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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 신라비와 냉수리 신라비

김순희 시민기자
등록일 2024-02-27 18:42 게재일 2024-02-28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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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봉평리 신라비는 전시관 안에 제일 좋은 자리에 놓였다.
울진 여행 중이었다. 죽변의 해안 스카이레일을 타려고 가다가 ‘봉평리 신라비’라는 안내판을 보고 차를 세웠다. 드넓은 주차장에 들어가니 신라비 전시관 건물이 웅장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신라의 비석이라 하니 구석에 돌로 된 비 하나 섰겠지 하는 우리의 예상이 빗나갔다.

신라비의 중요성 때문인지 전시관 규모가 상당했다. 주차장에 공중화장실과 도서관이 함께 있었고, 입구에 울진 곳곳에 있던 비석들을 한곳에 모아 놓아 비석거리를 조성하였다. 여기 비석들은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 평해 군수, 울진 현령 등을 지낸 지방관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세운 선정비와 불망비 송덕비였다.


제1전시실에서는 울진 봉평 신라비가 발견된 이야기와 1500년 전 신라의 어느 날을 상세히 적어 놓았다. 1988년 1월 죽변면 봉평 2리 118번지 논을 갈기 위해 작업을 하던 중 발견하여 신라 비라고 확인했다. 오래 땅속에 묻혀 있었던 까닭으로 비문의 일부가 마멸되어 정확한 판독이 어려우나 신라 법흥왕 11년(524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신라가 영토확장으로 동해안 지역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곳 거벌모라(居伐牟羅·봉평)지역을 새로 편입함에 따라 주민들의 신라 부속 반대를 위한 항쟁사태가 일어나자 신라가 이를 응징하기 위해 육부회의(六部會議)를 열고 대인(大人)을 파견하여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편 및 신라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비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비는 사각장방형의 자연석 화강암에 한 면을 다듬어 비문을 새겼는데, 규모는 작지만, 형태는 고구려 장수왕 2년(414년)에 세운 광개토대왕비와 유사한 고구려계의 특징을 보인다. 비문은 예서풍의 10행 398자로 완벽한 판독문이 제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당시 신라가 동해안 지역에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노인법, 장형의 기술로 볼 때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연결된다. 또한 육부회의가 이때에도 행해졌음을 알 수 있고, 법흥왕을 매금왕(寐錦王)이라 했으며 각 부의 신료들과 함께 명령을 내려 당시 신라 왕권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 비는 당시의 신라영토, 율령 체제, 왕권의 한계, 관료제도 등을 알 수 있는 자료로 가치가 크다. 국보 제242호로 지정되었다.


제2전시실에서는 역사를 엮는 석비가 곧 역사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석비의 종류와 어떻게 만드는지, 한국, 중국, 일본의 것을 비교했다. 6~7세기 신라의 석비 연표체험실은 봉평리 신라비 모형을 만져보며 신라비에 대하여 좀 더 체감할 수 있는 공간이다. 벽에 그려놓은 연표를 보자니, 반가운 ‘포항’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봉평 신라비 보다 더 연대가 빨랐다. 사진은 신광면행정복지센터 마당에 있는 냉수리 신라비였다.


냉수리 신라비의 의의는 첫째,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시대의 비 중에서 포항 중성리 신라비 다음으로 연대가 빠르다는 점, 둘째, 한 인물의 재산 소유와 상속 문제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이 시기 경제 관계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점, 셋째, 6부·갈문왕·사라·관등·촌주·도사 등 정치·제도사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을 다수 보인다는 점, 넷째, 국어학적으로 이두(吏讀)의 성립 시기와 성립 과정을 추정하게 하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특히, 이 비는 울진 봉평리 신라비와 긴밀한 상보적 관계이다. 이렇게 중요한 국보가 비는 겨우 피하나 바람은 고스란히 맞는 한댓잠을 자는 신세다. 봉평리 신라비는 큰 지붕을 이고 훤한 조명 아래 사진도 함부로 찍지 못하도록 고이 모셔놓았는데 말이다. 포항시에서 번듯한 살림살이를 마련해 이사하도록 애써야 할 중요 문화재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김순희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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