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들은 보통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정자를 지었다. 드라마가 유명해지며 알려진 안동의 만휴정도 그 옛날엔 시내를 건너고 골짜기를 올라야 보인다. 오늘 찾아간 체화정(안동시 풍산읍 상리리)은 사람들의 발길이 오가는 곳에 지었다. 바로 길가라 주차 공간도 없어서 백여 미터에 풍산 공설시장 주차장에 차를 두면 된다.
선비가 깊은 곳에 조용히 공부하려고 짓는 정자이지만, 체화정은 길가에 자리해 손님을 기다리는 모양이다. 1761년(영조 37)에 진사 이민적(1702~1763)이 짓자 형이 너무 좋아하며 늘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형을 따라 손님들도 찾아왔다. 이 정자를 깊은 산 바위틈이나 맑은 샘 근처에 두었다면 주인장이 바라볼 경치야 좋았겠지만 벗들이 찾아오기엔 멀었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 좋아하는 형의 마음이 얼마나 서운할까 걱정했다고 전한다.
체화정이란 이름은 상체지화(常棣之華)의 줄인 말로 다닥다닥 함께 모여 피는 상체꽃을 형제가 모여 사는 것에 비유하여 형제애를 상징한다. 시경에서 따온 말이다. 이민적은 만년에 큰형 이민정과 함께 이곳에서 지내면서 형제간의 우의를 다졌다고 한다. 체화정은 1985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9년 보물로 승격했다.
어느 계절에 찾아가도 아름답다. 장마가 한창인 7월 말에 찾아가니 입구에 물옥잠화가 연보랏빛으로 가득 피었다. 탄성을 지르며 다가가 꽃구경했다. 주위의 초록과 대비해 단연 돋보였다. 연못이 이어지며 길 안내를 했다. 따라가니 수련이 낮게 엎드렸다. 연꽃은 이제 막 꽃대를 올려 일주일 정도면 연못 가득 연향이 번질 것이다.
찬찬히 체화정을 올려다보았다. 온돌방을 중심으로 양옆에 마루방이 있고, 앞쪽에는 툇마루를 내고 난간을 둘렀다. 양쪽 마루방 사이에는 들문을 설치해서 공간을 넓힐 수 있게 하였다. 무엇보다 방문이 독특하다. 창호지 가운데에는 ‘눈꼽째기창’이라는 작은 창을 더 내서 문을 다 열지 않아도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우리의 창호는 한지를 발라 마감해 안에서 밖을 내다볼 수 없다. 따라서 밖을 살피기 위해서는 문을 열어야 하는데, 여름에는 상관없으나 겨울에는 열손실이 크다. 따라서 큰 창을 열지 않고 별도로 설치한 작은 창을 열어서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를 눈꼽째기창이라고 한다. 눈꼽째기창은 창호 바로 옆에 별도로 설치하는 경우와 체화정처럼 창호에 한 몸으로 부착하기도 한다.
대청에서 냇물 소리를 들으려 담에 냈던 독락당의 살창만큼 독특하다. 계절마다 방에서 내다보는 연못의 경치가 형제가 보기에도 만족스러워 추운 겨울에도 작게 창을 열었을 것이다. 정자 앞쪽의 연못에는 3개의 작은 섬을 만들었다. 이 세 개의 인공섬은 신선이 사는 ‘삼신산’을 의미한다. 중국 전설에서 유래한 삼신산(三神山)은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의 세 산으로 불로불사하는 신선들이 산다는 곳이다.
앞쪽에 걸린 현판은 사도세자의 스승이었던 안동 출신의 학자 유정원이 썼다. 정자 안에는 담락재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조선 최고의 서화가 중 한 명인 김홍도의 글씨다. 김홍도는 1781년 정조 어진 제작에 참여한 공으로 경상북도 안동 안기찰방을 지냈다. 찰방은 지금의 역장이나 우체국장에 해당한다. 1786년 근무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별의 징표로 써준 글씨다. 담락재라는 말은 형제가 서로 화합해야 화락하고 오래 즐겁다는 뜻이다.
정자 양옆으로 오래된 배롱나무가 키를 높였다. 아직 꽃문을 열지 않았지만, 곧 붉은 자태를 뽐낼 것 같아 그때 또 찾아오자 다짐하며 발길을 돌렸다.
/김순희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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