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하얼빈에`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짓고, 저격현장에 표지석을 세울 계획이다. 안 의사 저격 당시 중국 지도층은 “우리나라에는 왜 안 의사 같은 인물이 없나. 그는 본받아야 할 인물이다”라고 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중국은 항상 한국과 보조를 같이한다.
우리는 `유관순 열사의 노래`는 잘 알고 있지만`안중근 의사 추념가`는 듣기 어렵다. 김향운 작사, 계정식 작곡의 이 추념가는 학교에서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안중근의사 숭모회 임원들도 “1946년 3·1절 기념식에서 이 노래를 처음 들은 후 맥이 끊어졌다”고 아쉬워한다. 4절까지 있는데, “수양산 빛난 정기 의인이 타고 나서/ 피끓는 애국심에 언 땅을 두루 돌며/ 의군을 일으키어 구국에 힘쓰셨네// 장하다 품으신 뜻, 크시다 밟으신 길/ 온겨레 뭉쳐서 영원히 노래하세”로 시작되는 이 노래를 이제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
안 의사는 1909년 독립정신을 다지기 위해 동지들과 `단지동맹`을 결성했다. 왼손 무명지 한 마디를 잘라 그 피로 태극기 위에 `大韓獨立`이라 쓴 유품이 지금 남아 있다. 그리고 안 의사는 옥중에서 많은 휘호를 남겼는데, 그 낙관은 모두 왼손 손바닥으로 찍었다. 이`손바닥 낙관`은 후세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힘이 없어 남의 나라에 먹히는 일이 없게 하겠다”는 결심으로 부국강병에 몰두했었다. 또 하나 감동스러운 것은 안 의사 어머니의 편지다.
“응칠아! 네가 이번에 한 일은 우리 동포 모두의 분노를 세계앞에 보여준 것이다. 이 분노의 불길을 계속 타오르게 하려면, 고등법원에 항소하지 말고 이번에 억울하게 죽어줘야 한다. …. 살려고 몸부림하는 인상을 남길 필요 없다. 혹시 늙은 에미를 남겨두고 네가 먼저 죽는 것이 동양유교사상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망설일까 일러둔다” 이 편지를 일본인 간수 지바 도시치가 읽고 감동해서 일기장에 옮겨 적어두었다가 공개했었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26일 오전 10시에 이또를 저격했고, 5개월후인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에 사형을 집행했다. 시간까지 맞춘 보복처형이었다. 우리도 이제 그날 오전 10시에 추념가를 부르며, 추념식을 거행해야 하겠다. 그것이 극일(克日)의지를 다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