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1일 영화 `포화속으로`의 배경이 되는 포항여중 전투가 벌어진다. 경주·포항 등지의 학생들이 참전한다. 수도산을 넘어오는 북한군을 맞아 11시간 넘게 싸웠고, 87명 중 48명이 전사한다. 정부는 수도산 머리에 `포항지구 전적비`를 세웠고, 국군과 학도병이 어깨동무하는 모습을 새겼다. 칠곡군 왜관 낙동강 방어전과 안강·형산강 방어전은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할 시간을 벌어주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9월 18일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고, 북한군의 보급로는 차단됐으며, 전세는 역전됐다.
북진하는 연합군을 따라 학도병은 10월 7일 원산에 도착, 치안을 맡기도 했으며, 10월 13일에는 북한 출신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도호국단을 결성하고, 시가행진을 하며 승세를 완전히 굳혔다. 그러나 51년 1월 중공군이 참전해 인해전술을 쓰면서 순식간에 38선까지 진격했고, 연합군은 그 뼈아픈 `흥남철수`, `1·4후퇴`를 맞으며 정전협정을 제의했으나 중국군이 거부함으로써 전쟁은 53년 7월까지 계속됐다. 중공군과 연합군이 38선에서 팽팽히 맞서 있을 무렵인 51년 3월 6일 학도병은 임무를 마치고 해산했다.
당시 재일교포 학생들도 참전했다. 1천여 명이 지원했으나 신체검사와 가정형편 등을 따져 642명으로 의용대를 구성했다. 이들은 인천상륙작전 등 서부전선에 투입됐고, 135명이 전사했다. 53년 휴전협정이 체결돼 일본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일본정부는 이들의 입국을 거부했다. 출국 허가 없이 나라를 떠난 범법자란 것과 중·일 간 외교관계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13년이나 지난 후 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에야 일부 돌아갈 수 있었다. 이처럼 학도병은 국내외적으로 박대를 많이 받았다.
학도병은 `군번`이 없기 때문에 `보훈단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군 자료라든가 공식적인 기록이 없다. 현재 생존해 있는 학도병은 2천여명이고, 재일 학도의용군은 37명(국내에 25명, 일본에 12명)이 생존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을 앓으며, 생활도 어렵다. 나라 살림도 이만큼 됐고, `학도의용군전우회`가 모든 자료를 갖고 있으니 이를 바탕으로 정부는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