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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역사의 현장에서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역사를 말하는 사람은 많다. 역사학자는 물론 인류학자, 정치가, 사상가, 종교인, 군사전문가, 경제학자 등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나름의 식견과 주장으로 역사를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판단이 오류일 때가 많고 예측과 전망은 별로 기대할 것이 없을 정도로 빗나가기 일쑤였다. 한 마디로 인류의 역사는 상당수가 돌발적인 것이었다.한반도의 현대사는 그야말로 예측불허의 연속이었다. 일제의 침탈로 식민지가 된 것도, 미국의 원폭으로 해방이 된 것도 예측한 일이 아니었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 되고,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에 유엔군의 참전과 중공군의 개입으로 밀고 밀리며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국토가 초토화 된 채 휴전을 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하고, 5·16 쿠데타로 박정희 소장이 정권을 잡을 것을 예상한 역사학자가 있는가. 그로부터 60여 년 한반도의 남쪽은 소위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세계 10위권의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데 비해 북쪽은 거지꼴의 불량국가로 전락하게 될 것을 내다본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토록 극명해진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맹목적 이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자들이 부지기수인 것을 역사가들은 무엇이라 말하는가?나름의 주장과 논리로 제법 이름깨나 얻은 논객들도 시대파악이나 현실인식에 맹점과 오류가 적지 않은 걸 본다. 제 딴엔 날카로운 비판이라고 소위 ‘모두까기’식 양비론이나 들이대다가 결국에는 소통이니 협치니 하는 원론적인 결론을 내놓는 게 고작이다. 그러니 지금의 시국이 국운이 걸린 내전상태라는 위기의식이 있을 리 없다. 대다수 국민들이 좌·우로 갈라져서 사활을 건 선전선동의 전장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걸 모르거나 외면하는 식자들이 많은 것이다.역사를 예측할 수는 없어도 돌발사태는 사실 우연히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윤석열이란 인물이 대통령이 될 거라고 예견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문재인 정권이 적폐청산이란 명목으로 전 정권 인사들을 모조리 사법처리해 놓고 정작 자신들의 비리는 덮으려고 ‘검수완박’이라는 철면피한 꼼수를 쓰지 않았다면, 추미애와 박범계 두 법무장관이 윤석열 검찰을 무력화하고 대신 제 발바닥을 핥는 충견들로 검찰을 장악하지 않았다면, 윤석열은 역대 여러 검찰총장들 중 한 명에 불과했을 것이다.서로 극렬하게 대립하는 상태에서 패자가 되면 모조리 적폐청산의 대상이 되고, 승자가 모든 것을 장악하는 것이 좌파들의 정책이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는 문재인 정권 5년이었다. 대화든 타협이든 일단은 싸움을 이겨놓고 생각할 일이라는 것이 좌파들을 상대하는 최선의 전략임을 명심해야 한다.역사의 미래를 예측하긴 어렵지만, 오래지 않은 과거와 당면한 현실의 파악은 불가능한 게 아니다. 눈이 밝고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지금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이 내전이나 다름없는 위기상태라는 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철저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일거에 패망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이 지난 정권에서 배운 역사의 교훈이다.

2023-09-14

단식투쟁은 ‘양날의 검(劍)’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8월 31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취임 1주년이 되는 날 “무능 폭력 정권을 향해 ‘국민 항쟁’을 시작하겠다. 민주주의를 회복하겠다”고 외치며 국회 앞에 천막을 치고 무기한 단식투쟁을 시작한 지 2주일이 지났다. 단식투쟁(斷食鬪爭)은 ‘정치적 시위 또는 특정 사항 관철 등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단식을 하는 비폭력 저항 행위’로 자신의 건강과 목숨을 걸고 하는 자해나 자살과 같은 의미가 짙다.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목적을 위해 그 정당성과 인간 권리를 앞세워 특성 이슈를 부각하려는 것이기에 대중에게 설득력이 있고 없고의 차이에서 그 가치를 판가름하게 된다.단식투쟁의 효과는 원인과 목적, 추진 맥락, 사회적 환경에 따라 다르다. 이번 이재명 대표의 경우는 정부에 대한 직접공격 대신에 단식을 선택하여 검찰 소환에 항의하려는 듯한 회피성 투쟁이고 조건 없는 단식이라는 조롱과 위로가 엇갈리고 있다. 단식 중단의 명분도 없고 자신의 사법 리스크에 물타기 한다는 둥 실리도 챙기지 못하고 대여(對與) 투쟁만 시끄럽게 한다. 우리 인간은 물 없이는 3일, 음식을 먹지 못하면 3주가 적정생존 기간이고 4주가 넘으면 위험하게 되어 사망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3일 이상 음식을 안 먹으면 체내 포도당이 소진되고 칼륨의 손실이 커지게 되어 1주일 넘기면 몸에 이상이 발생한다는데, 단식 13일째 검찰 조사받으러 가는 모습에 의사도 놀란다. 밤에는 천막을 떠나고 토·일요일에는 쉰다는 것에 ‘출퇴근 단식’이니 ‘웰빙 단식’이니 하는 말도 나돌지만 건강 악화로 당내의 우려도 커져 국회 당 대표실로 장소를 옮겼다.단식하면 떠오르는 인물에 인도의 성웅 간디가 있다. 인도의 독립을 위해 비폭력 무저항으로 3주간 옥중 단식투쟁을 했다. 집단 투쟁으로는 1981년 영국과의 갈등으로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들 200여 명이 1, 2차 60여 일간 단식으로 10여 명이 사망했다는 역사도 있다. 단식투쟁이 유난히 많은 우리나라 정치사의 경우, 1983년 가택연금 중에 대통령제 직선제 개헌을 요구한 김영삼은 23일간, 1990년 지방자치제 실현을 주장한 김대중은 13일간, 2014년 세월호특별법 국회 통과를 두고 문재인은 9일간 단식을 하였고, 5·18특별법으로 수감 중이던 전두환과 영수회담을 제안하며 8일 단식한 황교안은 정신을 잃고 병원으로 실려 갔었다. 또 비정치인과 학생운동가들도 단식투쟁을 감행했었고 올해만 해도 3월 간호법 반대의 대한의사협회, 6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반대, 7월 양평고속도로 백지화 철회와 9월 새만금 예산 삭감 항의 등의 단식규탄도 계속되었다.단식투쟁은 시작하기는 쉬워도 끝내기는 어렵다고 ‘양날의 검’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진정한 태도로 상대방의 이해와 합의를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번 이재명 대표의 경우 무표정한 여당의 아량을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2023-09-14

기념식수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모두의 집에 풀과 꽃과 텃밭의 채소만 있는 건 아니다. 나무가 더 많다. 아니 더 많이 심었다.원래 제법 큰 대추나무가 마당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감나무, 가죽나무, 뽕나무, 사철나무도 있었다. 그러나 집과 터의 규모에 비해 전체적으로 휑뎅그렁했다. 고택엔 역시 소나무라며 남편이 제일 먼저 사다 심은 여섯 그루의 소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고, 기념식수로 심은 나무들도 몇 그루 있어 볼 때마다 기껍다.남편이 손주와 함께 석류나무를 사왔다. 그리고는 손자에게 이 나무는 건이 나무야. 그러니까 물도 주고 잘 키워. 나무팻말에 제 이름을 쓰게 했다. “석류나무, 이 건, 2022년 6월 10일” 기념식수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었다. 작년 여름 사흘을 묵고 간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기념식수를 제안했다. 신박한 제안에 무조건 콜! 조경회사에 전화해서 여름에 심어도 잘 자랄 나무로 추천한 보리수를 심었다. 꽃삽 들고 사진도 찍고 팻말도 써서 박았다. “초등학교 친구들, 김정숙, 김현숙, 박창희, 최금순, 이정옥, 2022년 8월 10일” 한 친구는 저 닮은 홍매화 한 그루 더 심겠다며 우겨 우물가에 심었고, 거기에도 나무팻말을 박았다. 올봄 가장 이르게 붉은 매화를 피웠길래 사진으로 꽃소식을 전했다.위덕대 자율전공학부 24학번 성인학습자들의 모임이 있다. 매년 스승의 날에 나이가 더 어린 나를 스승이랍시고 꼭 청해서 식사를 함께하고 선물도 주신다. 작년 스승의 날에도 어김없이 황송한 대접을 받았다. 인사 삼아 모두의 집에 초대했다. 용인, 청도, 대구에서 각기 바삐 사시는 분들임에도 귀한 걸음을 주셨다. 집들이선물을 걱정하시길래 기념식수 얘기를 했다. 좋은 방법이라며 배롱나무를 꼭 사 심어 달라시며 나무 팻말을 미리 써 두셨다. “아름다운 동행, 유복혜, 박영희, 오순옥, 2022년 8월 23일” 가을에 배롱나무를 사 심고 팻말을 박았다. 올여름 분홍색 꽃을 피웠길래 사진을 올려드리며 감사함을 전했다.5월엔 선덕여왕경모회원 14명이 1박2일의 워크숍을 했다. 뜻있고 값진 나무로 기념식수를 해야 한다기에 단아하되 멋스러운 수형의 향나무를 사서 미리 심어두었다. 다같이 기념식도 하고 팻말을 망치로 박는 퍼포먼스도 했다. “선덕여왕경모회 방문 기념. 2023년 5월 22일”44년 전 딱 한 해, 소선여중 교사로 만난 인연으로 아직도 연락을 이어 온 선생님들 모임이 있다. 만발한 백일홍꽃을 단톡방에 올려 꽃구경 오시라고 초대했다. 7월 어느 날, 서울, 부산, 함양, 대구에서 5분이 태풍을 뚫고 오셨다. 흰 꽃이 탐스러운 목수국으로 기념식수를 했다. “소선회 방문 기념, 박종선, 송경숙, 유진숙, 이숙화, 임신영, 2023년 7월 15일”지난주 울릉도에 일이 있어 갔다. 베리의 죽음 후 울적함을 달랠 겸 남편도 동행했다. 남편이 울릉도의 주황색 열매가 예쁜 마가목숲을 보고 난 후 그 나무에 꽂힌 듯했다. 기어이 세 포기 사서 배에 싣고 왔다. 오늘 마가목을 심었다. 셋 중 가장 튼튼해 보이는 나무를 정성스레 심더니 한마디 했다. “이 나무는 베리 나무야.” 남편은 베리를 위한 기념식수를 한 거였다.

2023-09-13

다산처럼 읽고 쓰자

최선희 경운대 교수 더위도 가시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한다는 처서(處暑)가 지나면서 귀뚜라미가 풀밭에서 나오기 시작했지만 더위는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그런데 자연의 섭리는 놀랍다. 밤 기온이 내려가 풀잎마다 ‘흰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白露)가 찾아오며 아침저녁 시원한 바람의 손길을 느낄 수 있으니, 가을이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 것 같다. 가을하면 떠오르는 것은 단연 독서의 계절이다.9월은 독서의 달이다. 1994년 시민들의 독서문화 정착을 위해 제정된 독서의 달을 맞아 올해 2023년 슬로건 공모 이벤트가 열렸다. 총 164편의 슬로건이 접수되어 ‘펼쳐보자 책도, 꿈도’, ‘책으로 눈 맞춤, 미래로 발맞춤’, ‘책은 한 장 한 장, 꿈은 성큼성큼’ 등 20건의 슬로건이 최종 선정되었다. 이 중 눈에 띄는 구절은 ‘책은 한 장 한 장’이다. 다산 정약용의 독서법을 생각나게 하는 문구이다.다산의 독서방법은 세밀하게 읽으며 깊이 생각하는 정독(精讀)이다. 그는 자신의 지인과 자녀에게 정독의 방법으로 다섯 단계의 초서독서법을 설명했다. 독서 전 단계인 입지(立志), 실제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이해하며 뜻과 의미를 찾는 해독(解讀), 읽은 내용을 능동적으로 고찰하고 자신의 뜻과 비교하여 취사선택하는 판단(判斷), 책을 읽으면서 좋은 부분이나 교훈을 받은 부분을 기록하는 초서(抄書), 읽고 생각하고 기록한 모든 것을 통합하여 자신만의 새로운 견해로 지식을 확장하고 창조하는 의식(意識)의 단계가 그것이다.다산 정약용은 자신이 강조한 다섯 단계의 초서독서법을 몸소 실천하면서 18여 년간의 강진 유배생활 동안 5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그는 유배라는 처절하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 복사뼈가 세 번이나 구멍이 날 정도의 과골삼천(8E1D骨三穿)을 겪으며 수 만권의 책을 정리하며 편집하고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18세기 조선의 한 지식인이 자신만의 독서법으로 21세기 정보화시대에 걸맞을 정도로 세상의 정보를 필요에 따라, 요구에 맞게 정리해낸 것이다. 그의 고뇌어린 왕성한 지적 의욕과 실천하는 자세가 너무나 경이롭고 존경스럽다.다산의 초서지법(抄書之法)은 눈으로 빨리 읽는 일반 독서에 비해 엄청난 시간과 함께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때문에 무엇이든 바삐 진행되는 요즘시대에 맞지 않는 독서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독서, 즉 책 읽기의 목적이 무엇인가. 바로 ‘생각하기’가 아닌가. 남들보다 다른 생각, 어제보다 더 나은 생각으로 경험과 지혜를 쌓을 때 독서의 궁극적인 목적이 실현되는 것이다. 운동을 하면 몸의 근육이 단련되듯이 독서를 하면 생각의 근육이 단단해져 사고력이 강화됨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곧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추분(秋分)이 다가온다. 밤의 길이가 점점 길어지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음을 실감할 것이다. 이 가을에, 천고(天高)에 떠다니는 뭉게구름과 같이 천천히 읽고 써보자. 하루가 멀다 하고 세상은 빨리 바뀌고 있지만 읽기와 쓰기도 그에 맞춰 따라가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2023-09-13

정치, 그 책임의 무거움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탄핵의 위기를 맞았다. 아들의 사업에 부적절하게 관련된 혐의가 제기되었다. 하원의장 케빈 맥카시(Kevin McCarthy)는 대통령이 권한을 남용하고 공권력을 방해하였으며 권력을 부패하게 한 흔적이 짙다면서 의회가 탄핵 소추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또한, 그는 대통령이 가족이 부당하게 연루된 일에 대하여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일삼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대통령의 심각한 일탈에 동조하며 방관하는 백악관 당국에도 심각하게 경고하면서, 미국 의회가 즉각 대통령 탄핵 절차에 돌입할 것을 요청하였다. 바이든 대통령 측은 직접적인 증거가 제시되지 않은 정치적 공세에 대처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고 반응했지만, 미국 시민의 절반 정도는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다고 전해진다.국내의 한 도지사가 국민소환의 위기에 처했다. 최근 있었던 수해 상황에서 있었던 지하차도 사고에서 그가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여 인명의 손실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해당 지역에서 주민소환의 요건인 서명인 확보가 시작되었으며,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를 정치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소환을 주장하는 측은 ‘도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책임져야 할 지사가 참사 당시 직무를 유기하고 부적절하고 무책임한 언행으로 일관해 도정의 신뢰가 사라졌다’고 한다. 물론, 안정적인 도정의 지속적인 진행을 위해 소환을 반대하는 시민들도 있다. 뽑아준 유권자의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 선출직 공직자의 업무수행은 크나큰 도전을 받는다.선출직 공직자는 끊임없는 감시와 견제의 눈길을 피할 길이 없다. 시민들의 소환압박은 물론, 매서운 언론의 눈초리는 늘 곁을 떠나지 않는다. 공인으로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정직해야 하고 투명해야 한다. 충분한 전문성을 가지고 성실하고 유능하게 매사에 임해야 하며, 모든 일의 진행과 결과는 한 치도 빠짐없이 공개되고 공정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주어진 임기 내내 비판과 평론이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 겉으로는 균형을 잃지 않는 공직자의 모습을 지켜야 한다. 세평에 휘둘리지 않고 이념에 따라 편파적이지 않으며 국민과 시민만을 위하여 봉사하며 섬기는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국민의 혈세를 봉급으로 받으며 일하는 공직자의 가치를 날마다 증명해야 한다. 실로 어려운 일이지만, 국민은 때가 되면 다시 누군가를 뽑아 세워 일을 맡긴다.철학자 플라톤(Platon)은 지도자의 무지(無知)가 공동체 건설에 있어 최악의 조건이라 하였다. 무식한 지도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지도자, 알아야 할 사항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지도자가 가장 나쁜 지도자라는 뜻이 아니었을까.인간인 이상 실수가 있을 수 있지만, 실정(失政)의 책임(責任)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지도자가 되면 위험하다. 국민이 주인인 민주사회에서, 더 많은 국민이 인간다운 삶과 행복한 일상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문제는 심각하다. 정치는 그 책임의 무거움을 알고나 있는가.

2023-09-13

‘청년이 아프다’

홍석봉 대구지사장 요즘 청년들이 많이 아프다. 경북의 청년 인구가 빠르게 줄고 있다. 2037년이면 경북도민 10명 중 청년은 2명이 채 되지 않을 것으로 예측됐다. 출생 인구가 줄면서 청년 인구도 함께 줄고 있다. 유입 보다 유출이 더 많다. 교육환경이 좋고 일자리가 풍부한 수도권으로 계속 빠져나간다. 직업이 가장 큰 이유다. 가족, 교육 등이 다음 순위다.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는 ‘청년 백수’가 126만 명이라는 통계도 있다. 졸업자 열 명 중 3, 4명은 백수다. 아예 구직활동을 포기하고 그냥 쉰다는 청년도 32만 명이라고 한다. 속칭 ‘니트족’이다.취업은 결혼과 출산에도 영향을 미친다. 청년 3명 중 1명 만이 결혼을 긍정적으로 본다. 청년 중 절반 이상은 결혼해도 자녀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청년들의 결혼관과 자녀관이 크게 바뀌었다. 결혼하지 않는 이유로는 경제 문제를 첫 손 꼽는다.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과 ‘빚투(빚내서 투자)’로 빚더미에 올라 인생을 저당잡히는 이들이 적잖다. 청년들의 현주소다.청년 유출은 지방소멸과 직결된다. 정부 차원에서도 지방소멸과 균형발전을 위해 여러가지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그다지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매년 9월 셋째 주 토요일(올해 9월 16일)은 ‘청년의 날’이다. 청년 문제에 관심을 높이기 위해 2020년 법정기념일로 지정됐다. 경북도가 12일 경주에서 청년의 날 행사를 열었다. 지역 청년들이 참여하는 각종 이벤트가 마련됐다. 청년들의 고민을 함께 논의하는 자리도 가졌다. 이철우 도지사는 “청년이 모이고, 지방에 살아도 희망 가질 수 있도록 대전환을 이루겠다”고 했다. 청년들에게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09-13

돌확

윤명희 수필가 주말이면 농막에 간다. 산이 둘러쳐진 그곳에는 이제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 잎만 무성한 수국은 아직 꽃대를 밀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에는 대신 쥐똥나무 꽃이 하얗게 내려앉아 있다. 나는 옮겨 심은 꽃들을 살피며 물을 준다. 그 꽃들은 그녀와 함께 남편의 친구인 K씨의 고향집에서 왔다.고향집 골목에 들어서자 빈집 냄새가 났다. 첫 집을 시작으로 옆집도 앞집도 비어있었다. 귀퉁이가 내려앉은 흙 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담쟁이가 눈치도 없이 새순을 틔웠다. 낡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대문 옆에 먼지 앉은 유모차가 오지 못하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붉게 핀 목단 옆에는 작약이 꽃망울을 달고 둥굴레와 금낭화가 작은 등을 켜고 있다. 물기를 흠뻑 채운 장미가 지붕위로 발돋움 하고, 큰 화분에는 수국이 난초와 세력다툼을 하고 있다. 봄이면 다시 채워질 거라 기대했던 빈 화분들이 풀쑥 쓰러진다.마지막까지 고향집을 지키던 할머니들이 한 분 두 분 돌아가시자 빈집들이 흉물처럼 남았다. 곧 허물 거라는 말에 남편과 나는 꽃나무를 가지러 먼 길을 갔다.우리는 하나도 남기지 않을 요량으로 괭이와 삽질을 해댔다. 지렛대를 이용해 수국이 든 큰 화분을 대문 밖까지 가져가는 일에 온 힘을 실었다. 아래채 뜰에 남보랏빛 꽃이 한 송이 피어있었다. 실금이 간 시멘 바닥 사이에 가냘프게 앉아있는 그것이 허물어지는 빈집을 홀로 지키게 할 수는 없었다. 괭이로 바닥을 깨 조심스레 뿌리를 거두었다.쉬었다 하자는 소리에 나는 돌확이 가까이 있는 뜰에 앉아 장갑을 벗었다. 집에 들어설 때부터 눈이 갔지만 관심 없는 척 했던 것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돌확에서 장례식장 영정 사진으로 뵈었던 K씨 어머니가 어른거렸다.이른 아침, 어머니는 장독대를 반질하게 닦고, 돌확에 들깨를 갈아 국을 끓였을 것이다. 학교에 늦겠다는 소리가 마당을 가로질러 사랑채 문을 두드린다. 서너 번의 재촉에 잠이 깬 아들이 눈을 부비며 방문을 연다. 머릿수건을 한 어머니는 텃밭에 나가고, 차려놓은 밥상이 기다린다. 마당 가운데 있는 살평상에 누워 못다 깬 잠을 떨친 아들은 엄마의 밥상 앞에 앉는다. 따뜻한 쑥국 향을 배에 채운 그는 책가방을 들고 대문을 나선다. 어스름 해가 지면 된장국 냄새가 풍기는 대문을 들어선다.시집 와 평생을 살았던 어머니의 집을 허물 수밖에 없는 아들의 마음을 보지 않으려고 나는 가져갈 것만 욕심내고 있다. 나는 친정엄마가 남긴 물건을 하나도 가지지 못했다. 일찍 돌아가신 탓이라 해보지만, 결국은 손때 묻은 물건의 의미를 챙기지 못한 까닭이다. 이제 남의 집 처마 끝에 매달아둔 치자에도 눈이 가고 벽에 걸어둔 둥근 채까지 손이 간다. 이것도 아깝고 저것도 아깝지만 눈이 자꾸만 말없이 앉아 있는 돌확에 머문다. 차마 달라고 하기가 뭣해 에둘러 던졌다.“저건 어디 갖다 두려고?”가져가라는 말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나는 벌써 놓을 자리까지 마련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내 속을 들여다 본 듯 했다. 그의 마음이 변할세라 남편의 등을 떠밀었다.어둑해서야 농막에 도착했다. 내려놓고 보니 배불뚝이 큰 항아리가 일곱 개나 된다. 옆집에서 버려둔 것까지 욕심낸 게 다 모였다. 나는 농장에 갈 때마다 돌확이 먼저 보이라고 입구에 있는 쥐똥나무 아래에 내려놓았다. 외롭지 않게 부레옥잠을 안겨주고, 함께 집을 떠나온 꽃들을 둘레둘레 심어주었다. 따라온 이웃집 항아리도 서로 마주보게 놓고 그 위에 화분을 올려두었다.보름달이 은은한 밤, 농막에 누워 전깃불을 끈다. 주중의 피곤함이 노곤히 내려앉는다.달빛 속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마주앉은 항아리들이 맞장구를 치고 먼저 이사 온 쥐똥나무가 넌지시 돌확의 어깨너머로 끼어든다. 나도 모로 누워 바깥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의 얘기가 자장가가 된다.

2023-09-13

무오일주(戊午日柱)

육십갑자 중 오십다섯 번째는 무오(戊午)다. 천간(天干)의 무토(戊土)는 황토색을 가진 높은 산이다. 지지(地支)의 오화(午火)는 봉화대의 횃불 같다. 동물로는 누런 말이다.무오일주는 뜨거운 용암을 품고 있는 화산의 물상이다. 겉으로 보기에 침착한 선비의 모습이다. 마음속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불안정함을 가지고 있다. 생각이 많아 복잡한 내면의 소유자다. 우직하고 자존심이 강하지만, 변덕스럽지는 않다. 자신의 감정을 숨길 줄 모르며, 거짓말은 하지 않는 편이다.친구를 좋아하며 신용과 의리를 중요시 여긴다. 허나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호불호가 분명하여 타인에게 미움을 사기도 한다. 겉으로 보면 속이 드러나지 않아 우직한 곰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두뇌 회전이 빠르다. 또한 스태미나가 넘치기에 운동선수를 하거나 취미로 운동을 하면 좋다.장점으로는 독립심과 자존심이 남다르고 강건한 기상으로 카리스마와 부드러움을 갖춘 지도자 모습이다. 주어진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감 있어 일을 추진할 때 지속 능력이 좋지만, 주변 사람들과 갈등과 고통이 수반된다. 그렇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해결능력이 탁월해 잘 대처하며, 주변 사람들도 도와주는 타입이다. 하지만 강압적이고 독단적이며 폭력적인 이중적 모습도 보여준다.미국의 소설가 존 스타인벡(1902∼1968)이 1939년에 발표한 ‘분노의 포도’가 있다. 1929년에 경제대공황이 시작되고 미국 중부에는 극심한 가뭄과 모래폭풍이 덮친다. 옥수수 농사를 망친 가난한 농민들의 삶을 보여준다. 경제 파탄과 자연재해에서 트랙터가 인간의 일을 대신하여 저소득층은 실업자로 전락하고 만다.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이야기의 주인공 톰 조드는 실수로 살인하여 4년을 복역한 뒤 가석방 된다. 돌아오는 도중에 어릴 때 목사였던 케이시를 만나 동행하면서 고향의 소식을 듣는다. 집은 가뭄과 은행 빚에 의해 쫓겨나기 직전이다. 구직광고를 보고 낙원의 땅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기로 결정한다. 케이시도 함께한다.오클라호마에서 캘리포니아까지는 수 천 킬로미터가 되는 먼 길이었다. 서부로 가는 인파 행렬 속에서 조부모가 세상을 뜨고 톰의 형과 임신한 여동생의 남편이 자기 살 길을 찾아 사라져 버린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가족들은 막연한 기대를 품고 캘리포니아에 도착한다.거기도 일하려는 사람은 많고, 기업화된 농장들은 담합해서 임금이 턱없이 낮아져 있다. 굶주린 아이들은 병들어 가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결국 노동력 착취에 반발해 노동자들은 조합에 합류하기 시작하고, 파업을 이끌던 케이시가 삽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톰 역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어 가족 곁을 떠나게 된다.작가는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간다’라고 쓰고 있다. 톰의 어머니는 모든 것을 잃더라도 가족만은 잃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가난에 허덕이며 절망하면서도 끝까지 인간의 존엄성만은 놓지 않으려 애쓴다. 소외 받는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깨닫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고 앞장서 싸울 사람으로 성장해 나간다. 희망의 가능성은 여전히 공동체, 즉 가족에게 있음을 톰의 어머니를 통해 보여 주고 있다.무오일주 여자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활발한 활동성을 가지며 일의 추진력이 좋아 여장부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본인이 잘 꾸미기도 하지만, 배우자의 외모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남자는 겉으로 보면 마초 같은 모습과는 달리 알뜰하게 챙기는 성향이 있다. 미인과 인연이 많아 연애를 잘하는 편이다. 공명심이 있어 쓸 필요가 없는 곳에 돈을 쓰기도 한다. 남녀 공히 성적 유혹에 빠질 위험성이 있어 자신을 다스리는데 노력할 필요가 있다.무오일주는 만물의 생명력이 깃든 광활한 땅의 이미지를 하고 있고,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의 모습이다. 말이 하늘의 기운이 가장 무성한 무(戊)를 만났으니 조화롭고 활기찬 기운이다. 마치 큰 산 위를 뛰어 달리는 말과 같다. 진취적이고 정열적이며 화끈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야생마 같은 물상으로 어디에 구속되기보다는 자유 분방함을 즐긴다.또한 말은 깔끔한 동물이다. 발정도 일 년에 한 번만 하고, 인공수정도 안 된다. 그런데 말이 문제가 좀 있다. 우리가 머리 나쁜 사람을 보고 ‘말대가리’라고 하는데, 이 말은 주인을 몰라본다는 것이다. 그냥 올라타는 놈이 주인이다.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다. 미래나 과거가 아닌 현재에 충실하다. 어떤 규격이나 틀도 없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각종 제약에서 벗어나는 성향이다. 하지만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한 힘과 정열을 어디에 쓰느냐가 관건이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조선시대에 4대 사화(士禍)가 있다. 첫 번째가 무오사화다. 1498년(연산군 8년) 무오년에 벌어진 일이다. 성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단종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이라는 이유로 훈구세력이 사림의 대표 김종직 일파를 처단한 사건이다. 김일손은 처형되고, 그의 스승이었던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했다.권력 다툼에는 항상 피 냄새가 난다. 훈구파를 비판하며 등장한 세력이 사림파다. 권력을 뺏기 위해 지키기 위해서는 반대파를 숙청하는 일이다. 김일손은 춘추의 필법으로 사관의 책무를 지키기 위해 목숨도 마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선은 특별히 명분을 중시하는 사회였다. ‘선비를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라는 말은 체통과 명분을 중시했던 사회였기 때문이다.지금도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처리하고 있다. 명분이 정의롭다면 그들의 도덕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과연 시행자들은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는 사람일까라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불의와 부당함에 분노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침묵하면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2023-09-13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

우정구 논설위원 봄과 가을은 기온은 비슷하지만 날씨의 변화는 확연히 다르다. 봄철에는 소나기 등이 자주 내리기도 하고 계절 내내 심한 바람도 많이 분다. 반면에 가을은 바람이 불어도 산들산들 불고, 청명한 날씨가 며칠씩 이어지는 등 얌전한 날씨가 특징이다.음양오행설은 이런 계절의 차이를 기운(氣運)으로 풀이한다. 봄은 온갖 만물이 소생하는 것처럼 발산하는 기운이 가득하고, 가을은 결실을 맺는 수렴의 기운이 세다고 한다. “봄바람 났다”는 말은 있으나 “가을바람 났다”는 말이 없는 이유다.등화가친(燈火可親)은 “등불을 가까이할 수 있다”는 뜻으로 가을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대 중국의 문인 한유(韓愈)가 독서를 권장하는 시에서 한 구절 따와 유래가 됐다고 한다.옛 우리 선비들도 가을이 오면 한여름 무더위에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 글 읽기에 정진했다. 특히 수확이 풍성한 가을은 마음이 안정돼 공부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로 꼽았다.우리나라 국민의 독서율이 인터넷, 스마트폰 등의 보급으로 갈수록 저조하다. 문체부가 조사한 국민독서실태 조사(2021년 기준)에서 국민의 연간 독서율(전자책, 오디어북 포함)은 47.5%에 그쳤다. 성인 두명 중 한명은 1년간 책을 한 번도 읽지 않는다는 의미다. 읽은 사람의 연간 독서량도 9.5권에 그쳐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다.독서는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다. 복잡한 세상에 사리분별력을 키워주는 데도 도움이 된다. 특히 성장기 어린이의 사고발달에 매우 유익하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책은 한권 한권이 하나의 세계다”고 말했다. 가을의 길목에서 독서의 세계로 빠져보자./우정구(논설위원)

2023-09-12

정치인의 ‘거친언어’, 유머로 바꿀 수 없나

심충택 논설위원 정치인들의 험한 말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마디마디에 지성은 찾아볼 수가 없고 살벌한 기운만 넘친다.정치인들의 막말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지켜야 할 선이 있는데 최근에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진영을 극도로 의식하면서, 중간지대에 있는 국민은 안중에 없다. 이런 정치문화가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면서, 정치인이 이제 독버섯 같은 역할을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정치인들의 거친 언행들이 사회병리의 토양을 만드는 것이다.민주당 박영순 의원이 최근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을 향해 “북한에서 쓰레기가 나왔어, 쓰레기가”라고 내뱉은 것은 탈북자에 대한 그의 증오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행위다.박 의원은 전대협 부의장 출신이다. 지난달 말 민주당 전남도당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서영교 최고위원은 “일본의 대변인 노릇이나 하는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 그리고 국민의힘은 일본 총독부보다 더 못된 짓을 하고 있다”고 했고, 장경태 최고위원은 “당장 멈추지 않으면 독립운동에 버금가는 국민적 운동이 용산총독부를 향할 것임을 경고한다”고 했다. 지난주에는 최강욱 의원이 대정부 질문 중 대통령을 일컫는 자리에서 “윤석열씨”라고 했다. 지난달엔 김은경 민주당 혁신위원장이 “‘윤석열 밑’에서 임기를 마치는 게 치욕스러웠다”고 했다. 국민이 선거로 선출한 대통령까지 일상의 조롱거리로 삼는 것이다. 기본적인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다. 의회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 등 공인에 대해 존칭을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다.민주당내에서 이처럼 거친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이러한 난폭한 언행은 내년 4월로 예정된 총선이 다가올수록 더 심해질 것이 뻔하다. 강성팬덤의 입맛에 맞는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말을 사용하다보니 언어가 계속 더 험악해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해당 정치인 지지자들이 SNS나 커뮤니티에 쓰는 말들도 난폭하기 짝이 없다.온갖 조롱과 멸시, 저주에 가까운 글들이 인터넷에 넘쳐난다. ‘이데올로기 전쟁’이 지금처럼 일상화 한 적이 있었나 싶다.정치인들은 지금 추석명절을 앞두고 특히 고물가로 고통받는 서민들의 싸늘한 민심을 회복하는 데 집중해야 할 때다. 지난 주말에는 전북 전주의 한 빌라 원룸에서 생활고를 겪은 듯한 40대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된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 숨진 여성 곁에는 한동안 먹지 못한 듯 쇠약한 상태의 4세 남자아이가 있었다니 충격적이다. 올해 하반기는 취업문이 더 좁아져 기업채용공고를 기다리는 청년들의 가슴을 졸이게 하고 있다.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당장 해결해야 할 현안은 지금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정치인들은 지금부터라도 위기가정과 청년취업 등 민생을 돌보는데 집중해 주길 바란다. 사회분위기를 황폐하게 하는 거친 언어들은 다수 유권자의 반발과 환멸을 불러올 뿐이다. 선거 판세에도 당연히 도움이 안된다. 국민은 자기와 이데올로기가 다른 상대까지도 유머로 감싸 안는 그런 정치인을 보고 싶어 한다.

2023-09-12

공교육의 몰락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종종 누구는 어디를 가서 학교에 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의아했다. 방학을 이용해서 갈 수도 있을 텐데, 학기 중에 결석까지 하며 갈 이유가 무엇일까? 이 주제로 아내와 대화를 나누던 중 ‘개근 거지’란 단어를 알게 되었다. 단어의 어감에서 짐작하듯 학교를 빠지지 않고 다니는 학생을, 가난해서 학교만 다닌다고 비하하는 뜻이 담겨 있다. 그 옛날 개근상이 근면 성실의 상징이었다면 이제 개근상은 가난한 집안 환경을 드러낼 뿐이다.물론 부모 책임하에 학교를 벗어나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은 필요하다. 체험활동의 교육적 의미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다만 그것이 현실에서 부모의 재력에 따른 교육 차별과 맞닿아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 집도 학기 중에 어디를 가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스템은 개인의 (무)의식을 파고든다. 그리고 그 결과 학부모들에게 공교육은 신뢰하고 따라야 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선별적으로 이용하는 대상이 되었다. 현장학습 제도가 오롯이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매개가 된 것은 분명하다.서이초 선생님의 극단적 선택 이후 안타깝게도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연이은 비극적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각기 조금씩 구체적 사연은 다르지만, 학생 그리고 학부모와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으며 학교 당국의 무관심이 커다란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특히 서이초 선생님의 사건이 보도되고 우울증이 심해졌다는 기사를 통해 보건대, 언론의 보도가 도화선이 되어서 그간 잠재되어 있던 분노 혹은 억울함의 감정이 폭발된 것이다. 지금의 공교육은 좋은 선생님이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이라는 어느 교사의 인터뷰가 가슴에 꽂힌다.우리 사회는 공교육의 붕괴라는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못하다. 해결을 위한 첫 단계인 원인 분석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서이초 선생님의 49재에 연가 혹은 병가를 쓰는 선생님을 징계하겠다는 교육부의 태도나 선생님의 자살이 정신력 문제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 사회가 공교육의 현실을 외면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미 공교육의 권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아졌는데, 선생님들에게는 이전 시대의 역할을 요구하는 것은 모순 아닌가. 지금의 공교육은 교육 서비스업의 하나가 되었다. 이미 대학은 오래전부터 ‘소비자 만족도 조사 1위’를 홍보문구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 영향은 초등·중등교육 현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대학 입시에 영향을 주는 생활기록부 작성이 끝나자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아 정상적인 학사 운영에 어려움이 생기는 현실은 또 다른 사례이다. 이제 선생님은 월급을 받고 지식과 정보를 알려주는 대상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 현장을 지키라는 교육부의 외침은 공소하게 들려올 뿐이다. 교권 회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공교육을 대하는 학생과 학부모의 인식을 바꾸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관습화된 교육 시스템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될 수 있다.

2023-09-12

가을의 어귀에서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하루가 다르게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백로(白露) 지난 한낮의 가을볕은 노염의 여세를 몰아 여전히 따갑게 내리쬐지만, 살랑살랑 실바람은 산과 들판을 쓰다듬으며 선들선들 가볍게 지나간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초가을, 무엇을 해도 좋을 시기라서 그런지 아침 저녁으로 산책로 등지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많아졌다. 삼삼오오 다니면서 얘기꽃을 피우거나 애완견을 데리고 걸어가는 사람, 운동삼아 뛰어가거나 자전거를 타고가는 사람 등을 둘레길이나 해변, 강변, 공원 등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마치 가을 마중이라도 하듯이 간편한 차림으로 집을 나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가벼운 운동을 하거나 산보하는 모습들이 여유로워 보인다. 특히 휴일의 아침산책이나 산행 등은 느긋한 마음으로 자연을 접하며 일상에 절여진 심신을 이완할 수 있기에 필자도 간혹 즐기는 편이다. 쳇바퀴 돌 듯하는 빠듯한 일상의 쉼표같은 휴식이나 멍때리기, 걷기 등은 어쩌면 숨가쁘게 살아가는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위안 삼는 ‘자락(自樂)의 시간’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그렇게 지난 주에 이어 이번 휴일도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섰다.포도(鋪道)를 조금 걷다가 야트막한 산길의 입새부터는 신발을 벗어 두고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즐겨한다는 맨발 걷기를 지척의 동네 뒷산에서도 할 수 있다니 여간 다행스럽지가 않다. 진흙과 백토, 풀잎, 낙엽 등으로 이어지는 숲길 초반의 촉감은 부드럽고 매끈하고 약간 간지럽게 다가왔다. 거침없이 내딛는 빠른 발길보다는 땅바닥을 살피며 보폭을 작게 하고 조심스럽게 걷는 느린 발걸음으로 차츰 숲에 접어들면, 숲과 나만의 은밀한(?) 대화와 교감이 시작된다.해뜨기 전 숲의 고요를 깨는 것은 온갖 풀벌레들의 울음이다. 간간이 새들의 지저귐도 들려오지만, 일정한 음률과 리듬으로 울리는 풀벌레들의 합창은 이른 아침부터 귀를 맑게 해준다. 조금 지나니 댓잎을 가볍게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들려오고, 한여름의 햇살 받아 한껏 푸르던 잎새들이 녹음에 지쳐서 물들 채비를 하는 듯 황록색과 담록으로 어우러지니 눈 호강이 따로 없는 듯하다. 거기에 참나무가 즐비한 숲길 여기저기에 떨어진 도토리가 앙증스럽게 반기니 숲은 언제나 이처럼 같은 자리에서 다른 듯 새로운 모습을 보이는데, 늘 무엇인가에 쫓겨 안절부절 허둥대는 자신은 언제쯤 숲의 여유와 안식을 배울 수 있을런지 발바닥을 따갑게 자극하는 돌부리가 채근하는 듯했다.그렇게 2시간여 산길을 맨발로 오가다 보니 서늘함 속에서도 얼굴에 땀방울이 맺힌다. 길을 나서면 이처럼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것들이 많아지듯이, 사람 사이에도 가끔씩 왕래와 소통이 있어야 잡풀 무성한 산길이 되지 않을 것이다. 세상살이의 교분이나 정의(情誼)도 결국 자신이 하기에 달린 것이다.

2023-09-12

불멸이 된 ‘좀비 정찬성’

지난 8월 26일 밤, 대한민국의 뭇 남성들은 두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느라 정신없었다. 나도 마찬가지.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듯 줄줄 새는 눈물에 ‘정신적 수도세 폭탄’을 염려해야 할 정도였다. 여성들도, 다른 나라 사람들도 울었다. “누가 옆에서 양파를 까고 있는 거지?”라는 서양식 유머가 SNS에 돌았다. UFC 은퇴 경기를 치른 정찬성 때문이다.본명보다 ‘코리안 좀비’라는 링네임이 더 유명하다. 이 별명이 그의 화끈한 경기 스타일을 말해준다. 아무리 맞아도 쓰러지지 않고 끊임없이 상대를 향해 전진하는 ‘좀비 스타일’은 팬들을 열광시켰다. 좀비가 세계 무대에 진출한 2010년, 그해 격투기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린 굿즈 상품이 ‘코리안 좀비’ 티셔츠다.경북 포항 출신의 무명 선수가 세계 무대에 진출해 강자들과 뜨거운 난타전을 벌이며 커리어를 쌓는 동안 격투기는 마이너한 서브 컬처에서 주류 스포츠 산업으로 그 위상이 달라졌다. 레너드 가르시아, 마크 호미닉, 더스틴 포이리에 등을 꺾고 당대 최강의 챔피언 조제 알도와 타이틀전을 벌인 게 2013년이다. 경기 중 어깨가 탈구되는 큰 부상을 입는 바람에 아쉽게 패배했지만,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빠진 어깨를 직접 끼워 맞추려는 투혼을 보였다. 이후 부상 치료와 군 복무 등으로 3년여 공백이 있었지만, 다시 돌아와 이길 때나 질 때나 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명경기를 펼쳤다. 그의 경기는 격투기 그 자체였다.어느덧 서른 후반이 된 정찬성이 절대 강자인 맥스 할로웨이와 붙었다. 할로웨이의 압도적 우세가 예상됐다. 좀비는 모든 걸 다 걸고 후회 없이 싸우겠다고 했고, 정말 그렇게 싸웠다. 최고의 타격가인 할로웨이를 1라운드에 몰아붙였다. 2라운드에선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펀치에 관자놀이를 맞고 쓰러졌고, 목조르기 기술인 ‘아나콘다 초크’에 걸렸다. 기절한 듯 보였다. 그런데 빠져나오는 게 불가능한 그 상황에서 믿을 수 없는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좀비는 좀비였다.인생의 마지막 라운드라는 걸 직감했을까? 3라운드 공이 울리자마자 전성기 때의 ‘좀비’로 돌아가 할로웨이에게 돌진했다. 싱가포르 경기장이 터질 듯 끓어올랐다. 20초 동안의 엄청난 난타전. 단 0.1초 차이로 할로웨이의 강력한 카운터가 정찬성의 안면에 먼저 꽂히면서 경기가 끝났다. 마침내, 좀비가 쓰러졌다. 쓰러지는 순간까지 허공에 대고 두 방의 주먹을 더 휘둘렀다. 모든 것을 불태운 산화였다. 할로웨이는 정찬성을 일으켜 세운 뒤 마이크를 잡고 “좀비는 진정한 레전드다. 좀비를 위해 더 크게 소리지르라”고 외치며 존경을 표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만 할게요. 4, 5등 하려고 운동하는 게 아니거든요. 후회 없이 준비했는데… 챔피언이 될 수 없으니 그만 해야죠.” 좀비의 17년 격투 인생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언제나 화끈한 난타전을 펼친 탓에 이제는 상대의 주먹을 견딜 내구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불구덩이로 뛰어든 것이다. 은퇴 발표 후 옥타곤을 나서는 순간, 그의 테마곡인 ‘더 크랜베리스’의 ‘Zombie’가 울려 퍼졌다. 패배한 선수의 음악을 트는 건 이례적인데, 은퇴하는 레전드를 위한 UFC의 경의였다. 처절한 싸움에 삶을 다 바친 남자의 마지막 무대. 때로 어느 스포츠의 한 장면은 그 종목보다 위대하다. 모든 관중들이 ‘좀비’를 부르는 함성 속에 싸움을 내려놓은 그가 아내와 포옹하는 순간이 그랬다.“돈을 벌거나 안전한 승리에만 관심 있는 선수들과 달리 그는 이 스포츠의 실제 모델이다”, “좀비는 챔피언 벨트를 얻지 못했지만 더 위대한 불멸을 얻었다” 정찬성의 은퇴 영상에 달린 해외 팬들의 댓글이다.좀비의 마지막 상대가 될 수 있어 영광이었다는 맥스 할로웨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방패를 든 채로 쓰러지는 것보다는 언제나 칼을 든 채로 쓰러지는 것을 택한다”고.사람들은 묻는다. 모든 걸 불태우면 뭐가 남느냐고. 정찬성이 답한다. 감명과 영감, 그리고 작은 불씨들이 남는다고. 그게 다른 이들의 생으로 옮겨 붙어 빛과 열기가 된다고. 나는 앞으로 용기와 꺾이지 않는 마음이 필요할 때면, 죽을 걸 알면서 온몸으로 온 생애로 죽음을 향해 돌진한, 그렇게 영원히 살게 된 정찬성의 장렬하고 아름다운 산화를 떠올릴 것이다.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코리안 좀비!

2023-09-12

일요일과 토마토 수프

주말 아침, 깨끗이 씻은 복숭아를 잘라 그릇 가장자리에 담는다. 금요일 퇴근길에 사온 그릭 요거트를 수저로 크게 퍼서 가운데에 담고 그 위에 메이플 시럽을 뿌린다. 요즘 다시 식이 조절 중이라 과자를 먹지 않으려 하지만 오늘은 주말이니까, 괜스레 너스레를 떨며 달달한 과자 조각도 듬뿍 올린다.빠른 손놀림으로 그릭 요거트를 만들어 냈다면 미리 끓여 두었던 뜨거운 물로 녹차를 우린다. 투명한 물에 연둣빛 분말이 점차 퍼지는 걸 지켜보며 아침의 부산스러움을 조금 낮추어 본다.식사를 마치면 그간 애써 흐린 눈으로 외면하곤 했던 집안의 상태를 살핀다.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 정돈되지 못한 각종 생활용품들, 한가득 쌓인 설거지, 밀린 빨래들, 비에 젖어 퀘퀘한 냄새를 풍기는 운동화까지 그야말로 무질서와 대혼란의 종결지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잠깐 딴청을 부려보지만 마음 속 깊이 어서 움직여야 한다는 조급함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우선 암막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다. 그 후 다 먹은 그릇을 설거지통에 갖다 놓으며 밀린 설거지를 처리하고, 그 다음은 가스레인지와 그 주변부에 베이킹소다와 식초를 섞은 주방 세제를 뿌려 기름때를 불린다. 음식물을 처리하면서 냉장고 안도 비우고, 마찬가지로 만들어둔 세제를 뿌린 후 마른 걸레로 닦아낸다. 주방이 얼추 마무리 되었다면 다음은 바닥을 청소한다. 바닥 다음은 책상 위, 그 다음은 빨래, 그 다음은 각종 쓰레기 정리 등등 7평 남짓한 좁은 원룸이지만 발길 닿는 대로 청소하다보면 두세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꾸준한 속도로 달려 나가는 마라토너처럼 길고 묵묵한 수행을 꾹 참으며 나아가다 보면, 다행히 저 멀리 결승선이 보이기 시작한다,청소가 마무리되어갈 때쯤이면 다시금 배가 고파진다. 이제는 가을을 앞두고 꼭 생각나는 음식인 토마토 수프를 만들 차례다. 냉장고에서 금요일 저녁에 사둔 버섯과 양파, 당근, 브로콜리, 토마토, 소고기를 차례대로 꺼낸다.양파와 토마토를 손에 쥘 때면, 언제나 듬직한 모양새로 안정감 있게 자리해서 기분이 좋아진다. 당근과 브로콜리도 차례대로 찬 물에 깨끗이 씻어내며 몸의 열기는 물론, 반복되는 일상 위로 쌓인 무료함도 탈탈 털어낸다.청소는 숨이 가쁘게 정신없이 움직였다면, 칼질하는 시간만큼은 천천히 나아가야 한다. 빠른 속도와 효율성만 보고 움직였다간 다치기 쉽기 때문이다, 느릿느릿 도마를 두드리는 칼질 소리와 함께 주방을 채우다보면 다시금 집 안의 온기가 훈훈히 도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안정된다.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나면 브로콜리의 머리 부분을 30초 정도 데쳐둔 후 작게 손으로 떼어내어 큰 그릇에 손질한 재료를 한 데 담는다. 여기까지 마쳤다면 큼지막한 프라이팬에 동물성 버터를 한조각 올리고, 버터가 녹으면 지방이 적은 부위의 소고기를 굽는다. 어느 정도 고기의 핏기가 가시면 당근, 버섯, 양파, 브로콜리, 그리고 큼지막하게 썰은 토마토 7~8개 정도 차례대로 넣어준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다음은 재료가 잠길 만큼 물을 넣어준 후 월계수 잎, 카레 가루 2스푼 정도 넣어 향과 감칠맛을 더한다. 냄비 뚜껑을 닫고 2~3시간 정도 푹 끓여주면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이맘때 딱 먹기 좋은 토마토 수프가 완성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다른 재료보다 토마토의 양을 훨씬 많이 넣어야 한다는 점이다. 토마토의 갯수를 더 늘려도 되고, 시중에 파는 토마토 퓨레를 4~5 수저 더 넣어 토마토의 맛과 향을 강하게 내면 더욱 좋다.준비한 재료를 썰어 넣어 푹 끓이기만 하면 돼서 그리 복잡한 요리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 곁에서 지켜보며 끓여야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많은 주말 오후에 시도해야 하는 요리다. 대량으로 만들어 놓고 소분 후 냉동실에 넣어두면 원하는 때마다 꺼내어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기도 좋고, 무엇보다 소화가 빠르고 속이 편해서 기운 없을 때 먹으면 좋은 음식이기도 하다.아직 대낮의 태양은 뜨겁지만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요즘, 퇴근 후 창문을 열고서 선선한 바람과 함께 토마토 수프를 먹다 보면 여름 내내 끈적하게 쥐고 있던 지난 미련을 보낼 수 있게 된다. 사소하지만 부지런히 가꾸어 나가는 일상의 습관으로 다시금 보통의 월요일로 나아가 본다.

2023-09-12

‘1-3 일동’ 감사 연꽃

강길수 수필가 책상 위 컴퓨터 모니터 곁에 연꽃 한 송이가 있다. ‘1-3 일동’ 감사 연꽃이다. 아까워 못 마시는 작은 혼합 음료병이 변신한 연꽃이다. 벌써 3주가 지났다. 연꽃엔 명함보다 조금 큰 종이쪽지가 붙었다. 쪽지에는 이런 글귀가 쓰였다.“항상 저희를 위해 힘써주셔서 감사합니다♡ 1-3 일동”큰 글씨 세 줄로 쓴 감사 글 아래 왼쪽 공간에, 분홍 하트 눈을 가진 토끼를 그렸다. 토끼 왼쪽과 오른쪽에 위아래로 분홍 하트가 각각 두 개씩 그려져 있다. 그 오른쪽엔 1학년 3반 일동 표시 글을 써넣어 균형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쪽지에는 모두 7개의 하트가 있다. 사랑과 행운의 하트가 틀림없으리라.8월 중순 금요일, 흐리고 비가 조금씩 내리는 날이었다.이웃 시 S 여고에서 일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마칠 시간이 가까워 교사(校舍) 입구에 놓은 시료 채취기 앞에서 기다렸다. 안에서 여학생 네댓 명이 나오더니, 내게 쪽지를 붙인 혼합 음료 두세 병을 내밀며 말했다. “저, 이것 좀 받아 주실 수 있으세요?”예상치 못한 상황에 엉거주춤, 한 병을 받으며 말했다. “응. 한 병이면 돼. 고마워!” 교내 종교모임 학생들인가보다 여기며, 붙은 쪽지의 글은 읽지도 않고 음료병을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학생들은 내게 해맑은 웃음을 덤으로 선물하고 교실로 들어갔다. 시간이 되어 시료 채취기를 철거했다. 빨리 가고픈 마음에, 음료는 꺼내 보지도 않았다.집에 돌아와 조끼 주머니에서 음료병을 꺼냈다. 비로소 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그래. 세상은 역시 살만한 거야!”하고 속말이 튀어나왔다. 쪽지는 종교모임 학생들이 쓴 게 아니라, 1학년 3반 ‘Z세대’들이 쓴 것이었으니까. 더운 여름날 교내에서 일하는 이들을 어린 딸들이 분별(分別)하고, 뜻을 모아 감사의 마음도 함께 담아준 음료병…. 아까워 음료를 마실 수가 없다.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분별을 안 하거나, 못하는 사람들이 휘젓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정치, 행정, 사법, 언론, 학계, 종교계 등 사회 대부분 분야가 분별력을 잃고 좌충우돌한다. 때문에, 묻지 마 강력범죄가 퍼지지 않겠는가. 한데, 이 학교 1-3 어린 학생들은 어찌하여 근로자를 분별(分別)하고 감사하게 되었을까.지금 고1이면 거의 홑 자녀일 테고, 동기간(同氣間)이 있어도 두셋일 것이다. 그러니, 이 고운 딸들이 그저 예쁘고 기특하기만 하다.S 여고 1-3반 학생들의 분별력이 감사로 태어나, 내게 다가온 날…. ‘디지털 원주민’으로도 불리는 ‘Z세대’ 고1 소녀들. 그들은 내 마음에 ‘1-3 일동 감사 연꽃’으로 피어났다. 양심 저버리고 분별력 잃은 기성세대의 검은 마음. 그 검은 마음에 1-3 일동 감사 연꽃 씨앗이 뿌려져, ‘분별의 연꽃’으로 활짝 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하여, 불의와 부정, 조작과 선동을 몰아내고, 진실과 정의와 사랑이 도도히 흐르는 분별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2023-09-11

그런 과학은 없다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동해는 천혜의 어장이며 수산업은 포항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산업 중 하나다. 따라서 포항 지역사회는 바다 건너편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오염수 방류에 대해 대단히 민감할 수밖에 없다. 지난 8월 24일 오전‘일본 후쿠시마오염수방류반대포항시민행동’은 죽도시장 개풍약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원전 오염수 방류를 강행하는 일본 정부, 그리고 반대와 견제는커녕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우리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방류를 앞두고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정화 시설(ALPS)을 거친 원전 오염수는 방류해도 안전하다는 입장을 표명하였으며, 일본 정부 또한 이를 오염수 방류의 ‘과학적’ 근거로 삼고 있다. 다소 황당하게도 우리 정부가 국민의 세금인 예산을 들여 이 ‘과학적’ 논거를 홍보하는 광고를 제작ㆍ방영하고 있기도 하다. 그 결과 상식과 안전의 문제여야 하는 것이 정쟁의 소재가 되어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다.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과학은 반증 가능하기 때문에 비로소 과학성을 확보한다고 보았다. 과학은 자연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이론이자 지식 체계이지만, 결코 그 자체로 완벽한 진리는 아니다. ‘ALPS로 걸러진 원전 오염수는 방류해도 안전하다’는 국제원자력기구의 주장 또한 지속적으로 반증되고 확인되어야 하는 가설이자 이론에 불과한 셈이다. 방류된 오염수가 중장기적으로 해양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해양생물들의 먹이사슬에는 얼마나, 어떻게 축적되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거의 없다.무엇보다도 우려되는 것은, 이번 오염수 방류가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서가 아니라 ‘가장 저렴한 방법’으로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일본 사회는 일찍이 산업 폐수의 무분별한 방류로 인해 이타이이타이병이나 미나마타병 같은 공해병을 겪은 바 있다. 미나마타병은 수은 중독에 의해 발생하는 병이다.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에 위치한 신일본질소비료 공장에서 1950년대부터 중금속인 수은이 포함된 공장 폐수가 바다에 무단으로 방류되었고, 그것이 먹이사슬을 따라 축적되어 어패류를 섭취한 사람들이 신체 마비, 정신지체 등의 심각한 증상을 겪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1983년, 울산 온산공단 인근 주민들이 겪어 왔던 전신 통증과 마비 증상의 원인이 공단에서 바다로 흘러나온 중금속 때문임을 밝힌 ‘온산병’이 대표적인 공해병 사례로 알려져 있다. 쉽고 저렴하게 산업 폐수를 처리하려던 시도가 수년~수십 년 뒤 무서운 질병으로 돌아온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가 ‘과학적으로’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과학적인 태도가 아니다. 과학은 결코 100%를 이야기하지 않으며, 과거에는 안전하다고 여겨지던 것이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대단히 위험한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사람의 건강과 생명을 건 실험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옳다. 과학의 이름으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아가 저지할 수 있도록 과학계와 시민사회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2023-09-11

국민을 배신한 ‘네 탓’ 정치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권력의 행사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이기 때문이다.‘내 탓’은 없고 ‘네 탓’만 하는 정치는 책임회피이며, 권력을 위임한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 권력을 감당할 인격도 능력도 없는 정치인들의 유체이탈 행태가 가소롭다.‘2023 세계스카우트 잼버리대회’가 실패로 끝나자 그 책임을 둘러싼 네 탓 공방은 가관이었다. 전 정부와 현 정부, 지방정부와 중앙정부 모두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여당은 전 정부와 전북도에, 그리고 야당은 정부여당의 비판에 집중했다.심지어 문재인 전 대통령까지 나서서 “국격을 잃었고, 긍지를 잃었다. 부끄러움은 국민의 몫이 됐다”고 마치 남 얘기하듯 현 정부를 비판했다.국제적 망신을 사고서도 반성은커녕 ‘네 탓 타령’에 여념이 없는 정치권의 행태가 한심하다.‘서울­양평고속도로 노선변경’ 의혹을 둘러싼 여야의 네 탓 공방은 결국 고속도로 추진을 중단시켰고, 159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에서는 행안부·경찰·소방·서울시·용산구청 등이 서로 네 탓을 하면서 책임회피에 급급했다.또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의 책임소재를 두고서도 충북도·청주시·흥덕구청·경찰·소방이 낯 뜨거운 네 탓 공방을 벌였다.이처럼 “잘 되면 내 탓, 잘못되면 네 탓”이라는 책임회피 심리를 그린월드(A. Greenwald)는 ‘베네펙턴스(beneffectance) 현상’이라고 했다.성공에 대한 자신의 공로는 과대평가하는 반면, 실패에 대한 자기 책임은 과소평가하는 성향이다. 이는 자기기만의 ‘이기주의적 편향성’으로서 잘못의 원인을 남에게 찾아서 ‘핑계 만들기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핑계를 통한 자기합리화는 제3자의 객관적 입장에서 볼 때 책임회피 및 책임전가일 뿐이다.특히 국정을 책임진 정부여당의 ‘네 탓 타령’은 비겁하고 무책임하다. 최근 국민의힘 연찬회에서 윤대통령은 야당을 향해 “1 더하기 1은 100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야당과 언론이 “24시간 우리 정부 욕만 한다”고 했다. 국정을 책임진 대통령이 야당 탓, 언론 탓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하는 국민은 서글프다. 야당과 언론의 역할이 정부여당의 견제와 비판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말인가? 비판을 비난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마찬가지로 국회를 장악하고 있는 민주당 역시 ‘네 탓’을 멈추고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문재인정부가 잘했다면 왜 정권이 교체되었는가? 남 탓하며 책임을 회피해왔으니 내 탓이 무엇인지를 알 리가 없었다. 민주당은 남 탓하기에 앞서 현재 수사 받고 있는 각종 비리와 의혹에 대한 자기반성이 먼저다.소크라테스(Socrates)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집행권력과 입법권력을 나눠가진 여야 정치인들이 특히 명심해야 할 말이다. 정부든 국회든 권력을 가진 쪽에서 먼저 성찰하고 반성할 때 비로소 정치가 정상화될 수 있다. 이것이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책임정치의 정신이요, 정치지도자가 가야할 길이다.

2023-09-11

수성구 프리미엄의 위력

홍석봉 대구지사장 대구 수성구는 정주여건이 좋아 ‘주민 살기 좋은 곳’ 1순위, ‘대구의 강남’으로 꼽히는 지역이다. 각종 조사에서 대구시 9개 구·군 가운데 최고로 살기 좋은 지자체로 첫 손에 오른다.그 중에서도 수성구 범어 4동과 만촌 3동(범4·만3)은 수성학군의 대명사가 됐다. 이곳에는 경신고와 대륜고, 오성고, 정화여고, 대구여고 등 명문고가 밀집해 있다.최근까지 대구의 아파트 분양은 이 지역에 집중돼 있었다. 분양가가 대구의 타 지역 보다 월등히 비쌌지만 경쟁률은 높기만 했다. 소위 학군 프리미엄 때문이다. 주택경기 불황 속에서도 수성구 아파트는 높은 인기를 구가한다.입주를 앞둔 대구 수성구의 한 아파트가 행정동 명칭을 두고 주민 갈등이 빚어졌다. 결국 의회가 개입, 수성구 중동과 수성동에 걸쳐 지어진 ‘A 아파트’의 소속 행정동 명칭을 수성동으로 결정했다. 신축 아파트가 2개 동에 걸쳐 있어 주민 요구로 특정 동을 선택한 사례는 지역에선 처음이다. 게다가 이 아파트 인근 주민들까지 같은 동으로 편입을 요구하고 나섰다.이 아파트는 부지 면적의 80%가 중동, 20%가 수성동에 걸쳐 총 303세대 6개 동 규모로 지어졌다. 아파트 전체 면적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동이 아니라 수성동으로 행정동 명칭을 지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시행사가 ‘수성동 아파트’라고 분양 광고 해 당연히 수성동 주민이 될 줄 알았다는 주장이다.결국 집값이 문제였다. 수성동은 중동보다 대구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범어동과 더 가깝다. 입주 후 수천 만 원의 집값 차이가 날 수도 있다. 이 아파트 인근 주민까지 수성동 편입을 요구, 파장이 일파만파다. 수성구 프리미엄의 위력이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09-11

경주 남산과 열암곡사지

천년의 신라가 자리 잡았던 경주, 그곳에서도 남산은 영산(靈山)이라 불리며 예나 지금이나 신성하게 여겨진다. 이곳은 신라에 불교가 전파된 이래로 불사가 약 400개에 달하는 불국토이며, 현재에는 불자들이 꼭 둘러봐야 하는 성지이며, 역사학자에게는 신라를 연구할 수 있는 자료이자 다양한 설화와 전설이 함께 숨 쉬는 이야기의 보고이다. 또한 산새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시원한 바람에 땀 식히며 걷기에도 매우 좋은 곳이다.남산은 삼국부터 조선시대까지 시대별 불교 유적을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장소이기도 하다. 7세기에는 경주 중심가와 소통이 편하며, 지형이 완만하여 절이나 석탑 등의 건축을 조성하기 쉬운 북쪽 기슭부터 만들어지다가 점점 남쪽과 동쪽으로 확대되었다. 서남산 선방곡 초입이나 북남산과 인접한 구릉 하단에서는 주로 이때의 불적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에 불교가 융성하기 시작하여 통일 신라의 세련되고 사실적인 불교로 넘어간 8세기 불적은 도심 가까이 건립되는 경우가 많았다. 잘 알려진 불국사·감은사·사천왕사·망덕사·감산사 등은 대부분 이 시기에 지어졌다. 애장왕 2년(806년) 새로운 사찰을 수도 내에 건립하는 것이 금지된 이후에는 지방이나 영산인 남산을 중심으로 불사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9세기쯤부터는 급경사로 이루어진 백운계를 비롯한 남쪽과 서쪽에서도 불사가 이뤄졌다. 신라가 저물어가던 이 시기에는 여러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왕권이 불안정하였다. 왕위 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고 왕권이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5E211 이상의 거대한 불상이 유행한 이유이기도 하다.9세기 이후가 되면 불상보다는 석탑이 선호된다. 하늘과 가깝고 높고 딱 트인 지형에 석탑을 세워 불국토를 건설하려 하였다. 10세기 이후에는 새로 짓기보다 개축하고 보수하여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상황은 고려를 지나 조선 후기까지 계속된다.남산은 불사가 쌓여 온 세월만큼 많은 유적과 유물이 지금도 발견되고 있다. 그중에서 열암곡은 2007년 이후 ‘기적’이라는 이야기가 덧붙어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는 곳이다. 고위산 남서쪽 백운계 본류의 오른쪽 열암곡에는 열암곡사지라는 절터가 있다. 이곳은 깨어지고 넘어진 불상이 많이 흩어져 있고 경사가 심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은 기적의 이야기를 직접 보고자 열암곡사지를 찾는다. 이곳은 2007년 정비하면서 발굴과 일대 조사가 함께 이뤄졌다. 더불어 흩어져 있어서 외면받고 방치되었던 석조여래좌상의 머리도 발견되었다. 열암곡사지 석조여래좌상은 9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8세기 후반 불상들에 비해 얼굴이 둥글둥글하고, 신체 비례가 짧은 편이며, 어깨와 가슴은 좀 더 남성스럽고, 광배(불상 뒤를 받치는 꽃잎 모양의 석재)의 화염문이 8세기 후반보다는 세밀한 것으로 밝혀졌다.그리고 30E211 거리쯤 떨어진 곳에서 높이 5미터가 넘는 대형 마애여래입상을 찾아내었다. 마애여래입상은 발견 당시 앞으로 고꾸라진 채 바닥과 겨우 5㎝의 간격을 두고 버티고 있었다. 불상이 새겨진 바위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폭 4E211, 높이 6.8E211, 두께 2.9E211 그리고 무게만 80t에 이른다. 그런 바위가 약 40도에 가까운 급경사면에 거꾸로 엎어져 있으며, 불상의 코가 겨우 지면에서 5㎝를 두고 뭉개지지 않은 것이다. 그 5㎝의 간격이 불상의 얼굴을 원형 그대로 살렸다.1천300년의 세월을 품은 기적의 이야기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르 몽드’지(2007년 9월 13일) 1면에도 소개되었다. 지금도 남산 열암곡에는 2007년 발견된 그대로의 이야기가 유지되고 있다.사람들은 기적의 이야기를 보고, 기적을 빌기 위해 지금도 남산 열암곡의 험한 산길을 걷는다. 그리고 세계문화유산인 아유타하 왓 프라 마하탓(Wat Phra Mahathat)의 큰 보리수나무 뿌리에 박힌 불상 머리를 보기 위해 몸을 숙이는 것처럼 ‘5㎝ 기적’을 확인하기 위해 마애여래입상 앞에서 엎드리거나 고개를 깊게 숙인다. 그 오똑한 콧망울을 확인하려면 몸을 숙이지 않고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의 행동이 마치 부처에게 기도하며 절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바로 세워진 마애여래입상보다 거꾸로 있는 현재의 이야기가 오히려 사람들에게 더 와닿는 듯하다.남산은 오래된 만큼 많은 불교 유적이 있고, 그 속에 품은 이야기가 있다. 성지 순례하듯이 남산의 불사만 찾아다녀도 꽤 오랫동안 숲길을 걸어야만 한다. 누군가는 성지를 순례한다는 마음으로, 누군가는 역사적 탐구를 위해서, 누군가는 이야기를 따라 남산 숲속을 오르다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힌다. 바람이 전해주는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면서 걷는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09-11

구원의 도착지점

‘더 웨일’ 포스터. 모세가 야훼로부터 받은 ‘십계명(十誡命)’은 행해야 할 두 개의 명령과 하지 말아야할 여덟 개의 금기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으로써 신의 세계로 향하는 엄혹한 규칙이며, 행동과 함께 마음까지 살펴야하는 규범이다. 불교에서는 승려와 신자들이 마땅히 지켜야할 가장 기본적인 계율로 오계(五戒)가 있다. 모두 ‘아니 불(不)’로 시작하는 부정어로 시작한다. 해야할 것보다 하지말아야할 것을 강조한다.하지만 인간은 쉽게 계명과 계율에서 이탈한다. 그리고 반성하고 회개하며 계명과 계율의 궤도로 귀환한다. 인간은 해야할 것과 하지말아야할 것들 사이를 오가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희열을 느끼고, 경건하거나 기쁨을 느끼거나, 맑거나 어지러운 복잡다단한 삶을 살아간다. 계율과 계명이 아니어도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만든 사회적 ‘규범’이 존재한다. 이 규범 또한 해야할 것과 하지말아야할 것을 정하고 칭찬과 형벌이 주어진다. 계율과 계명이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규범은 순수하게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기인한 것이다. 차이는 있지만 계율과 규범은 항상 ‘후회’가 깔려 있다. 후회가 쌓이고 깊어지면 ‘죄책감’으로 이어진다. 후회의 강도가 강해질 때 죄책감이 남는다.종교에서 죄책감은 반성과 회개, 기도를 통한 ‘죄사함’으로 해소된다. 규범의 죄책감은 결과의 강도에 따른 ‘형벌’에 의해 해소된다. 죄사함은 구원을, 형벌은 교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신의 존재 여부와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와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고찰들이 인간의 역사와 함께 했었다.‘후회’는 인간이 하루에도 수십 번 마주하는 선택의 결과다. 사소한 선택에서부터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 선택의 결과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타날 때 ‘후회’가 뒤따른다.‘후회’를 돌이켜 원상태로 되돌릴 것인가, 후회를 낳은 선택을 다른 선택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을 것인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충돌한다. 사람의 관계 속에서 상반된 신념을 가진 이들과 충돌하고 화해하며 서로를 끌어 안는다.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더 웨일’은 과거에 내린 선택의 결과로 빚어진 지금, 후회를 두고 벌어지는 상반된 믿음을 가진 이들이 낡은 아파트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등장하고 퇴장하면서 충돌하는 모습을 그린다. 제목처럼 고래만큼 비대한 초고도 비만자 찰리는 보행 보조기가 없으면 혼자 몸을 일으킬 수도 없고, 한발도 나아가지 못한다.그가 머무는 한정된 공간 속으로 종교적 구원의 깃발을 든 이와 찰리를 돌보는 유일한 친구이자 간호사 리즈, 찰리의 딸, 그의 전처가 순차적이거나 반복적으로 아파트를 출입한다.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후회’라는 공통적 감정을 숨기고 타인을 통해 그의 후회가 해소되길 희망한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공 찰리에게 집중된다. 선택은 뜻하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되고 후회로 남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죄책감으로 이어지고 누군가에게는 미안함으로, 누군가에게는 그리움과 증오로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이 그렇다고 명쾌하게 나눠지지도 않는다.죽음을 직감한 찰리는 이제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와 죄책감의 시간을 벗어나 적극적인 화해를 청하고자 한다. 화해에 대한 의지는 그의 동작만큼 굼뜨지만 그의 몸무게 만큼 무겁고 강력하다.“알아야겠어! 내 인생에서 잘한 일이 하나라도 있다는 걸!”이라는 찰리의 대사처럼 그 하나를 위해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선택이 후회로 남으면서 고통이 동반되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은 결국 신에 의해서가 아닌 인간에 의해서 구원받는다. 관객은 주인공과 함께 그의 집안에 갇혀 가쁜 숨을 내쉬며 묵직하게 쌓아가는 화해의 과정을 지켜본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비로소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거대한 한 마리의 고래를 목격하게 된다. 화해했는가, 구원받았는가, 진정성이 얼마나 상투적인가라는 생각이 뒤엉킬 때, 벅차 오름과 함께 눈물이 흘러 내린다./(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3-09-11

민심에 길이 있다

김진국 고문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단식 농성장에서 지난 5일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방문해 극단 정치를 자제하라고 충고한 것이다. 맥락을 보면 단식을 그만두라는 말로도 들린다. 이 대표의 표정이 굳어졌다.‘개딸’이 무서워서도 이런 충고를 하는 정치인이 거의 없다. 곧 총선이다. 공천도 받아야 한다. 곰곰이 따져보면 이 대표를 비난한 게 아니다. 이 대표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조언이다. 김 의장은 민주당 출신이지만 국회를 대표하는 국회의장이자 정치원로다. 국회의장은 다음 총선에 출마하지 않는 게 관례다. 그런 점에서 사심(私心) 없는 그만이 할 수 있는 고언(苦言)이다.그의 말을 길게 인용한다. 김 의장은 “정치라는 것은 언제나 상대적”이라며 “국민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잘하고, 잘못한다고 보질 않는다”라고 말을 꺼냈다.“벌써 두 번이나 민주당이 본회의에서 일방적으로 법안을 통과시켰고,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사전에 예고되거나 그렇게 될 것이 분명한 사안인데도,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이 (법안) 단독 처리를 반복하는 것이 과연 민주당을 위해서도 옳은 것인가. 여당이 아예 대안을 안 내놓으면 어쩔 수 없지만, 대안이 있는 경우엔 민주당이 주장하는 10개 중 5~6개만 살릴 수 있으면, 그래서 국민의 70~80%가 ‘그만하면 됐다’고 할 수 있으면, 그것이 제대로 된 의회민주주의가 아니겠나. 그래서 어떤 것이든 일방적으로 처리하기 전에 조정 작업을 해보려고 노력한다. 민주당에서도 좀 협력해달라.”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는 불안하다. 정치인의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 다수결이 원칙이다. 그렇지만 다수결로만 선택한다면 대통령 한 사람만 뽑으면 된다. 국회는 왜 구성하나. 국회의원들이 무조건 당론 투표만 하고, 대화도 타협도 없다면 정치는 극한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대통령과 국회 다수당이 같은 단점(單占) 정부에서는 국회가 거수기가 될 수 있다. 반대로 분점(分占) 정부에서는 사사건건 정부와 국회가 충돌해 파국으로 갈 수 있다. 민주주의 제도를 설계한 사람들이 이 점을 간과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가면 결국 양측이 모두 손해고, 나라가 망하는 길이다. 정치인의 윤리와 소명 의식을 믿은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대화와 타협은 꼭 필요한 덕목이 다.대통령이 거부권 행사를 미리 경고한 법안을 여당과 협의 없이 단독으로 밀어 붙이면 법안이 국회로 돌아올 게 뻔하다. 그렇다고 거부권을 무력화할 만큼 재적의원 3분의 2 의석을 확보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같은 일을 반복하는 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유도하고, 그 법안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정치적 노림수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굳이 법안 단독 처리만이 아니다. 인사청문회도 야당은 반대, 정부는 임명 강행이 관행처럼 굳어간다. 여야의 대화가 실종됐다. 윤석열 대통령의 책임도 크다. 이재명 대표가 검찰의 수사를 받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야당과 대화를 포기하고, 야당 요구를 일체 외면하는 일방통행은 그가 강조하는 자유민주주의에 어울리지 않는다.내년 총선은 또 하나의 고비다. 지금의 여소야대(與小野大)는 떠안은 것이지만 내년 총선 결과는 윤 대통령 임기 전반기에 대한 심판이다. 선거에서 지면바로 레임덕이다.현행 헌법이 제정된 1987년 이후 대통령의 거부권이 행사된 것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7건, 노무현 전 대통령이 6건, 이명박 전 대통령이 1건, 박근혜 전 대통령이 2건, 윤 대통령이 2건이다. 여대야소였던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적은 건 당연하다. 군인 출신이고, 권위주의 정부의 관성이 남아 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횟수는 가장 많지만 가장 타협적으로 국회를 운영했다. 야당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국회에 정치가 살아 있었다. 민심이 야 3당을 지지했기 때문이다.요즘 같은 정치로는 격렬한 지지자만 동조할 뿐 중간층은 외면한다. 단식으로는 뒤집을 수 없다. 김 의장의 지적대로 양보하고, 타협하면서 얻어내려고노력할 때 민심도 얻게 된다. 중요한 것은 민심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09-10

운을 부르는 마법 정리 정돈

엄주선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부자들의 집을 보면 매우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옷 모자 신발 등이 가지런하게 찾기 쉽고 사용하기 편리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부자라서 집이 잘 정리 정돈 되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부자가 되면서 습관이 된 것이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부자들은 돈이 되지 않는 곳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페이스북의 설립자 마크 저커버그는 항상 회색 티셔츠를 입는 이유에 대해 삶을 간단하게 하여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데 에너지를 사용하기 위함이라 하였다.이는 심리학적 근거가 있다. 어떤 옷을 입을지 아침 식사로 어떤 메뉴를 고를지 이렇게 간단한 결정을 하는데도 에너지가 들고 인간은 피로를 느낀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인체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으려 하며 건강이나 돈 등과 같이 자신이 목표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부자들은 이를 잘 알고 최대한 활용하는 사람인 것이다.제조현장의 정리 정돈도 이와 같은 이치로 사용하는 자재나 생산 물품이 잘 정리 정돈되어 있으면 필요한 물품을 작업자가 쉽게 찾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어 동작에 소모되는 에너지의 낭비를 줄일 수 있고 회사의 궁극적인 목표인 돈을 벌기 위한 가치를 창출하는 활동에 많은 에너지를 사용 할 수 있다. 이는 개인은 일을 편하고 안전하게 하는 것이며 조직은 이익이 증대되는 효과가 있다.이를 보면 생산현장의 물품과 자재 류에 대하여 어떻게 관리하는 것이 최적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가장 좋은 것은 보관 장소나 창고는 없애고 필요할 때 바로 공급하는 것이다. 도요타는 이를 위해 설립 이후 지금까지 86년간 후공정이 요청시 생산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며 공정내 재공이 Zero인 연속 흐름생산을 추구하고 있다. 그 다음이 그렇게 하기 어려우면 최소한의 필요한 자재를 어디에 무엇이 얼마나 있는지 명확히 하고 누구나 쉽게 찾고 사용이 편리하도록 하는 것이다.이중 자재창고의 정리 정돈 방법을 소개하면 창고내 저장되어 있는 모든 물품을 드러내어 종류를 파악한 후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구분하여 필요 없는 것을 버린다. 그리고 유사 품목 별로 구분하여 저장 위치와 방법을 정하여 적절한 적치대를 설치하고 주소를 정하여 자재를 보관한다. 보관된 각 자재는 품명, 코드, 규격·사양, 수량이 알 수 있도록 식별표를 부착하여 적정량을 관리한다. 창고가 여러 개소일 경우 Name Plate와 내부 배치도, 소화기 위치, 운영기준과 점검시트를 동일양식으로 적용 유지한다.정리 정돈은 ‘깨진 유리창의 법칙’과 같이 방치하면 더욱 관리가 안되고 상태가 나빠지며 활동을 하면 할수록 이를 통해 생긴 좋은 기운이 행동에 작용하여 모든 일이 잘 풀려 운이 상승하는 개인과 회사 모두에 마법과도 같은 활동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3-09-10

책맹인류와 독서 예산 삭감

유영희 작가 지난 토요일 동네 도서관에서는 9월 독서의 달을 맞아 김애란 작가를 초대해서 ‘소설, 삶을 담은 그릇’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애란 작가의 말 중에, 소설이란 한숨 같은 소리를 말로 바꾸고 그 이야기에 지위를 주는 것이라는 말이 크게 기억에 남는다. 약한 사람, 소외된 사람에 대한 존중과 대접이 담겨 있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런 작가와의 대화는 독서를 자극하고 삶의 의미와 관계 맺음에 대한 통찰을 갖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독서율이 낮아지는 상황에서 이런 책 문화 프로그램은 단비 같은 역할을 한다.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우리나라 독서율이 꼴찌다. 19세 이상 성인 중 1년에 책을 한 권도 안 읽는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EBS에서는 8월말부터 9월말까지 5주에 걸쳐 ‘책맹인류’를 10부작으로 방송하고 있다. ‘책맹인류’란, 문자는 해독했으나 긴 책을 읽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지난 수요일 방송된 ‘책맹인류’ 3부 ‘우리는 왜 읽지 않는가’에서는 세계적으로 독서율이 낮아지는 이유를 분석하고 일본이나 핀란드에서 독서율을 높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여러 사례를 들어 소개하고 있다. 이날 방송에서는 주로 개인이나 민간 차원의 노력을 소개했는데, 후속 방송에서는 미국, 영국,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호주, 일본. 많은 나라들이 국가 정책 차원에서 ‘읽기 능력’ 향상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소개할 예정이다.그런데 우리 정부는 독서율을 높이는 데 별로 관심이 없나 보다. 정부는, 올해 약 60억 원이던 ‘국민독서문화증진 지원’을 전액 삭감했을 뿐 아니라, 아예 예산 코드 1433-308을 없앴다. 결국 내년 독서 관련 예산은 ‘독서대전’, ‘지역독서대전’, ‘책읽는도시협회지원’ 등 일부 사업들을 위한 10억 원가량뿐이다. 체육기금을 활용하는 ‘책 읽어주는 문화 봉사단’ 예산 2억 원을 합해도 12억 원이라, 올해 독서 진흥 예산 약 114억 원에 비하면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지역서점 활성화 예산이 사라져서 작은 서점에서 진행하던 작가와의 대화나 문학 행사를 내년에는 하지 못하고, 영유아를 위한 북스타트, 청소년 독서를 위한 전국청소년독서토론한마당, 성인을 위한 독서동아리 지원, 장병을 위한 병영독서 활성화 지원도 모두 할 수 없게 되었다.이 중에서 병영 독서는 2년 간 참여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더 관심이 간다. 구독자 100만이 넘는 북튜버 김송은 어려서는 책을 읽지 않다가 군대에 가서야 지인 추천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군대에서도 독서는 청년들에게 꿈을 꾸게 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는데, 내년에는 전면 폐지되었으니 안타깝다.다행히 오늘 도서관 행사는 자치단체 예산이라 내년에도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크고 작은 책 문화 행사가 많아지면 독서율이 올라가고 독서율이 올라가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알게 된다. 정부는 내년 독서 예산안을 재고하기 바란다.

2023-09-10

조각 이불을 보다가

김규종 경북대 교수 독자 여러분은 조각 이불을 좋아하시는지 모르겠다. 여러 가지 무늬와 색깔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조각 이불이 마음에 드시는지 궁금하다. 조각 이불은 어린아이를 위한 이불로 사랑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록달록한 무늬와 기하학적인 질서로 배열돼있는 조각 이불은 따스함과 질서정연함을 동시에 선사할 수 있으니 말이다.언제부턴가 나를 만들어온 여러 요인(要因)을 생각하게 된다. 퇴임을 앞두고 사람들에게 인사말을 하라는 청을 들었을 때 그런 말을 했다. 지금의 나를 있도록 해준 여러분의 인내와 너그러움에 감사한다는 뜻의 말을 전한 것이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누구나 그를 낳고 길러준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친구와 친지가 있기 마련이다. 그 사람들 덕분에 어제와 오늘의 나와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게 아닌가?!요즘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가슴 아픈 사건은 단연 교사들의 자살 행렬이다. 지난 7월 19일 스물세 살 먹은 서이초교의 어린 여교사 자살로 학부모와 학교장들의 온갖 행악질과 갑질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다. 세상 살기가 쉬운 일이기만 하랴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중대한 사명을 수행하는 교사들을 상대로 악행을 거듭한 자들에게 대를 이어 악운(惡運) 있기를?!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장편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에서 기인하는 ‘베르테르효과’로 간주하기에는 너무도 심각한 악행이 교사들에게 행해지고 있는 게 이 나라 현실이다. 학교폭력이라는 말이 학생들에게나 적용되는 게 아니라, 학생과 학부모가 교사들에게 행사하는 저급하고 막돼먹은 폭력이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밝혀지고 있다.어떻게 학생과 학부모가 교사를 상대로 막말과 폭언과 폭행을 거리낌 없이 자행할 수 있단 말인가?! 학교를 약육강식의 정글로 만들어놓는 승냥이만도 못한 인간들은 학교를 떠나야 한다. 문제를 일으킨 학생과 학부모들은 마냥 의기양양(意氣揚揚) 득의만면(得意滿面)하기 그지없는데, 교육부는 서이초 교사의 49재에 참석하느라 수업에 임하지 못한 교사들을 처벌하겠노라고 엄포나 놓았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교육은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 삼주체(三主體)가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이룰 때 성취될 수 있다. 교사의 권위와 교권을 무력화하는 학생과 학부모, 교단과 교권의 의미를 스스로 실추시키는 교사가 있는 한, 교육은 만년 공염불(空念佛)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사는 학생을, 학생과 학부모는 교사를 먼저 생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과 지구와 우주가 돌아간다는 소아병적인 사고와 인식을 버려야 한다.조각 이불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중심이 없다. 개개의 조각은 고유한 색깔과 무늬가 있지만, 내가 잘났으니 나를 따르라고 우기지 않는다.하나의 조각은 모두를 위하여, 모든 조각은 하나의 조각을 존중하고 어울려 조화로운 전체를 완성한다. 세상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은 홀로 잘나서 빛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조화롭게 공존할 때 비로소 존재의의가 환해진다는 사실을 곰곰이 돌이켜보면 좋겠다.

2023-09-10

전술핵 공격잠수함

우정구 논설위원 북한이 전술핵 공격잠수함을 전격 공개하면서 또 한번 국제사회의 이목을 끌었다. 우리 군은 “무리한 제조로 완성도가 떨어져 정상적 운용이 어려울 것”이란 관측을 내놓았지만 북한의 핵무기가 수중의 잠수함에까지 운용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안보에 상당한 위협이다.이번 공개된 북한의 전술핵 잠수함은 수중에서 한국 전역은 물론 주일미군기지까지 기습 핵타격도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개된 전술핵 잠수함에는 총 10개의 수직발사관이 있어 잠수함탄도미사일(SLBM)을 최대 10기까지 발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는 한미가 기존에 구축한 미사일방어체계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격이다. 북한은 기존에 배치된 70여척의 잠수함에도 전술핵을 탑재하고 김정은은 핵잠수함 도입까지도 호언장담하는 상황이다. 특히 북한의 핵전술잠수함 개발은 북한핵의 완성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대응에 주목이 된다. 지난 2010년 3월 백령도 앞바다에서 북한 해군잠수함의 어뢰 한 발로 우리 천안함이 폭침당하고 장병 48명이 목숨을 잃었다. 핵전술잠수함에 의한 도발이 이뤄진다고 상상한다면 끔찍하다.북한의 핵도발에 대한 한국 독자 핵무장론이 힘을 받고 있다. 국민의 71%가 핵무기 보유에 찬성하는 것으로 조사 된 바도 있어 핵에는 핵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전문가의 주장이 먹혀드는 분위기다.지난 1월 윤석열 대통령이 “북핵 문제가 심각해지면 한국이 자체 핵을 보유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비핵화 지위 및 비확산체제 지지라는 전제가 달린 주장이지만 북한의 핵위협에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핵추진잠수함에는 핵추진잠수함으로 대응하는 우리의 준비가 필요하다./우정구(논설위원)

2023-09-10

어른답게 살아가기

김병렬 울릉군 독도박물관장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려고 할 때 나를 밟고 지나가라면서 길에 누운 정치인이 있었다. 그가 만약 살아있다면 “할아버지 그때 왜 그러셨어요”하고 손자가 물을 때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내가 안목이 짧았다고 하면 손자가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까지는 버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솔직한 분이시라는 자긍심은 가질 수 있을 테니까. 반면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했다면 손자는 픽 웃고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더는 갖지 않게 될 것이다.엄마는 수입 쇠고기를 먹으면 뇌에 구멍이 숭숭 뚫린다고 데모를 하고는 왜 저에게 수입 쇠고기만 사다가 요리해 주세요라고 아들이 질문하면 엄마는 어떤 대답을 할까? 사드가 설치되면 모두 통닭구이가 된다고 외치던 사람은 성주참외를 안 사먹는지 모르겠다.평택에 미군기지가 들어오면 안 된다고 주민등록까지 옮긴 후 데모하다가 밀린 월세도 안 내고 슬그머니 사라졌던 사람들이 요즘은 어디 가서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또 어떤 사람은 일제강점기 때 종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을 돕겠다고 모금을 받아 개인적으로 횡령하기도 했고, 또 이를 이용해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피해 할머니들이 우리를 위해 해준 게 뭐 있느냐고 물으면 묵묵부답이다.그런가 하면 어떤 국회의원은 총리에게 오염수가 섞인 바닷물을 마시겠는가 하고 질문했다. 그에게 그의 아들이 아버지는 오염수가 섞이지 않은 바닷물을 마실 수 있어요? 라고 하면 아들이 보는 앞에서 짠 바닷물을 마실 수 있을까?왜 자기는 오염처리수가 섞이지 않은 물도 마시지 못하면서 총리에게는 오염처리수가 섞인 바닷물을 마시라고 할까? 회의 중에 주식을 거래하고 코인을 구입한 국회의원이 자식들에게 수업시간에 딴 짓 하지 말라고 말할 자격이 있나?특목고 폐지하라고 하면서 자기 자식은 해외 유학 보내는 어른은 또 뭐고, 반일을 위해 모두 죽창을 들자고 했던 사람이 일제 볼펜을 쓰는 건 또 뭔가? 또 다른 반일주의자는 일제 샴푸를 쓰다가 들통이 나니까 샴푸를 안 쓴다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가 사진이 공개되어 비웃음을 샀다.입만 열면 모든 특권을 내려놓겠다고 하면서 내가 원하는 날 원하는 시간만큼만 조사받겠다고 하는 건 또 뭔가? 이건 특권이 아니고 모든 국민이 누리는 일반적인 권리인가? 이분도 황제의 DNA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황제처럼 성장했나? 모두 아이만도 못한 어른들 아닌가?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흉상을 육사 교정 밖으로 이전한다고 해서 요즈음 광복회까지 나서서 난리다. 애초에 육사 교정에 이분들의 흉상을 세운다고 했을 때부터 말이 많았다. 육사 교정에 세우는 흉상은 육사에서 세울까 말까부터 시작해서 세운다면 누구를 세울 것인가를 결정해서 세우면 된다.그런데 육사는 배제된 채, 이전 정권에서 세우기를 원했고 자신들이 선정한 인물들의 상을 세웠다. 자신들은 이전 정권에서 세워놓은 각종 표석을 멋대로 옮겨 놓고, 자신들이 세워놓은 것은 자손만대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면 이런 멍청한 일이 또 있겠는가?더 한심한 것은 이 흉상을 철거해서는 안 된다고 이 흉상을 만들라고 한 어른이 전 국민을 상대로 SNS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이 흉상들을 만들 때 누구누구를 만들라고 하지 말고 육사생도들이 본받을 만한 분들을 만들라고 했으면 지금과 같은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른들은 무엇을 하라고 강요할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만 해주면 된다.다음 달에 독도의 날이 있다. 독도의 날이 됐든 삼일절이 됐든 기회만 되면 머리띠 매고 일본대사관 앞에 몰려가서 데모하는 어른들이 있다. 지금까지 80년 가까이 흘렀지만, 독도문제는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그렇다면, 앞으로 80년이 흘러도 해결될 가능성은 기대하기 어려운 게 아닌가. 아버지 때는 뭐하고 이런 어려운 일을 자기들에게 물려주느냐고 후대들이 물으면 지금의 어른들은 뭐라고 답을 할 것인가?독도박물관장직을 맡은 지 한 달이 되어 간다. 내 꿈은 일본의 어린이들이 한국 어린이들의 손을 잡고 독도박물관을 구경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의 어린이들도 일본 어린이들의 손을 잡고 일본 동경의 다케시마 전시관을 구경하게 될 것 아닌가.한국의 어린이들은 일본의 입장을 이해하고, 일본의 어린이들은 한국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도록, 최소한 이 정도의 판은 어른들이 깔아줘야 하는 것 아닌가.

2023-09-10

도마도마, 도마뱀

뜰을 가로지르는데 뱀 조심 뱀 조심뱀 조심 팻말이 눈에 쏙 들어와서도마뱀 도마 위에 뱀, 그런 생각했어요.투명 플라스틱 컵 들고 들어온 사서선생님여기 이것 봐요 문 틈으로 숨어들어잽싸게 잡아 왔어요, 참 귀엽지 않나요?작은 도마뱀 한 마리 몸 구부리고 엎드려컵 바닥에서 할딱할딱 숨을 몰아쉬어요.가녀린 갈색 꼬리가 길어서 애처로워요.빨리 내보내 주세요, 풀밭으로 어서요.양쪽으로 볼록거리며 할닥거리는 심장도마뱀 객주문학관 도마도마 뱀 뱀 뱀― 이정환, ‘객주문학관 도마뱀’ 전문 (가히 가을호, 2023)도마뱀이란 캐릭터는 공룡을 닮은 신비롭고 귀여운 외모 덕에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동물이다. 우리가 이 행성에 살기 전의 세계가 완전히 다른 종의 것이었다면 그것은 거대한 공룡시대일 것이다. 하지만 공룡들의 이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공룡의 이름은 우리가 화석을 통해 알게 된 정보로 인간이 지었다.말 그대로 이름을 만들어 낸 수 천 년의 역사에 인간이 가진 호기심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도마뱀이 파충류지만, 모든 파충류가 도마뱀은 아니다. 공룡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다이너소어(Dinosaur)도 그리스어로 ‘무섭다(δεινό)’는 뜻의 데이노와 ‘도마뱀(σαυρος)’을 뜻하는 사브로스에서 유래되었다면 우리말 도마뱀은 어떤 조어법으로 탄생했는지 궁금해진다.여기 이정환 시인(1954~)이 작명한 도마뱀을 어린이들의 눈으로 탐색해 보자. 화자가 말하는 공간 객주문학관은 비교적 사람의 손때가 덜 묻어나는 청송에 있다. 이 일대는 선캄브리아시대 산악지형과 중생대 퇴적암과 공룡발자국지형 등 우리가 쉽게 근접할 수 없는 천혜의 자연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이곳에서 시인의 “눈에 쏙 들어 온” 것은 뱀 조심 팻말이다. 아이들을 기쁘게 할 기대감에 사서 선생님은 “잽싸게 잡아” 온 도마뱀을 투명 컵에 담아 온다. 관찰하던 아이들은 웬일인지 빨리 내보내 달라고 재촉한다. 왜 그랬을까? 물릴까 봐 무서워서일까? 아이들은 투명 컵을 통해 들여다본 도마뱀의 모습에 마음이 급했다. 이희정 시인 “몸 구부리고 엎드려” “컵 바닥에서 / 할딱할딱 / 숨을 몰아 쉬”고 있는 모습에서 도마뱀이 죽을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평생을 초등 교육현장에서 어린이들과 보낸 시인은 아이들의 때 묻지 않은 선한 동심을 잘 읽고 있다. 시조가 가진 언어의 율동성을 다정다감한 대화체의 화법으로 “잽싸게” “할딱할딱” “볼록거리며” 등의 소리와 동작을 표현하는 말로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오래전 작은 아이의 도마뱀 일화가 떠오른다. 파충류에 흥미를 보이던 아이는 도마뱀 세 마리를 집에서 키웠다. 도마뱀의 집을 꾸며 주고 매일 들여다보며 먹이를 주곤 했는데 어느 날 한 마리가 죽어버렸다. 아이는 슬픔에 빠져 며칠 동안 밥도 먹지 않았는데 무심결에 웃음을 보인 엄마에게 식탁을 두드리며 분노했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어떻게 도마가 죽었는데 웃을 수 있냐”고 항변했다. 아이의 슬픈 감정을 온전히 이해 하지 못했지만, 생명을 돌보는 갸륵한 심성에 감탄했다. 이후 아이는 남은 두 마리를 숲으로 풀어주었고, 더 이상 도마뱀을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도마뱀이 가장 행복한 곳은 숲이란 것을 이해하고 갖고 싶은 자신의 욕심을 놓을 줄도 알았다.찰나의 모든 순간은 예술이 된다. 그림이든 시든 무엇으로든 표현할 수 있다. 긴 여름 전시회장에서 본 카라바조의 그림 ‘도마뱀에 물린 소년’ 또한 그랬다. 얼굴표정으로 혹은 손가락으로 순간의 감정 서사를 그리듯. 이정환 시인이 운율로 감았다 풀어내는 동시조, 도마뱀 또한 재치 있게 작명한 한 폭의 기특한 풍경이다.저만치 가을이 오고 있다, 객주 문학관 풀숲에선 오늘도 “도마도마, 뱀 뱀 뱀”

2023-09-10

역사적 인물의 평가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인물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옷이나 생김새 등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도 있고, 학벌이나 지위나 재력 따위를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도 있다. 이념이나 종교적 시각으로 사람을 판단하기도 하고, 개인적인 감정이나 고정관념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평가의 목적에 따라 판단의 기준이 달라지기도 한다.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도 시대와 문화적 배경,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는 데 고려되는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우선은 그 인물의 업적과 그 업적이 시대나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평가하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그 인물이 어떤 목표와 가치를 추구했고 그것이 사회에 어떤 긍정적인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평가가 있어야 하고, 인물이 가진 통찰력과 지혜와 능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살펴야 한다. 물론 윤리적인 측면도 고려해야 하고, 신뢰할 수 있는 역사학적 증거와 연구를 판단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우리나라는 일제의 침략으로 식민지 시대를 겪었고, 이데올로기에 의한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른 상황에서 그 역사 속의 인물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엇갈릴 수밖에 없다. 북한과 종북·주사파들이 일제치하의 친일행위에 절대적 비중을 두는 것에 비해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친일에 못지않게 공산주의에 동조나 가담 여부를 인물평가의 주요 기준으로 삼는다.최근 뒤늦게 불거진 광주시의 정율성공원 조성 문제와 육군사관학교의 홍범도 장군 동상 이전 문제로 좌·우 양 진영이 논쟁을 벌이고 있다. 정율성은 북한과 중국을 오가며 조선인민군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팔로군행진곡 등 공산체제를 찬양·고무하는 작곡활동을 했으며, 6·25 때는 중공군을 따라와서 궁정악보 등 왕실관련 유물을 훔쳐 중국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중국에 귀화하여 중국 국적으로 살다 죽은 그가 대한민국과 광주시에 기여한 바가 없는데, ‘정율성거리’를 만들고, 매년 기념음악회를 열고, ‘정율성공원’까지 조성하겠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홍범도 장군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등 항일 무장투쟁을 한 독립군의 대표적인 인물 중의 일인이다. 독립군으로서의 그의 공적은 누구 못지않지만, “조선의 자유독립을 위하여 제국주의 일본을 반대한 투쟁에 헌신한 조선 빨치산 대장 홍범도의 이름은 천추만대에 길이길이 전하여지리라.”는 묘비명처럼 그는 소련 공산당원이기도 했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한 간성들을 길러내는 육군사관학교에 홍범도 동상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 국방부의 주장이다.문재인 좌파정권은 공산·전체주의 시각에서 김원봉이나 신영복 같은 공산주의자들을 존경했다. 반면 윤석열 정부는 반공·자유민주주의 입장에서 공산주의와 싸운 공적을 높이 평가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 정부수립 업적을 높이 사고, 백선엽 장군을 6·25전쟁 영웅으로 기린다. 지난 역사의 인물들뿐만 아니라, 지금 정치권의 인물들에 대한 판단과 평가도 국운의 향방을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는 걸 절감하는 요즘이다.

2023-09-07

스승이 존경받는 사회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지난 4일 학부모 갑질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서이초등 여교사의 49재 날, 서울 여의도에서 약 2만 명의 교사와 시민들의 추모집회가 열렸다. 이날을 ‘공교육 멈춤의 날’로 정하고 전국 곳곳에서 약 10만 명 이상이 동참하였다고 한다. 교육부 장관은 이 추모집회를 ‘교사들은 집단행동 불가’라는 공무원 복무규정의 위반이라며 집회 참가자에게는 파면, 해임 등의 징계가 가능하다는 통보를 했으나 교사들은 오히려 자발적 결의로 연가 또는 병가를 내어 함께 모였고, 유·초·중등 교사 50만7천 명의 교권확립을 주장하며 질서 정연하게 마무리했다.매주 수만 명 이상 토요일 집회를 이어오면서 외친 것은 그동안 계속되어온 공교육 약화를 우려한 교육개선의 문제였다. 지난해 말 초·중등교육법이 개정되고 올해 8월 교원지위법이 발의되어 교사의 생활지도권이 강화되고 교권침해범위가 확대된다. 지난 5년간 교권침해 사례는 매년 약 2천여 건이 발생했고 초등교사 대부분이 교직 생활 중 교권침해를 당한 경험이 있었다는 설문조사도 있다. 그중 반 이상이 학부모의 악성 민원이라고 한다.이러한 교권침해 사례가 일어나면 피해 교원과 학생을 격리하지 않고 오히려 교사에게 병가를 내게 하거나 전보 발령을 하는 등 교육청과 교권보호위원회는 모든 책임을 교사에게 전가하는 등 2차 가해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 명예퇴직이 늘고 있다는 안타까운 교육계 소식이다.학생인권조례에는 학생 학습권과 교사 수업권, 교원의 존중 등이 법규화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정치인의 공허한 약속일 뿐 구체적 학생지도와 징계 방법 등이 명시되어있지 않아서 오히려 아동학대로 의심받기 쉽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업 중 잔다거나 수업 방해와 지시 불응 등이 있는 경우에도 체벌이 불가하여 교내 청소나 반성문 작성을 시키면 비인권적이라는 학부모 민원이 발생하기 때문에 학생지도를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교육현장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2014년 ‘아동복지법’이 통과된 후, 아동학대죄로 정직을 당한 경우도 많고 지난 3년간 전국에서 담임교사 129명이 학부모 요구로 교체되었는데, 이 중 102명이 초등교사라 한다. 초등학생 학부모라면 3, 40대 젊은 층일 텐데 귀한 자식을 금쪽같이 키우다 보니 ‘내 아이만 소중하다’는 생각으로 자기 자식은 제멋대로인 아동이 되고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은 모르는 듯하다. 잘 못한 초·중등 아동의 인성교육에 필요한 훈육을 아동학대라는 죄를 뒤집어씌우는 사례가 많아서 교사들의 생활지도권 보장이 요즘과 같은 공교육 추락 사회에서 꼭 필요하다고 본다.교권과 학생 인권은 상호 대립하는 가치는 아니다. 정당한 생활지도를 통해 진정한 가르침을 주었을 때 선생님들 또한 자존감과 긍지를 가질 것이다. 이번 집회에서 “선생이 무너지면 교육이 무너진다”를 외쳤으니,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큰 가치 속에 부모는 교육을 선생님에게 믿고 맡기고 선생은 제자들에게 따뜻한 사랑의 가르침을 주어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스승이 존경받는 사회를 이루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3-09-07

안동에 이민청을?

우정구 논설위원 2018년부터 경북도가 야심차게 운영하고 있는 ‘화요일 공부하는 모임’인 슈퍼화공 포럼이 지난 5일 국회에서 정례 행사를 가졌다. 이날 모임 참석자들은 인구소멸 문제와 관련해 경북도의 이민정책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이날 포럼 좌장을 맡은 경기대 김택환 교수는 “지방시대를 선도하기 위해 독일 남부 보수도시 뉘른베르크처럼 경북 안동에도 이민청을 설립하자”는 제안을 했다. 또 한국장학재단 배병일 이사장은 “도청에 이민국을 신설하고 외국인 유학생 30만명을 유치하자”는 제안도 했다. 지방소멸을 막기 위해선 사람을 모아야 하며 저출산 대책으로 소멸을 막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다.단일 민족을 표방한 한국은 이민정책에 대해 보수적이다. 그러나 인구소멸의 문제가 심각히 제기되고 최근 이민자 증가가 늘면서 다민족, 다문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은 이주민에 대한 배타적 시선이 조금씩 수그러들고는 있으나 외국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아직은 소극적이라 했다.우리나라 체류 외국인이 200만명을 넘어섰고, 2030년에는 300만선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동훈 법무부장관도 “출산 장려만으로 인구절벽을 줄이기 어렵다”며 “이민정책 없이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없다”고 적극적 이민정책을 표방했다.슈퍼화공 포럼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소멸할 것으로 보이는 경북의 인구문제를 푸는데 새로운 시각의 이민제도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많은 국가들이 이민을 적극 수용, 국가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경북도의 이민정책에 변화가 올까. 기대해 본다./우정구(논설위원)

2023-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