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마음 가난한 세상에 시의 씨앗을 뿌려라

엄다경 시민기자
등록일 2024-12-12 18:47 게재일 2024-12-13 12면
스크랩버튼
지난달 올해 첫 눈이 내린 모습.

며칠 전 지인이 무심코 하는 말에 마음이 상했다. 자신이 주식으로 상당 금액의 손실을 본 것을 얘기하면서 나는 손에 잡아보지도 못했을 돈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닌데 가슴 한쪽이 아릿하게 아팠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이라 이루어놓은 것 없이 세월만 가나 싶어 허허로운 마음에 찬바람이 쌩하니 지나갔다. 결혼하고 전업주부로 아이 셋을 키우고 살았으니 통장이 여유로울 리가 없었다. 공무원 남편의 월급을 아끼고 아끼면서 살아온 날들. 이제 오십 중반의 아줌마인 내게는 시인이라는 가난한 이름 하나만 남았다.

전에 어느 유명 가수에게 당신에게 노래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했었다. 제법 알려지고 매니아층도 있는 그 가수는 자신에게 노래는 ‘젠장’이라고 했었다. 만족할 만큼 되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노래 없이는 살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안 되는 시를 끙끙대며 붙들고 있을 때면 그 가수의 ‘젠장’이라는 말이 참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쓰고 싶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시 쓰는 일과 참 일맥상통 하는구나 싶어서이다.

“시를 쓰니 세상에 빚 갚은 것이고 / 의지할 시를 자식처럼 키우니 저축 아닌가 / 그래서 나는 절로 웃음이 난다네 / 시시시(時視詩) 가득한 통장에 / 마이너스는 없다네 / 詩앗 뿌렸으니 세상에 보시하는 것이고 / 시 한섬 거두었으니 추수한 것 아닌가 / 그래서 나는 절로 웃음이 난다네 / 시시시 가득 찬 통장에 / 마이너스는 없다네 / 하늘은 모든 것을 가져가고 / 시라는 씨앗 하나 남겨주었다네 / 그래서 시 통장에 / 시인이란 없다네” - 천양희 ‘시(詩) 통장’

하지만 천양희 시인의 시를 읽고 깨닫는다. 가난한 나에게 통장이 있었구나. 시 통장이 있었구나. 미처 그걸 몰랐었다. 갑자기 힘이 불끈 솟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사유의 은행에 통장을 개설했었구나. 어설픈 시 한 편 쓰는 걸로 우주에 진 그 많은 빚도 갚고 든든히 의지할 자식처럼 저축까지 하고 있었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마치 까맣게 모르고 있던 상속 재산이라도 발견한 듯 마음이 들뜬다.

시 뿌리고 시 거두고 살며 은행에는 마이너스 없는 시 통장도 있으니 무엇이 두려우랴. ‘시시시(時視詩)’의 잔고가 가득 찬 종신토록 사용할 통장이 있으니 이제 쓸데없는 걱정은 거두고 살아야겠다. 세상이 내게 시 아닌 것 다 거두고 시의 씨앗만 남겼대도 내가 뿌린 씨앗이 어느 가슴에선가 발아하리라 생각하면 다른 즐거움 버리고 시에 발목 잡혀 사는 것도 그리 억울하지만은 않다.

/엄다경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사회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