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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랑 중 가장 크고 높은 어버이의 사랑

엄다경 시민기자
등록일 2024-05-02 18:51 게재일 2024-05-03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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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다경 시민기자가 아들에게 받은 카네이션 화분.
어떤 오해로 인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날이 있었다.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세상은 너무나 매몰찼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표현이 이때 필요하구나 싶었다. 밥도 안 먹히고 물도 안 먹히고 그저 멍하니 앉아서 초점 없는 눈으로 벽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 세상에 아무도 내 편은 없는 것 같은 상실감으로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시체처럼 널부러져 있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집 앞 공원으로 나갔다.

키가 훤칠한 소나무 숲 아래쪽에 있는 단풍나무 두어 그루 아래에 섰다. 전날 내린 비로 단풍잎은 더욱 생생한 초록빛이었고 아이 손가락 같은 잎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살랑살랑 단풍나무 가지를 흔들다 가고는 했다.


그 풍경 아래에 아득히 서 있다가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십여 년 전에 하늘로 가신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 중환자실에 입원해 계실 때 의사는 가족을 몰라볼 거라 했지만 몸이 굳고 혀가 굳어 말을 잃었어도 아버지는 눈빛으로 분명 나를 알아보셨었다.


사람의 눈빛이 얼마나 간절한 말을 할 수 있는지 그때 알았다. 죽음 가까이에서도 그렇게 애절하게 딸을 바라보던 아버지를 잊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세상에 나 혼자인 것처럼 괴로워한 내가 갑자기 바보 같이 생각이 됐다. 그러자 말할 수 없는 위로가 찾아왔다. ‘아! 내게도 언제나 지켜봐 주며 걱정해 주는 아버지가 있었지’ 비록 보이지 않는 시공간으로 경계지어 있지만 이어진 인연의 끈을 통해 아파하는 딸을 어루만져 주는 아버지의 손길이 느껴졌다. 갑자기 힘이 불끈 솟았다.


“아버지가 가마솥에 불을 지피셨다/ 잘 마른 나뭇가지에 불이 붙으면/ 아궁이는 뒤뜰 감나무 홍시 빛깔보다 더 환해졌다/ 지난 계절 내내 가지에 묻은 바람들이 깨어나/ 너울너울 불꽃이 되어 흔들렸다// 나는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나무의 생이 타들어가는 냄새를 맡았다/ 비릿한 듯 은근한 듯/ 얻어먹은 술밥에 취한 것처럼 혼곤한 그 냄새가/ 삭정이 같이 구멍 숭숭한 처마를 지나고/ 뒤란 꽁무니에 매달린 굴뚝까지 돌아나가야/ 가마솥의 여물은 질긴 가난처럼 익었다// 여덟 아이들 중 서넛은/ 기슭에 떨어진 도토리처럼 집을 떠났고/ 남은 아이들이 복닥거리는 작은 방에/ 서서히 온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저녁이면 어김없이 냄새가 피어올랐다/ 여위어 가던 아버지가 한 줌의 재가 되기 전까지는/ 아직도 아버지는 이승의 아궁이로 불을 지피시고/ 익숙한 나무 타는 냄새와 구들장을 번져가는 온기로/ 나는 오늘도 저물어가는 이 저녁을 살아낸다” (엄다경 시 ‘아버지의 아궁이’)


다시 오월이다. 새봄이 오고 새잎은 찬란하지만 한번 떠난 부모님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 사랑의 끈이 끊어졌다고 여기며 아파하지는 말자. 살아가는 데는 보이지 않는 깊은 사랑이 우리를 받쳐주고 있다. 그 힘이 있어 살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세상의 사랑 중 가장 크고 높은 사랑은 어버이의 사랑이리라. 그 사랑 덕에 우리는 오늘을 잘 살아낼 수가 있다. 카네이션 곱게 들고 사랑의 온기를 가슴으로 느끼는 오월이 되자. /엄다경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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