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상사화(相思花)가 피었다. 대문 근처 벚나무 아래 조붓한 공간에 두 송이 상사화가 몸을 열었다. 연분홍색으로 피어나되 몇 갈래로 꽃들이 나뉘어 피어나는 상사화. 초봄이면 상사화는 아주 당당하고 의연하게 대지를 뚫고 이파리를 지상으로 내보낸다. 언뜻 보면 난초 같지만, 녀석은 5월말 6월초면 생명을 다하고 시나브로 사라진다. 지상에 아무런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춰버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여름의 절정(絶頂)이거나 혹은 가을로 접어든다는 입추(立秋) 무렵이면 보란 듯 꽃 대궁을 키워낸다. 그러니까 이파리가 무성하게 자라났다가 아무런 미련도 없이 사라진 상사화가 그로부터 두어 달 뒤에 화사한 꽃으로 환생(還生)한다는 얘기다. 언제부터 상사화가 우리 마당에 자리를 잡았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다. 필시 두어 해 전부터 적잖은 기쁨을 주었으리라 추측할 뿐. 상사화를 볼라치면 옛일이 떠오르곤 한다.
학부 1학년 시절부터 유독 붙어 다녔던 남녀동기 둘이 있었다. 1학년 시절부터 손에 손을 맞잡고 교정을 활보(闊步)했던 그들은 우리들에게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연애라든가, 특히 학내사랑은 매우 낯선 대상으로 각안됐던 시기였다.
그런데 아침저녁으로 손잡고 학교가 좁다하고 싸돌아다녔던 그들이었으니 외계인 비슷한 취급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았던 셈이다. 그렇게 세월이 무상하게 흐르고, 3학년 1학기 여름방학 끝날 무렵 우리는 비보(悲報)를 접한다. 그들 중 남학생이 제주도에서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하다가 세상을 버렸다는 전갈을 받은 것이다. `참 별일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 모두는 그녀의 사후행적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정형화된 추측은 그녀가 아주 오래도록 슬픔과 체념과 절망의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란 내용이었다. 그토록 다정하고 아낌없이 사랑했던 연인이 불귀(不歸)의 객이 됐다는데, 그 정도야 당연지사 아니겠는가, 하는 암묵적인 동의가 깔려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됐다. 겨울이 오기 전에 그녀는 낯선 청년 하나의 손목을 끌고 학교에 나타났다. `으응, 저건 또 뭐지?!` 낭패한 얼굴과 볼 멘 소리가 들려왔다.
다혈질인 친구 몇몇은 상당히 비분강개(悲憤慷慨)하기를 여러 차례 되풀이하기도 했다.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 하는 나의 말에 단단히 역정을 내기도 했다. 인간이 어쩌면 그럴 수 있느냐, 하는 분노와 짜증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던 열혈청춘들.
세월이 더 많이 흐른 다음에 그녀의 행동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내를 몹시 사랑했던 사촌형이 상처(喪妻)를 하고 난 다음 불과 6개월이 되지 않아서 재혼의 길을 선택했을 때 상사화의 그녀가 생각난 것이다. 금슬(琴瑟)이 아주 좋았던 사촌형 내외는 크고 작은 잔치나 행사 때가 오면 그들이 경영하던 빵집을 내게 맡기고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누리곤 했다. 그들의 화사(華奢)한 표정과 웃음소리가 지금도 들려오는 듯하다.
그러다 돌연 형수가 세상을 버리자 사촌형은 거기서 발원하는 거대한 상실의 늪지대를 홀로 통과하지 못했던 것이다. 연애를 하든, 결혼을 했든 남달리 깊은 사랑으로 엮인 사람들은 홀로의 시공간을 견뎌내지 못한다는 결론에 나는 도달했다. 주위를 살펴보시라! 이혼 혹은 사별(死別)을 겪은 뒤에 여전히 독신을 고집하는 사람들의 이전상황을 돌이켜보시라. 필시 그들은 그렇게 행복하지도 깊이 있는 사랑과 결혼생활을 경험하지 못했으리라.
눈을 감고 거리를 걸을 때에도 광장을 떠돌 때도 저녁놀을 바라보는 시점에도 깊은 한숨을 허공중에 날릴 때에도 그나 그 여자가 옆에 있다면 그것은 상사병이다. 상사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이해하는 것은 더러 가당치도 않다. 하되, 상사화가 피어날 무렵이면 나는 예전의 그들을 떠올리며 낮은 한숨을 쉰다. `아아, 사랑이여! 그 아픈 상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