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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자신에게 안녕을 고할 때

요즘 아버지는 자주 마지막에 관해 말한다. 멀게만 느껴졌던 퇴직이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반평생 몸담았던 교직을 떠나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오랜 시간동안 온 힘을 다해 일궈왔던 세계에 안녕을 고하는 마음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나에게는 헤쳐 나가야 할 것들이 많다. 어딘가에 소속감을 느끼기보단 주변부를 두리번거리고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손에 쥔 것이 없기에 놓을 것도 없다. 나는 시작을, 아버지는 끝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아버지는 후련해 보이기도 아쉬워 보이기도 한다. 어떤 면에선 떠나는 것을 은근히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는 동안 최선을 다해 일했고 매시간 후회 없이 보냈다는 아버지. 그렇기에 일터를 벗어나는 것이 섭섭하지만 귀하고 기쁘다고 했다. 그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미래의 나 역시 그와 같은 마음으로 나의 세계에 안녕을 고할 수 있을까?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면서 나는 나름대로의 답을 찾았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를 번복하고 내놓은 마지막 작품으로 개봉 전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마케팅을 하지 않는 마케팅으로 관객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했다. 영화 개봉 이후에 평이 극명하게 갈리는 것도 꽤 흥미롭다. 은퇴작이라는 표제를 내어놓은 만큼 자기의 세계관을 정리하는 태도에 감명 받기도 하고, 이전 작품들만큼 난해하고 매력적이지 않다든가 전적으로 자신만을 위한 영화라는 평도 있다.미야자키 하야오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나는 이번 작품을 무척이나 애틋하게 감상했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듯 아쉬운 점은 분명 있었지만, 이제 정말 그를 보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마지막을 준비하고 정리해야 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전쟁 중인 일본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느리지만 분명하게 전개된다. 화재로 어머니를 잃은 마히토는 아버지와 함께 도쿄를 떠나 어머니의 고향으로 오게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여동생과 재혼을 하게 된 것이다. 현실이 탐탁치 않은 마히토는 정체불명의 왜가리 한 마리를 만나고, 탑에 관한 신비로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던 중 사라진 새어머니를 찾아 탑으로 향하게 된 마히토는 새로운 세계에서 일련의 놀라운 사건을 겪는다.작품에서는 전반적으로 죽음에 관한 기조가 흐른다. 어머니의 죽음을 보여주는 도입부터 주인공인 마히토가 향하는 낯선 세계 역시 시공간이 완전히 뒤엉킨, 죽음 너머의 세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전작들에서 보여줬던 죽음의 이미지는 조금 더 거시적으로 느껴졌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개인의 실존적인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것은 마히토가 빠져나온 탑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과도 연결된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그 세계로 갈 수 없다는 전언과도 같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서서히 잊어갈 것이라는 왜가리의 말 역시 의미심장하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어떤 세계가 닫히면 또 다른 세계는 열리게 되어 있다. 탑의 이야기는 끝났고 마히토는 다시 도쿄로 돌아가게 된다. 앞으로 소년이 만나게 될 세계는 결코 이상적이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는 계속될 것이며 도처에 악의의 흔적이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마히토에겐 그 모든 것을 극복해나갈 힘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친구를 사귀는 일이라는, 소년의 외침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늘 ‘함께 있음’을 생각하게 했다. 우리는 모두 이 세계를 구성하는 구성원이며 그렇기에 모두는 특별하고 소중하다. 동시에 내 옆에 있는 누군가도 역시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다. 서로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이것은 자신의 마지막이 누군가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 마지막이 있기에 시작도 있다. 이 모든 것은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나의 아버지는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청년 시절 소진하지 못한 열망의 불씨가 조금씩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일터를 떠나는 일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아버지처럼, 또 마히토처럼 언젠간 나 역시 나의 세계에 마침표를 찍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나 역시 스스로가 어떻게 살았고 또 어떻게 마무리를 할 것인지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2023-11-21

혼란스러운 마음을 리셋한다

김규인 수필가 인공지능은 일상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인공지능이 알려주는 일기예보를 듣고 경제전망을 보고 물가를 예측한다. 초기의 인공지능과 대결해 1승을 거둔 이세돌의 승전보는 벌써 옛이야기이다. 인공지능을 모티프로 한 영화 ‘나의 마더’는 이미 2019년에 상영됐다.인공지능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한다. 미국 팔란티어의 인공지능 고담은 위성과 열감지기, 정찰용 드론, 각종 첩보와 적군이 사용하는 휴대전화 감청 정보, 각종 인터넷 정보를 종합하여 작전 정보를 제공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한다.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항복 방송, 불에 타는 미국국방부 건물인 펜타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체포 영상은 모두 인공지능을 이용해 조작했다. 인공지능의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국민의 삶이 달린 경제 문제, 일기예보, 기후변화를 논하는 자리에 조작된 정보가 입력된다면 일 초에 백경 번을 연산한다는 인공지능을 둔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조작된 자료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손해는 그 자료를 믿고 따른 국민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신입사원을 뽑는 면접에서 사람들에 의한 불평등한 점을 해소하고자 채택한 인공지능 면접도 사람이 뽑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먼저 신입사원을 뽑은 면접관들이 공정하게 평가한 것이 아니라, 그 면접관들이 뽑은 자료를 토대로 인공지능에 입력하여 선발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편견도 없는 공정한 자료를 입력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매일 쏟아지는 자신들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노조의 데모와 정권만을 잡으려는 정치인들의 주장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쩌면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는 일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말을 한다. 조금만 더 사회를 둘러보고 남을 배려하는 말을 할 수는 없는지. 그 틈바구니에 끼인 국민을 생각할 여유는 없는 것인지.무섭게 오르는 물가와 집을 매개로 사기를 펼치는 사람들이 득실거리고 전화 사기마저 극성을 부린다. 이런 와중에도 국가는 국가대로 바쁘다. 인공지능이 나라의 미래를 바꿀 게임 체인저라며 이러한 변화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경쟁을 서두른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국민이나 국가나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추운 날씨 탓인지 며칠 전에는 금방 태어난 아기 마음 같은 하얀 눈이 내렸다. 눈처럼 하얀 정보만을 입력할 수는 없는 것인지. 그러기 위해서 우리 사회는 얼마나 더 순수해져야 할까. 무너진 아파트 지하 기둥에 콘크리트가 들어갈 자리에 박힌 벽돌처럼 정직하지 못한 일은 지위의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 너무나 많이 퍼져 있다.그런데도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것은 죽지 않은 양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치매에 걸린 노인에게 따스한 손길을 건넨 김선 씨의 선행을 보며 이제까지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리셋한다. 우리 사회에 아직 정확한 자료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기쁜 일이다. 이런 날은 인공지능이 그리는 밝은 내일을 상상하기도 한다.

2023-11-20

글쓰기의 어려움과 기쁨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내 이야기,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글로 쓰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어요.”지난 18일, 포스텍 캠퍼스에서 열린 ‘제2회 포스텍 SF DAY’에서 김초엽 작가, 김겨울 작가의 ‘SF 북토크’를 찾은 포항 시민들과 포스텍 학생들이 작가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한겨울을 방불케 하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130명이 넘는 청중이 강연장에 모였고, 두 시간이 넘는 강연과 대담 시간 동안 놀라운 집중력으로 두 작가의 이야기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았다.김초엽 작가는 “‘쓰고 싶은 나’를 발견하는 읽기의 여정”이라는 주제로 화학을 전공하는 과학도였던 자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6년 차 SF 작가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정표가 되어 준 책들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상세히 소개해 주었다. 또한 김겨울 작가는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특유의 차분한 말투로 청중을 대신해 김초엽 작가에게 질문을 던지고 더 많은 이야기를 끌어냈다.김초엽 작가의 강연과 두 작가의 대담도 물론 훌륭했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청중들의 질문이었다. 20분 남짓 예정된 질의응답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고, 두 작가는 진심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현장에서 이 장면을 전부 지켜본 나로서는,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간직한 사람들이 아직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새삼 벅차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소설, 시, 드라마,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가 있지만, 엄정한 형식과 객관성을 요구하는 학술논문과 같은 몇몇 분야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글쓰기는 자기표현, 즉 ‘나’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를 나만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쓰는 것이 자기표현적 글쓰기의 본질은 아니다. 글로 쓰는 순간 모든 글쓰기는 잠재적인 독자를 갖게 된다. 나의 이야기가 다른 ‘나’들, 즉 독자들에게 전달되어야만 좋은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글쓰기는 나의 세계를 확장하는 작업이며, 다른 배경을 지닌 타인과 소통하는 법을 익히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글쓰기에도 배움이 필요하다. 나와 타인이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지평, 즉 글쓰기의 문법을 익혀야 한다. 지루한 국어 시간이나 논술 수업 같은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쓰고자 하는 장르, 예컨대 소설이면 소설, 에세이면 에세이의 장르적 특성과 창작 방법을 익힘으로써 해당 장르의 문법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공부를 말한다. 행사장에서 김겨울 작가가 한 질문자에게 조언했듯,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를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들을 발견하고 거기서 출발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김초엽, 김겨울 작가의 북토크와 같은 문화행사 또한 누군가에겐 독서와 글쓰기에 흥미를 갖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포항을 비롯한 모든 지역에서 이러한 문화행사가 더 자주 열리기를, 글쓰기를 통해 확장된 세계를 감각하는 기쁨을 더 많은 사람들이 누리게 되기를 바란다.

2023-11-20

영원히 빛나는, 한 장군과 여원무

“행객이 길 멈추고 노도 소리 듣고선/ 왜구들 죽이는 장군을 대하는 듯/칼자욱은 어제일 같이 반석에 남아있고/장한 업적은 천추에 빛나리//당시의 공열은 세상을 진동했고/그 충정 천년토록 늠름도 하네/지금까지 장군의 이 전하고 있어/단오 때의 여원무는 영원히 빛나리”경북 경산 자인면에서는 지역을 수호하는 신으로 ‘한 장군’을 모시고 제의를 지내고 있다. 자인면 서부리의 진충묘에서는 ‘한장군대제’, 마곡리·현내리·광석리 3개 마을에서는 ‘한묘제사’, 자인면 원당리·용성면 대종리와 가척리 등에서는 ‘한당제사’로 불리는데, 모두 한 장군과 그의 누이를 기리는 유서 깊은 행사이다.9세기 전후 신라 때 자인의 도천산에는 왜구들이 성을 쌓고 기거하면서 주민들을 괴롭혔다. 한 장군은 그의 누이와 함께 버들못가에서 꽃관을 쓰고 여원무와 배우잡희의 놀이판을 벌이고, 못에 배를 띄워 호사스러운 광경을 연출했다. 성의 왜구들은 신비한 놀이판에 유인되어 칡으로 만든 그물과 한 장군의 칼에 섬멸되었다. 지금도 버들못가에는 왜구의 목을 자를 때 남은 칼자국이 돌에 남겨져 있는데, 이를 검흔석 혹은 참왜석이라 부른다. 한 장군이 죽은 후 자인면에서는 여러 사당을 세워 수호신으로 모셨으며, 여원무를 통해 한 장군 남매를 기리고, 죽은 왜구를 위무하는 제의를 이어갔다. 진충묘는 주민들이 도천산의 서쪽 기슭에 한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는 신당이다. 그러나 일제 당시 철거당하고 그 자리에 일본 신사가 세워졌다. 광복 이후 북서리에 있던 한당을 이건하여 진충묘로 삼았다. 현재 자인계정숲의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북서리에서 이건된 진충묘와 자인중고등학교에서 발굴 후 만들어진 한 장군 묘소를 자연스럽게 둘러볼 수 있다. 1968년 8월 자인면에서는 제법 큰 규모의 석실묘가 발견되었다. 두개골이 포함된 유해와 은으로 장식한 갑옷·투구·녹슨 철제창·많은 토기류가 발굴되었는데, 한 장군의 묘소로 알려지게 되었다. 주민들은 이듬해 자인계정숲 내에 유해를 모시고, 유물은 박물관에 보관하였다.매해 음력 5월 5일이 되면 자인계정숲을 중심으로 한 장군과 관련된 제의-한묘대제·여원무·호장굿·자인팔광대·큰굿-가 치러진다. 한묘대제는 한 장군의 묘소와 그의 사당에서 유교식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여원무는 한 장군 남매를 기리고, 죽은 왜구를 위무하는 춤으로 커다란 화관으로 유명하다. 호장굿은 호장을 앞세워 한 장군과 관련된 장소를 돌아다니는 가장행렬이다. 자인팔광대는 8명의 광대가 3막을 구성하는 자인만의 전통 탈춤이다. 양반의 이중적인 모습을 해학적으로 풀어내는 다른 지역의 탈춤과 달리 양반의 권위와 조강지처에 대한 가부장적 사상이 드러난다. 큰굿은 무속인들이 시중당 앞에 모여 부정굿·산신맞이굿·천왕맞이굿·칠성맞이굿·조상축원굿·장군맞이굿·사자풀이굿을 지내는 것이다.여원무는 한 장군이 여장을 하고 누이와 함께 춤을 추어 왜구를 섬멸했던 춤이다. 제의적 의미에서 자인면에서는 오랫동안 이어온 기록이 남아있으며, 현재는 1969년 무보를 마련하면서 복원된 것이다. 여원무은 악사들의 풍악에 맞춰 10척(3m)이나 되는 화관을 한 장군과 누이가 들고 중앙으로 나오면서 시작된다. 남매는 중앙에서 덧배기가락에 맞춰 춤을 추다 화관 속에 숨는다. 뒤를 이어 여장한 무동 두 명과 무부들이 화관 주위를 돌며 굿거리장단에 맞춰 원을 그린다. 무동은 한 손에 꽃가지를, 다른 손에는 박을 들었다. 무동춤이 이어지다가 다시 화관에 숨어 있던 한 장군 남매가 나와 도드리장단에 맞춰 화관무를 춘다. 한 장군은 오른쪽에서 누이는 왼쪽에서 양손으로 화관을 잡고 회전하면서, 화관의 끝이 땅에 닿을 정도로 동작을 크게 하며 춤을 춘다. 회전을 반복하는 춤을 춘 후 다시 화관에 숨는다. 이어 다른 무부들이 등장하여 굿거리장단에 맞춰 다른 원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전체 등장인물이 춤을 추며 원무를 그린다. 대개 여원무는 3개의 동심원을 그리는데 그 크기가 18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이때 쓰이는 2개의 화관 무게는 30~40kg 정도이며, 5종의 꽃으로 8개의 가지를 부채꼴로 만들어 500여 개의 종이꽃을 달아 크고 화려하게 만든다. 덕분에 한 장군과 누이는 여원무에서 화관에 가려지고, 사람보다는 꽃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제의 전 화관은 신성하게 여겨 접근이 금지되어 있지만 제의가 끝이 나면 남녀노소가 풍년·제액·치병을 위해 꽃을 따다 집안에 두었다고 한다.자인면의 수호신 한 장군은 신라와 고려 사이의 인물로 보인다. 그가 왜구를 물리친 이후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 온 제의는 경산 자인의 특색을 알리는 문화행사로 자리 잡았다. 화려하고 커다란 꽃관이 커다란 원무를 그리는 무부들 사이에서 두드러진다. 꽃이 저절로 움직이는 듯한 여원무가 지역을 대표하는 춤이 되어 영원히 빛나는 듯하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3-11-20

회화에서의 공간과 시간문제

그림은 보는 것에서 시작해 그리는 것으로 종결된다. 화가는 끊임없이 보는 사람이다. 보는 것은 시각과 시선의 문제이며, 생각과 관점의 문제이기도 하다. 동일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화가의 시선에 따라 그림은 다른 것을 보여준다.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보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것. 그것이 그림의 매력이다.화가의 시선에 따라 동일한 대상도 달리 보여진다. 어떤 화가들은 바깥 세계를 내다본다. 또 어떤 화가들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본다. 빈센트 반 고흐가 내면을 들여다본 화가라면 데이비드 호크니는 밖을 내다보는 화가이다. 막셀 뒤샹처럼 훔쳐보거나 르네 마그리트처럼 뒤집어 보길 즐긴 이도 있다.호크니는 보는 것을 즐기는 화가이다. 달리 보는 것을 즐기고 달리 본 것을 즐거이 그린다. 화가라면 누구나 공간, 시간, 시점의 문제와 대결한다. 본 것이나 보는 것을 그리려면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서구회화는 오랫동안 르네상스의 발명품 ‘선원근법(linear perspective)’에 의존해 공간문제를 해결해 왔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 화가들은 우리 눈이 하나의 소실점으로 대상을 보지 않을 뿐 아니라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구도 시야에 들어온 모든 대상을 동시에 명확하게 볼 수 없다. 시야에 들어온 대상들 중 오로지 눈이 향한 것만 선명할 뿐 나머지는 상(像)으로 인지될 뿐이다.직접적으로 경험한 대상을 즉각적으로 그림에 옮긴 인상주의의 등장으로 선원근법은 해체되었다. 하지만 호크니는 실제 시각경험을 그림에 담기 위해 원근법의 문제를 다시 소환했다. 러시아 종교철학자 파벨 플로렌스키가 쓴 ‘시각을 넘어서(beyond Vision)’라는 제목의 책에서 호크니는 역원근법(reverse perspective)이란 개념을 접한다. 선원근법의 소실점이 화면 안에서 발견된다면 역원근법의 소실점은 그림 밖 감상자의 뒤쪽에 위치한다. 화면 속 소실점이 그림 속 환영의 공간(가상공간)을 불러일으킨다면 화면 밖 감상자의 뒤 공간으로 소실점이 옮겨지면 그림 속 공간이 그림 밖 현실 공간으로 확장된다.보는 것의 문제가 공간의 문제라면 본 것을 그리는 문제는 시간의 문제이다. 보는 행위는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문학은 시간의 순차적 흐름에 따라 사건을 전개한다. 정지된 한 장면만 보여주는 회화는 그렇지 못하다. 실감나는 공간, 설득력 있는 묘사나 표현보다 내용 전달이 중요했던 중세미술은 공간성과 시간성에 있어서 보다 유연했다. 논리성에 구애받지 않았던 중세 그림에서는 빈번하게 하나의 화면에 여러 장면이 함께 그려졌다.르네상스 이래로 재현과 모방이 추구되면서 중세적 유연성 대신 논리적 화면구성이 중요해진다. 그 결과 하나의 화면에는 하나의 장면만 그려졌다. 2018년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를 찾은 호크니는 11세기 초 제작된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를 감상했다. 길이 70m의 태피스트리에는 노르만의 왕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역사가 자수로 그려져 있다. 이 작품에서 호크니는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소실점이 없고 그림자가 그려지지 않았다. 시간에 따른 사건의 전개는 존재하나 공간이 부재하는 그림이다.‘바이외 태피스트리’에서 시간성 문제의 실마리를 찾은 호크니는 90m가 넘는 길이의 작품 ‘A Year in Normandie(노르망디에서의 일 년)’을 완성했다. 아이패드로 그린 노르망디 풍경 220장을 출력해 이어붙인 그림이다. 이 그림은 멈춰 서서 보도록 그려지지 않았다. 산책하듯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시선을 던지며 보는 그림이다. 호크니는 90m 길이의 초대형 파노라마 풍경화를 굴곡진 벽면에 이어붙이면서 감상자를 움직이게 했다. 감상자의 움직임으로 회화가 지녔던 시간의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다. 호크니의 이러한 발견을 ‘moving perspective(움직이는 원근법)’ 혹은 ‘움직이는 초점(moving focus)’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김석모 미술사학자

2023-11-20

서울공화국 vs 국가균형발전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총선용 포퓰리즘 광풍이 불고 있다. 보선 참패로 수도권의 싸늘한 민심을 확인한 여당이 총선전략으로 ‘메가시티(megacity) 서울’을 띄웠다.이미 정치·경제·사회·문화가 고도로 집중된 ‘서울공화국’인데 ‘메가시티 서울’은 또 무엇인가? 지방은 소멸위기인데 헌법 제123조에 규정되어 있는 ‘국가균형발전’의 헌법적 가치를 수호할 의지는 있는지 묻고 싶다.서울은 ‘너무나 메가’해서 주택·교통·교육·직장·과잉경쟁의 부작용이 심각할 뿐만 아니라 전국 최저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지방은 역대 정권의 ‘균형발전정책’에도 불구하고 경쟁력은 오히려 약화되어 고사 직전에 있다. 그동안 지방 인구를 빨아들여 버텨온 서울공화국이 멀지 않아 지방이 사라지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그럼에도 여당이 또 다시 서울공화국에 매달리는 이유는 뻔하다. 지방인 영남과 호남의 표심은 예측이 가능하지만, 총선 승패를 결정짓는 수도권은 가변성이 크기 때문이다. 수도권의‘떠난 표심’을 되돌리기 위해 극약 처방을 한 것이지만, 이것이 ‘승부수’가 될지 ‘자충수’가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서울확장론’이 서울과 지방, 인접도시의 서울편입 여부, 그리고 서울에서도 지역적 편차에 따라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메가시티 서울’과 ‘지방시대’의 양립은 희망에 불과하며 현실에서는 충돌한다. 서울이 집중화될수록 지방소멸은 더욱 가속화 될 뿐이다. 양자관계에서 우선은 ‘헌법적 가치인 국가균형발전’이다. 최근 한국은행 보고서도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고 지방 거점도시의 경쟁력을 키우는 균형발전전략이 우리의 활로라고 지적하고 있다.따라서 국정을 책임진 정부여당은 서울을 확장하기 전에 문제의 발생 원인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국민의힘 5선의 서병수 의원은 “이미 ‘슈퍼 울트라 메가시티’인 서울을 더 ‘메가’하게 만든다는 건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짓”이라고 비판했다. 서울은 메가시티가 아니라서 문제가 아니라 이미 너무 메가시티라서 문제인 것이다.설사 서울의 확장필요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순서는 ‘지방의 부활’ 다음이다. 지방소멸을 막는 것이 서울확장보다 훨씬 더 시급하기 때문이다. 지방이 죽으면 서울도 죽는다.지방 부활의 전제조건은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이다. 따라서 대선공약인 ‘500개 공공기관의 2차 지방이전’부터 조속히 실행해야 할 것이며, 메가시티도 서울이 아니라 부산·울산·경남, 대구·경북, 여수·순천·광양처럼 지방에서 먼저 추진되어야 한다.국가발전전략은 면밀한 연구와 공론화 과정이 필수라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김대기 대통령실장은 ‘메가시티 서울’에 대해서 “대통령실과 여당의 사전 협의는 없었다”고 했으니 어이가 없다. 정부가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총선용임을 확인해준 셈이다. 오죽하면 여당의 유정복 인천시장도 “실현 가능성이 없는 정치 쇼”라고 비판했겠는가.총선만 생각한 정략적 접근으로서는 서울의 문제도 지방의 문제도 결코 해결할 수 없다.

2023-11-20

‘오자서’와 ‘웜비어부부’의 복수

홍석봉 대구지사장 초나라 사람 오자서(伍子胥)는 아버지 오사와 형 오상을 억울하게 잃었다. 복수를 다짐한 오자서는 홀로 초나라를 탈출했다. 심적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오나라로 달아난 그는 훗날 ‘오왕 합려’로 불리는 공자 광(光)을 만난다.오자서는 갖은 책략을 동원해 광을 보위에 올렸고 오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기원전 506년, 오나라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했다. 3개월여 만에 수도를 함락시켰다. 하지만 오자서의 원수인 평왕은 이미 죽은 뒤였다. 오자서는 평왕의 무덤을 파헤쳤고 시신을 꺼내 구리 채찍으로 300대를 내리쳐 형체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만든 후에야 매질을 멈췄다.원한이 사무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나쳤다는 여론이 일었다. 그러자 오자서는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는 말을 남겼다.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는 뜻이다. 복수의 화신 오자서의 한 서린 고사다.북한에 억류됐다가 아들을 잃은 미국 웜비어 부부가 최근 북한 자금 29억원을 회수했다. 웜비어 부모는 6년이 지나도록 복수를 멈추지 않고 있다. 최근엔 북한의 새 자금원인 가상화폐까지 뒤지고 있다고 한다.웜비어 부부는 아들이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2018년 워싱턴DC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 5억 달러의 손해배상액을 인정받았다. 부부는 이 판결을 근거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북한 자산을 추적해 압류하거나 동결시켰다. 집요한 복수 행각이다. 웜비어 부모는 “죽는 순간까지 악랄한 김정은 정권과 싸우겠다”고 했다. 김정은 정권의 패악이 세계인에게 복수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면 좋은 결말을 보지 못한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1-20

윤핵관, 왜 여론이 외면하나

김진국 고문 험지(險地) 출마, 퇴진이란 말이 쏟아진다. 여야가 따로 없다. 총선이 얼마 안 남았다. 그동안 다져온 지역구를 포기하고 낯선 곳에 출마하는 건 떨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니 험지 출마는 정계 은퇴와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그렇지만 정치신인은 아직 선거판에 명함도 못 내밀었다. 정치인으로서 자신이 있다면 지금 시작하는 게 굳이 늦은 건 아니다. 따뜻한 온실에 있다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들판에 나서려니 서러울 뿐이다. 이런 판 갈이가 낯설지는 않다. 카리스마가 있는 당 총재나 대통령이 흔히 밟아온 과정이다.선거 때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도 흔들었다. 3김 청산도 요구했다. 대통령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동안 3김이 이끄는 정당에서 다른 목소리는 파묻혔다. 조금만 다른 목소리를 내도 정(釘)을 맞았다. 지역주의에 기초한 줄 세우기, 야권 후보 단일화 실패…. 여기에 반발한 젊은 정치인들이 새로운 지도자를 요구했다.그렇지만 3김씨 가운데 두 사람은 대통령이 됐다. 다른 한 사람은 내내 이인자로서 힘을 유지했다. 이들은 지역주의 정치의 책임을 벗어나기 어렵지만, 한편으론 지역의 정서, 한(恨)을 대변하는 정치적 상징이기도 했기에 이루어낸 성과다.그들은 ‘대통령 병(病)’에 걸렸다고 욕을 먹기도 했지만, 경쟁을 벌이느라 의정 활동을 독려하는 역할도 했다. 호남과 영남이라는 온실에서 편하게 당선된 의원들 가운데 나태하고, 지역민들의 원성을 받는 의원들은 과감하게 교체하는 카리스마도 있었다. 지역할거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이철승 전 의원처럼 지역에 뿌리가 깊은 거물 정치인들도 맥을 못 추고 쓰러졌다.물갈이의 긍정 효과와 함께 비주류는 발을 못 붙이고, 총재에게 충성경쟁을 하는 비민주적 정당 문화를 뿌려놓았다. 대통령이나 당 대표의 권위가 그때만은 못하다 해도 극심한 진영화의 영향으로 양대 정당의 공천이 당락의 필수조건처럼 작용한다. 유권자보다 공천위원이 당락을 좌우하는 것이다. 그러니 국민의힘에서 나오는 ‘윤핵관’과 영남 다선 의원의 험지 출마론, 민주당의 86정치인 용퇴론, 친명(親明) 험지 출마론이 본선보다 더 치열한 싸움판이 되고 있다. 사실 권력자와의 친소(親疏) 관계, 출신 지역이나 나이, 성별을 이유로 선거에서 불이익을 감수하라는 건 옳지 않다. 나이가 어려도 생각이 고리타분한 인사가 있는가 하면 나이가 많아도 합리적이고, 활동적이며, 사고가 자유로운 사람이 있다. 정치권을 취재하다 보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절감할 때가 많다.문제는 ‘윤핵관’이나 86 정치인들을 공격하는 말이 왜 여론의 호응을 얻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윤석열 정부의 문제는 모두 윤 대통령의 책임이다. 그렇지만 정치 경험이 없는 윤 대통령 가까이에서 조언을 해온 ‘윤핵관’도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소통이 막히고, 독단적으로 흘러간 임기 초반의 시행착오는 사실 정치를 모르는 윤 대통령보다 조언자들의 책임이 크다. 적어도 윤 정부의 정치 향방을 좌우할 요직에서는 물러나라는 여론이 비등한 이유다.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당 총재 시절, 평민당 의원들에 대한 호남의 불만이 팽배했었다. 평민당 공천만 받으면 말뚝을 꽂아놔도 당선된다고 하던 시절이다. 나를 안 뽑으면 누구를 뽑을 거냐는 오만하고 나태한 의정 활동이 지역민의 감정을 건드렸다. 김 전 총재도 과감하게 물갈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이 되려면 더 열렬한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영남도 마찬가지다. 일부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는 지역도 있지만 국민의힘 공천은 본선보다 더 어려운 관문이다. 최근 윤 대통령의 정치 행보에 변화가 생겼다. 선거가 가까워졌다는 절박감,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받은 충격, 지지부진한 여론 지지율 등 바뀌지 않을 수 없는 요인들이 많았다. 어떤 요인에 따른 것이든 바뀌는 만큼 지지율이 움직인다. 선거 전략은 따져봐야 하지만, ‘윤핵관’이건, 영남 지역 의원이건, 여론이 인요한 혁신위원장을 주목하는 이유를 새기고, 반성해야 한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11-19

꼼수 물가인상

우정구 논설위원 물가가 올라가면 인플레이션, 물가가 내려가면 디플레이션이다. 일반적으로 경제학에서는 물가가 올라가면 경제가 상승세를 타는 것으로 보고 긍정적 신호로 여긴다.하지만 물가가 급등하면 돈의 가치가 떨어져 서민경제가 괴로워지기 때문에 정부가 물가관리에 더 신경을 많이 쓴다.물가 상승과 서민 고통은 비례한다. 특히 정부가 밝히는 물가지수보다 서민이 느끼는 체감물가가 많이 오르면 서민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하늘을 찌른다.국제통화기금이 올해 한국의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3.6%로 내다봤다. 지난 10월 제시한 3.4%보다 0.2%포인트 올랐다. 내년도 물가상승률 전망치도 기존보다 0.1% 포인트 오른 2.4%를 제시했다. 정부의 물가관리에 비상이 걸린 셈이다.최근 정부는 물가관리 대책회의를 열고 슈링크플레이션에 대한 실태조사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슈링크플레이션은 줄인다는 뜻의 슈링크(shrink)와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다.가격은 그대로 두고 제품의 물량을 줄이는 꼼수인상을 말한다. 정부의 물가인상 억제 정책에 동조하는 척하면서 꼼수로 가격을 올리는 행위다. 소비자를 기만 행위로 당연히 단속돼야 한다.슈링크보다 한수 위의 꼼수가 있다. 스킴플레이션(skimflation)으로 가격과 용량은 그대로 두고 원재료를 줄이는 수법이다. 품질을 낮추며 가격인상 효과를 내는 것이다.연말쯤에는 물가가 안정될 것이란 정부의 전망이 빗나갔다. IMF의 예상대로라면 물가와의 전쟁이 길어질 수 있다. 정부의 물가대책이 더 긴요해진 요즘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3-11-19

길상천(吉祥天)을 아시나요?!

김규종 경북대 교수 며칠 전에 울산에 사는 친구가 단톡방에 낯선 식물 사진을 올린다. 단톡방 참가자들은 서울과 청도 그리고 울산에 산다. 궁금한 두 사람이 ‘뭐야?’ 했더니 ‘길상천’이란 답변이 돌아온다. 길상천이란 글자를 보자마자 내 머릿속에는 청송(靑松) 인근의 ‘길안천(吉安川)’이 떠오른다. 언젠가 청송에 살던 선배 교수를 찾았다가 만난 길안천이 기억난 것이다. 그래서 ‘청송’ 부근에 갔는지 물었더니, 친구에게는 대꾸가 없다.나와 서울에 사는 친구는 길상천이 당연히 어디 ‘지명(地名)’일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꽤 늦게 돌아온 답변은 ‘용설란’이었다. “거대하고 보기 힘든 놈이라 사진으로 보낸 것”이란 해설이 추가된다. 폭과 높이가 각각 75에 40년 정도 묵었다는 설명도 보탠다. 나는 그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어디 있는 길상천인데?” 묻는다. ‘멕시코’라는 답변이 날아든다. “시방 멕시코 갔나?” 했더니 마음만 갔다 왔다는 전갈이 온다.다시 사진을 보니 두툼한 어른 손바닥 크기의 식물 이파리가 겹겹이 엉켜있고, 날카로운 가시가 하늘로 향해 있다. 어찌 보면 거대한 초록 연꽃이 하늘을 향해 벙그는 것 같기도 하다. 참, 이상하게도 생겼군, 하고 혼잣말하는데, 휴대전화가 ‘웅~’ 하고 울린다. 울산 친구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아는 화원(花園)에 2년 넘도록 방치된 길상천이 보기 좋아서 내게 선물하고 싶다는 것이다.실물로 보면 훨씬 더 대단한 녀석이어서 일찍이 보지 못한 ‘대물(代物)’이라는 말도 덧댄다. 울산에서 청도까지 어떻게 하려고, 했더니 마음만 정하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결국 지난 목요일(11월 16일)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뿌리는 가운데 문제의 길상천을 싣고 그의 거대한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이 도착한다. 후진해서 가까스로 마당 안으로 들어온 차 안에서 길상천은 유유자적인 자태로 앉아 있었다.굵어지는 빗줄기 속에서 1시간 반 넘도록 나와 친구는 길상천의 오랜 뿌리를 잘라내고, 거기 덕지덕지 달라붙은 낡은 흙을 털어내면서 악전고투를 거듭한다. 다행히 마당이 넓고, 작업하기에 편리하게 수도가 비치돼 있고, 두 사람의 손발이 착착 맞았기에 분갈이 작업은 착착 진행된다.젖어가는 청바지와 웃옷은 물론, 모자를 쓴 얼굴에도 빗물과 땀이 뒤섞인다. 마침내 길상천을 새 화분에 앉히고, 거실로 집어넣는 데 성공한다.이어지는 ‘은성(殷盛)’한 뒤풀이 자리에서 우리는 입을 모아 오늘의 성공적인 작업을 자축한다. 어떻게 그런 거대한 화분을 선물할 생각을 했느냐, 하는 내 물음에 그는 멋쩍게 웃으며 예술 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창의적인 생각 아니겠어, 화답한다. 듣고 보니 그렇다. 나 같으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을 천연덕스럽게 해내는 그의 담대함과 실행력에 새삼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길하고 상서로운 식물, 길상천!죽기 전에 딱 한 번 꽃피우고, 행운과 복락을 가져다준다는 길상천을 우중(雨中)에 가져와 작업해준 친구의 말처럼 대운이 들어올 모양이다. 길상천과 나라의 안녕을 함께 기원한다!

2023-11-19

스포츠 관광문화 도시로 도약하는 문경

신현국 문경시장 문경새재가 자리하고 있는 문화와 관광의 도시. 국군체육부대가 위치하고 2015 세계군인체육대회를 유치·개최한 스포츠 체육도시. 사과와 오미자의 주산지. 문경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대표 이미지이다.연간 4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문경새재와 철로 자전거, 에코랄라 등 풍부한 관광자원은 중부내륙 최대의 관광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여기에 전국 최고의 스포츠 인프라와 우수한 문화·관광자원을 연계한 융복합 스포츠 산업 육성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를 꾀하고 있다.문경시는 전국 최고의 문경 국제소프트테니스장, 시민운동장, 배드민턴 전용 경기장, 온누리 스포츠센터, 국제클라이밍센터, 문경야구장, 파크골프장 등 스포츠 관광도시의 명성에 걸맞은 다양하고 우수한 스포츠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또한, 문경시 마성면 남호리에 설치 중인 다목적 야외씨름훈련장은 야외 공연도 겸할 수 있는 다목적 훈련장으로 올해 10월에 준공을 앞두고 있다. 호계면 호계리에 조성 중인 필드하키장은 내년 10월에 사업을 완료해 필드하키 국제대회를 유치, 전 세계에 스포츠 도시 문경을 홍보하기 위해 조성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최근 급증하는 테니스 이용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 부족을 해소하고 이상 기상 여건에 따른 제약을 해소하기 위한 ‘실내테니스 경기장 조성사업’ 추진하고 있다. 사업부지 전체 토지 보상은 지난 5월 완료했으며, 내년 1월 실시설계용역 후 25년 12월에 준공할 계획이다.문경시는 전국 어디에서나 2시간대에 접근이 가능한 대한민국 사통팔달 교통의 중심지이다. 국제규격의 최신시설을 갖춘 국군체육부대를 비롯해 전국 최고의 스포츠 인프라도 갖추고 있다. 우수한 문화·관광자원을 연계한 융복합 스포츠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각종 스포츠대회와 전지훈련의 성지로 거듭나 국내·외 스포츠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면 코로나로 인해 움츠렸던 지역경제에 불을 지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1%의 가능성에도 도전한다는 긍정의 정신으로 한국체육대학, 대한체육회, 국민체육진흥공단 등 체육 관련 공공기관 및 유관단체를 집중적으로 유치해 문경을 스포츠의 요람으로 만들 계획이다.이를 위해 아시아하키연맹 정기총회, 전국단위 육상·유도·탁구·테니스·태권도·씨름 등 70여개 각종 대회를 47억 원의 예산을 들여 국군체육부대 및 지역 체육시설에 분산 개최를 통해 정치권은 물론, 체육인 및 동호인에게 스포츠 도시 문경을 각인시켜 나갈 것이다.문경시는 올해 아시아하키연맹 정기총회와 전국단위 육상·유도·탁구·테니스·태권도·씨름 등 국제대회 2개, 전국대회 45개, 도 단위 대회 19개, 시 단위 7개 등 총 73개 대회를 유치했다. 73개 대회의 절반이 올해 신규로 유치해 개최되거나 개최될 예정이다.또한, 2015 세계군인체육대회 성공적 개최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2024년에는 세계 60여 개국 6천여 명의 선수와 임원이 참가하는 세계 최대의 태권도 축제인 ‘2024 세계태권도 한마당’과 ‘2024 아시아 유·청소년 유도대회’, ‘2024 국무총리배 세계 바둑선수권 대회’ 등 굵직한 국제대회 3개를 이미 유치했으며, 2025 아시아소프트테니스선수권대회와 2031 세계군인체육대회 유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올해로 25회째 맞는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명예 관광 축제인 2023 문경찻사발축제 기간에는 ‘문경새재배 파크골프 대회, 전국 생활 체육대 축전, 동아일보기 전국 소프트테니스대회’ 등이 개최됐다. 경기 관계자 4천여 명 정도가 축제장을 방문해 생활자기 및 명품 도자기 경매에도 참여해 ‘문경찻사발축제 경제효과 137억 돌파’에 일조했다.공공기관 이전을 위한 정치권에 대한 호소는 물론, 관련 부처와 기관 설득 작업에 모든 전력을 쏟을 것이다. 아울러, 지역발전을 위한 개발 사업들과 산적해 있는 여러 과제들과 각종 행정절차를 긴장감을 갖고 속도를 내어 분명한 결과를 이끌어 낼 것이다.마지막으로 문경시의 슬로건이 ‘긍정의 힘 yes 문경’이다. 긍정적인 마인드와 최고의 친절정신으로 공공기관 유치와 문경 발전을 위한 개발 사업들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문경의 백년대계를 다질 수 있도록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할 방침이다.

2023-11-19

누룽지

며칠 전 친정 엄마가 누룽지를 보내왔다. 일찍 출근하는 남편이 입맛이 없다기에 끓여 주었더니 고소하다며 한 그릇을 뚝딱 비워냈다. 좀 더 구하고 싶어 전화를 했더니 집에서 손수 만든 것이라며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냉동실에 오랫동안 두었던 찬밥 덩어리를 꺼냈다. 알알이 흩어져 먹을 수 없는 식은 밥을 프라이팬에 올렸다. 중간 불에서 밥을 주걱으로 꾹꾹 눌렀다. 어느 정도 눌으면 약한 불에서 은근히 굳히면 된다. 노르스름하게 누룽지가 만들어지는 재미에 식은 밥을 자꾸 올렸다. 외출 준비를 하면서 나갈 때 ‘가스 불을 끄고 가야지’ 해놓고 백지 상태로 그냥 나가 버렸다.까마득히 잊은 나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백화점에서 즐거운 시간에 빠졌다. 아이들 옷도 사고 우리 옷도 사고 화장품도 구경했다. 쇼핑을 하다가 다리가 아프면 까페에서 커피도 한잔 하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나지 않는 수다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배에서 어김없이 점심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났다.백화점 식당가로 갔다. 친구와 나는 알밥을 시켰다. 진동 벨을 받아들고 우리 번호가 뜨길 기다렸다. 잠시 후 식사가 나왔다. 알밥을 받아들고 지글지글거리는 눌은밥을 비비는 순간 집에 켜 두고 온 가스 불이 생각났다. 머리가 하얘졌다. 아무리 필름을 되돌려 보아도 불을 끄고 온 기억이 없다.쇼핑한 모든 것을 친구에게 집어 던져두고 비비다 만 알밥도 팽개치고 주차장까지 마냥 달렸다. 차에 비상등을 켰다. 빨간 신호등을 마구마구 지나쳤다. 좌회전을 해야 하는 차선에서 직진 차량에 막혀 갈 수가 없었다.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 나에게 이전부터 따라 왔던지 경찰차가 막아섰다. 경찰 한 분이 다가와 내 차의 창문을 내리라는 손짓을 보냈다.“무슨 일이십니까?”잔뜩 긴장했던 나는 경찰을 보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뭔가 해결을 해 줄 것 같았다.“아저씨…. 우리 집에 불났어요”집이 어디냐고 묻고는 경찰차를 따라 오라고 했다. 호루라기를 꺼내 사거리 중간에 서서 모든 차를 다 막아 세웠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다른 경찰 한 분이 차량 지붕에 빨간 등을 꽂더니 갑자기 사이렌 소리를 내며 창문으로 손을 꺼내어 뒤로 따라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경찰차가 막힌 길을 뚫어주었다. 나는 경찰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집까지 왔다. 가는 동안 조금씩 정신이 들면서 문뜩 ‘혹시 내가 가스 불을 끄고 왔으면 어쩌지’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온 아파트가 불길에 휩싸여 소방차가 와 있으면 어떡하나 했던 염려는 잠시 뒤로 미뤘다. 생각보다 평온한 공기에 안심하고 주방으로 들어섰다. 주방 바닥이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몇 번의 경보음이 났겠지만 아무도 들여다 봐 주지 않았으니 주방 스프링클러가 작동해 불을 진정시켜 놓았다.대학을 졸업한 후 한 번도 일을 쉰 적이 없었다. 바쁘게 돌진하며 살더보니 배터리 다 된 네온사인마냥 깜빡거리니 겁이 살짝 나기도 했다. 오후 내내 주방 바닥의 물기를 닦아냈다. 이전 같으면 물기 묻은 주방 바닥이 일어나 있는 것도 속상하고, 집에 불 냄새가 나는 것도 싫었을 텐데 그냥 한 번 실컷 웃고 말았다. 김경아 작가 꽉 막힌 도로를 달려오며 맥없이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지만 두려움의 불길을 지나면서 다시 한 번 삶의 모습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값비싼 화장품 하나 사는 것으로, 명품 가방 하나 사는 것으로 나의 세련됨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마흔의 끝자락에서 조금씩 깨달아 간다. 일류 스테이크가 아니고 눌어붙은 누룽지처럼 은근히 또 기억나게 하는 깊은 속이 진정 나이 들어가는 것임을 조금씩 알 것 같다.눈이 좀 침침하고 기억이 좀 깜빡거려도 사람들 속에 묻혀 주변의 꽃과 풀도 눈에 담을 줄 아는 느림이 세련된 것임을 알 것 같다. 피곤하면 어디든 앉아 쉬고 누군가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보낼 줄도 아는 여유를 알아가며 익어가고 싶다. 다른 이의 탁한 목구멍을 뻥하고 뚫어주며 불편한 속을 달래주는 누룽지처럼 깊은 맛을 내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2023-11-19

편파의 기준을 생각한다

유영희 작가 며칠 전부터 KBS에서 편파 논란이 한창이다. 지난 12일, 제26대 KBS 사장으로 취임한 박민은 임명된 지 하루만에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를 대폭 교체하고 프로그램도 개편하였다. 하차 당한 사람 중 뉴스에서 대표적으로 거론된 인물은 KBS 뉴스 9의 이소정과 주진우 라이브의 주진우이다. 2TV 시사토크 프로그램인 더 라이브는 아예 폐지되었는데, 너무 갑작스러운 조치라 당분간 예능 등 다른 프로그램을 송출할 예정이라고 한다.그 다음 날 박민 사장은 과거 KBS에서 편파 방송을 했다며 사과하였다. 그가 편파보도라고 예시한 사례들은 한동훈 관련 ‘검언유착’ 오보, 고 장자연 씨 사건 관련 후원금을 모금하고 도피한 윤지오 씨 출연, ‘오세훈 시장 생태탕 의혹’ 관련 보도 등이다. 그가 직접 언급한 이 세 가지 사례는 모두 여당 또는 보수 언론에 불리한 사건들이다.그러나 편파의 기준은 상대적이라 박민 사장의 행보 역시 편파 혐의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실제로 박민에 대한 기사에는 ‘이제 편파 방송 하겠다는 거지?’ 하는 댓글도 많이 보이고 시청료 거부 운동까지 일어나고 있다.누가 편파적이고 누가 공정한가를 객관적으로 결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중국 고대 춘추 전국 시대에도 백가가 다투는 혼란한 시기에 장자는 다툼을 해소하기 위해 제물론을 주장했다. 장자는 애당초 객관적 공정성은 불가능하다면서 모든 주장이 동등하다고 한다.“내가 자네와 논쟁을 했다고 가정해보세. 자네가 나를 이긴다면, 자네가 옳고 내가 옳지 못한 것일까? 내가 자네를 이긴다면, 내가 옳고 자네가 옳지 못한 것일까? 어느 한 쪽이 옳고, 다른 한 쪽은 그른 것일까? 우리가 둘 다 옳거나, 둘 다 그른 것일까? 만약 자네와 의견이 같은 사람더러 판단해 보라고 하면, 그는 이미 자네와 의견이 같은데,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겠나?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판단해 달라고 한들,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겠나? 그렇다고 나나 자네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판단해 달라고 한들, 어찌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겠나?”나아가 장자는 모든 주장이 다 주관적이므로 나의 주장을 고집하지 말라고 한다. 이런 장자의 말은 귀 기울일 만하기는 하나, 모든 주장에 동등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의심한다’의 저자 보 로토는, 인간의 지각 능력은 근원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신경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나의 오류를 줄이기 위해서는 ‘내가 본 것이 객관적 실재인지 의심하라. 멈추고 그냥 보라.’고 한다. ‘그냥 보기’ 위해서는 낯선 곳에 가보고, 평소 하던 것과 다르게 해봐야 한다. 내게 익숙하지 않은 것, 내가 싫어하는 것과 기꺼이 만나는 일이다.절차와 협약을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만 관철시키면 또 다른 편파 시비를 불러온다. 정말 편파를 시정하고 싶다면, 먼저 자신의 생각을 의심해야 한다. 하던 일을 멈추고 그냥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편파를 줄이는 지름길이다.

2023-11-19

마라톤과 혁신의 공통점

김종찬 포스코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말이 건강하게 사는 삶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회자되고 있는데,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 국립노화연구소, 국립암연구소가 참여한 연구결과가 JAMA 저널에 발표됐다. 이 내용은 하루에 8000보를 걸으면, 수명이 길어질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연구원들은 하루에 4천보(약 3㎞를 걷는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하루 8천보(6㎞)를 걷는 사람들은 심혈관 질환과 암을 포함한 어떤 이유로든 앞으로 10년 안에 사망할 가능성이 절반 정도라는 것이다. 많이 걸을수록 사망 위험이 낮아진다는 연구결과가 나온 셈이다.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웹툰 작가 겸 방송인 기안84가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해 화제가 됐고, 지난 10월에 춘천마라톤에서 정치인 안철수 의원이 풀코스를 완주하기도 하면서, 풀코스 마라톤에 더해 5㎞, 10㎞, 21.0975㎞(하프 마라톤) 등 다양한 거리의 마라톤 코스에 일반인의 참여도가 높아지고 있다.완주라는 결과로 얻는 신체적 정신적 건강은 과정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마라톤과 기업의 혁신이 묘하게 닮아 있음을 발견하였다.첫 번째, ‘지속적인 노력’이다. 마라톤은 오랜 시간 동안 지속적인 노력을 요구하고, 혁신 역시 지속적인 노력과 확고한 의지를 필요로 한다. 마라톤은 주어진 거리를 완주하기 위해 꾸준한 훈련과 개인의 노력이 필수이며, 혁신은 기존의 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현하기 위해 조직적이고 명확한 방향이 필요하다. 두 번째, ‘일관성’이다. 마라톤은 주어진 거리를 연속적으로 달리는 것이기 때문에 일관성 있는 힘의 배분과 전략이 필요하다. 혁신 또한 지속성을 바탕으로 일관성 있고 꾸준한 실행이 필요하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현하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일관성이 중요하다.세 번째, ‘도전과 극복’이다. 마라톤은 신체적인 한계에 도전하며, 이를 극복하는 것이다. 혁신 또한 기존의 관행과 제약에 도전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우는 것이다. 마라톤이 경쟁상황에서 동기를 부여하고 한계를 극복하는 것처럼 혁신도 경쟁 상황에서 동기를 부여하고 기존의 한계를 극복해야 시장을 지킬 수 있다. 네 번째, ‘목표의식’이다. 마라톤은 주어진 거리를 완주하는 것이 목표다. 본인의 체력에 맞게 오버 페이스가 되지 않도록 시간 목표를 정하고, 혁신 또한 최종 목표에 영향을 주는 서브 목표를 세밀하게 설계하여 달성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성공체험’이다. 마라톤에서는 완주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성취감을 얻을 수 있고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혁신에서도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삶의 에너지를 얻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 혹은 기업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으로 인해 큰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 프로는 시간의 20%를 시합에, 80%를 훈련에 투자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며, 우리에게 보이는 결과는 하이라이트만 보여 화려하지만 훈련 과정에 고통을 연료로 써서 얻어진 것이다.

2023-11-19

이스라엘의 보복전쟁은 즉각 멈춰야 한다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은 개전 한 달이 지났다. 전쟁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일방적 점령이라 볼 수 있다. 하마스의 무리한 이스라엘 축제장 난입과 200여 명의 인질이 전쟁의 발단이다.이스라엘군은 탱크를 앞세워 팔레스타인 가자시티를 점령해 버렸다. 정확한 팔레스타인의 피해 상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벌써 민간인 1만여 명이 피살되었다. 며칠 전 이스라엘군은 가자시에서 가장 큰 알시파병원까지 점령했다. 병원 바닥에서 피를 흘리는 어린 환자, 전기마저 끊긴 병원에서 신생아까지 죽어가며 팔레스타인 부상자는 넘쳐나고 있다.이집트 국경 남부 라파 쪽으로 밀려가는 피난민 행렬은 우리의 6·25를 연상케 한다. 유엔의 구호품마저 전달되지 않는 이 전쟁의 참상은 전 세계인들을 경악케 한다. 이 전쟁은 누가 뭐라던 이스라엘의 대대적인 보복 전쟁이다. 하마스의 무모한 인질극을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귀중한 생명을 앗아가는 이스라엘의 보복 전쟁이 즉각 중단되어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먼저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보복 전쟁은 인도주의에 근본적으로 반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외형적으로 하마스의 이스라엘에 대한 침범과 인질극에서 비롯되었지만 양측 갈등의 누적된 불만이 표출된 것이다. 전 세계 디아스포라가 되었던 유대인들은 2차 대전 후 1948년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을 건국한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수십 세기에 걸쳐 살아온 팔레스타인인들을 쫓아 버리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현재 이스라엘 외곽으로 밀려나 철조망 안에서 갇혀 사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들 간의 영토 논쟁은 닭과 계란처럼 시작도 끝도 없다. 이번 전쟁은 결국 현대적 장비를 갖춘 이스라엘의 30만 정규군과 3만명으로 추산되는 하마스 간의 전투이며 처음부터 승부가 결정된 전쟁이다. 탱크와 첨단장비를 갖춘 이스라엘군은 이미 1만여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갔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군사작전은 국제법에도 어긋나며 반인도적 전쟁 범죄일 뿐이다.둘째, 국제 여론도 이스라엘의 침략행위를 비난하고 있다. 미국만이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즉각적인 교전중단을 요구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이 15개국 중 12개국이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미국, 영국, 러시아만이 기권했을 뿐이다. 다행히 우리 정부도 유엔 총회 결의안에서 미국편을 들지 않고 기권하였다. 이스라엘 정부 입장을 무조건 옹호하는 미국의 처신도 점차 국제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세계 여러 곳의 유대인들은 어디서나 성공했지만 그들의 행위는 시기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들은 어디에서든 그들 유대 교회에 나가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상류층에 진입해 있다. 아인슈타인도 미국의 헨리 키신저도 현 미국 국무장관 블링컨도 모두 유대인이다. 미국에서는 월가를 장악하였고, 프랑스에서는 언론까지 장악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수전노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이웃과의 공생의 원리를 잃고 있다. 반유태주의가 퍼지고 국제 여론이 나쁜 이유이다.셋째, 이 전쟁은 이스라엘 현 총리 벤야민 네타나후의 정치력과도 결코 무관치 않다. 전쟁 전부터 그의 보수 강경 노선은 이스라엘 어디에서나 인기가 없다. 이 전쟁은 그가 유발한 전쟁이라는 비판이 따르는 이유이다. 하마스의 이번 인질극을 네타나후는 그의 실추된 정치력 회복 계기로 삼는 듯하다. 실각 위기에 놓인 그의 정치적 입지를 하마스에 대한 전쟁으로 만회하려는 것이다. 여느 독재자처럼 그는 내우를 외환으로 극복하려는 무리한 술책을 쓰고 있다. 그의 꿈은 이번 전쟁을 가자 지구를 장악하여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의 기회로 삼으려는 듯하다. 이스라엘은 이미 수차례의 전쟁을 통해 서안지구(West Bank)나 골란고원을 점령해 이스라엘 정착촌을 건설하였다. 이번 전쟁도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집트의 시나이 사막으로 쫓아버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찾으려는 의도일 것이다.그러나 이스라엘 총리 네타나후의 꿈은 실현될 수 없다. 우선 이 보복 전쟁에는 수많은 팔레스타인의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고 있으며 세계의 여론도 점차 그들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년 전 다윗의 별을 상징하는 이스라엘국기가 광화문 태극기 집회에 등장한 바 있다. 유대인들이 인접 반 이스라엘세력을 무력으로 응징하듯 우리도 북한을 강력히 응징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국의 일부 극우 편향 종교 집단의 무모한 의도이며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우리 속담에도 ‘짐승도 도망칠 구멍을 두고 쫒으라’는 말이 있다. 이스라엘의 강력한 무력에 의한 잔인한 팔레스타인 복속은 인륜에 반하는 잠정적 조치이기 때문이다. 장기전이 되면 인접 이슬람 국가들의 동맹을 강화시켜 전면전으로 확전될 가능성도 있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배척하는 ‘눈은 눈, 이는 이’라는 일부 이슬람의 동태 복수법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야훼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이스라엘은 일단 전쟁부터 멈춰야 한다.

2023-11-19

녹색쾌락주의

이원만 시인 “현대 경제의 살 길은 소비패턴의 생산시스템에의 대거 반영이고 그 소비패튼은 여성 소비판단력의 우수성에서 기인하며 그 여성 소비판단력이 경제 대원리를 좌우한다.”위의 말은 세계적인 경제학자인 임마뉴엘 윌러스틴과 폴 크루그먼의 주장이다. 다양한 생물종의 멸종만이 아니라 인간의 멸종에 대한 경제대책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라는 고민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여성소비판단력의 우수성’이라는 말에서 왜 ‘여성’이고 ‘소비판단력’일까? 또 ‘우수성’이 뭘까? 이런 질문 끝에 ‘대안쾌락주의’ ‘녹색쾌락주의’라는 말들을 떠올리게 된다.지금의 생물다양성의 위기, 인간멸종의 위기라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것들이 지금의 문명이 주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원시시대로의 회기하자는 것이거나 자본주의 파괴와 새로운 사회체제를 세우자는 등 따라하기가 어려운 비현실적인 것들이 많다. 그렇다고 또 다른 대안으로 제시되는 텀블러로 에코빽으로 지구를 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풍력발전, 태양광발전 등 생태적인 에너지정책을 잘 받아들였던 독일국민들이 겨울철 난방을 위해 정부가 내놓은 히트펌프정책을 반발하고 나섰다.가스, 석유보일러들을 히트펌프로 서서히 교체하자는 것인데 그 비용이 부담이 되는 모양이다. 열효율이 좋고 이산화탄소의 배출도 줄이지만 정부가 지원한다고 해도 가계가 부담해야되는 히트펌프가격만 2천만원 수준인데다 거기에 설치비, 난방효율을 높이는 건물수리비용이 눈덩이처럼 커져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법에 의해 의무적으로 히트펌프를 써야하는 기간을 피하기 위해 새로 짓는 집을 짓는 이들은 가스, 석유 보일러를 미리 설치한다고 난리라고 한다. 거기에다 기계도 기계설치인원도 아직 부족해서 언제 설치될지도 모르고 기다려야하는 등의 불편까지 감수해야하니 원성이 자자할 만하다. 기후위기 대처에 적극적인 독일의 녹색당은 히터펌프정책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고 기후위기를 과장된 종말론으로 여기는 세력들에게 권력을 넘겨줄지도 모르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기후위기에 잘 대응한다고 하는 유럽의 중심국가인 독일의 이런 사례를 보면 탄소중립과 기후위기의 극복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알 수 있다. 아무리 방향이 좋다고 하더라도 나의 노후대책을 무너트리고 세입자나 노인가구의 부담을 고려하지 않는 정책은 외면받는다. 디테일이 중요한 것이다.‘여성 소비판단력의 우수성’이라는 말이 나오는 배경에는 이런 정치적인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고민이 깔려있다. 그것이 자본주의 경제의 내용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있다.집안 일이든, 음식이든, 소비든 여성들의 판단력이 좌지우지한다. 그래서 그 여성의 소비판단력이 우수해야 하는 것이다. ‘우수성’이라는 말에 ‘녹색쾌락주의’라는 말을 넣어본다면 우리는 어떤 소비미학을 가지게 될까? 어떤 라이프 스타일을 가지게 될까?-얼마든지 비행기를 타도 상관없다, 우리의 식습관을 줄일 수 있다면!-핫 플레이스로 붐비는 여행지보다는 고즈넉한 힐링이 낫지 않겠는가!-친환경 유행을 따라 에코빽을 더 사느니, 그냥 소비를 좀 줄여보자!-개나 고양이만 예뻐하지 말고, 한 번쯤 돼지의 입장도 생각해보자!‘텀블러로 지구를 구한다는 농담’이란 책에서 쇤부르크가 주장하는 고품격 녹색의 삶에 대한 몇 가지 제안들이다. 불편하지 않고, 맛을 즐길 기쁨도 놓치지 않고,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드레스스타일을 유지 하고, 여행도 즐기고, 스포츠도 즐기는 녹색의 삶은 불가능할까?그런 녹색쾌락주의자들이 많아져 소비가 그런 기준으로 진행되면 자본은 어디에 투지를 할까? 육식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지구열대화를 위한 엄청난 기여를 할 수 있다. 거기에다가 생태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소와 닭과 돼지를 개와 고양이 수준으로 사랑할 수도 있지 않은가! 정치가 제시하는 정책방향도 중요하지만, 그 정책이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을 디테일하게 만족 시키는 정책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우리의 고품격 녹색의 삶, 녹색쾌락주의자들의 지갑이 어디에 열리는가가 결정한다. 그것말고 다른 대안들은 솔직히 비현실적이다. 불편해서, 희생을 강요해서 싫은 것이다.세계는 전쟁중이고 선진국들의 생태정책들은 후퇴하고 있다. 가능성이 낮지만 만약에 선진국들이 높은 수준의 규격을 만들어 낸다면 가난한 나라들은 그것을 따라하지 못해 많은 손해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전지구적인 문제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 모든 것들을 꿰뚫는 것은 ‘여성 소비판단력의 우수성’이다. 디테일하고 현실가능하지만 품격도 높은 녹색의 삶, 녹색쾌락주의가 앞으로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이 되어야 한다.

2023-11-19

울릉도 지원 특별법

우정구 논설위원 울릉도에서 마지막으로 화산이 폭발한 시기를 학계는 대략 5천년 전으로 보고 있다. 섬 곳곳에서 발견된 고인돌과 무문토기 등으로 미뤄보아 외딴섬이지만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도 꽤 오래전 일로 짐작을 한다.역사 기록으로는 신라시대 때 처음 등장한다. 우산국으로 불렸고 지증왕 13년에는 하슬라주 군주 이사부가 이곳 정벌에 나섰다는 기록도 있다. 1900년 10월 대한제국 칙령 41호로 군으로 승격됐고 1914년 강원도 관할에서 경북으로 편입됐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포항시의 생활권이다.2022년 기준 울릉도의 인구는 8천900명 정도. 1975년 2만9천명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있다. 초중고 학생수는 447명이다. 인구 대비 5%다. 고령화 지수는 전국 평균 3배며 작년에 출생한 신생아가 겨우 스무명이다.주요 생업수단인 어업도 옛날 같지 않아 울릉주민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큰 문제는 울릉도에 살고 있는 학생들 대다수가 장차 육지로 떠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울릉의 앞날은 암울하다.단지 2026년 울릉공항이 개항되면 외지인이 많이 찾아와 섬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은 그나마 희망적 요소다. 울릉군은 공항이 개항되면 현재 40만명 정도 찾는 관광객이 100만명까지 는다고 본다.울릉도를 행·재정적으로 지원할 특별법이 국회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이 특별법은 섬 주민의 생활개선과 관광 인프라 구축을 위해 정부가 재정적 지원을 하는 법안이다. 군민의 생존과 직결되는 법안이다.특별법은 그동안 두 번이나 고배를 마셨다. 21대 국회기에 통과하지 못하면 또다시 폐기돼야 한다. 울릉군민의 관심이 크지 않을 수 없다. /우정구(논설위원)

2023-11-16

정치인의 품격

홍석봉 대구지사장 정치판에만 들어가면 입이 험해진다. 품격이라곤 찾아 볼래야 찾을 수가 없다. 시장바닥에서나 들을 법한 거친 말들이 난무한다. 상대방 입장과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상스러운 말을 마구 뱉어낸다. 그것도 공식석상에서. 요즘 우리 정치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품격(品格)’은 사전적 의미로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 또는 ‘사물 따위에서 느껴지는 품위’다. 그런데 이 품격이 우리 사회에서 점차 낯선 말이 되고 있다. 특히 정치판의 저질 발언과 행동은 국가 품위를 좀먹는다. 국민들은 모멸감마저 느낀다. 자긍심은 형편없이 망가진다.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출판기념회에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어린 놈” “건방진 놈”이라고 호칭해 물의를 빚었다. 검찰 수사에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 송 전 대표는 자신의 돈 봉투 사건과 관련, “이게 무슨 중대한 범죄라고 6개월 동안 이 지랄을 하고 있는지. 미친놈들 아니냐”고도 했다. 며칠 동안 한 장관에게 험한 말을 퍼부었다. 한 장관에 대한 원념이 느껴진다.여기에 다른 민주당 의원들까지 한 장관을 겨냥한 거친 표현을 하며 가세하는 형국이다.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부산의 토크콘서트장을 찾은 인요한 혁신위원장에게 ‘Mr. Linton’이라고 부르며 “당신은 오늘 이 자리에 올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면박줬다. ‘혐오 정치’라는 말이 나왔다. 이 전 대표는 이틀 뒤 ‘앙숙’인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과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칸막이 하나를 두고 식사하다 자신을 비난하는 안 의원에게 “조용히 좀 하라”고 고함 질렀다가 비난을 샀다. 이 전 대표는 ‘인성’ 문제와 함께 ‘싸가지’ 없다는 평가를 달고 다닌다.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당 대표까지 지냈다. 우리 정치판의 현주소다. 매사에 모범을 보여도 부족한 판국에 천박한 언행으로 눈총받고 있다.말과 행동은 그 사람의 품격을 보여준다. 고맙다고 인사할 줄 알고, 자신의 실수엔 고개 숙이며 상대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 품격과 가치를 갖춘 사람이다. 그런데도 말을 함부로 하는 이들이 많다. 그것도 대한민국의 최고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인들이다. 정치인은 대중을 상대로 하는 사람이다. 언행과 일거수일투족이 항상 대중 앞에 노출된다. 그만큼 조심하고 사려 깊은 행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막말로 자신의 품격을 떨어뜨리기 일쑤다. 정치인 전체가 매도당할 수 있는 그런 언행이 곧잘 터져나온다. 절제와 포용, 정직, 신의, 배려는 품격의 전제조건이다.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와 행동이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4류 한국 정치가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대한민국의 성과를 여지없이 깎아내리고 있다.조선 후기 학자이자 문신인 성대중은 ‘청성잡기’에서 “내면의 수양이 부족한 자는 말이 번잡하며 마음에 주관이 없는 자는 말이 거칠다(內不足者,其辭煩,心無主者,其辭荒)”고 설파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했다. 품격 있는 정치인, 존경받는 정치인을 과연 볼 수 있을까.

2023-11-16

국가와 국민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지난달 7일(현지시간) 가자지구를 거점으로 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수천 발의 로켓포를 발사하며 대규모 공격에 나섰다. 가자지구 인근 지역에 진입한 하마스 무장대원들은 주민 수백 명을 살해하고 수십 명을 인질로 잡았다. 즉각 보복에 나선 이스라엘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가자지구에 쳐들어가서 하마스 소탕전을 벌이고 있다.로마군의 침공으로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은 천구백 년 동안 세계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2차 대전 중에는 히틀러 나치에 의해 600만 명이 학살당하는 대참사를 겪기도 했다.그러다가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가 끝난 날인 194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 지구를 이스라엘의 새로운 유대인의 영토이자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을 계승한 국가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하지만 기왕의 팔레스타인 거주민들과 아랍 국가들의 저항과 공격으로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아랍 국가들과 팔레스타인의 공격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응징했다. 다시는 나라 없는 민족이 되지 않겠다는 피맺힌 결의가 아니겠는가.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35년 동안 우리도 식민지 백성이었다. 고려와 조선 시대는 약소국의 수모와 치욕을 감내해야 했다. 고려는 몽골의 침략으로 수난을 겪었고, 조선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왕위를 책봉 받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서 세계가 놀란 기적이 일어났다. 중국과 일본에 더 이상은 굴욕을 당하지 않을 만큼 국력이 부강해진 것이다.이제는 대한민국 국민과 대통령은 세계 어디에 가도 괄시 받지 않고 당당하게 행세할 수 있게 된 것이다.전쟁이 할퀴고 간 초토에서 외국의 원조를 받아가며 보릿고개를 넘어온 세대들로서는 이게 꿈인가 싶게 놀라운 현실이다.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문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국가가 나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묻기 전에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오늘(11월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일제 강점기 동안 우리의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희생하거나 헌신한 선열들에 대한 추모와 존경을 표하는 날이자 그들의 독립정신 및 호국정신을 기리는 날이다. 미국의 원자폭탄 위력 앞에 일제가 항복을 했기 때문에 맞이한 해방이지만, 나라를 잃은 35년 동안 우리의 얼과 맥을 이어온 것은 일제에 저항하고 맞서 싸운 순국선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참으로 안타깝게도 오늘의 정치판에는 우국충정을 가진 정치인들이 보이지 않는다. 온통 사리사욕과 당리당략에 혈안이 된 정치모리배들만 득시글거린다. 어찌 정치꾼들뿐이겠는가.선전선동에 현혹되고 그릇된 이념과 포퓰리즘에 눈이 멀어 표를 몰아준 국민들이 자초한 일이다.망해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것도 국민이지만,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도 국민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흥망의 기로에 서 있다. 좌우로 갈려 존망이 걸린 내홍을 치르고 있는 실정이다. 국민의 각성과 결단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2023-11-16

수능시험을 치르며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매년 11월 셋째 목요일이 되면 대학수학능력시험 즉, ‘수능’이 치러진다. 1994년도부터 실시해 오고 있고 문이과 통합 수능으로는 세 번째이며 전국 84개 시험지구의 1천200여 개의 시험장에서 치러졌다. 그동안 몸과 마음을 다해 공부한 50만4천여 명 수험생은 이제 긴장을 풀고 본인이 원하는 대학지원에 온 정신을 쏟아야겠지. 이중 N수생(재수 이상 수험생) 및 검정고시 출신이 17만8천여 명으로 35% 이상이 되어 28년 만에 최고라고 하는데, 최고 상위권 학생의 ‘의대 열풍’과 킬러 문항 배제 소식에 반수생(半修生·대학을 다니다가 중간에 재수하는 학생)들이 가세한 탓이라고 본다.수능 과목의 국어, 수학, 사회·과학 탐구는 상대평가이고 한국사, 영어 또는 제2외국어, 한문은 절대평가인데 한국사는 우리 역사에 대한 기본 교양 평가이며 미응시자는 전 과목이 무효 처리된다. 이번 수험생들이 약간 혼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는 견해는 지난 6월 입시 비리 관점에서 불거진 ‘사교육 카르텔’ 논란으로 대통령이 사교육 경감방안을 요구하며 소위 초고난도 문제라는 킬러 문항 배제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수능 출제 위원과 학원 사이에 출제 문항의 정보를 주고받았다는 사실로 학원가에 빨간불이 켜지기도 했다. 이에 오히려 ‘물수능’이 되지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지만 사교육비를 줄이려는 계획이라는 말에 그 연관성에 약간의 의문을 갖게한다. 그러나 사교육이 엄청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지금, 공교육 중심의 공정한 수능을 실현하여 고교 이상 학력이면 여태껏 배운 실력으로 유추하여 해답을 얻는 정도의 문제이면 족하리라 본다. 수능성적은 대학마다 과목·영역별 반영 비율이 다르므로 지원할 때 잘 파악하여 불이익이 없도록 해야 한다.근래 와서 대학은 반도체 및 첨단과학 관련 학과를 신설하거나 증원하려 하고 의대 쏠림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올해의 수시 모집에서 보여준 의대 경쟁률은 수도권이 61대 1이고 지방의 29개 대학은 18대 1인 것을 보면 의약학 계열 지망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나아가 우리 국민의 교육 의식을 엿볼 수 있다.‘말이 나면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말이 있다. 제주도에서 키운 말이 품질이 좋듯 인재도 서울에 몰리고 있는 현실이다. 교육 평준화…. 참 어려운 말이다. 천재는 천재로 키워야 하지 않을까. 근래 4년간 SKY대학 정시합격자의 70%가량이 수도권 출신이라는 통계가 있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지방 대학 소멸 위기가 닥쳐오는데 이에 대한 국가 대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영유아 10명 중 6명 이상이 사교육 즉, 선행 학습을 받는데, 연간 3개 이상 사교육을 받는 영유아는 수도권이 비수도권의 3배 이상이고, 전국 초등 1학년 학부모 1만1천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연간 300만원 이상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집이 약 26%라고 하니 온갖 희생을 감수하고 자식들 교육에는 최선을 다하는 우리 국민의 교육열은 아마 세계 최고가 아닐까!코로나 확진자, 유증상자도 같이 치른 이번 수능으로 독감 환자가 늘고 있는 겨울의 초입에 우리 사회도 별 탈이 없기를 바란다.

2023-11-16

수능날 다시 생각하는 교육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어김없이 수능의 날이 밝았다. 날씨와 상관없이 마음이 추워진다. 해마다 겪으면서도 이날은 새삼 스산하다. 청년들의 내일은 수능보다 훨씬 넓고 깊고 높다. 그럼에도 오늘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쌓은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길 바란다. 실력도 답안지 위에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오늘은 후회없는 하루가 되어야 한다.수능과 대학입시. 이거 너무 오래 되지 않았을까. 입시제도에 문제가 있다거나 바꾸어야 한다는 논의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수능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사회가 바뀌고 저출산고령화로 인구추이도 바뀌어 학생숫자가 급격하게 줄었다는데 수능은 그대로다. 이제는 미래지향적이며 글로벌한 교육을 생각한다면서 수능은 수십년 째 같은 모양이다.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우리가 기르고자 하는 사람의 모습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문과와 이과. 문과형 인간과 이과형 인간. 책 제목에도 등장한다. 모방하고 추격하며 겨우겨우 헤쳐왔던 시절에는 그런 구분이 필요했다. 과학과 기술에 능한 인재와 문화와 역사에 집중하는 사람을 길러내어 얼른 우리도 잘 살아야 했다. 사회 각계에 분야마다 권위자들과 실력자들이 있어야 했다. 세월이 바뀌었다. 이제는 다르다. 공교육이 문과와 이과를 가르는 건 거의 위험하다. 사람을 이과형 또는 문과형으로 길러내면, 사회적 불균형을 초래하고 문화적 갈등을 깊게할 터이다. 수학적 논리와 과학적 사고를 하면서도 문화와 역사와 철학을 이해하는 인간을 길러야 한다. 세상을 과학기술의 눈으로만 보면서 역사에 무지한 인간을 길러야 할까. 문화적 상상력만 넘치고 논리적 사고에는 맹탕인 사람을 상상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특성이 다를 수 있겠지만 교육이 나서서 차이를 넓힐 필요는 없다.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는 태도를 탈피해야 한다.유네스코(UNESCO)도 교육이 관심가져야 할 덕목으로 네 가지 소양을 설정한다. 협력(Collabora tion), 소통(Communication), 창의(Creativity)와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더 이상 홀로 존재하는 사람도 없고 고립되어 존재하는 직업도 없다. 세상은 모두 ‘협력’을 바탕으로 움직이는데 독야청청 뛰어난 실력은 의미가 없다. 대면하여 나누는 소통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소통방식이 다양해 졌다. 효과적으로 효율성 높게 ‘소통’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하늘 아래 새 것은 없다. 새롭게 바라보고 다르게 연결하는 상상력을 길러야 한다. 정답제시를 위한 기억력보다 문제해결을 위한 ‘창의’가 요청되는 까닭이다. 새로운 무엇을 쌓으려면 우선 존재하는 것들에서 문제를 발견해야 한다. 매사를 분석적으로 바라보고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으로 승부해야 한다.문제는 과목별로 발생하지 않는다. 문과적 소양과 이과적 덕목을 균형있게 버무려 통합적 사고와 획기적 돌파를 해낼 수 있는 인간을 길러야 한다. 상상과 창의로 승부하는 다음세대를 길러야 한다. 고작 문과와 이과의 차이를 발견하는 미시적 접근에서 탈피해야 한다. 과학적 사고에도 능하면서 문사철(文史哲)에도 이해가 깊은 통합적 인성을 길러야 한다. 교육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2023-11-15

‘대구인’ 이육사기념관

홍석봉 대구지사장 이육사는 일제치하 저항정신의 상징 인물이다. 그는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서 한국인의 가슴 속 깊이 이름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는 단 한 줄의 친일 문장도 남기지 않은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민족정신이 투철했고 지조를 지켰다. 1927년 장진홍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투척 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 투옥돼 3년간 옥살이를 했다. 당시 수인번호 264가 그의 필명이자 이름이 됐다.도쿄, 베이징 등 유학시기 몇 년을 제외하고는 그는 줄곧 대구에서 살았다. 1932년까지 대구에서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하며 활동했다. 육사는 ‘청포도’, ‘절정’, ‘광야’ 등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이육사기념관이 16일 대구 중구 남산동에 문을 열었다. 그는 고향인 안동에서 대구로 이사한 후 6차례 이사를 다녔다고 한다. 현재 기념관이 들어선 곳은 1922년 이육사와 가족이 살았던 곳이다. 그가 살던 가옥은 재개발로 철거됐고 시공사가 기념관을 지었다. 기념관은 다양한 기록과 사진, 영상 등을 갖춰 이육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도록 했다. 이육사의 고향 안동에는 2004년 개관한 이육사문학관이 있다. 이곳에는 문학 및 연극, 음악회 등과 각종 강좌를 개설, 육사의 문학과 정신을 면면히 계승하고 있다.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대구의 정신을 빛낸 그의 기념관이 그가 살던 자리에 들어선 것은 의미가 남다르다고 하겠다. 이육사의 예술 행적과 독립 활동을 조명할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대구사람 이육사’라고 말할 정도로 속속들이 대구인으로 살고 대구를 사랑한 이육사다.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는 독립운동 역사 교육장과 전시공간이 되길 바란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1-15

혼자 걷는 시간

정미영 수필가 영일대 호수공원에 가을이 깊다. 붉게 물든 나뭇잎을 보며 물가를 걷고 있으니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긴다. 아침노을 빛이 스며든 호수의 색채가 내 마음으로 옮겨와 은은하게 번진다.얼마 전, 지인이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의 저서를 읽었다고 했다. 올레길은 제주도 방언으로 집으로 통하는 아주 좁은 골목길을 뜻하는데, 서명숙 이사장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나서 구상한 것이다. 책을 읽고 난 뒤에 올레길 코스를 모두 걷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적인 여건이 충족되지 않아 생각을 접었단다.그러던 어느 날, 해파랑길부터 걸어보자는 생각을 했다. 해파랑길은 동해의 상징인 떠오르는 해와 푸르른 바다색인 파랑, ~와 함께라는 조사 랑을 조합한 합성어다.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파도소리를 벗 삼아 함께 걷는 길을 의미한다. 지인은 본인이 거주하는 포항의 구룡포 앞바다를 떠올리는 순간 곧장 실행에 옮겼다.포항과 울산에 위치한 해파랑길을 벌써 몇 코스나 걸었단다. 혼자 걸으니 어촌의 고즈넉한 풍광과 사람들을 온전히 눈에 담을 수 있어 좋고,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행복하다며, 창공에 반짝이는 햇살처럼 새뜻하게 웃었다.지인을 보며 최초의 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구절이 떠올랐다.“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수행자가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으려면 타인의 영향을 받지 않아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묵묵하게 자기만의 걸음으로 걸어가야 한다. 나는 지인 또한 혼자 걷는 시간에 스스로를 재발견하고 자신이 소중한 사람임을 재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어느덧 나는 인생시계의 가을에 머물고 있다. 봄, 여름의 계절에 혼자라는 낱말을 떠올리면 외롭다가 연상되었다. 그 감정에 휘말리기 싫어 대부분 친구나 가족 등 누군가와 함께했던 기억이 있다. 오죽하면 학창시절에 즐겨 불렀던 광고 음악이 ‘오리온 초코칩 쿠키’였다. “초코가 외로워 쿠키를 찾네. 쿠키가 외로워 초코를 만났네.” 노랫말이 마음에 들어 용돈을 모아 과자를 자주 사먹었던 추억이 있다.이제는 혼자라는 낱말을 떠올리면 독립이 연상된다. 독립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낱말인지 체득했다. 학부모를 대상으로 자녀 교육 강의를 하러갈 때, 대부분 부모들은 자녀 교육의 목표를 내 자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자녀 교육의 목표는 독립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 부모가 존재하지 않을 때를 대비해 사랑하는 내 자녀가 스스로의 인생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홀로서기를 준비시켜야 결국은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연한다.나는 독립의 첫 걸음으로 자녀에게 혼자 걷는 시간을 줘보라고 권하고 있다. 가까운 거리에 심부름을 시켜본다든지, 집 앞을 산책하고 오라든지, 자녀가 자신을 믿고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나무 그늘 아래에 서 있으니 바람이 불어온다. 제법 쌀쌀했다. 나는 잔소름이 오스스 돋은 팔뚝을 손으로 쓸며, 그윽하게 둘레길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호숫가에 좀 더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모처럼 시간이 걸리더라도 산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둘레길을 걸을 것인지, 잠시 고민한다.산 위에서 호수로 다시 바람이 불어온다. 산길에는 낙엽이 제법 두텁게 쌓여 있겠지? 문득 낙엽을 밟고 바스락 소리를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연달아 니체가 인생 좌우명으로 삼았던 괴테의 명언도 떠오른다. ‘타협하지 말고 온전히 자신의 모습으로 아름답고 당당하게 살아라.’ 나는 문구를 활용해 스스로에게 들려준다. ‘고민하지 말고 온전히 자신의 모습으로 아름답고 당당하게 걸어라.’ 자꾸만 혼자 걷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만든다.둘레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나뭇가지가 무성하다. 가만히 살펴보면, 나무들도 저마다 혼자서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겨울나기를 준비한다. 혼자 걷는 시간은 나무에게도 필요한가 보다.

2023-11-15

소설(小雪)과 명리 이야기

24절기 가운데 20번째가 소설(小雪)이다. 태양이 황경 240도에 위치하며, 입동과 대설 사이다. 올해는 11월 22일(음력 10월 10일)이 소설이다. 소설(小雪)의 의미는 이날 첫 눈이 내린다는 뜻이다.소설은 순음(純陰)의 달인 해월(亥月 음력 10월)이라 날씨가 황급히 추워지는 시기다. 얼음이 얼고, 첫 눈이 내리는 등 첫 겨울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아직 따뜻한 햇볕이 간간이 내리쬐어 소춘(小春)이라고도 한다. 11월 말까지 약간의 따스함이 남아있어 농촌에서는 야외에서 끝내지 못한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겨울이 빠르게 오건 늦게 오건 소설(小雪) 때가 되면 비가 눈이 되면서 겨울이 성큼 다가온다. 일반적으로 이때부터 바람이 심하게 불어 나뭇잎을 다 떨어뜨린다. 나무의 겨울나기를 위한 자연의 순리다. 어촌에서도 배를 띄우려 하지 않는다. 날씨도 추워지는데, 이를 ‘손돌추위’라고 한다. 산짐승이 먹이를 찾아 밭으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까치와 텃새들이 유난히 설치는 절기가 소설이다.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겨울이 덜 춥다고 하지만, 정도의 차이지 춥기는 매한가지다. 계절의 흐름 속에서 소설의 추위는 다음 해의 농사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날씨가 춥지 않으면 병충해가 늦게까지 창궐해 보리농사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소설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는 속담이 있다. 소설에 날씨가 추워야 보리농사가 잘된다는 뜻이다.전한(前漢)의 회남왕 유안(劉安·기원전 179~122)이 저술한 회남자(淮南子) 권5 ‘시칙(時則)’의 핵심은 시령(時令)사상이다. 시령사상이란 통치자가 1년 열두 달마다 그달에 나타나는 자연계의 여러 변화를 일일이 주목하면서 자연의 변화에 합당한 정치를 시행해야 한다는 주장이다.음력 10월이 되면 방위는 북쪽이고, 숫자는 6이다. 이때부터 물과 땅이 얼어붙기 시작하며, 꿩이 바다로 들어가 무명조개가 되고, 무지개는 더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천자는 북쪽 교외로 나아가 겨울을 맞이한다. 돌아와서는 국가를 위해 죽은 자들의 자손에게 상을 내리고, 홀아비와 과부들을 보살핀다. 신위(神位)에 기도하고, 거북점과 시초점을 치고, 주역 괘의 조짐을 관찰해 길흉을 살피게 한다.이달에는 크게 술을 마시면서 겨울 제사를 지낸다. 천자는 하늘의 신에게 내년의 복을 빌고, 토지신에게도 정성스럽게 빌고 제사를 지낸다. 이 일들이 끝나면 조상신에게도 제사를 지내고, 농부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휴식하게 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러한 풍습은 농경사회의 특징이라 볼 수 있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우리 농촌에서는 입동과 소설이 드는 음력 시월에 지난 한 해 동안 함께 수고하고 보살펴준 가축, 사람, 자연 등 모든 것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행사가 있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한 뒤 마을의 안녕에 감사하면서 햇곡식과 햇과일로 제사를 지낸다. 나라에서는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각 가정에서는 한 해 농사를 무탈하게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준 가신(家神)과 조상들에게 감사의 예를 올린다.음력 시월은 가장 풍요로운 시기이므로 열두 달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달이라는 뜻에서 상달(上月)이라 불렀다. 상달에 이르면 함께 애쓴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빚진 것을 갚는다.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뿐만 아니라 동물과 눈에 보이지 않는 천지의 모든 존재와 죽은 이들, 신령들을 모두 챙기는 행사다. 유교 제례의 하나인 시제(時祭)도 지낸다. 이는 5대조 이상의 선조들에게 지내는 제사로 묘소에서 지낸다.상달고사는 여성들이 주관하는 큰 행사였다. 고사를 지낼 때 농사를 짓는 가정에서는 조상단지, 성주단지, 터주단지 같은 신주단지에 추수한 햇곡식을 갈아 넣는다. 이곳을 책임지는 신령들에게 시루떡과 물을 올리며 지난 한 해 무사히 지낸 것에 감사하고 다음해의 안녕을 기원한다.그리고 봉양을 받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는 모든 혼백에게도 조금이나마 가을의 풍요로움을 같이 나눈다. 이렇게 상달에 이르면 정성이 들여지고, 겨울나기를 위한 김장까지 끝나면 비로소 한 해를 마무리하게 된다.시월상달, 해월에 시작되는 겨울의 시간은 외부활동 대신에 수공예와 같은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열중하고, 겨울이 깊어질수록 정신활동에 몰두하게 된다. 명리에서도 겨울은 죽음과 같은 시간이라고 하지만, 활발한 신체활동을 멈추고 쉬게 하는 의미도 있다.추울 때 벽에 틈이 생기면 찬바람이 들어와 감기에 걸리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魔)가 들어와 고통을 초래한다. 항상 흔들림 없는 경(敬)의 마음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한다.

2023-11-15

탄소중립과 바다 지키기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바다는 늘 출렁이며 깨어 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거칠게 철썪이고, 바람 한점 없이 고요하면 고요한대로 바다는 뭍을 향해 조근조근 속삭이듯이 찰랑대고 있다. 때로는 거센 너울로 짙푸른 근육을 보이며 포효하듯 흰 포말로 부서지기도 하고, 때로는 잔잔한 호수마냥 흰돛단배가 평온하게 떠가는 여울로 살랑거리기도 한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는 지구표면의 70%를 차지하여 뭍에서 버려지는 온갖 쓰레기와 혼재물을 받아들이면서 삭힐 것은 삭히고 지울 것은 지우며 밀어낼 것은 밀어내고 있다. 자신을 낮추어 모든 강줄기와 하천을 받아들이기에 ‘바다’라고 하는지도 모른다.그러한 바다가 수십년 전부터 몸살을 앓고 있다. 바다에 넘쳐나는 쓰레기 때문이다. 해양쓰레기의 대부분이 플라스틱으로 해양생물을 위협하고 있으며, 침적되거나 부유되는 해양쓰레기로 인해 해안경관 훼손, 해양생태계에 악영향을 초래하고 있다.전세계적으로 해양쓰레기 심각성은 커져서 한국 면적의 16배에 이르는 거대한 쓰레기섬이 북태평양 공해상에는 해류를 타고 몰려들고 있다 한다. 국내 해안도 최근 중국 등에서 떠내려온 쓰레기가 전국의 해변에 쌓이는가 하면, 제주 해안에서 플라스틱을 먹은 바다거북의 사체가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끊임없이 몰려드는 해양쓰레기도 심각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로 인해 해양환경이 파괴되고 해양생태계의 먹이사슬조차 위협 받아 지구환경 전체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즉, 무분별하게 버려진 쓰레기로 인해 바다가 신음하고, 바다숲과 온갖 생물들의 생태환경이 파괴되고 균형이 무너짐으로써 해양생물의 순환구조에 이상현상이 나타나 결국 바다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후에 영향을 줘서 이상기온과 기후변화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이는 곧 육상생태계에서 식물이 광합성으로 흡수하는 그린카본(Green Carbon)이 중요하듯이, 고래나 산호초, 해중림처럼 해양생태계에 저장되는 블루카본(Blue Carbon)의 생성과도 연관성이 있어서 결국 쓰레기는 탄소중립에 직결되는 중요사안이라 할 수 있다.현대 인류는 지구 온난화에 의한 기후위기로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제사회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기 중의 탄소를 줄여야 한다고 합의하며 저탄소·탈탄소·탄소중립 프로그램을 진행시키고 있다. 즉, 인간의 활동으로 배출되는 탄소는 최대한 줄이고, 배출된 탄소는 블루카본이나 그린카본이 흡수하거나 탄소 포집·이용·저장기술(CCUS)로 제거하여 실질적인 탄소 배출량을 ‘0’ 수준으로 낮추는 것을 탄소중립이라 한다. 그래서 각국에서는 탄소 배출 없는 제품유통과 탄소중립 모빌리티, 재생 에너지, 자원순환, 에너지 효율화 건물 등으로 지속가능한 자연 생태계를 구축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이러한 측면에서 해양환경을 지키며 탄소중립의 작은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포스코의 영일만해양지킴이봉사단의 활동은 나름 의미와 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해양환경 보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비치코밍과 플로깅 등의 활동을 매월 펼치면서 캠페인과 의식함양 교육, 체험활동에 솔선수범을 보이고 있어서 참으로 고무적인 일로 여겨진다.

2023-11-15

엄마의 재봉틀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엄마는 예쁜 옷을 잘도 만드셨다. 자잘한 꽃무늬가 있는 무명천을 떠서 종이로 본을 만들어 소매 풍성한 원피스를 입혀서는 이리저리 돌아보라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 살 아래 남동생의 옷도 척척 만들어 입혔다. 마치 사립학교 교복을 닮은 흰색 깃을 단 그 옷을 단정히 입은 동생의 사진이 아직도 있다. 엄마의 손재봉틀은 혼수로 장만해온 거라고 들었다. 방바닥에 앉아 오른손으로는 손잡이를 돌리며 왼손으로 천을 박음질하는 엄마의 솜씨는 어린 내 눈에는 신기였다. 반짇고리에 있는 색색의 천들을 이어 조각보를 만들기도 했던 엄마의 바느질은 그저 우아한 취미였고, 우리들의 옷을 손수 지어 줄 수 있는 기쁨이었다. 그때까지는….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풍비박산되자 엄마의 재봉틀은 생계수단이 되었다. 이웃 누군가의 옷을 지어주기 시작했다. 크고 멋진 기와집에서 옮긴 작은 방 한 칸밖에 없는 초가집에서 엄마는 밤새도록 재봉틀을 돌렸다. 단 하루 치의 먹을 것이라도 나올 곳은 엄마의 재봉틀뿐이었다. 엄마의 솜씨는 입소문을 타고 번졌고, 일감이 많아질수록 엄마의 밤샘일은 늘었다. 그래도 다섯 식구 입에 풀칠하고, 삼 남매 학교 치레는 만만치 않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엄마는 큰맘 먹고 손틀을 발틀로 바꾸었다. 그리고 일터를 방안에서 난전으로 바꿨다. 부끄러움을 떨치고 세상으로 나갔다.매서운 바닷바람, 거친 바닷사람, 그리고 따가운 햇빛에 훤히 노출된 엄마, 그리고 엄마의 재봉틀 덕에 우리는 산골짜기 초가집에서 시내로 이사할 수 있었다. 학교와 좀더 가깝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엄마의 바느질 솜씨는 삯바느질에서 옷 수선으로 바뀌어도 솜씨가 뛰어났던지 주변의 같은 업종의 아주머니들에게서 시샘과 부러움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엄마는 그만큼 더욱 고달팠다. 밤이면 퉁퉁 부은 발을 주무르며 끙끙 앓았다.그때까지 거친 세파를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두 분이었다. 사업 실패 이후 아버지는 포기하셨던 듯 무력해지셨으나 엄마는 강하게 맞섰다. 부잣집 마님의 취미였던 솜씨좋은 바느질을 생계수단으로 삼을 정도로 엄마는 악착같고 독한 가장이 되어 있었다. 온전히 엄마의 뒤에서 무기력했던 아버지는 엄마 대신 집안일을 좀 거드는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엄마의 일터에 나가기 시작하셨다. 처음엔 엄마의 일을 보조하셨던 것 같다. 그러다가 엄마의 일을 배워 엄마의 재봉틀 옆에 아버지의 재봉틀을 하나 더 두고 같이 일을 하셨다. 그렇게 두 분은 참으로 열심히 일하셨다. 덕분에 우리 삼 남매는 중학교부터 큰 도시로 유학할 수 있었다. 주말엔 셋이 번갈아 내려가 두 분의 일을 거들곤 했다. 무서우리만치 뜨거운 두 분의 교육열에 보답하듯 우리도 치열하게 공부해서 보답하려고 애썼다. 엄마의 교육열만큼이나 뜨겁게 일했던 엄마의 낡은 재봉틀은 오빠가 잘 간직하고 있다. 며칠 후 엄마의 기일에 가면 엄마 보듯 만져보고 쓰다듬을 수 있겠다.

2023-11-15

‘동성로 캠퍼스타운’이 대구이미지 바꾸길

심충택 논설위원 첫 유럽여행을 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학도시’였다. 30여 년 전 여행한 독일과 영국의 대학들은 당시 우리나라 대학과는 달리, 캠퍼스가 없이 도시 전체에 단과대학이 흩어져 있어서 이색적이었다.하이델베르크 대학 인문·사회과학부가 있는 독일 하이델베르크시 구시가지의 경우, 도시 전체가 대학 캠퍼스 같았다. 학생들이 수업을 듣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단과대 건물 여기저기를 삼삼오오 다니는 모습이 나에겐 문화적 충격이었다. 우리 일행은 마크 트웨인과 존 웨인이 단골이었다는 하이델베르크 한 식당에 앉아 생맥주를 마시며, 자유분방한 학생들의 모습을 부럽게 바라봤다. 도시 전체가 지성과 낭만이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대구시가 최근 중구 동성로를 유럽의 대학도시와 비슷한 ‘캠퍼스 타운’으로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동성로는 1960년대 이후 40여 년 이상 대구시민의 쇼핑 중심지였다.그러나 2000년대 들어 온라인 상거래 발달로 청년들의 발걸음이 줄어들면서 쇼핑상가에 큰 타격을 줬다. 동성로의 상징이었던 대구백화점도 불황으로 인해 문을 닫았다. 이러한 동성로를 대학캠퍼스로 바꾸겠다는 대구시의 발상은 놀랍다.이 뉴스를 듣고 대구 대학생들이 유럽처럼 강의실과 상가, 광장이 조화를 이룬 동성로를 오가며 자유스럽게 공부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캠퍼스 타운은 경북대, 계명대, 대구대, 대구가톨릭대, 대구한의대 등 대구 지역 12개 대학이 총장협의체를 구성해 대구시와 같이 추진한다. 대통령 직속인 ‘국가건축정책위원회’도 후원기관이다.캠퍼스 타운 사업이 현실화되면 동성로 빈 상가는 대학 공동 기숙사, 통합강의실, 학습·연구공간, 전시·행사·이벤트 공간, 동아리방, 커뮤니티 공간, 직장인 강의실 등으로 활용된다. 빈 상가에 대학 음악동아리가 입주하면 수업 뒤 동아리 활동을 하게 되고 버스킹도 할 수 있다. 외식학과는 빈 건물에 조리실을 만들어 실습실로 활용할 수 있고, 동성로에서 시식회도 열 수 있다. 학생들이 동성로에 거주하면서 공부하고, 창업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다는 것이 대구시 목표다. 건물을 임대하는 비용은 교육부 재원으로 마련할 계획이고. 부족하면 시비도 투입된다.동성로 캠퍼스 타운이 성공적으로 정착하려면,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시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포틀랜드시는 70여 개의 포틀랜드 주립대학 건물이 도심 곳곳에 흩어져 있어 도시 전체가 대학이다.포틀랜드시는 학생·시민이 많이 찾는 건물들 사이에 광장을 만들고, 대중교통(버스와 경전철, 스트리트카)이 모두 광장주변을 지나도록 함으로써 접근성을 최대화했다. 대학에서 진행하는 모든 수업과 연구는 지역 공동체와 함께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시민들에게 인기를 누리는 예술대학은 1층 한쪽 면을 유리로 만들어 지나다니는 시민이 학생들의 공연을 볼 수 있도록 했다.앞으로 동성로 캠퍼스 타운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돼 대구 이미지가 유럽 대학도시나 포틀랜드시처럼 지성과 낭만이 넘치는 젊은도시로 바뀌길 기대한다.

2023-11-14

막말의 뒤끝

우정구 논설위원 스포츠 용어로 잘 쓰이는 트래쉬 토크(Trash Talk)는 상대 선수에 대해 모욕적인 방식으로 대화하는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트래쉬 토크를 우리 말로 직역하자면 ‘쓰레기 토론’ 정도다.운동 선수들이 상대방을 자극하기 위해 언론 인터뷰나 SNS 등에 모욕적이고 비난성 짙은 발언을 쏟아내는 것은 경기를 앞두고 심리전에서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의도가 있는 행위다. 또 시합을 앞두고 상대와 심한 비방성 발언을 주고받음으로써 경기의 흥행을 끌어올리려는 의도도 숨어 있는 것이다.상술의 하나로 노이즈 마케팅이 있다. 상품의 품질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상품을 팔 목적으로 고의적으로 구설수를 만들어 인지도를 높이는 판매 방식이다. 트래쉬 토크든 노이즈 마케팅이든 대중의 이목을 끌거나 돈을 벌기 위해 부정적 이미지도 감수하는 일종의 타깃 마케팅 방식이다.그런 점에서 정치인이 쏟아대는 막말은 목적도 없고 정치적 이익도 없는 허무맹랑한 일이다. “말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지만 천 사람의 귀로 들어간다”는 서양의 격언이 있다. 말을 신중히 하라는 뜻이다.우리나라 속담에도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했다. 동서고금을 통해 말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경구(警句)는 수도 없이 많다. 특히 고위층이나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면 말을 골라가며 하는 지혜부터 먼저 배워야 한다.송영길 민주당 전 대표가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향해 던진 시정잡배 수준의 막말이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사람의 언행을 보면 내일의 나를 본다고 했다. 말 잘못해 역사 뒤안길로 사라진 인물이 어디 한두 사람인가. 5선 관록이 무너져 내린 모습에서 막말의 뒤끝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우정구(논설위원)

2023-11-14

한 번 더 질풍 같은 용기를, 싱어게인!

JTBC 예능 프로그램 ‘싱어게인 3’의 인기가 뜨겁다. 과거에 활동을 했지만 무대에서 멀어져 잊혀진 가수들,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의 주제가를 불러 목소리는 익숙한데 이름과 얼굴은 알려지지 않은 이른바 ‘얼굴 없는 가수’들, 그리고 대중의 주목과 관심이 없는 언더그라운드에서 묵묵히 자기 음악을 해온 무명 뮤지션들이 싱 어게인(sing again), 다시 노래 부를 기회를 얻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신인을 발굴하기 위한 게 아니라 재기를 위한 무대라는 점에서 일종의 패자부활전인 셈이다.화제가 된 참가자들이 있다. 우선 1회에 출연한 참가번호 5번 가수다.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깊고 묵직한 허스키 음색으로 주목을 끌더니 전설적인 블루스 아티스트 B.B.킹을 연상시키는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블루지 기타 연주로 심사위원들을 사로잡았다. 최백호의 ‘부산에 가면’을 자신만의 색채로 완벽하게 소화한 그는 경연 최초 ‘올 어게인’(모든 심사위원의 합격표)을 받으며 2라운드로 진출했다.그의 정체는 실력파 뮤지션 김마스타다. 홍대를 중심으로, 또 전국을 돌며 노래를 부르는 방랑가객이다. 무대에서 보여준 뛰어난 음악성, 가을에 어울리는 짙은 음색도 여운을 남겼지만 무대 전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은 큰 울림을 줬다.“다들 요즘 음악을 너무 목숨을 걸고 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목숨 걸고 안 합니다. 인생을 걸고 하는 거지. 목숨은 하나지만 인생은 기니까.”꿈을 위해, 성공을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하다 실패했을 때, 다시 도전할 의지를 잃은 채 꿈에서 멀어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속적 성공을 못 이루면 인생이 다 끝난 것처럼 절망하는 이들 또한 많다. 그런 세태 가운데 인생을 걸고 온전히 노래 한 곡을 부르는 게 최종 목표라는 김마스타의 말은 아름다운 잠언, “speaking words of wisdom”(비틀즈, ‘Let it be’)으로 들린다.며칠 전 방영된 3회에서는 2030세대의 애국가나 마찬가지인 만화 주제가를 부른 가수가 등장했다. 참가번호 74호. 15년 만에 다시 무대에 서는 것이라고 했다. 몹시 긴장한 그는 호흡도 제대로 못하고 몸을 떨었지만 전주와 함께 첫 소절을 부르는 순간 대한민국 전체를 전율시켰다. 그가 부른 노래는 바로 응원가로 익숙한 ‘질풍가도’. 특히 2030세대는 청소년기와 사회초년생 시절 이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면서 용기와 위로를 얻었다.“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거친 파도에도 굴하지 않게. 드넓은 대지에 다시 새길 희망을 안고 달려갈 거야 너에게. 그래 이런 내 모습 게을러 보이고 우습게도 보일 거야. 하지만 내게 주어진 무거운 운명에 나는 다시 태어나 싸울 거야. 세상에 도전하는 게 외로울지라도 함께해 줄 우정을 믿고 있어. 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15년 만에 다시 잡은 마이크임에도 엄청난 성량과 단단한 고음으로 완벽한 무대를 선보였다. 결과는 올 어게인. 심사위원 선미, 코드쿤스트, 규현, 사회자 이승기 등 ‘질풍가도’와 함께 성장한 세대는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 유튜브에 공개된 방송 영상은 하루만에 370만 조회수가 넘고, 댓글 1만개가 달렸다. 하나 같이 “신나고 힘이 나는 노래인데 왜 눈물이 나는 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누군가에게는 자살하려는 마음을 되돌려준 노래, 또 누군가에게는 실패를 극복하게 해준 노래, 힘겨운 시절에 많은 이들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준 노래가 다시 울려 퍼졌다. 코드쿤스트는 “이 노래로 저희에게 용기를 주셨으니, 이젠 용기를 받으실 차례”라며 74호 가수를 격려했다.유정석. 애니메이션 주제가 외에 별다른 활동을 못한 무명가수다. 만화 방영 후 7년이 지나 노래가 인기를 끌면서 유명해질 수도 있었을 텐데, 식도암에 걸린 누나를 간병하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누나도 세상을 떠나고, 그 자신도 루게릭병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는 중 전신마비와 우울증을 앓다 겨우 회복했다. 그 슬프고 아픈 시절을 지나 15년 만에 “질풍 같은 용기”를 우리에게 외친 그의 무대야말로 ‘싱 어게인’이다. 최종 우승자를 가릴 때까지 경연이 많이 남아 있지만, 그 희망의 노래를 다시 들려준 것만으로도 이 프로그램은 이미 ‘올해의 방송’이다. 오랜 어둠을 딛고 일어나 다시 노래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 질풍 같은 용기 있기를!

2023-11-14

삶의 틈 속에서

수요일 오후 반차를 쓰고 집 근처 카페에 앉아있다. 한참 마무리 지어야 하는 일이 많은 수요일 오후에 왜 한가롭게 이곳에 앉아 있느냐 하면, 오늘따라 유독 하루를 버텨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요즘 들어선 잠을 도통 잘 못자고 있다. 어떤 꿈을 꾸고 일어나는 것도 같은데 일어나면 그 꿈의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기분 나쁜 찝찝함이 남아 있을 뿐. 오후 반차를 쓴 김에 밀린 잠을 자볼까 싶었지만 그러기엔 날씨가 너무 좋기도 하고 햇빛을 좀 쐬어야 할 것도 같아 집 근처 카페에 와 있다. 이 카페는 5년 전부터 자주 찾는 곳으로, 통유리창이 있는 고층 카페에 커피도 맛있어서 꽤 좋아하는 곳이다.수많은 버스,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짧은 주기로 바뀌는 신호등과 흔들리는 나무, 형형색색 커다란 간판들을 내려다보며 나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얼마나 적응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북적이는 대도시의 거리를 동경과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다가도 어느 날은 내가 얼마나 작은 인간인지 지나치게 화려하게 비춰지는 탓에 씁쓸해지기도 했었다. 과거의 일들을 생각하다보니 일순간 유리창에 스무 살 중반의 내 모습이 어른거린다. 일하느라 더러워진 흰티를 두터운 외투 속에 꽁꽁 숨겨 놓고 시집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 줄 씩 읽어 내려갔던 오기의 순간이.그리곤 지금 다시 멍하니 내가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앉아있다는 걸 깨닫고 있다. 벌써 이곳에 자리 잡은 지 5년이 흘러가고 있었고, 20대 중반이던 나는 이제 서른을 앞두고 있다. 서른을 앞둔 지금, 나는 조금 더 성숙해지고 어른스러워졌을까? 생각하다보면 잘 모르겠다. 그저 기차 탑승 시간을 자꾸만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반복적으로 나의 어떤 부분이 변화했는지, 또 어떤 게 변하지 않은 것인지 거듭 생각하며 초조해지고 있는 것이다.지금 카페 테이블 위엔 최지은 시인의 시집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가 놓여 있다. 빛 속에 잠긴 활자들은 슬프고 아름답다. 내가 감히 흉내 낼 수도 없고 들어갈 수 없는 뜨겁고 후덥지근한 세계. 몇 편 읽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딴청을 피우고 만다.어린 날 내가 꿈꾸었던 글쓰기의 열망이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당혹스럽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바뀐 건 어떠한 희열도 바람도 없이 지내고 있다는 것, 두 번째로는 무거운 뒷목과 굽은 등, 자꾸만 앞으로 말리는 어깨 등 못난 몸의 변화가 찾아왔다는 것.최근 5년 전 친하게 지냈던 사람에게 오랜만에 안부를 물었다. 추억을 이야기하는 동안은 잠시 반갑고 기쁘기도 했지만 결국 우리 사이의 큰 공백이 생기며 아주 많은 부분이 변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사이의 변하지 않은 신뢰나 배려, 특유의 말버릇 같은 것에 대해 찾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고, 결국 머쓱하게 웃으며 시간이 참 빠르게 흐른 다는 말로 통화를 끝냈다.다시금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이곳도 알게 모르게 많은 곳이 바뀌어 가고 있음을 발견했다. 지인이 일하던 휴대폰 매장은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으로 바뀌었고, 눈물이 많던 친구와 맥주를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 했던 호프집은 화려한 헬스장이 들어섰다. 조금씩 달라지는 이 풍경이 처음은 흥미롭다가도 과거가 지워지는 것만 같아 쓸쓸해진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앞자리가 바뀌는 나이 때문일까. 오늘은 왠지 잠이 오지 않아 벽에 기대어 멍하니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더니 내게 다가와 잠의 안부를 물어봐주는 사람이 있다. 근래 가장 크게 변화한 건 이렇게 다정하게 물어봐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고, 덕분에 성급한 불안감을 아무렇지 않게 잠잠히 눌러 볼 수 있다는 것이다.별다른 대화 없이 그가 좋아한다는 영화 한 편을 튼다. ‘우리도 사랑일까’의 마지막 장면엔 이러한 대사가 나온다. “Life has a gap in it, it just does. You don‘t go crazy trying to fill it.”(인생에는 빈틈이 있기 마련이야. 그걸 미친 사람처럼 일일이 다 메꿔가면서 살순 없어.) 삶의 권태를 느끼는 주인공 마고에게 언니 제럴딘은 삶은 본질적으로 결핍을 느끼기 마련이고, 허망하고 부족한 부분을 느끼면서도 감내하고 채워가는 게 인생이라는 걸 마고에게 알려 준다.지금 잠시 꿈과 이상, 그리고 열정을 잃어버렸다 한들 인생엔 틈이 있기 마련이니 더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심란해지지 않아도 된다. 삶은 완벽하지 않고 이 또한 작은 해프닝이 될 테니까.

2023-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