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구문학상`과 `조선족문학상`은 `통일문학`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 한세광(韓世光)은 1909년 일제강점이 시작되던 해에 평양에서 태어났고, 20세에 미국 유학길에 오르는데, 화물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널 때 검은 갈매기 한 마리가 줄곧 배를 따라왔고, 한 선생은 속으로 “너도 미국 유학 가느냐? 너와 내가 같은 운명이구나”라고 생각을 하며 자신의 아호를 흑구(黑鷗)라 지었다. 그는 25세때 유학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와 `대평양(大平壤)`이란 문예지를 창간, 시, 수필, 소설, 평론을 발표하고, `흥사단 사건`에 연류돼 1년 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해방 후 서울로 내려와 미군정청에 근무하다가 48년 포항으로 이주했고, 59년 포항수산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70세에 타계할 때까지 포항을 떠나지 않았다. 서울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로 초빙받았으나, “나는 포항 송도 송림과 갈대밭과 갈대꽃 위를 날으는 새들을 떠날 수 없고, 포항의 문우들과 작별할 자신이 없다”며 거절한 일화는 유명하다.
흑구는 1978년 `북한`지에 `모란봉의 봄`이란 수필을 발표했다. “나의 고향, 모란봉에는 올해에도 봄이 오는가. 내가 고향을 떠나온 지도 어언 33년이 흘렀다....해마다 철이 바뀔때는 고향생각을 잊을 수 없지만, 내 나이 칠십 고개를 올라서는 고향 생각이 더욱이 간절해진다”로 시작되는 작품에는 평양의 모습들이 낱낱이 담겨 있고, “자유가 있으면 제일강산이요, 자유가 없으면 캄캄한 생지옥이다”란 발언도 있다.
서상은 호미수회 회장은 “한글과 문학을 통해 한민족의 정체성과 동질성을 찾고 통일 기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며 “한반도의 끝자락인 호미곶에서 시작된 작은 운동이 태백을 거쳐 백두에까지 뻗어나가 조국 통일의 문을 열어가는 문학축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통일문학제의 싹이 영일만 호랑이꼬리에서 움트고 있다는 그 의미가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