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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학생운동 국가기념일 지정해야

등록일 2016-03-02 02:01 게재일 2016-03-0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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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5일에 있었던 정·부통령 선거는 한국 정치사상 최악의 부정선거였다.

신익희·조병옥 두 유력 민주당 대선 후보자들이 병사(病死)한 후라 이승만 후보의 경쟁상대는 없었고, 부통령에 민주당의 장면 후보와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가 대결했다. 여론이 장면 후보에 기울자 자유당은 `이기붕 당선을 위한` 모의에 돌입했다. 그것도 공공연한 부정모의였다. 내무부가 총괄계획을 세우고 전국의 행정·사법조직이 동원됐다.

학생들의 분노가 쌓여갈 무렵인 2월 27일 토요일은 이기붕 후보의 대구 유세가 있는 날이어서 대구지역 고교들은 2교시 단축수업을 했다. 유세장에 갈 시간을 만들어준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인 28일은 일요일임에도 학생들에게 “등교하라”했다. 그날은 민주당 장면 후보의 연설이 있는 날이었다. “이건 해도 너무한다” 분노한 고교생들은 학교에 가는 대신 시내 한 곳에 모였다. 그리고 “부정선거 중단하라!”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구호를 외치며 도지사 관사 등 관공서를 향해 행진했다. 남녀 8개 고교가 참여했다.

당시 데모대를 이끌었던 이는 포항 출신의 경북고 2학년 이광웅씨였다. 그는 경찰에 체포돼 피투성이가 되도록 구타를 당했고, 반성문을 써라는 요구를 받자 “비겁하고도 포악한 부정선거가 학원의 자유조차 박탈했다. 우리가 일어서야 자유당이 망하고, 침묵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써주는 바람에 기절할 때까지 맞았다. 올해 74세인 이씨는 지금 영덕옥계솟대공원 대표로 “늦게나마 2·28 민주의거가 국가적 행사로 격상되고 법제화 돼 영광스럽고 자랑스럽다”고 했다.

최근 `2·28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대구시는 이 날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할 것을 촉구하는 100만인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이 학생운동은 그 자체로 끝난 것이 아니라, 3·15 마산의거로 이어졌고, 4·19 학생민주화 혁명으로 승화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특별하다. 학생들의 정의감과 의분에 불을 지른 도화선이 된 대구 2·28 학생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업회와 대구시는 내년부터 국채보상운동 기념일인 2월 21일부터 2월 28일까지를 `대구시민 주간`으로 선포하고 범시민 행사로 격상시킬 계획이다.

1929년 11월 3일에 벌어졌던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 나가 민족독립운동으로 승화됐던 역사적 사실은 2·28 대구 학생운동이 `학생들의 순수한 정의심과 분노에 불을 지른 도화선`이었다는 점에서 맥을 같이한다. 그리고 `의거`의 수준을 넘어 `혁명`으로 승화됐다는 점에서도 동질성을 가진다.

광주시와 대구시는 최근 특별한 `동맹`을 맺고 공동발전을 모색하고 있는데, 그것도 `두 지역 학생운동`의 영향력이 아닌가 한다. 2·28은 국가지정 기념일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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