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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달·아사녀 전설 서린 경주 영지석불좌상 탐방

김순희 시민기자
등록일 2024-02-06 19:27 게재일 2024-02-07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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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세월을 이겨낸 영지석불좌상이 사람들의 발길을 기다린다.
오랫동안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불국사를 창건한 김대성은 절 안에 불탑을 세우기 위해 백제의 석공을 불렀다. 당시 백제는 돌탑을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솜씨가 좋은 아사달을 신라로 데려와 석탑을 만들었다.

그런데 아사달이 불탑을 만든다며 신라로 간 지 여러 해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내인 아사녀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신라로 향했다. 어렵사리 불국사에 도착한 아사녀는 남편을 찾았지만, 아직 불탑이 완성되지 않아 만날 수 없다며 사람들이 막아섰다. 당시 사람들은 불탑을 만들 때 여자를 만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아사녀는 날마다 불국사 앞을 서성거리며 기다렸다.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아사녀를 가엾게 여긴 한 스님이 그녀에게 귀띔했다. 불국사 가까이에 있는 연못에서 정성껏 기도를 드리면 탑이 완성되었을 때 탑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칠 것이라고. 이후 아사녀는 매일매일 연못을 들여다보며 탑의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림자는 볼 수 없었다.


기다림에 지쳐 상심한 아사녀는 결국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연못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그녀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사달이 석가탑을 완성했다. 아내가 그리웠던 그는 서둘러 아사녀를 만나기 위해 나섰지만, 아무리 헤매도 아내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홀로 백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훗날 사람들은 아사녀가 빠져 죽은 연못을 ‘영지’, 석가탑을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무영탑’이라고 불렀다. 아사달은 신라를 떠나기 전 바위에 아내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고 그녀의 모습을 새겼다고 한다. 그런데 완성한 뒤의 모습을 보니 마치 부처와 같았다고 전한다.


경주로 영지석불좌상을 만나러 갔다. 영지로를 따라가니 영지초등학교를 지나자 물 위를 오리가 가르며 노니는 영지가 나타났다. 바람 한 점 없어서 물에 산 그림자가 가득 들어앉았다. 둘레에 벚나무 가로수와 산책로가 놓였고, 연못 가까이에는 공원이 조성돼 방문객들이 앉아 쉬기에 좋았다. 길 건너에 영지암 이정표가 우리를 부른다.


이곳엔 모든 이름 앞에 영지라는 갓머리를 달았다. 오랜 전설이 살아서 우리 곁에 있다. 이야기의 증거를 만나러 걸어 들어가니 석불 좌상의 옆모습이 보였다. 얼굴 모습을 알아볼 수 없는 불상이다. 빗물에 씻겨나간 것인지 바람결에 쓸린 것인지 마모가 심하다. 하지만 어떤 이는 원래 미완성의 불상이라고 주장했다.


얼굴은 알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건장한 신체와 허리, 양감 있는 무릎 표현 등이 통일신라 석불 양식이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것이며, 손 모양과 자세는 석굴암 본존불을 충실히 따랐지만, 광배 일부도 상했다. 같은 자리에서 천 년 넘는 세월을 견디었다는 것만으로도 상을 주고 싶은 마음이다.


약간 이지러진 광배 뒤로 불국사가 놓인 토함산이 어디쯤인가 살폈다. 내비게이션으로 확인하니 차를 타고 8분 거리이다. 석가탑이 얼마나 높이 올라야 이곳까지 그림자를 드리울까. 산 그림자라도 길게 늘이면 닿을까, 발돋움해보아도 불국사의 산신각조차 보이지 않는다. 길에 오가는 자동차 소리에 저녁 예불을 알리는 북소리조차 삼켜버렸다. 아사녀의 모습을 닮았다던 석불의 표정이 없어진 것은 가까이 두고도 다가가지 못한 아사녀의 마음이 다 녹아내린 것이 아닐까 싶어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계절마다 불국사를 찾았지만, 영지석불좌상은 처음 찾았다. 불국사를 찾는 관광객들이 이곳도 함께 둘러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두 손을 모아본다. /김순희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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