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부석사 관광지 조성 부지 발굴 현장을 가다 <4> 당나라 여인 선묘, 연정을 넘어 호법신이 되기로 서원한 고결한 희생 1967년 고고학 조사로 드러난 무량수전 아래 석룡, 전설을 현실로 깨우다 조선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가 증언하는 기이한 바위, “틈 사이로 실이 지났다“ 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구도적 동반자, 의상대사와 선묘가 일군 ‘화엄의 꽃‘
1967년 5월 6일 부석사 무량수전 앞뜰에서는 1300년 전의 전설을 찾는 작업이 시작됐다. 그곳에 묻혀 있다는 석룡을 찾기 위한 작업이었다.
7일 오후 전설로 내려오던 석룡이 모습을 드러내며 1300년의 꿈을 깨웠다. 부석사 창건 설화에는 의상대사의 구법(求法)과 선묘 낭자의 고결한 사랑이 숨어 있다.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와 그를 연모했던 당나라 여인 선묘 낭자의 이야기다.
의상대사가 불법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에 머물 당시, 낭자 선묘는 대사의 거룩한 풍모에 반해 깊은 연정을 품게 됐다.
그러나 대사가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하자, 선묘는 개인적인 사랑을 넘어 그가 무사히 불법을 깨우치고 신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호법신이 되겠다는 장엄한 서원을 세운다.
10년의 공부를 마치고 의상이 귀국길에 오르자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황룡으로 변신한다. 거친 풍랑으로부터 대사의 배를 호위하며 무사히 신라 땅에 닿게 했다.
676년, 의상대사가 봉황산 기슭에 화엄의 가르침을 펼칠 사찰을 세우려 했으나, 500여 명의 이교도 무리가 이를 거세게 방해했다. 이때 용이 된 선묘가 나타나 커다란 바위를 공중으로 띄워 올리는 신통력을 발휘하자 겁을 먹은 무리가 흩어지며 비로소 사찰이 세워졌다.
공중에 뜬 바위의 전설에서 부석사(浮石寺)라는 이름이 유래됐다. 역사적 의미를 보면 선묘 낭자의 이야기는 단순한 설화를 넘어 한 수행자가 진리를 세우기 위해 겪는 고난과 이를 지탱해주는 지극한 헌신을 상징한다.
현재 부석사 무량수전 뒤편에는 선묘를 기리는 선묘각과 전설 속의 부석(浮石)이 나란히 자리해 천년의 약속을 증명하고 있다.
1967년 고고학 조사 당시 실제로 무량수전 앞 마당 석등 좌측에서 무량수전 좌측 기단 방향으로 용의 비늘 모양처럼 다듬어진 거대한 돌 줄기가 발견돼 전설이 단순한 허구가 아님이 밝혀졌다.
석룡은 지표면에서 깊지 않은 30-50cm 정도의 깊이에 묻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선묘는 세속의 인연을 넘어선 헌신의 후원자, 불법을 수호하는 화룡의 화신, 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구도적 동반자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선묘가 신통력을 발휘해 큰 바위를 띄웠다는 부석(뜬돌)은 부석사의 정체성이자 가장 핵심적인 상징물이기도 하다. 부석은 위 아래 바위 사이에 미세한 틈이 있어 서로 붙어 있지 않고 떠 있다고 해서 부석이라 불린다.
조선시대 기록에 따르면 바위 사이에 실을 넣고 당기면 걸림 없이 지나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기록은 1751년에 편찬된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이 쓴 인문 지리서인 택리지의 팔도총론 경상도 편에 남아 있다.
다른 기록에는 조선 중기의 관찬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실 이야기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선묘 낭자가 바위로 변해 도둑을 물리친 창건 설화와 선묘정이라는 우물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실려 있어 택리지와 함께 부석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일본 교토에 소재한 고산사에는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신라로 돌아오는 과정에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의상대사를 호위하고 있는 내용을 담은 화엄종조사회전(華嚴宗祖師繪傳)이라는 두루마리 그림을 보관하고 있다.
부석사를 배경으로 한 많은 시와 글, 가운데 몇 편을 소개한다.
옥처럼 높이 솟아 절 문에 기대어 섰는데 /스님은 의상대사 지팡이가 신령한 뿌리로 변한 것이라고 하네 /지팡이 머리에 응당 조계의 물있으니 /천지간 비와 이슬의 은택 빌리지 않으리라-(퇴계 이황의 부석사 선비화)
「취원루 머리에 비단장막 넓직한데 /가을날에 내가 와서 난간에 의지했네 /거기에 있는 스님이 분제국을 가르키면서 /웃으며 이르기를 인간에는 행로가 어렵다 하네」 /「푸르고 푸른 원기가 동남에 쌓이니 /태백과 소백의 큰 봉우리 서로 엉키어 들쭉날쭉하도다 /흩어져 뻗어 내린 팔다리 같은 지맥들 여러 봉우리 어지러워 /온전하게 차가운 빛을 의상암에 실어주네」-주세붕선생의 무릉잡고(武陵雜稿) 제3권, 부석사(浮石寺) 4수 중 1, 2수.
「마당 북쪽에 하나의 고찰이 있어 무량수전이라(현판을)걸어 놓았는데 세상에 전하기로는 공민왕의 친필이라 하였다. /몇 군자를 이끌어 북쪽으로 안양문을 나와 다시 취원루에 오르니 이 누각은 앞으로 대지에 임해있고 눈은 하늘에 다하여 멀고 어렴풋한 여러 산들이 모두 여기로 조회하러 달려오는 듯하였다」-오두인 (양곡집)3, 부석사 기문 중
/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