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오끼섬에 살던 한 수산업자가 “독도에는 물개가 수천 마리 서식하고 있는데, 이를 잡을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요청서를 정부에 보냈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 중이었으니 군수물자가 필요했다. 물개 가죽은 방한복으로 물개 기름은 함정의 연료가 되니 이를 놓칠 리 없다. 일본 정부는 바로 허가하지 못하고, 시마네현 현장에게 문의하는 절차를 거친 것이고, `문제 없을 것`이란 회신을 받은 일본 정부는 1905년 2월15일 훈령 87호를 발령해 독도를 일본땅에 편입시켰다.
1905년이 어떤 해인가? 러일전쟁이 한참이고, 일본이 유리한 국면을 맞고 있었으며, 1904년에는 `한일의정서`가 체결됐다. 그 핵심 내용은 “일본군이 조선 땅을 일부 차지해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게 한 것”이다. 러일전쟁을 치르기 위한 주둔지를 확보한 것이다. 이 조약을 반대한 이용익은 체포돼 일본으로 압송됐고, 보부상의 핵심 인물 길영수, 육군참장 현상건 등은 연금된 가운데 이지용과 하야시 사이에 조약이 맺어졌다. 일본은 경부선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가져갔고, 통신기관을 접수했으며, 러시아와 맺은 일체 조약은 폐기됐다.
러일전쟁에 이긴 일본의 조선 침탈 야욕은 노골화됐다. 1905년 일본은 을사5적과 짜고,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맺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으니 이미 조선의 국권은 거의 사라진 것이나 같았다. 조선땅을 자기들 마음대로 했으니 1910년의 한일합방은 이미 예정된 절차일 뿐이었다. `독도를 죽도라 명칭 변경을 하고 시마네현 소관, 오끼섬 소속`으로 한다는 일본정부의 훈령은 이 시기에 나온 것이다. 조선 전역을 삼키는 판국에 섬 하나 먹어치우는 일은 간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지금까지 그 침탈의 역사를 내세우면서 `훈령 87호에 의해 역사적 실질적으로 일본 영토`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울릉도·독도가 조선땅임을 입증하는 지도는 수없이 많다. 일본 자신이 만든 지도뿐 아니라 유럽에서 제작한 지도에도 울릉·독도는 조선땅과 같은 색깔로 칠해져 있다. 나라가 힘이 없어 뺏겼던 땅을 되찾았는데, 아직도 과거의 미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따돌리는 것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