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특별시리즈 다문화가정 ‘다름을 품은 사랑·행복한 동행’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족과 함께 있는 순간이었어요.”
베트남 출신 쩐티이엔피(46) 씨는 2006년 가을 가슴 가득 설렘과 불안을 안고 한국 땅을 밟았다. 대구 달서구에 자리 잡은 지도 벌써 19년. 베트남 껀터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던 그는 더 넓은 세상에서 자신을 키우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낯선 땅에 왔다.
글 싣는 순서
①우즈베키스탄 성아린 씨 “시끌벅적한 글로벌 우리 가족”
②중국 정준 씨, 날마다 ‘하하호호’·심심할 틈이 없는 3대가 함께 사는 가정
③베트남 쩐티이엔피 씨, “내 삶의 이유는 우리 가족•베트남 돌아갈 이유 없어”
④중국 오리리 씨, “K문화 좋아서 한국 며느리 됐어요”
⑤우즈베키스탄 이유진 씨, “조금 달라보이나요? 달라서 더 소중한 우리 가족”
쩐티이엔피 씨가 대구에 도착했을 때 남편 강석군 씨와 시어머니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쩐티이엔피 씨는 “처음 시댁에 왔을 때는 모르는 것이 많아 걱정이 됐다”면서도 “남편과 가족들도 모두 반갑게 맞이 해주는 모습에 감동 받았다”고 했다.
일년 뒤 딸 강수진(18) 양이 태어나고 쩐티이엔피 씨는 삶은 한층 더 밝아졌다. 쩐티이엔피 씨는 “생활이 넉넉지 못해 힘들었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때 정말 행복했었다”고 회상했다.
쩐티이엔피 씨는 시어머니와도 각별했다. 특히 시어머니가 해주신 잡채가 가장 맛있었다고 했다. 쩐티이엔피 씨는 “엄마(시어머니)는 저를 위해 정성스레 아침 식사를 차려주셨다”며 “모든 음식에 매운 고춧가루가 들어 있었는데 잡채는 맵지도 않고 녹색, 빨강, 흰색, 노란색으로 여러 야채가 뒤섞여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어가 서툴러 엄마(시어머니)가 ‘물 갖다달라’고 하셨는데 ‘문 닫아달라’고 하시는 줄 알고 문을 닫고 나갔다”며 “나를 기다리다가 엄마 입에 있던 약이 다 녹았다”며 부끄러운듯 미소를 지었다.
이어 “여전히 한국말을 잘 못하지만 엄마 눈만 봐도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면서 “마음이 통하는 사이가 됐다”고 했다.
쩐티이엔피 씨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편의 지병이 재발했고, 안타깝게도 치료가 늦어 2017년 세상을 떠났다.
남편을 떠나보낸 후, 친정 부모는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오라며 손을 내밀었다. 고향에서 교사 생활을 이어갈 수도 있었지만, 쩐티이엔피 씨는 시어머니와 가족, 그리고 딸을 위해 한국에 남기로 했다.
쩐티이엔피 씨는 “딸과 한국에서 잘 살고 싶었다. 남편이 없어 힘들었지만 그래도 베트남으로 가지 않았다”며 “베트남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냐고 물어본다면 못 갈 거 같다고 대답할 것”이라 말했다.
그러면서 “평일에는 딸을 어린이집과 학원에 보내놓고 밤 늦게까지 일했다. 공부방 원장님이 많이 도와주셨다”며 “엄마가 베트남 사람이라 딸 수진이도 한국말을 잘 못할까 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착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 초등학교 때 전교회장까지 맡았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2024년 3월 세상을 떠났다. 쩐티이엔피 씨는 “엄마가 병원에 계실 때 몸도 닦아 드리고 병수발을 들었다. 가족이니까”라며 "이제는 명절 음식을 혼자 만들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지만, 정작 엄마는 곁에 없다. 이제 엄마 힘 안 들게 해드릴 수 있는데…”라며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쩐티이엔피 씨는 가족이 함께 오순도순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시어머니가 가르쳐주신 것들을 항상 기억하고 있다. 남편과 어머니가 사무치도록 그립다”며 “딸에게 행복은 매우 단순하며 우리 곁에 있다고 알려줬다.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고 만족하는 방법을 알아야 된다고 가르친다”고 말했다.
쩐티이엔피 씨는 생계를 위해 일을 하느라 한국어 공부를 잘 못했다. 지금은 복지관에서 세계문화지도사 자격과정 수업을 듣고 있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공부를 해 한국에서 다시 교사 일을 하고 싶다는 꿈도 생겼다.
하늘나라에 간 남편에게 하고픈 말을 묻자 “다시 만나면 수진이 예쁘게 키워 대학 공부까지 다 시키고 시집도 보냈다고 자랑할 것”이라며 “열심히 살았다는 칭찬을 받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장은희기자 jangeh@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