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위기 앞에서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듯 보인다. 그러나 포성(砲聲)이 멎은 자리, 혹은 전투의 한복판에서도 오래된 신분의 질서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공동의 적 앞에 서 있어도 인간 사회의 위계(位階)는 여전히 작동한다. ‘신분·출신 차별과 갈등’은 어느 한 시대, 어느 한 민족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쟁과 신분의 묘한 함수관계가 기록으로 남은 첫 사례는 고대 로마다. 기원전 494년, 귀족(파트리키)이 정치를 독점하던 로마에서 평민(플레브스)은 전쟁에는 동원되면서도 정치적 권리는 거의 없었다.
결국 평민들은 도시를 떠나 ‘성산(星山, Mons Sacer)’으로 집단 철수했다. 이른바 ‘평민 철수’(Secessio Plebis) 사건이다. 외적과 싸워야 했던 로마는 병력의 다수를 차지한 평민의 이탈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귀족은 결국 양보했고, 평민 보호관(Tribunus Plebis) 제도가 탄생했다. “전투는 평민이, 통치는 귀족이”라는 구조에 대한 첫 집단 저항이었다.
성경에도 비슷한 긴장이 등장한다. 예수는 갈릴리 어부들, 세리(稅吏) 마태, 열심당원 시몬처럼 서로 배경이 다른 이들을 제자로 불렀다. 특히 세리는 로마에 협력해 세금을 걷던 직업으로, 당시 유대 사회에서 배척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는 그들을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였다. 혈통과 직업, 종교적 배경을 넘어선 선택이었다.
로마 말기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또 다른 장면을 보여준다. 그의 갈리아 원정군은 주로 평민 병사들로 구성했다. 카이사르는 병사들과 땅바닥에서 함께 자고, 음식을 나누며 고난을 공유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에 카이사르는 ‘병사들과 같은 행군 속도를 유지했고 눈·비를 가리지 않고 야영했으며, 병사 개개인의 이름을 기억하며 포상에 후했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긴장은 조선 말 항일 의병 안에서도 나타난다. 의병은 ‘나라를 위해 싸운 민중의 군대’로 불리지만, 내부에는 양반·평민·천민의 구분이 여전히 작동했다. 을미·정미의병을 이끈 다수는 유학자 출신이었고, 실전 전투의 핵심은 포수·사냥꾼·상민이 담당했다. “전쟁은 포수가 하는데, 공은 선비가 가져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896년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유인석(柳麟錫)의 부대에서도 산포수(山砲手) 세력과의 긴장이 있었다고 전한다. 유교적 명분과 엄격한 군율을 중시한 지휘 방식, 그리고 매복·기동전을 선호한 포수들의 실전 감각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했다.
제천 관아 점령 이후 방어 전략을 둘러싼 이견이 누적되며 일부 세력이 이탈했고, 이는 일본군의 반격 국면에서 약점으로 작용했다.
반면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은 실력으로 인정받은 인물이다. 그는 양반 중심 의병 구조 속에서도 전과(戰果)를 세우며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더 나아가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는 신분의 벽이 한층 낮아졌다. 김좌진 휘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는 노비·머슴 출신 인물들이 중책을 맡았고, 이는 청산리 전투 승리의 동력이 됐다.
오늘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차별과 배제는 비상식적이고 답답한 일이다. 그러나 당시 사회의 세계관과 질서 속에서 보면, 그것은 오랜 관습과 신념이 쉽게 무너지지 않았던 결과이기도 하다. 전통을 지키려는 의지와 새로운 질서를 향한 요구가 한 공간에서 충돌하는 순간, 갈등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위기 속에서 우리는 과거의 질서를 끝까지 붙들 것인가, 아니면 공동의 대의를 위해 경계를 허물 것인가. 로마의 성산(聖山) 몬스 사케르, 갈릴리의 어부들, 루비콘 강, 그리고 제천의 의병진은 서로 다른 시대에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In the midst of crisis, will we continue to cling to the old order?”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