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처럼 지켜낸 ‘훈민정음 해례본’<br/>당시 기와집 열 채 값 치르고 수집해
위창 오세창이 제자 간송 전형필에게 한 말이다. 간송은 한국의 전통 문화 유산을 보는 안목을 키워 준 스승의 이 말을 가슴깊이 새기며 민족의 혼과 얼을 지켜내겠다는 결심을 한다.
상속받은 재산으로 24세에 억만장자가 된 간송은 그 재산을 밑천으로 막대한 양의 국보급 문화재를 수집한다. 1900년 초부터 일본으로 흘러들어가거나 훼손될 위기에 처한 우리의 문화재를 보호 차원에서 사들였다.
거액을 주며 수집한 국보급 문화재들은 지키는 일도 쉽지 않았다. 1·4후퇴 때는 유물들을 놔둔 채 부산으로 급히 피난을 가야 했고, 당시 누군가에 의해 유출된 많은 소장품이 간송 보다 먼저 도착해 골동품상에 팔리기도 했다. 간송은 ‘훈민정음 해례본’ 등 가장 중요한 문화재 몇 점만 간신히 챙겨 은신하며 지냈고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한 국보 ‘훈민정음 해례본’은 그렇게 지켜질 수 있었다.
민족 말살 정책이 극에 달했던 1940년, 일제가 그토록 없애고자 했던 이 책을 먼저 발견하지 못했다면, 전쟁으로 혼란스러웠을 때 이 책을 베개 밑에 두고 잠을 잘 정도로 목숨 걸고 지켜내지 않았다면, 한글은 인도 고대 문자나 몽골 글자 등을 모방했다느니 창호의 격자무늬를 본떴다느니 하는 논란으로 여전히 평가절하 되고 있을 것이다. 이 책값으로 당시 기와집 열 채 값을 치렀고, 그 값은 현대의 물가로 환산하면 무려 30억 원에 가깝다.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한글의 창제목적, 제자원리, 운용법 등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보화각(<8446>華閣)은 간송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미술관이다. 1938년 서울 성북동에 설립될 당시 오세창이 ‘빛나는 보배를 모아 두는 집’이라는 뜻에서 ‘보화각’이라고 했다가 간송 사후 ‘간송미술관’이 되었다. 2019년 12월 30일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이후 보수 필요성이 제기돼 1년 7개월간의 보수·복원 과정을 거쳐 ‘보화각 1938: 간송미술관 재개관전’을 개최했다. 보수·복원 과정에서 새로 찾은 자료들과 미공개 서화 유물 36점을 처음 선보이기도 하는 이 전시는 5월 1일 개막하여 6월 16일까지 1시간에 100명만 인터파크 예약을 통해서 입장 가능하며 입장료는 무료다.
후손들에게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자긍심을 심어준 간송 전형필 선생과 동시대를 살았던 대한제국 매국노 윤덕영은 나라 팔아 받은 돈으로 ‘조선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집’ 벽수산장을 지으며 부귀영화로 천수를 누리다 해방이 되기 전에 죽었다. 백성을 사지로 몰았던 그의 권력은 경술국치라는 치욕적인 역사를 후손들에게 남겼다. 그 이름 입에 올리기조차 싫다. 애국지사 전형필 선생도 매국노 윤덕영도 같은 우리 선조라는 것이 그저 아이러니컬하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라. 풀 위로 바람이 불면 반드시 쓰러지느리라(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 논어 안연편에서 계강자가 공포(恐怖)정치로써 백성을 다스리면 어떻겠냐는 질문에 대한 공자의 답이다. 정치에 따라 백성은 선하게도, 악하게도 될 수 있다. 권력에 의해 한 나라의 존망(存亡)이 결정되는 예는 지난 세계 역사에서 수없이 접한다. 선조들의 유산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것은 오롯이 후손 몫이다 보니 찬란한 문화를 창조한 조상들과 그것을 지키려 힘썼던 간송 전형필 선생의 후손이라는 것이 무한 자랑스럽다.
/박귀상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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