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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양성평등문화 확산 앞장설 풀뿌리 단체 찾아요

“‘여성의 권리 향상’을 위해 활동해 온 단체들을 지원합니다”경북여성정책개발원(원장 최미화)은 여성의 사회참여 기회를 확대하고, 지역의 양성평등문화 확산에 앞장 설 양성평등 풀뿌리단체를 공모한다.풀뿌리단체 지원사업은 양성평등에 대한 관심과 활동의지가 있는 소모임을 육성해 경북의 양성평등 의제를 발굴하고 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해 지난해부터 시작됐다.공모자격은 경북도에서 활동할 3인 이상으로 구성된 소모임이며, 공모분야는 △양성평등 관련 연극활동(찾아가는 연극공연, 아이들과 함께하는 인형극, 시나리오 제작 등) △여성·가족 권익증진 및 양성평등문화 확산활동(양성평등테마 학습·문화활동, 양성평등 어린이 그림책 교육활동, 양성평등교육 콘텐츠 개발활동, 도민 양성평등교육 및 놀이, 여성·가족 역량강화사업 등) 분야다.공모신청은 4월 3일까지 경북여성정책개발원 홈페이지 개발원소식란에서 지정양식을 다운로드 받아 이메일(happyaudri@forwoman.or.kr)로 접수하면 된다. 선정된 단체는 200만원이 지원되며, 5월부터 10월까지 사업을 수행하게 된다.최미화 경북여성정책개발원장은 “지난해 3개의 풀뿌리 소모임을 지원해 여성의 사회참여 기회를 확대하고, 양성평등 의제 확산 기반을 마련하는 성과를 거뒀으며, 경북 여성들의 호응을 받았다”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도내 풀뿌리단체와 협력을 통해 양성평등문화를 확산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윤희정기자

2020-03-10

하룻밤에 써 내려간 단편 ‘나의 어머니’ 1등 당선

백신애는 영천 출신의 소설가이자 여성 운동가이다. 32세로 요절한 그녀는 1929년 조선일보에 하룻밤 만에 써내려간 단편 ‘나의 어머니’를 응모한 것이 1등으로 당선되면서 신춘문예 출신 첫 여류작가라는 기록을 세웠다. 불꽃같은 지성을 지닌 여성계몽가로 30년대 저항문학의 정수를 보여준 백신애는 경상북도 공립학교 여교사 1호이기도하다. 대구사범 강습과를 수료하고, 1924년 천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발령받은 백신애보다 더 빨리 교직에 발을 들여놓은 사례는 아직 보고되지 않고 있다. 아명이‘무잠’ , ‘무동’ , ‘술동’등이었던 백신애는 유복한 부잣집 외동딸로 태어났지만 호사를 누리기보다 일제의 핍박으로 짓눌리고 힘든 이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시인의 감성을 타고난 문학가다. 충분히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데도 그보다는 주변의 아낙들이 가부장적 관습에 짓눌리는 모순의 개선을 원했고,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도록 하기 위해 헌신했다.식민지 시대 저항문학가경북공립학교 여교사 ‘1호’부잣집 외동딸의 호사 누리기보다일제 항거와 여성 운동에 앞장△유복한 가정에서 총명했던 어린시절1908년 5월 20일 영천군 영천읍 창구동에서 태어난 백신애(白信愛·1908∼1939)의 아버지 백내유는 미곡상과 정미소를 경영하는 영천에서 알아주는 부자였다. 어머니 이내동은 영천 양반에다 영남 갑부인 규수였으며 남다른 모성애로 어려서 병약했던 딸을 자애롭게 받아들이고, 정성을 다해 양육하며 인생 끝까지 따뜻하게 돌봐준 훌륭한 어머니였다. 어머니 이내동은 오월의 창공이 저문 어느날 밤, 비둘기 태몽을 꾸고 백신애를 가졌다. 비둘기 태몽은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를 말한다더니 백신애는 소녀천재라고 소문이 날 정도로 영리했다.하지만 백내유는 허약한 딸을 보호하고자 보통학교 정규 교육 대신 6,7세 때부터집에서 독선생을 들여 한문을 익히게 하고, 사서를 가르쳤다. 어려운 집안을 단박에 일으켜 세울 정도로 명석하고 부지런했던 백내유는 천성적으로 병약한 딸이 바깥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꺼렸다. 완고한 면이 있어 신학문도 접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때문에 백신애의 공부는 한학을 하는 선비인 이모부 김 씨가 주로 맡아서 가르쳤다. 위로 5살 많은 오빠 백기호도 백신애에게 큰 영향을 줬다.백기호는 대구고보(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중앙대학교에 다니면서 몽양(夢陽) 여운형에게 영향을 받아 진보 좌파적 성향을 지닌 적극적인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백기호는 동생에게 일본말을 가르치고 강의록도 보여줬다. 오빠가 읽던 탐정소설과 고대소설도 백신애가 받아 읽을 정도로 백기호의 사상과 지식을 그대로 습득하기에 이른다.△짧은 교사생활, 그리고 여성운동에 뛰어들다1922년 백신애는 집안의 보호와 안정으로부터 스스로 뛰쳐나갈 것을 결심한다. 아버지 몰래 여학교에 지원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에 의해 곧 발각되고 여학교 대신 사범학교에 들어가는 것으로 합의한다. 그렇게 경북사범 강습과를 1년 만에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백신애는 1924년 영천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발령났다. 도내 공립학교 여교사 1호다.백신애는 1924년 5월 10일 결성된 조선여성동우회와 1925년 1월 21일 결성된 경성여자청년동맹 등에 가입해 운동가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 두 여성단체에 가입한 일은 백신애의 발목을 잡았다. 1927년 1월 22일 좌익 여성단체 가입이 탄로나면서 교직에서 강제 퇴직당했던 것이다. 일제침략정책의 충복인 훈도 노릇을 하기 싫었던 백신애는 미련없이 교직을 떠났다. 자유롭게 서울로 올라간 백신애는 본격적인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상경 직후 바로 조선여성동우회, 경성여성청년동맹의 상임위원을 맡은 백신애는 1927년 2월 서울 천도교회관에서 열린 경성여성청년동맹 2주년 기념식을 거의 혼자 손으로 다 치뤄냈다. 치밀하게 준비했고, 행사마다 성공했다. 서울 뿐 아니라 지방을 다니면서도 순회강연을 하면서 사회개혁을 앞당기기 위해 열정을 쏟았다. 목우(牧牛) 백기만이 주선한 김천 강연에서 백신애의 활약은 대단했다. 백기만은 편저인‘씨 뿌린 사람들’에서 경북이 낳은 문인 중에서 고월, 육사와 함께 백신애를 혁명독립지사라고 적고 있다.부잣집 외동딸에게 보장된 편안하고 안락한 길을 포기하고, 피지배 민족의 고통과 현실적 모순을 여성계몽으로 극복하기 위한 백신애의 노력은 계속되었다.백신애백신애가 가입한 조선여성동우회는 유명한 여성혁명가 정칠성 등을 낳은 단체로 근우회 등과 함께 본격 여성운동을 펼친 단체다. 조선여성동우회는 초창기에는 노동부인을 위한 음악회, 교양강좌 등 온건한 활동을 하다가 차츰 서민여성들의 인권옹호, 자유연애와 성의 해방까지 외치는 조직으로 나아갔다.조선여성동우회와 경성여성청년동맹을 통해 한창 여성운동에 주력하던 백신애는 1927년 돌연 시베리아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왜 혹한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야했는지 그 이유는 모른다. 다만‘백신애 소설연구’를 쓴 계명대학교 민현기 교수는 혁명의 땅으로 명명된 그곳을 직접 밟아보려는 백신애의 결심 그 자체가 시베리아행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추정한다. 여성 해방과 민족 해방을 위한 투쟁의지를 더 높이려는‘계획된 고행’이 바로 시베리아행이었다는 분석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자료제공= 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20-03-09

경북도 양성평등 남녀모니터링단 모집

경북여성정책개발원(원장 최미화)은 여성가족부 수탁사업으로 지역 양성평등 환경 조성 사업을 추진한다.전액 국비로 운영되는 경북양성평등센터가 주관하는 이 사업은 지역정책 모니터링과 양성평등 교육 및 문화 사업의 2개 영역으로 구성된다.지역정책 모니터링 사업으로는 시설 및 공간에 대한 양성평등 관점 모니터링단을 운영한다.교육 및 문화 사업으로는 △보육·유치원교사를 위한 찾아가는 양성평등교육 △양성평등 활동가 육성을 위한 별반(차별반대) 운영 △양성평등 토크콘서트와 토론회를 열 양성평등 경북 알리오 등 3개 세부사업으로 짜여졌다.양성평등 경북도민 모니터링단은 20명 내외의 남녀도민으로 구성되며, 공간 및 시설에 관한 양성평등 관점 역량강화 교육을 받는다.참여 신청은 http://naver.me/5Ss3SY2j에서 신청서를 작성해 15일까지 제출하면 되며, 선정된 모니터링단에게는 활동비가 지급된다. 교육 및 문화 확산에 관한 3개 세부사업 가운데 양성평등 강사단 별반(차별반대)은 지난해 기본과정에 이어 심화과정이 진행된다.보육·유치원교사를 위한 찾아가는 양성평등교육은 각 기관별로 참여 신청을 받아 교육을 실시하며, 양성평등 경북 알리오 사업 중 토크콘서트는 9월 중 개최 예정이다.최미화 경북여성정책개발원장은 “경북도의 실질적 양성평등 문화 정착을 위해 지역민의 역량을 강화하고, 현실적 모순을 개선하겠다”고 말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3-08

1955년 ‘미망인’ 이후 1997년 화려한 컴백

남편 이보라는 1954년 6월, 산후 한 달이 막 지난 박남옥 앞에 시나리오를 던져줬다. 박남옥은 남편의 시나리오로 16㎜ 영화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35㎜ 영화가 쏟아져 나오던 때라 박남옥이 16㎜ 영화를 제작하려고 한 것은 제작비를 줄이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박남옥은 총 제작비 480만원 가운데 언니에게 280만원을 빌리면서‘자매영화사’를 차렸다.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출연 배우들도 대부분 박남옥이 영화일을 하면서 친분을 맺었던 사람들로 캐스팅했다. 스태프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애초부터 적은 돈으로 시작한 영화인지라 이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그녀가 겪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돈이 있으면 영화를 찍었고 돈이 떨어지면 촬영을 중단하고 돈을 구하러 다녔다. 마침 시작된 장마로 촬영은 자꾸 늦어졌고, 출연자나 스태프가 나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끝날 것 같지 않던 촬영은 6개월이나 걸려 끝났다. 그러나 촬영이 끝나자마자 엄마 등에 업혀 날마다 촬영현장을 지켰던 딸 경주가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딸에 대한 미안함과 자책감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어렵사리 촬영이 끝나고 영화 녹음 작업이 남았다. 1954년 12월 18일 중앙청에 있던 녹음실을 방문했다. 그때 그녀는“16mm 영화라 안된다” , “여자라 재수가 없다”면서 온갖 푸대접을 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녹음을 끝내고 나니 이번에는 개봉할 영화관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여성감독이 만든 영화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었다. 역시 딸 경주를 업고 영화 제작본이 든 궤짝을 들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닌 끝에, 겨우 1955년 4월 영화를 개봉할 영화관(서울중앙극장)을 구할 수 있었다. 러나 서울중앙극장에서 개봉한 영화‘미망인’은 안타깝게도 4일 만에 막을 내렸다. 35㎜ 영화의 홍수와 여성감독이 만든 영화에 대한 편견이 빚어낸 명백한 흥행실패다. 하지만‘미망인’은 당시 사회문제로 대두됐던 전쟁미망인을 소재로 여성의 갈등과 욕망을 과감하면서도 절제 있게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평론가와 관객들 사이에서 화제를 불러 모으기도 했다.“죽을 고비를 넘기고‘미망인’을 만들었다. 목숨이 둘이고 셋이면 또한다. 그렇지만 목숨이 하나니 하나로 끝났지.”우리나라 영화 한 편을 만들면서 박남옥은 거의 기진했던 것 같다. 영화에 대한 열정과 자신의 패기를 믿고 시작한 영화지만 여성에게 허락된 것이 거의 없던 시절, 영화를 만드는 일은 목숨을 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미망인’을 끝내고도 영화계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던 박남옥이지만, 그 뒤로 다시는 메가폰을 잡지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 목숨이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최초의 여성감독’으로 돌아온 박남옥일찍이 영화와 사랑에 빠졌던 박남옥은 결혼은 절대하지 않을 거라며 부모 애를 태웠다. 그랬던 그녀가 이보라와 결혼을 한데는 남편의 열렬한 구애도 구애지만 부모에게 덜 미안한 딸이 되고 싶었던 이유가 컸다고 한다. 그러나 여성에게 아내와 어머니라는 이름만을 허락한 시대를 거부하고‘여성감독 박남옥’이라는 이름으로 살기를 희망했던 그녀에게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을 것 같다.영화‘미망인’이 상영된 이듬해인 1956년, 박남옥은 남편과 이혼하고 딸 경주를 자신이 키우기로 한다. 그 뒤로도 박남옥은‘시네마팬’이라는 월간 영화잡지를 창간해 해외화제를 취재하는 등 영화계를 떠나지 않았으나 1957년 아버지의 권유로 둘째 형부의 회사인 동아출판사에 입사하면서 결국 영화계를 떠나게 됐다고 한다.단 한편의 영화만을 남기고 잊혀졌던 박남옥이 다시 돌아온 것은 1997년 제1회 서울국제여성화제에서다. 이 영화제에서‘미망인’은 개막 초청작으로 상영됐고, 박남옥은‘최초의 여성감독’으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오랫동안 기억되지 못했던 그녀가 이 영화제를 통해 새롭게 조명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한국영화계에서 여성영화인들의 활약이 그만큼 뛰어났고 그 역량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제1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는 최초의 여성감독인 박남옥 감독을 기리는‘박남옥 영화상’을 신설했는데, 애당초 박남옥이‘최초의 여성감독’이라는 영예를 안기 위해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었으나, 이제 새로운 길을 개척한 고난에 대한 보상이 후배 여성영화인들의 활약에 힘입어 제대로 주어졌다. 1992년, 박남옥은 일찌감치 유학길에 오른 외동딸 경주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신문을 보면서 일상을 보내고 있으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노인들이 아름답게 늙어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녀가 세상에 남긴 영화는 단 한편뿐이었지만 그녀는 늘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내놓지 못한 미완의 영화들이 그녀의 아쉬움으로 남아있는 것 같지는 않다. 멀찍이 서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나이의 노감독은, ‘100m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한 번도 옆을 보고 딴 생각을 한 적이 없던’오로지 영화에 미쳐 있었던 한 시절을 떠올리면서“유감없지, 내 지난날에….”라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자료제공=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20-03-02

경북지역 여성 농어업인 친화 정책 필요

“경북 지역 여성농어업인들의 복지증진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여성친화 농어업정책이 필요합니다”(재)경북여성정책개발원(원장 최미화)은 최근 여성농어업인들이 체감할 수 있는 정책에 대한 요구가 증가함에 따라‘여성농어업인 복지 향상을 위한 정책방안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먼저 2018 여성농업인 실태조사(농림축산식품부) 경북지역 데이터 분석 결과, 농업·농촌에서 여성농업인으로서 고충사항은 가사와 농사일 병행의 어려움이 49.4%로 1순위로 나타났고, 농사일에서의 체력 부족 33.5%, 농기계 사용의 어려움 6.3%, 시설 사용의 어려움 4.4%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또한, 여성농업인을 위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는 여성농업인의 가중한 노동부담 경감이 24.3%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고, 여성농업인을 위한 복지시설 확충 및 복지제도 확대 21.4%, 여성농업인의 경제적·사회적 지위 향상 17.6%, 여성농업인이 농산물가공, 유통, 농촌관광 등으로 진출하도록 기술과 자금 지원 14.1%, 농촌지역 보육 및 교육시설 확충 8.7%, 여성농업인을 위한 정보화, 마케팅 전문 경영교육 강화 7.8% 등의 순이었다.특히, 여성농업인을 위한 정책, 제도 및 시설 인지도를 살펴본 결과, 모든 정책에서 30% 이상의 인지도를 보인 제도는 없었다.한편, 경북도내 여성어업인 30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성어업인 실태조사와 여성어업인 의견수렴 결과에 따르면, 여성어업인 역량 강화를 위해 필요한 정책은 여성어업인 전문성 향상을 위한 기술교육 및 훈련 지원이 1순위(28.7%)로 나타났고, 여성어업인 일손 돕기 지원 21.1%, 여가 및 문화활동 활성화를 위한 바우처 제공 17.2%, 여성어업인 단체의 설립 및 활성화 지원 8.6%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또한, 어업에 종사하면서 겪는 어려움으로는 체력 및 건강상의 문제가 49.7%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고, 일과 가정생활을 함께 해야 하는 어려움 19.2%, 어업의 위험성과 안전문제 11.0%, 어업에 대한 지식 및 정보의 부족 7.0% 등의 순으로 응답했다.여성어업인을 위해 시급히 해결돼야 할 과제로는 여성어업인 경제적·사회적 지위 향상이 28.8%로 가장 많았고, 여성어업인의 가중한 노동 부담 경감 22.5%, 복지시설 및 복지제도 확대 18.6%, 안전한 어업 환경조성 16.5% 등의 순으로 제시됐다.이번 보고서 연구책임자인 진혜민 연구위원은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여성농어업인 복지 향상을 위한 정책과제를 제안했다.여성농업인 복지 향상을 위한 과제로는 첫째, 여성농업인 당사자의 정책 인지도 향상 및 서비스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여성농업인 정책알림이 활성화와 정책가이드북 발간을 제안했다. 둘째, 공동경영주(공동경영체) 등록 확산 릴레이 캠페인이다. 여성농업인의 직업적 권리 증진과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을 위해 공동경영주 등록은 매우 중요하며, 공동경영주 등록 확산을 위한 온-오프라인 릴레이 캠페인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셋째, 여성농업인 문화·복지 서비스 증진을 위한 마을 공동급식 지원사업과 행복바우처 제도의 양적, 질적 확대가 이뤄져야 한다.여성어업인 복지 향상을 위한 과제로는 첫째, 여성어업인-수협관계자-어촌계장-행정부서-연구진이 함께 참여하는 ‘경상북도 여성어업인 문제를 고민하는 포럼’이 신설·운영될 필요가 있다. 둘째, 여성어업인 여성리더 역량강화 및 여성리더 양성이다. 여성어업인의 교육 참여 기회 및 경험이 다소 낮게 나타났는데(참여경험이 없는 경우 58.6%), 여성어업인 리더 양성을 위해 어촌계별 여성리더 및 여성후계자를 각 1명씩 지정해 경북형 여성어업인 리더단을 구성·지원할 필요가 있다.진혜민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연구위원또한 여성인재 아카데미 지역사회 여성리더 교육과 더불어 여성어업인 교육 수요도가 높았던 취미·여가·교양 교육 및 수산물 판매·마케팅 교육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여성어업인의 건강 증진을 위한 궂은 날 찾아가는 물리치료실 운영이다. 어업환경 특성상 어업이 불가능한 날에 여성어업인이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이용해 ‘궂은 날 찾아가는 물리치료실’운영을 통해 건강관리 및 의료서비스 지원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최미화 경북여성정책개발원장은 “선도적인 경상북도 여성농어업인 정책 추진을 위해 현장과의 소통을 강화하고 연구개발을 통한 여성농어업인 복지 향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지속적인 연구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2-25

패기와 배포로 영화계 활짝 연 여장부

박남옥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이었다. 걸출한 여성 영화감독을 많이 배출한 지금의 우리 영화계를 패기와 배포로 활짝 연 여장부이다. 미술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결심한 것이나 결혼을 종용하는 부모에게 맞서 이화여전을 자퇴한 것,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남성중심적인 영화현장에 뛰어들어 갖은 차별과 어려움을 이겨낸 모습 등은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줬던 매우 단단하고 강한 여성이었다.어려서부터 미술·영화에 관심부모 권유 이화여전 가사과 자퇴스물네살, 조선영화사에 입문한국전쟁 중 국방부 뉴스 편집△다재다능한 셋째 딸박남옥은 1923년 경북 경산시 하양읍의 유복한 가정에서 딸 여섯, 아들 넷의 10남매 가운데 셋째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책읽기를 즐겼던 박남옥은 세계문학전집을 읽는 틈틈이 언니들이 읽는 영화잡지도 읽곤 했다. 다양한 책읽기를 통해 기른 문학적 소양은 그녀가 영화를 만드는 데 풍부한 토양이 됐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박남옥은 운동을 잘 했는데, 여고 시절 전조육상선수권대회(전국체전)에서 여자 포환던지기 종목에 출전해 1위를 차지하며 3회 연속 한국신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그런 그녀가 영화에 빠져들게 된 것은 순전히 스타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다. 여학교에 다니던 당시 청초한 외모로 인기를 끌었던 여배우 김신재가 출연한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한 열망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박남옥은 그 후 꾸준히 김신재에게 편지를 보내고 사인도 받으면서 영화에 대한 사랑을 키웠다. 여고시절 운동선수로 이름을 날렸지만 정작 박남옥은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화가 박래현과 천경자가 수학한 일본의 우에노 미술학교에 진학해서 미술공부를 하고 싶었던 그녀는도쿄로 유학을 가려고 밀항선을 탔다가 배가 좌초돼 일본의 수용소에 있다가 돌아오기도 했다.고향에 주저앉게 된 박남옥은 부모의 권유로 1943년 이화여전(현 이화여자대학교) 가사과에 입학했다. 원했던 공부가 아니니 당연히 학교공부에 재미를 붙일 수 없었던 박남옥은 휴일이면 온통 보리밭이었던 염천교 부근의 헌책방을 찾아다니면서 영화나 미술 관련 책을 사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곤 했다.그 와중에 좋아하는 영화도 닥치는 대로 보러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최고의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손꼽히는 레니 리펜슈탈(1902~2003)이 제작한‘올림피아’(1936)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베를린올림픽을 소재로 한‘올림피아’의 압도적인 상미와 획기적인 다큐멘터리 기법도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이렇게 멋진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감독이 여성이라는 사실이었다. 1919년, 우리나라 최초의 남성감독인 김도산이‘의리적 투구’를 제작한 이래 조선영화에서 여성이 감독한 영화는 단 한편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여성감독의 존재에 그녀가 얼마나 신선한 충격을 받았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영화를 좋아해서 단지 열심히 보러 다니기만 했던 박남옥은 비로소 영화를 직접 제작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는다.얼굴도 보지 않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이었지만 박남옥은 결혼에 뜻이 없었다. 영화가 어떤 세상도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고 보면, 그런 영화 속에 깊게 빠져있던 그녀에게 가부장적인 결혼생활은 회피하고 싶은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혼기가 찬 딸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부모는 박남옥에게 결혼을 강요했고, 그녀는 그에 한 저항으로 부모가 원했던 학교를 자퇴하고 말았다.△한국최초의 영화감독이 되다1944년 고향으로 내려온 박남옥은 대구 매일신문사의 기자가 됐다. 책을 많이 읽고 쓰기 재능을 가진데다 미술과 영화에 대한 관심이 컸던 그녀는 신문의 영화란을 맡으면서 영화에 대한 열정을 키워갔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마침내 본격적인 영화인생을 시작하기 위해 박남옥은 나이 스물 넷 되던 해인 1946년 서울로 올라간다. 서울로 올라와서 처음 본 영화 역시 김신재가 출연한 ‘거경전’이었다. 영화를 본 다음날 박남옥은 수선화를 사들고 여학교 때부터 줄곧 우상이었던 김신재를 만나러 갔다. 이때 맺은 김신재와의 우정은 그 후 줄곧 이어진다.박남옥은 친구 남편인 윤용규 감독의 소개로 조선영화사 촬영소에서 일하게 됐다. 그곳에서 영화 관련 일을 배우면서 버려진 필름을 편집해 남몰래 영화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신경균 감독의‘새로운 맹세’에서는 스크립터 일도 맡았다. 오랫동안 꿈꾸던 영화 일을 하게 되면서 누구보다 열심이었지만, 여자라고 무시를 당하거나 여자라서 지방출장에서 배제되는 등 남성 중심적인 화현장에서 그녀가 겪어야 했던 어려움은 적지 않았다.박남옥.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그러나 박남옥이 여자라는 이유로 이해받지 못한 곳은 영화 현장만이 아니었다. 혼기를 놓친 데다 영화판에서 남자들과 어울려 세월을 보내는 딸을 염려한 부모는 결국 딸을 끌고 대구로 내려왔다. 그 후 박남옥은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선을 보러 다녔다. 그러던 중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박남옥은 곧바로 국방부 촬대에 입대해 뉴스를 편집하면서 전쟁을 몸소 겪어냈다.남편이자 극작가인 이보라를 만난 것도 1953년 종군화를 만들던 때다. 결혼은 절대 하지 않겠다던 그녀지만 평생 속을 썩인 부모에 대한 미안함과 집 앞에서 결혼을 하자고 외쳐대던 이보라의 구애가 이어지면서 서른한 살의 박남옥은 부산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결혼한 이듬해 예쁜딸 경주를 낳았다. 그러나 딸을 낳은 지 3일 만에 영화를 보러갈 정도로 박남옥의 마음은 온통 영화에 가 있었고, 영화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남편도 딸도 나눠가질 수 없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자료제공= 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20-02-24

‘비동의 간음죄’ 신설 본격 검토스토킹·데이트 폭력 핫라인 구축

정부가 형법상 ‘강간과 추행의 죄’라는 명칭을 ‘성적자기결정권을 해하는 죄’로 변경하고, ‘비동의 간음죄’의 신선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여성가족부는 지난 2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여성폭력방지위원회를 개최하고 이런 내용을 담은 ‘제1차 여성폭력방지정책 기본계획(2020∼2024)’을 심의·확정했다.이 기본계획은 정부 차원에서 여성폭력 방지를 위해 마련한 최초의 중장기 계획이다.비동의 간음죄는 폭행·협박이 없더라도 상대방의 합의 또는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간음한 경우 이를 성적자기결정권의 침해로 간주해 처벌하는 것을 말한다.가정폭력 범죄에 ‘주거침임·퇴거불응죄’를 추가하고 유죄 판결 선고자에 대한 수강·이수명령 병과 규정 및 불이행자에 대한 제재 규정도 신설하기로 했다.가정폭력 가해자 격리를 통한 피해자 보호를 위해 ‘자녀면접교섭권 제한’을 피해자보호명령 유형에 추가할 방침이다.스토킹·데이트폭력 사건은 제때 현장에서 대응할 수 있도록 전담조직(TF) 운영을 활성화하고 피해자와 핫라인을 구축해 신변 보호에 나서기로 했다.이와 함께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정도 추진된다. 성매매에 유입된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아동·청소년 성 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에도 나서기로 했다.정부는 ‘변형카메라의 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불법 촬영기기 규제 관리에 나서는 한편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음란 동영상 스트리밍을 모니터링·관리할 음란물 차단기술 개발과 현장 적용에 나설 방침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2-23

“다문화한부모가족 자녀 성장지원 필요”

경북도내 다문화한부모 자녀교육 및 성장지원에 대한 관심이 요구되고 있다. 이는 경북도 출연기관인 (재)경북여성정책개발원(원장 최미화)이 최근 발표한 다문화한부모가족 지원방안 연구 결과에 따른 것이다.경북여성정책개발원은 경북도내에 거주하는 다문화한부모가족 175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9월 2∼10월 29일까지 설문(160명) 및 심층면접(15명) 조사를 실시해 그 결과 ‘2019 경상북도 다문화한부모가족 지원방안’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배옥현 연구위원배옥현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연구위원을 연구책임자로 한 이번 보고서는 경북도 다문화한부모가족의 기초적인 사항, 가족변화의 원인 및 과정, 경제적, 정서적, 가족관계, 가족 내 역할수행 영역 등 가족변화 정도 및 가족생활의 어려움, 정부의 지원 및 욕구 등 가족생활 전반을 파악하기 위한 내용 등을 조사했다.이들 가족생활에서의 어려움에 대한 조사 결과, 47.9%가 경제적 어려움을 꼽았으며, 다음으로 자녀양육 및 훈육의 어려움(30.2%), 취업의 어려움(6.5%), 건강상의 문제(4.6%), 가족과 헤어져 사는 어려움(3.8%), 가사노동의 부담(1.5%)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또한 심층면접 조사결과, 다문화한부모가족은 전반적인 생활의 어려움, 생계비 부족 등으로 인해 자녀의 성장이 저해되고, 교우관계가 잘 안되며,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으며, 인터넷 중독 문제나 따돌림, 자신감 부족 등 우울감이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자녀의 성장 및 교육 걱정에 대한 어려움을 덜어주고 한국어 실력 부족 및 미숙으로 인한 자녀들의 알림장을 읽고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거나, 방과 후 숙제 봐주기, 향후 진로 상담 및 방향 정해주기 등을 지원하는 외식, 스포츠, 학습, 문화 등 바우처 서비스의 적극적인 모색이 필요한 것으로 제기됐다.‘2019 경상북도 다문화한부모가족 지원방안’ 연구 보고서 표지.이를 위해 경북도는 다문화가족지원기금이나 다문화가족 특별지원 예산 중 일부를 쿠폰 형식으로 분기별로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등 자녀 성장을 돕는 사업으로 운용해 확대·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이다.또한 선주민 이주여성 중 언어소통이 잘되는 사람이 중심이 돼 카톡방이나 밴드 등을 운영해 한국어 알림장이나 준비물 챙기기와 같은 해당 콘텐츠를 모의 다국어로 번역해 줌으로써 다문화한부모의 자녀관련 교육적 접근성을 용이하도록 지원하는 방안 모색도 제기됐다.최미화 (재)경북여성정책개발원장은 “다문화한부모 자녀교육 및 성장지원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스마트 폰의 카톡방이나 밴드 활용 등을 통한 자녀의 알림장 확인이나 준비물 챙기기 등 번역서비스 지원 강화를 통해 다문화한부모 자녀의 교육적 환경이 안정적으로 조성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20-02-11

포항시여성단체협회장 선거 김정례·정경애 출마

포항시 최대 여성단체인 포항시여성단체협의회 차기 회장 선거가 6일 두 후보 간의 대결로 치러진다. 포항시여성단체협의회는 오는 6일 오전 10시 포항시여성단체협의회 사무실에서 2년 단임 임기의 제13대 회장을 뽑는 선거를 실시한다.지난달 31일 회장 선거 후보 등록 결과 김정례(58) 한국여성유권자연맹포항지부장과 정경애(56) 포항시새마을부녀회장 등 2파전으로 열린다.김정례 후보는 포항 출신으로 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한 뒤 지난 2009년 포스코 협력작업을 수행하는 (주)PNB를 창업해 여성기업인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2016년 2월 한국여성유권자연맹 포항시지회 제3대 회장으로 취임해 정책토론회 등 다양한 방식으로 여성의 지위향상과 사회에 여성참여 확대를 위해 여성 정치인 발굴하고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에 힘쓰는 한편 건전한 지방자치를 위해 우수의원을 표창하는 활발한 활동을 펴왔다.정경애 후보는 포항 출신으로 포항시새마을부녀회를 이끌고 있으며 남다른 친화력과 포용력을 인정받고 있다. 1991년 포항시 새마을운영위원으로 위촉돼 활동을 시작해 지난 2018년 15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연말 이만포기의 사랑의 김장나누기. 한민족 해맞이 축전 떡국 나눔봉사 및 재난의 현장 등에서 헌신적으로 앞장서 봉사활동을 펼쳤다. 주민화합을 통한 지역사회 발전과 시민복리 증진에 기여하고 새마을정신으로 도정발전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공으로 2019년 새마을대상을 수상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2-02

여성일자리사관학교 2020학년도 교육과정 운영기관 모집

“경북여성 일자리창출, 2020년 새해에도 여성일자리사관학교가 앞장섭니다”경북여성정책개발원(원장 최미화)은 오는 17일까지 2020년도 여성일자리사관학교 산학연계 교육과정 운영기관을 모집한다.경북 여성의 직무능력을 개발하고, 4차산업혁명을 통한 여성일자리 창출 및 지역과 기업을 연계한 맞춤형 교육과정을 발굴하고 운영하기 위함이다.공모분야는 4차산업혁명 분야와 산업현장 맞춤형 인력양성을 위한 산업기술·사무 분야, 통합 돌봄 등 사회복지 분야, 지역관광활성화 및 6차 산업관련 문화예술관광 분야 그리고 교육기관이 산업과 교육을 연계해 여성일자리 창출이 가능한 자율분야 등이다.교육과정은 최소 150시간 이상으로 전문교육, 직무소양교육, 취업준비교육 등 경북여성을 위한 맞춤형 커리큘럼으로 구성하면 된다. 위탁기관은 교육과정 심사위원회를 거쳐 최종선정이 된다. 과정 당 최대 3천500만원 지원되며, 1개의 기관이 1개의 과정만 신청가능하다.신청 대상은 도내 주소지를 두고 직업교육이 가능한 대학 및 연구, 교육기관이며, 민간기업과 일자리 분야 및 관련 분야 교육 경력이 없는 기관은 신청대상에서 제외되며, 공모신청은 여성일자리사관학교 홈페이지(www.gbwomanjob.com) 공지사항의 모집공고를 통해서 신청서를 다운로드해 작성하고 전자메일로 접수하면 된다.최미화 경북여성정책개발원장은 “이번 공모를 통해 여성일자리사관학교 교육과정으로 여성들이 다양한 직무교육을 받고, 경북형 여성일자리 창출이 되기를 바란다”며 “교육운영에 관심이 있고 경쟁력 있는 도내 교육기관들의 많은 관심과 공모를 바란다”고 말했다. /윤희정기자

2020-01-05

‘신바람 경북 여성일자리 포럼’ 성료

경북여성정책개발원(원장 최미화) 경북광역새일센터는 지난 11일 오후 2시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2019 청포도(청년여성을 포용하는 경상북도) 일자리 포럼’을 성황리에 개최했다. 이날 포럼은 여성일자리 확대를 통한 ‘일터 넘치는 부자 경북’실현의 일환으로 기획됐으며, ‘4차 산업혁명과 여성 일자리’ 를 주제로 청년여성, 여성일자리 전문기관, 여성친화기업 등 200여 명이 참여했다.이번 일자리 포럼에는 이원재 요즈마그룹 아시아 총괄대표의‘4차 산업혁명의 글로벌 여성일자리 창출’이란 제목의 기조강연이 마련됐다. 요즈마그룹은 이스라엘의 경제발전을 이끈 세계적 벤처 캐피탈기업으로 젊은 여성인재 육성을 위해 사회적 지원 확대 및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을 강조했다.또한, 주제발표로 한국고용정보원 최영순 팀장의‘4차 산업혁명과 직업세계의 변화’와 대구가톨릭대학교 김태형 교수의 ‘Smart時代 따라잡기’가 이어져 경북형 여성일자리 창출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됐다.이날 포럼에서는 ‘경북여성 사회적경제 페스티벌’도 함께 열렸다. 나는 드론 사회적협동조합, 경북코딩메이커 사회적협동조합 등 창업에 성공한 여성 사회적경제기업 14개 업체가 체험부스를 운영해 창업에 관심있는 여성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최미화 경북여성정책개발원장은 “이번 청포도 일자리 포럼을 통해 4차산업혁명 시대의 미래직업 트렌드를 읽고 미래 여성 일자리에 대한 고민을 나누며, 경상북도 청년여성들이 새로운 직업에 도전하는 발판이 됐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10-13

추석 한복 맵시있게 입기

평년보다 많이 이른 올 한가위에는 여름 끝자락, 가을 초입에 잘 어울리는 한복으로 추석빔을 입어보자.한복은 그 자체로 보면 평면적인 형태지만 입으면 입체감이 살아나는 아름다운 옷이다. 디테일이 많고 몸에 꼭 맞게 피트되는 서양 옷에 비해 실루엣은 단순하지만, 훨씬 풍성하고 율동적인 느낌을 준다.한복은 색상, 명도, 채도에 따라 다양한 분위기를 표현할 수 있어서 두 가지 이상의 색상을 조화롭게 맞추는 배색이 중요하다. 상의는 밝게, 하의는 어둡게 하는 것이 고전적이며 그 반대는 세련된 느낌을 준다. 동일한 컬러의 저고리와 치마를 선택할 경우에는 정적이고 통일된 효과를 얻을 수 있으며 톤온톤 매치의 경우 온화하고 친근한 이미지를 줄 수 있다.너무 짙은색으로 빠른 추석이 자칫 무거워 보이지 않도록 고운색으로 배색을 잘해 깔끔하고 단아한 멋을 내 본다. 권장 색상은 연한핑크, 연한비취, 연노랑, 황금색, 카키색, 네이비색 등이다. 조금 짙은 색은 치마로 색배색을 하는 것이 좋다. 원단소재로는 노바, 크리스탈, 갑사, 숙고사 등 얇고 화사한 원단을 추천한다. 원단이 주는 넉넉함과 편안함으로 독보적인 매력을 표현해보자.계절이 조금 빠른 탓에 원단 소재와 색상 선택을 잘해 실용성과 활동성에도 편리한 퓨전한복도 잘어울릴 것 같다.머리는 가능한 업스타일 또는 단정하게 하고 흐트려 풀어 있는 모습은 금물이다. 속옷 착용은 신체보호 기능 중 위생 및 보온의 필요성 외에도 겉옷의 보정 기능을 통한 맵시 표현을 위해 중요하다. 한복 착용시 한복의 곡선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해 속옷을 제대로 갖춰 입어야 한다. /추은월(한복전문점 소예 대표)

2019-09-10

신여성이자 항일운동 앞장선 독립운동가

21세인 1931년 배화여고보를 졸업한 조애영은 시험 없이 이화여전 가사과에 합격했다. 이때 선교사가 조애영의 능력과 영어 실력을 보고, 미국유학을 권했다. 그러나 부모와 오빠의 반대에 부딪혀 유학은 이루지 못했다. 얼마 뒤 이화여전을 중도에 그만두고 집안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영천 출신의 이담(李潭)과 혼인했다.그러나 신여성으로서의 그녀의 결혼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남편은 중앙고보시절 만세운동에 참여할 정도로 사회참여에 적극적인데다 일본유학까지 다녀온 신지식인이었지만 아내의 사회생활은 허락하지 않았다. 신교육까지 받은 그녀로서는 참아내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겠지만, 그녀는 원망이나 미움보다는 전통의 덕목을 따랐다. 갈등과 충돌보다는 화의(和議)의 길을 택한 것이다.비록 적극적인 사회 활동은 하지 못했지만 신교육으로 습득한 지식을 남편의 사업에 보탰다. 1940년에 이르러서는 배화여고보 학원재단 기성회원이 되기도 했다. 활동을 시작한 초기에는 동창회와 같은 소극적인 활동이었지만, 점차 여성단체로 폭을 넓혀 나갔다.48세가 되던 1958년에 이르러 조애영은 친구의 권유로 그동안 쓴 작품 들을 모아 시조집 ‘슬픈 동경’을 출간하고자 했다. 그러나 남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그 가운데 몇 권만이 조카 조지훈에 의해 남겨졌다. ‘슬픈 동경’이라는 제목은 조지훈이 지어준 것으로, ‘내 마음에 슬픈 노래’라는 뜻이다.1958년 48세 때 작품집 ‘슬픈동경’남편 반대로 출간 좌절‘한양비가’ ‘학생의거혁명가’ 등1960년부터 활발한 가사 창작활동1977년 ‘한국현대내방가사집’ 지어내방가사 명맥 유지 노력 결실△현대가사문학과 여성단체를 이끌다회갑기념 출판기념회에서의 조애영.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조애영의 가사 창작활동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인 1960년부터 다시 활발해졌다. 이 시기에 지은‘한양비가’·‘학생의거혁명가’ 등에는 그녀의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이 잘 반영돼 있다.‘한양비가’는 조선의 건국부터 조선의 변천사를 차례대로 나열하면서 해방과 이후 4·19혁명에 이르는 근 현대사를 간추린 장편의 가사다. 조애영은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배운 교훈을 이야기하면서 역사에 대한 의식의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학생의거혁명가’는 ‘한양비가’에 포함하려다 분량이 너무 방대해져서 따로 분리한 작품으로, 4·19혁명의 전말에 대해 서술하면서 날카로운 비판 의식도 보여준다.60세인 1970년에는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조작가협회, 한국신화학회, 민속학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이듬해 61세에는 한국수필가협회 회원이 됐으며, 시조 계간지 ‘신시조(新時調)’와 ‘수필문예(隨筆文藝)’를 간행하는 출판사의 고문을 맡기도 했다. 그 해에 시조집‘슬픈 동경’이 재판·간행됐는데, 그 동안의 작품에다 38편의 시조를 추록해 회갑기념으로 출간한 것이다.또 은촌선생회갑문집 간행위원회에서‘은촌내방가사집’을 출판했는데, ‘화전가’등 19편의 규방가사가 실려 있다. 조애영은 활발한 작품 활동과 더불어 사회활동에도 적극 나섰다. 그 출발은 배화여학교의 동창회지만 점차 그 폭을 넓혀 성균관이나 여성유림회에도 참여했다.1972년에는 성균관 교화분과 부장을 맡아 활약했다. 이듬해 12월에는 ‘유림월보’(제57호)에‘여성유림의 자세’를 발표해“여성은 가문의 전통을 존중하고, 경로정신에 투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의식은 전통적인 유교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 뒤 1975년 조애영은 성균관 여성유도회 초대회장이 돼 3년 동안 활동했다.이듬해인 1976년에는 1년 동안 ‘유림월보’를 통해‘풍속과 습관’이라는 주제로 글을 연재하기도 했다. 1977년에는 함께 내방가사를 연구하고 창작하던 여성유도회원들과 그동안 지었던 내방가사를 모아 정순임·고단과 함께‘한국현대내방가사집’을 출간했다. 이는 내방가사의 맥을 이으려는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1979년 7월에는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렸던 제4차 세계시인대회에 참가해 ‘Mother’라는 시조를 발표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 쓴 조애영의 작품 속에는 한층 더 강한 역사의식이 드러난다.1987년 가을 ‘배화동창회보’(제6호)에‘무궁화 12곡’을 발표했으며, 12월‘유교신보’에‘갑인왜란애사(甲寅倭亂哀詞)’를 발표해 주실마을에서 일어난 일본인의 횡포를 고발했다. 1991년 ‘배화동창회보’(제9호)에 망국의 한을 노래한‘구한말애사(舊韓末哀詞)’12곡을 발표해 남북한 적십자사총재에게 보냈다.이어 제10호에는 ‘한말애사(韓末哀詞)’를 발표해 고종의 즉위부터 남북분단까지의 역사를 서술했다. 또한 이 무렵‘한국동란회상곡’을 지어 둘째 오빠 조헌영을 비롯한 납북인사와 이산가족의 아픔을 노래했다. 그러나 ‘유교신보’에 실으려 했던 이 작품은 당국의 검열에 의해 발표되지 못했다.현대가사문학의 선구자이자 성균관 여성유도회 창립을 주도하고 초대회장으로서 여성유도회를 이끌었던 조애영은 2000년 8월25일 9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조애영은 속박의 굴레를 벗은 신여성이자 항일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가였다. 또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우리네 내방가사(內房歌辭)의 맥을 이어 온 여류 문사였다. 특히 그가 영남지방에서 구전돼 내려오는 가사를 모아 자신의 작품과 함께 펴낸 ‘은촌내방가사집’ ‘한국현대내방가사집’은 지금도 문학사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조애영의 현대가사는 조선시대 내방가사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예전의 내방가사가 주로 시집살이나 노처녀의 한탄, 또는 가난한 생활과 힘든 노동에 대한 푸념을 노래했다면 조애영의 가사는 역사와 사회문제를 다룬 것이 많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성의 갈등에서 극복과 화합으로 나아간 것이 바로 조애영의 삶이라면 그의 문학은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보다 큰 이상을 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자료제공= 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19-08-19

북미 성악콩쿠르 출전 등 활발한 활동

신명여학교 재직시의 추애경.1928년 워싱턴대 재학중 김태술과 결혼보스톤 추기음악대회 참가‘리릭소프라노 조선의 천재’ 언론 호평1968년 자전적 소설 집필·1973년 운명△미국에서의 활동미국으로 유학간 추애경은 1927년부터 샤블 워싱턴대학교 음악과에서 성악전공으로 수학하고, 이어서 보스톤으로 학교를 옮겼다. 한편 1927년 여름 워싱턴대학교 음악과에 관계한 직후 추애경은 북미에서 실시된 성악콩쿠르에 출전했다. 이 음악대회는 그해 8월 8일~28일 와이노나(Wynonna) 호반(湖畔)에서 전미주(全美洲)에 있는 각국 학생 중에서 실력이 있는 33개국 200명의 음악가(성악·기악·작곡)가 모여 하기음악대회(夏期音樂大會)를 개최하고, 대회 마지막 이틀 동안 현상독창대회(懸賞獨唱大會)가 개최됐다.이 하기음악대회에 시카고의 추애경을 비롯한 한국음악가는 모두 3명인데, 뉴욕의 김태술과 시카고의 현제명이 그들이다. 이 음악대회에서 현제명이 1등으로 뽑혔다.이렇듯 이들은 미국유학 시절에도 함께 음악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서로 잘 아는 사이로 모두 대구 출신들이다. 한편 이듬해 보스톤 MIT공과대학 연구원에서 전기학 전공으로 미국유학 중이던 김태술은 1928년 1월 전미주대학정구선수권을 획득해 미국 보스톤지에 대서특필 되기도 했다.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성악공부를 시작한 추애경은 1930년 보스턴 뉴잉글랜드 컨서바토리음악원(Boston New England Conservatory)에 성악전공으로 입학헸다.추애경은 뉴잉글랜드음악원에 입학하기 2년 전, 워싱턴대학에 재학중이던 1928년 8월 25일에 인디아나주 완나텍에서 매시 목사의 주례로 김태술과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이후 추애경은 보스톤 뉴잉랜드음악원을 대표해 1932년 가을에 보스톤 추기음악대회에 참가해 언론에서 좋은 평을 받았다. 이 추기음악대회에서 추애경은 두 곡을 노래했다. 하이든 작곡의‘그를 다시는 사랑하지 않았소’와 킬 작곡의‘장미와 야앵’을 노래했다. 당시 보스톤의 음악잡지‘음악평론’에서는 추애경을 ‘리릭소프라노로 조선의 천재’라고 격찬한 바 있다. 이렇게, 뉴잉글랜드 컨서바토리음악학교를 다니면서 음악대회에 출전한 추애경은 1933년 6월에 졸업해 음악사(音樂士) 학위를 취득했다.이렇듯, 미국에서 공부한 추애경은 뉴잉랜드음악원을 졸업한 이후 그곳 메샤추세츠주 보스톤시 월썸(Waltham)과 워터타운(Watertown)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 생활을 하며 가정을 꾸려나갔다. 이후 자녀가 생기자 추애경은 아이들 양육을 위해 가정주부로 들어오면서 자신의 성악활동을 접어야만 했다. 가정주부로 돌아온 추애경은 토요일마다 텍사스코(Texaco)사가 후원하는 메트로폴리탄오페라(Metropolitan Opera)를 청취하면서 음악에 대한 정감을 잊지 않았다. 한편 추애경은 1968년에 자전적 소설인‘THE FAMILY OF CHUNG SONG’ 1)을 집필했다. 이 책의 내용은 자신의 직접적인 가족이름만 같고, 다른 모든 내용은 소설화됐다.추애경은 1973년 난소암으로 사망했고, 아들이 묻힌 매사추세츠주 브레인추리(Braintree)의 블루힐즈공원묘지(Blue Hills Cemetery)에 잠들어 있다.한편, 추애경은 1969년 5월 31일 이화여자대학교 개교 83주년을 맞이해 당시 김옥길 총장의 주선으로 자랑스런 졸업생으로 선발돼 개교기념일에 공로상을 수여받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자료제공=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19-08-05

제1세대 서양 음악가로 활발한 활동

미국 유학시절의 추애경(1933년).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추애경은 영남지역 최초의 여성 성악가다. 대구 신명여학교를 1919년(제7회)에 졸업하고 서울 이화학당에서 성악을 전공한 추애경은 신명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음악활동을 했다. 이후 일본과 미국에 유학해 피아노와 성악을 전공했다. 특히 미국에서 음악대회에 출연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당시 시대상황으로 인해 한국으로는 귀국하지 못했지만, 제1세대서양음악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후배 여성들이 음악가로서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초석을 놓았다.신명여학교 재학 시절 음악가 박태준·현제명 등과 만나1921년 이화학당 입학 성악 전공·1927년 미국 일본으로 유학길△교회를 다니며 성악가로서의 꿈을 키우다제1세대 서양음악가 추애경(秋愛卿·1900~1973)은 대구시 중구 동산동 10번지에서 아버지 추영옥과 어머니 최복경의 2남2녀 중 세 번째 2녀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 추옥은 서문시장에서 건어물상회를 운영했는데, 상호가 청송이라 청송댁으로 불렸다고 한다. 추애경의 원래 이름은 추동암(秋東岩)이었다. 어릴 적부터 신명여학교를 다닐 때까지(1915~1918)는 추동암으로 불렸지만, 신명여학교를 졸업한 후 이화학당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추애경이란 이름으로 개명했다.추애경은 대구사립고등보통학교를 4년간 다녀 졸업했는데, 당시 보통학교의 모든 과정은 4년간이었다. 정확히 언제 고등보통학교를 다녔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15년에 중학교 과정인 신명여학교에 입학했으므로, 1911년에 입학해 4년간 보통학교 과정을 마쳤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당시 집안사람들 모두가 교회에 다니지 않았지만 추애경은 1914년부터 제일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신명여학교에 입학하려면 교회에 출석하고 있어야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추애경은 이곳 제일교회에서 장래 남편이 되는 김태술(1899~1979)을 비롯해 성가(聖歌)를 좋아하고 즐겨 부르는 음악가 박태원(1897~1921), 박태준(1900~1986), 권영화(1899~1935) 그리고 현제명(1903~1960) 등을 만나게 된다. 당시 이들은 모두 잘 아는 친한 사이였다.△이화학당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교사가 되다1914년, 곧 대구사립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때부터 종로에 위치한 제일교회에 다닌 추애경은 이듬해(1915년) 같은 기독교계 학교인 신명여학교에 입학해 고등보통과 4년 과정을 마치고 1919년에 졸업했다. 곧 신명여학교 제7회 졸업생(3월 19일 졸업)이 되는데, 그해 3월 8일 3·1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대구 서문시장에서 주도적으로 앞장서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신명여학교를 1919년 3월에 졸업한 추애경은 2년 후 1921년에 이화학당대학예과(1917년 이전에는 중등과)에서 성악(소프라노)을 전공해 1923년 제16회로 졸업했다. 그리고 이화학당 본과에 다닌 추애경은 그해 8월에 개최된 만국기독청년회 주최의 하령회(A Summer Church Conference)에 대구대표로 참석한 바 있다. 이후 1925년에 본과과정을 마치고(제11회 졸업) 신명여학교에 교사로 재직하게 된다. 당시 일간지에 교육자로서 자신의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또한 신명여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대외 음악활동을 주관했다. 1926년 7월, 김성실, 안예아, 한만복, 이찬, 권영화 등 대구청년회·대구여자청년회와 함께 하기음악무도를 대구에서 개최하기도 했다.△일본과 미국으로의 유학추애경은 음악공부에 대한 욕심으로 일본과 미국으로의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는 일제강점기라 한국에서 미국으로 곧바로 갈 수가 없었다. 일본에서 미국 가는 배를 타야만 가능했다. 그녀는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 일본에서 음악공부를 했는데, 성악이 아닌 피아노 공부였다고 한다. 1926년 일본 규슈 나가사키현에 위치한 가즈이(活水)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서 피아노 전공으로 수학했던 것이다. 이화학당 및 이화여전을 졸업한 학생들은 당시 외국으로 유학하기 위해 일본 가즈이 여자전문학교를 거쳐 미국 보스톤 등으로 유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이화여전 교수 중 가즈이 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한 일본인 교수가 있었으며, 미국 보스톤으로 유학한 선배들이 있었으므로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이듬해 1927년 6월 4일,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의 주선은 이미 현제명을 미국으로 보냈던 로드히버(Homer A. Rodeheaver·1880∼1955) 선교사가 했다. 미국 인디애나주 위노나 레이크에서의 무지개레코드(Rainbow Records)사 창립자이며 기독교음악에 헌신자인 호머 로드히버가 미국행 경비와 뉴잉글랜드음악원의 등록금을 장학금으로 지급함으로써 이뤄졌던 것이다.1927년 6월 추애경이 미국으로 유학간다고 해 주위 대구음악인들이 송별음악회를 마련했다. 대구를 떠나기 하루 전날 6월 3일 대구제일소학교 강당에서 추애경의 송별음악회가 열렸던 것이다. 1927년 당시 대구에는 음악을 연주할 전문적 음악회장이 없었다. 음악회는 주로 대구제일소학교강당이나 조양회관에서 이뤄졌다. 대구제일소학교강당은 구 중앙초등학교 자리(현재 대구 2·28기념중앙공원 자리)에 있었던 옛 건물이고, 조양회관은 달성공원 주위 옛 원화여고로 사용됐던 위치의 건물이다.이 음악회는 미국 워싱턴대학으로 음악유학을 떠나는 추애경을 축복하는 발표회다. 추애경 자신을 비롯해, 김애국·주복남·박태준·차원석·견신희가 출연해 연주한 바 있다. 특히 주복남의 피아노반주에 박태준이‘이별가’(잘 가시요)를 노래해 아쉬움을 더욱 표현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자료제공= 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19-07-29

농민·노동자·여성을 함께 아우르다

정칠성. 동아일보, 1928.01.06정칠성은 기생 출신이라는 신분을 극복, 근우회 대표로 농민, 노동자 여성을 대변하고 여성 민중의 이익을 위해 활동했다.그녀는 ‘낭만적 사랑을 꿈꾸는 여성’ , ‘남성에게 사랑받는 여성’으로 살기보다는 주체적인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기를 희망했다.그녀가 두 차례의 일본유학을 감행한 이유 또한 교육을 통해 주체적인 자아로 살기 위해서 였다. 나아가 다른 여성들에게도 그 길이 열리기를 희망하며, 여성운동에 나선 것이다.정칠성은 신여성은 가정이라는 ‘소(小)’보다는 사회라는 ‘대(大)’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현대사회는 여성의 참여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정칠성을 사람들은 ‘사상기생’이라 불렀다. 이 무렵 ‘사상기생’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녀의 행보는 단연 두드러진다. 단순히 남성운동가를 돕기 위해 헌신적인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감상적 신여성’도 아니었으며, 여성으로서 넘을 수 없는 한계를 안타까워하며 애끓는 마음을 글로 쏟아내던 낭만적 ‘문학기생’ 과도 달랐다.정칠성은 여성 노동자와 농민을 계몽해 이들의 해방이 곧 여성의 해방이라고 강조했다해방 이후인 1945년 9월 정칠성은 좌익계 여성단체인 조선공산당 경북도당에 참여하고, 부녀부장이 됐다. 같은 해 10월에는 조선부녀총동맹 중앙위원에 선임됐다. 아무리 평등과 자유가 넘쳐나던 해방 직후라고 하더라도 기생 출신으로 여성지도자가 됐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이 무렵 남녀평등을 염원하는 정칠성의 목소리는 한층 고조됐다. ‘조선의 남편들이여, 여성계몽에 힘쓰는가?’라는 주제아래 정치적 압제와 더불어 남성들의 무관심에 대해 비판했다.“그중에도 이중삼중으로 억눌리고 질식하는 여성들의 운명은 언제까지든지 기구만 하구려. 정치적 압력은 우리들의 직접적인 투쟁대상이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 더욱 절박한 고통을 주는 것은 조선의 남편들이에요. 소위 민주진 의일꾼들까지 가정내의 민주주의는 모르고 아내를 계몽하지않고 독서나 집회를 위해서 시간을 주지않고 이러고는 여성운동이 활발하지 못한것만 개탄하잖아요.”‘독립신보’ 1946년 11월 14일자노동과 여성이 함께 해방돼야만 진정한 독립이라는 정칠성의 사상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그를 월북으로 인도하게 된다.북한에 간 그는 1948년에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는 등 정치적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하지만 1958년 이후 남조선노동당 계열로 몰려 김일성에 의해 숙청됐다.그래서 6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처럼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는 경력 때문에 그녀의 독립운동 경력이 잊혀졌다.그녀가 간 길은 일제강점이라는 극악한 상황 속에서 누구나 갈 수 있는 쉬운 길은 아니었다.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남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제전선에 뛰어들었던 그녀가 느꼈던 사회의 벽, 민족의 벽은 참담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정칠성은 환경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사회를 꿈꿨으며, 그 새로운 사회를 모든 여성들에게 주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차별과 억압에서 벗어나 모든 여성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열망하며, 거침없이 달려갔던 정칠성의 행보는 분명 새로운 미래를 여는 길이었다.‘페미니즘(feminism)’ 또는 ‘여권주의(女權主義)’라고도 표현되는 여성운동은 인격의 확립과 생활의 독립을 목표로 해 종래의 속박과 압제로부터 여성의 자아해방과 생활영역 확장을 일궈내고자 하는 운동이다. 그러나 한국의 여성운동은 일제의 식민지라는 상황을 경험하면서 특수성과 독자성을 확보했다. 즉 여성운동이 봉건적 질서에서 벗어나 여성의 권리와 정치·경제·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려는 일반적인 세계여성운동의 흐름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민족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여성들은 여성 스스로의 몫을 찾아야 할 뿐만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 그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여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 여성들은 개항기부터 국권회복운동에 나선 것이다. 그 가운데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들은 여성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사회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정칠성은 그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자료제공= 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19-07-23

전국적 여성통일기관 근우회 이끌어

권번 시절 정칠성.정칠성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여성운동가다. 20대 중반까지 기생이던 그녀는 3·1운동 이후 여성운동가로 변신했다. 1927년 전국적 여성 통일기관인 근우회를 이끌며, 계몽운동과 여성권익 향상, 나아가 항일운동을 펼쳤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들은 여성운동의 방향을 제시해 사회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중심에 바로 정칠성이 있었다.20대 중반까지 기생 ‘금죽’으로3·1운동이후 여성 운동가 변신1927년 ‘근우회’ 창립한국 근대여성운동 이정표 제시△기생으로 성장해 여성운동가가 되다금죽(錦竹)이라는 기생 이름을 가진 정칠성(丁七星·1897~1958)은 대구 출신이다. 그녀는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기생학교에 들어갔다. 대구관찰사(대구시장)가 주최하는 행사에서 기생들의 공연을 보고 스스로 기생의 길을 선택했다. 1800년대 후반부터 일본 유곽 문화가 상륙해 기생이 성매매와 연결되기 전만 해도, 기생(妓生)은 예능인과 동의어로 통했다. 여덟 살 소녀가 반한 대상은 예능인으로서의 기생 직업이었다. 군청과 도청 행사에 빠지지 않고 초청되는 등 유명세를 떨쳤던 그는 1915년까지 대구에서 기생 생활을 하다가 18세 무렵 상경해 한남권번(漢南券番)에 등록했다.기생으로서 정금죽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녀의 존재는 단연 두드러졌다. ‘별건곤 ’8월호(1927년)에 따르면 정칠성은 17세에 승마를 배우는 파격성을 보이기도 했다. 또‘개벽’에 실린 ‘경성의 화류계’라는 제목의 글에는 그녀가 단발미인으로 장안에 화제가 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칠성은 기생의 삶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녀는 3·1만세운동 뒤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녀는 1922년 동경(東京) 영어강습소에서 공부했다. 이때가 26세다. 이듬해 1923년 고향 대구로 돌아온 그녀는 독립운동에 본격 투신했다. 특히 정칠성은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로 거듭났다. 그해 10월‘대구여자청년회’를 창립하고 대구 첫 독립 여성단체를 조직한 뒤 계몽운동을 벌였다. 여덟 살부터 기생으로 살던 정칠성이 그 틀을 깨고, 여성운동가로 바뀐 것이다.△근우회 중앙집행위원이 되다정칠성은 1924년 조선여성동우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이 됐다. 이는 그녀가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본격적인 여성운동가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조선여성동우회는 여성의 사회·경제적 해방을 내세우며, 정종명·허정숙·주세죽·정칠성 등이 1924년 5월에 조직한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다. 이 회는 한국의 여성이 노예상태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여성의 인간적·경제적 평등권을 주장했다. 여성동우회는 여성문제를 다룬 강연회와 여성노동자를 위한 위로음악회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그들의 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강연회 등은 일제 당국으로부터 금지조치를 당하기 일쑤였다. 정칠성은 이 회를 조직하고, 중앙에서 활약하는 한편 1925년 3월 경북 도단위 사상단체 사합동맹(四合同盟) 결성에 참여했다. 이어 그녀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두 번째 일본행이었다.동경으로 건너간 정칠성은 1925년 3월 동경 여자기예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여성사상단체 삼월회(三月會)를 조직했다. 이 회는 1925년 3월 동경에 유학하고 있던 정칠성·이현경·황신덕 등 여자 유학생들이 조직한 사회주의 여성단체다. 설립 목적은 조선무산계급 및 여성의 해방이었다. 삼월회는 1925년 12월 총회를 열어“조선 여성은 계급적 봉건적·인습적 압박의 철쇄에 얽매어 있으므로 무산계급 남성과 손을 잡고 인류의 압제를 근본적으로 모두 없애고, 대중 중심의 새 사회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방침 아래 조선인 노동자 학살사건이 있자 조사회를 만들기도 하고, 조선무산계급단체에 자금을 기부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이어 정칠성은 1927년 5월 근우회 결성에 참여해 중앙집행위원이 됐다. 이는 여성운동의 전국적 통일기관이었다. 민족유일당으로서 신간회가 탄생하자 여성운동계도 통합을 추진해 1927년 5월 27일 근우회를 창립시킨 것이다. 근우회의 창립은 한국근대여성운동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발기총회는 1927년 4월에 40인의 발기인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여기에 정칠성이 참여했다. 이어 1927년 5월, YMCA 강당에서 회원 150명과 방청인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21명의 집행위원이 선출됐는데, 정칠성은 박신우·유각경·정종명과 함께 조직선전부를 맡았다. 기생 출신의 정칠성이 어느덧 여성운동계의 지도자급으로 성장한 것이다.근우회는 강연회와 토론회·강좌 등을 통한 선전계몽활동, 노동여성 조직화 노력, 여학생운동 지원 등의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근우회 운동에 대한 일제의 계속되는 탄압으로 인해 활발한 활동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지도부는 여러 차례 고초를 겪었다. 1930년 1월 정칠성은 학생운동 지도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허정숙·박호진·박차정 등과 함께 붙잡혀 구금되기도 했다.어렵게 명맥을 유지하던 근우회는 신간회와 더불어 해소(해산)을 결정했다. 해소를 위한 회의가 개최되자 여기에 참여해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여성운동이 근우회로 집중됐던 만큼 근우회 해소는 한국여성운동계에 심각한 타격을 줬다. 근우회 해산이후 1930년대 여성운동은 일제의 파쇼체제의 강화로 더욱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정칠성 또한 30년대부터 경성·평양·대구·통에서 편물강습 등으로 생활하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자료제공= 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19-07-16

마지막 남은 집까지 처분 김천고보 설립

△백미 1만섬 규모 서슴없이 쾌척최송설당이 김천고 설립을 위해 기부한 재산은 김천, 김해, 대전 세 곳에 흩어져 있는 20만2천100원 상당의 토지와 10만원의 은행예금까지 모두 30만2천100원이었다. 당시 백미 1섬은 29.77원이었으니 32만원이면 1만섬 이상을 살 수 있던 엄청난 규모다. 최송설당은 빼앗긴 나라를 건지려면 인재를 길러야 한다고 생각해 인문계 고등학교를 설립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일제 학무국이 설립을 허가하지 않고 상고나 농고를 만들라고 했다. 물러날 송설당이 아니었다. “인문계 고보 설립허가를 내주지 않으면 기부를 취소하겠다.”고 나서는 한편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총독부 방침을 고치지 않은 채 인문고를 건립한다는 목표는 힘들 것으로 판단했다. 인문고 허가를 받기 위해 사이토오(霽藤實) 총독의 아내를 만나 간곡하게 뜻을 전했다. 결국 총독부는 1930년 10월말, 김천고보 설립을 허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듬해 1월, 고등보통학교 규정 일부를 개정해 인문고에 실업과목을 첨가했다. 그런데 밀고 당기면서 개교가 일 년 늦어지는 바람에 설립자금 충당에 차질이 빚어졌다. 원래 송설당이 기부하기로 했던 재산이 30만2천원에 1930년도 수익예상금이 2만6천원이었는데,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쌀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1만6천원의 부족분이 발생했다. 당장 총독부 학무국이 제동을 걸고 나왔다. 그러나 최송설당은 물러서지 않고, 마지막 남은 처소인 무교동 55간 짜리‘송설당’집을 내놓겠다고 선언했다. 무교동집 평가액이 2만3천원이어서 총독부의 이의제기를 막기에 충분했다. 1931년 2월 5일, 재단법인 송설당교육재단이 인가를 받았고, 3월17일에 김천고보 설립이 총독부 학무국에 의해 정식 승인(총독부 고시 제145호) 됐다.△적막한 김천을 활기찬 김천으로동아일보 1931년 4월 25일자는“최송설당의 김천고보 개교는 적막의 김천을 활기의 김천으로, 초야의 김천을 이상의 김천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김천고보 초대교장은 안일영이었다. 학생을 받기 위해 1931년 3월27일과 28일 입학시험을 치뤘다. 5월 9일 강당을 준공했다. 5학급으로 시작했다. 나라를 구할 인재양성이 목표던 김천고보는 개교하면서 학생을 정원보다 50%나 더 뽑았다. 빨리 더 많은 인재를 길러내려는 파격이었다. 교사도 전국 최고를 모셨다. 서울 월급의 배를 주면서 최우수 교사로 진용을 갖췄다. 1932년 1월 15일, 제2대 교장 정열모가 부임했다. 애국적 국어학자 정열모 교장의 가르침 아래 수많은 구국 동량들이 김천고보로 몰려왔다.김천고가 있어서 일제 암흑기 김천은 희망이 있었다. 송설당이 81세가 되던 1935년 11월30일, 동상건립 얘기가 나왔다. 전국에서 뜨거운 호응을 보내왔다. 조만식, 방응모, 윤치호 같은 저명인사는 물론이요, 신의주고보, 동래 일신여학교, 대구계성학교, 금오산공립보통학교 등 학교 단위에서도 성금을 보내왔다. 경향 각지 502명이 5천945원을 동상 제막식 경비로 냈다. 적게는 10전부터 많게는 50원까지 성금을 보내왔다. 제막식 당일은 장관이었다. 전국에서 하객이 물듯 몰려들었다. 김천고보 운동장에는 교직원 37명, 전교생 250명의 세곱절이 넘는 하객 7~800명이 운집했다.‘사막의 오아시스’김천고 제막식에서 여운형은 송설당이 세운 김천고보를 ‘사막의 오아시스’ 에 비겼다. 일제 탄압이라는 어두운 사막에서 김천고보는 살아갈 희망을 샘솟게 한 오아시스나 마찬가지다. 살아생전 큰 복을 지은 송설당은 기라성 같은 인사 1천여 명의 축하를 받으며 동상을 봉정받았다. 이 모든 것이 감사했던 최송설당은 마지막 남은 한 점 재산까지 다 모아 특별교실(과학관) 건립비용으로 냈다. 무일푼 송설당이 생활비를 아껴 마련한 돈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기부한 송설당은 1939년 6월 16일 오전 10시40분 재단이사를 비롯한 간부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85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송설당의 묘소는 학교 뒷산에 있다.△배우지 않으면 옷 걸친 소최송설당은 수많은 가사와 한시도 남겼다. 3권 3책의 석판본으로 1922년 12월 1일에 발간된‘송설당집’에 실린 송설당의 한시는 모두 167수다. 송설당이 한시를 지은 시기는 선조의 설원을 성취한 때(1901년)를 전후해 1912년 송설당을 건립하고 1922년 문집을 발간하기 이전이며 시적 공간은 주로 나라를 잃은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송설당 한시에는 현실을 직시해 인간답게 사는 일로부터 나라를 회복하고 세계의 평화를 염원했던 애민, 애국, 우국의 간절한 정회가 담겼다. 한마디로 시문에 능해 억지로 꾸미지 않아도 절로 뛰어난 글을 이뤘고, 굳은 절조와 장부다운 기상이 있어 우국의 정서를 시에 담기도 했다. 또한 우아하고 속기가 없는 시를 썼다. 송설당은 배우지 않으면 옷걸친 마소가 된다고 항상 경계했으며, 평소에도 독서에 열중했음을 한시‘월야’에서 알 수 있다. 특히 최송설당은 교육은 인격을 닦는 바탕임을 강조하는데, 이한모가 돌 다듬는 것을 보고 쓴 ‘관이한모치석(觀李漢模治石)’이라는 한시에서는 갈고 닦아 빛을 낸다는 절차탁마가 곧 학문의 과정이며, 절차탁마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군자가 되는데 있다고 노래했다. 또 송설당은 인간 존재의 가치는 유용한 존재가 되는데 있음을 ‘송(松)’이라는 한시에서 은유했다. 소나무가 자라 마룻대와 돌보감이 될 때까지 지금 키우는 사람은 늙어서 못 보리라는 것이다. 곧 사람의 교육은 인재를 양성하되, 그 인재는 다음 세대의 주역들이라고 노래했다.최송설당 사후 김천고보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발전을 거듭했다. 1942년 10월에 터진 조선어학회 사건에 제2대 교장 국어학자 정열모가 연루되자 학교는 강제 폐교됐다. 김천고보를 빼앗긴 송설당교육재단은 공립 김천중학교의 후원단체로 전락했다가 1953년에야 학교를 되찾았다. 김천의 정신으로 자리잡고 있는 김천고보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사한 최송설당은 한국여성사 또는 조선문화사의 첫머리를 장식하기에 충분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자료제공=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19-07-09

2019 포항시 양성평등상 시상식 양성평등상 수상자에 김애숙씨

김애숙(71·사진) 포항YWCA 제6·7대 회장이 지난 4일 포항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열린 2019년 포항시 양성평등상 시상식에서 수상자로 선정됐다. 양성평등상은 여성의 권익신장으로 양성평등을 촉진하고, 양성평등 문화 확산에 노력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상이다.김애숙 회장은 포항YWCA 제6·7대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지역 여성 실직자들의 취업 기회 확대 및 경제적 자립과 권익증진, 여성폭력 근절 및 피해여성 및 아동 권익 증진, 환경 및 경제 살리기 등을 위해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쳤다.특히 청소년과 학교 교육 등 사회 각 분야에서 탁월한 창의력과 재능을 발휘한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의 영광을 안게 됐다.김 회장은 포항YWCA 일하는 여성의 집과 포항YWCA가정폭력상담소, 가정폭력피해보호시설인 소망의 집을 개소했으며 아나바다 나눔 활동을 선도적으로 추진해 쓰레기 종량제 정착에 기여하는 한편 청소년의 바른 교육을 위해 청소년 어울마당, 학교폭력추방캠페인, 청소년유해환경감시단 활동 등 바른 청소년문화를 위해 노력했다.김 회장은 “앞으로도 더욱 건전한 청소년 문화 확산 및 여성들의 삶의 질 향상과 권익증진에 앞장서고 살기좋은 포항 건설을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고 전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7-07

전 재산 쾌척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보모로 잘 알려진 최송설당은 일제치하 당시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고자 전 재산을 쾌척해 경북 김천에 인문계 고등학교인 김천고등보통학교(현 김천중·고)를 설립해 우리민족의 앞날에 꿈과 희망을 심은 한국육영사업의 어머니다. 경상북도 내 여성 육영 사업가 1호다. 그의 생애는 긴 여정의 시간이었다. 85세를 살었던 그는 조선의 멸망과 주변 강대국의 횡포, 왕족의 비애, 일제 강점기의 고통 등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살아왔다. 역적의 사슬을 풀고 가문을 부흥시켰고, 가난에서 벗어나 가족은 물론 이웃들에게 베풀며,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러내 나라의 독립을 앞당기는데 한 몫을 했다.△가문의 과업을 짊어지다최송설당(崔松雪堂·1855∼1939)은 철종 6년 김천시 문당동에서 아버지 최창환과 어머니 정옥경 슬하 3녀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다. 최송설당의 아버지 최창환은 원래 전라도 고부에 살다가 선조의 세거지를 찾아 김천으로 옮겨왔다.송설당의 집안은 평안도 선천 부호군이었던 증조부 최봉관(崔鳳寬)이 ‘홍경래의 난’을 맞아 성(城)의 함락을 막지 못하고, 처가마저 난군에 연루됐다는 죄로 옥사하고, 4명의 자식들이 모두 전라도 고부로 유배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서당 훈장이었던 부친 최창환(崔昌煥)으로부터 이같은 집안의 내력을 전해들은 송설당은 가문의 명예를 회복시킬 것을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송설당의 아버지는 조상의 죄 때문에 벼슬길이 막혔다. 김천에서 서당 훈장을 하며 간신히 생계를 이어갔지만 늘 가난했다. 송설당은 입을 덜고자 일찍 시집을 갔지만 남편의 죽음으로 다시 친정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때부터 재력을 모아 쓰러진 가문을 다시 일으켜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돈이 되는 일은 어떤 고역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어 돈을 모았다.△계단식 성장법을 택하다송설당의 생애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첫 시기는 고향인 김천에서 주로 머문 시기로 1855년 태어나서 1894년 상경하기 전까지 약 40년 간이다. 두 번째 시기는 상경 이후 1930년까지 36년간이다. 이 시기에 송설당은 서울에 정착해서 김천을 오가며 살았고, 영친왕의 보모로 지내며, 또한 가문의 신원을 이뤘고, 부를 일궜으며, 정권의 핵심인 고종, 엄비와 친분을 맺었다. 세 번째 시기는 경성에서 고향 김천으로 되돌아와서 여생을 마무리한 약 10년으로 이 시기에 한국 육영사업의 한 획을 그었다.첫 시기 전반부는 주로 아버지 슬하에서 한학과 한글을 공부하던 어린 시절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직접 장사길에 나서서 천신만고 끝에 부를 일군 시기다. 이 시기에는 아버지로부터 대물림한 집안의 신원 문제에 대해서 방법을 모색했다.두 번째 시기는 상경과 함께 인생의 승부수를 던진 시기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고종에게 다가서려면 고종의 총애를 받는 엄상궁의 마음을 먼저 얻어야했다. 엄상궁은 고종의 후예를 잉태하기를 기원했다. 송설당은 이런 엄상궁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엄상궁이 아들 낳는 꿈을 현몽했고 엄상궁 동생과 친분을 맺은 후 강남 봉은사에 드나들며 엄상궁의 아들수태를 위한 백일 불공을 드렸다. 출산일이 다가와 최고급 출산용품까지 진상하자 최송설당은 엄상궁의 아들 이은(李垠·친왕)의 보모가 되며 덕수궁으로 입궐했다. 덕수궁에 들어간 지 4년 만에 역적 집안의 족쇄는 풀리고 조상 신원의 꿈을 이뤘다.△89년 만에 역적누명을 벗다광무 5년(1901년 11월) 고종이 ‘몰적(沒籍)의 복권’을 내주면서, 89년 만에‘역적 집안’이라는 낙인을 떼냈다. 송설당은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영친왕이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면서‘친왕 보모’역을 마감했다.약 10년에 불과하지만 송설당의 궁궐생활은 결정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왔다. 송설당이 궁궐에서 나온 직후 무교동 94번지에 지은 ‘송설당’이라는 큰 집과 곳곳에 낸 의연금 규모를 보면 상당한 재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송설당이 재력을 지닌 시점은 궁궐에서 나온 전후다. 경선궁이라는 궁호를 받은 엄비는 경선궁에 주어진 토지를 교육사업에 쓰기 시작했고, 그 영향을 송설당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엄비가 교육에 뜻을 두고 진명여고 건립에 기부한 땅은 모두 경선궁 소유 땅들이다. 송설당이 김천고를 설립하기 위해서 만든 송설교육재단에 기부한 토지는 몇 지역에 집중되는데, 김천이 대표적이고 김해에도 154 필지나 된다.△환갑 넘어 사회환원 본격화최송설당은 중년이 되면서‘나눔’에 본격적인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송설당이 실천한 첫 나눔기사는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등장한다. 당시 미국 동포가 간행하는 공립신보를 보다가 의연금을 모집하는 취지서를 읽고 감동해서 4원을 기탁한 데 이어 1912년에는 김천 교동 주민을 위해서 벼 50섬을 희사했다. 1915년에는 여성운동을 하는 경성부인회에 거액을 기부했고, 1917년에는 김천공립보통학교, 금릉유치원, 금릉학원 등에 유지비를 댔다.마지막 세 번째 시기는 1930년 6월 29일 김천으로 내려와서 육영사업을 펼치며 여생을 마무리하던 때다. “깨끗한 돈을 교육에 쓰라”고 당부한 어머니의 유언이 크게 작용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면 무엇보다 시급하게 인재를 키워야한다고 판단을 한 송설당은 김천에 인문계 고보를 짓기로 결정했다. 1930년 신년벽두에 김천으로 내려온 송설당 앞에는 취주악대를 앞세운 환영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뤘다. 송설당이 김천고보를 지을 땅 산록에 자리잡은 정걸재로 향하는 길에도 반기는 사람들로 넘쳐났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com자료제공= 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19-07-02

市 “경력단절 넘어 경력이음으로”

포항시가 시승격 70년 및 제24회 양성평등주간을 기념해 1일 시청 대회의실에서 시민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력단절을 넘어 경력이음으로! 여성일자리와 미래’를 주제로 토크콘서트를 개최했다. 이날 토크콘서트는 포항시 승격 70년을 맞아 현재의 포항여성일자리 현황을 살펴보고 다가올 100년을 준비하는 출발점에서 여성의 일자리 비전을 제시하고자 제24회 양성평등주간 기념행사로 마련됐다.먼저 최병철 한국창직역량개발원장의 ‘4차 산업시대와 여성일자리’ 주제의 특강이 진행됐으며, 경력단절여성 3명의 취·창업 성공사례 발표에 이어 김경미 에스테스힐링심리상담센터소장이 주재한 가운데 최미화 경북여성정책개발원장, 김준홍 포항대학 교수, 이계영 포항YWCA 사무총장, 최병철 한국창직역량개발원장이 패널로 참석해 토크콘서트가 진행됐다.이번 토크콘서트에서는 경력단절 여성의 현황과 새로일하기에 도전하는 여성들의 극복 방안, 일자리 창출을 위한 취·창업 발상의 전환, 사회적 경제에 참여 방법, 새일센터를 통한 취·창업 도전, 포항여성일자리의 전망 등 여성일자리에 대한 소중한 의견들이 제시됐다.정기석 복지국장은 “우리 시에서는 지역 여성들이 자신의 꿈과 능력을 맘껏 발휘하고 당당하게 경력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여성의 취업에 장애요인을 없애고,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일자리를 발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번 토크콘서트가 포항여성일자리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뜻깊은 자리가 됐길 바란다”고 말했다. /윤희정기자

2019-07-01

‘함께하는 양성평등! 모두가 행복한 포항!’

포항 여성들의 최대 문화축제의 장인 ‘제22회 세오녀문화제’가 오는 4일 문화예술회관에서 1천200여 명의 시민들과 함께 화려하게 펼쳐진다. 양성평등기본법에 의해 지정되는 양성평등주간(매년 7월 1~7일)에 매해 포항의 브랜드 행사로 개최되고 있는 세오녀문화제는 1998년부터 시작해 올해 22년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양성평등 실현과 26만 포항 여성이 주축이 돼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성(性)평등 문화를 확산하자는 의미있는 행사로 개최돼 왔다.올해 세오녀문화제는 제24회 양성평등주간 기념식과 함께 ‘함께하는 양성평등! 모두가 행복한 포항!’이라는 슬로건으로 시민들이 함께 실천해야 할 생활 속 양성평등 의식개선 메시지를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고 함께 하는 자리로 준비했다.특히 포항시 승격 70주년 기념 포항여성사 영상물 상영, 양성평등 디자인 공모 작품 전시회, 양성평등문화확산 우산공연, 양성평등 실천다짐 퍼포먼스 등 모든 영역에서 함께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고 일상에서 성평등을 실천을 다짐하는 화합의 장을 펼칠 예정이다.아울러 제24회 양성평등주간 기념식에서 양성평등발전유공자를 시상하는 한편 △지역여성 예술인작품전시회 △한국전통차시음 및 체험 △포항시 승격 70주년 기념 여성사 사진전 △여성문화회관 프리마켓 등 다채로운 행사를 준비했다.이밖에도 1일 오후 2시 포항시청 대회의실에서 포항여성일자리 현황을 살펴보고 다가올 100년을 준비하는 출발점에서 여성의 일자리 비전을 제시하기 위한 ‘4차 산업시대와 여성새로일하기’ 특강과 ‘여성 일자리와 미래’ 주제의 토크콘서트 등도 열린다.행사를 주관한 박해자 포항시여성단체협의회장은 “2019년 세오녀문화제는 포항시 승격 70년을 맞이해 포항여성사를 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가야할 포항여성의 미래를 고민하고, 진정한 양성평등 문화 확산에 초점을 두고 준비했다”며 “우리 여성들이 주축이 돼 포항시를 지탱하는 든든한 뿌리로 자리매김해 양성평등으로 행복한 도시 포항을 꽃피울 것이라 다짐하며, 남녀 모두가 평등을 일상에서 실천하고 모든 시민들이 행복한 양성평등주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6-30

1927년 ‘길림사건’ 이후 의열투쟁에 뛰어들어

△의열투쟁으로 만주를 울리다남자현의 이름이 만주지역 독립운동사에 널리 드러난 것은 1927년에 일어난‘길림사건’이다. 이는 안창호를 비롯한 독립운동계 지도자 300여 명이 중국 관헌에게 붙잡혀 갇힌 일이다. 당시 독립운동계는 대동단결을 다지기 위해 길림에서 큰 집회를 열었는데, 그 때문에 중국관헌에게 체포된 것이다. 이들 가운데 최종 47명이 길림감옥에 갇혔다.이때 남자현은 이들을 옥바라지하며 이 일을 여러 곳에 알리고 비상대책반을 꾸리는 등 뛰어난 활약상을 보였다. 남자현과 독립운동계의 이러한 노력으로 독립운동가들은 무사히 풀려나게 됐다.길림사건 전후로 남자현의 활동은 큰 변화를 보였다. 교육활동에서 의열투쟁으로 전환한 것이다. 의열투쟁이란 적의 주요기관이나 주요인물을 직접 공격하는 투쟁방법으로서 불특정 다수를 공격하는 테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략이다. ‘조선중앙일보’ 1933년 8월 26일자에 따르면 남자현은 사이토오 총독을 처단하려 나섰다. 1927년 4월 박청산·김문거·이청수 등과 함께 길림성 안에서 계획을 세웠다. 혜화동 28번지 고아무개 집에 머물며 교회신자로 변장하고 총독 암살을 준비했다. 그러나 남자현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그런데 일본의 만주침략을 비난하는 국제여론이 일어났다. 이에 국제연맹은 그 현장을 조사하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했다. 이 소식을 들은 남자현은 독립의 뜻을 국제사회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우리민족의 독립의지를 담은 혈서를 써서 전달하기로 했다. 그녀는 국제연맹조사단장 릿튼이 방문하는 1932년 9월 19일을 혈서 전달 날짜로 잡았다.남자현은 하얼빈 남강에 있던 한 중국인 음식점에서 왼쪽 무명지 두 마디를 잘랐다. 그리고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란 다섯 자를 썼다. 독립을 원하는 우리 민족의 뜻을 붉은 피로 쓴 것이다. 그리고 잘린 손가락을 함께 싸서 국제연맹조사단에게 전달할 기회를 살폈다. 그러나 경계가 엄중해 쉽게 기회가 오지 않았다.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남자현이 보여준 기개와 용기는 남성들도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이 의거 뒤 남자현은 만주에 파견된 일본 전권대사 부토를 처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만주국 1주년 행사가 열리는 1933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남자현은 우선 무기 확보를 위해 부하 정춘봉을 비롯한 몇 명의 중국인과 무기 조달방법을 논의했다. 마침내 권총 한 자루와 탄환, 그리고 폭탄 두 개 등을 전달받기로 했다. 2월 23일 오전 10시 남자현은 거사장소를 확인한 뒤 노파로 변장하고 무기와 폭탄 운반에 나섰다. 그러나 밀정의 밀고로 거사 직전인 2월 27일, 하얼빈에서 일제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마지막 뜻“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남자현은 하얼빈 주재 일본총사관 감옥에서 여섯 달 동안 가혹한 고문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이렇게 욕되게 사느니 차라리 죽음으로 항거하자는 결단을 내리고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남자현은 음식을 끊은 지 9일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가혹한 고문과 단식으로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감옥을 나온 남자현은 한 여관에서 아들과 여러 동지들의 간호를 받았다. 그러나 끝내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고, 그녀는 몇 가지 유언을 남겼다. 하나는 조선이 독립되는 날 자신의 돈 200원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손자에게 교육을 시켜 내 뜻을 알게 하라는 유언이었다. 그리고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혼수상태로 풀려난 지 닷새만인 1933년 8월 22일, 그녀는 61세로 순국했다. 장례는 바로 다음날 오후에 진행됐다. 8월 23일 오후, 유지 30여명이 모인 가운데 조선여관에서 영결식이 치러졌고 마가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5일 뒤 ‘부토(武藤信義) 모살범(謀殺犯)’이라는 제목 아래 그녀의 순국 사실이 국내 언론에도 보도됐다. 50일 뒤인 1933년 10월 12일 오후, 하얼빈의 외국인 공동 묘지에 묻힌 남자현 묘 앞에 비석이 세워졌다.1934년 1월 간행된 한국독립당 기관지‘진광(震光)’창간호(중국 항주 발행) ‘여걸 남자현 선생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경술국치이후에는 비록 김섬·애향·계월향같은 의기가 나오지 않았지만, 신혼의 여운을 버리고 조국을 위해 의병을 조직하여 국내와 만주를 돌며 백절 불굴의 정신으로 적과 맞서 수십년을 일관되게 투쟁한 여걸이 출현하였다. 그가 바로 근대한국의 여걸로 손꼽히는 남자현이다.”‘혁명의 어머니’, ‘전율할 노파’남자현의 투쟁을 기리는 작업은 해방 뒤 한국여성단체에서 이어갔다. 남자현은 전통적인 규범 속에서 성장한‘구여성’이었다. 그러나 당당히 그 껍질을 벗고, 46세의 나이에 외아들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했다. 그 뒤 14년 동안 만주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했다. 나라에서는 그 뜻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하얼빈에 있던 그녀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고향인 경북 영양군에서는 남자현을 기리는 일이 추진됐다. 1999년 11월, 영양군은 남자현 지사 생가를 복원했다. 위치는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394번지(석보로 208) 일원이다. 원래 생가지가 있었던 393-6번지 바로 옆이다. 본채·문간채·추모각 등의 건물과 기념비를 세웠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자료제공= 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19-06-25

아빠와 함께하는 육아를 확산한다

최근 육아하는 아빠들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재)경북여성정책개발원(원장 최미화)이 이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운영해 눈길을 끌고 있다. 경상북도 아버지학교(라떼파파)는 안동시·예천군·청도군·문경시·경주시 영유아기·학령기 젊은 아빠들을 대상으로 6월 14∼20일 2일과 8월 1∼14일 3일간 등 다섯차례 안동시청 대동관 낙동홀, 경북도청 동락관, 청도군청 대회의실, 문경시 문화예술회관, 경주시 교육청에서 진행한다.지난해에 이어 운영되는 경상북도 아버지 학교(라떼파파)는 2018년 4회 455명이 교육에 참여하는 성과를 거뒀다. 특히 올해는 4개 권역이 고루 포함되도록 확대해 총 5회 교육이 실시될 예정이며, 아버지의 육아 참여가 자녀를 행복으로 이끌도록 자녀 양육에 필요한 기본 지식과 양육 기술 및 정보 등을 제공하기 위한 온·오프라인 활동 모임인 ‘아빠 육아단’을 구성할 계획이다. 최성애 박사(HD 행복연구소 소장)를 초청해‘우리자녀를 위한 사랑의 기술, 감정코칭’, ‘4차 산업시대, 자녀를 위한 감정코칭’, ‘우리자녀 정서적 금수저로 키우기’, ‘우리가족을 위한 사랑의 기술’, ‘스트레스를 낮추고 신뢰와 행복도를 높이는 소통의 기술‘ 등을 주제로 한 특강을 실시한다.특강을 맡은 최성애 박사(HD 행복연구소 소장)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 심리치료전문가, 가트맨 방식 부부치료사, 하트매스 연구소 회복탄력성 트레이너, 미국 미시간대학교 공과대학 심리학과 교수를 재직하였으며, KBS ‘가족클리닉’, MBC 스페셜 다큐멘터리 ‘행복한 부부, 이혼하는 부부’, SBS ‘위기의 부부’ 등에 출연해 강의를 펼쳐 주목 받았다.최미화 경북여성정책개발원장은 “아버지의 육아 참여 중요성을 인식해 아버지가 육아에 즐겁게 참여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확산해 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