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라든 초대 대통령에 대한 예우는 각별하다. 공(功)과 과(過)는 다 있지만, 건국대통령에 대해서는 공(功)을 앞세우는 것이 관례다. 특히 터키 건국대통령은 신격화되고 있다. 그를 비난하는 자는 극형에 처할 수 있는 법까지 있다. 초대 대통령을 높이는 것은 “그가 국가의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정해준 `국가의 조타수`이므로 비록 과오가 있어도 극력 덮으려 한다. 국가의 자긍심을 훼손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건국대통령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칭송의 소리보다 높았다. 그의 장례식을 놓고 정부 요인들은 “국민장으로 해야 한다”고 했으나 4·19세대들은 “국장도, 국민장도, 사회장도 안 된다”며 격렬히 반대했다. 이른바 `인의 장막`에 가려 국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해 3·15부정선거를 촉발시켰고, 부패정부를 방치한 잘못을 크게 부각시킨 결과였다. 그의 모든 공(功)은 완전히 묻혀버렸다. 결국 유가족들은 가족장을 선택했다. 그것은 누가 뭐라해도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도 국내 정세로 보아, 이승만 박사의 조기 귀국에 `정치적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일권 당시 총리가 대독한 추모사에서 박 대통령은 “조국 독립의 원훈(元勳)이요, 초대 건국 대통령이신 고 우남 이승만 박사”란 말로 시작해 “칠십 노구로 광복된 조국에 돌아와 새 나라를 세워 민족과 국가의 방향을 제시한 것은…”이란 말로 끝 맺었다. 박 대통령은 `건국대통령의 존재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점에서 나온 추도사란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하와이에 갔을 때, 이승만 박사는 그에게 “국정이 어떠하냐”고 물었고, 김 부장은 “잘 돼갑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때 이 박사는 “잘 돼간다는 말 믿지 마시오. 그런 말 믿다가 내가 지금 이 지경 된 것이오”라고 말했다. 가슴에 맺힌, 통한의 한 마디였다. 그의 서거 50년이 흐른 지금 건국대통령을 객관적으로 재평가하고, 젊은이들의 가슴에 조국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일에 착수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