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그림을 즐기는 또 하나의 즐거움 ‘낙관’

김순희 시민기자
등록일 2024-10-22 19:04 게재일 2024-10-23 12면
스크랩버튼
서화에 서명·압인하여 완성의 뜻 표시
옛 그림과 글씨를 감상할 때 낙관을 자세히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긴 그림을 보았다. 벽의 오른쪽에서 시작해 왼쪽 끝까지 길게 두루마리를 펼쳐 놓아 마치 파노라마로 찍은 사진을 보는 듯하다. 그림을 자세히 보려고 몸을 기울였다. 동영상으로 남기려 빠르게 걸으며 찍어도 끝까지 가니 30초가 넘었다. 심사정의 촉잔도권은 길이부터 사람을 압도한다. 중국 장안에서 촉(지금의 쓰촨)으로 가는 험난한 길을 담았다고 한다.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 사이사이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 산꼭대기 마을과 아랫마을을 도드래로 연결해 물자를 실어 나르는 모습을 세필(細筆)로 그렸다. 이인문은 스승 심사정의 ‘촉잔도권’에서 영향받아 ‘강산무진도’를 그렸다.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 광활한 산수와 계곡, 기암절벽은 묘사가 닮았지만, 차이도 뚜렷하다. 인적이 드문 ‘촉잔도권’과 달리 ‘강산무진도’ 곳곳엔 농경·수산·해운 등에서 바쁘게 일하는 인물 360여 명을 그렸다.

그림을 자세히 보려고 걷던 걸음을 되돌려 다시 걷길 반복했다. 처음 볼 때와 달리 특이한 모양의 낙관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섬의 지도 같다가 다시 보니 꿈틀거리는 애벌레 같기도 했다. 그 옆에 동그란 도장이 또 찍혔다. 두루마리 처음에서 그림이 시작하는 곳까지에 찍은 것이 여덟 개였다. 이렇게 시작하는 첫머리에 찍는 것을 머리 두(頭) 자를 써서 두인이라 부른단다. 동행한 지인이 불경을 공부하는 분이라 서예에 관심이 많아서 알게 되었다고 했다.

낙관은 알고 있었지만, 종류에 대해서는 처음 들었다. 두인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시작을 알리는 방법으로 사용한다는데 주로 작품의 위쪽에 넣어 주고 아호인과 성명인은 작품을 끝낸다는 의미로 주로 아래쪽에 넣어 준다. 두인은 반달형, 타원형 종모양, 호리병 모양 등 매우 다양하다. 내용도 다양하여 서재명이나 연호 성 등을 넣기도 한다. 두인을 찍을 시에는 공간의 넓이나 내용을 고려하여 사용한다.

낙관은 낙성관지(落成款識)를 줄인 것이다. 서화에 서명·압인하고 완성의 뜻을 표시하는 것을 말한다. 상세하게는 시구(詩句), 연월(年月), 간지(干支), 쓴 장소, 서사(書寫)의 이유, 증여할 상대방의 성호(性號)를 써넣어 서명·압인할 경우도 있다. 현재는 다만 호만 쓰는 일이 많고, 도장 하나를 눌러서 대신한다. 중국회화에서는 원 이전은 거의 낙관하지 않았으며, 이따금 낙관할 때는 화면을 손상하지 않도록 돌 틈새 등에 숨겨 썼다. 이것을 은낙관이라고 한다. 얼마 전 다녀온 문봉선의 경주 그림 전시에서도 낙관을 그림 속에 숨겨두어 흘려보면 보이지 않기도 했었다. 나무, 돌, 금속, 동물의 이빨 같은 재료에 그린이가 직접 새겼지만, 전문가에게 따로 부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엔 고무인이나 스티커를 붙이기도 한다.

낙관을 한다는 것은 작가 스스로 작품을 완성했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시간이 흘러 후세에 이 낙관을 통해 이 작품이 진품이었는지, 위작이었는지를 밝히는 귀중한 열쇠가 되기도 한다. 인장을 찍을 때는 보통 두 개를 찍는데, 같은 형태를 피하여 하나는 주문(朱文), 하나는 백문(白文)으로 하는 것이 좋다. 낙관 글씨는 작품 글씨보다 작아야 하며, 낙관 글씨의 위치는 보통 왼쪽 윗부분이 기준이 된다. 한문 작품의 경우 한글 낙관은 격에 맞지 않는다.

신윤복은 ‘가슴속은 언제나 사시사철 봄이구나’라는 글귀를 타원형으로 새겨 미인도의 트레머리 가까이 찍었다. 모델을 향한 화가의 진심을 전하는 연서 같다. 누군가의 마음에 도장을 새기듯 옛 선비들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후 낙관을 찍었나 보다. 낙관을 자세히 보는 것은 그림을 보는 또 다른 방법이다.

/김순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사회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