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각각 형상의 ‘오백나한상’ 큰 울림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니, 단정하게 자리한 영산전이 눈에 들어왔다. 이 건물이 국보 제14호이다. 현재 남은 고려시대 건축물은 거조사 영산전,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 봉정사 극락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뿐이다. 대부분 절의 대웅전은 문이 많고 그 문에 꽃무늬 문살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리고 양옆에 따로 문을 내서 그리로 방문객이 드나든다.
이 건물에는 정 중앙에 검소한 가정집의 방문을 닮은 입구 하나뿐이다. 대신 살창을 사방으로 냈다. 그리로 햇살이 서성거렸고 바람이 숭숭 드나들었다. 측면에 고창이 있는 것이, 다른 고려시대 건축과 달리 특별하다. 기둥은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을 닮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오랜 세월 버텨온 흔적이 가득하다. 738년(신라 효성왕 2년) 원참대사가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경덕왕 때라는 설도 있다. 고려시대 혜림법사와 법화화상이 영산전을 건립하고, 오백나한을 모셨다고 한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니 불단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우리를 맞는다. 석가모니불과 석조나한상 526위가 모셔져 있다. 오백나한은 각각 표정과 자세가 모두 달랐다. 1805년(순조 5년) 영파성규 스님이 영산전 오백나한상 각각에 모두 이름을 붙였다. 1번부터 차례로 돌며 가만히 살피니 다양한 모습에 호기심이 생겨 이름을 한 번 더 보기도 했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놀란 듯한 존자, 손에 과일 같은 것을 얻으려는지 몸이 그쪽으로 기울어 있는 모습, 무릎 꿇고 다소곳하게 수줍은 미소의 존자님은 유럽 전시회 나들이도 다녀오셨다고 한다. 지붕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가, 고개가 뒤로 젖혀져 있기도 하고, 그 옆에 호랑이인지 동물을 안은 존자, 동물을 타고 있는 상, 추우신지 온몸을 감싸고 얼굴만 내민 모습에는 슬쩍 웃음도 났다. 주황빛 옷을 입은 존자는 이마에 손그늘을 만들어 멀리 보시며 무언가 말하려는 것 같아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여보았다. 신라, 고려 조선을 건너온 나한상들의 사연이 궁금해 더 발길이 느려졌다. 하나하나 손 모양 발 모양이 모두 달랐다.
나한은 산스크리트어 Arhan을 음역한 아라한(阿羅漢)의 줄임말로,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최고의 깨달음을 이룬 성자(聖者)를 의미한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처음 결집한 제자 500인을 500아라한이라고 하였다. 나한상은 모습에 대한 일정한 도상이 없었기 때문에 불교 미술 가운데 제작자의 창의성이 잘 발휘될 수 있는 소재였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 꿈을 무학대사에게 말하니 무학은 ‘장차 큰 귀인이 될 꿈’이라면서 나한전을 세우고 500 나한을 봉안하여 500일 동안 기도를 드리라고 하였다. 이성계는 석왕사를 세워서 500 나한들을 봉안하고 500일 동안 기도하였다. 마침내 그는 500 나한의 영험 때문인지 조선을 개국하여 태조가 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불교를 억압하였던 조선시대에도 나한신앙은 매우 성행하게 된다.
500 나한은 그 후 불화나 조각으로 많이 표현되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속에 반드시 아는 사람의 얼굴이 있다는 전설이다. 실제로 나한의 얼굴을 보면 우리 인간의 모습과 닮았고 특히 해학적이다. 수능이나 큰 시험을 앞두고 이 절을 많이 찾는다고 하니 북적거릴 가을 전에 방문해보길 바란다. /김순희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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