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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문화유산 ‘수원화성’ 답사기

김소라 시민기자
등록일 2024-08-01 18:51 게재일 2024-08-02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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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향한  정조 효심 서려
지난 7월 20일 수원에 사는 친구를 만났다. 어린시절부터 매일 일기를 쓰고 그것을 간직하는 친구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짧더라도 매일 기록하는 그의 모습이 멋져보였다. 그 다음날인 7월 21일은 수원화성<사진>을 감상했다. 수원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세계에서 인정하는 우리의 문화유산이 되었다.

우리기 지금 볼 수 있는 수원화성의 모습은 본래의 모습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지나오면셔 심각하게 파괴되어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재건되었기 때문이다. 재건된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될 수 있었던 이유는 화성 계획 설계도가 아주 구체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이전 모습 그대로 재현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원화성은 정조 18년인 1794년 2월에 착공하여 정조 20년에 축성을 완료하여 2년 8개월 만에 완공하였다. 수원화성은 아버지를 생각하는 정조의 효심으로 축성되었다. 정조의 아버지는 영조의 둘째아들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이다. 정조는 이런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아버지를 후대가 기억했으면 했으리라. 정조는 아버지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풍수리지상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알려진 수원 화산으로 옮겼다.


화성하면 정약용의 이야기도 뺄 수 없다. 규장각 문신이었던 정약용은 정조와 함께 화성 건설을 계획했다. 화성 건설 이전, 1789년 정약용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을 행차할 때 건널 배다리를 설계하여 그 공을 인정받았다. 이에 정조는 정약용에게 화성 설계를 맡긴 것이다. 정약용은 기존 성곽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중국의 건축술과 서양의 과학기술을 모두 동원하여 돌과 벽돌을 함께 사용하는 독특한 성곽을 생각했다. 그리고 1792년 화성 축성 계획안을 완성했다. 뿐만아니라 2만5000근을 들어올리는 새로운 장비 거중기를 만들어 공사를 진행하였다. ‘화성성역의궤’는 화성을 짓는 방법과 짓는데 사용된 모든 기계까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원형 그대로 복원할 수 있었다. /김소라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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