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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관계사, 그리고 심신지려(心信之旅)

등록일 2013-06-28 00:13 게재일 2013-06-28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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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은 2천년이 넘는 문화적 관계 속에 있었다. 나당(唐)연합군을 만들어서 중국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돕기도 했다. 한반도는 오랜 세월 중국의 문화적 정치적 영향권 속에 평화를 구가했다. 유교, 불교, 도교, 노장(莊)사상, 양명학, 천주교 등 다양한 사상을 중국에서 전수받았고, 중국이 먼저 배운 서양의 과학기술을 우리가 받아들였다. 국가는 다르지만 정신적으로는 한 울타리 속에 있다가 20세기초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면서 우리나라는 일본의 속국이 되었고, 중국과는 멀어졌다.

1949년 모택동(毛澤東)이 중공(中共)을 건국, 공산주의 국가가 되면서 우리와는 더 멀어졌다. 국교단절 43년이 지난 1992년 등소평(登小平)은 “한국에서 탐나는 사람은 제철소의 박태준과 대우의 김우중이다. 우리에게는 왜 그런 사람이 없나”라고 할 정도로 한국의 발전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그해에 “한국과 국교를 맺자. 경제교류를 하면 양국은 피차 이익이 될 것이다”라고 했고, 7명의 최고 국무위원의 동의를 얻어 마침내 국교를 다시 열게 되었다. 한국은 그동안 친구로 지내왔던 대만과의 관계를 끊을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한국은 사전에 간곡히 양해를 구했고 “일정한 경제교류는 계속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므로 법(法)보다 콴시(關係)를 중시한다. 친분관계가 돈독하면 일이 원만하게 잘 풀린다.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콴시가 잘 맺어져 있다. 시진핑이 저장성 서기 시절에 박 대통령은 한나라당 대표였다. 시 서기는 사절단을 한국에 보내 새마을운동에 대해 배우고자 했고, 박 대표는 새마을 성공 자료를 있는대로 다 꾸려서 보냈다. 시 주석은 그 고마움을 내내 잊지 않았고, 52년 생으로 자신보다 한 살 많은 박 대통령에 대해 “우리는 오랜 친구”라는 최고의 콴시를 보여주었다. 박 대통령은 양친을 흉탄에 잃는 극통(極痛)의 시절을 겪었고, 시 주석은 시골 토굴속에서 빈대와 이에 시달리며 탈출까지 감행하는 시련의 시절을 겪기도 했다. 두 사람은 `시련과 극복의 시절`을 겪어내며 최고지도자의 자질을 길러나갔던 것이다.

지금 중국에서는 박 대통령의 자서전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으며, 중국 젊은이들은 우리 박 대통령을 우상처럼 받든다고 한다. 과거 조공국(朝供國)이었던 조선이 이제 경제강국이 되었고, 양 정상은 `친구`의 관계로 정상회담을 한다. 실로 뽕나무밭이 바다로 바뀌는 변화의 시대를 맞은 것이다. 독일 통일에 소련의 고르바쵸프가 결정적 작용을 했듯이 한반도 통일에 중국이 한 몫을 크게 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믿는 마음`으로 만나는 양 정상 간에 통하지 않을 일이 있겠는가. 한-미-중 등거리 외교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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