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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여야 혁신경쟁, 무엇이 문제인가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총선을 앞둔 정치권의 화두는 또 다시 ‘혁신’이다.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상투적인 구호다. 그 동안 여야가 경쟁적으로 내세웠던 수많은 혁신위원회와 비상대책위원회는 도대체 무엇을 했기에 또 혁신하겠다는 것인가? 아마도 진정성 없는 ‘혁신 쇼’를 반복해왔기 때문일 것이다.권력정치에서 혁신은 혁명보다 어렵다. 마키아벨리(N. Machiav elli)는 “강력한 적과 미온적인 동지, 그것이 바로 혁신이 성공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라고 했다. 혁신에 저항하는 기득권세력은 강력한 반면, 그들의 저항을 돌파해야할 혁신파의 힘은 약하고 그 태도는 소극적이다. 권력은 달콤하지만 혁신에는 희생과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정치혁신이 성공하려면 ‘왜’ 그리고 ‘무엇을’ 혁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고한 인식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 혁신의 출발점은 진정성 있는 반성과 성찰인데, 합리적 비판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반성은 거짓이고 혁신은 위장일 뿐이다. ‘비윤’의 비판을 ‘내부총질’로 매도하는 ‘친윤’, 그리고 ‘비명’의 비판을 ‘수박’으로 폄훼하는 ‘친명’이 바로 혁신의 걸림돌이다.이러한 점에서 혁신에는 성역이 없어야 한다. 여야 혁신의 키(key)는 누가 쥐고 있는가? 권력의 정점에 있는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 야당대표의 사법리스크와 ‘개딸정치’가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 여야의 혁신경쟁을 대통령과 야당대표의 반성·성찰·의지의 경쟁으로 보는 까닭이다. 대통령이나 당대표에게 쓴 소리, 바른 소리를 못하는 정치인들도 문제지만, 혁신을 요구하는 ‘비윤’과 ‘비명’의 고언을 수용하지 못하는 권력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혁신의 또 다른 장애요인은 기득권세력의 인적·제도적 저항이다. 인적 차원에서 볼 때 야당의 김은경 혁신위원회는 당내 주류의 눈치를 보다가 제대로 혁신하지 못했고, 여당의 인요한 혁신위원회 역시 당 지도부·윤핵관·TK중진 등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유명무실하다. 권력자들이 기득권을 내려놓는 자기희생을 감수하지 않는 한 정치혁신은 말장난에 불과하다.제도적 차원에서는 ‘거대 양당’의 기득권 집착이 선거혁신의 최대 걸림돌이다. 양당은 ‘적대적 공생관계’ 속에서 기득권 유지를 위해 야합해왔다. 그 대표적 사례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이다. 지난 총선에서 여야가 꼼수를 쓴 위성정당들이 비판받자, 여당은 퇴행적인 ‘병립형 비례대표제’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있고, 야당은 위성정당 방지를 주장하지만 기득권 상실을 우려하여 선거법 혁신에는 소극적이다. 이러한 양당의 행태는 국민의 다양한 선택권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반민주적인 정치적 야합이다.이처럼 권력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몰염치한 정치인들에게 혁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혁신을 주도해야 할 거대 양당이 ‘이권 카르텔’에 안주함으로써 오히려 혁신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권자인 국민이 선거와 투표를 통해 정치인들의 잘잘못을 심판함으로써 지속적인 혁신을 추동(推動)할 수밖에 없다.

2023-12-04

미세플라스틱의 습격

홍석봉 대구지사장 지름 5mm 이하의 작은 플라스틱 입자인 미세플라스틱은 기존의 플라스틱 쓰레기와 더불어 해양 환경과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 미세 플라스틱은 해양오염뿐만 아니라 우리의 식탁과 건강까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시중에 판매되는 생수와 식음료 전반에서 미세플라스틱이 검출된다. 바다와 강 등 지표수에 이어 지하수까지 미세플라스틱에 오염됐다는 조사결과가 2019년 나왔다.강 하구에 있는 어패류 등 모든 수생 생물이 미세플라스틱에 오염됐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낙동강 하구와 인천·경기 해안은 세계에서 미세플라스틱 농도가 2, 3번째로 높은 곳이라고 한다. 이젠 어패류도 마음놓고 먹기 어려운 상황이다. 실제 사람의 대변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발견돼 인체 유입의 공포가 확산되기도 했다. 먹을거리에 대한 불안감이 더욱 커지게 만들었다.독도와 울릉도에 서식하는 괭이갈매기 깃털에서도 미세플라스틱이 처음 검출됐다고 한다. 경희대 한국조류연구소 연구진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지난해 독도와 울릉도에서 포획한 괭이갈매기 17마리의 깃털에서 미세플라스틱이 발견됐다. 깃털에 붙은 미세플라스틱은 유기오염물질과 독성화학물질을 흡착해 괭이갈매기의 방수성과 보온성을 해쳐 갈매기의 생존력을 떨어트릴 수 있다고 한다. 독도와 울릉도는 세계적으로 가장 오염된 해류로 평가받는 구로시오 해류의 영향을 받는다.플라스틱 폐기물은 1940년대 이래 63억t에 이른다. 이중 79%가 매립되고 나머지는 자연환경에 배출된 것으로 추산된다. 잘 분해되지 않는 플라스틱은 매립된 것은 매립된 대로 문제가 되고, 버려진 것은 버려진 대로 문제다.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 플라스틱이 되레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2-04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을 넘어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코다(CODA·Children of Deaf Adults)는 농인(聾人·청각장애인)의 자녀를 일컫는 말이다.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 부모에게서 자란 코다는 자연스럽게 수어와 청어(음성 언어)를 함께 익히게 된다. 이때 청어가 제1언어가 되고 수어는 외국어처럼 제2언어가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재일조선인의 모어가 조선어이듯, 농문화에 안겨 자라난 코다의 제1언어이자 모어는 수어다.포스텍 소통과 공론 연구소는 지난 12월 1일, 농인 부모님의 이야기와 자신의 코다 정체성을 다큐멘터리 영화 ‘반짝이는 박수소리’(2015)에 담아낸 이길보라 감독을 초청해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청해 들었다. 이길보라 감독은 국가와 사회가 장애와 장애인을 정상성의 기준으로 구별 짓고 차별하고 격리해 온 역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인식적 전환과 실천의 방법들을 들려주었다.이길보라 감독은 청문화(음성 문화)와는 또 다른 ‘농문화’라는 고유의 문화를 지닌 존재로서의 농인, 그리고 농문화와 청문화 양쪽을 오가며 잇는 존재로서의 코다를 부각시켰다. 수어는 소리와 청각에 기반한 청어와는 달리 시각에 기반한 새로운 언어이므로, 두 언어를 모두 사용하는 코다는 세계를 두 배로 넓고 다채롭게 경험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농인이 ‘결핍된 존재’로서의 청각장애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하고 행복한 존재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장애에 대한 나의 편협한 인식이 완전히 뒤바뀌는 경험이었다.솔직히 말해 아직도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내게는 장애를 비정상으로 구별 짓지 않는 것과 장애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철폐해 나가기 위한 싸움이 목적은 같을지언정 방법론적으로 일치될 수 없는 한 쌍의 대척점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사회에는 장애에 대한 차별들이 분명히 존재하며, 차별이 존재하는 곳에는 변화와 투쟁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장애인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 즉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그 착각 때문에 공감을 선행으로 되돌려주는 ‘착한 장애인’을 폭력적으로 요구하게 되거나, 그토록 공감 능력이 넘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도취에 그칠 수도 있다. 필요한 것은 ‘공감’이 아니라 장애인 또한 그저 장애를 가진 인간일 뿐임을 인식하고, 인간이 누려야 마땅한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고 있는지를 세심하게 살피는 일이다.예컨대, 우리가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생각하는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이동권)와 원하는 곳에서 살 권리(거주·이동의 권리)는 장애인을 대할 때 너무 쉽게 무시된다. 휠체어가 출입할 수 없는 공간들은 장애인의 권리를 넘어 인간의 이동권을 제약한다. 격리 시설에 수용된 장애인들은 거주·이동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당하고 있는 셈이다.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과 시혜적 관점을 넘어, 장애와 장애인 인권을 보편적 인권의 차원에서 사고하고 보장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2023-12-04

인공지능을 어떻게 하나

김규인 수필가 세계는 지금 인공지능 열풍이 분다. 어린아이에서 전문가까지 직간접적으로 매일 인공지능을 만난다. 기업에서는 상품의 개발과 매일 쏟아지는 자료 분석과 판단에 이용하고 인공지능 관련 주가는 날마다 오르고 인터넷에서는 기사가 빠지는 날이 없다. 심지어 인공지능으로 만들어진 가짜 뉴스까지 사람들의 이목을 모은다.인공지능은 산업의 판도를 바꾸는 큰 흐름임을 기업체는 안다. 그러기에 수많은 인력을 투입하여 관련 기술을 개발하고 제품에 적용하느라 바쁘다. 기업의 명운이 달려있기에 기술의 발전은 하루가 다르다. 개발하는 회사는 주로 자연어처리, 딥러닝, 음성인식, 영상인식 등의 기술을 연구하고 이를 활용하는 기업은 빅데이터, 게임, 우주개발, 콘텐츠, 로봇, 보안, 클라우드, 건강 관리 등에 활용한다.인공지능 개발회사 지코어는 세계의 인공지능 개발 및 연구자들을 위한 기회를 만들고 최첨단 인프라를 용이하게 제공하여 인공지능 개발 혁신을 촉진하려고 ‘생성형 AI 클러스터’를 개발한다. 지코어의 인프라로 인해 대기업뿐만 아니라 이제 막 시작하는 회사와 개인 기업가에게도 도움을 준다.인공지능의 개발이 마냥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한국은행은 고소득 전문직인 의사, 한의사, 회계사, 변호사 등이 앞으로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 가능성이 높은 직업이라고 분석했다. 반면에 대체 가능성이 낮은 직업으로 종교 관련 종사자, 운송 서비스 종사자, 대학교수 및 강사, 학교 교사, 음식 관련 단순 종사자, 식음료 서비스 종사자 등이다.오픈AI가 샘 올트먼을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해임한 것은 인공지능의 개발 속도를 조절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챗GPT의 아버지’라 불리며 개발에 앞장선 샘 올트먼은 빨리 개발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열망에 다시 복귀했다. 돈이 되는 인공지능 사업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AI 대부라 불리는 제프리 힌턴은 스스로 구글을 퇴사했다. 퇴사하며 수십 년간 수행한 인공지능 연구를 후회하고, 그 위험성이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고 걱정한다. 그 위험성을 자유롭게 알리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그의 말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이미 기본 데이터까지 조작하며 가짜 뉴스를 생산하여 진짜와 가짜 뉴스를 구별하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사람들은 인공지능과의 소통을 더 원활히 하기 위해 감정을 이식하는 문제를 말한다. 인공지능을 더 잘 부려 먹기 위해 감정을 심어주자는 말이 이제는 그렇게 반갑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왜 그럴까. 어쩌면 눈물을 흘리며 가짜를 말하는 인공지능에 모든 지구인이 속을까 봐 겁이 나는 것은 아닐까.이것은 모두 사람들의 문제다.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편해지려 하고 더, 더, 더를 외치며 욕심을 채우려는 것 때문은 아닌지. 욕심으로 엄청난 힘을 가진 괴물을 키우는 일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사람들의 지나친 욕심은 인공지능 로봇이 언제든지 사람을 향해 달려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을 위한 일에만 활용한다는 대전제가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언제나 인간은 존엄하기 때문이다.

2023-12-04

최적의 은거지, 묘골 마을과 육신사

대구에서 북서쪽 끝자락에는 순천박씨의 종택과 육신사·도곡재·태고정 등 유교문화재를 품은 묘골이라 불리는 전통 마을이 있다. 이곳은 길게 구불구불 이어진 좁은 도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야 마을 입구가 겨우 보이는 곳으로, 밖에서는 마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바람을 막기에 적당히 높은 산자락이 마을을 둥글게 감싸고 그 옴폭하게 들어간 땅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묘골 마을은 남동쪽의 입구만이 열려있어 은거지로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묘골 마을은 사육신 중 유일하게 혈육을 남긴 박팽년(1417~1456)의 후손들이 은거하여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박팽년은 단종 복위를 꾀해 세조에 의해 멸문당한 집현전 출신 학자다. 1455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경회루에 뛰어들어 항거했으며,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공문서에 ‘신(臣)’이란 글자를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단종에 대한 신념을 지켰다. 세조는 지조를 잃지 않은 박팽년의 정신을 높이 보고, 그를 형조참판으로 곁에 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박팽년은 1456년 6월, 세조를 주살하려 성삼문·하위지·유응부·이개·김질·유성원 등과 같이 역모를 모의한다. 역모가 김질의 배신으로 새어 나가면서 사육신들은 긴급 체포되었다. 역모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능지처사되고, 삼대가 극형을 받았으며, 그들의 부인들은 공신들의 노비나 관비가 되었다. 박팽년의 가문도 멸문지화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다행히도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 성주이씨는 친정아버지 이철근이 현감으로 있는 인근의 관비로 올 수 있었다. 당시 성주이씨는 박순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이에 세조는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관비로 삼으라”고 어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해 늦가을 아들을 낳았으나 다행히 여종도 딸을 낳았고, 둘은 비밀리에 자식을 바꿔 키웠다. 그가 천행으로 태어난 유복자, 박비(朴婢)였다. 성종 3년, 이모부 이극균(1437~1504)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묘골 마을에 왔다가 박비의 사연을 알게 된다. 이극균의 권유로 박비는 자수하게 되고, 성종은 사육신 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옥구슬’이란 뜻을 담은 이름 ‘일산(壹珊)’을 지어주며, 정3품 당하관 벼슬을 내려준다. 이렇게 박팽년은 사육신 중에서 유일하게 혈통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박일산은 후손이 없었던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99칸의 종택을 짓고 현재의 묘골 마을에 정착하여 순천박씨 충정공파의 입향조가 된다. 이때가 성종 10년경(1479년)이다. 이후 성종 때 정계에 형성된 사림들이 사육신의 신원을 회복시키려 노력했고, 숙종 17년(1691년)에는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의 관직이 모두 회복된다. 박팽년은 영조 때 자헌대부의 품계를 받고, 정조 17년(1791년)에 어정배식록에 오르면서 충신의 명문가로 알려진다. 달성의 낙빈서원에서 배향되다가 1982년 육신사가 건립되면서 숭정사에서 사육신과 함께 배향된다.묘골 마을에는 순천박씨의 종택은 물론 사육신을 모시는 육신사와 여러 전통 가옥이 남아 전통 마을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육신사는 단종복위운동으로 멸문된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처음에는 박팽년만 배향했는데, 그의 제삿날 후손 박계창이 사당 앞에서 서성이는 6명 어른들의 꿈을 꾼 후 사육신 모두를 제사 지냈다고 한다. 이후 낙빈사를 세워 사육신을 모셔 오다 고종 3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낙빈서원과 함께 철폐되었다.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다시 봉안하고, 충효 위인들의 유적 정화사업(1974~5)으로 육신사를 건축하게 되었다. 1981년 육신사는 관리사·외삼문·삼충각·숭절당 등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도곡재는 정조 2년(1778)에 박문현이 살림집으로 세웠으나 정조 24년(1800)경에 박종우의 공부방으로 사용되면서 도곡재라 불렸다. 삼가헌은 박광석이 1783년 이주해 와서 초가를 지은 곳이다. 삼가(三可)란 중용의 9장에 나오는 선비가 갖춰야 할 덕목을 말하는데,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수 있고, 날카로운 칼날을 밟을 수 있고, 벼슬과 녹봉을 사양할 수 있다’는 뜻이다. 대문칸채·사랑채·안채·연못·별당이 소속되어 있다. 태고정은 순천박씨 종택이 임진왜란 때 불탄 후 재건되면서 세워진 정자이다. 대청쪽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방이 있는 부분은 확장된 박공지붕이다. 방 앞에는 태고정(太古亭), 대청 앞에는 일시루(一是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달성군 하빈면 묘골 마을은 사육신 중에서 유일하게 후대가 이어진 박팽년의 후손 박일산이 터를 잡은 곳이다. 노비의 신분으로 숨어 살다 순천박씨의 입향조가 되기까지 최적의 은거지가 되었던 이곳은 지금도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찾아가야 볼 수 있는 숨겨진 마을이다. 박팽년과 그의 후손을 찾아가는 길이 그들의 지난했던 이야기만큼 구불구불 산세를 따라 길게도 이어져 있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3-12-04

우리 삶의 영화같은 순간들

우리는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영화같은 순간을 만났던가. 우리의 삶은 그 영화같은 순간들이 편집된 기억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기쁨과 슬픔, 감동과 후회, 만남과 이별의 순간들이 이어져 있다. 오랜 세월 영화를 만들어 왔던 감독은 그의 삶에 있었던 영화같은 순간들을 모티프로 작품들을 만든다. 물론 선택된 기억만을 보여주고 필름 위에서 윤색되어 관객을 만난다.반세기 동안 영화를 만들어 온 그의 작품을 몇 편쯤은 보았을 것이다.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이야기 속에서 기쁨과 놀라움, 슬픔과 감탄을 연발해 왔다. 우리는 영화감독이 만들어 놓은 이야기를 듣는다. 그가 구축한 세계 속에서 전달하고자하는 이미지를 따라가며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듣는다. 그 이야기 속에 식인 상어가 있었고, 재탄생된 공룡 시대가 있었고, 모험을 떠나는 소년과 외계인 친구가 있었다. 때론 가슴 아픈 역사의 현실이 펼쳐지기도 했다.이제 감독은 그가 우리들에게 하지 못했던 그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주저했었고, 감추고 싶었던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줄 것인가를 ‘영화 같은 순간’을 편집해 한 편의 영화로 만들었다.6살의 어린 새미는 생애 처음 영화관에 간다.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거대한 스크린 속에서 펼쳐지는 압도적인 장면들에 매료된다. 이렇게 새미는 영화라는 매체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감독의 자전적 영화인 만큼 당연히 그가 어떻게 영화와 사랑에 빠졌으며 얼마나 영화를 사랑하는지를 보여준다. 영화같았던 순간은 기쁨과 환희의 순간만은 아니었다. 쓰리고 아픈, 마음 속에 깊이 묻어 두었던 지극히 개인적인 가족사까지 드러내야하는 순간이 온다.잘라 낼 것인가 이어붙일 것인가. 가족의 캠핑 장면을 찍은 필름을 편집하던 중 새미는 우연히 필름에 포착된 가족의 비밀을 알게된다. 그 장면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사실을 어떻게 감당해야할 것인가의 충격에 휩싸인다. 이 장면을 해소하는 방식은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이용해서 보여주고 있다.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촬영에서부터 편집을 거쳐 완성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는 선택이 반복된다. 그것이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작업이었다면 감독의 선택에 의해 결정될 문제다. 하지만 도저히 드러낼 수 없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었다면 잘라 낸다고 해서 잊혀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77세의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전적 영화인 ‘파벨만스’에서 감추어 두었던 기억, 혹은 잘라 내었던 필름과도 같은 기억을 편집해 넣는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었던 영화에 대한 사랑의 과정을 담는다. 역사적 사실과 환상과 상상의 외부 세계를 만들어왔던 감독이 오늘날의 그를 만들었던 은밀했던 과정을 담담히 이야기한다.‘파벨만스’를 통해 스필버그가 만들어 왔던 영화가 어떻게 개인적인 삶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가 10대 시절에 겪었던 부모의 이혼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들이 그가 만들어 왔던 영화 속의 상황들을 더욱 더 풍성하게 만든다.인생의 영화같은 순간을 영화적으로 풀어낸 영화다. 잘라 내 감추어두었던 필름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감추어 두었던 필름을 이어붙여 보았을 때, 우리는 그가 만들었던 수많은 영화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목격한다. 처음 시작은 영화 만들기의 즐거움이었지만 이내 필름이 포착한 진실과 그 진실을 마주하는 고통과 용기가 필요함을 알게 된다.영화가 감독의 의도대로 편집되어 만들어진 작품일 때, 관객은 그의 의도에 따라 감정의 리듬을 갖는다. 일흔 중반이 넘은 감독이 인생의 내밀한 이야기를 펼쳐낼 때 잊히지 않는 아픔이 어떻게 “잊히지 않는 꿈”으로 이어지는가를 보여준다. 상처마저 영사기의 아름다운 빛으로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순간을 맛보는 영화다./(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3-12-04

예측 실패가 아니라 리더십 실패다

김진국 고문 2030 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 실패가 충격을 주었다. 여러 나라가 경쟁하는 일을 놓치는 경우야 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충격’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는 것은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필자는 엑스포를 유치하지 못한 것은 별로 실망하지 않는다. 애초에 유치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기대를 과도하게 부풀린, 그래서 엉뚱한 예측과 외교 활동에 헛심을 쏟은 정부의 행태가 더 걱정이다. 외교적 발언이 횡행하는 국제무대에서 정확한 예측을 하는 건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이번 유치 활동은 역대급 헛발질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정부는 표결 결과가 나오는 순간까지도 박빙이라고 주장했다. 이 바람에 윤석열 대통령과 한덕수 국무총리까지 열심히 득표 활동을 했다. 소중한 자산인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도 나섰다. 한국이 자랑할만한 문화예술인도 총동원했다. 지휘자 정명훈과 성악가 조수미, 그리고 아이돌 그룹들이 줄줄이 응원했다. 넷플릭스에서 세계적 반응을 받은 오징어게임도 이용했다. 그야말로 거국적인 캠페인을 벌인 결과는 119 대 29였다.많은 민간 기업인들은 이미 판세를 뒤집기 어렵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동분서주할 때도 외교력을 낭비한다고 우려했다. 너무 힘을 쏟아 실패했을 때의 낙담을 어떻게 감당하느냐고 걱정했다. 그런데도 정부 내에서는 1차 투표에서 70표 정도를 얻는다고 예측했다. 이에 따라 ‘2차 투표 전략’을 펼쳤다. 1차 투표에서 우리를 안 찍어도 2차에서는 찍어달라는 메시지를 전파했다. 그러나 예측과 전혀 다른 결과였다.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자본으로 국제행사를 오염시켰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미 그런 환경을 알고 도전한 경쟁이다. 그런데도 막판 뒤집기에 의욕을 보인 정부다. 이제 와 ‘석유자본’을 비난하는 건 책임회피밖에 안 된다. 일부 국민의힘 의원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문재인 정부 탓”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1년 반이 훨씬 넘었다. 아직도 전 정부 탓을 하는 건 염치가 없다.올해 초에는 정부도 유치 전망이 밝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도 그냥 포기할 수는 없으니 최선을 다하자는 정도였다고 한다. 윤 대통령이 이를 국정과제로 선정하고 힘을 쏟은 거야 칭찬할 대목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이 국제박람회기구 회원 182개국 정상을 대부분 만날 정도로 유치 노력을 기울이면서 정부 내 전망도 바뀌었다. ‘초접전’, ‘역전’이란 말이 나오고, 2차 투표 전략도 언론에 거론되기 시작했다.유치교섭 일선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경제인들의 예측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이 확보한 표가 훨씬 부족하다고 부정적인 보고를 올렸다. 그러자 “왜 사기를 꺾는 보고를 하느냐”고 질책했다고 한다. 그러니 “2차 투표에서는 한국을 지지하겠다”라는 외교적 발언을 모두 한국 지지 내지 중도로 분류하면서 예측이 한참 어긋났다.엑스포는 2030년에만 열리는 게 아니다.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우리만 이기려 할 수는 없다. 엑스포를 못 연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도전하면 된다. 문제는 정부 내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 드러난 오류다. 예측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현장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오판했다면 큰 문제다. 엑스포만이 아니라 다른 외교 문제, 다른 국정 현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윤 대통령은 예측이 빗나간 데 대해 “전부 저의 부족”이라고 말했다. 사실 엑스포는 다시 도전하면 된다. 엑스포 유치를 위해 기울인 노력이 어떤 형태로 건 우리 자산이 되어 있을 것이다. 되돌아보며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은 국정 운영 흐름이다.윗사람의 눈치를 보며 보고서를 왜곡하는 관리자는 위험하다. 그런 관리자는 쓰는 것도, 자신의 기대와 판단을 과도하게 앞세워 바른말을 못 하게 부담을 주는 리더십도 곤란하다. 이 기회에 그런 부분을 반성하고 바로 잡는다면 엑스포를 유치한 것보다 더 큰 소득일 수 있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12-03

행복한 혁신

엄주선 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혁신활동을 하면서 행복할 수 있을까? 혁신(革新)을 단순히 단어의 뜻만으로 해석하면 가죽을 벗겨 새롭게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매우 힘들고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필자에게는 제철소 혁신활동 도입 초기 사외 유명한 강사 분들이 마음가짐 교육을 할 때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어 더욱 그렇다.70년을 사는 ‘솔개의 우화’를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보통 솔개의 수명은 40년 정도이지만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벼랑 위에 둥지를 틀고 부리를 쪼아 새로운 부리가 돋게 하고, 발톱과 깃털도 모두 뽑아 새롭게 함으로써 30년을 더 산다는 내용을 전하면서 혁신을 매우 결연한 의지로 사력을 다해야 하는 힘든 활동으로 인식 시켰기 때문이다.지금은 기술의 발달로 모든 것이 자동화 지능화 스마트화되면서 일과 생활의 밸런스가 요구되고 개인의 행복을 더 중요시하는 것이 사회적 추세이다. 이에 맞추어 혁신도 어렵고 힘들다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개인의 삶까지도 변화를 유발하는 즐겁고 행복한 활동으로 바뀌어야 할 때이다.행복은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사람은 어떤 사실이 맞는지 틀리는지 판단하는 지적 능력과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 할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행복은 개인이 스스로 평가하는 것으로 자신 안에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느끼는 정도가 다른 매우 주관적인 것이다.행복은 3단계가 있다고 한다. 1단계는 육체가 느끼는 감정으로 기쁨이나 즐거움 등 기분이 좋은 상태이다. 2단계는 살면서 만족하는 것으로 즐거움과 고통을 비교해 보고 장기적으로 삶이 더 만족스럽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이는 전체적인 상태에 대해 종합적인 판단과 다른 가능성과 비교하는 보다 복잡한 인식 과정을 포함한다. 3단계는 감정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잠재력을 실현하는 삶으로 도덕적인 것과 이데올로기를 포함하고 있다.행복한 혁신활동 1단계는 활동한 결과에 대하여 바로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는 것으로 청소 정리 정돈과 같은 하기 쉬운 활동을 말하며 결과에 대해서는 격려와 칭찬을 통해 행복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2단계는 장기적으로 만족을 느끼는 것으로 개인의 발전과 성장이 보이도록 하는 활동 방법과 제도의 마련이다. 활동을 하면 할수록 업무능력이나 개선 역량이 향상된다고 느끼며 진급이나 승진이 되는 체계가 필요하다. 3단계는 본인 스스로 일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잠재력을 발휘하여 개선을 통해 삶의 태도가 바뀌는 단계이다.많은 회사가 혁신의 1단계인 단기적인 변화를 통해 분위기를 만들고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데 까지는 성공하며 일시적으로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가 식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는 2단계인 직원이 장기적인 만족을 추구할 수 있는 제도나 체계가 부족하여 지속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개선을 통한 행복 3단계인 진정한 일의 의미를 알고 삶을 살아가는 태도까지 변화를 유발할 수 있도록 혁신 활동도 시대에 맞게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2023-12-03

대통령과 평어를 쓴다면

유영희 작가 아이들이 분가하기 전 나를 부르는 호칭이 ‘용희야’였다. 이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 놀라지만, 그래도 그 호칭 덕분에 지금까지 아이들과 친하게 잘 지내는 것 같다. 갑자기 이 기억이 소환된 이유는 경희대학교 김진해 교수 때문이다. 김 교수는 강의 시간에 교수와 학생이 서로에게 평어를 쓰면서 수업을 한다고 한다. 2022년 2학기부터 평어 수업을 했다고 하니 만 1년이 지난 셈이다. 2015년부터 평어 수업을 해온 고등학교의 이윤승 수학 선생님도 있다.이런 시도는 교수에게도 낯선 경험일 것이다. 대학에서는 교수도 학생에게 반말하지 않는데다가, 다수를 대상으로 강의할 때는 더더욱 존댓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김진해 교수는 ‘반말’ 대신 평어라는 표현을 써서 수평적 관계 형성을 추구한다는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반말은 ‘야’, ‘너’ 같은 하대의 태도를 띠는 데 비해, 평어는 상대방과 수평을 강조한다. 그래서인지 김 교수는 자기를 소개할 때 경희대학교에서 가르친다고 하지 않고 공부한다고 말한다. 교수가 기대한 대로, 학생들의 반응도 좋다. 질문도 편하게 하게 되었고, 문자나 메일도 존댓말로 할 때보다 마음 가볍게 쓰게 되었다고 한다.그런데 뜻밖에 김 교수는 이 평어 수업의 중요한 의의는 교수와 학생간의 평어보다 학생들 사이의 평어 사용이라고 강조한다. 학생들이 선후배 사이에 존댓말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 요즘에는 같은 학년 같은 나이라도 존댓말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이 존댓말은 정말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라기보다는 상대와 거리를 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많아서 친근감 형성에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지나치게 경직된 분위기를 만들어 원활한 의사소통을 가로막는다.진작부터 평어를 쓰는 기업도 있다. 유명 출판사의 한 팀에서도 2년 전부터 평어를 쓰고 있다고 하고, 일부 스타트업에서도 하는 모양이다. 어느 회사에서는 평어는 쓰지 않지만, 직급 대신 영어 이름을 지어 부르기도 한다. 이런 시도는 모두 존댓말의 위계를 무너뜨려서 소통을 넓히려는 몸짓이다.한국어의 존댓말이 극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대한항공 비행기 추락사고이다. 1997년 대항항공 801편 항공기가 괌의 섬에서 추락해서 253명의 탑승객 중 228명이 사망했는데, 이 비행기 사고의 결정적인 원인이 부기장이 위계에 눌려 기장에게 제대로 할 말을 못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이 난 것이다. 그 후 영입된 그린버그 부사장은 조종실에서 영어만 사용하게 했고, 그 결과 대한항공이 안전한 항공사로 거듭났다고 하니, 말투와 소통의 상관관계가 얼마나 밀접한지 알 수 있다.그렇다면 학교에서만 평어를 쓸 것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시도해보면 어떨까? 며칠 전, 국회를 통과한 노란봉투법과 방송3법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여 여야 간 대치 국면이 계속되고 있다. 대통령과 평어로 대화한다면 혹시 소통의 물꼬를 틀 수 있을까? 이런 기대가 어처구니없기는 하지만, 한치 앞이 안 보이니 이런 터무니없는 상상이나 해본다.

2023-12-03

국립대 교수 봉급에 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 얼마 전에 유쾌하기도 하고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 내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이 ‘변리사(辨理士) 시험’에 합격했다는 글을 보내왔다. 참 잘 됐구나, 생각하면서 학생에게 답신을 보냈다. 12월 초부터 수업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 학생의 졸업을 막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이 골자다. 더욱이 1년에 고작 200명 선발하는 어려운 시험에 붙었다는 말에 나 역시 힘이 솟고 기분도 좋아지는 것이다. ‘경북대 파이팅!’ 하고 속삭인다.나는 그에게 변리사와 변리사 시험에 관해 10분 정도 후배들에게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백면서생(白面書生)인 나도 변리사가 어떤 직종인지 알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는 A4용지에 발표 자료를 빼곡하게 준비해왔다. 거기서 느낀바 가운데 한 가지 사실을 이 글에서 독자 제현께 전하고 싶다. 돈 얘기라서 유쾌하진 않지만, 그래도 나라를 생각하는 애국 독자들은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는다.변리사 초임 연봉은 6천500만원에서 7천만원 사이라 한다. 해마다 1천만원 정도 연봉이 오르기 때문에 몇 년 안에 억대 연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요즘 적잖은 청춘들의 욕망이 돈에 쏠려 있는 형편이어서 변리사 초봉 자료는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러다 문득 경북대 신임 교수들의 연봉이 떠올라 의기소침해지고 말았다. 독자 여러분은 국립대 교수 초봉이 얼마나 되는지 아시는지 모르겠다.주지하듯이 교수가 되려면 적어도 20년 가까이 공부해야 한다. 외국 어문학이나 철학 혹은 역사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해당 국가에 유학을 다녀와야 하는 것은 불문율(不文律)이다. 당연히 유학에 들어가는 비용은 거의 자부담이다. 유학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고 시간강사를 거쳐서 마침내 전임 자리를 얻기까지 몇 년 시간이 다시 흐른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경제 형편이 어려운 학생은 처음부터 교수직을 아예 포기하는 실정이다.40대 초중반에 교수가 되는 사람도 있지만, 50이 넘어서 교수로 초빙되는 경우도 심심찮다. 문제는 그들이 받는 경제적 처우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는 사실이다. 경력이 많지 않고, 군에도 다녀오지 않은 여교수나 면제를 받은 교수 초봉은 연 4천에서 5천 사이가 대다수다. 실수령액이 월 350만 원 안팎이라는 얘기다. 이런 정도의 봉급을 받고 무리 없이 가정을 꾸리고, 연구와 강의, 사회봉사를 할 수 있는 교수는 많지 않다.교수와 교수직에 대한 사회적 신뢰와 책임 의식은 날로 강조되고 있지만, 실질적인 처우개선은 이뤄지지 않은 편이다. 31년 전인 1992년 도이칠란트의 중견 인문학 교수가 월봉 450만원을 받을 때, 나는 100만원이 되지 않는 봉급을 받았다. 당시 도이칠란트의 국민소득은 오늘날 대한민국보다 적었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의 장래를 짊어진 청년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교수들에게 최고의 경제적 대우와 사회적 지위를 보장했다. 물론 지금도 그러하다.모든 것을 미국 표준으로 만들어가고 싶은 게 우리나라지만, 선진국으로 제2의 도약을 꿈꾸려면, 이제라도 국립대 교수들의 경제적인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고 믿는다.

2023-12-03

아직도 먼 100세 시대

우정구 논설위원 만60세가 되면 환갑이라 부르는데 60년만에 갑(甲)자가 새로 돌아왔다는 의미로 회갑(回甲)이라고도 한다. 한자 문화권에 속한 우리나라는 나이를 나타내는 한자어들이 많다.77세를 희수(喜壽)라 부르고 88세는 미수(米壽), 99세는 백수(白壽)라 한다. 여기 백수는 100세의 백수(百壽)와 발음은 같으나 한자 중 일(一)자 한획이 빠진 동음이어다. 천수(天壽)는 타고난 수명이라는 뜻으로 120세를 일컫는 말이다.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100세를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과거보다 백수를 누리는 사람이 많아진 것은 또한 사실이다. 10년 전보다 배 이상 늘어 전국적으로 100세 이상 장수 노인은 2만명을 훨씬 넘는다.미국 외교계의 거목이자 국제 외교의 전설로 불리는 헨리 키신저가 100세를 일기로 지난달 말 사망했다. 그는 100세의 나이에도 중국을 방문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1920년생인데도 아직도 많은 강연과 글쓰기 등으로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통계청이 지난해 기준으로 생명표를 발표했다. 현재의 연령별 사망 수준이 유지된다면 각 연령대 사람들이 향후 몇 세까지 살 수 있는지를 추정한 통계다. 2022년 출생한 아이의 기대 수명이 82.7년으로 조사돼 1년 전보다 0.9년이 감소했다. 코로나19로 사망자가 많이 늘어난 탓으로 풀이했다.이 통계에 따르면 100세까지 살아남을 생존률은 남자가 0.7%, 여자는 3.1%로 밝혀졌다.100세 시대라 하지만 100세를 기준으로 보면 아직은 낮은 생존률에 머물고 있다. 모두가 소망하는 100세 시대는 언제쯤 문이 활짝 열릴까./우정구(논설위원)

2023-12-03

대통령의 즉흥적 리더십은 위험하다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의 리더십의 행태는 미치는 영향이 크다. 지난 대선에서 이 나라 유권자들은 기성 정치인을 제치고 검찰총장 출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정치 경험이 없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택한 것은 때묻은 기성 정치인에 대한 강한 불신 때문이다. ‘공정과 상식’을 앞세운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것은 신선한 정치에 대한 갈망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년이면 집권 3년차에 접어드는 대통령의 지지도는 여전히 30%대 중반을 맴돌고 있다. 역대 대통령의 임기 초반 지지율에 훨씬 미치지 못한 결과이다. 여기에는 집권 여당의 총체적 실정에도 책임이 크지만 대통령의 리더십도 크게 작용한 듯하다. 윤 대통령의 리더십에서 솔직 담백함, 과감한 추진력 등은 긍정적 지지요인이 된다. 그러나 대통령의 즉흥적 리더십, 감정적 리더십은 정치적 갈등과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 대통령의 비합리적 리더십은 정치적 신뢰 상실로 이어지고 지지율 하락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지난 강서 보궐선거에서 집권 여당의 처절한 패배는 대통령의 이미지에도 상당한 손상을 입혔다. 그 보궐 선거의 원인을 제공한 김태우 후보를 사면 공천한 것이 선거의 가장 큰 패인이다. 공천 과정에서도 당내 일부에서 제기된 후보 교체론이 무시되었고 대통령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지난 문재인 정권에 대한 심판이라는 감정적인 요소가 작동한 결과이다. 후보 공천 과정에서 당기구의 공적인 심사과정은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았다. 검찰 공무원 출신 김태우 후보 공천은 전 정권에 대한 응징 프레임 하에서 속전속결로 확정되었다.그 강서 보선의 참패는 다행히 집권 여당과 대통령의 국정 기조 변화의 계기를 마련했지만 그 성공 여부는 미지수이다. 강서 선거의 참패는 대통령의 리더십에도 상처를 남겼다. 선거나 인사에서 철저히 검증된 인물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년총선에서도 당 공천 기구가 아닌 용산의 요구가 우선된다면 선거의 결과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이번 부산 엑스포 유치 과정에서 대통령의 동분서주하는 모습은 두드러지게 부각되었다. 외교에서 대통령의 영업사원 1호 모습은 잘 보여주었지만 결과는 참패로 끝났다.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엑스포 유치 실패를 자신의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솔직히 사과하였다. 취임 후 공식적인 대국민 사과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보도가 잇따랐다. 외교당국은 이번 선정 투표에 앞서 한국이 사우디를 박빙으로 추격하다 결선에서 뒤집을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대통령이 경제 단체장을 대동하고 파리 현장에서 연일 외교 교섭을 하였지만 그 결과는 117대 29의 스코어로 참패하고 말았다. 대통령의 판단을 흐리게 하여 현장 출장외교를 유도한 외교 부서는 의당 책임을 져야 한다. 정확한 외교 정보 부재는 대통령의 즉흥적인 현장 외교교섭으로 연결되었다. 이를 조정 통제하지 못한 용산의 정책기획실도 책임을 면피하기는 어렵다. 그간 내치보다 외교에서 획득한 대통령의 지지도는 이번 실수로 다시 흔들릴 수밖에 없다.이밖에도 대통령의 리더십이 즉흥적이라는 평가는 여러 곳에서 노출되었다. 대통령 선거 과정의 이준석 당 대표와의 갈등은 당선 후의 이준석의 징계 문제로 연결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준석 전 대표에 대한 대통령의 ‘xxx’라는 감정적인 발언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사실 대통령과의 개인적 친분표시로 사용된 ‘윤핵관’이라는 용어도 대통령의 긍정적 이미지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통령의 언론관도 즉흥적이라는 비판이 따랐다. 대통령의 취임 초기 대통령실 앞의 아침 도어 스테핑은 대통령의 신선하고 솔직한 한 이미지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도어 스테핑 폐지는 대통령의 즉흥적 조치로 오해될 수밖에 없었다. 모 방송국 기자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거부 역시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만 추가하였다. 공식적인 기자 회견까지 피하거나 유보하는 대통령의 언론관은 시급히 개선해야 할 과제이다.결론적으로 대통령의 즉흥적인 리더십은 정치적 신뢰 형성에 결코 도움을 주지 못한다. 대통령의 즉흥적 리더십은 기분이나 정서에 기반한 비합리적 리더십이다. 대통령의 리더십은 보다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보다 신중하게 결정되고 시행착오부터 줄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용산과 집권 여당의 관계부터 바르게 재정립되어야 한다. 대통령의 리더십은 범죄를 수사하여 응징하는 법적 정의 실현의 검찰 총장의 리더십과는 다르다.대통령의 리더십은 대통령실의 공적기구에 의해 철저히 검증되고 때로는 견제받는 리더십이 되어야 한다. 대통령 실은 대통령의 리더십이 자신감에만 의존하는 감성적 리더십이 되지 않도록 특별히 보필해야 한다. 다소 느리더라도 공평하고 안전한 리더십이 되어야 한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대통령의 합리적 리더십이 신뢰를 받을 때 국정은 탄력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이 총선 결과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은 명약관화하다.

2023-12-03

대만, 세계와 손잡고 넷 제로(Net Zero)의 미래로

쉐푸성(薛富盛) 대만 환경부 장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후변화가 세계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넷 제로(Net Zero, 온실가스 배출량 ‘0’) 달성은 대만과 국제사회의 공동 목표가 되었다.올해 2월 대만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은 ‘기후변화 대응법’의 시행을 선포함으로써 ‘2050 넷 제로’ 의 목표를 입법화하고 탄소 저감에 대한 굳은 의지를 표명했다. 또한 탄소정가제도 구축과 다양한 인센티브 제공을 통해 기업들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독려하고 있다.대만은 2022년에 ‘2050 넷 제로 프로세스 청사진’ 및 ‘넷 제로 전환을 위한 12개 핵심 전략 행동 계획’을 연달아 발표한 바가 있다.또한 ‘과학 기술 연구 개발’과 ‘기후 법제’를 기반으로 에너지, 산업, 생활과 사회 등 4대 전환 사업을 신속히 추진하고 있다. 그 외에도 ‘넷 제로 과학기술방안(2023~2026)’을 기용하여 지속가능하고 미래지향적인 에너지, 저탄소, 탄소 네거티브, 순환경제, 인문사회과학 등 5개 분야에 투자하여 넷 제로 과학기술에 대한 개발과 실행을 진행 중에 있다.대만은 지난 10년 간 에너지 집약도는 평균 2.9% 향상돼 에너지 전환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미국 에너지 경제 효율 위원회(ACEEE에 따르면 2022년 대만의 에너지 효율은 세계 8위로 개선되었다.대만의 재생 에너지 설비 설치 용량은 최근 5년간평균 21.9% 증가했다. 이는 아시아 인접 국가들뿐만 아니라 전세계 평균치인 9.1%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2023년 풍력 및 태양광 발전 설비 용량은 약 12.9GW에 달해 2016년에 비해 7배를 증가했다.전국에 264개의 해상 풍력 터빈이 설치돼 올해 전체 발전량에서 재생에너지 발전이 약 10%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대만 정부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전제로 친환경 전력과 미래지향적 에너지 개발을 극대화하고, 에너지 효율 제고, 다양한 에너지 저장장치 개발, 전력망 복원력 강화 등의 조치를 통해 단계적 에너지 전환을 실현해 나가고 있다.넷 제로의 국제적 추세에 부응하기 위해 대만은 정부 조직을 개편했다. 올해 8월 기후변화 대응과 온실가스 감축 관리 업무의 총괄을 맡기 위해 환경보호청을 ‘환경부’로 승격하고, ‘기후변화청’을 신설했다.또한 대만은 ‘국가 적응 리포트’를 발표하고 기후변화에 대한 과학적 조사 연구와 적응 및 실행 성과를 보여줬다. 동시에 통합 플랫폼의 구축을 통해 ‘기후변화 적응 실행 계획’을 세웠으며 이는 기후변화 대응 능력을 제고하고 국민의 안전과 국가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보장해 줄 것이다.대만 자원의 70% 이상이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2022년 일반 생활폐기물의 회수율은 59.5%이며, 산업폐기물의 재활용률은 86.5%에 달한다. 환경부는 ‘자원환경청’을 신설해 순환경제를 도입하고 자원 순환 및 폐기물 제로 개념을 실행에 옮겼다.또한 ‘그린디자인으로 오염원 관리’, ‘에너지 자원 재활용’, ‘ 폐에너지의 균형과 관리’ 등 3대 순환 계획으로 산업 체인을 연결하는 순환 네트워크를 구축했다.동시에 ‘혁신 기술과 제도’를 자원 순환을 이끄는 주축으로 삼아, 폐기물 제로와 넷 제로의 비전 달성을 가속화하고 있다.수출주도형 경제 구조를 가진 대만의 기업은 경영에 있어 국제 정세에 영향을 받고 있다. 글로벌 탄소 국경 조정 제도(CBAM), 녹색 공급망 구축에 대한 세계적 추세에 대응하기 위해 대만 정부는 부서 통합 조정 기구를 설립했다. 이 기구는 각 기업이 제품의 탄소 함량을 이해하고 줄이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며 탄소 정가 책정 제도를 추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또한 대만 정부는 기업의 저탄소 전환을 지원하기 위해, ‘친환경 금융 실행 계획’을 추진해 친환경 또는 지속가능한 산업에 투자를 유도하고 있다.올해 8월 대만은 ‘대만 탄소권 거래소’를 설립해 거래시장에서 거래, 유통을 통해 기업의 탄소 저감뿐만 아니라, 저탄소 기술의 연구 발전과 관련 인재 육성을 촉진하여, 친환경 경제의 선순환을 이끌고 있다.대만은 선한 역량을 가진 나라로서 우수한 친환경 기술과 과학실력을 가지고 있다.이를 통해 재해 구조 및 예방, 환경, 의료, 공중보건, 그린 에너지 등 관련 업무에 응용해 세계에 공헌할 기회를 찾고 있다.대만은 ‘유엔기후변화협약’ (UNFCCC)이 대만사람들에게 평등한 참여 기회를 제공하기를 기대한다. 또한 글로벌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국제협력기구와 ‘파리협정’ 관련 협상에 참여해 국제사회와 함께 글로벌 기후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전세계가 기후변화 위기와 공급망 재편에 직면한 이때, 대만은 중요한 해결사이자, 가장 믿음직하고, 안전하고 든든한 협력 파트너가 될 것이다.

2023-12-03

신화랑 풍류마을에서 찾아보는 화랑정신

김하수 군수 고구려와 백제보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했던 신라가 676년 한반도를 통합한 삼국통일은 역사적인 사건이다.비록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의지했다 해도 신라의 삼국통일은 고구려의 옛 영토까지는 차지하지 못했지만, 한반도의 민족문화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의미가 크다.특히 물질적인 강대함보다는 정신적인 측면이 더 강대한 힘을 발하는 것을 증명한 역사다.신라의 삼국통일을 이야기할 때는 제29대 무열왕(김춘추 603~661)과 제30대 문무왕(661~681), 김유신(595~673) 장군을 빼놓지 않는다.이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이들의 중심을 꿴 것이 화랑도(정신)이다.화랑도는 화랑과 그 낭도들이 사상적으로 간직하고 실천하려고 힘썼던 도리(道理)이지만 화랑과 낭도들이 활약했던 시기에는 화랑도로 불리지 않다가 현대에 이르러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화랑도를 어떻게 불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화랑정신이 세력이 미약했던 신라가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등장하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이 중요하다.신라 제24대 진흥왕이 화랑도를 통해 인재를 키우며 나라의 근본을 다지고 무열왕은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했다.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실질적인 왕으로 신라의 국격을 한 단계 높인, 신라를 신라답게 만든 왕으로 사적 제18호인 경주 안압지를 조성하기도 했다.가야의 후손으로 열다섯 살에 화랑이 된 김유신은 참가한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후세에 유명한 전투로 알려진 백제의 계백과 싸운 황산벌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함락시켜 삼국통일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청도는 이 화랑정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화랑도 정신을 이야기하면 곧 생각나는 것이 세속오계(世俗五戒)다.청도 운문산 가슬갑사(嘉瑟岬寺)에 머물던 원광법사에게 찾아온 귀산(貴山)과 추항(7B92項) 두 화랑에게 준 다섯 가지 규율인 세속오계는 우리가 잘 아는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등으로 현대에도 적용하기에도 무리가 없다.이 화랑정신을 지역의 무형문화 유산으로 받아들이고 계승하고자 건립된 것이 신화랑 풍류마을이다.2018년 3월 22일 개관한 신화랑 풍류마을은 화랑의 정신·문화·체험활동을 특화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현대적 의미의 해석을 통한 화랑 문화 고유의 정통성과 새로운 신화랑 정신문화가 공존하는 복합 문화관광단지다.신화랑 풍류마을은 화랑의 세속오계 정신과 화랑도의 교육과정이라 할 수 있는 도의상마(道義相磨), 가락상열(歌樂相悅), 유오산수(游娛山水) 등 8가지 테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교육·관광지로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던 화랑정신과 청도의 신(新) 화랑정신을 전시 및 교육공간으로 꾸며놓은 화랑정신 발상지 기념관, 화랑 RV 체험 존, 명상실, 신화랑 스카이 트레일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어 관광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특히 지난 8월 개장한 신화랑 스카이 트레일은 화랑과 낭도들이 훈련에서 느꼈을 담력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체험할 수 있어 주말과 휴일에는 가족, 친구, 연인, 단체 등이 업무시간 전부터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릴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또 1박 2일과 2박 3일로 진행되는 숙박형 ‘화랑되기’와 ‘화랑국선되기’ 프로그램은 최소 3개월 전 예약을 해야지만 시설 이용이 가능하다.청도군도 청도신화랑 풍류마을을 찾는 방문객을 위해 계절별로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는 숲 가꾸기 사업과 맨발 로드 및 수변공원 조성, 300명 정도가 이용 가능한 컨벤션홀 건립, 400여 미터의 곡선형 짚 코스터 레포츠 시설 건립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교육·관광의 명소로 변모시킬 예정이다.새마을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청도군은 인간 사랑 등을 담아 현대에도 지켜야 할 계율인 화랑정신을 신화랑 풍류마을이라는 특정 장소에만 국한 시키지 않고 지역에 두루 흐르는 시대정신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2023-12-03

옥상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다. 사방이 꽉 막힌 방보다 탁 트인 곳이면 더 좋다. 누군가의 간섭도, 관심도 없이 나만이 머무는 곳, 기왕이면 내가 사는 세상을 가만히 내려다 볼 수 있으면 제격이다.사춘기 시절, 빈 집 옥상에 올라가 소설을 썼다. 소설 속 소녀는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을 좋아했다. 낮이면 창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았고 밤이면 달빛을 따라 밤하늘을 유영했다. 상상의 날개를 파닥이며 쓰고 또 쓰고, 나는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맑은 내일과 파란 자유를 동경했다. 해거름이 넘도록 옥상에서 기다리는 날이 많았다. 일하러 간 부모님은 늦게 왔고 언니는 자율학습 하느라 밤이 이슥해서야 집에 들어왔다. 혼자서 다섯 알 공기를 가지고 놀다가 멀리서 누군가 오는 소리가 나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공기놀이가 싫증이 나면 상추 사이에 붙어 있는 달팽이들과 소꿉놀이를 하였다. 바람이 불면 빨랫줄에 걸린 옷들이 춤을 추었다. 거꾸로 매달려 춤을 추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옷들의 움직임을 가만히 바라보면 허수아비 춤 같기도 해서 나도 두 팔을 벌리고 바람을 맞았다. 그러면 바람은 내 치맛자락을 들춰보고 저만치 달아났다.엄마는 내가 집 안에서만 있기를 원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바깥으로 너무 돌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어둡고 막힌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들꽃처럼 바깥 공기를 마시며 비도 맞고 바람도 맞으며 자라고 싶었다. 단지 내가 마음껏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옥상은 나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부모님께 거짓말을 했다가 들켜 버린 날, 시험을 망쳐 버린 날, 나는 옥상에 올랐다. 아버지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청소해라 공부해라’하는 엄마의 잔소리를 피할 수 있었다. 노란 물탱크 옆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쿵쿵 발을 구르면 아래에 있는 엄마 아빠에게 화풀이라도 한 듯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옥상은 어린 내 생각이 크는 공간이었다. 장독대에 기대어 빈 하늘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공부는 왜 해야 할까, 나 혼자 살 수 없을까, 내가 행복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인생이 뭔지도 모르는 아이가 삶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음속으로 가출해 여기저기 떠돌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무더운 여름 날, 옥상은 꿈의 공간이었다. 엄마와 돗자리를 깔고 누우면 더위가 가셨다. 하늘의 모든 별이 나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는 것 같았다. 그 시간만큼은 외롭지 않았고 마음은 별처럼 반짝거렸다. 텃밭의 주인공보다 훌쩍 자란 잡초처럼 꿈속에서 나는 마음껏 자라나고 있었다.옥상에서 내려다보면 모든 것이 작아 보였다. 동네에서 제일 큰 어른도 꼬맹이 인형처럼 작아 보였다. 마치 내가 거인이 된 것처럼 앞 집 슈퍼도 작게 보였다. 모두가 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 같았다. 옥상에 서면 나는 세상에서 제일 크고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같았다. 옥상에 서면 혼자서는 갈 수 없는 먼 곳을 볼 수 있었다. 창문으로는 볼 수 없었던 푸른 하늘과 강둑으로 넘어가는 해도 가까이 보였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면 내가 바라는 세상이 펼쳐질 것 같았다. 김경아 작가 옥상에서 나만의 비밀을 간직했다. 화분 밑에 숨겨 둔 비밀 노트엔 부모님에 대한 섭섭함과 나의 연애사 등 모든 역사가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숨어 있는 비밀도 발견했다. 아무도 안 보는 줄 알고 했던 사람들의 무심한 행동들을 나는 옥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엄마의 분홍 구두를 신고 낡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나는 훨씬 더 많은 비밀을 간직한 어른이 되었다. 그렇게 옥상은 어린 날의 마음이 머물던 공간으로 남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 엄마가 되어 정신없이 사는 동안 옥상도 잊었다. 그러나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서 나를 돌아보았을 때, 나만의 이야기는 옥상에 많았다. 가끔 혼자이고 싶을 때 옥상이 떠오른다. 계단 사이사이 자라는 이름 모를 풀들과 하늘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이 정겨웠던 그 곳, 옹기종기 모인 항아리는 작아 보일 것이고 빨랫줄을 높이 올리던 바지랑대도 낮아 보일 것이다. 혼자 가만히 앉아 공깃돌을 받아보고 싶다.베란다에서 멀리 바라본다. 매지구름 몇 조각이 수평선 너머로 떠간다. 어린 날의 마음인 듯 구름을 따라가고 싶다.

2023-12-03

마지막 잎새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뉴욕 맨해튼의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예술인의 마을, 3층 벽돌집 꼭대기에 수우와 존시가 세 들어 살고 있다. 고향이 서로 다른 두 아가씨는 화가 지망생으로, 식당에서 우연히 만나 ‘예술감각에 있어서나 꽃상추 샐러드나 작업복에 대한 취미가 일치한다는 것을 알고’ 공동화실을 갖게 된 것이다.11월이 되어 추위가 닥치면서 존시가 그만 폐렴에 걸리게 된다. 상태가 심각해져서 왕진을 온 의사는 살아날 확률이 열에 하나 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존시는 침대에 누워 창밖으로 보이는 옆집 담장의 담쟁이 잎을 세면서 그 잎이 다 떨어지면 자기도 죽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담쟁이 잎이 몇 개 밖에 남지 않은 날 밤에 비바람이 불었다. 아침이 되자 존시는 잎이 다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하고 창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마지막 한 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북풍이 사납게 몰아친 다음 날도 그 잎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본 존시는 다시 삶의 의욕과 희망을 가지게 되고 병도 차츰 낫게 된다. 그런데 그 마지막 한 잎은 수우로부터 존시의 이야기를 들은 아래층의 늙은 화가가 밤에 몰래 그려놓은 것이었다.달랑 한 장 남은 12월 달 달력이 떠올려준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의 줄거리다. 바람에 떨어져서 줄어드는 담쟁이 잎과 소진해가는 자신의 생명을 동일시하고 절망에 빠져 병이 악화되는 것과 같은 현상을 ‘노시보 효과(NoceboEffect)’라고 한다. 아무리 좋은 약을 먹여도 환자가 ‘나는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실제 약효가 반감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가짜 약을 진짜라고 속여 먹여도 환자의 병세가 나아지는 현상을 ‘플라시보 효과(plecebo effect)’라 한다. 어린 시절 배가 아플 때 “엄마 손은 약손”이라며 어머니가 살살 만져주면 배앓이가 나았던 것도 그런 효과다. 의학적 소견으로는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의 30%가량은 가짜 약을 먹더라도 진짜 약이라고 믿는다면 통증이 잦아진다고 한다.12월은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되는 달이고 한 해를 마감하는 달이다. 한파가 닥치고 일조량도 짧아져서 자칫 마음이 침울해지기 쉬운 달이기도 하다. 돌아보면 뿌듯한 보람과 성취감보다는 후회와 아쉬움이 더 많은 게 보통사람들의 마음일 것이다. 더구나 노년에 접어든 사람들에게는 세월의 덧없음이 찬바람처럼 스며들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움츠러들고 부정적이면 그것이 노시보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12월에 삶을 비관하고 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래서라고 한다. 하지만 삭풍과 조락의 계절에도 찾아보면 곳곳에 긍정의 불씨를 발견할 수 있다. 닥쳐올 엄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돋아난 보리나 마늘의 새싹을 보노라면 생명의 엄연함을, 누렇게 변색을 하고 겨울을 맞는 냉이나 봄까치꽃 앞에서는 그 결연한 의지에 비장감마저 드는 것이다.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비록 가진 것이 초라하고 이룬 것이 없더라도 긍정과 감사를 잃지는 말아야 할 이유다.

2023-11-30

이제 12월이다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이제 12월이다. 본격적인 겨울의 시작, 찬 바람이 세차게 불고 흰 눈이 내리는 계절이다. 우리말로는 ‘섣달’이지만 아직 음력으로는 ‘동짓달’이다. 양(陽)의 기운이 시작되는 달이며 지난 한 해를 회고·정리하며 다음 해를 준비하는 달이기도 하다. 또 12월은 영어로는 December, 그런데 ‘Decem’의 뜻은 라틴어로 숫자 ‘10’을 의미하며, 옛 최초의 로마력(曆)은 10월까지였는데 열두 달로 되면서 뒤로 밀려난 것이다. 그러고 보니 11월 November도 라틴어 ‘9’의 의미를 갖는구나.이제 북극에서 대륙성고기압의 찬 기운이 불어오면 기온은 영하로 뚝 떨어지고 땅은 얼어붙어 빙판길 사고도 염려된다. 추위에 겨울 독감 인플루엔자와 폐렴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는 보도와 함께 코로나19의 확산 우려가 있어서 독감 예방주사와 백신접종을 동시에 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3년 전에 코로나바이러스가 들어와 번지며 1일 발생자가 처음으로 1천 명을 넘었던 달도 그해 12월이었다. 그리고 계속 창궐하여 펜데믹을 일으키더니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으니 방역 당국도 손을 놓지 못하고 있다.12월은 크리스마스가 있다. 성탄을 기리는 마음으로 주위에 온정을 베풀어야 할 곳이 많다. 그래서 연말 자선 모음을 하며 쌀도 모으고 구세군 자선냄비에 성금을 넣고 있다. 서울 광화문광장뿐만 아니라 각 지방 곳곳에 희망 나눔 캠페인을 벌이며 ‘사랑의 온도탑’이 세워지면 내년 1월 31일까지 62일간 시민들의 따뜻한 마음을 모아 100도를 훌쩍 넘기를 희망해 본다.초겨울을 지나 일 평균 온도가 0℃ 이하인 엄동이 되면 흰눈 잔치가 벌어지는 스키장이 열리겠지만 KBO 등 야외 경기는 비활동 기간이 되어 스토브 리그에 들어가게 된다. 대부분 학교는 겨울방학을 하여 쉬게 되고 곤충이나 짐승들도 긴 겨울잠에 빠져드는 1년의 끝 달, 우리도 겨울을 준비해야겠지….옛 어릴 때의 기억을 되살려 본다. 겨울이 되면 아버지는 군불을 때기 위해 장작 한 소달구지 구해놓으면 푸근한 얼굴이 되셨고, 세월이 흘러 연탄으로 바뀌었지만 지금은 가스와 전기가 방을 덥히고 집을 따뜻하게 한다. 참 좋은 세상이다. 또 중요한 건 김장 담그는 일이다. 어머니는 배추 수십 포기를 잘라서 소금물에 절이고 고추 마늘 생강 등을 빻아 버무려 큰 장독에 넣어 땅에 묻고 흐뭇해하셨다. 이젠 절임 배추 몇 포기만 사 와서 양념 묻혀 냉장고에 넣으면 된다.벌써 12월, 단풍 들었던 잎사귀가 다 떨어지면 겨울철 나뭇가지 치기를 해야된다. 나뭇가지 모양을 잘 살펴서 햇볕을 잘 받아 성장에 방해받지 않도록 밑가지를 잘라주어 새봄에 예쁜 새순을 기대하는 것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가지치기해야 할 곳들이 많음을 느낀다. 잘 골라 수형(樹形)을 가다듬는 일꾼이 나와야 할 텐데 걱정이다.대통령도 나서 민관이 온 힘을 다했던 부산 2030세계박람회 유치는 불발됐고 우리의 힘찬 미래를 실현하려던 꿈도 좌절됐다. 12월의 탄생석은 청록색 터키석이다. 성공과 승리 그리고 행운의 의미를 담고 있고 부정 에너지를 추방하고 독성을 판별한다고 하니 파란 하늘과 바다의 기운을 품어보자.

2023-11-30

로봇교사 등장

우정구 논설위원 ‘챗봇 서울톡’은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인공지능 상담 서비스다. 서울시에 관한 다양한 행정문의에 대답하고 시설, 교육, 행사 등 공공서비스의 예약과 민원접수를 도와주고 있다. 챗봇 하나가 일일이 상담과 답변을 해야 하는 공무원의 수고로움을 덜어준다.이미 음식점 등에서는 종업원이 아닌 로봇이 매장 서비스를 돕는 현장이 늘어나고 있다. 자동차를 주차해주거나 역 앞에서 고객의 짐을 받아 날라주는 로봇까지 등장해 우리 일상이 어느덧 로봇의 세상으로 빠져든 느낌이다.2016년 인공지능 알파고는 세계 최정상의 바둑 프로기사를 연이어 격파하는 기염을 토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세돌 9단을 4대1로 꺾어 알파고는 명실 공히 현존하는 인공지능으로 등극했다. 한국기원은 알파고를 정상의 프로기사 실력임을 인정하고 입신(入神)의 경지인 명예 9단증을 수여하기도 했다.내년부터 서울지역 일부 초등학교에서 로봇 영어교사가 등장할 것 같다는 소식이다. 학생의 영어 말하기 교육 강화의 한 방편으로 AI기능이 장착된 영어 로봇을 투입해 학생들의 언어 실력 향상을 돕는다는 것이다. 원어민처럼 학생과 1대 1 회화를 하는 로봇교사의 등장이 신통하기도 하지만 기계와 대화를 해야 하는 학생들의 느낌이 어떨지도 궁금하다.로봇교사 등장이 당장은 보조교사 형태로 진행되나 언젠가는 교사의 영역에 들어와 교실에서 교사를 밀어낼지도 몰라 우려도 없지 않다.교육은 교사와 학생이 몸으로 부딪칠 때 인성교육까지 완성되는 것이다. 로봇이 인간교사의 영역을 넘어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 로봇교사 등장이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우정구(논설위원)

2023-11-30

포항의 이유 있는 변신

홍석봉 대구지사장 얼마 전 프랑스 경제일간지가 경북 포항시를 대서특필해 국내외에 관심을 끌었다.최근 대규모 배터리 관련 투자가 이뤄지며 부흥하고 있는 프랑스의 덩케르크와 산업구조 면에서 유사한 과정을 밟는 포항에 주목한 기사다. 지방 소도시의 동병상련 모습도 보았던 것 같다. 이 신문은 포항제철을 중심으로 한 철강산업에서 배터리 산업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포항의 혁신산업 현장을 프랑스 덩케르크와 비교, 소개했다.포항은 최근 수년간 배터리 소재 기업들의 대규모 투자가 집중, 배터리 산업 중심도시로 산업구조가 급속도로 바뀌고 있다. 포항의 변화는 전기자동차 산업의 부상이 기반이 됐다. 2016년 2차전지 업체인 에코프로가 포항에 자리했고, 2019년 배터리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되면서 배터리 산업이 상승세를 탔다. 대기업의 대규모 신규 투자가 잇따랐다. 철강에서 배터리로 연관 산업이 급격히 옮겨갔다.포항의 변신에는 한계 산업인 철강에만 매달려서는 안 되겠다는 포항시의 위기감이 작동했다. 철강기업 포스코가 공격적인 투자로 ‘배터리 소재’ 회사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 바탕이 됐다. 포스코는 계열사인 포스코퓨처엠을 중심으로 국내외에 대규모 배터리 소재 생산기지를 건설하고 있다. 포스코그룹의 사업 다각화가 포항의 먹을거리와 산업구조 변화를 이끌고 있다.포항시는 미래 신산업의 주축으로 떠오른 이차전지를 발판삼아 연구개발 인프라와 산업 생태계를 지속 확장, ‘K-배터리 선도도시’로의 도약에 속도를 내고 있다. 포항시는 지난 7월 ‘이차전지 특화단지’로 지정돼, 배터리 도시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했다.포항시의 성공적인 변신은 대구시와 구미시 등 대도시의 현실과 비교된다. 대구시는 제일모직, 코오롱 등 대기업이 외지로 빠져나가고 난 이후 경제 전반이 가라앉았다. 주종인 섬유산업의 낙후 및 침체가 큰 영향을 미쳤다. 30년째 1인당 지역내생산량 전국 꼴찌의 멍에를 못 벗고 있다.대구시는 최근 지능형 반도체 등과 물 산업, 로봇, 의료 등 분야 육성에 주력하며 낙후를 벗으려고 몸부림친다. 지역 배터리 기업의 대규모 투자 등이 잇따르고 있으나 지역 경제 전체를 일으키기에는 힘이 부친다.구미시는 한때 전자 산업의 메카로 수출 1위 도시를 구가하며 펄펄 날았다. 하지만, 지난해 7위로 곤두박질했다. 구미 경제의 몰락은 삼성전자와 LG 등 대기업에 의존하다가 산업구조 개편의 타이밍을 놓친 것이 원인이다. 신성장 동력 발굴 등 업종 다변화와 투자 유치 실패가 뼈아프다.대구시와 구미시는 포항시의 변신을 눈여겨봐야 한다. 포스코라는 걸출한 대기업이 자체 도생을 위한 돌파구를 찾는 과정에서 배터리라는 새 먹을거리를 찾은 것이 동기가 됐다. 여기에 세계적인 전기자동차 붐에 편승, 배터리로 갈아탈 수 있었다. 철강 중심의 산업구조를 극적으로 바꾼 것이다. 포항시가 갖춘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 연구 인프라와 교통 및 항만 등 기반시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터다. 기회 포착과 투자, 기반시설, 사람 3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2023-11-30

선거문화, 문제있다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정치의 계절이다. 총선이 다가온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데, 국민은 혼란스럽다. 300명 국회 구성원을 바꾸는 절차일 뿐인데 온 나라가 어지럽다. 아직은 지역구도 획정해야 하고 비례대표 선출방법도 오리무중이라 국민은 마음이 산란하다. 국민은 그저 평온하고 정상적으로 작동하여 안심하고 살아가는 나라를 만나고 싶은데, 정치판은 그들만의 리그에 빠져 소용돌이를 친다. 지역의 일꾼을 뽑는 잔치가 이벤트 행사판이 되어 사방이 확성기 소음으로 시끄러울 예정이다. 지역이 바뀌고 살림이 나아질 기대는 저만치 가고 후보 간 표 싸움만 그득할 셈이다. 무엇이 어찌 바뀔지는 제대로 가늠도 못 하고 표를 던져야 하니, 선거가 정말 국민과 지역을 위한 결과를 낳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후보의 입장에서도 정책이나 능력으로 승부하기 보다 인기몰이나 세 과시가 최우선이 아닌가. 새로운 일을 만들고 지역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며 나라에 미래비전을 제시해야 하지만, 표심몰이와 포퓰리즘에만 집중하는 선거는 또다시 그렇고 그런 결과를 낳을 터이라 유권자가 이제는 선거에 특별한 기대를 걸지도 않는다. 민주주의 발전은 그만 두고 제자리걸음만 반복한다.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하는지. 현수막과 확성기, 악수세례와 허리인사로 치르는 선거를 하염없이 거듭하는 선거판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겠는지. 희망과 비전을 실은 정책을 만들고 토론과 홍보를 통해 겨루며 언론이 정상 작동하면서 검증되고 확인되는 진짜 민주주의를 실현할 길은 없는가.정책입안 과정을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홍보전략의 진행이 체계적으로 정돈되며 언론 소통과 전달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일은 우리 민주주의에서 불가능한 일일까. 정책은 국정과 지역의 현안을 치밀하게 분석한 결과로 토론과 조율을 거쳐 정교하게 만들어져야 한다. 홍보는 유권자의 생각과 의견을 반영하면서 진심을 담아 진행되어야 한다. 언론은 지역과 유권자의 현상을 가늠하고 후보자들의 정책을 비교하면서 균형있는 소통을 이끌어야 한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소란스럽고 현란하기만 할 뿐, 정책과 비전은 뒷전이고 표심만 구걸하는 모습이 아닌가. 막걸리와 고무신이 판을 치던 그 옛적 선거와 무엇이 그리 다른지 알 길이 없다.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미래동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정책, 홍보, 언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전문교육기관이 필요하다.소란하나 공허한 ‘빈수레 선거방식’은 이제 막을 내려야 한다.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도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는 선거방식은 사회적 합의를 거쳐 기필코 수정해야 한다. 제자리 걸음은 사실상 퇴보다. 민주주의의 껍데기를 쓰고 인기 영합에만 집중하는 선거는 실패한 시스템이다. 뽑아놓고 후회하는 습관이 이대로 좋은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정책, 홍보, 언론이 선진화되지 않고는 선거가 제자리를 잡을 길이 없다.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정책, 홍보, 언론의 전문화가 시급하다. 선거는 우리가 바라는 결과를 빚고 있는가.

2023-11-29

대구 상징물

홍석봉 대구지사장 대구를 상징하는 나무는 전나무다. 꽃은 목련이다. 대구시가 1972년 지정했다. 상징 새는 1983년 정한 독수리다. 전나무는 강직성과 영원성을 상징, 곧게 뻗어나가는 대구시민의 기상을 대표한다. 목련은 순결과 희생 정신의 시민 기질을 상징한다. 독수리는 활달하고 진취적인 기상, 개척적인 시민 정신을 나타낸다.도시도 마케팅하는 시대다. 다른 지역과 차별화는 기본이다. 지역의 개성과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 지역민들의 의견을 들어 도시를 상징하는 나무, 꽃, 새를 정한다.하지만 대구시를 상징하는 나무와 꽃, 새에 대해 아는 시민들은 많지 않다. 되레 의구심을 갖는 이들이 적지 않다. 과연 전나무와 목련, 독수리가 대구시를 대표하는 상징이 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다.권기훈 대구시의원이 28일 시정질의를 통해 대구 도동의 천연기념물 측백나무를 시목으로 지정할 것을 촉구했다. 기존 상징물이 대구와 아무런 연관성이 없고, 대구시의 각종 엠블럼이나 캐릭터 등으로도 활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상징물의 지정과 관리 등 제도 근거도 마련돼 있지 않다며 활용 방안을 찾을 것을 주문했다.문화재청은 2021년 국보1호 승례문 등의 문화재 지정번호를 삭제토록 했다. 서열화 논란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이에 1962년 천연기념물1호로 지정돼 60년 간 자리를 지켜온 ‘천연기념물1호 도동 측백나무’의 1호 이름을 떼냈다. 하지만 명성은 여전하다.대구 동구 불로천 상류 해발 160m 향산 절벽에 높이 5~7m, 수령 500년의 1천여 그루 측백나무 숲은 남방한계선에서 자라는 식물학적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참에 목련과 독수리도 바꾸는 것을 고려해봐야 할 것 같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1-29

구룡포人의 삶의 애환 뮤지컬로 재조명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계절의 끝자락에 감동의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제법 쌀쌀해진 날씨 속에, 지난 주 포항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열린 이색적인 뮤지컬 공연을 보고 극히 일부겠지만 가슴 훈훈한 예술적 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구룡포지역을 배경으로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애환과 숨겨진 얘기가 대사와 노래, 율동과 몸동작 등으로 어우러져 파도의 여울로 굽이치고 고래의 울음으로 퍼지는 듯했다. 포구(浦口)의 아늑함과 일제의 잔재인 적산가옥이 있는 구룡포지역을 재조명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을 투영한 역작으로 관객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이러한 작품은 지역의 손꼽히는 극단 예맥의 제60회 정기공연으로, 지난 여름날부터 거의 매일 연습하고 준비해서 정성껏 무대에 올린 창작 뮤지컬 ‘구룡포 프리덤’이다. 극단 예맥은 지난 1981년에 창립, 포스코 직원들을 중심으로 매년 1~2회의 정기공연을 열면서 근로문화제 대통령상 수상 등 꾸준한 활동을 펼쳐 이번에 60회째를 맞게 됐다. 뮤지컬로는 ‘93년 ‘넌센스’ 작품 이후 30년만에 두번째로, 당시의 파릇한 주연배우가 이번에 다시 중년의 주연배우로 열연, 두드러진 역할을 소화함으로써 많은 사랑을 받으며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특히 ‘구룡포 프리덤’은 ‘고향 구룡포에서 자유를 만끽하다’라는 주제를 담으면서 전체 대사의 95% 이상이 포항말(방언)로 되어 있어서 이채롭고 정겹게 다가왔다. 사라져가는 사투리의 말맛으로 진짜배기 구룡포인의 애잔하고 애틋한 스토리가 엮어져 공연 내내 향수와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고나 할까? 또한 무분별한 포획과 불법 어획, 서식지 파괴 등으로 멸종 위기에 처한 한국계 귀신고래가 서식지인 영일만 앞바다에 돌아오길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도 담고 있어서 한결 공감이 가기도 했다.구룡포를 주제로 한 뮤지컬 공연에 많은 시민과 동호인, 지역민들이 함께하여 아낌없는 갈채와 찬사를 보냈다. 특히 구룡포읍장을 비롯한 공무원, 해당지역 시의원,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장 등의 분들이 다수 객석을 채워 열렬히 환호했는가 하면, 연말에 구룡포에서의 앵콜공연까지 논의되는 등 많은 관심과 성원을 보냈다. 흘낏 지나치거나 무덤덤하게 여길 수 있는 일들을 뮤지컬이라는 예술적인 요소를 가미해 테마와 스토리를 흥미롭고 감동적으로 풀어낸 걸작이 아닐 수 없다.이처럼 뮤지컬은 연극적인 바탕에 음악과 무용의 요소를 곁들여 주제의 표현과 관객의 공감을 극대화시키는 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다. 연극과 오페라의 중간쯤 영역에서 진지함과 차분함, 애절함과 흥겨움으로 관객과 소통하고 호흡하며 독특한 재미와 볼거리를 제공하는 총체적인 연희(演戱)라고나 할까?이러한 측면에서 ‘구룡포 프리덤’ 뮤지컬은 시대에 투영된 삶의 변화와 굴곡이 극적인 요소와 잘 버물려 표현된 감칠맛 나는 ‘문화 밥상’으로 손색이 없었다. 구룡포인의 삶을 재조명한 극단 예맥의 줄기차고 의미있는 문화 밥상을 기대해본다.

2023-11-29

단풍 유감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아파트를 둘러싸고 있는 아름드리나무들이 빼곡하다. 봄이면 거목에서 피는 벚꽃이며 목련꽃이 장관이다. 하늘 높이 솟은 은행나무며 노랗게 치렁치렁 늘어져 담을 넘은 개나리도 눈길을 잡는다. 나는 이런 우리 아파트를 울긋불긋 꽃대궐이라 이름하고 꽃피는 봄을 만끽한다. 아파트 앞의 수성못 또한 벚꽃이 만개하면 꽃구경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꼬물거리며 싹 나고 불그스레 봉오리 맺는 것을 확인하곤 언제나 활짝 필까 맘졸이며 기다리는 일 또한 즐겁다. 팝콘 터지듯 한두 송이씩 피다가 어느 날 한꺼번에 눈 온 듯 옅은 분홍의 꽃이 구름같이 일렁이면 그 며칠이 환하다. 특히 밤의 벚꽃은 은은한 조명을 받아 희다 못해 눈부시고 향기까지 뿜어주니 게으른 발걸음이 이때만은 한 일주일 부지런해진다. 그러다 금세 하늘거리며 눈 내리듯 지는 꽃. 분홍 융단같은 꽃으로 내려앉은 봄은 순식간에 사라지지만 괘념하지 않는다. 여름내 짙푸른 녹음을 만끽하다 가을이 되면 봄꽃보다 더 붉은 단풍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벚꽃 단풍은 유난히 고와 해마다 찍어 저장한 사진도 많다. 높다란 은행나무의 찬란한 노란 잎을 쳐다보다 냄새 고약한 열매를 밟기도 하지만 노란 길은 더없이 아름답다. 수성못의 벚꽃길 단풍은 온갖 축제에 모인 사람들과 어울려 더욱 붉어지곤 한다.그런데 웬일인가. 올해는 도무지 단풍이 들 기미가 보이지 않더니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붉지 않고 푸르죽죽한 잎으로 말라 버린 채 낙엽 지고 있다. 은행잎은 이 추위에도 아직도 푸른 잎이 성성하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떨어지는 잎같이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는’ 낙엽이 아니다. 늦은 가을임에도 대체 단풍은 어딜 갔나 싶다. 멀리 산들도 여느 때와는 달리 울긋불긋 단풍옷이 아니라 누르거나 회색의 거무스레한 색이어서 영 볼썽이 아니다. 비가 와서일까, 가뭄이 들었나 걱정 아닌 걱정은 나 혼자만이 한 게 아니었던지 기사가 났다. 그제서야 이유를 알았다. 푸른 잎은 가을 되어 뚝 떨어지는 기온에 놀라 단풍이 들 것인데, 늦가을까지도 계속된 더위로 색을 바꿀 기회를 놓친 탓이란다. 결국 기후변화, 지구온난화 때문인 거였다. 그렇다면 내년도 또 후년도 쭈욱 고운 단풍 즐기기는 어려워진 걸까. 너무나 무서운 자연의 징벌이 어찌 단풍뿐이랴. 봄에는 산불로, 여름엔 태풍과 홍수와 산사태로 인간을 징치하는 자연이다. 두려워하고 바로 잡아야 할 일이다.그렇다면 난 무얼 해야 하나. 일회용품을 덜 써야 할까. 편한 물티슈 대신 걸레와 행주를 써야 하나. 가방에 손수건과 장바구니는 챙겨다니고 있다. 휴지 한 장, 비닐봉투 한 장이라도 덜 쓰고 싶어서다. 플라스틱컵이나 종이컵이라도 덜 쓰게 텀블러도 넣어다닐까 싶다. 두 식구인데도 어쩜 그렇게 쓰레기가 많은지 분리하다 보면 택배상자가 그 중 많다. 종이 상자 하나라도 줄이려면 홈쇼핑을 하지 말고 수고롭더라도 마트나 시장에서 장을 봐야 하나.단풍을 즐기지 못한 채 가을은 가고 겨울이 닥쳤다. 올겨울은 겨울다우려나 모르겠다.

2023-11-29

숲으로 들다

배문경 수필가 친구들과 함께 숲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짐을 풀고는 숙소를 나서자 오후의 햇살이 맞은편 산으로 기운다. 노을의 황금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산 입구의 문을 열고 좁은 길로 들어서자마자 공기가 다르다.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폐의 가장 아래쪽까지 숲의 향을 끌어들였다. 편백의 신선함이 몸 끝까지 가닿기를 바라며 들숨으로 횡격막을 최대한 늘였다. 하지만 아무런 냄새도 느끼지 못했다.바닥에는 잣나무 열매가 떨어져 곰팡이가 피었고 측백나무와 잣나무 잎이 수북하게 쌓였다. 낙엽을 밟으며 올라가자 편백나무들이 훤칠하게 하늘을 향해 팔을 뻗었다. 시냇물을 건너 오르막을 향해가자 숲은 가슴팍을 열고 우리를 받아들였다.지난해 코로나에 걸리고 일주일간 애를 먹었다. 그리고 확연히 그 증거를 남겼으니 냄새 맡기와 맛 느끼기라는 감각기관을 잃었다. 몇 주 혹은 서너 달이면 좋아지리란 기대는 물 건너간 것 같았다. 1년이 지나도 감각은 돌아오지 않았다.다시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조금 아주 조금 나무의 청량한 향이 폐부로 밀려 들어왔다. 아…. 다시 후각을 얻은 것일까. 깊게 짧게 깊게 길게 숨을 내쉬고 들이쉰다. 사이다처럼 시원하고 싸한 기운이 콧속으로 빨려 들어왔다.편백나무 아래에는 넝쿨식물이나 다른 나무들이 자랄 수 없다. 피톤치드 때문이었다. 식물로부터 방산(放散)되어 주위의 미생물 등을 죽이는 작용을 하는 물질의 총칭이 파이톤사이드(Phytoncide)이다. 그래서 히노키로 만든 다양한 제품이 건강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팔린다.그 피톤치드를 찾아 이곳을 찾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난다고 했다. 나 또한 청량감으로 폐부에 시원한 공기를 선사하는 편백나무 숲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이었다.편백나무는 두 종류이다. 몸피가 매끈한 것은 화백나무이고 목재로 사용되었다. 표피가 거친 것은 측백나무라고 하며 오일이나 다양한 제품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그래서 가려움에 좋다는 진액 오일과 두피에 좋은 샴푸를 샀다. 피부보다 모공이 다섯 배나 커서 평소 사용하는 샴푸로 인해 상한 두피를 달래보려 한다. 진액을 손에 살짝 묻혀 흡입하자 저 깊은 폐부에까지 깊이 파고드는 시원한 느낌이 너무 좋았다.숲의 입구에 지어둔 오육십 년 된 옛집을 개조해서 만든 펜션과 편백나무를 이용해 지은 펜션 사이에서 다섯 여자가 선택한 것은 개조한 집이었다.숲과 집이 온통 편백이었다. 이제 삐꺽거리기 시작하는 나이이니 건강에 좋다는 것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렵게 예약하고 건강을 찾는 이 계획을 선택한 것이었다. 편백나무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란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 함께 한다.여름에는 키가 크고 겨울에는 부피가 커진다는 나무들, 육십을 바라보는 여자들의 삶도 키는 줄고 부피만 느는 시간이다. 힘겨운 추위를 이겨낼 때마다 내면에 좁은 나이테가 만들어지고 삶의 얼룩을 견뎌내고 따뜻해지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아픔도 슬픔도 질환으로 힘들어 하는 우리 모두가 저 나무들처럼 비바람이 불어도 나뭇잎이 떨어지고 추위가 와도 견뎌내는 힘이 이해와 사랑과 보살핌이란 것을 안다. 서로를 바라보며 주름진 얼굴 사이로 진액 같은 웃음이 흐른다.나무숲 위로 보름달이 떠올랐다. 나무는 그림자를 길게 늘이고 그 사이로 신선한 바람이 흐른다.다섯 여자가 숲을 바라보았다. 1888년 2월 아를에 도착한 직후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편지로 “나는 편백나무와 함께 별이 총총한 밤이 필요하다. 그런 밤은 아마도 잘 익은 밀밭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엔 정말 아름다운 밤이 있다”라고 썼다. 우리 또한 보름달 옆으로 그 언제보다 밝게 빛나는 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함께 외쳤다.“별이 빛나는 숲속에서 아름다운 하늘에 빠졌다”라고.

2023-11-29

동지(冬至)와 명리 이야기

24절기 가운데 22번째가 동지(冬至)다. 태양 황경이 270도에 위치하며, 올해는 12월 22일(음력 11월 10일)이 동지다. 대설(大雪)과 소한(小寒) 사이다. 이때 북반구에서는 낮의 길이가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다. 반대로 남반구에서는 낮의 길이가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다. 추위는 대략 이 무렵부터 강력해지기 시작한다.중국의 율력융통(律曆融通)에 의하면 입춘을 세수(歲首·새해)로 정한 중국 하(夏)나라는 인시(寅時)로, 소한(小寒)을 세수로 정한 상(商)나라는 축시(丑時)로, 동지(冬至)로 세수로 정한 주(周)나라는 정자시(正子時)로 하루의 시작을 정했다고 한다.동지가 반드시 음력 11월에 있었기 때문에 음력 11월을 동짓달이라 불렀다. 중국에서는 동지를 한 해의 기준으로 삼도록 했으나, 한대 이후로 입춘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동지가 든 달이 반드시 자월(子月)이 되도록 설정했다. 이 같은 영향으로 중국이나 중국이 만든 역법을 받아들인 나라에서는 동지가 드는 시간을 정확하게 계산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올해는 12월 22일 12시 27분이다.동지(冬至)의 뜻을 한자로 풀어보자면 ‘겨울에 이르다’라는 뜻이다. 겨울의 한 절기로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을 의미한다. 동시에 해가 다시 길어지는 시점이기 때문에 한 해를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로 예로부터 ‘작은설’이라고 했다. 고려 때는 동지를 설날로 지정했는데, 충성왕 때 설날을 음력 1월 1일로 바꾸었다. 동지를 한 해의 시작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동짓날 민간에서 하는 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팥죽을 먹는 것이다. 왜 동지에 팥죽을 먹을까? 팥죽에는 신앙적인 의미가 있어 귀신을 쫓는 기능이 있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동짓날 집 안에 있는 악귀를 쫓아내기 위해서 팥죽을 쑤어 집의 대문이나 문 근처에 뿌렸다고 한다.동지 팥죽은 단팥죽이 아니다. 찹쌀로 새알 크기 만한 새알심을 만들어 팥죽에 넣어 먹는다. 그리고 나이만큼 새알심을 먹는 풍습도 있다.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동지 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말과 연관이 있다.전통적으로 이날 팥죽을 쑤어 먹고 소똥과 팥죽을 대문과 마당에 뿌렸다. 이는 악귀와 액운을 내쫓는다는 뜻으로, 중국에서 비롯됐다. 또한 동지를 작은설로 부르며 크게 축하했다. 민간에서는 설날 떡국을 먹으면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것처럼 동짓날 팥죽을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고 했다. 이는 옛날에 동지를 정월(正月)로 삼은 풍속에 따른 것이었다.음력으로 11월 10일까지 드는 동지를 애동지, 아기동지라고 불렀다. 올해는 양력 12월 22일이 음력으로 11월 10일이라 애동지에 해당된다. 옛날에는 애동지에는 어린이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하여 팥죽을 쑤어 먹지 않는 대신에 팥 시루떡을 만들어 먹었다. 동지에 먹는 붉은 팥죽은 옛날부터 액운을 막는 절기 음식이다. 악귀가 붉은 팥을 싫어해서다.동지를 기점으로 하여 점차 낮의 길이가 길어지므로 많은 곳에서 축제일로, 또는 1년의 시작일로 삼았다. 서양에서도 낮이 점점 짧아지는 현상을 태양이 죽어가는 것으로 봤다. 동지를 기점으로 낮이 길어지는 현상을 태양이 되살아나는 것으로 생각하여 태양신을 기리는 동지축제도 있었다.자월(子月·11월)의 절기인 대설과 소한의 중심에 동지가 있다. 명리에서는 12지지 중 첫 번째가 자(子)이다. 방위는 북쪽이고, 색은 검정이다. 시간으로는 자시(子時·23~01시)이므로 기운이 시작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통감외기(通鑑外記)에 보면 자(子)를 곤돈(困敦)이라 했다. 곤(困)은 궁핍하다는 뜻이며, 돈(敦)은 소생하는 기틀이다. 그래서 옛 운(運)은 이미 다하고, 새로운 기틀이 다시 일어남을 뜻하는 것이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자(子)는 차가운 어둠에 웅크리고 있지만, 시기가 도래하면 불어난다는 뜻도 있다. 즉, 만물이 땅에서 불어난다는 것처럼 땅 아래에서 새끼를 치고 싹이 나는 기운이 그치지 않는다는 의미다.동물로는 쥐다. 쥐는 번식력이 강하여 계속 불어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혜롭고 총명하고 끼가 많다. 그리고 생존에 유리한 조심성이 발달했다. 직업으로는 야간 활동이나 연구, 보안계통이나 은밀한 일에 적합하다.맹자의 ‘이루장구’ 하편에 ‘상고시대에 11월 갑자 초하루 야반(夜半·00시)을 동지로 역원을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시 말해 한 해의 진정한 새해 첫날은 동짓날이 시작되는 시간대인 자시(子時·23~01)의 중간인 자정이 새해의 시작이다. 또한 동지는 주역에 지뢰복(地雷復) 괘에 해당하므로 일양(一陽)이 시생(始生)한다. 즉, 동지가 새해의 생명 기운을 태동하는 때이기에 동지를 새해로 정한 것으로 추측된다.올해도 추운 겨울이 예상된다. 이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가장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들에게 온정과 관심을 가지는 동지가 되길 기대해 본다.

2023-11-29

밥상머리 교육이 무슨 죄

우정구 논설위원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인성과 예절 등을 배우는 게 밥상머리 교육이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어른들은 어린이가 반말을 하거나 어긋난 행동을 할 때면 “버르장머리 없다”“밥상머리 교육이 안됐다”는 식으로 나무라는 것이 보통의 언사였다.지금은 가정이 해체되다시피하고 한두 자녀를 귀하게 키우다보니 밥상머리 교육이란 말을 쓰는 경우가 드물다. 밥상머리 교육은 가족과 더불어 식사하면서 예절, 절제, 나눔, 배려 등을 배우는 한국식 도덕교육이다.하버드대의 한 연구팀은 만3세 아이가 책을 통해 배우는 단어는 140개, 가족과 식사를 하며 배우는 단어는 1천개라는 보고서를 낸 적이 있다. 식사 시간의 대화가 언어습득과 구사에 매우 효과적이란 뜻이다.콜롬비아대서도 비슷한 연구가 있었다. 가족과 식사를 자주 하지않는 청소년은 자주 하는 청소년에 비해 흡연률은 4배, 음주률은 2배가 높다고 했다. 이런 결과를 보면 우리 어른들이 말하는 밥상머리 교육은 매우 과학적 근거가 있는 교육법이다.국민의힘 인요한 위원장이 이준석 전 대표가 버르장머리가 없는 것이 “부모교육 잘못”으로 말했다가 사과를 했다. 과한 표현으로 사과는 했지만 인 위원장의 의도는 한국식 밥상머리 교육의 참뜻을 말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정치적 표현으로 부적절한 부분이 있었으나 밥상머리 교육의 진정한 의미가 잘못 전파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대가족제가 사라지고 바쁜 현대생활로 밥상머리 교육을 가르칠 기회가 적어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사회공동체 일원으로 어른을 존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기본적 예절을 지키는 도덕문화는 유지되는 게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3-11-28

여권 주류세력은 ‘넓은 視野’를 가지길

심충택 논설위원 국민의힘이 10·11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참패한 지 50일이 다 됐지만, 아직 터닝포인트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혁신위가 민심을 끌만한 다양한 혁신과제를 내놨지만, 당 주류인 김기현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와 친윤핵심, 영남권 중진들이 혁신 흐름을 끊고 있다. 국민의힘이 내년 총선에서 야권에 질 경우, 현재의 당 주류 인사들은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총선이 현 판세대로 진행되면 야권은 수도권을 석권할 가능성이 크다. 민주당이 지금처럼 과반의석을 넘으면 입법·사법에 이어, 행정부까지 손아귀에 넣는다. 특검과 해임, 탄핵이 이어질 것이고, 현 정부의 3부기능은 모두 마비된다. ‘동학농민혁명군 명예회복법’ 같은 기상천외한 입법 폭주도 이어질 것이다. 책임은 현재의 여당주류 인사들에게 향하게 돼 있다.국민의힘 주류 인사들은 충분히 이러한 결과를 예상할 수 있음에도 혁신위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어깃장을 놓고 있다.민심이반 위기 돌파를 주도해야 할 그들이 눈앞의 자기이익에 몰두하면서 민심을 외면하는 것이다. 당내에서 유일하게 민심을 반영하는 혁신위원들이 “이대로라면 더는 못 하겠다”며 두 손을 드는 사태까지 왔다.당 혁신위는 내일(30일) 2호 혁신과제인 ‘불출마 또는 험지 출마’ 권고를 정식안건으로 의결하고, 지도부에 공식혁신안으로 제안할 예정이다. ‘주류희생’을 최종적으로 요구하는 최후통첩 절차다. 현재로선 당 지도부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확률이 아주 높다. 김 대표는 오히려 본인 주도하에 총선을 치르겠다며 당 장악력을 강화하고 있다. 같은 처지인 친윤·영남중진 의원들도 이런 김 대표를 응원하고 있다.혁신위가 당에 권고한 과제 중에는 TK(대구경북)를 비롯한 영남중진들의 희생도 포함돼 있다. 사실 수도권 유권자 입장에서 보면, ‘영남정치세력의 당내 권력독점’은 보수정당을 비토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 김영수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와 관련, 지난 23일 열린 대구경북언론인회 포럼에서 “TK세력의 당권독점으로 인해 선거의 승패를 좌우할 ‘중수청’(중도·수도권·청년층) 지지가 심각하게 떨어졌다”고 진단했다. 국민의힘이 영남일색인 현 지도부체제를 고집하면, 내년 총선에서 여당바람을 일으킬 동력을 만들 수 없다.당 혁신위도 이를 인식하고, 영남권 중진들이 희생한 빈자리를 중도·청년층으로 대체해 총선에서 외연을 확장하자는 과제를 내놓은 것이다.보수정당 역사에서 TK를 중심으로 한 영남지역 공헌도는 아주 높다. 김용판 의원(대구 달서병)이 언급했다시피, 이 지역 정치인은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위기시 당을 지켜온 주류세력이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영남당 이미지로 선거를 치르면, 승산이 없다는 점이다. 내년 총선은 대한민국의 국가적 안위와 직결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TK를 중심으로 한 여당 메인스트림(주류세력)은 시야를 넓혀, 인요한 위원장이 “나라가 먼저다”라고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2023-11-28

정의의 탈을 쓴 희롱과 저주

교사와 여고생이 실랑이하는 영상이 뒤늦게 화제가 됐다. 지난해 3월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일이다. 수업 시간에 매점에 가려는 학생을 제지하려 교사가 가방을 붙잡는 과정에서 머리칼이 함께 잡힌 게 발단이 됐다. 학생은 “저도 남의 집 귀한 딸”이라며 따졌다. 선생님에게 대드는 여고생의 까랑까랑한 목소리와 영상을 찍는 친구의 킥킥대는 웃음소리 속에서 교사의 훈계는 맥 빠진 듯 들렸다.난리가 났다. 댓글창엔 “교권 추락의 현주소”라며 서이초, 호원초 사건과 묶어 탄식하는 글, 학생인권조례와 촉법소년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 가정교육을 질타하는 글이 넘쳐났다. 다수 언론에서 보도했는데 거의 모든 기사에 백여 개에서 천 개 넘는 댓글이 달렸다. 그만큼 사회적 공분을 산 것이다. 특이한 건 다른 이슈들은 기사마다 ‘베댓’(공감수가 많은 댓글)이 다양한 데 비해 이 사건 기사들에서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댓글은 한결 같다. “꼬락서니 보니 어떤 인생을 살지 뻔하다”는 것.영상 속 학생은 짧고 타이트한 교복 치마를 입고 있다. 모범생처럼 보이진 않는다. 학생답지 않은 옷차림과 선생님에게 대드는 ‘버르장머리 없음’이 합해지면서 물어뜯기 좋은 빵이 됐다. 피라냐 떼처럼 달려든 어른들은 정의감과 도덕심에 불타올라 말했다. “룸망주”(룸살롱 유망주), “귀한 딸 밤마다 어디 출근하는지 알면 어머니 가슴 찢어질 듯”, “자퇴하고 술집 취업?”, “노래방 도우미”, “교복 보면 수준 보임. 앞으로 막 살겠군”, “탬버린 흔들고~”, “나가요”(성매매 여성을 일컫는 은어)라고.정의라는 가면을 썼지만 혐오의 민낯이 고스란히 보인다. 저열한 인상비평과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천박한 성희롱이다. 성별 및 세대별 댓글 비율을 보면 40대 남성이 압도적이다. 교복 치마 줄여 입었다고, 선생님한테 대들었다고 딸뻘 여학생더러 “나가요” 운운하는 게 과연 올바른 훈육인가?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을 하면 찔리는 데가 있을 것이다. 아니다. 이 또한 인상비평이니 관두겠다.치마가 문제인가 행실이 문제인가? 이미지와 행실이 짝을 이뤄 확증편향에 박차를 가했겠으나 하나를 보고 열을 안다면 점집을 차려라.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상황 안에서만 판단한다지만 지금 보이는 것으로 장차 보이지 않는 것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교사에게 대든 걸 나무라면 된다. 교복이 불량한 걸 지적하면 그만이다. 하나를 보면 하나만 봐라. 고작 한 순간 인상으로 어린 소녀의 남은 인생 전체를 폄하하고 저주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단정한 옷차림으로 대들었다면? 짧은 치마를 입고 예의바르게 행동했다면? 교복 치마는 상대적 조건일 뿐 절대적 근거가 아니다. 댓글을 단 이들은 “모든 룸살롱 여종업원은 짧은 치마를 입는다. 여고생은 짧은 치마를 입었다. 그러므로 여고생은 룸살롱 여종업원이 될 것이다”라는 유치한 삼단논법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솔직해지자. 훈육이 아니라 희롱하고 싶었다고, 걱정이 아니라 저주하고 싶었다고.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유행에 휩쓸리기 쉬운 나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라 에고가 강하고 별 이유 없이 기성세대에 피해의식을 가질 때다. 당신들은 안 그랬나? 1990~200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오토바이 폭주하고, 교복을 ‘쫄바지’, ‘항아리바지’로 줄여 입거나 아예 ‘똥 싼 바지’로 늘여서 “온 동네 다 쓸고 다닌다”며 등짝 맞던 세대가 지금의 40대다. 선생님한테 대드는 일이야 흔했다. 그러고 보니 근래의 교권 추락은 학부모들이 교사들을 낭떠러지로 몬 결과가 아닌가? 정작 ‘내 새끼 지상주의’에 빠져 남의 자식 귀한 걸 모르는 학부모들 대부분이 40대다.사진과 영상은 많은 걸 말하지만 파편이자 단면일 뿐이다. 이미지는 실재를 왜곡하고, 나중엔 실재와 무관하게 자립한다. 영상 하나가 한 소녀의 미래에 ‘막장 인생’ 낙인을 찍은 것처럼. 해당 학생과 영상을 촬영한 학생 모두 선생님과 오해를 풀고 잘 지내다가 개인 사정으로 자퇴했다고 한다. 온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지금 얼마나 두려울까. 잘한 건 없으니 반성해야지. 그 반성을 통해 성숙해야지. 검정고시든 취업이든 꿈을 향해 나아가야지. 한 번의 잘못으로 인생 전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과연 얼마나 바르게 사는지 모르겠다만 가치 있고 행복한 삶으로 그들이 틀렸음을 보여주렴. 너는 귀한 딸이다.

2023-11-28

삶의 진주 목걸이 꿰기

급작스레 떨어진 기온 탓에 몸을 움츠리게 되는 겨울날. 느릿느릿 산책하던 거리는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게 되었고, 캄캄한 어둠으로 잠긴 아침은 평소보다 더 눈을 뜨기 힘들게 되었다. 급작스런 계절의 변화와 함께 나의 기분도 하루에 몇 번씩 오르내리고 있다. 이런 나약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몇 날 며칠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스터츠, 마음을 다스리는 마스터’ 속의 스터츠 박사는 ‘나약함을 드러내라’며 말을 건네 왔다.영화는 미국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 필 스터츠(Phil Stutz)와 ‘머니볼’, ‘더 울프 오브 윌 스트리트’로 얼굴을 알린 배우 조나 힐(Jonah Hill)이 등장한다. 조나 힐은 스터츠 박사와 만나 습득한 심리 치료 기술을 소개하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취약성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불가능을 상징하는 목소리를 스터츠 박사는 X-파트로 명명한다. X-파트는 비판하는 자아이다. 반사화적이며 불가능을 상징한다. 스터츠는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X-파트를 없앨 수는 있지만 완전한 삭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X-파트를 제거하면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삭제가 불가능하다면 이것을 똑바로 마주할 수는 있어야 한다. 이를 마주하면서 인정하게 된다면 성장을 이끌어오기 때문이다. 삶은 고통, 불확실성, 끝없는 노력의 3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 3가지 측면을 인정하고 극복하는 과정이 비로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삶의 고통과 불확실성, 끝없는 노력을 인정하고 행하기 위해선 어떤 게 필요할까? 그럴 때 스터츠는 ‘진주 목걸이 기법’을 이용하라고 조언한다. 여기서 진주는 행동이고 목걸이는 행동을 계속 이어가는 행위다. 아침에 일어나는 행위도 진주알 하나이고, 훌륭한 일을 하는 것도 진주알 하나다. 진주알 하나하나에 일의 가치를 매기는 것이 아닌,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진주알로 대입해 계속 행동하며 나아가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어찌저찌 진주알을 실에 꿰었지만 진주알 속에 이물질이 섞여 있을 수 있다. 이물질 탓에 진주알은 매끄럽지도 못하고 거무튀튀한 탓에 유독 튀어 보인다. 하지만 이를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진주알 꿰기는 성공과 실패라는 결론이 중요하지 않다. 진주알 속엔 이물질이 섞여 있다 하더라도, 진주알은 진주알이라는 존재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니 진주알 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 계속 진주알을 꿰어 나아갈 수 있다는 의지다. 그 의지를 발판 삼아 진주알 꿰기에 의미를 찾고 스스로의 믿음만 있다면 삶이라는 진주 목걸이는 꽤 그럴 듯 해 보일 것이다.2주 전까지만 해도 나는 급격하게 변화는 환경 탓에 혼란스러웠고, 현재까지 삶의 어떤 부분에서 성공했고 실패했느냐의 초점에 맞추어 오랜 고민을 했다. 이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삶은 계속되었고 빠른 흐름에 맞추어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X-파트에 가두어 더욱 나약해지기만 했다. 다행히 이 시점에서 습득한 ‘진주알 꿰기’ 기술은 X-파트를 마주하는 데에 진취적인 태도를 지니게끔 도와주고 있다.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아가기 위해선, 외면했던 과거의 나 자신과 화해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 했다. 숨기고 싶은 과거의 나는 그림자 속에 잠겨 있다. 거의 대부분 수치스러운 기억이거나 타인은 물론 나 스스로에게도 숨기고 싶은 과거의 기억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내가 저 그림자를 꺼낼 수 있을까? 생각하다보면 다시 뒷걸음치게 된다. 스터츠 박사는 그림자는 결국 ‘나’이기에 그때의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과거의 수치가 현재까지 이어져 스스로 파괴적인 성향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스터츠 박사 또한 외면하고 싶은 나 자신과의 화해가 어렵다. 그 또한 어린 스터츠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X-파트가 있었고 그 속에선 그저 힘없이 나약한 인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스터츠 박사 또한 이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취약성을 더 세밀하게 마주한다. 그는 취약성을 마주하며 마치 기분이 하늘을 나는 것만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자신의 나약함을 마주하며 느끼는 감정을 쉽게 가늠할 수 없지만 내가 발견한 건, 그는 그림자를 드러내어 인정하였다는 것이고 거듭 진주 목걸이를 꿰어가며 고통을 극복해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 찰나의 장면에 희망이 있었다. 그 희망을 믿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용기가 생겼고 동시에 삶의 방향이 묵직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2023-11-28

삶의 확실성을 위협하는 불길한 어둠의 공포

에드가 앨런 포는 미국 문학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특색 있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최초의 전문 탐정인 오귀스트 뒤팽을 창조했던 미스터리 작가이기도 하고, 특유의 기괴하고도 섬뜩한 분위기를 가진 작품들을 다수 써서 이후 소설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어셔가의 몰락’은 포가 1839년에 쓴 단편소설로 직계로만 이어진 어셔 가문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과 그것의 목격자가 된 나의 기록을 담고 있다. 어셔는 자신의 쌍둥이 누나를 죽여야만 하는 충동과 그로부터 얻게 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린다. 사진은 에드가 앨런 포. 우리의 삶은 단단한 현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눈을 조금만 돌리면 도무지 알 수 없는 대상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은 그럴 것이라고 알고 있고, 그럴 것이라고 믿고 있는 대상은 금방 그 존재를 잊어버리지만, 도무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는 것, 도무지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공포를 집어 먹는 존재이다.내가 익숙하게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 사이에 도시 알 수 없는 요소들이 끼어들어 그것이 더 이상 낯익은 대상이 아니게 되면, 그 관계는 공포가 된다. 철근콘크리트나 나무 같이 단단한 재료로 만들어진 단단한 공간들 사이에 존재하기 마련인 빈공간의 어둠은 인간의 태연한 앎을 빨아들여 불안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어낸다. 간단하게 ‘보이드(void)’라고 말해버릴 수 없는 공간과 관계의 공동은 내가 딛고 서 있던 단단한 실재의 토대를 무너져 내리게 만든다.이처럼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공간과 공간, 때로는 시간과 시간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비어있음에 주목했던 최초의 작가는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1809~1849)가 아니었을까. 물론 그 이전에도 그 세계를 바라보았던 작가들은 존재했지만, 언어와 글쓰기라는 도구로 그 세계에 대해 그려냈던 혹은 그 빈공간을 부조해냈던 사례는 아마도 그로부터 기원하지 않을까 싶다. 그 이전에는 ‘어둠’이라는 주제조차 빛을 비춰서 반사된 윤곽을 그려냈던 것에 불과했다면, 빛과 빛 사이, 단단함과 단단함 사이에 존재하는 불길한 어둠에 대해 최초로 그려냈던 것은 바로 포였다.에드가 앨런 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어셔 가의 몰락’은 짧은 단편소설이지만, 작가가 이 실마리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걸어들어가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그 어둠의 세계는 깊고도 깊다. 모든 불길한 예감들이 그렇듯 책을 덮은 이후에도 어셔가가 내뿜는 어떤 기운은 독자를 휘감고 놓아주지 않는다.구름이 무겁게 내리누르는 적막한 가을날, 시골길을 따라가던 나는 황혼이 내릴 무렵 옛 친구인 로데릭 어셔의 집이 보이는 곳에 다다른다. 그 황폐한 집을 보면서 나는 시적인 감정이 떠오르기는커녕, 대체 어디에서 솟아난 것인지 알 수 없는 침울함과 불안함에 사로잡힌다. 그러면서 이 음울한 집에서 몇 주간 머물기로 한다. 친구인 어셔는 오랜만에 나에게 연락해서 자신이 병에 걸려 있다며 나를 만나보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몇 주 동안 어셔의 저택에 머물면서, 나는 어셔의 쌍둥이 누나인 마델린이 지각불감증과 전신경직증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다가 어셔는 자신의 누나가 죽었다고 하면서 두 사람은 누나의 시체를 관에 넣어 지하실 깊은 곳에 넣어둔다. 그 이후 나는 신경과민 증세를 겪게 되고, 어셔와 마찬가지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나와 어셔는 그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소설을 읽는데, 그들은 저 지하로부터 들리는 둔탁한 소리들을 듣는다. 어셔는 그 저택을 휩싸고 있던 공포의 실체에 대해 말해주고, 결국 그것에 잡아먹힌다.포의 이 ‘어셔가의 몰락’은 지금 우리에게는 익숙한 공포로 가득한 가족 드라마를 보여주고 있다. 집의 망령과 하나가 되어 누나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관에 넣어 지하에 매장했던 어셔는 저 깊은 무의식에서부터 보내오는 강박과도 같은 소리를 듣는다. 기겁해서 놀라 집을 뛰쳐 나온 내 뒤로 그 저택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나를 사로잡았던 그 분명하고도 명확한 공포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무너져 내린다. 그것을 흘깃 본 사람만이 그것의 존재를 증언할 수 있다. 그 불길하고도 강박적인 어둠이 그곳에 실제로 존재했다고.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3-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