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괜찮다. 나도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신사역에서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려고 기다리던 중 광고판에 호랑이 캐릭터와 함께 이런 문구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강의가 끝나고 왜인지 모를 실의에 빠져 있는 때였다. ‘쓸데없이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아. 누가 누굴 가르친담. 내가 괜히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 건 아닐까?’
몇 년간 나를 짓누르는 무력감에 무거운 짐이 어깨와 등에 더해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저 문구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따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괜찮다. 나도 호락호락하지 않아. 나도 호락호락하지 않아.
출처가 궁금해서 알아보니 이미 밈으로 돌아다니던 문장을 가수 태연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려 화제가 된 것이라고 한다. 귀여운 호랑이 캐릭터와 그 말이 무슨 관계가 있고 또 무엇을 광고하려고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이미지와 문장은 내게 분명하게 남았고, 스스로 약간의 동력이라도 찾을 수 있게 되었으니 광고와 무관하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사실 나는, 제법 호락호락한 편인 것 같다. 부탁을 받으면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나쁜 말을 들으면 곧장 나쁜 말로 되받아치지 못한다. 외양이라도 좀 강해지고 싶은데 그건 태생적인 부분이라 어쩔 수가 없다. 키와 덩치가 그닥 크지 않은데 얼굴도 동그래서 좀 만만하게 생겼다.
심지어 목소리도 낮고 음성의 크기 또한 크지 않다. 전반적으로 별다른 포스가 없다. 스스로 위축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어디에서든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바로 쭈구리가 된다. 사람과 닿는 것도 무서워서 지하철이나 버스 옆자리에 누군가 앉으면 있는 힘껏 몸을 말곤 한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잘 안 된다. 언제나 내가 제일 약하고 볼품없어 보인다.
이런 나지만 의외로 오프라인에서 하는 것들을 즐긴다. 특히 콘서트. 아무래도 좌석을 선호하지만 스탠딩도 아주 싫어하지는 않는다. 일어서서 뛰면서 함께 해야 더 즐거운 공연도 있다. 락이 그렇다. 엊그제 일본 록(J-Rock) 밴드 원오크락(ONE OK ROCK) 내한 콘서트를 보러 친구들과 잠실실내체육관에 갔다.
전부터 좋아하던 밴드라 기대가 됐다. 동시에 걱정도 됐다. 노래가 하나도 쉬운 게 없는데 이게 다 라이브가 되는 건가? 공연장 음향 상태가 안 좋으면 어떡하지? 나… 밖에 오랜만에 나왔는데 사람들 속에서 음악에 집중할 수 있을까? 그렇게 양가적인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원오크락은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등장했다. 그리고 오프닝 첫 곡으로 ‘Puppets Can‘t Control You’를 했다.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직전의 걱정이나 고민은 모두 기우라는 걸 알았다. 전율이 일었다. 두 번째 곡으로 한 건 ‘The Beginning’. 두 곡만으로도 분위기는 완전히 달아올랐다. 나도 열심히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질렀다. 앞이나 옆에서 종종 작은 나의 영역에 침범해서 리듬에 몸을 맡겼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그 순간 나는 누구든 허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저 원오크락의 음악 안에 빠져 노는데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한 시간 아니 두 시간쯤 더 해도 좋았을 테지만 모두가 예상했을 앵콜곡 ‘We Are’를 마지막으로 공연은 끝났다. 친구들은 나와 같은 감정이 되었는지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보컬은 말할 것도 없이 끝내줬고, 악기들 또한 합과 움직임이 엄청났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결속력 같은 게 보이는 듯했다. 나도 저런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잠깐이고,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그리 쉽게 바뀔 수 없다.
인간은 나약하고 나는 더 나약하다. 공연장 밖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치이고 자꾸 움츠러드는 나 자신을 보면서 호락호락이라는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내 안에 원오크락이 준 에너지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호락호락. 하지만 호락호락도 락이 아닐까. 아니야. 확신을 갖자. 내가 설령 호락호락한 사람이라고 해도, 락처럼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심지어 락이 두 번이나 있는걸. 그래서 작지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호락호락도 락이다.
가방을 안고 대중교통을 조용히 타고 있는 내 이어폰에서는 늘 락이 나오고 있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나의 전투력은 이미 최고치에 달했다. 싫은 소리를 들어도 또 별말 못하겠지만 뭐 어떤가.
내 안에서는 다시 내가 짱이 되었다. 정말 강해지지는 못할지라도 너무 약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나에게 호락호락한 정도라면, 딱 괜찮을 것 같다.
/구현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