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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묘 가고 갑진 오는데

김상영 시민기자
등록일 2023-12-28 19:12 게재일 2023-12-29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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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군 의성읍내 오리집이 보인다.
실베스터 스탤론은 영화 ‘로키’와 ‘람보’로 유명한 배우다. 얼마 전에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 ‘슬라이’를 넷플릭스에 올렸다. 험난한 유년기의 탈출구로 영화를 사랑하게 된 남자다. 보잘것없던 무명 배우에서 할리우드의 전설이 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1946년생으로 80이 내일모레니 지난 시간을 반추할 만하다.

“휘리릭.”


영화 속에서 그가 세월을 말하였다. 차창 너머로 스쳐 간 풍경처럼 무심한 세월이 그리도 빠르게 흘러버렸다는 거다. ‘long time ago’ 정도일 줄 알았지, 미국 사람도 휘리릭으로 표현하는 걸 보면 인생의 무상함은 국적을 초월한다. 일세를 풍미한 사람이거나 부자들도 세월 앞에 평등하다.


마을회관 어르신들은 농사일 틈틈이 민화투를 치며 논다. 종일 따나 잃으나 일이천 원이면 좋은 말 한다. 고스톱에 비하면 단순한 게임이며 푼돈인데도 심심찮게 파투가 난다. 약이나 단을 좀 해서 내 돈이 수월찮이 나갈성싶을 때가 그러하다. 손에 든 패를 슬며시 내려놓거나, 판에 깔린 무주공산 알짜배기 화투를 슬쩍 끌어와 챙기는 거다. ‘들키면 말고.’ 식이다. 판 깬 낌새가 뻔한데도 언제 그랬냐며 우겨댄단다. 본동 댁이 길을 냈으니 안평 댁도 덩달아 파투를 내는 사태가 빚어질 수밖에 없다. 누구를 나무랄까, 도긴개긴이다.


“미친다, 미쳐.”


비교적 젊은 측에 드는 아내가 쪼잔하기 그지없는 화투판을 설명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죽으나 사나 ‘십 원 빼이’에 올인하는 어르신들이 짜장면인들 쉬 사 잡숫겠는가. 대동아전쟁 시절부터 허리띠를 졸라맸으니 안 먹고 안 쓰기에 이골이 난 게다. 평균수명이 83.6세에 불과한데도 백 세 시대라니, 저승은 머나먼 남의 일인 줄 알고 무조건 아끼고 보는 것이다. 세월 헤픈 줄 모르고 허리띠 다잡는 꼴이다.


의성읍내 오리 집은 단골 음식점이다. 전화번호조차 9252니, 천상 오리구이 집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맛집인데도 가물가물해질 무렵에야 친구와 다시 발을 들였으니 반갑지 아니하랴.


“해갈을 위하여!”


뙤약볕 아래 고추 딴 저녁나절 바짝 단 입에 소맥 두어 잔을 단숨에 쏟아붓든 게 엊그제 같건만 가을 넘겨 겨울로 건너뛴 것이다. 우리는 흡사 이산가족 만난 듯 그간의 안부 묻기에 바빠 말이 다 엉키었다. 안 주인은 “혹시 내가 잘못한 점이 있었나?” 돌이켜 봤다고 한다. 바깥양반은 불판 주물럭을 연신 뒤적여 주는 등 전에 없던 서비스를 하며 사람 좋게 웃는다.


바람 찬 어스름 저녁이어선지 자리가 파할 때까지 손님은 친구와 나뿐이었다. 마중 손님이 되어서 빈 테이블이 채워지기를 바랐으나 아쉬웠다. 치아 수리한다는 핑계로 술을 일병씩만 마시고 당뇨가 겁이 나서 국수 주문조차 거르게 되어 미안하였다. 한 그릇 시키면 둘로 나눠 대령하는 후덕한 아줌마인데 말이다. 살펴 가시라 온정 어린 인사를 받으며 거리로 나서니 겨울밤이 푸근하였다. 돈 쓰는 맛이 쏠쏠하다.


북원 로터리에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세모(歲暮)를 알린다. 계묘년은 또 이렇게 속절없이 가고 말 것이다. 새해엔 늙어지면 못 노나니, 부지런히 산을 타고 지갑도 열자. 세월은 휘리릭 가고 만다. /김상영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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