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유교문화보존협의회와 경북문화예산포럼은 최근 안동시청 앞에서 기념관 건립의 부당성을 제시하고, 그 예산을 통과시켜준 안동시의회에 대해서도 “문중의 의회인가, 시민의 의회인가”라고 성토하면서, “문중, 사찰, 권력에 휘둘리는 의회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스럽다”며 200억원의 예산을 전면 취소하라고 했다. 집행부가 예산을 편성하고, 의회가 가부 결정을 하는 시스템에 시민 사회단체들이 반대하는 일이 과거에는 별로 보이지 않았는데, 지방자치시대가 성숙되면서 드물지 않게 눈에 띈다. 그것은 납세자들이 `납세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이고, 공직자들 마음대로 국민혈세를 요리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이다.
정재호 유교문화보존협의회 회장은 “수 년전 안동시가 서후면에 수십억원을 들여 건립한 학봉기념관이 있는데, 왜 또 지으려 하는가. 이것은 예산낭비의 전형”이라 하고, 특정 문중에 특혜를 주려는 안동시는 민생보다 `치적 쌓기`에 골몰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이같은 주장에 대해 안동시민들도 대체로 공감하는 모양이다. 특히 학봉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상반되고 엇갈리는 상황이라 그 기념관을 중복 건립하는 일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1590년 선조는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했는데, 정사는 서인 황윤길이고, 부사는 동인 김성일이었다. 다음해 돌아온 사절단은 `일본이 도발할 것인가`에 대해 상반된 의견을 내놓았다. 황 정사는 도발가능성이 있다고 했고, 김 부사는 정반대 의견을 냈다. 당시 조정은 동인이 실세여서 학봉의 의견을 따랐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학봉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서애의 진언으로 학봉은 경상도 초유사가 됐다. 학봉은 진주대첩을 이뤘고, 제2차 진주성 전투때 병사했다.
황 정사 후손인 사학자 황의돈은 “당시 득세한 동인이 김성일의 편을 들어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마음을 놓아 태평한 꿈에 취해 드러누웠다”고 기록했고, 사학자 신복룡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가 마지막 생애를 어떻게 마쳤는가에 따라야 한다”며 학봉에 대해 `문중사학의 희생자`라 썼다. 이렇게 평가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기념관 건립을 고집하는 것은 맞지 않다. 안동에는 독립운동가들이 많고, 민주화운동가들도 적지 않다. 현대사 쪽에서 역사인물을 찾아보는 노력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