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년 포항 흥해서 출생 병서 좋아해 문무 겸비<br/>을사늑약 체결 후 산남의진 제3대 의병대장 추대
국가보훈부가 2024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세 분(최세윤·정원집·김영백)을 선정했는데 그 중 한 분이 흥해 출신 최세윤 의병대장이다. 최세윤은 1867년 포항 흥해에서 태어났다. 20대 후반까지 여러 경서를 익히고 통달했으며 특히 병서 읽기를 좋아하여 문무를 겸비하였다.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강요되자 책만 읽고 있을 것이 아니라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의기가 일어나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여 안동의진으로 달려가 김도화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에 합세해서 아장의 임무를 맡았다. 예안의진의 향산 이만도 의병장과 더불어 군무를 의논하여 능력과 신임을 받았으나, 고종이 아관파천을 하고 일제가 무력으로 의병을 강제해산 시키는 바람에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지으며 학림학당에서 인근 고을의 자제를 모아 글을 가르치며 농수 최천익 선생의 유고를 수집하여 ‘농수선생문집’속집을 간행하여 때를 기다렸다.
일본이 강제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고종의 밀지를 받은 정환직이 아들 정용기와 함께 영천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하였다. 의병전쟁은 전기·중기·후기로 나누는데 산남의진은 중기에 일어난 의병이다. 1907년 제1대 정용기 대장이 죽장 입암전투에서 전사하고, 제2대 정환직 대장도 체포되어 처형당한 후, 최세윤이 제3대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최세윤 의병대장이 활동할 당시, 일제는 헌병 6600명, 경찰 5000명으로 늘려 야만적인 살육 작전으로 의병을 초토화시켰다. 이에 맞서 최세윤은 결사적으로 항전했으나 1911년, 포항시 장기면 용동에서 피체되어 대구로 압송되었다. 대구지방재판소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경성형무소(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나라의 희망이 없음을 한탄하여 아내가 넣어주는 사식마저 거절하고 단식투쟁 끝에 1916년 49세 일기로 순국하였다.
최세윤 의병대장 가족은 당대 최고의 가치관인 충(忠)·효(孝)·열(烈)을 이루었다. 최세윤은 빼앗긴 나라를 찾으려다 순국하셨으니 ‘충’을 이루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아들 산두(1888~1912)는 일경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형벌에도 아버지의 행방을 함구하다가 24세에 옥사하였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않은 ‘효’를 실현한 것이다. 2017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윤영덕(1868~1917) 여사는 최세윤 의병대장의 부인인데, 남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어린아이를 업은 채 대구와 서대문형무소 주변에서 품팔이를 하여 사식을 올렸으나, 들여보낸 음식이 그대로 되돌아 나오자 남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뜻이 있음을 짐작하고, 명주옷을 미리 준비하여 남편이 순국하자 손수 염습한 주검을 포항 흥해까지 정성껏 모셔 와서 장례를 한 후,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남편을 위해 혼신을 다 하였으니 ‘열(烈)’을 이루었다고 회자 되고 있다. 최세윤은 부인 윤영덕 여사와 함께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사단법인 최세윤의병대장 기념사업회에서 2013년 의병대장의 일대기와 의병 활동을 중심으로 한 ‘산남의진 제3대 의병대장 최세윤’, 2021년 김일광 작가의 청소년 소설 ‘산남의진 의병장 최세윤’이 발행되었다. 매년 흥해읍에서 의병의 날을 기념하지만 포항시민과 흥해읍민들의 관심은 저조한 편이라 안타깝다. 수많은 의병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풍요로운 대한민국이 될 수 있었을까. 2024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최세윤, 그 정신은 길이 길이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이순영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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