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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현병 논쟁

최근 경남 진주의 한 아파트에서 벌어진 방화·살인 사건의 피의자가 조현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조현병 환자를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조현병은 정신질환의 하나로, 과거 ‘정신분열증’으로 불렸다. 하지만 부정적 편견을 심어줄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악기의 현을 고르다’는 뜻의 조현병(調絃病)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현악기의 줄처럼 이어진 뇌의 신경구조가 잘 조율되지 않아 정신적 혼란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조현병의 주된 증상은 환청, 망상, 이상 행동 등의 증상과 감정이 메마르고 말수가 적어지며, 흥미나 의욕이 없고, 대인관계가 없어진다. 환자들은 흔히 환각을 경험한다. 어떤 환자들은 이런 환청과 대화를 하기도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환각과 함께 망상은 정신분열병의 가장 특징적인 증상이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신과 연관지어 개인적인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관계망상, 나를 감시하고 있다거나 누군가가 나를 조종하고 있다는 피해망상, 내가 구세주이거나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종교망상을 자주 볼 수 있다. 망상은 합리적인 설득이나 논쟁으로 쉽게 교정되지 않는다. 의사들은 망상이나 환각, 환청, 이상한 행동 등이 6개월 이상 지속하면 조현병으로 판단한다. 조현병 환자가 전부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건 아니지만 일부 환자들은 공격적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전문가들은 보건 당국, 경찰, 지역 사회 등이 나서서 정신질환자를 관리하는 사회 안전망을 서둘러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현병 환자들의 범죄는 피의자와 관련이 없는 불특정 다수를 피해자로 만드는 강력 범죄로 이어진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따라서 기초수급자 등 정기적인 치료를 받기 어려운 조현병 환자들에 대해 우선적으로 공공의료 지원 시스템을 마련하고, 스스로 치료를 중단한 고위험군 환자는 방문 확인을 하는 등 예방조치가 필요하다. 또 치료조건부 기소유예나 현재 유명무실화된 치료명령제도를 활성화해 국가·지자체 차원에서 환자들을 관리해야 한다. 조현병 환자가 불특정다수를 향한 강력 범죄 피의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사회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4-24

책맹

장규열 한동대 교수주식으로 거부가 된 워렌 버핏(Warren Buffett)이 성공에 이른 열쇠는 ‘책읽기’였다고 한다. 디지털문명의 한 가운데인 21세기, 거의 모든 정보를 온라인으로 찾아볼 수 있으며 손가락 하나로 세상의 온갖 지식을 검색할 수 있다. 그럼에도 버핏은 ‘의미있는 지식과 뜻깊은 정보는 책을 읽지 않고는 얻어 챙길 방법이 없다’고 고집하며 독서를 통하여 평생 배우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9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세상과 너끈히 겨루며 싱싱함을 유지하는 비결 또한 책읽기라고 하였다. 하루 500페이지에 달할 정도의 독서량으로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섭렵하며 최첨단 정보를 기준으로 최우량 기업의 가능성을 판단하는 그만의 비법을 유지한다고 한다.양날의 칼. ‘지식정보시대’로 일컫는 오늘. 디지털문명이 안겨준 정보의 총량은 어마어마하다.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온라인은 정보로 이미 차고 넘친다. 정보의 양이 많기도 하지만 정보가 진화해 가는 속도를 따라잡기도 버거울 판이다. 사이버공간의 ‘초연결사회’는 인간에게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손쉽게 획득할 수 있게 하였다.그러나 과연 충분할 것인가. 컴퓨터와 영상모니터에만 심취하고 몰두하는 현대인은 생존과 성장에 필요한 만큼 정보와 지식을 챙기고 있는 것일까. 놀랍게도 이렇게 풍성한 정보습득이 간편해진 세상에 온라인검색만으로 얻지 못하는 정보가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상태를 문맹(Illiteracy)이라 불렀었지만, 디지털시대 현대인은 문맹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름하여 책맹(Aliteracy). 글을 읽을 줄은 물론 알지만 책을 읽지 않는 상태를 일컫는 표현이다.디지털정보와 영상전달에만 의존하는 사이 굳이 책을 읽을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는 일이야말로 사람을 위험한 상태에 빠뜨리게 된다. 글을 따라 읽으며 자연스럽게 체득하였던 집중력과 판단력의 저하를 초래하여 급기야는 디지털로 정보를 습득하면서도 점점 더 조급해 지고 산만해 지며 인내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그런 결과, 지식듭득과 상관이 없을 평소에도 주의력에 손상이 발생하여 균형있는 인성을 유지하는 일마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한다. 디지털중독이 가져오는 책맹현상은 위험하다. 유튜브와 게임과 SNS는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는 하였지만, 그 내용과 시야를 협소하게 하고 축소해 가는 경향성을 지닌다. 디지털의 모든 특장점을 충분히 활용할 줄도 알아야 하지만, 책읽기를 통하여 개발되는 집중력과 분석력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을 터이다.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Bill Gates)도 소문난 독서광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따금씩 좋은 책들을 소개하기도 한다. 알리바바의 마윈(馬雲)은 성공에 이르는 동안에는 몰라도, 그 성공을 유지하려면 독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였다. 빛의 속도로 바뀌어 가는 세상에 간편한 도구인 온라인 접속에 더하여 지루하고 답답하기 할 독서에 몰입하는 일은 비효율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인간의 문명은 독서를 통하여 사고력과 분석력을 진전시키고 통합과 협력을 위한 인성의 개발도 지식을 넘는 지혜로 가득한 책을 읽음으로 구현하여 왔다.지난 세기 초반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아직 문맹이 존재하던 시절에 이미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인터넷과 온라인에 중독된 나머지 인간의 소중한 능력을 잃어버리는 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디지털문명을 더욱 꽃피우게 하기 위하여도 책의 가치를 다시 새겨야 하며, 읽는 일의 수고로움을 지켜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제대로 알기 위하여 읽어야 한다.

2019-04-24

광주에서 대구를 생각하다!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무등산 자락에 자리한 작은 원룸에 둥지를 튼 지 어느덧 두 달. 경북대와 전남대 교환교수제에 따라 광주에서 1년을 보내기로 한 때문이다. 광주와 대구의 거점 국립대학으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전남대와 경북대. 그동안 학생교류는 지속적(持續的)으로 진행됐으나, 교수교류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경북대와 전남대 양교 총장이 교환교수제에 합의함으로써 실질적인 교류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거기에 첫 번째로 동승(同乘)한 셈이다.예전에 민교협 회의나 국교련 회의차 광주에 들른 적은 있지만, 장기체류는 이번이 처음이다. 관찰자나 관광객이 아니라, 거주민의 한 사람으로 광주를 살펴봄은 초로(初老)의 인생살이에 하나의 전환점이 되리라 희망한다. 역마살 탓인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나라 곳곳을 떠돌며 지난 20년을 살아왔다. 자동차로 획득한 이동의 자유와 떠돌고자 하는 욕망에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닌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사계절 정착민으로 광주에 머물고 있다.대구나 광주, 어딜 가나 눈에 밟히는 것은 시장이며 노점상이다. 거주지 부근에 있는 말바우 시장은 2, 4, 7, 9일이 장날이다. 열흘 가운데 나흘이 장날인 셈이다. 그때마다 길거리에 영감과 노파들이 노점(露店)을 펼치고 줄지어 앉아들 있다. 쑥과 냉이, 달래에서부터 양배추와 대파, 각종 한약재 등속을 펼쳐놓고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는 사람들. 얼마 전에는 홍어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양동시장에도 들렀다. 노점은 거기도 예외가 아니었다.그러다가 대구의 크고 작은 재래시장이 떠올랐다. 그곳에 터를 잡은 숱한 노점상들의 모습과 매무새가 새삼스레 기억되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도처(到處)에 깔린 24시간 편의점과 각종 마트와 슈퍼마켓, 소규모 점방과 대규모 할인매장들이 두 도시의 닮은꼴을 형성한다. 간간이 들려오는 누추하고 낡은 트럭의 녹음방송이 광주와 대구의 친연성을 강조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렇게 고단한 나날을 영위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상념이 찾아든다.거리거리에서 폐지를 실은 손수레를 끌고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노인들의 행장(行狀)도 광주나 대구나 매한가지다. 빈자는 어디에도 있고, 그들의 팍팍한 삶은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하되 대구와 광주는 확연히 다르다. “기억하고 행동할게요” 현수막이 내걸린 문흥초등학교 정문. 4·16 세월호 대참사 5주기를 추념(追念)하는 노란 현수막. 유민 아빠 김영오 씨가 광주에 정착한 데는 까닭이 있다.‘무등 공부방’에서 열린 김용운 선생 초청강연 진행자는 대구의 성리학과 광주의 실학을 대비하여 말한다. 과거를 투영하는데 거금을 들이는 대구와 소액을 미래에 투자하는 광주의 차이를 지적하는 것이다. 영광스러운 조선의 성리학과 빛나는 과거와 벼슬자리와 가문을 추억하는 대구와 실패한 조선의 성리학과 민초들의 신산(辛酸)한 삶과 미래를 떠올리는 광주. 아마도 그런 차이가 5.18 민중항쟁의 광주와 간첩과 폭도 운운하는 대구의 차이일지도 모른다.지난주에 문을 연 산수동의 인문연구원 ‘동고송(冬孤松)’ 창립대회는 은성(殷盛)했다. 한겨레신문 곽병찬 대기자의 ‘향원익청(香遠益淸)’ 출판기념회를 겸한 개원식에 60명도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여 가난한 지역 문사들의 후원을 자처한다. 1980년대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폭력적인 군부정권 아래서 12년 도피 생활을 했다던 황광우 소설가가 잠시 운을 뗀 지난날의 회억(回憶)은 참으로 따스하고 인간적인 것이었다.대구에서 광주로 올 때 어떤 분들은 대구에 없는 ‘무등 공부방’을 아쉬워했다. 반면에 대구에는 ‘지식과 세상’이나 ‘대경인문학협동조합’ 그리고 ‘가락 스튜디오’같은 곳이 있다. 그런 단체와 기관이 서로 어울려 소통하고 연대하면서 화합과 상생, 과거와 미래를 터놓고 논하는 자리를 만들어가는 것도 뜻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4월 하순의 상념이다.

2019-04-24

만약 모든 어린이들이 명상을 배운다면

김현욱 시인고통의 수레바퀴는 어떻게 돌아가기 시작할까?‘고엔카의 위빳사나 명상’(월리엄 하트, 김영사, 2017)에서는 ‘맛지마니까야’를 통해 모든 고통의 원인을 적시한다. “무지가 일어나면, 반응이 일어난다. 반응이 일어나면, 의식이 일어난다. 의식이 일어나면 마음과 물질이 일어난다. 마음과 물질이 일어나면,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이 일어난다.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이 일어나면, 접촉이 일어난다. 접촉이 일어나면, 감각이 일어난다. 감각이 일어나면, 갈망과 혐오가 일어난다. 갈망과 혐오가 일어나면, 집착이 일어난다. 집착이 일어나면, 되어감의 과정이 일어난다. 되어감의 과정이 시작되면, 태어남이 일어난다. 태어남이 일어나면, 늙음과 죽음이 일어난다. 슬픔, 애통함, 육체적 정신적 고통 그리고 고난과 함께. 이 모든 고통이 일어난다.”고통의 수레바퀴를 멈추려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알아야 한다. 붓다는 인간의 마음이 크게 네 가지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았다. 의식(원냐나), 지각(산냐), 감각(웨다나), 반응(상카라)이 그것이다. 의식은 분별하지 않는 알아차림·수용을, 지각은 인지행위·분류·분별과 평가를, 감각은 가치부여·호불호를, 반응은 갈망과 혐오를 가리킨다. 결국 인간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몸(아원자 입자)의 흐름과 이보다 더 빠르게 변하는 정신(의식, 지각, 감각, 반응)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붓다는 발견했다.깜마(카르마)를 ‘운명’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깜마는 ‘운명’이 아니라 ‘행동’이다. 붓다는, 당신이 당신의 주인이고, 당신이 당신의 미래를 만든다고 설했다. 그러니까, 인생이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나’의 ‘반응’ 때문이다. 모든 고통의 원인은 ‘반응’ 때문이다. 그러니까, 반응을 멈추면, 고통도 사라진다. 모든 반응을 멈추면,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고통의 진짜 원인은 마음의 반응이다. 반응이 쌓이고 깊어지면 갈망과 혐오가 생겨난다. 붓다는 이것을 ‘갈애(渴愛)’라고 했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인간이 삼독(三毒)과 오욕(五慾)에 집착하는 것을 갈애라고 한다. 갈애는 번뇌와 망상을 일으킨다. 번뇌와 망상은 인간의 정신을 병들게 한다. 이룰 수 없는 것을 끊임없이 바라면서도,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는 불만을 갖는 정신적 습관이 바로 ‘갈애’다.고통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보자. 집착은 왜 일어날까? 좋아하고 싫어하는 정신적 반응이 쌓이고 깊어지면 집착이 생긴다. 무엇이 좋아하고 싫어함을 일으킬까? 감각 때문이다. 감각은 왜 일어날까? 몸의 감각과 마음, 즉 여섯 가지 감각 토대를 통해서 일어난다. 왜 여섯 가지 감각 토대가 존재할까? 그것들이 마음과 물질의 흐름에 필수요소이기 때문이다. 마음과 물질의 흐름은 왜 일어날까? 붓다는 ‘의식’, ‘나’와 ‘나 아닌 것’으로 세상을 분리하는 인식 행위 때문에 일어난다고 했다. 이것 때문에 ‘정체성’이 생기는 것이다. 매순간 의식이 일어나 특정한 정신적, 육체적 형태를 취한다. 따라서,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의식은 끊임없이 흐르고 변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의식의 흐름을 일으킬까? 붓다는 그것이 반응 때문에 일어난다고 했다. 고통의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원인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반응은 왜 일어날까? 붓다는 그것이 ‘무지’ 때문에 일어난다고 설했다.인간은 반응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반응하는 대상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반응한다. 인간은 반응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끊임없이 반응하고, 반응한다. 전 세계적으로 명상 붐을 일으킨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말했다.“만약 세계의 모든 8세 아동들이 명상을 배운다면, 한 세대 만에 세계의 폭력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의 수레바퀴를 깨부수는 방법은 ‘명상’이다. 만약 한국의 모든 어린이들이 명상을 배운다면 어떻게 될까?

2019-04-24

시인과 화가의 우정

가난한 천재 화가 이중섭에게는 절친한 벗 구상준이 있었습니다. 구상 시인으로 알려진 유명한 분이지요. 한국 전쟁이 막 끝난 1954년. 부산에서 홀로 작품을 그리고 있던 무명의 이중섭을 자신의 식객으로 대구로 모시고 올라와 지극한 정성을 다 합니다. 구상은 당시 영남일보 주필로 활동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힘을 다해 이중섭이 오로지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친구의 작품을 알리기 위해 서울과 대구의 전시회를 진두 지휘하면서 무리한 탓이었을까요? 구상은 이중섭의 대구 전시회가 끝나자 쓰러집니다. 폐결핵 판정을 받고 폐 절단 수술을 받습니다. ‘누구누구는 꼭 문병을 올 거야. 중섭이야 제일 먼저 달려오겠지.’그런데 이상합니다. 다녀갈 만한 사람들은 모두 문병을 왔는데 가장 친한 벗인 중섭은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구상 시인은 마음이 상하기 시작합니다. ‘중섭이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회복 중이라 불편한 몸에 낙심한 마음이 겹쳐 구상은 한없이 기분이 가라앉습니다.며칠 후 마침내 중섭이 병실 문을 열고 나타납니다. “자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나는 다른 그 누구보다 자네가 제일 먼저 달려올 줄 알았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만은…” 친구의 원망에 이중섭은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머리만 긁적입니다. 부시럭 거리며 무언가를 꺼내 구상에게 내밉니다. “이게 뭔가?” “실은 이것 때문에 이렇게 늦었네. 내 정성일세.” 천도 복숭아 그림이었습니다. “어른들 말씀이 천도 복숭아를 먹으면 무병 장수한다고 하지 않나? 그러니 자네도 이걸 먹고 일어나게.” 과일 하나 사 올 수 없었던 가난한 이중섭이 과일 대신 그림을 그려 온 겁니다.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마주 잡습니다.구상 시인은 2004년 5월 11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천도 복숭아를 서재에 걸어 두고 평생을 함께 합니다. 시인과 화가의 우정을 생각하니 함석헌의 시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탔던 배 꺼지는 순간 /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 ‘너만은 살아다오’ 할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불의의 사형장에서 /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려줄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내가 바로 누군가에게 중섭이 되는 날을 꿈꾸어 봅니다. 나는 과연 그 한 사람을 가졌는지 묻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누군가의 그 한 사람이 되어 줄 수 있는 삶이기를 생각하는 그대의 멋진 모습에 반합니다./조신영 인문학365 대표

2019-04-24

임금님 수라상에서도 귀한 대접… 뽀얀 쌀밥 한 그릇

열 살 무렵, 시골에 살았다. 어느 날 이웃집에 놀러 갔다. ‘계란밥’이 나왔다. 쌀 조금에 보리쌀과 좁쌀을 잔뜩 넣은, 가난한 집의 식사였다.노란 좁쌀이 달걀과 비슷한 색깔이었다. 그 후 오랫동안 ‘계란밥’ 타령을 했다. 그나마 밥은 먹고 살 정도의 중농. 할머니는 철없는 손자의 ‘계란밥’ 타령을 듣다못해 말씀하셨다. “쟈, 저러다 병나겠다. 고마, 계란밥인지, 좁쌀밥인지 해조라.”그로부터 몇 번 ‘계란밥’을 먹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오래지 않아 그게 달걀이 아니라 좁쌀이라는 사실은 알아차렸다. 밥그릇에 담긴 작고 노란 좁쌀 알갱이. 당연히 좁쌀이 어떤 의미를 지닌 지도 몰랐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중국에서 샤오미[小米, 소미]라는 회사가 나올 줄은 짐작도 못 했다.◇ 쌀을 먹은 역사? 그리 오래지 않았다이밥에 고깃국? 북한이 김일성 시대부터 내걸었던,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구호다. 쌀밥 한번 마음껏 먹어보자. 만만치 않다.우리 ‘쌀밥 역사’도 그리 길진 않다. 수탈의 일제강점기에는 언감생심 힘들었다. 한국전쟁 후에는 전쟁의 상처로 먹고살기 힘들었다. 1970년대 혼식과 분식의 시대를 지났다. 힘들었던 시절, 정부는 아이들의 도시락까지 검사했다. ‘식량 자급자족’은 쌀밥을 원하는 대로 마음껏 먹어보자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쌀밥 마음껏’을 이루었고 북한은 실패했다.그 이전, 조선 시대에는 가능했을까? 당연히 불가능했다.‘조선왕조실록’ 세조 4년(1458년) 6월26일의 기사다. 제목은 ‘도승지 조석문, 우승지 한계미에게 제향 외에는 갱미를 쓰도록 명하다’이다.임금이 도승지 조석문, 우승지 한계미에게 이르기를, “내가 항상 스스로 검약하여서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넉넉하고 유족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음식을 조금도 검찰하지 않으니, 반미(飯米)는 지극히 정(精)하고 지극히 희게 할 필요가 없다. 금후로는 제향(祭享) 이외에는 세갱미(細粳米)를 쓰지 말게 하고, 대개 중미(中米)를 쓰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조석문이 대답하기를, “중미는 지극히 거칠으니 진공(進供)하기에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갱미(粳米)를 쓰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세갱미〉갱미〉중미’ 순서다. 중미보다 더 거친 쌀은 ‘조미(7CD9米)’다. 말 그대로 아주 거친 쌀이다. 조선 건국 후 60년이 지났을 시점이다. 나라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세조는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절대군주다. ‘반미(飯米)’는 밥쌀이다. 절대군주가 먹는 밥상의 쌀을 반쯤 쓿은 것으로 사용하라는 명령이다. 지금의 현미보다 덜 쓿은, 거친 쌀이었을 것이다. 세갱미는 완전히 쓿은 쌀이다. 오늘날의 백미(白米)와 흡사한 것으로 추정한다.역시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다. ‘제향(祭享)’은 제사와 잔치다. 제사 모시는 일과 손님맞이 잔치 이외에는 귀한 백미를 쓰지 말라는 지시다. 임금도 일상적으로 백미를 먹기 힘들었다.조선 시대, ‘쌀’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쌀[米]과는 다르다. 쌀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지금 우리가 먹는 쌀은 대미(大米)다. ‘소미(小米)’도 있다. 좁쌀이다. 좁쌀도 쌀이다.쌀만 일용하는 곡식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메밀도 일상적인 ‘밥의 재료’ 곡물이었다. 메밀을 구황작물로 여기지만 그렇지는 않다. 메밀은 흉년에 먹는 구황작물이면서, 일상적으로 재배하고, 식량으로 삼았던, 중요한 곡식 중의 하나였다. ‘메밀 쌀’도 있었다.곡식은 두 종류로 나누었다.정곡(正穀)과 잡곡(雜穀)이다. 사전에는 “쌀, 찹쌀 이외에는 모두 잡곡”이라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다산 정약용(1762~1836년)의 ‘경세유표_제12권_지관수제_창름지저3’의 일부다. 정곡과 잡곡의 종류, 곡식의 종류를 정확하게 기록했다.정곡 여섯 가지는, 첫째 대미(大米: 즉, 볍쌀), 둘째 소미(小米: 즉, 좁쌀), 셋째 벼(租: 즉, 稻), 넷째 조(粟: 즉, 稷), 다섯째 대맥(大麥), 여섯째 대두(大豆)이다(벼 중에는 혹 산도(山稻)라는 것이 있고, 조 중에는 혹 늦차조가 있음).잡곡 여섯 가지는, 첫째 패자(稗子: 吏文에는 잘못 稷이라 함), 둘째 수수(85A5黍: 이문에는 그릇 唐이라 함), 셋째 귀밀[雀麥: 이문은 그릇 耳牟라 함], 넷째 메밀[蕎麥: 이문에는 잘못 木麥이라 함], 다섯째 소맥(小麥: 이문에는 그릇 眞麥이라 함), 여섯째 소두(小豆: 녹두는 진제(賑濟)와 군량 양쪽에 마땅한 데가 없으니 그 이름을 열두 가지 중에서 없앰이 마땅함)이다.정곡은 대미(쌀), 소미(좁쌀), 벼(예전 멥쌀), 조[粟, 속, 기장으로 추정], 대맥(보리), 대두(콩) 등이다.잡곡은, 패자(피), 촉서(수수). 귀밀(귀보리), 교맥(메밀), 소맥(밀), 소두(팥) 등이다. 녹두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진제(구휼 정책)와 군량 양쪽에 모두 큰 쓰임이 없다.쌀과 더불어 좁쌀, 메밀 쌀, 기장, 보리 등을 널리 ‘쌀’로 사용했다.다산 정약용의 시대, 즉 정조대왕이 통치하던 18세기 후반은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다. 비교적 안정적이고 넉넉하던 시절이다. 이 시대에도 ‘이밥에 고깃국’은 여전히 힘들었다. 쌀 대신에, 오늘날 우리가 잡곡으로 여기는, 보리, 좁쌀, 기장, 콩 등을 밥 짓는 곡물로 사용했다. 쌀만 쌀이 아니라, 여러 잡곡도 쌀로 여겼다.◇ 우리는 무엇을 먹고살았을까?우리 선조들이 한반도에 산 것은 5천 년이다. 역사를 글로 기록한, ‘유사시대’는 2천 년에 미치지 않는다. 긴 세월 동안 우리 선조들은 무엇을 먹고살았을까? 쌀보다는 잡곡이다. 한반도의 역사는 ‘잡곡 대신 쌀’의 역사다. 남쪽과 달리, 추운 날씨의 한반도 북쪽은 쌀 생산이 불가능했다.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8권_지관수제_전제(田制) 10’의 내용이다.촌감(村監) 한 자리는 곧 옛날 전준(田畯)의 직(職)이다. 그 해가 다 가도록 수고하는데, 녹(祿)이 없을 수 없으니 1년에 곡식 24곡(斛, 240두)을 받아서 양식으로 하며, (중략) 남방에는 벼, 북방에는 메기장을 준다촌감, 전준 모두 현장에서 농사를 관리하는 권농관이다. 급료를 준다. “남쪽에서는 벼(?), 북쪽에서는 메기장”이다. 원문에는 “南方以稻 北方以稷(남방이도 북방이직)”으로 표기했다. 남과 북에서 지급하는 급료의 내용물이 다르다.‘도(稻)’는 탈곡하지 않은 벼, ‘직(稷)’은 탈곡하지 않은 기장이다. ‘도’는 지금은 잡초로 여기는 ‘피’, 예전 멥쌀이나 볏과의 식물로 여기기도 한다. ‘직’도 마찬가지. 기장 혹은 볏과의 어떤 식물로 추정한다.‘도’와 ‘직’ 모두, 우리가 먹는, 쌀이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급료의 내용물은 다르지만, 양은 같다. 240말이다. 도와 직을 나누지 않았다.우리만 곡물, 잡곡을 먹었을까? 그렇지는 않다.조선 중기 문신 남용익(1628~1692년)은 효종 6년(1655년), 조선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문견별록’을 남겼다.“(전략) 음식은 반드시 젓가락으로 먹으며, 빈부귀천 할 것 없이 하루 두 끼 ‘밥’을 먹고 힘든 일을 하는 자라야 세 끼를 먹음. 가난한 사람으로서 역사(役事, 힘든 일)를 하는 자는 밥을 두서너 숟갈을 뭉쳐 한 덩이로 만들어 불에 쬐어 말려서 먹되 하루 두 덩이를 먹었으면 다시는 더 밥을 먹지 않으며, 심한 자는 더러 찐 떡만 먹거나 군고구마만 먹기도 하여, 아무리 큰 도성이나 큰 읍(邑)이라 하여도 솥밥을 먹는 집이 드물다. (후략)”이 글의 ‘밥’은 우리가 생각하는 쌀로 지은 ‘밥’이 아니다. 정확지는 않지만 ‘어떤 곡물’을 찐 것이다.원문에는 ‘반(飯)’이라고 표기했다.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밥’이 반드시 쌀은 아니다.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어떤 곡물이다. 글의 끝부분에 “솥밥을 먹는 집이 드물다”라고 했다. 솥밥은, 오늘날과 같이 쌀 혹은 보리 등으로 지은 밥을 의미한다. 솥밥을 먹는 집이 드물다는 것은 곧 쌀밥 혹은 보리밥을 먹는 이가 드물다는 뜻이다.조선 후기 이앙법이 보급되고 농법이 발달하면서 단위 면적당 쌀 생산량이 늘어났다. 불행히도 여전히 서민들은 쌀로부터 멀었다. 수탈도 심했던 시기다. 조선 말기에도 대부분 서민은 잡곡이 주식이었다.우리는 쌀에 관한 한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쌀은 두 종류다. 자포니카종(japonica, 日本種)과 인디카 종(indica, 印度種)이다. 자포니카종은 단립종(短粒種)이다. 쌀 길이가 짧고, 통통하다. 인디카종은 장립종(長粒種)이다. 길고 날씬하다.‘훅 불면 날아갈 것 같다’라고 표현하는 안남미(安南米)다. 한반도에 소개될 때 ‘베트남 쌀’로 불리면서 얻은 이름이다.우리는 단립종, 자포니카종을 주로 먹는다. 우리가 먹는 쌀이니 대부분 나라가 우리와 같은 쌀을 먹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렇지는 않다.전 세계를 통틀어, 단립종의 생산은 10%에 불과하다. 대부분 나라가 안남미, 장립종 쌀을 먹는다. 단립종 쌀을 먹는 지역은 한반도와 일본, 중국 북부 등이다. 동남아와 유럽, 미주 지역은 모두 장립종을 먹는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베트남 쌀국수’도 장립종 쌀로 만든다. 우리가 수입하는 베트남 쌀국수의 대부분은 태국산이다. ‘태국에서 수입하는 베트남 쌀국수’도 재미있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4-24

꽃나무에 이름표를 달며

김순희 수필가벚꽃이 진 영일대둘레길에 또 다른 분홍빛이 꽃불을 켰다. 아, 이 꽃 이름이 뭐였지? 누가 알려줬는데 지난해 휴대폰으로 검색도 했었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무와 꽃 이름을 잘 아는 태명씨에게 전화를 걸어 둘레길에 터널을 이루고 피어있는 꽃나무의 이름을 다시 물었다. ‘꽃아그배나무’라고 금방 알려주었다.왜 이렇게 안 외워질까? 뇌세포가 쪼그라들었나, 만날 듣고도 자꾸 까먹는다. 이름이 생소하기도 하지만 관심 부족이란 걸 느낀다. 꽃아그배나무가 내게 많이 사랑스럽지 않았나보다.나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보는 그렇게 삼사 년 된 지인이 있다. 서로 친구란 말을 하는 사이다. 이번 봄이 시작 될 무렵, 그 분이 내 이름을 쓸 일이 있었다. ‘김순이’라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가슴에 다는 이름표에 써서 주는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 모르게 살며시 네임펜을 들고 글자 ‘이’에 ㅗ을 씌우고 ㅡ를 받쳐 ‘희’로 만들어 주었다. 자세히 안보면 덧칠이 안 보인다. 몇 주가 지나도 이름표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 것을 보니 그분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르는 눈치다.내가 그 사람에게 꽃아그배나무인 것이다. 꽃의 색깔을 알고 어디서 많이 피는지도 알지만 정작 이름은 모른다. 친구라는 이름표가 무색해져버렸다. 슬며시 그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친구에서 그냥 아는 사람으로 이름표를 바꿔 달았다. 시댁에 다니러 갔다. 아버님이 홀로 가꾸어 놓은 뜰로 나가 두릅순과 엄나무순을 따와 전을 부쳤다. 나물 반찬으로 남편과 셋이 둘러 앉아 점심을 먹었다. 두릅순이 한창이라 따고 돌아서면 금세 다른 가지에 새순이 돋는다고 하셨다. 어머님이 계실 때는 장에 내다 팔아 돈을 샀는데 그 돈 써 보지도 못하고 갔다며 쓸데없는 일만 했다며 농을 하셨다.두릅이 가득한 바구니를 보니 두릅에 대해 몰랐던 그날이 떠올랐다. 나무백일홍이 붉게 피는 걸 구경하러 ‘초곡리 칠인정’에 가다가 둑방에 노랗게 키를 세운 꽃이 눈에 띄었다. 같이 간 일행에게 이름을 물어도 아는 이가 없었다. 며칠 뒤 시댁에 갔더니 텃밭 울타리에 온통 노란 어제 그 꽃이 둘러 있었다. 가만히 보니 그 자리는 봄마다 내가 두릅을 땄던 그 자리였다.먹고 싶은 순을 달고 있을 때만 가까이 할 뿐 두릅의 여름과 가을의 모습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잎이 크고 꽃이 벙싯벙싯해서 겨울과 봄의 뼈대만 세운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노란꽃술 가득 꿀이 가득해 꿀벌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늦가을이 되면 까만 씨를 맺기 위해 여름내 벌을 불러들였다.두릅의 사계절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풀도 생각이 깊어지면 나이테를 품을 수 있을까, 두릅은 풀에서 진화해 나무가 된 것 같다. 나무는 쳐다보는 것이라고 배웠는데 아버님 뜰에 두릅은 그러기엔 키가 자그마해서 나무의 특징인 듬직한 둥치가 없다. 땅에서 바로 가지가 솟아나와 끝에 연두빛 불을 켠다. 그 모습은 아직 풀의 특징과 더 닮았다.치커리는 잎만 따다 싫증이 나서 두었더니 꽃대를 쑤욱 올렸다. 맑은 하늘빛 꽃이 어찌나 고운지 사진을 찍어 만나는 이마다 보여줘도 치커리꽃을 처음 본다고 했다. 텃밭에서 몸을 낮추면 생강꽃, 당근꽃, 완두콩꽃, 꽃이 목적이 아닌 풀들의 전성기가 보였다.사람에게 부대껴 사람멀미를 할 때마다 꽃구경을 다녔다. 자주 꽃을 보다보니 멀미가 없을 때에도 꽃을 찾아나서 꽃에 집중하는 나를 발견했다. 관심을 갖다보니 꽃이 남긴 이야기와 사람이 남긴 이야기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들꽃이라고 부르던 아이들이 주름꽃, 개구리자리, 좁쌀냉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왔다. 이름을 알고 나니 더 어여뻐 보였다. 꽃들의 이름표를 가슴에 새기고, 사진으로 일기로 기록하다보니 사계절이 지났다. 멀미도 사라졌다. 꽃의 다른 이름은 위로였다.

2019-04-24

카테리니 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물질이 사고를 결정한다우리는 흔히 역사는 발전한다고 말한다.이 말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1831)로부터 왔는데, 헤겔이 쓴 정확한 단어는 ‘발전’이 아니라 ‘전개’였다.발전과 전개는 다르다. 발전이란 어떤 목표를 가지고 나아간다는 말이지만 전개한다는 말에는 그런 목표가 없다.역사가 전개된다는 의미는 더 나은 쪽이나 더 못한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펼쳐진다는 말이다.인류의 문화는 진화한다. 이때 진화라는 말도 하나의 종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갈래의 방향 중 하나의 방향을 선택해 간다고 보아야 한다.오늘날 지구상 생명체의 진화도 어느 방향성을 따라 발전되거나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갈래의 무작위성의 결과다. 그 선택의 방향이 좋은지, 나쁜지 말할 수는 없다. 좋다, 나쁘다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비교 우위에 지나지 않는다. 삶은 반복될 수 없으므로 그 둘을 비교할 수는 없다. 패션의 흐름도 이와 다르지 않다.인류의 문화가 진화한다는 것은 변화하며 변화의 우열에 대해서 쉽게 말할 수 없는 방향으로 펼쳐진다. 왜 그런 변화가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이러한 변화를 불러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유물론은 물질이 이러한 변화를 불러온다고 말한다.물질은 인간의 정신과 삶의 방식을 변혁시킨다. 그렇다면 어떻게 물질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 이야기를 해보자.노벨 문학상을 받은 포르투갈의 호세 사라마고(Jos00E9 de Sousa Saramago·1922∼2010)는 기발한 상상력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폭로한 ‘눈먼 자들의 도시(Blindness)’를 썼다. 이 소설은 사람이 집단적으로 눈이 멀게 되는 전염병에 걸린다는 상상력에서 출발한다.이를 통해 인간의 법과 도덕과 윤리가 얼마나 연약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쉽게 와해될 수 있는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비겁하고 추악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모든 사람의 눈이 멀면 더럽고 깨끗하다는 개념이 사라질 것이고 더불어 잘 생겼다거나 예쁘다는 말도 사라질 것이다.TV가 무용지물이 될 것이고 백화점이나 아울렛과 같은 패션시장은 애당초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심지어 동물원까지 텅 비어 버릴 것이다. 눈이라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 속에서 예술이 만들어지고, 아름다움 에 대한 관념이 생긴다. 아무리 고결하고 고상하고 싶어도 물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사유와 정신, 영혼까지 더러운 진창길을 헤매야 한다. 물질을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카테리니 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내 기억 속에 남으리카테리니 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기차는 멀리 떠나고 당신 역에 홀로 남았네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남긴 채 앉아만 있네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To Treno Fevgi Stis Okto)’의 가사 일부다. 조수미의 노래로 우리에게 친근한 이 곡은 음악의 거장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eodorakis·1925∼)가 작곡했다. 1960년대 그리스의 군부독재에 저항하여 싸우던 한 청년 레지스탕스와 연인이 겪은 이별의 아픔에 대해 다루고 있다.혼란한 정치적 상황에 질린 여성은 연인과 함께 지중해 연안의 아름다운 카타리니로 떠나고 싶어한다.하지만 독재 치하에서 억압받는 민중을 놔두고 혼자만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떠날 수 없었던 청년은, 그녀 앞에 나타나지도 못한 채 그녀가 떠나가는 모습만 숨어서 지켜볼 뿐이다.근대적 탈 것은 전근대적인 탈 것과 전적으로 다른 성질의 것이다. 마차는 사람의 사정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지만, 기차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기차에 탄 사람의 마음이야 어떻든 기차는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정해진 시간까지 달려가기 바쁘다.기차는 인간을 이해해주지 않는다. 인간은 떠나는 기차를 세울 수도 없으며, 기차를 따라 잡을만큼 빠른 교통수단도 없다. 연인은 떠나가고 홀로 남은 남성은 그 이별을 중지시킬 방법이 없다. 실제로 기차의 기적은 시끄럽다. 기차를 타기만 하면 이별은 자동적으로 이뤄진다. 사람과 사람을 떼어놓고 마는 기차의 속성이 그 요란한 소리를 슬프다고 느끼게 만든다. 기차의 기적이 슬픈 것이 아니라 기차의 속성으로 인해 기적은 슬픈 것으로 우리에게 인식된다.△경험의 양과 속도물질은 시대와 사회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사회의 변화에 보조를 맞추며 발전했다. 과거의 산업혁명은 기계의 발전에 힘입었지만 중세시대와 같이 신을 중시했다면 이런 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계가 인간을 대신한다거나, 인간이 신을 흉내낸다는 것 자체가 불경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계에 대한 인식이 점차 호의적으로 바뀌게 되었을 때 비로소 기계의 발전이 급속도로 이뤄졌다.인간은 평균 시속 10㎞로 달릴 수 있고, 걸으면 한 시간에 4㎞ 가량 갈 수 있다. 인간탄환이라 불리는 자메이카의 육상선수 우사인 볼트(Usain Bolt)가 세운 100m 세계신기록은 9.58초다. 이 속도로 사람은 10분도 달릴 수 없지만, 1시간을 달린다고 해봤자 고작 38㎞를 가는 것이 전부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하이퍼루프 프로젝트는 음속으로 달리는 열차 개발계획이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 바퀴 없는 열차가 인간의 음성보다 더 빨리 달리는 시대가 지금 우리 눈앞에 열리고 있다.1850년대 사람이 이동하는 평균속도는 시속 6km였고, 이를 토대로 계산한다면 한 사람이 평생 이동하는 거리는 11만㎞였다. 그런데 2050년이 되면 운송수단의 평균속도는 시속 337㎞에 이를 것이고, 한 인간이 평생 이동하는 거리는 1천100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운송수단의 속도가 50배 늘어나는 동안 인간의 능력은 100배 이상 상승하게 된다. 인간은 더 쉽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더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의 능력은 거기에 비례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하급수적(exponential)인 수준으로 높아진다.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평균이동속도가 빨라진 것은 경험의 폭이나 경험의 양이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 이전의 사람은 대부분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서 자라고 그곳에서 죽었다. 그들의 경험은 그 마을 이상을 넘어서지 않았고, 마을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 이상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즉 근대이전 인간의 경험과 지식이 마을과 같은 크기였다고 할 수 있다.공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탈 것의 속도는 빨라져 자신이 태어난 나라는 물론 마음만 먹으면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단시간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의 경험과 지식의 크기는 지구라는 수준을 넘어서 우주로 뻗어나가고 있다. 우주는 터무니없이 넓고 거기에는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무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사고는 이제 우주 만큼의 넓이로 확장될 것이다.정신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인간을 지배한다. 과학기술은 물질을 만듦으로써 정신을 변혁시킨다.

2019-04-24

성공은 착실한 준비에서

심한식 경북부지난 19일부터 22일까지 경산에서 개최된 제57회 경북도민체육대회는 성공체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작성된 기록을 떠나 경산시의 철저한 준비에 민·학이 서로 소통과 협력으로 힘을 보탰기 때문이다.경산시는 2017년 8월 제57회 경북도민체전 개최지로 결정되자 2018년 1월 도민체전 T/F팀을 결성해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최적의 분위기 속에서 선수들이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 이들을 지원할 자원봉사자들의 교육, 부족한 경기장을 메울 학교시설의 사용을 위해 사전 소통을 강화했다.물론 부대비용은 들었지만, 중간고사 기간임에도 많은 학교가 시설을 경기장소로 제공해 어려움이 없었다.부부가, 자매가 특별한 사연으로 자원봉사에 참여한 미담들이 쏟아졌고 대회가 끝났지만 진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이처럼 철저한 준비와 소통이 뒤따라야 성공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주위에서 너무 자주 목격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다.일하기보다는 눈치로 승진하려는 공직자, 지역민과 동떨어져 정치판만 기웃거리다 출마에 나서는 정치인들, 진실을 전하기보다는 돈을 밝히는 기자, 사건을 왜곡시키는 수사기관, 돈으로 성적이 바뀌는 학교, “나만 아니면 돼”라는 지도자들. 눈을 들어 어디를 보아도 진실성보다는 거짓과 탐욕이 자주 목격된다. ‘참’보다는 ‘거짓’이 더 빠르게 전달되고 전염성이 강한 것을 인정하더라도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다.이 세상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세상을 버텨내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경산시의 성공적인 도체 개최를 부러운 눈으로 보지만 말고 지금부터라도 착실하게 준비해 보자. 열심히 노력한 이후에 뒤따를 보상을 생각해 보자. 비록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해도 최선을 다했다는 행복은 남지 않겠는가? 성공과 내일을 위해 어떠한 방법으로든 뛰는 우리는 ‘진실’의 토대 위에서는 벗어나지 말아야 하겠다./shs1127@kbmaeil.com

2019-04-23

포항의 야시장(夜市場)이라면

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기획조사팀장최근 대한민국의 밤은 어쩌면 예전보다 활기찬 모습을 보일 것 같다. 전국 각지에서 유행처럼 ‘야시장(夜市場)’을 개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야시장은 생각보다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이던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비교적 산업과 경제가 활발하게 움직이며 주요 도시에는 전기가 제대로 공급되었기 때문에 서울, 부산, 대구는 물론 포항 등 주요 도시에서는 야시장이 개설되었던 것이다. 포항도 야시장의 역사는 이미 100년 가까이 되는 셈이다.당시 포항의 상거래는 조선인들이 중심이 되는 여천시장과 지금의 중앙상가 위치에 즐비하였던 일본인 상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여천시장에서는 해가 뜨면 시장이 북적이다가 해가지면 철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당시 신문기사 등을 살펴보면 시장에는 노점들도 많았다. 주로 여인네들이 지역의 유명한 특산물이었던 돌김이나 청어의 머리를 자르고 몸통을 절반으로 갈라 내장을 제거한 후 염장 조미하여 말린 신흠(身欠)청어 등을 가지고 나와 호객하는 모습은 흔한 풍경이었다.지금 철강경기의 변동에 따라 지역경제가 흔들리듯이 당시에는 청어 어획이 풍어(豊漁)냐 불어(不漁)냐에 따라 포항읍내 경기가 결정되었다. 여름철에는 시장을 여는 시간이 늘어나기는 하였지만 취급하는 것이 부패하기 쉬운 수산물이어서 어려움이 많았고, 선선한 저녁에는 어두워서 장사할 수 없었다. 이에 지역 상인들은 스스로 값비싼 전기료와 전등임대료를 감내하며 사활을 걸고 깜깜한 밤을 밝혀 손님을 끌어 모으기 위해 시작한 것이 바로 야시장이었다.1930년대에 전국적으로 유행하였던 야시장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물리적으로 장사하는 시간이 연장된데 다 야밤에 환하게 전등으로 밝혀진 시장거리는 당시로서는 대단한 볼거리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최대한 짧은 시간동안 값비싼 전기료비용을 건지려는 상인들의 조바심으로 인해 아이들과 함께 나온 부인들을 단순 구경꾼으로 지레짐작한 상인들이 막말하거나 무시하는 사례, 큰손이 아닌 군것질하는 아이들을 홀대하는 사례들도 많았던 모양이다. 당시 야시장을 둘러싸고 ‘부인손님에 대한 응대 특히 공손하게 하자’, ‘태도문제, 언사와 함께 중요’, ‘모처럼 온 손님 고마운 생각을 가져라’등 지금도 그대로 인용할만한 기사들도 눈에 띄고 있다.서울시에서 시행하고 있는 밤 도깨비 야시장은 이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올해도 4월5일부터 시내 곳곳에서 개최하고 있다. 2015년에는 20만 명, 2016년에는 330만 명, 2017년에는 505만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야시장이라고 해도 푸드 트럭과 같은 단순히 먹거리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외국인들에게도 인기가 높다고 한다. 야시장은 과거처럼 상인들이 사활을 건 단판승부가 아니라 일종의 축제와 같은 성격을 지니게 된 셈이다. 과거에는 그저 깜깜한 밤을 밝히기만 해도 신기함에 사람들이 몰리는 매력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간은 적고 가볼 곳은 많은 시대가 되었다. 결국 지자체가 주도하는 행사이기는 하지만 성공여부가 지자체의 역량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지자체의 역할은 하드웨어인 자리를 마련해주는 데 그쳐야 한다. 야시장에 한번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두세 번 재방문하거나 관광방문객이 반드시 찾게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이번에 포항에서 개최하는 야시장은 이왕이면 의미 있는 야시장이 되었으면 한다. 예를 들어 먹거리라면 적어도 구룡포 대게, 흥해 부추, 곡강 시금치, 청하 돌미역, 신광 흥곡주, 장기 산딸기 등 반드시 지역산 농수산물을 이용하였다는 원산지표시까지 있었으면 좋겠다. 비록 도심의 행사지만 지역 특산물도 함께 알리는 도농복합도시 포항다운 야시장으로 성공하기를 기대한다.

2019-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