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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체육계 성폭력, 코치는 ‘코칭’을 아는가?

신희선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박사체육계도 ‘미투(#MeToo)’다.쇼트트랙 심석희 선수를 지도했던 조재범 코치가 상습 폭행만이 아니라 강간, 상해 혐의로 추가 고소되었다.어린 선수들의 몸과 마음에 고통과 상처를 준 코치와 감독의 성희롱과 성폭력 문제가 불거지면서 체육계를 구조적으로 혁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는 학교운동부 및 합숙훈련을 특별 점검하기로 하였고, 국가인권위원회는 ‘스포츠인권 특별조사단’을 구성하여 대한체육회 소속 선수 13만명의 실태를 전수조사하기로 했다.체육계 성폭력 이슈를 보며 스포츠 정신, 코치의 역할과 코칭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스포츠 정신은 선수가 자신이 땀 흘린 만큼 최선을 다해 정정당당 겨루고 공정한 심판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승리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자세를 포함한다. 그러나 지금의 체육계는 과연 스포츠 정신이 살아 있는지 궁금하다. 대한체육회가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였다고 한다. 선수로서의 성장과 경기출전권 등 모든 것이 감독과 코치의 손에 의해 결정되었다.선수들이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 지상과제가 된 ‘스카이 캐슬’에서 선수들의 인권은 뒷전이었던 것이다.일등주의 문화, 상명하복 분위기에서 선수 개인에 대한 인격적인 존중은 무시되어 왔다. 수면 위에 드러난 것만 보더라도 코치의 욕설과 폭행이 다반사였고, 일부 여성 선수들은 성추행과 성폭력까지 감수해야 했다. 성적만 좋으면 모든 것이 덮어졌다.스포츠 정신에 반하는 체육계의 고질적인 병폐는 차제에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무엇보다 체육계에 몸담고 있는 이들에게 인권교육과 성교육이 철저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선수들이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학습권을 보장해 주고, 합숙시설에서 군대처럼 훈육하는 시스템 개선도 필요하다.스포츠계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관련자 모두가 책임을 공유하는 구조로 나아가야 한다. 무엇보다 코치와 선수간에 개방적인 학습 파트너십에 기반한 코칭이 자리 잡아야 한다.‘코치’는 스포츠 분야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비즈니스 코칭, 커리어 코칭, 라이프 코칭 등의 형태로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코칭은 기본적으로 “어떻게 하면 코칭을 받는 사람이 더 나아질 것인가?”라는 질문을 갖고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엘리자베트 하버라이트너는 ‘코칭 리더십’에서 “코칭이란 지원을 통해 스스로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확대하여 능력과 의욕을 높일 수 있게 하는 리딩 방식”이라고 정의하였다. 스포츠 영역에서 코치는 자신의 선수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효과적인 코칭을 통해 선수들이 자신의 역량을 개발하도록 도와주며 최선의 길을 안내해주어야 한다.선수의 가능성을 믿고 가장 가까이에서 성장을 도와주고 지원하는 것이 코치의 역할이기 때문이다.그런 점에서 코치와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관계다. 이는 코치가 성실한지, 언행이 일치한지, 약속한 것을 이행할 능력이 있는지 등을 통해 선수들은 코칭을 받으며 자연스레 알게 된다. 코치가 하는 코칭이 선수들이 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도록 일깨워주고 자신의 역량을 개발해 가도록 유도함으로써 성취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코치와 선수간에 인간적인 존중과 신뢰가 없는 금메달은 상처뿐인 영광이다. 코치를 선수가 고발하는 지금의 한국체육계의 현실을 보며, 근본으로 돌아가 묻는다.“코치는 코치이(coachee)를 한 인간으로 정중하게 존중하여 대한다. 코치는 개인적으로, 성적으로, 재정적으로 코치이를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국제코칭협회 윤리원칙을 체육계 코치들이 알고 실천했는지를.

2019-01-28

외면당한 천재 모차르트

세상에는 많은 음악들이 있고 그 음악 안에 함축된 내용은 사람마다 인격이 다르듯이 모두 다르다. 지금까지 음악을 벗으로 살아오면서 필자의 마음을 움직였던 작품과 그것을 작곡하였던 작곡가의 마음을 되짚어보고, 우리가 음악시간에 미처 배우지 못하였던 작곡가의 인생을 소개하며 글을 읽는 분들의 영혼이 쉴 수 있는 소중한 쉼터를 제공하고자 한다.사람들이 주로 듣는 클래식 음악이 바로크시대부터라고 생각할 때 참으로 많은 작곡가들이 이 세상을 살다 갔다. 그 중 잊혀진 작곡가가 더 많겠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작곡가들은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특별한 작품을 남겼거나 음악사적으로 획을 그을 만한 양식이나 기법을 새롭게 시도한 작곡가들일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와 바로크 시대의 경계에 위치한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1567∼1643)를 시작으로 바로크시대의 마지막과 고전악파의 시작에 서 있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 그리고 고전악파에서 로맨틱음악의 시대로 인도한 루드비히 판 베토벤(1770∼1827), 그리고 낭만음악에서 근·현대 음악으로 넘어가는 단초를 제공한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 등이 시대를 구분하는 획을 그은 작곡가로 우리는 기억한다.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작곡가는 이 중에 있지 않다. 필자가 오늘 말하고자 하는 작곡가는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이다. 세계 어딘가에서는 반드시 모차르트 음악이 연주되고 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시대를 구분 짓는 획기적인 양식을 남긴 작곡가는 아니었다. 과연 다른 작곡가들에 비해 어떤 점이 뛰어나서 36년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전 인류에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사랑받고 있는 것일까?모차르트의 음악은 다른 작곡가들과 분명히 구분되는 점이 있다. 필자는 그것을‘순수함’이라고 생각한다.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나서 당시 궁중 음악가였던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1719∼1787)에게서 이른바 조기 교육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궁중 음악가였으며 ‘기본 바이올린 교습법 시론’이라는 이후 오랫동안 사용된 표준교재를 집필할 정도로 음악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아들의 놀라운 재능을 감지하였던 그는 어린 모차르트를 데리고 유럽의 곳곳을 다니며 연주회를 개최하였으며 바로크가 탄생했던 이탈리아를 비롯해 오스트리아의 음악정서와는 달랐던 유럽의 다양한 도시를 누비며 연주여행을 하였다.이 부분은 모차르트에게 글로벌한 음악을 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란 지역도 비록 규모는 작지만 동유럽과 서유럽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융화되어 발화되는 곳이었기에 모차르트는 선천적, 후천적으로 다양한 음악양식을 접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그의 작품에 장점으로 반영되었다.모차르트는 ‘음악의 신동’으로 불린다. 하지만 이 별명은 그에게는 다소 억울한 면이 있다. 이 별명은 그를 타고난 천재로만 각인시키며 모차르트에 대한 이미지를 고정시켜 버리는데 사실은 조금 달랐다.모차르트는 유년기와 청소년 시기를 부모라기보다 매니저와 음악스승의 역할을 하였던 아버지와 연주 여행을 하며 보냈다. 이것은 어린 시절을 그의 또래 집단과 함께 아이답게 보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건강상태도 좋지 않았을 것이며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주로 자신보단 계급이 높은 귀족 계급들이었기에 엄청난 격식과 예의범절을 강요받았을 것이니 스트레스도 많았을 것이다.그의 어머니와도 일찍부터 헤어져 지내야 했으며 아들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그의 아버지에게 투정을 부리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음악이었으며 음악은 자신의 전부였을 것이다. 지난 2009년 우리 곁을 떠난 마이클 잭슨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사람을 잘 믿었다고 한다. 그 이유가 그 또한 5살이란 어린 시절부터 그의 형제들과 ‘잭슨 파이브’라는 그룹을 이뤄 음악활동으로 보냈기에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성장할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모차르트의 어린 시절과 공통점이 많은 부분이다.모차르트 대부분의 명곡은 그가 죽기 10년 전 빈에 정착한 후 대부분 작곡되었으며, 작곡의 기량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음악에서조차 순수함이 느껴진다. 여기서 순수함이란 어린 아이의 순수함을 말한다. 그 순수함에는 의도성이 없으며 음악을 듣는 이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들어달라는 요구도 없다. 오직 음악만이 존재하며 그것으로서 모든 것을 표현하고자 한다.모차르트는 36년이란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참 많은 곡을 작곡하였다. 그의 가장 큰 유산은 22곡의 오페라 작품들이다. 그가 다작의 오페라 작품을 쓰면서 쌓인 많은 유산들이 어쩌면 가장 세속적인 음악장르인 오페라와 대조적으로 종교곡의 정수인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인 ‘레퀴엠’(K.626)으로 그의 마지막 작품답게 ‘신 앞에서 홀로 선 가련한 인간’이라는 가장 고귀한 드라마로 표현되었다. 이 곡을 구성하는 모든 곡들이 다 아름답지만 특히 라크리모사(Lacrimosa)가 가장 인상적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모차르트가 죽고 난 후 공동묘지의 한 구석에 볼품없이 매장될 때 나오던 배경음악이다.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791년 가장 유명한 오페라 ‘마술피리’와 ‘클라리넷 협주곡’‘피아노 협주곡 27번’을 비롯하여 많은 곡을 남겼다. 그리고 이 ‘레퀴엠’은 건강상의 이유로 모두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일설에 의하면 라크리모사의 8마디까지만 모차르트에 의해 직접 작곡되어지고 나머지 부분은 그의 제자인 쥐스 마이어(1766∼1803)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푸치니(1858∼1924)도 그의 마지막 오페라 ‘투란도트’를 모두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지휘자 토스카니니(1867∼1957)는 1926년에 행해졌던 라 스칼라좌에서의 ‘투란도트’ 공연에서 3막이 연주되던 도중 “마에스트로가 쓴 곳은 여기까지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지휘봉을 남겨두고 무대를 내려와 다른 지휘자가 지휘하여 연주를 끝냈다고 한다. 푸치니를 존경했던 토스카니니가 슬픔으로 지휘를 더 이상 할 수 없어서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모차르트의 ‘레퀴엠’은 자신의 죽음을 추모하여 작곡한 것은 아니었다. 발자크 백작이 먼저 떠난 자신의 부인을 추모하기 위해 의뢰한 곡이었지만 이 곡을 쓰며 모차르트는 쇠약해진 자신을 보며 죽음을 예감한 것으로 확신한다. 모차르트는 죽기 전 자신의 제자인 프란츠 쥐스 마이어(1766∼1803)를 불러 곡의 자신이 생각한 악상의 흐름을 지시해 두었다고 한다. 세상을 떠난 자가 시작하고 그를 추모하는 남은 자가 완성한 전무후무한 ‘레퀴엠’이 완성되었으며 산자와 죽은 자의 공동 작품이 되었다.필자는 아직 죽음을 생각할 만한 나이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평소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곡을 늘 일러둔다. 그리고 혹시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그 곡을 같이 듣거나 연주하면서 나를 추모해 달라고 농담 아닌 농담으로 이야기 하곤 한다.모차르트가 가장 힘들어 했던 시기는 빈에 체재할 때부터였다. 빈 체재 초기에는 많은 사랑을 받았으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돈 지오반니(Don Giovanni)’등 그가 귀족들의 생활을 희화한 작품에 의해 결국에는 그를 지원해 주던 귀족들조차 모두 등을 돌렸다. ‘돈 지오반니’의 2막의 마지막 부분의 “돈지오반니∼ 그대가 초대하여 이렇게 왔도다!” 라고 노래하는 석상의 장면에서 모차르트가 자신에게 등을 돌린 귀족들에게 외치는 분노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불꽃이 돈 지오반니를 지옥으로 내치는 장면에서 신에게 정의롭지 못한 그들의 심판을 요청하는 듯하다.하지만 역시 그가 죽던 해 작곡된 짧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모테트 합창곡 ‘아베 베룸 코르푸스(Ave Verum Corpus K.618)’는 한때는 환호하던 그들이 등을 돌려 결국은 자신을 비참히 죽게 만들었지만 그들을 용서해 달라는 속죄의 메시지와 그의 외롭고 고달팠던 인생이 느껴진다.모차르트는 자신이 천재라고 불리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많지만 그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사람들은 나의 음악이 쉽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만큼 작곡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작곡에 대해 생각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거듭 연구해 보지 않았던 음악의 거장은 없었다.”문양일씨는 1971년 대구생이며 계명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오케스트라 지휘를 공부했다. 현재 포항예술고에서 음악과 전임으로 재직중이다

2019-01-28

노인 연령기준

노인의 연령을 상향하자는 논의를 처음 내놓은 단체는 대한노인회다. 2015년 대한노인회는 줄곧 반대 입장에 있던 노인 연령의 상향을 공식적으로 공론화시키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공론화에 앞장서겠다는 용기 있는 결단을 했다.우리나라는 1981년 노인복지법이 제정되면서 노인의 기준 연령이 65세가 됐다. 이를 기준으로 기초연금, 장기요양보험, 지하철 무임승차 등과 같은 각종 혜택을 부여한다. 왜 65세가 기준점이 됐는지는 자세한 설명이 없다. 아마 국제적으로 65세 이상이 노인 연령의 기준점으로 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 것으로 짐작된다.그러나 한국인이 인식하는 실제적 노인 연령은 이보다 훨씬 더 높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7년 전국 65세 이상 노인 1만여 명을 대상으로 노인 연령에 대한 인지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자의 86.3%가 노인의 기준 연령을 70세 이상으로 생각했다. 건강 상태가 좋아졌고 60세 정년으로 경제력을 해결하기가 힘들다는 것 등이 연령층을 높게 봐야 하는 이유였다.최근 복지부장관이 한 모임에서 노인 연령의 상향문제를 거론해 주목을 받았다. 그는 “급속한 고령화 사회 진입으로 한국사회는 사회복지 지출규모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어 대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더 늦추면 한국사회가 큰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한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노령화가 빠른 국가다. 노인 문제에 대한 대책이 절실한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회통념의 문제이다.대한노인회가 노인 연령의 상향 문제를 꺼낸 지 4년 만에 또다시 이 문제가 공론화장으로 나왔다. 공론화는 노인복지법 제정 당시 때보다 한국인의 기대수명이 6년이나 늘어난 사회적 배경도 작용했으나 국가 재정의 문제도 심각하다는 뜻이다. 노인 연령이 늘어난다고 노인 복지가 소홀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OECD 최악의 빈곤 수준에 처한 우리 노인에 대한 특단의 대책이 있어야겠다. 이 시대 노인은 가난한 대한민국을 부자나라로 만든 산업화의 일등공신이다. 충분한 복지혜택 누릴 자격이 있는 세대라는 뜻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1-27

포퓰리즘 바이러스

안재휘 논설위원조선은 사대부들의 지독한 사색당파로 망한 나라다. 학자에 따라서는 ‘당쟁’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일이 아니라는 관점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객관적 시각의 통사(通史)로 볼 때 조선시대의 당파싸움은 미화될 여지가 없다. 사색당파의 논쟁들은 하나같이 ‘백성’과 ‘국가’를 위하는 충정을 명분으로 걸어놓고 있지만 그 행태와 뒷이야기에는 냉혹한 흑백논리와 더럽고 편협한 욕망만 우글거린다. 절대권력자인 왕을 지렛대로 쓰려는 그들의 음모는 필사적이었다. 지금 이 나라를 이끌어나가고 있는 청와대와 여야 정치권의 행태를 보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옛날에는 세상을 움직이는 축이 임금이었던 반면, 지금은 국민의 지지율이 권력의 향배를 가름한다는 측면이 다를 뿐이다. 예전에는 왕이 얼마나 영특한가의 요소가 권력을 가르고 국운을 결정짓는 핵심변수였고, 지금은 국민들이 과연 얼마나 현명한가가 성패의 관건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뒤집을 수도 있다(水可載舟 亦可覆舟)’는 공자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민심’의 요체를 깨닫게 하는 절묘한 비유로 다가온다. 그러나 공자의 이 말은 백성의 마음이란 결코 한곳에 머물러있지 않음을 예고하는 고약한 은유로도 읽어야 마땅하다.현대정치에 있어서 정치권은 끊임없이 국민의 어리석음을 파고든다. 특히 이 나라 정치인들이 최대한 악용하고 있는 무기가 바로 포퓰리즘(populism)이다. 절대다수의 정치인들은 포퓰리즘이라는 바이러스를 어떻게 구사해 민심을 훔치고, 권력을 얻어 누릴 것인가에 골몰해 있다. 그들 입에서 나오는 ‘민생’이니, ‘애국’이니 하는 용어들은 민심을 홀리기 위한 과장된 형용사요 궤변의 꾐수일 따름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벌어지고 있는 정책의 혼선과 부작용들은 대개가 자승자박(自繩自縛)의 테마들이다. 우리는 작금 국가 주요정책이 포퓰리즘의 경연 속에서 함부로 다뤄질 때 어떤 참담한 혼란으로 귀결되는지를 절절히 체험하고 있다. ‘최저임금’ 문제가 그렇고, ‘탈원전’ 문제가 그렇다.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과 섣부른 ‘탈원전’이 국민 삶에 어떤 처참한 결과로 나타나는지는 이미 충분히 입증됐다. 그 시발점이 바로 지난 대선이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와 진보 시민단체가 지지세력의 핵심인 문재인 후보와 더불어민주당이 최저임금 대폭 인상과 ‘탈원전’을 덜컥 공약으로 내세운 것이 비운의 출발점이었다. 정책은 방향이 중요하다.그러나 방향이 옳다고 무조건 “당장 시행하겠다”고 공약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범죄적 선거행태다. 어설픈 선거공약 하나가 나라를 말아먹을 수도 있음을 공연히 묵과하는 정치인들의 언행이란 참으로 사악하다. 당장 표가 된다고 판단되면 무조건 내놓고 보는 엉터리 공약들은 반드시 치명적인 시행착오를 불러온다. 최저임금을 감당해야 하는 중소 영세사업자들의 처지를 전혀 헤아리지 않고 폭증을 감행해버린 정부의 처사는 아무리 곱씹어도 이해가 안 간다. 이유라곤 그저 ‘공약이었다’는 것 하나뿐인데, 세상 물정 모르는 윤똑똑이 얼치기 지식인들의 곡학아세를 앞세워 그런 하책을 쓴 이면은 도무지 헤아려지지 않는다. ‘탈원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핵발전기술 강국 ‘대한민국’의 위상을 하루아침에 개차반으로 매장해버린 결정적인 실수를 대체 어찌할 참인가.문제는 여전히 포퓰리즘 바이러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치권이 지지율을 떠받치는 맹종세력의 눈치만 살핀다는 사실이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에겐 세금 많이 걷어서 나눠주면 입을 막을 수 있다는 심보다. 나라야 망하건 말건 권력만 유지하면 된다는 가치관에 갇혀 살던 조선시대 무한 당쟁 앞잡이들의 행태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포퓰리즘 바이러스의 노예로 온존하는 사특한 정치꾼들과 어리석은 민심이 합작해내는 이 불량한 정치행태를 대체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2019-01-27

사막을 숲으로 바꾼 여인

네이멍구(內蒙古) 마오우쑤 사막 징베이탕은 과거 비옥한 초원이었지만, 무분별한 벌목 때문에 사막으로 변했습니다. 새도 날지 않고, 풀 한 포기 없는 황폐한 죽음의 땅입니다. 여기에 20세 꽃다운 처녀가 시집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죽은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친구 아들이 사는 장베이탕 사막 토굴 앞에 노새에 싣고 온 딸과 짐 한 꾸러미를 내려놓습니다. “이제부터는 여기가 네 집이다”눈물로 한 달을 지냅니다. 어느 날 멀리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미친 듯 달려갑니다. 왠 여자가 자기를 쫓아오자 겁에 질린 사막 행인은 뛰어 달아나죠.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쏟다가 세숫대야를 가져와 발자국을 덮습니다. 사람이 그리울 때마다 한 번씩 열어보며 마음을 달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생각합니다. 사람을 마냥 그리워할 것이 아니라 이곳을 사람들이 올 수 있는 곳으로 만들자. 사람들이 오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꽃이 피고 나무가 있으면 사람들이 올 것 아닌가?그날 왕복 19㎞ 사막길을 걸어 묘목 한 그루를 사와서 심습니다. 사막에 물이 있을 리 없습니다. 우물까지 또 걷습니다. 양 어깨에 물통을 지고 하루에 40번씩 우물을 오가면서 물을 길어 옵니다. 정수리에 불을 붙일 것처럼 이글대는 태양 아래 물기 하나 없는 곳, 모래바람이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와 금이야 옥이야 업어 심은 나무들을 무차별 습격합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매일 19㎞를 왕복하고 40번씩 물을 길어 나릅니다.그녀는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우물을 오가는 일을 30년 넘도록 포기하지 않고 반복합니다. 묘목을 사서 심고, 죽은 나무를 뽑는 일을 멈출 수 없습니다. 눈물과 피와 땀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30년의 시간이 흐릅니다. 그녀는 여의도 면적 10배의 크기 땅(1천400만평)을 울창한 숲으로 일궈냅니다. 첫 아이를 사막에 묻었지만, 지금은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습니다. 사막의 토굴이었던 신혼 방은 이제 어엿한 숲 속 저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인위쩐(殷玉珍), 제 평생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입니다. 그녀는 책 한 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입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사막 여인은 모든 식자들 앞에서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보란 듯이 외칩니다. 멈출 것이냐, 한 걸음 더 내 딛을 것이냐, 갈등하는 우리에게 인위쩐은 빙그레 웃으며 도전합니다. 멈추지 말고 가던 길을 계속 가라 말합니다./조신영 생각학교ASK 대표

2019-01-27

민족 분단의 단초는 항일 투쟁의 분파에서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상해 임정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다녀왔다. 상하이의 초대 임정 청사, 윤봉길의사기념관을 거쳐 항저우, 자싱, 전장, 난징의 임시 정부 유적지도 돌아보았다. 지난해 충칭 임시 정부방문에 이어 두 번째 학술 탐방 행사의 일환이다. 독립운동 정신 계승사업회가 마련한 이번 학술대회에는 중국의 저명한 학자들도 참여하였다. 중국에서 활동한 조선인들의 항일 투쟁을 재조명하기 위함이다. 석원화 교수는 상해 복단대학의 명예교수이며 코리아연구센터의 주임이다. 그는 조선인들의 중국에서의 항일 운동을 3개 분파로 나누어 그 활동을 소상히 소개하였다. 한국의 학술 대회 참여자들의 가장 관심을 끈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에서 활동한 첫 번째 그룹은 김구 선생을 중심으로 이회영, 안창호, 신규식 등 상해임시정부파다. 우리는 대체로 중국에서의 항일운동하면 상해에서 출범하여 중경에서 해방을 맞이한 26년간의 임시 정부의 활동만을 기억한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건국은 3·1운동과 상해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헌법에도 명시하고 있다. 중국의 석 교수는 상해 임정이 윤봉길 의거 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 하에 독립운동의 투쟁 역량을 강화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김구의 한국광복군과 김원봉 중심의 조선민족전선 연맹은 중국군과 함께 항일 투쟁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요체가 되었으나 이승만의 단정 안에 밀려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두 번째 그룹이 1926년 중국 조선인 집거지에서 조선 공산당을 조직하고, 동북 항일 연군에 가담한 최석천, 김일성, 김책 등의 활동이다. 이들의 항일 행적에 관해서는 남한 땅에서는 소개된 자료가 거의 없으나 김일성이 중국의 동북항일 연군의 소조로서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북한 정권 수립된 후 우리사회는 좌파나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항일 독립운동을 무시하고 배제한 결과이다. 우리 학계에서는 이들의 활동은 보잘 것 없다고 폄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보천보 전투 등 이들의 항일 투쟁을 영웅시하고 정치적 선전 도구로 활용하였다. 이들은 소련이 1945년 대일 선전 포고를 하자 일제의 감시를 피해 소련 변경지역으로 장소를 옮겨 항일 투쟁을 계속했다. 해방 후 김일성은 소련군 소좌로 귀국하여 결국 스탈린의 지지 하에 북의 최고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세 번째 그룹은 중국 모택동의 팔로군과 신4군에 편입되어 중국의 항일 근거지에서 활동한 세력이다. 팔로군 포병 대장을 역임한 무정과 최창익, 김두봉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중공군 최후의 근거지인 연안에서 출발하여 중국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 항일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만주 지역에서 일본군 잔재를 소탕하였으며, 북한의 정권 수립 시 군대 조직의 주요 구성 부문이 되었다. 이들은 북한 정권의 초기 주요 요직을 맡았으나 6·25 전쟁 전후 대부분 숙청되었다. 6·25 전쟁 후에는 허가이 등 소련파도 숙청되었다. 결국 북한정권에는 김일성 중심의 갑산파만 살아남아 오늘의 백두 혈통이라는 삼대 세습의 토대가 되었다.결국 일제의 조선 강점이 분단의 씨앗이라면 중국에서의 항일 운동의 분열이 분단의 단초가 되었다. 1945년 2월의 얄타 비밀 협정에 의한 미국과 소련의 38선을 경계로 한 분할통치는 한반도 분단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해방 공간에서 남북의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의 4김 회담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상해 임정에서 탄핵된 후 주로 미국에서 활동한 이승만은 남한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중국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 소련군에 편입된 김일성은 북한의 수상이 되었다. 모두가 역사의 운명이고 아이러니이다. 임정 1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선열들의 항일 독립운동 정신을 되새겨 민족의 재통일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민족의 통일이 한민족의 완전한 해방이기 때문이다.

2019-01-27

법정문화도시 포항

류영재포항예총 회장꿈틀로를 지나가다 ‘경축, 포항시 법정문화도시 예비지정’이란 펼침막을 만났다. 그렇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진작부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펼침막은 새삼 내 심장을 뛰게 하였다. 오랜 세월동안 문화예술의 불모지로 인식되던 포항이 전국 여러 지자체와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문화도시 지정의 가장 중요한 관문인 예비지정을 받았으니 마음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법정문화도시는 현 정부의 역점사업 중 하나로 문화를 도시발전의 근간으로 인식하고 지역문화진흥법에 의거하여 국가에서 행·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제도이다. 예비지정이 되면 승인된 계획에 따라 1년간 문화도시 조성사업을 추진한 후 그 실적을 평가하여 최종 선정이 결정된다. 법정문화도시로 최종 지정될 경우 향후 5년간 국·도비 등 200억 원 규모의 예산이 지원되는 쾌거다. 철강 산업도시로만 인식되던 포항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도시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지난해 11월 하순께, 뒤돌아보니 벌써 지난해의 일이 되었다. 일찍 찾아온 겨울 탓에 추운 날씨였고, 서울의 바람은 포항보다 더욱 차가웠으며 묵직한 사명감도 추위를 보탰던 것으로 기억된다. 무거운 보고용 책자 보따리를 들고, 그보다 훨씬 더 묵직한 사명감을 양어깨에 짊어진 포항문화재단의 담당팀장을 비롯하여 상임이사, 사무국장 그리고 문화예술과장, 도시재생과장 등 관계자들과 함께 아침 일찍 서울행 열차에 올랐다. 같은 시간 경북도청의 담당자도 상경하였다. 경복궁 내에 위치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법정문화도시 최종발표회에 참가하기 위한 걸음이었다. 경연이니만큼 긴장된 분위기였고, 앞 순서의 타 지자체 발표를 보면서 만만치 않은 경쟁이 되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포항문화재단의 발표를 보고나니 안심이 되었다. 연구와 추진내용의 충실함이나 포항의 정체성을 담은 차별화 전략, 그리고 자연재해 극복과 그 정신적인 상처를 문화로 치유하겠다는 간절함 등이 단연 돋보인 까닭이다. 심사위원단과의 질의응답 과정에서 경상북도의 지원, 포항시와 포항문화재단의 의지, 지역문화계의 염원이 확인되었으니 전문가, 행정기관과 민간의 유기적인 협력, 거버넌스가 빚어낸 성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문화가 도시의 미래를 좌우할 키워드임을 일찌감치 인식한 포항시는 이미 오래전부터 철강산업과 더불어 문화예술이 함께하는 도시로의 도약을 꿈꾸며 여러 가지 준비를 해오던 터였다. 벌써 7년의 역사를 만든 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이 그 단적인 사례이다. 포항시는 법정문화도시 지정공모가 발표되자마자 경상북도와 협약을 체결하고 문화도시 지정을 위한 예산 지원 등의 협조체제를 구축하였고, 문화도시 비전 연구용역 수립에 착수하는 등 법정 문화도시 지정을 위해 긴밀하게 움직였다. 문화도시 자문위원회를 조직하였고, 토론회를 개최하여 시민의견을 수렴하였고, 지자체 현장실사 평가에는 이강덕 포항시장이 직접 참석하여 사업계획을 격려하였으며, 평가단의 의견을 경청함으로써 문화도시 지정에 대한 포항시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실제로 이번 문화도시 예비지정 평가항목에 지자체의 의지와 협업이 포함되어 있었으니 이 부문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음은 불문가지, 모든 일은 정성이 반인 법이다.포항시의 법정문화도시 예비지정을 축하하며 관계자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내년의 최종평가에서 법정문화도시로 확정될 경우, 국가 예산의 유치라는 성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큰 가치는 포항시민의 문화적 자부심의 고취다. 이는 셈할 수 없는 큰 가치를 가진 무형의 자산이다.이제 문화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법정문화도시로 최종 선정이 될 때까지 힘을 합쳐야 하며, 최종 지정이 끝이 아니라 진정한 문화도시의 출발점임도 잊지말아야할 일이다.

2019-01-27

겨울에 물든 황량하고 적막한 비밀을 깨우다

북극의 한기가 남하하면서 한반도를 꽁꽁 얼린 날이었다. 북극하면 빙하와 에스키모와 새하얀 곰부터 떠오른다. 여름에는 해가 지지 않는 백야 현상이 나타나고 겨울에는 해가 뜨지 않는다는 곳이다.그런데 뺨이 에이고 손이 얼어붙는 것이 ‘북극 한파’ 때문이라니, 공간의 경계가 일시에 사라진 듯 야릇한 기분이 든다.월성 앞에 선 기분도 그만큼이나 기묘하다. 동지섣달 칼바람 속에서 시간의 멀미증을 느끼며 천년 왕성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월성의 속살은 비밀 같기도 하고 상처 같기도 하다.맹추위에 중단한 발굴조사 구역의 파란 방수천 위로 까마귀 떼가 검은 날갯짓을 하며 날아간다. 영화의 천년과 폐허의 천년이 한꺼번에 물밀어온다.내가 월성을 찾은 것은 두 번째다. 2014년 1월 고3 엄마가 되기 직전에 잠깐 짬을 내어 혼자 여행을 떠났다. 무작정 잡아 탄 버스가 경주행이었던 건 우연이자 필연이었다. 귀향의 안도감과 여행지의 설렘을 동시에 주는 곳, 졸작 ‘미실’의 무대로 소설 속에서 하세월 뛰놀고도 여전히 미로를 헤매는 느낌을 주는 곳이 경주이기 때문이다.비수기 평일이라 게스트하우스 4인실을 혼자 썼다. 방은 덥고 건조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버스를 잡아타고 여느 관광객처럼 불국사와 석굴암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남들이 모두 하듯 대릉원과 첨성대를 ‘도장 깨기’한 후에 도둑괭이처럼 남몰래 오른 곳이 월성이었다.그때의 월성은 지금의 월성이 아니었다. 그저 석빙고 인근의 도도록한 언덕, 잡풀이 함부로 돋고 오솔길이 맥락 없이 이어진 구릉이었다. 그곳이 신라의 왕성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간간이 지나는 산책객 외에 일부러 발걸음을 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패망한 왕조의 쇠락한 왕성, 외적의 침범으로 잿더미가 된 황성 옛터. 월성은 삼한을 통합한 제국의 수성 따윈 까맣게 잊은 채 초식동물처럼 나부죽이 엎드려 침묵하고 있었다. 내 눈에 새겨진 천년 폐허의 마지막 모습은 그러했다.꼬박 5년이 지난 후, 다시 월성을 찾았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5년이면 절반쯤은 새롭고 절반쯤은 여전하리라. KTX로 서울에서 포항까지 가서 신문사 미팅을 마친 후 시외버스를 타고 형산강을 따라 경주에 닿았다.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경주의 밤은 어두웠다.연말이라 숙소를 구하기 여의치 않아 버스터미널 근처에 미니호텔에 여장을 풀었는데, 아침에 숙소를 나섰을 때는 좀 놀랐다. 동네의 풍광이 요즘 식으로 말하면 ‘혼돈의 카오스’였다. 야릇한 간판을 내건 모텔, 외국인을 포함해 소박한 여행자들이 모여드는 게스트하우스, 단독주택과 빌라, 교회와 식당, 심지어 노인복지회관과 자동차정비소가 한동네에 처마를 맞대고 있었다.“경주가 왜 이렇지?”인터넷 지도가 이끄는 대로 골목을 지나노라니 모텔 창문에서 분명히 보일 풍경에 불쑥 고분이 나타난다. 사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풍경일지라도 외부인에게는 몹시 낯설고 당황스럽다.“어디를 파도 유물이고 유적이니 후손들의 궁여지책이 아닐까요?”이번 여행에 길벗이자 기사 노릇을 할 운전병 만기 전역자 아들의 답이다. 아들은 덕후(마니아) 중에서도 기이한 덕후인 ‘폐덕(폐허 덕후)’이라 “경주에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모여 있다!”며 흥분해 따라나선 터였다.그곳이 경주다. 생과 사가, 욕망과 허무가 서로 민낯을 바라보고 섰다. 그것이 경주다.신라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첫날은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오직 두 발로 월성을 걸어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길을 건너자마자 불쑥 나타난 고분은 마총과 금관총을 포함한 노서리고분군이었다. 거기서 길을 건너면 동남쪽으로 천마총과 황남대총으로 유명한 대릉원이고, 대릉원에서 길을 따라 가면 첨성대 그리고 계림이 나타난다.이때부터는 발걸음을 늦추고 상상력의 보폭을 넓혀야 한다. 천년 전, 천오백 년 전 그때의 사람들처럼 천진하게 혹은 위엄 있게 주위를 둘러본다. 월성 입구에서 3~4백 미터 앞쯤에는 오뚝하고 어여쁜 첨성대가 하늘을 향해 머리를 열고 있다.거기서 월성 쪽으로 더 다가가면 미추이사금을 시작으로 56명 중 38명의 왕을 배출한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발견’된 계림이 있다.지금은 고목(古木)의 숲이지만 그때는 탄생의 생기를 품은 울울창창한 숲이었을 것이다. 계림을 지나면 주춧돌 자리가 선명한 건물지와 함께 철망을 친 양옆으로 현장 보호를 위한 방수천이 줄지어 있는 구역이 나타난다.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광화문 바깥으로 종로를 향해 6조 거리가 형성되어 있듯 신라의 관아 건물로 쓰였을 것이라 추측되는 외곽의 건물지와, 자연 하천인 남천(옛 이름 문천(蚊川))과 함께 월성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해자(垓字, Moat)의 발굴 현장이다. 그 사이로 난 조붓한 길을 따라 가면 아까의 낮은 구릉이 ‘열리고’ 그 안에 편편한 터가 나타난다. 바로 월성이다.바람 부는 월성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다. 차갑게 언 땅 위로 흙바람이 뽀얗게 분다. 발굴지로 주목받은 지 몇 해가 지났건만 2014년 그때와 마찬가지로 인적은 드물다. 지금껏 월성을 찾는 발길은 월성 자체보다 내부에 자리한 ‘석빙고’ 때문이었다.석빙고는 옛 시절의 냉장고다. 요즘도 정전이 되면 어둠보다 냉장고가 멈춰 음식이 상해버릴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지경에, 근대 이전의 석빙고는 나라에서 관리할 만큼 중요한 곳이었고 얼음은 임금님이 신하에게 애정의 표시로 내려주는 하사품이기까지 했다.그러니 석빙고가 자리하고 있다는 건 월성이 그만큼 사람이 살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렷다.하지만 월성 내 석빙고는 신라의 유물이 아니라 조선 영조 때 만든 것이다. 남한에 딱 6개, 안동, 현풍, 경주, 청도, 창녕, 영산에 남아있는 석빙고라지만 집집마다 냉장고는 물론 김치냉장고와 냉동고까지 보유한 세상에 대단한 흥밋거리는 아닌 듯하다.내부를 들여다보니 깊은 석굴이 썰렁하다. 때마침 청소년 자녀를 포함한 한 가족이 구경을 왔다가 석빙고를 보더니 탄식을 터뜨린다.“애걔, 이게 다야?”어린 학생의 실망한 목소리에 경주로 떠나오기 전 들었던 목소리가 겹친다.“월성? 그게 대체 어디야?”월성을 취재하러 간다고 말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대개 비슷했다. 나름 식자들이고 경주 여행도 여러 차례 했건만 월성은 잘 모르고, 알아도 역사책에서나 읽었다고 했다. 그들에게 어떻게 월성을 알릴 수 있을까?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들의 숫자만큼, 혹은 그 이상의 것들이 빠르게 지워지는 경조부박한 세상에서 무엇으로 잠시나마 천년의 시간을 돌이키게 할 수 있을까?“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罔羅四方)!”월성에 오르면 바야흐로 신라가 사방에 펼쳐진다. 지증왕이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 사방을 망라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신라’로 정한 뜻이 왕성의 앉음새로도 느껴진다.남산 그리고 남천을 등지고 서면 오른편 동쪽으로 낭산과 토함산이, 왼편 서쪽으로 선도산이, 앞쪽 북쪽으로 소금강산이 우뚝하다.동북쪽에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서남쪽에 나정과 오릉이, 북서쪽 사선 방향으로 대릉원과 쪽샘, 노동동과 노서동의 고분군이 펼쳐진다. 지금은 도로에 끊겨 나뉘어져 있지만 하나의 궁성이었던 동궁과 월지, 그리고 경주국립박물관이 자리한 남궁과 성동동 전랑지에 자리했을 것이라 추정되는 북궁까지 포함하면 장대함이 더하다.신라의 수도 서라벌은 왕성으로부터 뻗어나가는 일직선대로와 격자형의 택지 조성으로 완벽하게 아름다운 계획 도시였고, 그 모두의 중심에 월성이 있었다.물론, 여전히 황량하다. 아직은 적막하다. 하지만 겨울의 동토가 이미 봄의 생명을 품고 있듯 한때 이곳에서 융성했던 왕조의 비밀이 발밑에서 꿈틀거리고 있다.“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고(故) 황현산 선생은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에서 한 사람의 감수성의 수준이 질적으로 얼마나 높고 낮은가는 현재의 두께감에 좌우된다고 지적했다. 신라, 경주, 그리고 월성. 그곳에서 느끼는 현재의 두께는 천년인가? 아니면 고작 눈앞의 지금뿐인가?월성의 동쪽 끝 성벽, 경북매일신문 이용선 사진부장의 추천을 받아 그곳을 찾았다. 마침 적당히 편평한 돌까지 있어 걸터앉아 기다리기에 맞춤하였다.동쪽 성벽에서 내려다보는 바로 아래 국립경주박물관이 있고, 그 안뜰에 일명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신종이 걸려 있다. 성낙주의 ‘에밀레종의 비밀’(푸른역사,2008)을 통해 성덕대왕신종이 에밀레종의 인신공양 설화보다는 만파식적 기원설(황수영,1982)에 근접한다는 주장을 매우 흥미롭게 읽은 바, 월성 성벽에서도 들린다는 영묘한 종소리를 꼭 들어보고 싶었다.원래는 봉덕사에 있다가 영묘사로 옮겼다가 봉황대에 보호되던 것을 국립경주박물관 경내로 이전한 성덕대왕신종은 문화재 보호를 위해서인지 직접 쳐서 소리 내는 대신 매시간 정각에서 20분 간격으로 녹음한 종소리를 들려준다.시간이 되었다. 과연 종소리가, 시인 김광균이 ‘외인촌’에서 묘사한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가 월성 성벽까지 은은히 닿는다. 3번씩 6번, 18번이 이어지는 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녹음된 소리이니 마냥 감격하기에도 객쩍다. 그렇지만 신비로운 울림만은 부정할 수 없으니, 성덕대왕신종의 종소리가 폐허를 깨우는 장면은 기묘한 떨림으로 오래 기억될 듯하다. 경주, 그리고 월성에 대한 신고식으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이제부터 좀 더 두텁고 풍부한 현재를 위해 천천히 월성의 지난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본다. 암호 같기도 하고 북극성 같기도 한 문헌과, 고고학이라는 과학과, 폐허에서 꽃을 피울 수 있는 상상력을 등롱 삼아.

2019-01-27

‘무(巫)’

유튜브는 오늘 같은 세상에 참 쓸모가 많다.유튜브가 선사한 새 세상 가운데 하나가 무당들 세상이다. 무당이라면 신비롭기도 하지만 무섭기도 하고 그보다 미신이라거나 천하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느 곳에 가도 무당 없는 곳 없지만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아니면 별종 세계 사람인 듯 취급하기 일쑤인 것이다. 그런데 유튜브가 이 세계를 세상 속으로 들여왔다. 어느 날 이것저것 검색을 하다 보니 용하다는 점집 찾아가 점 보는 과정을 고스란히 유튜브에 올려 놓는‘채널’이 있더라는 말씀이다.주위에도 사주 명리를 공부한 사람들은 꽤 많았다. 당신들 인생에 뭔가 답답하고 막힌데가 있다고 생각하던 끝에 ‘운명’에 관심이 꽂혀 도대체 왜 그런가를 골똘히 궁리한 끝에 명리학적 사유에 도달한 것이다. 그분들 말씀, “사주 도둑질은 하지 못하는 법”이라던가. 그런데 이렇게 ‘철학’으로 운명을 보는 것과 ‘신점’은 아주 다르단다. 명리는 연월일시, 사람이 세상에 날때 가지고 나온 네 기둥을 가지고 보는데 반해, 신점은 그야말로 ‘신’이 영매라 할 무당에게 그가 누군지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바로 알려준다는 것이다.카메라를 도중에 끊고 편집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런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세상에는 과학이라는 것으로 못 보는 게 많은데, 칼 융에 의하면 그것은 아직 전모를 모르는 것일 뿐,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무당은, 아니 ‘무’는 “귀신을 섬겨 길흉을 점치고 굿을 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것처럼 세속화 된 뜻도 다시 없을 것 같다. 무당은 귀신을 섬기는 게 아니라 ‘신’을 섬긴다. 귀신과 신이 뭐가 다르랴 하겠지만 확실히 무당들은 영험한 능력을 보유한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과 죽음 이후에도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산 자에 기대거나 괴롭히는 귀신을 구별한다. 또 옛날부터 ‘귀’와 ‘신’을 구별해 보는 전통이 있었음을 상기해 볼 수 있다.서양에서 들어온 종교는 ‘무’를 한갓 미신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한국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무(巫)’를 숭상했으며 무당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이어주는 신령스러운 존재였다. 근대 국학자들은 무당에서 제정일치 시대의 지혜로운 통치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는 바, 그들은 신을 통하여 인간 세계가 처한 상황을 예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과연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마음은 한갓 육체에 깃들인 것, 뇌수의 작용일 뿐인가, 아니면 육체와 다른 초월적인 기원을 갖고 있고 또 사후에는 다시 육체와 분리되어 초월적 세계로 돌아가는가? 어렸을 때는 전통적 사고에 따라 귀신을, 신을 믿었다. 젊어서는 인간을 물질적으로 인식하려 했다. 이제 또 생각하면 정신이라 부르는 것, 마음, 또 혼, 영혼은 어쩐지 육체에 기생한다기보다 이원론적 기원을 갖는 것 같기도 하다.삶은 신비롭다. 삶 너머도 신비롭다. 유튜브가 끌어들인 ‘무’를 통해 삶과 그 저편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1-24

오비

강길수수필가그 많던 낙엽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초겨울까지만 하더라도 보도(步道)를 메우던 낙엽들이 자취를 감췄다. 보도 옆 학교 운동장 가에 플라타너스나무가 하늘 높이 서 있다. 가지에는 마른 잎과 열매가 간간이 붙어있다. 무슨 미련이라도 남은 건가. 초겨울까지 푸른 잎을 놓지 않고 버티던 플라타너스나무다. 대한(大寒) 무렵의 한겨울인데도, 가지와 마른 잎은 서로 부둥켜안고 아직도 긴 이별연습을 하고 있다니.반면, 간선도로에 줄지어 선 은행나무는 완벽한 나신(裸身)으로 변모해 있다. 마른 잎을 한 개라도 달고 있나 싶어, 여러 나무를 유심히 살펴도 단 하나도 없다. 은행나무와 잎 사이의 맺고, 끊음이 저리도 분명한 걸 이제야 알았다. 나무밑동 곁 마른 잔디를, 마른 은행낙엽 몇 잎이 부여잡고 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도 나누는 걸까. 지난봄의 약동과 여름의 성숙과 가을의 화려함은 찾아 볼 수 없어도, 마른 낙엽과 잔디가 서로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대견하고도 애달프다.가을이 되자 나뭇잎들은 스스로 고운 색옷 갈아입고 가지를 떠나 은퇴했을 터다. 북녘 된바람에 우수수 쓸려 낮은 곳에 모였을 낙엽들. 미화원이 큰 비닐봉지에 쓸어 담아, 매립지나 소각시설로 보냈을 것이다. 매립지에 간 낙엽들은 땅 속 깊이 묻혀 시나브로 부패되며 가스와 물, 흙으로 되돌아 갈 길을 걷겠지. 소각시설로 간 낙엽들은 커다란 소각로에 들어가 몸을 불태워 열과 가스와 증기로 변하고, 얼마간의 재를 남기는 길을 갔을 테고. 도시 가로수에서 태어난 나뭇잎들의 한 생은 이런 여정들을 겪어내며 마칠 것이다.직장생활을 하면서 중년기에 접어들자, 주위에서 ‘오비(OB)’란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직장 떠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도 별 생각 없이 그 말을 따라 썼다. 그때 글쓰기라도 했었더라면, 오비의 원어를 따져 보았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남 따라 막연히 그냥 썼다. 훗날, 원어도 모르고 따라 쓰는 자신이 부끄러워 온라인 사전을 찾아보았다. 영어로 ‘올드 보이(Old Boy)’였다. 직역하면 ‘늙은 소년’이 된다. 하지만, 이 말이 ‘졸업생’이나 ‘퇴직자’를 뜻하는 표현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두 번째 직장에서 설립한 작은 회사에, 사측의 권유로 기술진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무렵, 두 번째 직장의 ‘오비모임’이 결성되었다. 나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새 직장에서는 현직이었지만, 전 직장기준으로 보면 오비였다. 매월 한 번씩 열리는 오비모임을 회원들은 좋아했다. 타 모임들과는 다른 분위기가 이루어져서다. 이를테면 경쟁심리가 없어 흉허물이 없다든가, 젊음을 함께 바친 직장이었다는 공감대가 펼쳐졌다. 따져 보니 내가 참여하는 오비모임도 퇴직자모임, 동문회, 성당의 봉사직출신모임 등 여러 개다.생각해보면, 활엽수 나뭇잎들은 가을에 모두 오비가 되었지 싶다. 어떤 잎은 붉은 오비, 어느 잎은 노란 오비, 다른 잎은 보랏빛 오비, 여느 잎은 갈색 오비가 되어 직장인 나무를 떠난 것이다.한겨울에 나뭇잎이 하나도 없는 은행나무는, 나무와 잎 사이가 사리 분명하나 정 없어 보인다. 아직도 마른 잎과 열매를 더러 매달고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와 잎, 열매 사이는 끈끈하고 긴 이별을 나누어 애석하나 아둔해 보이기도 한다.사람들이 오비가 되는 여정도 활엽수 나뭇잎들과 같지 않을까. 어떤 직장은 퇴직 문제가 은행나무낙엽처럼 말끔히 처리된다. 직장도, 근로자도 합법적 퇴직문제를 이견 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리라. 다른 직장은 퇴직 문제가 바로 해결되지 않고 플라타너스나무 잎처럼 끈끈하게 끌어, 법정싸움까지 비화되기도 한다. 양측의 욕심 때문인가.지금 오비이면서 현직이기도 한 나는, 장차 어느 나무를 닮아가야 할까. 또, 지구촌 생이 끝나는 날엔 어떤 오비가 기다릴까.

2019-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