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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언덕’에서 눈과 만나다

박선유 시민기자
등록일 2024-02-27 18:42 게재일 2024-02-28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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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쌓인 경주 풍력발전단지 풍경.
재난문자가 연이어 울렸다. 비가 내리는 와중에 많은 눈도 내리니 조심하라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언제부터인가 경주엔 눈이 내리지 않았다. 아니 경주 시내권이라고 표현하는 쪽이 맞겠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시내권을 제외하고 제법 큰 눈이 내렸다. 참고로 경주시는 경북에서 안동시에 이어 행정구역 면적이 두 번째로 넓다. 그래서 어느 동은 비가 내리는데 어느 동은 해가 날 때도 있다. 좁은 시내권만 생각한다면 경주가 전국에서 외국인 비율이 두 번째로 높다는 사실만큼 외지인들에겐 낯선 소리일 것이다.

먼 기억에 의하면 겨울 즈음 처마 밑에는 눈밭으로부터 어린 발을 보호하기 위한 부츠가 대롱대롱 매달려 말려지고 있었다. 눈은 용케 작은 부츠 안으로 들어와 매번 양말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장갑도 부츠도 눈에 젖어 제 기능을 못할 땐 아랫목으로 뛰어들어 언 손발을 녹였다. 분명 기억엔 눈이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뜸해지더니 감감무소식이 되었다. 그렇다 보니 먼지처럼 날리는 눈에도 기뻐하게 됐다.


아이에게 눈은 새벽녘 갑자기 깨어나 두 손으로 만져본 게 전부였다. 놀이공원 속 인공눈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래서 경험시켜 주고 싶었다. 소복이 쌓인 눈을 밟으며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느낌을.


눈 소식이 전해진 날부터 SNS에는 사람들이 올린 눈 사진이 가득했다. 후보지로 두 군데를 선정했다. 첫 번째로 고른 곳은 암곡이었는데 도착했을 때는 이미 거의 다 녹아 맛보기 차원의 경험만 하고 돌아와야 했다.


아쉬움에 다음 목적지를 골랐다. 바람의 언덕. 경주 풍력발전 단지다. 친환경 청정에너지 생산을 위해 한국동서발전과 동국S&C가 건설한 상업용 풍력발전 단지로 총 7기의 풍력 발전기가 가동 중이다. 이곳은 무료로 개방 중이며 멋진 풍경과 산책로로 인기다. 사계절 내내 인기지만 초록이 가득한 계절에 경풍루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특히나 멋지다. 주차장과 화장실도 있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단 주변에 상가나 식당이 없다 보니 노약자를 동반할 때는 미리 간단한 요기 거리를 준비하면 좋다. 취사는 불가다. 단점으로는 대중교통으로는 이동이 어렵다는 점이다.


평소 장거리 운전을 내켜하지 않지만 눈에 대한 집착으로 내비게이션을 켰다. 대략 40~5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다. 30여분 달리자 본격적인 난코스가 등장했다. 아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묵꼬치 같은 길이다. 구불구불한 길을 다들 서행 중이었다. 긴장 속에 십여 분이 지나자 목적지에 도착했다. 온천지에 눈이다. 서둘러 부츠를 신기고 눈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눈과 찬바람이 만나 코끝이 시리다. 쨍하게 차가운 겨울바람. 그리웠던 느낌이다. 부러 눈이 깊게 쌓인 곳을 골라 밟아보았다. 뽀드득 소리가 난다. 눈이 내린지 이틀이 지나다보니 녹은 부분은 미끄러워 산책은 포기하고 한 곳에서 놀기로 했다.


작지만 눈사람을 만들고 모형틀로 이런저런 모양들을 찍어내다보니 시간이 꽤 지났다. 눈싸움을 하고 싶었다는 아이의 말에 눈을 뭉쳐 던져댔다. 내내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들 즐거워보였다.


오후가 되자 해가 들기 시작하면서 풍력 발전기를 덮고 있던 뿌연 안개도 걷히기 시작했다. 젖어든 장갑과 옷들이 집으로 갈 시간을 재촉했다. 모처럼 찾아든 하얀 눈 덕분에 아이도 엄마도 모두 만족한 하루였다.


/박선유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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