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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무포를 아시나요

등록일 2023-04-23 19:46 게재일 2023-04-2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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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무포 골목 그림.

야무진 꿈을 꾸었다. 이십 대였나, 삼십 대였나, 동해안 국도를 걸어서 종단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꿈은 액자 속에 흐릿하게 갇히고 현실은 형광의 도시를 누비느라 바빴다. 어쩌다 한 번씩 답답한 액자를 벗어나 빨주노초파남보 하늘을 그리고 싶다. 이런 날은 무작정 집을 나선다. 서너 시간 혼자 어슬렁거릴 곳을 찾는다.

고래가 머무는 곳, 구룡포에서 호미곶으로 이어진 해파랑길 14코스인 다무포 고래마을이다. 골목이 뿜어내는 소리는 낮고 가늘다. 그 소리를 담은 집들은 모두 오수에 빠진 듯하다. 4월의 봄바람도, 방파제에 한 번씩 부딪히는 파도도, 갯바위에 앉아 꾸욱, 꾹 대는 갈매기도 풍경을 이루는 화소이다.

하얀 등대가 보이는 의자에 앉는다. 등대는 바닷길에 불 밝히느라 꼿꼿한 채 서 있다. 굵은 비, 가는 비 내려도, 태풍으로 속의 것들을 다 긁어 토해낼 때도 흔들림이 없다. 따뜻해진 봄 바다 그 위로 갈매기 서넛 난다. 그래, 지금쯤 수평선 너머 고래가 떼를 지어 오고 있겠다. 4월과 5월쯤 고래 산란기에는 이곳 먼바다에 고래가 나타난다. 그 종류가 20여 종이 넘는다. 바다 향해 귀를 쭈욱 열자 멀리서 고래 소리가 다양하게 들리는 듯하다.

다무포의 맑고 적당한 수온은 고래가 새끼를 낳고 회귀하기 좋은 조건이다. 해마다 이때쯤 수십 마리씩 고래는 다무포 앞바다를 찾는다. 한때 고래잡이로 마을 주민들은 넉넉한 생활을 누렸다. 그런데 1986년 국제협약에 의해 상업적인 포경이 금지되었다. 그 이후 마을 길목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사라지고 활기로 가득했던 집안도 더는 들썩이지 않았다. 이십 년의 시간이 흐른 후, 다행히 2008년 고래생태 마을로 지정되었다. 수평선 저 멀리 고래 떼가 다시 오기를 기다린다.

관심이 생겼다는 것은 벌써 행동의 프로그램이 진행되었음이다. 다무포 마을의 쇠락이 멈추고 그곳에서 작은 꿈틀거림이 음쑥음쑥 자란다. 2019년 ‘포항시 도시재생 마을공동체 역량강화 사업’에 선정되어 마을은 다시 활기를 찾았다. 따가운 여름 햇볕과 함께 골목이 들썩거렸다. 마을 담벼락 곳곳에 하얀색 페인트를 입히고, 그 위에 미역 그림이 한들거린다. 미역 줄기 사이로 물고기가 춤을 추고, 거북이 한가로이 노닌다. 담벼락마다 다른 그림과 조형물은 이 곳을 찾는 이에게 다채로운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한다.

이순혜 수필가
이순혜 수필가

바다에서 담벼락으로 옮겨 온 고래가 타일 속에서도 헤엄친다. 여럿이 그린 고래는 그들만의 고래로 골목을 가득 채운다. 가만 들여다보니 유치원생에서 고등학생 그리고 학부모도 참여했다. 하나씩 짚어가며 고래를 불러들인다. 그의 이름들을 부르자 어느 유치원, 어느 초등학교 몇 학년이라 쓴 명찰을 앞세우고 지느러미를 파닥거린다. 이들은 커다란 한 마리 고래가 되어 담벼락을 꽉 채운다. 포항시에 따르면 4월에서 5월 해안선을 따라 헤엄치는 고래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이곳은 동해에서 고래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오늘은 먼바다의 고래가 다무포 마을 골목에서도 만난다.

나란히 어깨를 맞춘 파란 지붕 따라 골목을 걷는다. 아까부터 따라온 담벼락의 고래도 숨을 몰아쉬며 잠시 멈춘다. 누구는 이곳의 로맨틱한 풍광이 그리스의 산토리니를 닮았다고 한다. 산토리니에는 고래가 없는데, 고래가 머무는 이곳이 더 아름답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산토리니에 가면 다무포 마을에 가봤니? 라고 물어볼 것이다.

한 번쯤 마음을 빼앗길 만한 곳을 찾는다면 이곳에 오시라. 고래가 머무는 파란 지붕과 하얀 담벼락이 있는 다무포에. 마음 한 켠에 잔잔하게 흐르는 여유를 갖고 싶다면. 따스한 봄날의 여기 풍경은 가장 빛나고 반들반들한 마음 한 곳에 저장할 만하다. 곳곳에 쉬어가기에 괜찮은 상상의 의자가 당신을 기다린다. 저 수평선 윤슬이 반짝이는 곳에 고래 한 마리가 튀어 오른다. 나는 고래 등을 타고 동해를 유람하는 꿈을 상상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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