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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당근 프로젝트

배문경수필가 시작은 오천 원이었다. 시립도서관 앞에 서서 폰을 하고 있는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맞으시죠”, “네” 얘기는 짧고 물건을 본 그녀는 좋다며 돈을 나의 계좌로 입금시켰다. 물건은 내손을 벗어났다.집안 청소를 하다보면 먼지만 쌓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는 필요했지만 지나고 보면 처치 곤란한 물건들로 방이 빼곡히 차곤 한다. 언제 시간을 내서 정리를 해야지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 마음먹은 날 이것저것을 들춘다. 내게 필요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겐 필요할 것 같은 물건부터 어쩌다 보니 잊어버리고 겹쳐 산 물건들이다. 말도 되지 않은 가격으로 내놓고 기다려보는 것도 잠시 흥미로운 일이다.물건이 주는 기쁨에 비하면 사람이 주는 기쁨은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관리가 필요하듯 사람과 사람 사이도 나무와 나무사이처럼 적절한 햇빛과 바람이 필요하다. 당근마켓에서 물건을 팔면서 또 많은 전화번호를 지웠다. 사람 숲에 가려 하늘을 못 보거나 잊혀 진 그도 나도 그녀도 나도 모르는 관계인 경우도 있다.누구시죠? 이런 관계로 당황스럽지 않기 위해 정리하자. 당근마켓에 내놓을 것은 아니지만 정리해서 전화번호부도 가볍고 통풍이 되어야할 듯했다.원피스를 좋아하는 내게 안 입는 원피스가 서 너 벌이 있었다. 살 때는 비싸게 줬지만 시간이 지나니 짧아서 약간 유행이 지나서 라는 핑계로 물건을 당근마켓에 내놓았다. 가격은 각각 오천원이었다. 올리자 말자 입질이 시작되었다. 어떤 분은 택배를 부탁하며 택배비까지 덜렁 보냈다. 같은 편의점끼리는 택배비가 저렴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점심시간에 직장근처 같은 편의점에 갔지만 택배취급을 하지 않는다고 하고 몇 군데를 갔지만 허사였다. 어찌어찌하여 찾아간 편의점이 얼마나 고맙든지 택배를 보내고 나니 점심시간도 끝나가고 등엔 땀이 고여 있었다. 오천원짜리 원피스가 결국 나의 점심시간 한 시간을 잡아먹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신뢰를 지킬 수 있었으니.점심시간에 직장 앞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두 시간 후 연락을 취했더니 죄송하다며 갑자기 ‘자녀가 아파서 급히 병원에 있다며 죄송하다’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팔아도 된다며 미안한 마음을 비추었다.‘일 잘 처리 잘하고 오실 때까지 옷은 기다리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마시라’는 위로의 문자를 날렸다. 일주일이 지났지만 소식은 없다.타지에서 온다는 고객은 퇴근 후 40분 뒤에 도서관 앞에서 보기로 약속한 경우다. 낯설지만 잘 입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나는 만원이란 돈이 생겼다. 그리고 가벼움이란 기쁨도 같이 얻었다. 많은 것이 좋고 행복할 수 있지만 적정선에서 느끼는 즐거움도 행복을 만든다.빽빽하게 장롱에 들어차 있던 옷걸이의 옷들이 조금씩 빠져나가자 장롱도 통풍이 되는지 환해졌다.휴대폰 전화번호 목록이 차고 넘친다. 작은 인연조차 소중히 여긴 탓에 저장해 둔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이름만 보고서는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옷장정리를 끝내고 전화번호 목록도 하나씩 지웠다. 카톡방에 쌓인 사진과 동영상도 지웠다. 폰의 데이터 공간에 여유가 생겼다. 어떤 공간이든지 여유가 있어야 새로운 것들이 들어올 수 있다. 수천 개의 전화번호가 차 있던 휴대폰도 여름의 바닷바람이 일듯이 시원해졌다. 비우는 것이 채우는 일에 첫걸음이다.오늘 아침 내려놓았던 번호에서 전화가 왔다. 몇 년 연락이 안 되던 사람이 직장으로 전화를 해서 나를 찾는다. 잊혔던 사람이 새로운 사람으로 다가온다. 이건 새로운 행운이란 생각으로 입 꼬리가 올라간다.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가는 모양이다.그토록 극악스럽던 올 여름 더위가 아침 선선한 바람으로 바뀌었다.8월 8일이 입추(立秋)고 삼복지간(三伏之間)에는 입술에 붙은 밥알도 무겁다는 말복이 8월 10일이다.눈부신 오늘이 기다리고 있다. 가볍게 출발해 보자.

2023-08-09

계축일주(癸丑日柱)

육십갑자 중 오십 번째는 계축(癸丑)이다. 천간(天干)의 계수(癸水)는 깨끗하고 찬 물이며, 비 또는 연못이다. 지지(地支)의 축토(丑土)는 얼고 습한 땅이다. 동물로는 소다.계축일주는 겨울 땅 위에 차가운 비가 내리는 물상이다. 냉한 성분과 음기를 강하게 품고 있어서 끈기와 오기, 집념이 남다르다. 스스로에게 매우 엄격한 기준과 이상이 있어 모든 일에는 끝까지 노력하는 스타일이다. 조용하고 말이 없어 보이지만, 속으로는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어 남들이 알아줄 때까지 경거망동하지 않는다.노련하지 못하지만, 패기 하나만큼은 엄청나다. 출세 지향적 삶을 추구하기 위해 자기개발에 충실하다. 여기에 공부와 교양, 정신수양도 함께 연마하면 크게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가정에는 소홀히 할 수 있다.저돌적이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본인의 공력만큼 성과가 나타나지 않아 심하게 자책하는 경향이 있다. 이 또한 견디는 힘이 강하다. 독단적으로 일을 추진하려는 성격 때문에 사서 미움을 받는다. 특히 타인을 은연중에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조심해야 한다. 자기 주관이 명확해 타인의 간섭을 싫어하고, 환경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한다. 주변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경향도 있다. 흥분된 마음을 내려놓고 냉철한 판단이 요구된다.‘장자’ 외편 ‘산목편’의 ‘빈 배’를 보자. 한 사람이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다가 빈 배와 부딪치면 그가 아무리 속이 좁은 사람일지라도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는 빈 배이니까. 만약에 배에 사람이 있다면 그는 피하라고 소리를 칠 것이다. 그래도 듣지 못하면 또 다시 소리칠 것이고, 결국에는 화를 내며 욕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이 모든 일은 배 안에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러나 배에 사람이 없다면 그는 소리치지 않을 것이고, 화를 내지도 않을 것이다. 세상의 강을 건너는 그대 자신의 배를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도 그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그대에게 상처를 입히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심청사달(心淸事達)이란 격언이 있다. 마음이 맑고 고우면 만사가 형통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작금의 현실과는 큰 괴리가 있다. 그것이 우리의 딜레마인 것이다. 상책이 없다면 차선책이라도 써야한다. 자신이 처한 위치를 냉철한 이성으로 판단하여 정당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과 함께 공유한다면 인생살이가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계축일주 남자는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자 노력하는 형이다. 부인 복은 좋으나 가정생활이 순탄하기는 힘이 든다. 본인의 바람기와 이성관계에 주의해야 한다. 아내가 종교, 예술 분야에 종사한다면 대체로 해로할 수 있다. 여자는 남편이 가정에 충실하고 능력이 있지만 본인의 행동이 거칠고 차가워 보일 수 있어 다정다감한 생활은 힘이 드니 신중해야 한다. 남녀 공히 무정해질 수 있으니 유념해야 한다.계축일주의 하늘 계(癸)는 무조건 주는 것을 좋아한다. 마치 비가 내리듯이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는다. 땅은 살림꾼인 소 축(丑)이다. 말없고 부지런하고 힘도 좋아 어디 하나 버릴 것이 없다는 소다. 소는 위가 네 개라서 삭이고 또 삭이는 되새김질을 하며 참고 참는 성질이 있다.겨울 소이기에 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나설 때를 기다리며 힘을 비축해야 한다. 소는 시작이 굼뜨지만, 시간이 걸려도 끈기와 집념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 사교성이 있거나 카리스마가 있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설렁한 느낌이 들지만, 속으로는 얼음송곳 같은 섬뜩함도 가지고 있다.자(子)는 북쪽이고 겨울이지만, 축(丑)은 동쪽이고 봄을 향하고 있다. 앞으로 조금 나아지는 희망을 기대하지만, 언제 추위가 올지 모른다. 마치 동장군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는 것이다. 소같이 순한 엄마가 한 번 성질을 내면 집안이 온통 풍비박산이 된다. 그래서 한 마디 입을 열면 참고 참았던 독기가 뿜어 나오는 독설가가 된다.계축일주는 길흉반반(吉凶半半)이다. 터트려서 좋을 것이 있고, 터트리지 않고 삼킬 것도 있는 법이다. 소 축(丑)이 천간 계(癸)의 낙처를 소화하자니 되새김질을 많이 하다가 토해내고 마는 그런 기운이 작동하는 때다. 혹은 미루던 일들이 시절인연으로 이루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류대창명리연구자 ‘계축일기’는 조선 중기 1613년 계축년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일기다.‘계축일기’는 인목대비 폐비사건이 시작되었던 계축년(광해군 5년)을 기점으로 일어난 궁중의 비사다. 현명한 광해군이 계축년에 참고 참았던 것을 터트렸지만 결국 원하는 것은 얻지 못했다.‘계축일기’의 작자는 미상이고, 인목대비를 모시는 궁녀나 궁중에서 일을 하는 나인이 쓴 책으로 추정된다.‘계축일기’는 일방적인 견해이고, 광해군 입장에서는 전혀 다를 수가 있다.인목대비는 김제남의 딸로 19세에 51세 선조의 계비가 되어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낳는다. 선조가 57세에 죽자 광해군이 즉위한다.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여 모반하려 한다는 무고(誣告)로 김제남 부자와 영창대군은 참혹한 죽음을 당한다. 인목대비는 서궁(덕수궁)으로 쫓겨나 폐비가 되며 그 뒤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11년 만에 인조반정으로 복위되는 이른바 궁중비사이다.사람은 무엇을 위해 상대를 헐뜯는가?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 위함인가? 아니다. 자신의 권력 유지와 탐욕으로 인해 행해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사실이 아닌 일을 거짓으로 꾸며 고변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 불행과 고통의 씨앗이 숨겨져 있다.어떤 말일지라도 하나하나의 말에는 어느 정도 선입견과 편견이 포함되기 마련이다. 말의 액면 그대로 이해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뒷면에 감추어진 의미까지도 민감하게 알아채야 한다. 그래야만 불행을 최소화할 수 있다.

2023-08-09

텃밭2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된장찌개를 끓이다가 황급히 불을 껐다. 텃밭에 가서 대파를 찾았다. 풀숲 더미를 뒤져 간신히 하나를 찾았다. 쑤욱 뽑아 뿌리를 털고 그 자리에서 흙 묻은 겉껍질을 깠다. 가까이 있는 수돗가에서 씻어 들어오면서 대충 비틀어 잘랐다. 제법 실하게 큰 고추 몇 개도 땄다. 한 개는 된장에 썰어 넣고 몇 개는 쌈장에 찍어 먹어도 좋겠다.한 달여 전, 안사돈께서 파 모종이 있으니 심겠냐고 전화주셨다. 작년에 들깨와 마를 심어주셔서 잘 키운 적이 있었다. 나도 한참을 못 간 터라며 같이 심으러 가는 게 어떠시냐고 여쭈었다. 흔쾌히 동행하셨다. 오랜만의 집엔 무성히 자란 풀이 반겼다. 풀에 뒤덮인 텃밭이 부끄러워 막무가내 엎드려 풀을 쥐어뜯어 뽑았다. 풀 속에 숨어 있는 오이와 가지는 새끼손가락만한 열매를 겨우 맺고는 노랗게 비틀려 있었다. 큰형님이 주신 호박 모종은 꽃도 피우지 못한 채였다. 딸기 모종을 살 땐 손주들에게 직접 따게 해야지 꿈도 야무졌다. 그러나 토마토와는 달리 딸기는 어찌된 노릇인지 열매가 달리는 듯하다간 지고 달린 열매조차도 볼품없는 데다가 흙에 묻어 맥없이 잎만 뻗치고 자라있었다. 제법 이파리 성성하여 향기로운 맛을 줬던 고수와 청겨자조차 키가 자랄 대로 자라 꽃을 피우고 있고, 싱싱하여 아름답기까지 했던 상추마저도 잎색은 바래고 대신 상춧대를 높이 올려 꽃을 달고 있었다. 잎채소들은 한창 자랐을 때 더 자주 더 많이 따 먹었어야 했다. 예뻐서 아끼느라 먹을 시기를 놓친 거였다. 고추도 먹을 만큼 크게 자란 것이 대견스러워 따지 않았더니 며칠 후엔 발갛게 익는 거였다. 더욱 이뻐 두고두고 감상(?)하려 했는데, 그만 갈라지고 썩어버리는 게 아닌가. 주인 잘못 만나 제 구실을 못한 채소들에게 미안함이란….안사돈도 같이 풀을 뽑으시면서 제초제를 뿌리지 않으면 잡초를 막을 수 없다고 하신다. 약을 치지 않으려면 비닐로 멀칭이라도 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 가져오신 파는 마침 집에 있는 검은 비닐자투리를 땅 위에 덮고,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어 심었다. 그렇게 안사돈께서 소중히 심어주신 파였다. 멀칭 덕에 다른 곳보단 잡초가 훨씬 덜했고 텃밭 중에서도 가장 먼저 물을 주며 정성을 더했더니 제법 꼿꼿하게 자라주었다. 그러나 꽤 오랜 장맛비엔 속절없었다. 기승을 부리며 자란 풀더미에 가려있는 가엾은 파에 미안함마저 들었다. 농사는 주인의 발자국소리를 듣고 자란다던데, 자주 오지 못한 내 탓이 크다며 자책할 밖에….한해의 배움이 크다. 내년 텃밭을 일굴 때는 올해의 실패를 지혜로 삼아야겠다. 유기농퇴비를 듬뿍 섞어 땅심을 도와준다. 골을 파서 두둑을 크게 만들어 올리고 모종과 씨앗은 두둑에 심는다.-나는 골에다가 모종을 심었었다.- 아, 밭두둑엔 미리 넓은 멀칭비닐을 덮어 두어야지. 무엇보다도 내 발자국소리를 더 자주 듣게 해 주리라. 예쁜 모종과 씨앗에게 더 이상 미안하고 부끄러운 주인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그래도 된장에 송송 썰어넣은 파향과 고추향은 달디달았다. 갓 딴 고추를 쌈장에 찍어 한 입 베어 무니 서걱! 소리가 싱그러웠다. 이게 바로 텃밭의 맛이로구나 싶었다.

2023-08-09

찾아가는 서예교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삼복더위가 무색할 정도로 학동(學童)들이 서예삼매에 빠져든다. 벼루에 물을 부어 사각사각 조심스럽게 먹을 갈고, 은은하게 피어나는 먹내음을 맡으면서 붓에 먹물을 찍어 화선지에 천천히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모습들이 사뭇 진지하고 정겹게 보인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이들은 태어나서 처음 잡아보는 붓과 생전 겪어보지 못한 붓글씨 쓰기 실습으로 새로운 배움의 세계에 빠져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묵향에 흠뻑 젖어 들고 있다.이러한 모습은 최근 포항제철소 묵향붓글씨봉사단이 구룡포읍에 위치한 꾸러기마을돌봄센터를 찾아가서 아동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붓글씨 체험학습 프로그램 ‘찾아가는 서예교실’의 활동장면들이다. 여름방학을 맞은 학생들에게 평소 접하기 어려운 우리 고유의 서예를 알리고 몸소 체험하도록 함으로써 전통문화예술에 대한 관심과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됐다. 2022년 7월부터 송도동, 해도동에서 시작된 서예체험교실은 주로 지역아동센터를 찾아가서 실기 위주의 붓글씨 쓰기로 진행되는데, 1년새 열 세 차례나 열렸다.포항시 읍면단위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이번 서예수업은 1부 서예에 대한 설명과 지필연묵 용구 소개, 먹갈기, 붓잡는 방법, 화선지 재단, 기초 점획 연습과 자신의 이름 및 장래 희망을 붓으로 쓰는 등으로 진행됐다. 그리고 1부 수업 후 휴식시간에는 구룡포읍지역사회보장협의체에서 지원한 치킨과 음료, 과일 등을 학생들이 간식으로 맛있게 먹으면서 즐거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이어 2부에서는 삼복더위에 필요한 부채작품 쓰기로, 학생들은 합죽선, 원형부채, 모시부채, 오죽선 등의 다양한 부채에 자신들의 꿈과 희망의 글귀를 붓으로 직접 쓰거나 그림을 곁들여 ‘나만의 부채작품’을 완성해 흥미와 자신감을 더했다. 이날 서예교실에 참여한 10여 명의 학생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쓰고 그린 다양한 붓글씨와 먹그림을 벽면에 부착해 전시하기도 하고, 또한 각자가 만든 부채작품을 보면서 서로 부채질을 해주는 등 시종 밝고 신나는 모습들이었다.“버겁고 여린 손길/어느새 익숙터니//먹 갈고 붓 놀리기/신명으로 삼는 나날//초롱한 망울 속으로/피어나는/꿈 자락” -拙시조 ‘書童’전문(2000년)서예는 문자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심성을 표현하는 예술이지만 독특한 품격과 매력을 갖고 있어서 생활환경을 미화시키고 실생활에 접목할 수 있는 효용가치가 큰 심신활동이다. 그리고 서예를 배움은 단지 글씨를 잘 쓰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매우 유익한 활동으로서 개인의 사상과 인격수양, 예술적 재능과 문화 교양의 개발, 침착성과 인내심 그리고 의지의 단련을 강화시키며, 또한 심신의 건강과 심미안을 높이는데 도움을 준다.비록 재능봉사활동 차원에서 일회성으로 지역아동센터를 찾아다니며 주마간산 격의 서예수업을 진행하고 있다지만, 이 마저도 없다면 부조전래의 서예의 명맥과 전통문화의 계승발전은 어떻게 될까? 서예인구의 저변확대를 꾀하고 꿈나무 육성을 위한 제도적, 교육적인 안목과 보완책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2023-08-09

태풍 경로

홍석봉 대구지사장 태풍은 대개 적도 부근에서 발생해 천천히 서진한 후 소멸하는 경로를 취하는 것과 발생 후 북상해 북위 20~30도 부근에서 진로를 북동쪽으로 바꾼 다음 빠른 속도로 진행하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지만 태풍의 진로는 종잡을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떤 태풍은 지그재그로 움직이고, 한동안 제자리에 멈춰 서 있기도 하며, 원 모양으로 움직이기도 해 진로 예측을 어렵게 한다. 태풍의 약 12%가 이상 행보를 한다는 통계도 있다.북상 중인 6호 태풍 ‘카눈’ 때문에 온 나라가 비상이 걸렸다. 그런데 카눈의 궤적이 이례적이다. ‘카눈’은 갈지(之)자 행보를 하다가 다시 방향을 틀어 오키나와를 거쳐 한반도를 향해 북상 중이다. 오키나와를 강타한 카눈이 대만 동쪽 해상까지 갔다가 갑자기 ‘유턴’해 다시 오키나와를 덮쳤다. 이어 북쪽으로 방향을 90도 꺾어 일본 규슈 방면으로 향했다. 기상청은 카눈이 10일 오전 경남 통영 인근에 상륙 후 한반도를 관통해 11일 오전 북한 평양 부근에 이르겠다고 예보했다.전문가들은 카눈이 특이한 궤적을 보이는 이유가 태평양 상공에 형성된 고기압에 막혀 길을 찾지 못한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카눈은 당초 부산에 상륙, 포항 등을 거쳐 동해안을 훑고 지나갈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경로를 점차 서쪽으로 바꿔 통영 상륙이 예보됐다. 많은 강우와 강풍을 동반해 큰 피해가 우려된다. 더구나 지난번 집중호우 피해 복구도 완전히 이뤄지지 않은 마당이다.카눈(KHANUN)은 태국에서 제출한 이름이다. 열대과일의 이름을 따왔다. 8월 들어 태풍의 내습이 본격화 됐다. 앞으로 어떤 태풍이 더 닥칠 지 알 수 없다.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08-09

남들이 바라보는 대한민국은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세계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스위스의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세계 각국의 인재유치매력도 순위를 발표하였다. 어디서 공부하고 준비하였든 젊은 인재들이 소양과 재능을 펼치며 일하고 싶은 나라의 순위를 매겼다. 대한민국은 조사대상 63개국 가운데 49위에 그쳤다. 나름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이같은 조사에서 중하위권에 머물러 있는 점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2022년 결과인데, 이전보다 여덟 계단이나 떨어졌다고 한다. 미국이 4위, 일본이 27위, 호주가 14위라 하고, 그나마 중국이 우리보다 아래쪽에 보인다. 썩 괜찮은 나라인줄 알았던 대한민국이 젊은 인재들의 눈에는 아직도 멀었다는 셈이다. 그마저 해를 거듭하며 내려간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여러 나라들이 인구감소를 힘들어 하는 가운데, 유독 캐나다가 한 해에 이민인구 유입 100만 명을 돌파하며 인구를 획기적으로 늘이고 있다. 비결은 역시, 가 살고 싶은 나라를 만드는 게 아닐까. 우리는 대한민국을 얼마나 그런 나라로 만들고 있을까. 정부는 위기를 맞은 인구정책을 가다듬으면서 양질의 고급인력을 끌어들이는 고급인력 유입을 효과적으로 유도할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저출산과 고령화를 문제로 인식하여 국내인구를 늘이는 일도 중요하지만 점차 확연해지는 글로벌 환경에서 해외의 인재들을 대한민국으로 맞아들이는 정책이 필요하다. 유학 떠난 인재들이 세계시장에서 활약하는 일도 소중하지만, 고국으로 다시 불러들일 만한 여건을 만들어 내는 일도 정책적으로 고민해야 한다.세금과 연금제도, 환경적 정주여건, 2세를 위한 교육환경, 문화적 다양성과 수성, 일상생활에서의 불편제거 등 인재들을 대한민국으로 모으기 위한 과제들이 즐비하다. 그동안 경제적 집적효과에 방점을 두고 국가경쟁력을 생각해 왔다면, 이제는 보다 다각적이며 심층적인 시각에서 우리의 모습을 살펴야 한다.‘세계 10위권’ 타이틀이 세계인의 마음속에 단단하게 자리잡기 위해서 우리에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치안과 안전이 우리의 자랑이었는데 그마저 무너진 듯 보이는 오늘의 현실 앞에 혹 나라의 경쟁력 관리를 위한 길을 잃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세계스카우팅잼보리에 참여했던 대원들이 다소 실망하여 속을 끓였겠지만 국가이미지를 다시세울 방법을 얼른 찾아 끌어올려야 한다. 스카우팅의 본질과 젊은이들의 심장을 함께 두드릴 방도를 찾아야 하고 그들이 돌아간 후에도 잊지않고 교감을 이어갈 관심과 태도를 가져야 한다. 좋은 생각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남들이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 앞에 겸손해야 한다. 생각은 금방 바뀌지 않는다. 진심과 공감을 실어 태도와 방법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세계인이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모습이 오늘보다 나아지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세계10위권’ 허상을 붙들고 자만해 봐야 아무도 이 나라를 곱게 봐주지 않는다. 꿈에서 깨어나 우리의 실상을 보아야 하고, 거기서부터 쌓아올려야 한다.

2023-08-09

건강한 여름나기

우정구 논설위원 더위를 표현한 우리말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습도가 높아 찌는듯한 더위 때는 무더위, 찜통더위, 가마솥더위 등으로 표현하고 습도가 높지 않으나 햇볕이 뜨겁게 내리 쬐는 더위를 불볕더위, 불더위, 강더위라 부른다.한자말로 삼복염천(三伏炎天)은 삼복기간의 매우 더운 날을 이르는 표현인데 지금이 그 시기다. 지금은 에어컨이나 선풍기 등이 있어 혹독한 한여름 더위도 그런대로 시원하게 보낼 수가 있다. 그러나 문명이기 혜택을 못 누린 우리의 조상들은 지금처럼 무더운 여름날을 어떻게 보냈을까 궁금하다.조선시대 왕들의 여름나기는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보면 조금씩은 알 수 있다. 당시 왕들도 기발한 피서법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개가 궁내 후궁 피서지인 창덕궁 후원에서 수박과 참외 등을 먹으며 더위를 식히는 게 고작이다.조선 7대 왕 세조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오대산 계곡을 자주 찾은 것으로 기록돼 있고, 22대 정조는 책을 읽으며 더위를 이겨냈다고 한다. 그는 “책을 읽으면 몸이 치우치지 않고 마음의 중심에 선다. 그래서 더운 기운이 몸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조선시대 양반들은 산수가 좋은 계곡을 찾아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고 시를 읊으며 경치를 즐기는 탁족회를 자주 즐겼다. 집안에서는 사랑방 옆 마루에 돗자리를 깔고 눕거나 차가운 감촉의 죽부인과 부채 등으로 더위를 달랬다.유난히 더운 여름을 맞고 있다. 14일째 전국에 걸쳐 폭염특보가 내려진 가운데 여름철 전력 수요도 역대급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온열질환 사망자도 급증한다. 건강한 여름나기에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겠다./우정구(논설위원)

2023-08-08

‘증오정치’가 사회병리의 주범이다

심충택 논설위원 대구 도심 곳곳에 자동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경찰특공대 요원이 시민을 감시하는 무서운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1980년 비상계엄령 사태 때의 장갑차까지 길거리에 등장하자 시민들은 ‘연쇄 묻지마 살인’의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며칠 전부터는 인터넷에 살인예고가 연이어 올라오면서 불안은 더 커지고 있다.묻지마 살인과 살인예고 범죄가 개인의 질병이나 유전적 원인이라는 분석이 다수이지만, 그 원인을 사회병리에서 찾는 전문가도 있다. 우리사회에서 격화되고 있는 진영싸움이 집단적 증오심을 키우면서 범죄로까지 비화한다는 것이다. 공감이 가는 분석이다.지난 2020년 2월 코로나19가 대유행했을 때 대구경북은 집단증오의 표적이 된 적이 있다. 언론을 통해 표출된 증오였지만, 당시 시도민들은 ‘묻지마 살인 범죄’ 버금가는 고통을 겪었다. 그중에서 ‘증오정치의 선동가’로 불려지는 김어준의 말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2020년 3월 6일 코로나 확진자가 쏟아져 대구가 고통받을 때 자신이 진행한 라디오를 통해 “우리 코로나 사태는 대구 사태이자 신천지 사태”라고 말하며, 코로나 발생원인을 대구시민 탓으로 돌렸다. 그 5일 전에 민주당 한 청년위원이 “지금 문재인 대통령 덕분에 다른 지역은 안전하니 대구는 손절해도 된다”고 한 말에 대한 후속타였다. 그 후 좌파여류시인인 김정란은 페이스북에 “대구는 독립해서 일본으로 가시는 게 어떨지. 소속 국회의원들과 지자체장들 거느리고”라는 글을 올렸고, 한 민주당 중진은 ‘대구봉쇄’를 입에 담았다.좌파 진영의 이러한 증오표출에 대해 당시 대구시민들은 분노로 상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발적 격리를 하면서 대구봉쇄를 거론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외신들은 대구시민들이 보여준 성숙하고도 침착한 대응을 특종기사로 다루면서 격려했다.좌파진영은 지금도 증오심을 무기로 ‘진지전(陣地戰)’을 유발하고 있다. 민주당 김은경 혁신위원장과 양이원영 의원의 노인폄하 발언에 대해서는 같은 당내에서조차 ‘개딸들의 홍위병’등을 운운하며 비난하고 있다.좌파진영이 주도하는 진지전은 우리사회 전체의 증오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진지전은 무솔리니 정권에 대항했던 좌파지식인 안토니오 그람시가 내놓은 헤게모니이론에서 나온 용어다. 그람시는 헤게모니 이론을 설명하면서 ‘권력이 진지전을 통해 상식적인 것을 비상식적인 것으로 만들고, 비상식인 것을 상식적인 것으로 만들어 국민을 통제한다’고 했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정확하게 짚은 이론이다.미국의 대표적 여론조사기관인 퓨리서치센터가 지난 연말 민주주의를 시행하고 있는 19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국 국민이 느끼는 ‘정치적 갈등’ 수준이 1위로 나타났다. 좌파와 우파 양진영이 상대를 향해 쏟아내는 막말과 모욕적인 언사는 갈수록 거칠어져서 진지전에 관심 없던 국민까지 증오의 늪에 빠트리고 있다. 정치인들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갈등과 분열의 저질 정치를 계속하는 한 우리사회의 병리현상은 치유될 수 없다.

2023-08-08

한약을 먹으면 간이 나빠진다고요?

나선택포항 행복한의원장 “한약을 오래 먹으면 간이 나빠진다는데, 제 약은 괜찮을까요?”“건강 유지 목적으로 1년에 한두 번 한약을 먹었는데, 양방 병원에서 먹지 말라고 해서 먹을 수 없어요”20년 이상 한 자리에서 진료 중인데, 이상하게도 2∼3년 전부터 이런 얘기를 많이 듣는다.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한약 먹으면 간이 상하거나 건강이 나빠진다는 과학적 근거가 나타난 것인가? 여러 통계 자료와 논문들을 찾아보았지만 그런 얘기는 없다.한국의료분쟁조정위원회의 ‘의료분쟁 조정중재 통계연보’를 보면 최근 5년간 의료행위 조정 사례 중에서 한약이 차지하는 비율은 0.3%로 극히 낮다. 2007년 한국소비자원에서 ‘한약재 중금속 모니터링’을 통해 중금속, 이산화황, 납, 수은, 카드뮴 등에 대해 분석한 결과 시중에 유통되는 쌀보다도 낮고 안전함이 밝혀졌다. 2021년 대구시 보건환경연구원에서 대구 약령시장 한약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중금속 안전도 적합 판정을 받았다. 그럼에도 더욱 엄격한 한약의 안전성 관리를 위해 2015년부터는 한약재 GMP 기준이 의무화되어 농약, 중금속 기준 뿐 아니라 ‘의약품용 한약재’의 경우에는 제조시설과 기구, 원료의 구매 제조 및 품질검사, 제품 출하에 이르기까지 생산 공정 전반을 표준화한 절차를 거쳐야 한의원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한약재 자체의 오염으로 인한 문제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현행 규정상 한약재는 뛰어난 효능과 함께 독성도 가지고 있어서 전문가인 한의사와 한약사만 다룰 수 있는 ‘한약’과 독성이 거의 없어서 누구나 사용 가능한 ‘식품(농산물)’으로 나뉜다. 한약에는 마황 부자 대황 세신 시호 행인 (살구씨) 황련 등 뛰어난 효능이 있지만 체질이나 증상에 맞지 않게 투약되면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들이 있다. 식품에는 도라지 구기자 산수유 산약(마) 오미자 계피 황기 갈근(칡) 등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것들이 많다. 식품류 한약재라도 한의원 등의 의료기관에 공급되는 것은 식약처에서 허가한 공인 기관에서 기준치 이상의 유효성분 함유 여부와 중금속과 농약의 잔류 여부를 검사해서 합격된 것만 사용 가능하므로, 시장에서 유통되는 것보다 훨씬 우수하고 안전한 약재가 사용되고 있다.이쯤 되면 한약을 오래 먹으면 간이 나빠진다는 말은 어불성설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이런 식의 얘기가 나오는 걸까?한약으로 인한 부작용의 대부분은 복용을 중지하고 3∼4일이 지나면 자연소실 된다. 다시 말하지만, 한약을 먹어서 간이 나빠지는 것이 아니다. 음식이든 한약이든 양약이든 뭔가를 먹었을 때 불편한 느낌이 생겼다면 일시적으로 간수치가 상승할 수 있다. 이 때 그것의 복용을 중지하고 처방한 의사 또는 한의사와 상의해서 약의 내용물이나 복용량을 조절하면 간이 나빠질 이유가 없다.기후가 급격하게 변하는 요즘이다. 면역 저하로 인해 각종 전염병과 질병이 만연하다. 한약은 오랫동안의 사용으로 각종 효능이 입증되어 있다. 게다가 요즘은 국가에서 약재 관리의 기준을 정해 놓음으로써 안정성도 확보 되었다. 한약과 함께 여러 질병을 예방하거나 잘 치료해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바란다.

2023-08-08

소유와 존재, 그 엄청난 간극

최선희 경운대 교수 최근 들어 데이트 폭력에 대한 사건이 자주 들려온다. 헤어진 여자 친구가 연락을 받지 않는다고 찾아가서 무차별 폭행하고, 신고를 하면 보복살인까지 하는 끔찍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 한 때는 사랑한다고(?) 생각한 연인에게 이런 무자비한 행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 프로파일러는 데이트 폭력의 주요인을 소유와 집착에서 빚어진 결과라고 진단한다. 사랑하는 대상을 지배하려는 욕망으로 구속하고 가두려는 소유적 집착이 문제라는 것이다.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을 소유할 수 있는가. 50여 년 전 사회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에리히 프롬이 제기한 인간의 두 가지 생존양식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화두를 던지며, 인간 유형을 자기가 가진 것에 의존하는 ‘소유적 인간’과 존재하는 것에 자신을 맡기고 능동적인 일을 추구하며 삶에 희열을 느끼는 ‘존재적 인간’으로 구별했다. 그는 이런 소유와 존재의 차이점을 학습, 권력, 사랑 등의 구체적 사례로 설명한다.프롬이 주장하는 소유적 학습은 배운 내용을 모조리 필기하고 암기하여 시험에만 대비하는 행위이고, 존재적 학습은 배울 내용을 미리 연구하여 교수자의 설명을 적극적이고 생산적으로 수용하는 태도이다. 소유하려는 권력은 자신의 권위에 굴하는 사람을 착취하고 존재하려는 권력은 인간의 인격을 바탕으로 세워진다고 한다. 그리고 소유적 사랑은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취하려하고 존재적 사랑은 상대를 배려하고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고 설명한다.‘나는 소유적 삶을 살고 있는가, 존재적 삶을 살고 있는가?’ 학생들에게 에리히 프롬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 이 문제를 생각해보게 했다. “수능이 끝난 후 약국 아르바이트로 20살치고 꽤 많은 돈을 갖게 되었다. 나는 소위 말하는 명품 신발과 가방을 소유하게 되었고 더 많이 가지기 위해 학업을 소홀히 한 채 약국 일에만 전념하며 계속해서 무언가를 갖고 싶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발버둥 쳤다.”고 고백한 한 학생은 소유욕에 의한 불안하고 불편한 감정을 토로했다. 이어서 자신의 소유양식의 삶을 성찰하며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고민해보겠는 다짐도 했다. 어떤 학생은 과제를 하기 위해 구입한 ‘소유냐 존재냐’ 책을 인스타그램에 올린 자신의 태도를 소유적 삶이라고 규정하며,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 사진 찍기에 집중하는 또래 친구들의 소유적 삶을 질타하기도 했다.1970년대에 에리히 프롬이 제기한 소유적 삶의 문제들이 아직까지 사회 도처에 자리한 채 우리의 존재적 삶을 위협하고 있다. 특히 소유적 사랑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사랑은 상대를 내 것으로 가지려는 욕망이 아니라 상대를 마주하고 그 존재적 가치를 아끼려는 마음이다. 나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가? 소유적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칼린 지브란의 시 한 구절을 새겨볼 일이다. “함께 있으되 거리를 두라/그래서 하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서로 사랑하라/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 말라.”소유는 아이 같은 욕심이고 존재는 성숙한 어른의 마음이다. ‘소유와 존재’, 그 엄청난 간극을 기억하자!

2023-08-08

법대로 합시다?

며칠 전 산책을 하다가 어떤 사건을 목격했다. 오후 세 시, 초등학교 4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로 공원 놀이터는 북적였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한 아이가 혼자 벤치에 앉아 있었고, 동시에 저 멀리서 경찰이 오는 게 보였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상황을 종합해 보니 아이가 자신이 ‘학교 폭력’을 당하고 있다며 경찰에 신고한 것. 출동한 경찰은 아이들을 한 명씩 불러내어 상황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육체적인 폭력은 없었고 놀다가 말다툼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한 아이가 배제된 것이었다. 등나무 벤치에 앉아 있던 할머니 중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친구들이 안 놀아준다고 경찰을 불러도 돼?” 옆에 앉은 다른 사람 역시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요즘 애들은 시도 때도 없이 경찰을 막 불러.” 나는 그들에게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로 공원을 떠나야 했다.세상이 달라졌구나. 나 역시도 그렇게 느꼈다. 아이들이 자기를 지키는 방식을 알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세상에 보호를 요청할 수 있다는 것에 새삼스럽게 놀라운 마음이 들었다. 또한 아이의 신고였으나 상황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 조사하는 경찰의 모습 또한 대단하게 느껴졌다.동시에 당연한 우려가 따라왔다. 친구들끼리의 다툼, 물론 크다면 크고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 이러한 일에 공권력을 소환한 것을 과연 올바른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려지던 아이는 경찰의 등장으로 인해 가장 힘이 센 사람이 되었다. 자신의 힘으로 상황을 바로잡으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칼자루를 손에 쥐고 휘두르는 쪽이 되어 버린 것이다. 법과 제도는 약자를 지켜주는 장치이다. 하지만 이것을 잘못 사용하게 되면 상대를 상처 주고 크게 다치게 하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법대로 하자”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 요즘이다. 규범을 어긴 사람이 처벌받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당사자들끼리 소통하고 충분히 숙고해 볼 수 있었던 문제까지도 법의 영역으로 끌고 와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어떤 판결이 나는 순간, 누군가는 죄인이 되고 모든 것이 공정하게 처리되었다는 착각을 등에 진 채로 상황은 종결된다. 일련의 사건에서 많은 것이 묵살된 채로 일이 마무리되는 것이다.최근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웹툰 작가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자폐증을 앓는 자신의 아이를 담당하는 특수교사가 아이에게 정서적 학대를 했다는 이유로 교사를 고발한 일이다. 그 과정에서 불법적으로 녹음기를 사용했고 특수교사에게 상담을 청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보다 고소를 하여 징계 받는 것을 우선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작가는 자신의 입장문에서 아이를 지키고 싶은 부모의 마음, 동시에 교사를 고소해야지만 아이와 분리될 수 있는 시스템 때문에 불가피하게 이러한 일을 시행했다고 말했다. 제도적 문제 속에서 자신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던 지점을 봐달라는 것이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럼에도 대중들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하다. 설령 법정에서 교사가 사용한 언어가 학대의 영역이라고 판단한다고 할지라도, 한 사람의 삶을 파괴하면서까지 그가 얻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진심으로 궁금해지는 것이다.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싶다’와 ‘법대로 엄중하게 처벌해 달라’는 요청은 전혀 다르다. 그가 진심으로 교사에게 원하는 것이 반성과 개선이었다면, 이러한 선택은 완전히 잘못되었다.페터 비에리는 자신의 저서 ‘삶의 격’에서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 우리에게 알면서도 고통을 가하는 경우 우리는 분노와 원망, 증오를 느낀다. 이러한 감정들은 고통의 상쇄를 갈망하는데, 그것이 원망을 잠재워주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쇄를 일컬어 복수 또는 보복이라고 한다. 피해자가 재판관에게 요구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가해자를 감옥에 집어넣고 고통을 고통으로 되갚아주는 것이다.” 보복의 마음을 가지고 있게 되면 절대 화해의 결과가 나올 수 없다. 그날 오후, 놀이터의 아이들은 경찰의 등장으로 인해 사이좋은 친구 관계가 될 수 있었을까? 학부모와 교사 사이의 법적 공방에 결론이 나면 그로 인해 모두가 존엄을 되찾을 수 있을까?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은 결코 단순하고 표면적이지 않다. 모든 것을 법대로 해결하는 세상은 결코 좋은 세상일리 없다. 하루가 머다 하고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서로의 상황을 더욱 이해하고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2023-08-08

‘우리’는 왜 악마가 되어가는가

무차별 흉기 난동 사건이 자꾸 발생하고 있다. 7월 21일에는 신림역 일대에서 칼부림 사건이 일어났고, 8월 3일에는 서현역 일대에서 칼부림 사건이 일어났다. 미수에 거친 사건도 8월 3일에서 4일까지 3건 가량이 있었고, 무차별 난동이 아닌 특정 인물을 대상으로 한 상해 사건도 많았다. 인터넷에서는 자신이 특정 지역에서 무차별 흉기 난동을 벌일 것이라는 예고 글도 끊이지 않고 올라왔다. 내가 자주 가는 왕십리역, 혜화역, 고속버스터미널역 등에도 예고글이 올라와 지인들과 소식을 공유하기도 했다.범죄 전문가들은 최근 추세를 범죄 감염 이론의 관점에서 해석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고 있다. 하나의 거대한 범죄가 발생하고, 이를 미디어에서 주목해 흥미 위주의 자극적인 보도를 계속하자, 예비 범죄자들이 자극을 받아 실행에 옮기면서, 이와 같은 범죄가 확산된다는 것이 범죄 감염 이론의 주된 골자이다. 실제로 흉기 난동 사건이 7월 말에서 8월 초 현재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범죄 감염 이론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실제로 모방범죄가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 여러 전문가들의 경고가 있기도 했었다.현상 자체도 우려해야 할 일이겠지만, 한 가지 더 우려되는 것이 있다. 그건 미디어가 범죄자들을 보도하는 태도다. 범죄자들이 평소 금전 관계나 치정 관계, 혹은 정신병력이 있었다는 식의 보도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궁금하다. 지금의 한국에서 금전 관계나 치정 관계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신과 진료 기록을 가진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까닭을 금전 문제나 치정 관계 혹은 정신병의 문제로 일소시키는 것은 얼마나 단순한 일일까.내가 불만인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최근 미디어의 보도 태도를 보자면, 이와 같은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특정한 개인의 문제인 것처럼 축소하려 이를 악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특정한 개인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범죄의 확산에 취약한 특정한 계층 내지는 세대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왜 국가는 범죄의 확산 자체를 문제시하고 고찰하는 대신 특정한 지역에 경비경계를 강화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일까. 마치, 이 모든 문제가 구조적 결함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결사적으로 항변하듯.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특정한 범죄자 내지는 그들이 저지른 범죄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동일한 유형의 범죄가 계속 발생한다면, 그건 범죄자의 잘못일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범죄가 계속해서 일어나도록 방치하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요즘 뉴스나 인터넷 커뮤니티의 댓글에서 묻지마 범죄를 근거로 특정한 하위 집단을 악마화하는 태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화가 난다. 그리고 그 악마화하는 대상에 2·30대 남성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낀다. 왜 2·30대 남성들은 갈수록 범죄자의 형상으로 그려져야만 하는 것인가. 실제 2022년에 발표된 범죄 연령 통계에 따르면 2·30대는 전 세대 가운데 가장 범죄율이 낮은 것으로 집계된다. 그럼에도 사실을 왜곡시켜가면서까지 2·30대 남성을 악마화 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실제 강력 범죄율이 20대에서 높다는 사실에만 주목하면서, 왜 그들이 분노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인가.이데올로기 연구자인 상탈 무페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의 적대 이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이데올로기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미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 사회는 필연적으로 그 사회와 불화하는 적대성을 내포한다. 그와 같은 적대는 한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를 통해 분출한다. 지금 터져나오는 분노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정말 특정한 악마의 소행일까. 악마를 키우고 있는 것은 누구일까.오늘도 여전히 정부의 무능에 대처하기 위해 20대 남성 군인 장병들이 동원되고 있다. 솔직해지자. 이 나라는, 이 정부는, 이 구조는, 자신들의 무능과 구조적 결함을 감추기 위해 특정 세대를 구멍 마개로 삼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수호하기 위해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전체주의적 군 시스템을 구멍마개로 활용해 20대 남성들을 갈아 넣고 있으면서, 동시에 이들을 사회를 위협하는 잠재적 악마인 것처럼 묘사한다. 작금의 20대 남성들은 시스템의 구멍을 막기 위해 동원되는 이중의 희생양에 불과하다. 내가 과격하다고 느껴지는가? 아니, 정말로 과격한 것은 이같은 부조리에 질끈 눈을 감고자 하는 당신이다.

2023-08-08

사랑할 줄 아는 드물고도 큰, 영양의 장계향

“인생이 70을 사는 것은 옛부터 드문 일이라 했는데/70에 3살을 더했으니 드문 가운데 더욱 드문 일/드문 가운데 아들 많으니 더욱 드문 일/드문 가운데 드문 일이 겹쳐 드문 경사가 나에게 있구나”( ‘희우시(稀又時)’, 장계향 73세)장계향(張桂香·1598~1680)은 조선 후기 남성 중심의 성리학적 위계질서 안에서 여성으로서는 드문 삶의 기록을 남긴 사람이다. 애민과 선행으로 ‘여중군자(女中君子)’라 불리며 칭송받았으며, 효녀이자 위대한 어머니로 알려졌다.본인의 시서화가 뛰어남을 물론이고, 최초의 한글 요리서를 적을 정도로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현대인 만큼이나 장수(83세)했고, 소설 ‘선택’(1997, 이문열)의 주인공으로서 다시 태어나기도 했다. 장계향이 시대를 초월하여 이렇게 드문 발자취를 남긴 것은 그녀의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실천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 아닐까.장계향의 어질고도 큰 성품은 남겨진 12편의 한시에 잘 드러난다.‘학발시’에는 병들고 늙은 모가 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가난 그리고 시적 화자의 안타까움이 3연에 걸쳐 길게 적혀있고, ‘성인음’에서는 군자에 대한 인식이, ‘경신음’에서는 몸을 함부로 하지 않는 효에 대한 마음이 적혀있다. 말년에 손자 신급과 성급에게 각각 성인의 마음과 학문을 익히는 자세가 기특하다는 투의 시를 보내기도 했다. 그녀의 적벽부체(赤壁賦體)는 당대 서예가 정윤목에게 호방하고 강하여 중국인의 필체로 착각할 정도라는 칭찬도 들었고, 그림 솜씨도 뛰어나 ‘맹호도’를 남겼다. 인두로 그린 호랑이는 금방이라도 그림을 박차고 뛰어나올 듯 포효한다.장계향은 알아주는 효녀이자 위대한 어머니이기도 하다.19세 결혼 후 시부모 봉양은 물론 해마다 친정아버지를 찾아뵈었을 정도로 지극한 효심을 지녔다. 당시 영덕에서 안동까지는 꽤 먼 거리였음에도 빠지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5리나 떨어져 있는 의병장 남경훈의 서당까지 전부인 아들을 매일 업어다 주었을 정도로 차별을 두지 않고 아이들 교육에 힘썼다. “너희들이 비록 글을 잘 짓는다는 명성은 있지마는 나는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선행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나는 문득 기뻐하면서 잊지 않을 것이다.”라는 그녀의 교육철학만 봐도 ‘여중군자’라 불릴만하다.장계향은 남편과 함께 애민과 선행을 실천하며 ‘군자’로서 평생을 살았다. 물려받은 어마한 재산을 형제들에게 양보하며 미련을 두지 않았고, 마을에 기근이 들면 집 앞에 솥을 걸고 도토리죽을 나눠주었다. 지금도 그녀의 유허비 옆에는 당시의 선행을 기억하는 300년 수령의 도토리 나무가 있다. 노비가 아플 때는 손수 병간호도 했다고 하니 본래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성품을 타고나지 않았을까.그녀의 큰 성품과 행적은 현재 영양의 두들마을에서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다.태어난 안동·시부모를 모신 영덕·분가한 영양 가운데, 영양 석보면 한 언덕의 두들마을은 장계향·이시명 부부의 신념이 후손들에 의해 오랫동안 이어진 특별한 장소이기도 하다.작가 이문열의 고향으로도 알려진 이곳에는 그의 문학이 숨 쉬는 광산문학연구소(2022년 화재)가 있고, 애국 열정만으로 항일과 독립운동을 했던 의인들의 자취가 있다.장계향·이시명 부부가 살았던 석계고택이 있고, 그의 넷째 아들 이숭일이 대를 이어 강학하던 석천서당이 있다. 그리고 부모의 유학적 가르침을 새긴 낙기대(樂饑臺)와 세심대(洗心臺)도 있다. 세심은 치심수행(治心修行)을 뜻하며, 낙기는 안빈수도(安貧守道)를 뜻한다.또한 ‘음식디미방’체험관이 있어 옛 요리를 만들어볼 수 있다. 책에는 일반양반가의 접빈용 요리 146개가 구체적인 조리법에 따라 분류되어 적혀있다.당시 요리들은 각종 조미료에 단련된 현대인의 입맛에는 매우 담백한 편이나 현대에 활용되지 않는 재료가 있어 유용한 자료로도 가치가 있다. 면류와 만두류가 특히 많은데, 꿩·생선의 껍데기·곰도 요리의 재료가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그녀의 유적비와 예절관, 한옥체험관 등 장계향의 발자취를 살필 수 있는 장소가 있다.장계향은 조선 후기 여성으로서는 꽤 드물게도 이름을 남긴 여인이다. 남성조차 유학을 배웠다하여 군자의 길을 걷는 이가 드물고, 지속적인 애민과 선행을 실천하는 자도 드물고, 재물에 욕심을 내지 않는 사람도 드물던 시대였다. 장계향의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성품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녀의 삶을 기억하고 회자한다.과거에도 현대에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사랑할 줄 아는 커다란 마음인 듯하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08-07

‘그루트어’가 들릴 때 “너희 모두 사랑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 Volume3’포스터. 쉽지 않았던 만남을 어떻게 정리해야할까. 만남도 쉽지 않지만 헤어짐도 만만치 않다. 시작은 내 모든 것을 내놓으며 어필하지만 헤어질 때는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의 문제가 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1’편이 상영된 것이 10년 전이니 이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편에서는 강산이 변하는 시간 동안의 추억을 뒤로 하고 아름답게 헤어져야만 한다.10년 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1’편(2014년), 우주의 어딘가에서 하나 둘씩 모였던 이들은 이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편에 이르러 각자의 소망을 담아 흩어진다. 각자가 떠나왔던 곳으로 되돌아 가거나,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간다.1편에서 불편한 동맹을 맺고 일명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결성하는 5명의 이력은 불안전한 가족관계에서 출발한다.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우주로 납치되는 스타로드(퀼)와 암살자로 길러지는 가모라, 아내와 딸을 잃고 복수심 하나로 살아가는 드랙스, 현상금 사냥꾼으로 말하는 너구리 로켓과 그의 동료 나무인간 그루트. 어설프고 불안전한 이들의 합체가 이루어진다. 파괴된 가족관계가 불안전한 가족관계를 이루는 과정이 유사 가족의 탄생을 다룬다. 이들은 여타의 히어로들처럼 탁월함이나 월등함으로 가공할 악당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가볍고 불안한 어느 지점에서 무모하리만큼 저돌적인 상황을 만들어 내면서 활극을 펼친다. 마음 한 구석에는 각자의 슬픔과 고통을 가지고 있지만 부조화와 능청, 진지한 상황 속에서 어긋나는 말과 행동의 ‘삑사리’를 통해 유머로 영화를 이끈다.어설프고 불안전한 성정의 5명이 모여 우주의 수호자로 거듭나는 이야기의 1편이 유사 가족의 탄생을 다루었다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2’(2017년)는 멤버들의 가슴 깊은 곳에 있었던 근원적 슬픔과 고통인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가족의 의미를 다룬다. 스타로드의 생물학적 아버지며 우주의 신적인 존재인 에고의 등장으로 탄생의 비밀이 밝혀진다. 하지만 에고의 음모에 맞서 그를 구하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스타로드를 키워왔던 욘두의 희생이다.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 에고는 악당이 되어 파멸되고, 자신을 길러주었던 해적 욘두는 스타로드를 구하고 이들의 가슴 속에 남는다. 혈연이라는 생물학적 의미의 가족보다는 ‘희생’과 ‘동료애’라는 함께하는 가치에 가족의 의미를 두고 있다.이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3부작으로 막을 내렸다. 3편에서는 그간 과거가 드러나지 않았던 말하는 너구리 로켓의 과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새로운 과거의 탄생과 가족의 의미를 물었던 전작에서 각자의 슬픔과 고통을 가지고 뭉쳤던 유사 가족의 여정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어떻게 헤어질 것인가를 보여준다. 바로 자신이 떠나왔던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그곳에서 그간 숨겨왔으며 피해왔던, 동료들에게도 공유할 수 없었던, 오롯이 개인이 마주해야했던 진실이 있는 곳으로 떠난다.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아서 새로운 팀(유사 가족)을 이룬다. 그들이 쌓아왔던 견고한 세계 속에서 이별의 시간 속에서 무엇을 남겨야하는지 깨알같은 솜씨로 보여주고 있다. 우주의 어느 곳에서 만났던 오합지졸들은 동료가 되어 어떻게든 악당을 물리치고 은하계를 지키는 영웅으로 성장해 가지만 이들이 지킨 것은 세상이 아닌 동료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을 뿐이다.3편에서는 무모하고 어설프며 뭔가 부족한 결핍의 존재들이 완벽을 추구하는 악당과 마주한다. 완벽함과 부족함, 진지함과 어설픔이 충돌하면서 유머와 감동이 빚어진다. 지난 10여 년의 여정을 단순하게 말하자면 오래 전 뜻하지 않게 집을 떠나 온 이가 우주적 차원의 별종들과 어울려 우여곡절을 겪은 후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오합지졸들의 사연을 하나 하나 어루만지며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이 뭉클하다. 대사하나 표정 하나까지 알뜰하게 챙긴다. /(주)Engine42 대표

2023-08-07

‘묻지마 범죄’와 대책 없는 사회

홍석봉 대구지사장 ‘묻지마 범죄’는 대상을 특정하지 않고, 구체적인 동기 없이 불특정 다수를 향해 저지르는 범죄를 말한다.인과관계가 명확한 강력범죄와는 달리 특별한 동기와 대상이 정해져 있지 않아 대비가 어렵다. 언제든지 범죄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공포감에 사회를 긴장에 빠트린다.묻지마 범죄가 인간성이 상실된 현대사회의 병폐의 산물로 ‘선진국형 범죄’라는 분석도 있다. 반면 범인이 자신의 범행을 합리화하고 원인을 사회의 부조리로 돌리는 변명일 뿐이라는 진단도 있다.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범죄다. 대부분 노인, 여성, 어린이 등 신체적·사회적 약자가 대상이다. 묻지마 범죄 가해자들은 공통적으로 사회에 불만이 많고 누군가를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데 별다른 거리낌이 없다. 잃을 게 없다는 막가파식 행동과 증오범죄도 한 유형이다.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묻지마 범죄’의 범행 동기는 사회에 대한 불만, 자기처지 비관, 상대방의 의도 오해석, 분풀이, 환각·망상, 재미·자기과시·이유 없음 등 다양하다. 정신질환 범죄를 제외하고는 소외와 빈곤 등 사회적 불평등에 따른 분노와 원망이 폭력 행위로 분출되는 경우가 많다. 예방도 쉽지 않다.일본도 장기불황이후 묻지마 범죄가 속출, 사회가 홍역을 치렀다. 미국과 유럽에서도 양극화, 차별, 실업, 경제적 불황 등에 노숙자와 난민, 이민자 등 문제가 뒤엉켜 발생하는 묻지마 범죄로 골머리를 앓는다.우리 사회가 최근 묻지마 범죄로 충격에 빠졌다. 외톨이형 은둔자와 정신질환자 등의 묻지마 폭력 위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다. 정신질환자 등 관리 대책이 필요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대책 없는 사회가 더 두렵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08-07

존재적 삶을 위하여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청춘예찬’에 환호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노년예찬’이 가슴에 와 닿는다. 청춘에 읽었던 에리히 프롬(E. Fromm)의 ‘소유냐 존재냐’와 ‘존재의 기술’은 머리와 가슴에서 분리됐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다시 읽어보니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존재의 의미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고학생(苦學生)은 부·권력·명예의 소유가 곧 행복인줄 알았던 것이다.삶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은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이 존재론적 물음은 이념·성별·직업·빈부에 관계없이 행복한 삶을 위한 전제이다. 특히 정치인·언론인·교수 등 사회지도층은 자신의 존재이유를 더욱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권력에 혈안이 된 정치인은 정치의 존재이유를 생각할 리가 없고, 확증편향에 갇힌 언론인은 언론의 존재이유를 말할 자격이 없으며, 권력과 야합한 어용교수는 지식인의 존재이유를 왜곡할 뿐이다. 소유가 목적이 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이유를 망각하기 때문이다.물론 우리의 삶에서 재화는 생존에 필요하므로 소유 자체를 부정하거나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소유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집착의 위험성이다. 돈·권력·명예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은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소유에 집착할수록 더 큰 욕심을 내게 되고, 많이 소유할수록 더 크게 얽매이게 된다. 모든 소유는 오직 한때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이다.소유적 삶은 욕망·물질·외형을 우선하는 삶이며, 존재적 삶은 절제·정신·내면에 치중하는 삶이다. 소유적 삶은 항상 불안하지만 존재적 삶은 언제나 평온하다.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소유적 삶은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는 까닭에 행복할 수 없다. 반면 존재적 삶은 행위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에 집중함으로써 과거나 미래의 허상을 쫓아가지 않는다. 행복이란 ‘지금 바로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성현들이 역설한 행복한 삶은 존재적 삶에 있다. 사르트르(J. P. Sartre)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일갈했던 것처럼, 존재가 없는 소유란 있을 수 없다. 톨스토이(L. Tolstoy)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려면 꼭 필요한 것만 소유하라”고 했고, 프롬은 “인간의 목표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소박하게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법정 스님은 “무소유란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하면서 ‘텅 빈 충만’의 역설을 가르쳐주었다. ‘비워야 울림이 있다’는 사실은 만고불변의 진리다.그럼에도 우리가 존재적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성찰과 구도(求道)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존재적 삶을 위해서는 소유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정신적 힘’이 있어야 한다. 프롬이 ‘존재의 기술’에서 “자각·집중·명상을 통해 늘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했듯이, 존재적 삶은 끊임없는 성찰과 연마(練磨)의 결과물이다. ‘행복으로 가는 구도의 길’은 우리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그 길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2023-08-07

냉방도 복지다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뜨거워진 공기가 한반도를 뒤덮은 ‘열돔 현상’ 때문이라고 한다. 정체된 대기를 뒤흔들어 줄 것으로 기대됐던 6호 태풍 카눈마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리며 한동안 이 폭염을 감내해야만 할 것 같다.한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세계 전체가 이상고온에 시달리고 있다. 유럽에서는 에어컨 판매량이 급증했다고 한다. 에어컨 사용이 환경파괴로 이어진다는 인식이 강한 유럽인들에게도 올여름 더위는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폭염으로 인한 가뭄의 영향으로 미국 중부 곡창지대의 옥수수 수확량이 20% 이상 감소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국제 곡물시장에서 식량 가격이 폭등하지 않을까 염려된다.이처럼 이상고온현상이 지속되다 보니 온열질환(열사병) 환자도 많이 발생하고 있다. 야외작업이 많은 직업군은 물론이고, 에어컨 바람을 싫어하거나 비용이 부담돼서 선풍기 한 대로 여름을 나곤 하는 노년층과 저소득층이 온열질환에 특히 더 취약하다. 공사 기한에 쫓겨 폭염에도 공사를 강행할 수밖에 없는 공사장 야외작업자나, 잠시 밭을 돌보러 나갔던 고령의 농민이 열사병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도시의 경우 쪽방촌이나 달동네에 거주하는 취약계층이 온열질환에 노출될 위험이 높다. 이처럼 추위나 더위, 수해나 가뭄 등 기상위기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가리켜 ‘기후취약계층’이라고 한다. 정부에서는 내년부터 기후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언론보도에 따르면 지난달 31일까지 경북도내 온열질환자 109명 중 60세 이상의 비율이 42%(39명)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젊고 건강한 사람도 견디기 힘든 더위다. 노년층에게는 더더욱 버겁고 위험할 수밖에 없다.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는 전통적 돌봄 시스템이 붕괴해가고 있는 상황에서 노인 혼자, 또는 노부부 단둘이 살아가는 가구는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농촌지역의 경우 청년인구 유출 현상이 더해져 기후취약계층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농촌지역이 많은 경북의 특성상 시급히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문제다.겨울철이 되면 어려운 이웃에게 연탄을 전달하는 봉사가 곳곳에서 이루어지곤 한다. 추위에 고통받는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추위뿐 아니라 더위 또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 아파트 경비실에 에어컨을 설치하려 했는데 주민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다는 소식도 적지 않게 들린다. 에어컨은 사치재라는 낡은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직 많은 것이다.개인이 변화를 만들어 내기 어렵다면 정부와 지자체가 먼저 ‘냉방 복지’를 적극 시행해야 한다. 기후취약계층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 냉방쉼터를 설치하고 집 구조상 가능하다면 에어컨 설치와 전기요금 지원도 고려해볼 수 있다. 경비노동자의 경우 근무공간의 온도를 일정 기준 이하로 유지하는 것을 의무화하도록 법령이나 조례를 제정하는 방법도 있다. 이러한 법적, 제도적 지원이 꾸준히 이루어진다면 사회적 인식 또한 바뀌어 나갈 것이다. 기후위기 시대에는 냉방도 복지다.

2023-08-07

탈북, 북한 이탈

강길수 수필가 가끔 탈북민의 유튜버를 본다. 몰랐던 북한의 실상과 문제들을 듣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족이면서 해방 후 지금까지, 자유민주주의 한국과는 매우 다른 1인 독재 체제를 3대째 왕조같이 이어오는 북한이다. 또, 핵무장을 완성했다며 우리와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니 국민으로서 북한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다.유튜버가 생기기 전에는, 이따금 언론에 보도되던 북한과 탈북민들에 관한 소식을 단편적으로 알고 지냈다. 한데, 지금은 유튜버를 통해 여러 정보를 알 수 있는 세상이다. 북한 정보도 예외는 아니다. 상당히 심층적인 내용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탈북민 유튜버 방송을 보면서 한 번도 자신이나 탈북민들을 ‘북한 이탈주민’이라고 소개하거나 말한 것을 본 적이 없다.한국 정부는 1997년 1월 13일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동년 7월 14일 시행했다. 그전에는 ‘귀순 북한 동포 보호법’이 시행되고 있었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현재 시행하는 법률의 명칭에서 ‘북한 이탈주민’ 부분이다. 그중 거부감 드는 단어는 바로, ‘이탈(離脫)’이다.표준국어대사전은 ‘이탈’의 뜻을, ‘어떤 범위나 대열 따위에서 떨어져 나오거나 떨어져 나감.’이라 풀이한다. 문제는, ‘이탈’이 범위나 대열 등에서 이상 있는 무엇이 떨어지는 현상으로 이해된다는 점이다. ‘대열 이탈’이나 ‘궤도이탈’처럼 일상에서 쓰는 ‘이탈’의 어감도, 이탈 주체가 뭔가 비정상이란 느낌이 든다. 즉, ‘북한 이탈주민’이란 표현은 자칫 탈북민의 자주성과 진정성을 저해하고, 북한 체제를 인정 두둔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한 웹사이트의 자료에 따르면, 탈북민의 명칭은 1993년 이전에는 ‘귀순자, 귀순 용사’로 썼고, 1994년~1996년은 ‘탈북자, 귀순 북한 동포’로 썼었다. 또, 1997년~2004년은 ‘탈북자, 북한 이탈주민’으로, 2005년~2008년은 ‘새터민, 북한 이탈주민’을 썼으며, 2008년 이후는 ‘탈북자, 북한 이탈주민’을 쓰고 있다고 한다.19세기 프랑스의 작가 플로베르는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을 주장했다. 우리나라 이태준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이는 글을 쓰는 데는 단 하나의 적확(的確)한 말을 골라 써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요구는 문학작품뿐 아니라 법률, 논문, 보고서 등 모든 글쓰기에도 적용된다고 본다. 더욱이 나라의 문서는 내용에 꼭 맞는 말을 써야 함은 자명하다.탈북민들은 ‘북한 이탈주민’이라는 말을 꺼리는 듯하다. 국민인 나도 이 말은 정상적인 북한 체제를, 탈북민이 문제가 있어서 떠난 것처럼 볼 수 있는 표현이라는 느낌이 든다. 문민정부 때, 입법자들이 이 점을 깊이 따져 보았는지 알 수 없다. 때문에, 우리나라의 탈북민에 대한 용어는 자유 없는 북한독재체제의 억압과 공포, 가난에서 목숨 걸고 탈출한 ‘탈북민 주체의 관점’에서 써야 함은 마땅하고 옳다.지금부터라도 입법부와 행정부는 탈북민에 대한 공적인 용어 선택에 신중하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23-08-07

김은경혁신위가 민주당 미래인가

김진국 고문 더불어민주당의 김은경 혁신위원장이 구설에 올랐다. 그는 지난달 30일 청년좌담회에서 “남은 수명에 비례해서 투표해야 한다”라는 말을 해 ‘노인 폄하’라고 비난받았다. 중학생 시절 아들의 말을 인용했다지만 “합리적이고 맞는 말”이라며 본인의 의지를 실었다.대한노인회를 중심으로 거세게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사과를 거부했다.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당 지도부가 사과를 종용하자, 그는 “사과하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자존심상 허락되지 않는다”라며 버텼다고 한다. 답답한 당지도부가 나서 사과했지만 거절당했다. 나흘이 지난 3일에야 김 위원장이 대한노인회를 찾아가 사과했다.혁신위를 만든 건 당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다. 변화의 진심이 있건 없건, 변화하는 모양새를 갖춰야 내년 총선에서 표를 얻을 수 있다는 절박한 마음에서 출발했다. 기왕에 변화한다면 국민이 불신하는 기성 정치인보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자는 생각으로 외부 인사를 모셔 왔다. 그러나 혁신위 활동을 보면 왜 만들었는지 알 수 없게 흘러간다.혁신은 나라를 바꾸겠다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 민주당을 바꾸자는 것이다. 그런데 당내 문제에는 입을 다물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 다 알고 있지만 건드리지 못한다. 국민의 불만을 풀어줄 만한 새로운 생각을 보여준 게 없다. 안에서 지지부진한 처지를 밖에서 풀어보려다 설화만 일으켰다. 본인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불가능한 제도라고 말한, 반민주적인 ‘제한선거’가 합리적이라는 사람이 무슨 혁신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이미 김 위원장은 여러 차례 헛발질했다. 이재명 대표와 대통령 후보 경선을 벌인 이낙연 전 대표를 겨냥해 “자기 계파를 살리려 (정치적 언행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라고 계파 대변인 같은 말을 해 반발을 샀다. 초선의원 간담회에서는 “코로나 때 딱 그 초선들이다”라고 말해 분란을 일으켰다.김 위원장은 노인 폄하 발언과 관련해 “교수라서 철없이 지내서 정치 언어를 잘 모르고 깊이 숙고하지 못한 어리석음이 있었다”라고 말했지만, 교수라고 다그런 건 아니다. 노인 폄하를 변명하다 또다시 교수들을 모욕한 셈이다. 국민의 지지를 끌어오기 위해 만든 혁신위가 지지율을 떨어뜨리고 있다. 도와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도부가 혁신위의 사고를 수습하느라 바쁘게 만들었다.여야를 막론하고 비대위를 만들어도 대부분 임시방편으로 끝났다. 혁신위도 새로운 이슈를 만들어 사법 리스크에 걸린 이재명 대표 대신 욕을 먹어주는 방탄 효과 외에는 존재 이유가 이미 사라졌다. 김 위원장은 사과 성명에서도 이름도 ‘민주당 혁신위’가 아니라 ‘김은경혁신위’라고 붙였다. 그만큼 ‘자존심’을 내건 모양이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김은경혁신위’ 전체가 무력화됐다. 당내에서조차 해체하라는 말이 나온다. 이런 판국에 혁신위가 어떤 안을 내놓은들 박수받을 수 있겠는가.김은경 위원장은 나흘 만에 사과했다. 버티다 사과했다. 더구나 그는 사과하지 않고 버티는 동안 “윤석열 밑에서 (금융감독원 부원장) 임기를 마치는 게 치욕스러웠다”라고 새로운 분쟁 거리를 만들었다. 윤 대통령을 ‘대통령’이란 직함을 빼고 맨이름으로 불렀다. 조국 사태 때처럼 개인적 잘못을 진영싸움으로 바꿔 극성 지지자들로부터 지원받으려 했다는 분석이 설득력이 있다. ‘개딸’의 힘으로 밀어붙이려 했다는 말이다. 철없이 정치를 잘 모르는 게 아니라 너무나 ‘정치적’인 행보다.전임 이래경 혁신위원장은 임명한 지 10시간 만에 낙마했다. 김 위원장도 낙마하건 않건, 이미 실패했다. 혁신위원장 자리에 의외의 인물들이 임명되고, 추락하기를 반복하는 것은 이재명 대표가 기존 여의도 정치와는 다른 길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대표의 책임이다. 두 사람의 실패는 이 대표가 생각하는 새로운 길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개딸정치’로는 정권 교체가 어렵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08-06

위기일수록 더욱 빛나는 것

박남서 영주시장 2년여에 걸쳐 우리를 괴롭혀온 코로나19가 잠잠해져 가는 즈음, 수해로 인해 전국이 또 한 번 큰 아픔을 겪고 있다.이번 폭우는 우리나라 곳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고,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는 수해 피해에 많은 이들이 망연자실하고 있다.영주시 역시 수해를 피하지 못하고 집중호우가 지역을 휩쓸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지난 6월 20일부터 한 달간 누적 강수량이 920㎜를 기록한 가운데 7월 14과 15일 양일간 270㎜의 강수량을 기록했다.지금까지 집계된 바에 따르면 영주지역은 이번 집중호우로 도로파손 350건, 하천 유실 336건, 문화재 12곳 등 공공시설 피해액이 247억 원에 달한다.개인 피해 또한 적지 않다. 주택 160채, 축사 6곳, 농작물 928.6ha 등 150억 원의 사유 시설이 피해를 입었다. 무엇보다 토사가 덮쳐 주택이 매몰되는 등 4명의 사망사고를 겪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영주시는 지역의 피해가 잇따르자 집중호우 직후인 지난 14일 경북도 내에서 가장 먼저 공무원 비상근무 3단계를 발령하고 전 직원 재난상황 비상근무 체제에 돌입, 피해상황에 대비토록 했다.이어 15일에는 재난현장통합지원본부를 설치하고 이재민 구호, 안전진단, 시설응급복구, 의료 및 방역, 교통대책 등 26개반을 편성해 통합대응체제를 구축, 운영하는 등 시민들의 안전과 피해 최소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시가 이렇게 빨리 응급 복구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이웃을 향한 착한 마음 덕분이었다. 영주시 전 공무원이 투입되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했다곤 하지만 지자체의 대응만으로는 광범위한 피해지역을 빠른 시간에 복구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영주 시민들은 갑작스러운 수마에 상처를 입은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수해 현장으로 달려갔다.적십자봉사회와 의용소방대, 육군 제2신속대응사단, 제50보병사단 등 수마에 상처를 입은 주민들의 상심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민·관·군이 합동으로 구슬땀을 흘렸다.많은 이들이 이웃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손을 내밀어 현재까지 누적 인원 1만 2천여명이 6천800여 대의 장비를 동원해 수해 복구에 손을 보탰다. 이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다.정부는 수해로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을 위해 지원을 약속했다. 19일 오전 영주시를 포함한 13개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영주시는 피해복구비 중 지방비 부담액의 일부를 국비로 추가 지원받아 재정 부담을 덜 수 있게 됐다.피해 주민에 대해서는 재난지원금 지원과 함께 국세·지방세 납부유예, 공공요금 감면 등 간접적인 혜택이 추가로 지원될 예정이다.이번 폭우에서 알 수 있듯 기후변화로 자연재해는 최근 전례 없는 수준으로 발생하고 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기후가 변하면서 앞으로 집중호우와 태풍과 같은 자연 재난의 발생 빈도가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는 것이다.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정비하고 예방하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재난관리체계를 사후 수습에서 예방 중심으로 전환하고, 최근 5년을 기준으로 재난 대비 매뉴얼을 재정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영주시는 자연재해 방지 및 선제 대응을 위한 안전 관리체계 구축, 댐·제방 등 재해예방 시설 보강을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또 하나 중요한 것은 피해가 발생했을 때 사회 구성원들의 마음가짐이다.사람과 사람 사이에 온정이 스며들면 못 할 것이 없다고 한다.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미리 환경을 정비하는 것은 물론, 이웃에 예기치 못한 재난이 발생했을 때 함께 이겨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모두에게 큰 힘이 된다.국가와 지자체의 노력, 이웃의 마음이 합해져 우리 사회가 앞으로 더욱 안전하고 아름다워지기를 기대한다.

2023-08-06

선바위 별곡

저 외로움의 깊이는 얼마일까. 선바위가 망부석처럼 흐르는 강물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계절 따라 햇볕은 빛과 그림자를 얼마나 드리웠는지. 주름마다 검푸른 이끼가 박혀있다. 인고의 세월에도 기울지도 아니하며 선바위가 홀로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선바위 옆 가파른 절벽 아래 일제당이 깊은 침묵에 들었다. 구름과 산은 서로 모양을 바꾸는데, 발걸음이 닿기도 힘든 이 깊은 산 속, 선바위와 일제당은 동무처럼 변함없이 지난 시간을 함께했다. 일제당에서 입암서원을 바라본다. 서원 앞쪽으로 흐르는 가사천과 물길을 휘돌게 하는 절벽을 바라보며 많은 가객이 시를 읊었다. 낭낭한 소리들이 귓전에 들리지만 선바위는 내 아버지처럼 침묵했을 것이다.글을 쓰고 싶었던 아버지는 세상의 뒤편에서 폐결핵과 싸웠다. 때때로 피를 토했고 시름시름 야위어 갔다. 학업은 일찌감치 포기했고 가장의 삶도 이어가기가 힘들었다. 자신의 처지는 굵직한 기둥처럼 가슴에 박혀 언제 삶의 마침표를 찍을지 몰랐다.아버지를 대신해 엄마가 세상으로 나갔다.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고 가끔 비바람도 몰아쳤다. 여자 혼자 식솔을 먹여 살리려면 너무나 힘에 부쳤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살림은 늘 언제 무너질지 늘 불안했다. 문틈으로 찬바람이 스며들었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막을 힘조차 없었다.아버지의 삶은 돌처럼 굳어버렸다. 파도가 길을 내어주지 않으면 갈 수 없었고 바람이 이끌어주지 않으면 한 발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멈춰버렸다. 그렇게 아버지는 자식들의 삶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가슴 아픈 관조였다. 자식이 학교에 가도 한자리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자식이 글을 익히고 글을 쓰고 글처럼 살아낼 동안 아버지는 오롯이 바라만 볼 뿐이었다.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고, 바라지 않고,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서 고독을 받아들였다. 마음속에 묻고 묻어 퇴적되어 온 외로움을 표현하지 않았다. 선바위는 강으로, 바다로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며 자신도 바다로 가고 싶은 꿈을 꾸어 보았으리라. 더 넓은 들판으로 나아가 젊은 기개를 마음껏 펼쳐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바위는 흘러가는 물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며 그 속에 비치는 하늘을 보고 구름을 보며 넓은 세상을 동경했을 뿐이다.빈자리보다는 선자리가 나았다. 비록 병든 아버지였지만 우리 자식들에게는 늘 든든한 아버지의 자리였다. 글을 읽어도 허공에 맴도는 소리가 아니었다. 강으로 바다로 고단한 길을 돌고 돌아와도 아버지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를 맞았다. 아버지는 우리들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어느 날 구순의 성상의 아버지가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는 ‘클레멘타인’을 피아노로 치고 싶다며 당장 가르쳐 달라고 채근했다. 아버지는 한 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 양쪽 청각을 80% 잃으셔서 장애 판정까지 받으신 아버지가 어떻게 피아노를 칠 수 있을까. 완주한다 한들 그 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방법을 생각하다가 스케치북을 꺼냈다. 색연필로 스케치북 위에 건반을 그렸다. 도부터 옥타브 위의 도까지를 글로 쓰고 솔 위에 숫자 3을 썼다. 아버지의 마음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더듬거리다가 다시 악보를 보고 또 더듬거리기를 반복했다. 김경아 작가 무더운 여름날이 지나고 무수한 나무 이파리가 떨어졌다. 겨울 초입에 들었을 때 아버지는 자식들을 모두를 불렀다. 저녁도 먹기 전에 아버지는 홀로 피아노에 앉아 자세를 가다듬었다.‘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 모르는 딸 있네’아버지의 꿈은 거창하지 않았다. 가장으로서 해가 뜨면 세상에 나가 가족을 위해 열심히 그물을 던지고 싶었다. 오랜 세월 강바닥 저 밑에 깔려 있던 아버지의 소망이었다.아버지는 굳은 손으로 건반을 짚었다. 한 마디 두 마디 세 마디, 자식들은 넓은 바다를 향해 노를 저어가는 아버지를 보았다.

2023-08-06

질서 있는 삶

유영희 작가 “우리의 소유와 필요를 확대해가면 갈수록 그만큼 더 운과 역경의 타격에 부닥친다. 욕망의 길은 한계를 지어 제한되어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자기 힘에 맞게’라는 말은 대단히 알찬 말이다. 정신의 위대함은 위대함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정신의 가치는 높이 올라가는 데 있지 않고, 질서 있게 살아가는 데 있다.”이 글은 몽테뉴의 ‘에세’에 나오는 몇 구절을 붙인 것인데, 이승연의 ‘살고 싶어 몽테뉴를 또 읽었습니다.’에서 골랐다. 이 문장 중에서 특히 ‘질서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정신의 가치를 높인다는 말에 눈길이 꽂힌다. ‘질서 있는 삶’이란 남과 비교하지 않고 명분에 자신을 매몰시키지 않으며 자신에게 충실한 소박한 삶을 말한다. 이런 질서 있는 삶의 모델 중에 이나가키 에미코도 포함될 것이다.이나가키 에미코는 그의 ‘퇴사하겠습니다’라는 책에서 아사히 신문사를 50살에 퇴사한 이야기를 자세히 썼다. 여기서 그는 회사의 후광을 믿고 자신을 회사와 동일시하는 ‘회사 인간’으로 살면서 소비를 탐했던 이야기, 그러다가 10평짜리 집에서 단촐한 삶을 살게 된 이야기를 진솔하게 서술한다. 결과만 보면 객기어린 낭만적인 선택처럼 보이지만 그에게는 무척이나 진지하고 필연적인 과정으로 보여서 무척 공감이 갔다.이나가키는 명문대 엘리트 코스를 밟아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격표도 떼지 않은 새 옷이 즐비한 데도 계절이 바뀌면 새 옷을 사고 온갖 요리책을 사서 화려한 음식을 먹는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전기를 흥청망청 쓰는 소비 생활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우동으로 유명한 다카마쓰라는 지역에서 근무하면서 돈 없이 생활할 때의 기쁨을 경험한 것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10여년의 준비 끝에 퇴사하고 나서 그는 에어컨은 물론, 냉장고나 전기밥솥조차 없이 휴대용 버너로 냄비 밥을 하고 10분 만에 끓이는 국을 곁들여 맛있게 먹으며 여러 가지 즐거운 일을 한다. 옷은 서랍장 하나로 충분하다. 그는 이렇게 자신이 행복한 삶의 질서를 발견하고 마을을 내 집 삼아 회사 사회가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넉넉하게 살아가고 있다.그의 삶이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남편도 자식도 없는 싱글라이프이고, 28년간의 직장 생활을 통해 어느 정도 모은 돈이 있으며, 글 쓰는 능력도 남달라서 적은 원고료나마 수입을 가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정신의 가치이다.얼마 전, 집이 작은데도 정신이 너무 산만해서 공간을 재구성했는데, 버릴 것이 다섯 박스가 나왔다. 특히 옷걸이 50개로 사계절 옷을 다 걸게 되니,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가해지고 정신이 고양되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저 ‘자기 힘에 맞게’ 소유하고 일상을 질서 있게 가꾸어가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삶이 될 수 있다. 올해는 더워도 너무 덥다. 이런 일상을 살다 보면, 기후 변화도 조금은 늦출 수 있지 않을까?

2023-08-06

우리가 누리는 풍요는 어디서 오는가

김종찬 포스코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통계청 자료의 억대 연봉자 추이를 보면 2017년 71만9천명, 2019년 85만2천명, 2021년 112만3천명으로 증가되고 있다. 연봉 1억 이상의 풍요로움을 누리면서도 일에 투입하는 시간은 주 5일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누가 주는 혜택일까? 19세기 말 미국에서 시작된 과학적 관리법을 제창한 테일러(F.W.Taylor)에서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그가 공장관리자의 직책에 있을 때 근로자들의 생산성을 관찰하게 된 것이 그 동기가 되었다. 경영의 목적은 사용자와 종업원의 상호 발전에 있으며 종업원 및 기계가 최대의 생산성을 달성할 때 가능하므로 노동생산성이 시장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다면 임금도 복지도 요원할 것이다. 당시 구두공장은 작업자의 숙련도가 생산성을 결정하였기에 노동자는 5년에 한 켤레 밖에 살 수 없을 정도로 비싸서 대개 맨발이었다. 그러나 생산 공정의 기계화와 공정 최적화로 구두 원가는 몇 분의 일로 감소하였기에 누구나 구두를 신게 되었고 구두공장의 근로자 수는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적은 노동력으로도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닌 생산의 효율과 기술의 발전만이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현대를 사는 우리도 알아야 한다.테일러의 생산성 향상 방법은 공정을 세분화하고 분업화하는 것이었다. 이는 생산 프로세스를 간소화하고 작업자들이 특정 작업에 집중하여 더 높은 생산성을 이끌어내도록 했다. 더 높은 생산성을 이끌어 내야 임금을 충분히 지급할 수 있고 회사에 적합한 인재를 붙들어 둘 수 있다고 확신했다.또한 시간 및 동작 연구를 통해 작업의 각 단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동작 방법과 시간을 연구하고 정의하였다. 삽을 예로 들면 비중이 높은 철광석이나 비중이 낮은 톱밥을 한 가지 규격의 삽을 사용하였기에 삽에 담기는 물질이 노동 생산성을 좌우하였다. 테일러는 삽의 규격을 물질의 성질과 작업자의 체력에 따라 최적화시켜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거기서 얻은 개선 효과를 모두가 누리게 된 것은 물론이다.이와 같은 효과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작업 방법과 절차를 표준화하여 모든 작업자 간에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작업자 간 차이를 최소화하고 작업자들을 대상으로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제공하여 분야별 맞춤형 훈련은 더욱 생산성 향상을 가속화하는 효과로 나타났다. 테일러의 생산성 향상 방법은 이처럼 현대 산업화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몇십 년 전만 해도 전 국민의 95%가 농사를 지어도 늘 배고팠지만, 이제는 전 국민의 5%만 농사를 지어도 남아도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사회는 ‘전문화’와 ‘분업화’로 변했다. 전문화와 분업화는 생산성을 극대화하여 아주 싼 가격에도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 풍요로움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큰 생산성 향상만이 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2023-08-06

새만금 잼버리 대회 난맥상

김규종 경북대 교수 보름 넘게 이어지는 폭염(暴炎)과 열대야가 시민들의 평온한 일상을 헤살놓고 있다. 강릉에서는 열대야도 모자라 초열대야까지 나타나는 걸 보니 지구 온난화가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는지 절감하게 된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계속되는데, 새만금 잼버리 대회의 난맥상이 한국인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고 있다. 선진국 타령을 해대던 수많은 언론매체에 빨간불이 켜진다.세계 전역 159개국 4만여 명이 참가하는 1천억원 규모의 세계적인 행사를 ‘배추 장사’ 문서 처리하듯 주먹구구식으로 치르려 했던 인사들의 난맥상이 하나둘 드러나고 있다. 새만금이 자리한 전북 부안을 지역구로 둔 이원택 민주당 의원의 1년 전 문제 제기가 사태의 핵심을 찌른다. 작년 국정감사에서 그는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잼버리 대회 준비상태를 디테일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현장에서 보기 때문에 걱정돼서 말씀드리는데, 부처의 장관과 책임자가 혼선이 있는 조건에서 이 행사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폭염이나 폭우 대책, 비산(飛散)먼지 대책, 해충 방역과 감염대책, 관광객 편의시설 대책, 영내-외 프로그램을 다 점검하셔야 합니다. 이런 것을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세계의 청소년과 세계가 바라보는 이 대회가 어려운 역경에 처할 수 있다는 걸 장관님이 좀 인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이런 문제 제기와 우려에 대해 김현숙 여가부 장관은 시종일관 “문제없다, 이미 모든 대책을 마련해 두었다,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답변을 되풀이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아가 그녀는 “태풍이나 폭염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모두 준비해 두었다. 이에 대해 보고드리도록 하겠다”라고 응답했다. 하지만 1천명이 넘는 온열 환자가 발생하고, 영국과 미국, 싱가포르가 철수를 결정하는 등 잼버리 대회 난맥상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새만금 잼버리에 가장 큰 규모인 4천500명의 참가자를 보낸 영국이 철수를 시작하고, 서울의 호텔로 이동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여기에 1천200명의 참가자를 파견한 미국과 60명의 참가자를 보낸 싱가포르가 철수를 결정하여 퇴영(退營)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아울러 세계 스카우트 연맹은 잼버리 행사 중단을 권고하기에 이르렀다.새만금 잼버리 대회의 총체적 난맥상은 이미 예고된 바 있다. 대회 공동조직위원장에 김현숙 여가부 장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강태선 한국 보이스카우트연맹 총재, 김윤덕 국회의원이 포진하고 있는데, 이원택 의원이 정곡을 찌른 것처럼, 부처 장관과 책임자가 이미 혼선에 빠진 형국(形局)이다. 잼버리 대회를 최종적으로 지휘하고 책임지는 제도적 장치가 삐걱거리고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다.예컨대 지난 6월 초 잼버리 조직위는 배수시설 설치와 포장 공사 비용 56억원, 재난·재해 발생 대비 예비비 14억원, 폭염 대비 물과 얼음 구입 예산 2억4천500만원의 추가예산을 여가부에 요청했다. 하지만 여가부는 20억원 정도를 지원함으로써 파국을 방조한 꼴이 됐다. 어쨌든 이번 대회가 더 이상의 파국 없이 무탈하게 끝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면 한다.

2023-08-06

모방범죄

우정구 논설위원 인간은 모방을 통해서 지식을 축적하고 학습의 효과를 높여간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인간의 모방은 본능에 가깝다고 말하기도 한다. 모방을 통해 새로운 창조적 결과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인류 발전에 기여한다면 모방의 긍정 효과다.그러나 모방 본능이 범죄로 옮겨진다면 큰 사회문제가 될 수 있다. 최근 묻지마 흉기난동이 잇따라 터지면서 모방범죄에 대한 국민적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실제로 서울 신림역 흉기난동 사건이 터진 데 이어 분당 서초역 일대에서 또다시 끔찍한 흉기난동 사건이 일어나자 하루 사이 온라인상에는 40건이 넘는 살인예고 게시글이 등장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중 상당수가 온라인 커뮤니티를 이용해 장난삼아 글을 올렸다고 하더라도 시민에겐 큰 불안이 아닐 수 없다.경찰이 관련 게시글에 대한 조사에 나서 이 중 18건의 작성자를 검거, 범행 혐의점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경찰의 이같은 대응이 모방범죄를 근본 억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세계에서 안전한 국가의 하나로 꼽히는 우리나라에서 최근 무차별 흉악범죄가 잇따라 일어난 것에 대해 국민이 받은 충격은 실로 크다. 어쩌다 우리가 이 지경에 됐는지 할 말을 잃을 정도다. 더 문제는 범죄를 본뜬 모방범죄가 언제 또다시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미국에서 탄저병 환자가 속출하자 전 세계에서 흰색가루를 우편물에 넣어 배달하는 가짜 탄저병 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다. 모방범죄는 즉각적이고 일반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범죄 장소와 시기, 대상을 예측을 할 수 없어 대응 방법도 마땅치 않다. 경찰이 장갑차까지 등장시키는 초강수를 썼다. 모방범죄 억제에 효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우정구(논설위원)

2023-08-06

겨우 인간

이원만 시인 우리는 민주시민을 넘어 이제 ‘생태시민’이 되어야한다는 목소리가 롱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 커지고 있다. 민주주의도 사람만의 민주주의가 아닌 지구상의 비인간 생명은 물론이고 무기물까지도 함께 민주주의를 누려야 한다는 ‘생태민주주의’를 이야기 한다.숲을 개발하는 곳에서 나무들의 편이 되어 톱날 앞에 몸을 던져 막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멸종동물들을 보호하고 강과 숲에게 법적인 권리를 누리게 하는 입법 활동도 생겨나고 있다. 전 지구적 생태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지구헌법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짝짝짝. 다 좋다. 찬성이다. 하지만 어떻게 생태시민이 될 수 있는 걸까? 우리는 매일 다른 생명을 먹으면서 우리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데 가능할까? 태생적으로 불가능한 것 아닌가? 이런 물음에 답을 구하지 못하면 갑자기 밥이 소화가 되질 않을 수도 있다. “인간도 동물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면 “만물의 영장이라더니 왜 이런 문제 앞에선 동물이래?” 소와 돼지와 닭들이 반격을 할 것 같다.“동물들을 좋은 조건에서 제 본성대로 살게 하고 도축할 때는 고통을 최소화하면 되지 않을까?”고 하면 “민주주의 하자며? 왜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날 먹으려고 그래?” 음메에 꿀꿀 꼬꼬댁 난리를 칠 것 같다. “뭐야? 우리가 잘 키워서 먹겠다는데 그게 자연의 순리 아닌가?” 사람들도 불만 아니겠는가? 어렵다. 생태민주주의도 생태시민도 참 어렵다.죽어서 쓰레기매립장에 버려지는 고래는 관심을 가지고 바다에 데려가서 원래 고래의 죽음과정인 ‘고래낙하’를 하게 해줘야한다는 둥 관심을 가지지만 개와 고양이의 집사노릇은 자처하지만 개를 돌보면서도 삼겹살을 굽고 치맥을 즐긴다. 그러면 하지 말아야 하나? 유엔에서는 공식적으로 지구온난화라는 용어를 폐기하고 ‘지구열대화’를 선언하고 지구에서 인간의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시급하게 대응책을 마련해야한고 목소리를 높인다.식물들은 물론이고 동물과 해양생물들이 난민처럼 자신들의 서식처를 떠나 피난하고 있다고 한다. 난민은 인간들만의 일이 아니다. 그 많던 경북의 사과나무들은 어디로 갔을까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에서도 느낄 수 있다. 동해바다의 수온변화에 어종도 달라지고 있다지 않는가? 물고기들이 오지 않아 굶어 죽는 바다표범들의 모습은 멀지 않은 미래 우리의 모습 같기도 해서 무서운 느낌마저 준다. 이 혼란을 만든 건 우리 인간이다. 뭐라도 할 수 있는 건해야 하는데 생태시민도 생태민주주의도 어렵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난감하다.그래서 겨우 생각한 것이 ‘겨우 인간’이다. 우리의 잘못과 우리가 못났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우리 심보부터 바꿔보자는 거다. 태생적으로 우리는 훌륭한 인간일 수는 없다. 하지만 다른 생명을 죽여서 이어갈 수밖에 없는 목숨이라면 최소한 ‘감사하게 먹고 밥값을 하며 살자’는 것이다. ‘생명을 먹어요’라는 책에서 이치다 미치코의 말은 그래서 곱씹어 볼만하다.우리는 우리가 빼앗는 생명의 의미도 생각하지 않고 날마다 고기를 먹고 있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라는 인사는 우리가 먹는 생명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입니다. 감사하는 마음 없이 먹는 것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음식을 남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생명을 먹어요-만만한책방/2022용서할 수 없다, 말도 안 된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일본인치고는 참 단호하지 않은가? 내게 이 말은 최소한의 예의 정도는 차려야 ‘겨우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동이족은 예로부터 다른 생명을 죽여서 내 목숨을 잇는 태생적인 조건을 슬퍼할 줄 아는 민족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겸손했고 생명을 살리는 것을 잘 했다고 한다. 콩을 심어도 세알을 심어서 땅속의 벌레도 먹고 새도 먹고 나머지 한 알은 인간이 먹으면 된다고 농사를 지은 민족이다.야외에서 밥을 먹으면 ‘고씨네’ 하면서 밥을 새나 벌레들에게 먼저 ‘대접’하고 먹었다. 사람이 먹고 남은 걸주는 게 아니라 먹기 전에 먼저 주는 것이니 ‘대접’이다. 이런 마음가짐이 생태시민의 마음가짐 아닐까? 상추를 씻다가 그만 상추 한 잎이 떠내려가자 산 아래까지 따라가 상추 한 잎을 건져왔다는 스님들의 식사법인 발우공양은 지구최고의 식사법이지 않은가.이런 우리 전통을 보면 지금의 생태사상을 뛰어넘는 사상들이 이미 생활화되어 내려왔다. 동학사상을 보면 여자고 어린이고 임금이고 백성이고 동물이고 식물이고 바위 같은 것들도 다 똑같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했다. 이런 사상을 내면화 할 수 있다면 생태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만 우리는 ‘겨우 인간’으로 지구의 공동생활자로 계속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겨우 인간’ 아니 ‘겨우 겨우 겨우 인간’이다. 그렇지 않은가?

2023-08-06

포항시민에게 환경경제를 고함

유성찬 (협동조합) 지속가능사회연구소 소장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포항시민연대 공동대표 빅토르 위고(1802~1885)가 소설 ‘레미제라블’을 쓴 때가 1862년이다. 소설 속에 주인공 장발장이 하수도를 통해 탈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적어도 1862년에 프랑스 파리 지하에는 사람이 서서 걸어 다닐 정도의 큰 하수도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1832년 파리에 콜레라가 유행하여 1833년부터 40년에 걸쳐 하수도 건설에 착수했다고 한다. 하수도라는 환경시설이 파리시민들을 콜레라로부터 구한 것이다.지난해 추석 무렵에 포항 오천의 냉천을 덮쳤던 태풍 힌남노로 인해 9명의 생명을 잃었고, 포스코의 수해손실이 조단위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또 얼마 전 충청권, 경북북부권 집중호우로 인해 경북 예천에서만도 22명이 사망하였다. 금강 미호천교의 둑이 터져, 오송궁평지하차도가 침수되었고 14명의 목숨을 잃었다.지하차도에는 집중호우를 대비해서 펌프가 설치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펌프가 아직 설치되지 않았든지, 펌프가 작동되지 않았든지, 아니면 설령 펌프가 작동했더라도 강물의 범람으로 펌프용량의 한계를 넘었을 수도 있다. 단순한 홍수조절장비, 대용량 펌프이지만 우리나라의 모든 환경시설은 국민들의 안전, 생명권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이제는 환경시설, 환경산업 또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이산화탄소 제로, 탄소중립을 위한 환경경제와 환경산업은 인류의 생존과 우리 국민들의 경제생활을 담보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환경산업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먼저 하폐수 시설이다. 생활하수, 공장폐수도 몇 단계의 하폐수 정화시설을 거치면 2급수 정도의 맑은 물을 만들 수 있다. 물부족 국가인 우리나라에 아주 중요한 물환경산업이다.그리고 대기오염을 해결하는 환경시설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주요한 굴뚝에는 센서가 달려있다. 실시간으로 다이옥신 등 환경오염물질을 체크하고 있고, 기준치를 넘게 되면 해당기업에 과태료 등 페널티를 매기게 된다.또 생활쓰레기, 건축물폐기물, 의료폐기물 등을 태우는 소각로와 그에 붙어 있는 발전기, 스팀발생기와 같은 에너지시설이 있다. 그래서 쓰레기가 곧 에너지라는 말도 생겼다.가습기살균제 같은 화학물질독성을 관리하는 산업, 아파트층간소음을 줄이기 위한 신소재사업, 학교교실의 석면제거 산업, 주유소에서 나오는 고약한 화학냄새나는 VOC가스 재흡수장치사업, 대기오염,수질오염 측정기 제조산업, 쓸러지를 재탄소화하는 에너지산업 등 환경과 관련하여서는 새로운 산업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다.기업과 공장에서 자동차, 가전제품, 생활편익상품을 생산하면 국민들이 이를 소비하여, 순환경제를 만들어 왔다. 이제는 환경순환경제가 대세가 되어 이 세상의 모든 제품들이 ‘친환경이냐, 이산화탄소를 적게 발생시키느냐’라는 아젠다가 경제와 산업의 핵심이 될 것이다. 환경을 이슈로 하는 경제가 국민경제의 대부분이 될 것이다.기후위기를 극복하여 인류의 파멸을 막고, 집중호우가 자주 발생하는 기후변화 상황에서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는 길은 현재의 모든 경제시스템을 지구환경을 지키는 방향으로 환경산업시스템으로 완전히 전환하는 길임을 이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거의 200년을 콜레라로부터 예방해준 파리의 하수도처럼 포항시민들의 건강을 위해 환경오염을 방지하는 대기·수질 환경시스템, 기후변화로 인한 집중호우로부터 시민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물관리시스템, 우리나라 국민경제에서 탄소국경세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탄소중립경제, 2026년 이후, 포스코 철강제품의 유럽수출을 위한 수소환원제철소 등 이 모든 생산활동이 환경경제산업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므로 포항시민들의 환경경제에 대한 깊은 관심이 필요할 때이다.포스코가 친환경 철강재를 생산하여 탄소국경세에 대한 걱정 없이 세계적으로 철강산업을 리드해가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지 않다. 현 시점에서 실기를 하면 다른 국가에 의해 추월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포항이 이차전지특구로 지정되었다는 기쁜 소식이 포항시내 길거리마다 축하현수막으로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이차전지, 수소연료전지도 환경산업의 일환이지만 포항을 근대화로 일어서게 한 철강산업의 주역, 포스코의 수소환원제철소 건설에 대해서는 포항시와 포항시민들의 관심이 집중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지역 위정자들의 탄소중립, 환경경제에 대한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아 아쉽다. 탄소중립을 위해서는 수소환원제철소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포항의 경제산업을 위해서, 탄소중립경제를 위해서 수소환원제철소 건립은 리튬2차전지 만큼이나 중요하다. 포스코의 철강산업이 일몰(sunset)산업이 아니라면 탄소제로와 환경경제를 이차전지산업과 동일하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또 어떤 환경단체는 대안도 없이 수소환원제철소 건립에 대해 부정적이다는 소식이 들리기에 NGO로서 탄소제로사회에 대한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환경경제에 대한 포항시민들의 깊은 관심이 우리를 탄소중립사회에서 존재케 할 것이다.

2023-08-06

입법도 특별한 것만 찾나?

홍석봉 대구지사장 #1. 더불어민주당이 최근 이태원 참사 유가족과 간담회를 하고 ‘이태원 참사 특별법’ 통과를 약속했다. 유가족협의회는 최근의 오송 지하차도 수해 참사가 이태원 참사와 판박이라면서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2.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가 대표 발의 예정인 ‘달빛 고속철도 특별법’에 민주당 의원 168명 전원이 공동 발의자로 참여키로 했다. 이 특별법은 대구와 광주를 1시간 내로 연결하는 고속철도 추진을 골자로 하는 법안으로 양 지역 숙원 사업이다.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의하면 21대 국회 들어 지난달 말까지 1천253건의 특별법이 발의됐다. 가결된 것은 ‘대구경북통합신공항 건설을 위한 특별법안’ 등 188건이다. 특별법은 지난 16대 국회 92건에서 17대 국회 325건, 18대 국회 733건, 19대 국회 832건, 20대 국회 때는 1천275건(가결 231건)으로 증가추세다. 가히 특별법 전성시대다.특별법은 법의 효력이 특정한 사람이나 사항 및 특정지역에 한해 적용되는 법이다.특별법 발의가 느는 것은 기존 법안을 개정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서도 예외 규정을 두어 관련 사안을 신속 처리할 수 있는 등 입법 과정이 간편하기 때문이다. 특정 이해관계 사안과 현안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입법 형태다.8월 현재 과학수도 대전의 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특별법과 경남 사천의 우주항공청 설치를 위한 특별법 제정이 추진 중이다. 이 같은 지리적 특성과 소외지역을 이유로 만든 특별법이 수없이 많다.특별법을 남발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영향력이 큰 일반법 개정보다 특별법을 제정, 해결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도 훨씬 효과적이다. 치적과 생색 내기에 도움된다.2000년대 이후 특정 문제나 사건에 관한 입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다양한 특별법이 등장했다. 국회의원들은 자신의 지역구 개발을 위해 특별법을 만든다. 국회 법사위원회가 한때 특별법 제정 자제를 요청할 정도다.특별법이 민원 해소의 일환이 되면서 입법구조가 더욱 복잡해졌다. 통일적이고 체계적인 법체계 유지가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별법은 일반법보다 상세하고 난해한 규정이 많아 법률 전문가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다. 법률의 실효성을 떨어뜨린다. 반면 순기능도 있다. 특별 안건을 세밀하게 규정, 사법부의 자의적 적용을 막고 국민의 예측 가능성을 높인다.전문가들은 특별법 홍수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특별법은 일반법과 비교하면 제한된 범위에 적용되지만, 그만큼 강력한 효력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별법 제정은 꼭 필요한 경우만 한정하고, 일반법과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세월호 특별법도 국회통과까지 숱한 곡절을 겪었다. 이태원 특별법도 조만간 제정될 태세다. 오송지하차도 특별법도 뒤이을 가능성이 크다. 각종 대형 사건·사고만 터지면 특별법을 만들고 특별히 대우해야 할 판이다. 특별법이 문제 해결의 수단은 되지만 국민에게 부담을 줄 수도 있다. 특별법 제정은 필요한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2023-08-03

경로사상 알기나 하나

우정구 논설위원 우리나라는 100세 이상 장수한 노인에게 국가가 청려장을 수여한다. 1년생 풀인 명아주의 줄기로 만든 청려장은 가볍고 단단해 노인들이 지니기에 적합한 지팡이라 건강 장수의 상징으로 통한다.삼국사기 등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나라에서는 장수한 노인에게 국장(國杖)이라는 이름으로 지팡이를 준 전통이 있다. 시대를 떠나 노인에 대한 사회적 존경심을 국가가 장수 지팡이를 통해 예를 표한 사례다.매년 10월 2일은 노인의 날이다. 또 10월 한달을 경로의 달로 정해 국가는 노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공경의식을 북돋운다. 특히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켜온 노인의 공로를 치하하고 시상도 한다. 동양과 마찬가지로 서양에서도 노인에 대한 공경의식은 성경에도 나오듯 도덕의 기본이다. 유교문화가 깊은 우리는 삼강오륜을 통해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가 지켜야 할 도리를 가르쳐 왔다.특히 오륜 중 하나인 장유유서 (長幼有序)는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어른에 대한 공경심을 으뜸으로 꼽았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잘 아는 상식이다.어쩌다 노인이 거치적거리는 존재로 대접받는 세상이 됐는지 어이가 없다. 정치권 중진들 입에서 노인비하 발언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노인에 대한 그들의 평소 사고를 알게 한다는 점에서 충격이다. 최근 더불어 민주당 혁신위원장이 “남은 수명에 비례해 투표하는 게 합리적”이란 취지의 발언은 정치가 노인을 깔본 또 하나의 사례이다.나도 늙어간다는 단순한 진리조차 까먹고 마구 떠벌이는 일부 정치인의 낮은 수준이 부끄러울 뿐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3-08-03

이 또한 지나가리라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연일 계속되는 폭염이다. 호박잎이 축축 늘어지고 뿌리가 얕은 풀들은 말라간다.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면 척박한 땅의 풀들부터 말라 죽고 말 것이다. 사람의 경우도 열악한 생활환경의 사람들이 기상이변 같은 자연재해에 취약하기 마련이다. 이 여름에도 에어컨이 없는 골방에서 더위를 견디고 있는 노약자들이 적지 않다.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여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런 희망의 이정표이기나 한 듯 저만치 입추와 말복이 다가오고 있다.곤경에 처한 사람들이 희망의 밧줄처럼 붙잡게 되는 말 중에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격언이 있다. 유대인들의 신앙교육서인 ‘미드라시’에 나오는 이야기가 어원이다. 어느 날 이스라엘의 다윗 왕이 반지 세공사에게 “나를 위한 반지를 만들되, 거기에다 내가 전쟁에 이겨서 환호할 때도 교만하지 않게 하며, 내가 큰 절망에 빠져 낙심할 때도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어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세공사는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었으나, 새겨 넣을 마땅한 문구가 생각나지 않아 고민하다가 현명하기로 소문난 솔로몬 왕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랬더니 솔로몬 왕자가 알려준 것이 바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였다.좋은 상황에서도 교만하지 않을 경구로 삼은 다윗왕과는 달리 현대 사회에서는 주로 역경에 처한 사람들이 위안으로 삼는 말이다.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에 비해 경제적으로는 많이 나아졌는데도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비관하고 좌절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스스로 절망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 절망적 상황도 또한 지나갈 것이란 말이 얼마나 위로와 힘이 될까.얼마 전에 서울의 한 초등학교 여교사가 자기가 가르치던 교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취업이 어려운 시기에 열심히 공부해서 마침내 교사의 꿈을 이루었을 터인데, 불과 두 해도 되지 않아 목숨을 포기해야 할 만큼 절박할 압박과 고통이 무엇이었을까. 우리의 교육 현장에, 시간이 흐른다고 지나갈 일회성이 아닌 고질적이고 만성적인 병폐를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어떤 상황도 시간이 흐르면 변하게 마련이라는 의미로는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말도 있다. 모든 것은 고정불변이 아니라는 이 말은 과학적 진리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양자물리학에서는 모든 존재의 본질은 비었다(空)고 한다. 물질의 기본요소인 원자의 경우 알갱이의 존재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 양자역학의 규명이다. 그것은 불교의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상통하는 말이다. 존재의 주체인 나(我)라고 내세울 본질이 없다는 것이 불가의 가르침이다.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은 세상에 고정불변이란 없다는 말이고, 절망이든 고통이든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도 절망의 굴레를 벗고 죽음을 받아들일 여지는 있는 것이다. 아무쪼록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세상에 대한 보다 깊고 넒은 통찰력과 굳센 삶의 의지를 가졌으면 좋겠다.

2023-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