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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째 지지부진… 원형복원 시급한 태백산 사고와 각화사

류중천 시민기자
등록일 2024-06-25 20:06 게재일 2024-06-26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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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보관 5대 사고지중 하나<br/>1606년 봉화 춘양면 석현리 숲에 자리<br/>수호 사찰 각화사 800여 명 스님 수도<br/>다른 사고들은 모두 존치하거나 복원
태백산 사고의 수호사찰인 각화사.

태백산 사고지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5대 사고지 중 한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 기록을 오대산·마니산·적상산·춘추관·태백산에 각각 사고를 지어 보관했다.

봉화 태백산 사고 건물은 화재로 소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원형 복원을 추진 중이나 수년째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춘추관, 성주, 전주, 충주사고 4곳에 나눠 보관했으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됐다. 임진왜란 이후 복본해 더 안전한 춘추관,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 등 깊은 산중 5대 사고에 보관하게 된다.


태백산 사고는 1606년(선조 36년)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태백산 절집 뒤쪽 원시림에 가까운 숲에 자리했다. 이정표 하나 없는 가파른 산길 너머에 태백산 사고터가 있다.


좌측에 ‘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실록각이 있었고, 왕실 족보를 보관하던 선원보각은 오른쪽에 있었으며, 포쇄각 근천관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경 태백산 사고의 서책들은 총독부로 옮겨졌다. 이후 1930년경 서울 규장각으로 옮겨졌으며, 1985년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사고 건물은 1940년경 소실되고 현재는 사고지만 존재한다.


사고본은 국보 제151호로 지정됐고, 1997년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보존 가치가 높은 세계적 보물이다.


봉화 태백산 사고의 수호 사찰은 각화사였으며, 따라서 수호총섭도 각화사의 주지가 맡았다. 수호 사찰로 지정돼 800여 명의 스님이 수도하였던 국내 3대 사찰의 한곳으로 대사찰이었다. 울창한 산림 속 각화사는 선승들이 수행하는 수도 사찰이다. 위압감이 들 정도의 석축은 큰 바윗돌을 정교하게 쌓아 올렸고, 미움도 고움도 다 벗어두고 번뇌를 떨치고 밟아야 하는 중앙으로 오르는 계단. 30여 계단을 오르면 달 그림자 드리우는 누각이란 뜻을 가진 월영루의 일주문이다. 그곳을 지나면 삼층석탑이 있는 요사체 뜨락. 내쉬는 숨소리조차도 부담스러운데 이따금 들리는 산새 소리는 청아하다.


우측으로 대나무 울타리로 경계를 지은 태백선원과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있으며, 정면으로 팔작지붕의 대웅전과 멀리 산운각이 보인다. 태백선원의 대나무 울타리에는 ‘묵언’이라는 두 글자에서 오는 무거운 침묵의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각화사는 태백산 남쪽에 위치하며 686년 신라의 원효대사가 춘양면 서동리 남화사를 옮겨 창건했다. 1606년(선조 39년)에 각화사 위쪽에 태백산 사고지를 설치, 수호 사찰로 지정되면서 800여 명의 스님이 수도했다고 한다.


각화사는 인근에 각화사 귀부, 부도, 김노경 공덕비가 있다. 귀부는 경북유형문화재 제189호다. 고려 초기 김심언이 지은 통진대사비를 비좌했다고 전한다.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된 고려 초기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는 존치하거나 복원되었으나 유일하게 봉화 태백산 사고만이 복원되지 않고 시간이 흐르고 있다. 태백산 사고가 하루빨리 복원되기를 기다려본다.


/류중천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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