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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서애의 애국·애족정신

등록일 2016-06-08 02:01 게재일 2016-06-0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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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은 퇴계의 문하생이다. 학봉은 이런 글을 남겼다. “베옷에 짚신 신고…. 집은 심한 추위나 더위, 풍우가 들이치면 남들이라면,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선생이 일찍 이르기를 벼슬하는 것은 도를 행하기 위함이지 녹봉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퇴계는 벼슬보다 학문에 뜻이 있어서 7번 관직에서 물러났고, 임금이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선조임금 시절에는 그 어느때보다 국정이 혼란스러웠다. 당쟁이 시작됐고 가장 극심할 때였다. 임금이 올곧지 못하니 신하들은 패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암군(暗君)시절에는 현명한 신하들이 많이 나타났다. 서애, 오성과 한음, 권율, 이순신 등이 그나마 나라를 구했다. 서애는 퇴계의 학풍을 온전히 이어갔다.

임진왜란을 온몸으로 막아냈던 서애는 `내부의 적들`에게 심한 고통을 당했다. 평생을 청요직(淸要職)으로 일관한 그에게 당쟁의 적들은 “서애가 가진 토지는 세곳이고, 미오보다 많다”고 모함했다. `미오`란 동탁이 금은보화를 모아두던 곳이다. 충신들은 도를 행하려 하지만, 어리석은 임금과 정적들은 왜적보다 더 무서운 장애물이었다. 6년간 전장을 헤매며 왜군을 물리친 서애는 결국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 당해 낙향하는데, 집은 초가삼간이고 끼니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었다.

정경세는 “자손은 나물찌꺼기밥도 때우기 어려워라/십 년 정승 자리 어찌 지냈기에/성도의 뽕나무 800주도 없단 말인가”라 읊었다. 제갈 량이 절명 직전 유비의 아들 유선에게 “소신의 녹봉은 걱정 마십시오. 성도에 뽕나무 800주가 있고, 거친 밭 15경도 있으니 자손들 의식주는 걱정 없습니다”고 유언했다. 그러나 서애에게는 그 `뽕나무 800주`조차 없었다. 그런데 정적들은 `동탁의 미오 운운` 했으니, `나무는 가만히 있고 싶으나, 바람이 그냥 두지 않는다`란 말이 연상된다. 낙향 2년후 선조가 죄를 풀고 다시 불렀으나, 서애는 한사코 응하지 않았다.

“일거수 일투족이 다 부딪히니, 당시 크게 답답하고 슬퍼하며, 이 곳(하회)의 무성한 숲과 우거진 덤불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고니의 성품은 산야에 맞지, 성시(城市)에는 맞지 않는다”. 이같은 술회에서 서애의 심중이 읽힌다. 덜 떨어진 임금과 악귀같은 정적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좌충우돌하기보다는 `징비록`을 써서 `나라 구할 길`을 밝히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서애는 초가삼간에서 굶주려가며 집필을 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2세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다녀간 안동 하회는 이제 `국제적 고을`이 됐다.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안동을 찾는다. 부디 정치인들이 `퇴계의 학풍`과 `서애의 애국·애족 정신`을 배우고 깨달았으면 한다. 정치의 정도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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