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일은 국력을 키워 극일(克日)하고, 우리의 항일 순국 열사들을 더 높이 선양해서 우리의 자존심을 키우는 일이다. 잔다르크가 프랑스의 자존심이듯이 항일 독립에 생명을 바친 열사들은 우리의 자존심이다. 영화 `연평해전`과 `암살`에 국민이 환호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우리의 가슴속에 숨어 있던 자긍심의 분출이다.
8월 22일은 영양 출신의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南慈賢) 열사 순국일인데, 이를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영화 `암살`의 여성 저격수를 연기한 전지현의 모델이라는 기사 하나가 보일 뿐이다. 그러나 남자현 열사는 저격수가 아니었다. 독립운동 자금과 무기를 조달하고, 연락책 등 뒤바라지 하며 `독립군의 어머니`란 말을 들었고, 암살계획에 참여했으나, 동료의 밀고로 실패하고 체포됐다. 왼손 무명지를 잘라 혈서를 써 국제사회에 조선독립 염원을 알려 `제2의 안중근`이라 했다.
그녀는 영양군 지경마을 영남의 석학으로서 정3품 당상관을 지낸 남정한의 3남매중 막내딸로 태어났으며, 15살에 사서삼경을 통달했다. 남편 의성김씨 김영주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의병이 됐다가 전사했고, 그녀는 46세 되던 해인 1919년 2월 만주로 건너가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교회 12개를 세우고, 10여개의 여성교육기관을 설립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33년 3월 1일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건국기념일에 부토 전권대사가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하얼빈역으로 가던 중 밀고로 왜경에 체포됐고, 6개월간 잔혹한 고문을 견디며 단식투쟁을 하다가 단식 9일만에 실신하자 왜경은 그녀를 보석했다. 그해 8월 22일 여관방에서 아들 김성삼에게 돈 248원을 주면서 “조국이 독립하거든 축하금으로 보내라”란 유언을 남기고 60세에 순국했다. 그 돈은 1946년 3·1절 기념식때 김구 이승만에게 전달됐고, 1962년 윤보선 대통령은 그녀에게 독립유공자 건국공로훈징 2등급을 수여했다. 유일한 여성 수훈자였다.
안동과 영양은 독립운동가를 유난히 많이 배출한 고장이다. 항일 투사들이 순국한 날에는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열어 민족자긍심을 드높이는 것도 극일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