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사회라 해서 정치인의 도덕성을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위공직자도 사생활을 간섭받지 않을 권리와 행복추구권을 침해받지 않을 기본권이 있으며, 그것은 누구나 존중받아야 한다고 여긴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 같은 사람은 워낙 여성편력이 난잡했고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맺은 사실이 폭로돼 국제적 비난을 받아 실각했고, 몇몇 고위층들이 낙마한 예도 있지만, 그것은 `한계를 넘는 문란행위` 때문이다. 비록 혼외정사라도 순수한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라면 그것은 `행복추구권`차원에서 봐주는 것이 국제사회다.
채동욱 총장의 문제로 연일 `전문가`들이 TV에 나와 `고견`들을 피력하고 있는데, 하나도 들어볼 만한 말이 없다. 해결점을 향해 논의들이 수렴되지 못하고, 다들 자기 말만 할 뿐 `결론`이 없다. 그러니 국민들은 더 혼란스럽다. 갑론을박하다가 자기들끼리 의견다툼도 한다. 애당초 해결점을 찾을 수 없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벌이니 각자 평행선을 달릴 뿐이다. 국민은 궁금하고 `알 권리`가 있고, 언론은 이를 충족시켜줄 의무가 있다. 그러나 알권리도 중요하지만, 당사자들의 명예도 중요하다.
채총장의 가족들과 임모 여인과 그 아들이 지금 겪고 있을 고통을 생각해봐야 한다. 그들도 사생활을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끝까지 진실을 밝혀내자고 덤비는 것은 잔인한 요구다. 그 결과가 너무나 참혹하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은 처참한 모습으로 피투성이가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스페인 투우장에서 싸움소가 창을 맞아 죽어넘어지는 것 같고, 로마 경기장에서 노예무사들이 목숨 걸고 격투를 벌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그 잔인한 장면을 구경하는 관광객이 아니지 않은가.
이쯤에서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누구도 `피`를 보지 않을 출구전략을 생각해야 한다. `참혹한 결말`보다는 아무 불행도 없는 상생(相生)이 낫지 않은가. 케네디 암살사건이 영원한 미궁속에 있듯이 채총장사건도 그렇게 덮고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