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았다. 신라의 궁성은 월성(月城), 고려도 개성 만월대 하나를 계속 사용했고, 조선은 한양에 몇개의 왕궁을 지었다. 전화(戰禍)를 입어 불타 없어진 궁성은 있지만, 흔적지우기 차원에서 헐어버린 것은 없다. 우리나라는 그만큼 전통을 중시하고, 조상의 업적을 존중했으며, 신임의 취임사에는 흔히 `전임의 업적을 계승 발전`이란 말이 들어갔다.
그런나 민선시대로 접어들면서 그 전통도 깨어졌다. 임명직 시절에는 없었던 현상이 선출직 시대에는 새로 생긴 것인데, 이른바 `전임의 흔적 지우기`가 그것이다. 선거에는 `적수`가 있기 마련이고, 전임이 언제 적수가 돼 맞설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현직의 업적을 더 뚜렷이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전임의 업적을 깎아내릴 필요도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사업의 연속성`은 심히 훼손되고 예산 낭비는 엄청나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납세자의 부담이 된다.
흔적지우기와 예산낭비의 대표적 사례가 서울시이다. 박원순 현 시장은 오세훈 전 시장의 업적을 철저히 지우고 있다. `경인아라뱃길` 중단으로 2조원을 날렸고, `노들섬 오페라하우스``둥둥섬`등 몇가지 사업 중단으로 2조7천억원의 예산이 사라졌다. 전·후임 시장이 정치이념을 달리하고 정당이 다르기 때문에 흔적지우기는 더 가혹했다. 경북도·상주시의 `드라이빙센터`사업도 2014년 6월 지방선거때 시장이 바뀌면서 `재검토 대상`이 됐다.
박승호 포항시 전임 시장의 대표적 치적이라 할 수 있는 `감사운동`과 `감사공원 조성사업`이 `전임자 흔적지우기`에 걸린 모양새다. 2013년 11월 총 사업비 4억1천500만원에 D사와 계약을 체결한 감사공원 조성사업이 중단된 것이다. 올해 1월 중순께 포항시로부터 뚜렷한 이유도 없이 “중단하라”는 통고가 왔다는 것이다. 포항시는 서울보증보험에 보험금 지급을 요청했고, D사는 보험금지급금지가처분 신청을 냈다. 법적 분쟁이 어떻게 결론 날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전임 흔적 지우기`가 도를 넘었다는 것이다.
포항시의 감사운동은 다른 지자체의 벤치마킹 대상이 돼 있었고, 전국적으로 번져 포항시가 `감사운동의 메카`로 부상하기도 했다. 여기에 발목을 거는 것은 속 보이는 자충수다. 전임의 좋은 정책을 계승하는 것은 오히려 현직의 성가를 높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