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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갈등이 빚은 비극

등록일 2015-06-25 02:01 게재일 2015-06-2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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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동란 65주년을 맞는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우리는 늘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고 말해왔다. `원한의 고리`를 끊고 이제 민족화합의 길로 들어서자는 결의도 다졌으며, `통일`을 소리높여 노래불렀다. 그러나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때의 일을 잊지는 말아야 하겠다.

낙동강과 형산강 방어선은 최후의 생명선이었다. 맥아드의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할 시간을 낙동강과 형산강에서 벌어야 했다. 그 일이 우리 경상북도의 사명이었다. `다부동전투`는 1950년 9월 24일부터 55일간이나 이어진 공방이었다. 구미시 인동리 천생산에서 벌어진 전투는 백마고지전투와 함께 한국전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로 기록돼 있다. 북한군 2만4000명, 국군 1만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곳에 `다부동전적기념관`이 섰다. 종군작가 조지훈 시인은 “조그만 마을 하나를/자유의 조국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라며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를 묘사했다.

이곳에는 `왜관지구전적기념관`도 있다. 1950년 8월 16일 인민군 4만여명이 사복차림으로 피난민 틈에 끼어 왜관철교를 넘으려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유엔군은 이곳에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그 폭격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그 후 3년간 이곳에는 풀 한 포기 나지 않았다. 왜관철교는 폭파와 재건을 반복하면서 전쟁의 참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물이 되었다. 칠곡군은 1993년 이를 복구해 `호국의 다리`라 이름지었다. 형산강전투는 영화 `포화속으로`에서 잘 표현돼 있다. 경주와 포항의 학도병이 대거 투입됐던 전투였다.

영덕군은 국비 등 295억원을 투입해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조성사업을 진행중이다. “장사에서 상륙작전이 있을 것”이란 허위정보를 유포한 뒤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했고, 그 성공을 뒷받침했던 곳이 바로 장사였다. 1950년 9월 14일 오전 4시30분에 작전이 개시됐고, LST문산호를 타고 온 학도병들이 대거 이 양동작전에 투입됐으며, 전사자 139명을 남겼다. LST문산호의 실물모형이 공원내에 복원중이다.

히틀러시대의 독일에 `쉰들러 리스트`가 있다면, 포항지역 죽장면 입암리에는 `김동헌 리스트`가 있었다. 당시 죽장지서장이었던 김 경위는 마을 주민 200여명이 `빨치산에 부역한 혐의`를 쓰고 억울한 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 명단을 없애버렸다. 주민들은 1950년 추모비를 세웠고, 1985년 대리석으로 재축조했으며, 최근 국가보훈처는 이 위적비를 `현충시설`로 지정해 국가적 보호를 받는 비석이 되었다. 6·25는 이념갈등의 결과였다. 21세기는 `정치이념이 사라진 시대`인데, 우리는 아직 그 낡은 사슬에 얽매여 있다. 이것이 바로 한민족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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