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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사

김순희 시민기자
등록일 2023-07-25 18:25 게재일 2023-07-26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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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사의 화장을 지운 부처님.
옛날에, 스님이 끼니때마다 바위에서 한 알씩 나오는 쌀을 받아서 모아 한 그릇의 밥을 지어서 먹었다고 한다. 어느 날, 욕심이 생긴 스님이 더 많은 쌀을 얻으려고 바위를 파 보았더니 쌀은 없고 물만 나왔다고 한다. 장기 근처에 이 전설을 간직한 절이 있다. 그 절에 화장을 곱게 했던 부처님도 있다고 해서 보러 갔다.

포항시 남구 장기면 방산리에 자리한 고석사였다. 고석사는 이름에 옛 고자를 넣은 만큼 오래된 역사를 지녔다. 신라 선덕여왕이 세웠다 하니 얼마나 긴 세월 그 자리에 있었는지 백 년도 겨우 사는 인간이 가늠하기 힘든 시간이다. 선덕이 왕좌에 오른 지 7년(638), 동쪽으로부터 세 줄기 서광이 3일 동안 궁전을 비추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서 그 빛의 발원지를 찾게 하니, 지금의 고석사 바위에서 발하는 빛이었다. 왕이 태사관에게 점을 치게 하니, 그 바위를 다듬어서 불상을 만들고 절을 지으면 길하다고 하여, 불상을 조각하고 이 석불을 모실 법당인 보광전(普光殿)을 지었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역사는 미상이다. 지금은 보광전과 산신각, 극락전이 있다.


천 년 넘게 한 자리를 지킨 절이다. 하얗게 덧칠했던 화장을 말끔히 지웠다는 불상이 궁금해 설명문도 대충 훑고 보광전에 올랐다. 종교는 다르지만, 절에 들어갈 때는 적은 금액이라도 시주를 하라기에 지폐 한 장 접어서 불전함에 넣었다. 절하는 건 생략하고 미륵불과 마주했다.


세 개의 산 모양을 등에 지고 부처님이 온화한 미소를 짓는다. 보광전 안에 위치해서 바람과 비를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두껍게 칠한 석고를 벗겨내며 상한 것인지 흘러내린 옷깃 여기저기 풍파를 한껏 맞은 모습이다.


다른 곳의 불상들은 앞면만 보여주지만, 고석사는 불상 주위를 한 바퀴 돌며 감상할 수 있다. 돌에 난 작은 구멍에 동전과 지폐를 끼워 넣고 신도들이 자신들의 소망을 빈 흔적이 가득하다.


2007년 찍은 하얀 불상의 사진을 찾아봤다. 다 벗겨낸 지금의 모습과 비교하니 전혀 다른 부처님이다. 옷부터 온몸이 하얗고 입술은 발갛다. 머리만 까맣게 칠을 해서 사진으로만 보니 모자를 씌운 듯한 느낌도 난다. 1923년경 석고로 치장한 것으로 추정하며, 2009년에 덧씌운 화장을 지웠다.


신라 시대 사람들이 새긴 부처님을 일제시대에 누가 석고를 돌 표면에 발라 하얀 모습으로 억지 화장을 시켰을까, 무슨 이유였을까? 사람이 세월을 덧입고 나이 들어가듯 돌에 새긴 부처님도 천 년의 시간을 덧입어야 자연스러운데 말이다.


익산 미륵사지의 탑과 안동 법흥사지 7층 전탑을 수리한다고 바른 콘크리트와 무엇이 다른가. 미륵사지는 콘크리트를 걷어냈고, 법흥사지는 근처를 지나는 철길을 들어내는 중이다. 가부키 배우 같은 두꺼운 화장을 지운 부처님이 편안해 보였다.


보광전 약사여래불 주위를 돌다 문득, 이렇게 큰 돌을 어떻게 건물 안에 넣었을까 궁금했다. 해설사에게 물으니 자연석에 새긴 마애불 위에 건물을 얹은 것이라 했다. 어리석은 나와 달리 신라 사람들은 참 현명했다. 또 부처님이 동쪽이 아니라 서쪽을 향해 앉은 것은 경주 불국사를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광전을 나와 망해산으로 올랐다. 오르는 길을 가만히 보니 바위를 차례로 깎아 계단을 만들었다. 절이 앉은 자리 전체가 하나의 큰 바위였다. 고석사라는 이름이 잘 어울렸다.


산신각을 돌아보며 고석사 전설을 이야기했다.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을 터인데 찾아보니, 이 이야기는 고석사가 아닌 근처 임중리의 국구암의 ‘쌀바위 전설’이 고석사로 잘 못 알려진 듯하다. /김순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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