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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의 위대한 기록

등록일 2015-09-25 02:01 게재일 2015-09-2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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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대한제국 침탈 과정은 치밀했다. 1905년 “조선은 자립할 능력이 없으므로 일본이 보호해야 한다”는 을사보호조약을 맺은 후 외교권을 뺏았고, 국제사회에서 대한제국은 `이름만 남은` 나라가 됐다. 그리고 `경제 종속국` 음모를 꾸몄다. 무거운 빚을 지워놓으면 별 수 없이 노예가 되기 마련이었다. 일본 통감부는 `차관 강요`와 `담배 장사`라는 두 가지 수법을 썼다. 차관 강요는 관이 하고, 담배장사는 민간인에 맡겼다.

“대한제국의 문란한 화폐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일제는 300만원의 차관을 강요했고, 1907년까지 2년간 총 1천300만원의 빚을 지웠다. 조선이 일본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빚 갚으라”고 압박할 수 있게 됐다. 1천300만원은 대한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었다. 엄청난 빚에 코가 꿴 조선은 외교권에 이어 경제권까지 잃게 됐다. 일본 상인들은 담배장사로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담배란 중독성이 있어 끊기 어려우니 `안정적인 경제침탈의 수법`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당시 조선의 여성들도 흡연을 꺼리지 않았다.

대구 국채보상운동의 단초를 제공한 곳은 여성단체였다. 끼니 때마다 쌀 한 숟가락씩을 따로 들어내 모았다가 이를 나라빚 갚는데 쓰자는 결의를 했고 곧 실천에 들어갔다. 남성들이 이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나선 것이 본격적인 국채보상운동이었다. 1907년 보부상 등 상업으로 대구 최고의 부자가 된 서상돈 선생이 제안을 했고, 출판인 언론인들이 호응했다. 그해 1월 27일자 대한매일신문에 취지문이 실렸다. “나라빚 1천300만원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 국고로는 해결할 방도가 없으니, 2천만 인민이 금연해서, 매일 1인당 30전씩 3개월만 모으면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 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신분 종교 직업을 가리지 않고 모두 호응했다. 부인들은 `패물폐지운동`을 벌여 비녀·반지·은장도 등을 내놓았고, 심지어 기생, 앉은뱅이 걸인, 노비까지 성심성의껏 헌금을 했다. 담배가 팔리지 않으니 담배회사들이 통감부에 호소하고, 통감부는 국채보상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대한매일신문 총무 양기탁이 130만원을 모아 내놓자 일제는 그를 횡령죄로 몰아 구속시켰다.

통감부의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보상운동은 좌절했지만 그 정신은 맥맥히 이어졌다. 3·1만세운동 후 1922년 서상일 선생이 부동산을 팔아 `조양(朝陽)회관`을 크게 지었다. 청년계몽 교육기관이었다. 오늘날 대구에 국채보상기념관이 세워져 다양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대구시는 이 기록물들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지금 세계에는 국채에 눌려 신음하는 나라들이 많은데, 이 기록물들은 자립경제를 위해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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