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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 지나간 뒤의 소고

엄다경 시민기자
등록일 2024-07-25 20:05 게재일 2024-07-26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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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의 작은 암자 화장암에서 찍은 배롱꽃.
밤 사이 억센 장맛비가 쏟아진 후 세상이 청명하다. 비에 푹 젖었던 나뭇잎은 좀 더 짙어지고 멀리 기찻길 옆으로 개망초꽃이 흐드러졌다. 푹푹 찌던 기온도 잠시 누그러졌고 창을 넘어 온 바람이 시원함을 주고 간다. 아파트 뒤쪽으로 보이는 주택에 사시던 할아버지 어느날부터보이지 않아도 그 집 마당의 노란 꽃은 올해도 여전히 피었다. 들판에는 초록물감을 쏟아놓은 듯 벼들이 자랐다. 밭둑에서 흔들리는 옥수숫대, 보랏빛 꽃들이 펑펑 터진 도라지밭, 그 위를 목 쉬는 줄도 모르고 울어대는 매미들. 이제 여름은 익을만큼 익었다.

“구름 5%, 먼지 3.5%, 나무 20%, 논 10%/ 강 10%, 새 5%, 바람 8%, 나비 2,55%, 먼지 1%/ 돌 15%, 노을 1.99%, 낮잠 11%, 달 2%/ (여기에 끼지 못한 당나귀에게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함)/ (아차, 지렁이도 있음)// 사실 제 시에 가장 많이 나오는 게 나무와 새인데 그들에게 저는 한 번도 출연료를 지불한 적이 없습니다 마땅히 공동저자라고 해야 할 구름과 바람과 노을의 동의를 한 번도 구한 적 없이 매번 제 이름으로 뻔뻔스럽게 책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작자미상인 풀과 수많은 무명씨인 풀벌레들의 노래들을 받아쓰면서 초청 강의도 다니고 시 낭송 같은 데도 빠지지 않고 다닙니다”- 손택수 ‘내 시의 저작권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부분


나도 산과 구름과 달과 논과 나무와 놀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자란 산골 동네는 그런 것 외에는 친구가 없었으니까. 눈만 뜨면 산과 놀고 구름과 매미소리와 나무 그늘과 놀았다. 풀과 꽃과 친구하면서 시인을 꿈꾸었고 붉게 노을이 하늘을 덮으면 주체할 수 없이 설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나를 버리고 손택수 시인과 동업을 했는지 내 시는 아직도 길을 못 찾고 오리무중 헤매고만 있다. 시인은 출연료도 저작권료도 지불하지 않았다는데 그럼 이제 내게도 좀 와줄 만 하건만. 누가 들으면 실력 없는 감독이 배우 탓만 하고 있다고 타박할지 몰라도 어째 내 연출 실력은 영 신통찮다.


그런들 어떠랴. 창을 넘어오는 뭉게구름의 푹신함에 빠져보다가 마음을 홀딱 뒤집어 놓고 가는 팬플룻의 소리에도 취해보다가 활자 중독자들의 대열에 끼여 열심히 또 시를 읽는 오늘이 이만하면 행복한 거 아니겠는가. 짐승도 내 편한 자리는 안다는데 열심히 하다보면 저 산도 들도 바람도 당나귀도 간절히 기다리는 내 마음을 알고 내 시에 고개를 들이밀고 찾아올지 모를 일이니. 괜찮은 시 한 편 얻는다면 다소간의 출연료를 지불할 의향도 있으니 말이다. /엄다경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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