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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가장 가까운 신, 발

김순희 시민기자
등록일 2024-06-11 19:25 게재일 2024-06-12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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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구박물관에서 ‘한국의 신발, 발과 신’이라는 주제로 9월 22일까지 전시회를 연다.
현재 남아 있는 신발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미국 오리건주에서 발견된 산쭉나무 껍질로 1만 년 전에 만들어졌다. 인류는 발을 보호하고 기후를 극복하기 위해 그 전부터 신발을 신었을 것이다. 가죽신을 장식한 용도의 단추가 경상북도 영천에서 발견되기도 했고,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신발 중에는 낙랑의 채협총과 창원 다호리에서 발견된 칠기 신발이 오래되었다. 나무에 칠을 해서인지 지금 전시실에서 우리와 대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삼국시대 짚신과 나막신 가죽신까지 ‘국립대구박물관 개관 30주년 특별전’에서 자세히 알려주어 살펴보느라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신발의 소재가 이리 다양할 줄 몰랐다. 짚, 왕골, 부들과 같은 풀대부터 나무, 종이, 비단, 가죽, 금속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었다. 현재도 신분에 따라 재료부터 다르지만 오래전 그 시대에는 더 달랐다. 농사를 짓는 평민은 짚과 나무가 구하기 쉬워서 짚신과 나막신을 주로 신었을 것이다. 말을 키우는 곳에서는 말가죽을, 목동들이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가죽발레를 함께 착용한 기록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통일신라는 4두품부터 소나 말가죽, 평민은 마로 만든 신발을 신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왕실은 좀 더 다양하게 비단, 고라니, 담비, 곰 같은 동물도 이용했다. 삼을 엮은 미투리부터 사슴가죽신까지 오리고 깁는 그림까지 보태주니 옛 시절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이름도 풀대나 나무줄기를 엮어서 만들면 초혜이다. 짚신이 대표적인데 한 켤레로 4일 남짓 신으면 닳아서 매일 밤마다 자기가 신을 신발을 꼬고 삼아야 했다. 한 사람이 일 년에 약 70켤레를 신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과거시험을 보려고 대구에서 문경새재를 지나 한양까지 가려면 열흘 이상 걸렸다고 한다. 짐을 꾸릴 때 짚신을 주렁주렁 매달고 갔을 것이다. 전시실 바닥에 한양까지 가는 길을 그려놓았다.


머리카락까지 함께 삼에 섞어 만든 원이 엄마 미투리는 가슴이 싸하다. 병든 남편을 위해 정성껏 삼은 미투리를 한글로 쓴 편지로 감싸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남편 무덤에 함께 넣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니 관람 중이던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어릴 때 직접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처음 보는 분들의 추억이 전시회의 한 부분이 되는 순간이다.


관리들은 목이 긴 화를 신었고, 양반들의 일상용 신발이었던 혜는 남녀에 따라 문양이 달랐다. 조선 후기에 부유해진 평민도 혜를 애용했는데, 한 켤레에 쌀 한 섬일 정도로 비쌌다고 한다. 비가 오는 날에는 나무로 만든 나막신이나 기름을 먹인 징신을 신었다. 눈이 내리는 겨울에는 보온을 위한 둥구니신과 설피를 착용했다. 영상을 따로 보여주는 방에 앉아 사람들의 발만 찍은 영상을 보니 발만으로도 참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구나 싶었다.


전시의 많은 부분이 습신이다. 습신은 죽은 이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신발이다. 노잣돈과 마찬가지로 돌아가신 분이 좋은 옷과 신발을 신고 가기를 바라는 후손들의 마음이다. 관 속에 빈 곳을 고인이 좋아하던 옷을 입히고 또 함께 넣었다고 하니 지금의 장례문화보다 좋은 풍습인 것 같다.


벽화에 그려진 그림이 영상으로 움직이고, 말표 고무신과 짚신을 치수별로 마련해 두고 관람객이 직접 착용하고 사진도 찍어보게 한 공간은 더 매력적이다. 서장훈 선수의 기록을 만든 커다란 운동화, ‘영화 1987’의 주인공 강동원과 김태리의 운동화도 있고, 성철 스님의 신발이 댓돌 위에 놓인 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흐르는 창을 마련한 건 더 아름답다. 신나는 박물관에서는 종이 신발 만들기 체험도 할 수 있고, 볏짚 생활용품 만들기, 꽃신 만들기 등 홈페이지에서 날짜를 확인하고 신청해 시간여행을 해 보길 기대한다. /김순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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