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11일 KIA 타이거즈와 LG 트윈스의 프로야구 와일드카드 결정전 2차전, 0대 0으로 팽팽한 9회말 트윈스가 원아웃 주자 만루의 기회를 잡았다.
3루 주자가 홈을 밟으면 그대로 경기가 끝나는 상황. 김용의가 좌중간으로 날린 타구는 의심할 여지없이 끝내기 안타로 보였다. 혹 외야수가 잡는다 하더라도 3루 주자의 태그업 득점을 막을 가능성은 없다.
보통 이런 경우 외야수들은 공을 포기한다. 잡아봤자 경기는 끝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이거즈 중견수 김호령은 수십 미터를 전력질주한 끝에 공을 잡았다. 그러고는 혼신을 다해 송구했다. 타이거즈는 탈락했지만 김호령의 눈물겨운 투혼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2015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꼴찌로 지명된 김호령의 선수 경력은 보잘 것 없다. 규정타석을 채운 게 단 한 시즌에 불과하며 통산 타율도 2할4푼밖에 되지 않는다. 뛰어난 외야 수비와 주루 능력을 가졌음에도 공격력이 약해 만년 후보다. 나이가 들며 경쟁력을 점차 잃어 2군에서 보내는 날이 많아졌다. 불성실하고 거들먹거리기라도 하면 차라리 미워할 텐데 누구보다 성실하고 묵묵하며 바른 인품을 가진 선수라 팬들에겐 아픈 손가락이다. 죽어라 공부하는데 고시에서 매번 낙방하는 막내아들 보는 마음이랄까.
150억원의 사나이 나성범, 경기 출장이 언제나 보장된 최원준, 2024년 우승에 역할을 한 이우성, 백업 선수로 나름의 팬덤을 거느린 박정우 등이 외야를 점거하는 사이 김호령은 자리를 잃었다. 점차 팬들의 기억에서도 지워지던 중 기회가 왔다. 나성범이 올해도 부상으로 ‘유리몸’이라는 오명을 쓴 채 이탈했고, 이우성과 최원준은 ‘철밥통’이라 할 만큼 감독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음에도 처참한 부진을 거듭하다 2군으로 내려갔다. 이들 외에도 김도영, 김선빈, 윤도현, 이의리, 곽도규, 황동하 등 주전들의 부상이 겹치면서 2군 선수들이 1군에 대거 콜업될 때 오선우, 김석환, 고종욱, 박민 등과 함께 김호령도 올라왔다. 타이거즈의 2군 경기장이 전남 함평에 있는 관계로 팬들은 이들을 ‘함평 타이거즈’라고 부른다.
주전들이 뛸 때 10개 팀 중 9위로 추락해 있던 팀은 2군에서 올라온 선수들의 믿을 수 없는 선전에 힘입어 6월 승률 1위를 기록하며 단독 2위로 올라 왔다. 이 기간 동안 ‘함평 타이거즈’는 팬들의 심금을 울리는 장면을 연일 보여줬다. 만년 유망주 꼬리표를 뗀 오선우의 꾸준한 활약은 물론 중요한 경기 막판 승부처에 대타 역전 홈런을 친 김석환, 타석마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어떻게든 출루해내는 이창진 등이 그랬다. 고종욱은 더욱 드라마틱하다. 매 경기 매 타석마다 간절함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6월 29일 경기에서 634일만에 3안타를 친 그는 수훈선수 인터뷰 도중 임신한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다 눈물을 펑펑 쏟았다.
가장 뭉클한 건 역시 김호령이다. 7월 5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 첫 타석에서 올 시즌 첫 홈런을 치더니 다음 타석에서는 프로 데뷔 첫 만루홈런을 치며 생애 처음 한 경기 두 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두 번의 홈런 장면에서 다른 선수들이 다 하는 그 흔한 ‘빠던(타격 후 배트를 요란하게 던지는 쇼맨십 행위)’이나 화려한 세리머니도 없었다.
늘 그렇듯 열심히 베이스를 돌다가 타구가 담장을 넘는 걸 확인한 순간 자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수줍게 기쁨을 표현했다. MVP로 선정돼 인터뷰를 하면서도 달변은 아니지만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과 겸손함을 눌러 담아 소감을 말했다. 그날 많은 타이거즈 팬들은 눈물을 흘렸다. 가족이나 친구도 아닌 남이 잘 되기를 이처럼 바란 적이 없다고들 했다. 착하고 성실하고 겸손하고 묵묵하고 헌신적인 사람이 오랜 시간을 견뎌 마침내 빛을 보는 서사를 김호령은 우리에게 보여줬다.
주전 선수들이 돌아오면 김호령을 비롯한 ‘함평 타이거즈’는 다시 2군으로 내려갈지 모른다. 하지만 2025년 여름, 이들이 보여준 절실함과 감동의 야구는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별 감흥 없이 함부로 흘려보낸 한 경기가 그들에겐 인생을 건 도전이었다. 소중히 생각지 않고 마땅한 권리인양 여겼던 한 타석이 그들에겐 평생 꿈꿔 온 순간이었다. 김호령의 수줍은 미소를 계속 보고 싶다. 야구 앞에 진실하고 노력 앞에 정직하며 기회 앞에 간절한 사람이 잘 되는 걸 계속 보고 싶다.
/이병철(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