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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도 정의감 중독자일까?

유영희 작가 지난 주 목요일에 동네 문화 행사에 다녀왔다. 지역 문화 자원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정책 토론회였는데, 공공도서관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있어 관심이 갔다. 그런데 자료집을 보니, 오프닝 공연 연주자가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의 약력은 누락되어 있고, 연주곡의 작곡자도 잘못 표기되어 있었다.행사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런 문제를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음날 행사를 주관한 기관에 전화하니, 담당자는 그쪽에서 보내준 대로 편집했다며 같은 말만 반복한다. 결국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아보고 다음부터는 오류가 없도록 꼼꼼하게 살피겠습니다. 이렇게 답변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하니, 담당자는 내 말을 앵무새처럼 똑같이 따라한다. 그러자 조금씩 올라오던 감정이 고삐가 풀리면서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아차, 나도 정의감 중독자인가?’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갔다.한때 ‘왜 분노해야 하는가’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을 정도로 분노는 정의감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감정이다. 그러나 안도 슈스케는 ‘정의감 중독 사회’에서 ‘분노’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공공의 이익과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필요하지만, 정의감에 휩싸여 분노가 폭주하면 정의 실현은 간 데 없고 자신에게도 사회에도 해롭기만 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감정을 일그러진 정의감이라고 하면서, 저자는 ‘긴 안목으로 보았을 때 나와 다른 사람에게 건전한가?’를 숙고하고, 나아가 관여할 필요가 있는 일인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가늠해보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여하고 싶다’와 ‘관여할 필요가 있다’를 구분하는 일이다.이런 이야기는 자칫 소시민적 행복을 추구하라는 말처럼 들릴 수 있다.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일은 개인이 관여하기도 어렵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관여할 필요가 있는 일은 해야 하며, 다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렇게 하면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분노는 지혜로운 이성으로 대체되고 정의가 실현될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이것을 참고해서 내 행동과 감정을 점검해보니, 관여할 필요성보다는 평소 오타 하나에도 지나치게 예민한 나의 특성이 작동해서 관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소소한 에피소드지만, 이렇게 올바름을 추구하는 행동의 기저에는 해결을 기다리는 마음이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충분했다.여기저기 SNS에 분노를 폭발하는 방식으로 갈등을 증폭시키는 것은 정의감에 중독된 현상이다. 우리 사회에는 정의감에 중독된 사람들이 많다. 이런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노력도 해야 하지만, 사회 교육 기관에서도 개설하면 좋겠다. 분노하는 내 마음의 기저를 인식하는 연습은 혼자만 하기보다는 사회적으로 확산될 때 더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관여할 필요가 있고, 할 수 있는 일을 차분하게 실천할 때 정의는 더 잘 실현된다.

2023-10-15

순우리말을 사랑하자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올해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지 577년이 된다. 비가 올 듯한 날씨에 베란다 밖으로 태극기를 달고 고개 내밀어 살펴보니 130여 가구의 아파트 벽면에는 다섯 집 정도가 걸려있다. 국경일에 대한 국민 의식이 좀 더 고양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기념식 중계방송을 보며 한글날 노래를 3절까지 따라 불러봤다. ‘한글은 우리 자랑이요 문화의 터전이며 생활의 무기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라고 다짐하고 보니 한글과 우리말 사랑의 마음이 잔잔히 일어난다. 한글은 4글자(ㅿㆁㆆㆍ)가 없어지고 자음 14자, 모음 10자 총 24자로 소리가 나는 대로 쓸 수 있는 세계에서 제일 우수한 글자이다.요즈음 글을 읽다 보면 그 의미를 잘 모르는 말들이 있다고 한다. 말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변화한다. 특히 요즘 젊은 세대들의 휴대폰 대화와 문자전송 등에서 사회와 문화의 발전에 따른 지식으로 신조어가 만들어지고 유행되기도 하여 우리말에 편입되거나 짧게 유행하고는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특히 한글은 거의 모든 발음을 나타낼 수 있기에 한자어나 외래어로 유입된 지 오래되어 발음이 변하여 고유어로 오인되는 귀화어(歸化語)도 상당히 많다. 우리 고유어라고 생각되는 단어들이 외래어일 수도 있고, 순우리말인지 아닌지 그 여부를 명확하게 가려내는 것이 어렵기에 논란도 있다.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한자문화권에 들어있어서 한자에서 유래된 단어가 많고 일제 36년을 거치면서 기초적인 단어는 일본어로 대체되었으며 또 나라가 발전하며 서방 국가들과 많은 왕래로 영어가 스며들었다. 이러한 언어문화 변화의 다양화로 우리 고유어가 사라지는 것이 두렵다고 그 유입을 차단하기란 불가하고 또 적합하지도 않아 다른 방향의 언어순화 운동이 필요하다고 본다. 새로운 개념이 들어올 때 한자어를 이용하기 편하고, 고유어를 한문으로 음역(音譯)하면서 그에 비슷한 한자를 쓴 결과 순수한 우리말과 구별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글을 쓰면서 가능한 한 순우리말을 쓰려고 노력하지만 함축된 뜻을 전하려면 한자어를 쓰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순우리말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순우리말인 줄 알았던 바람(風)과 가람(江)이 고대 중국어에서 왔고 붓, 쇠도 어원은 중국어에 있다고 하니 놀랍다. 그러고 보니 우리 선조들은 중국대륙에서 옛 문화를 공유한 탓이라고 봐야할까? 감자 고추 대추도 한자어의 변형이며, 심지어 김치도 침채(沈菜)라는 어원을 갖는다는 설도 있다. 이와 반대로 한자어로 오해받는 순우리말에는 근심, 마감, 거문고 등이 있고 생각도 생각(生覺)이 아니란다. 우레도 우뢰(雨雷)가 아닌 순우리말이고 에누리도 일본어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고유어로 착각하는 것에는 가짜, 공부, 귤 그리고 수를 셀 때의 ‘개(個)’도 한자어이고 냄비, 가방은 일본어, 담배와 빵은 포르투갈 언어라고 한다.캘리그라피 공부를 하며 외래어 같은 순우리말 몇 개를 듣고 참 아름답다고 느꼈다. ‘자연 그대로 변함없는-온세미로’ ‘사랑하는 사이-예그리나’ ‘즐거운 내일-라온하제’ 등 순우리말을 많이 사용하여 꽃가람 흐르는 ‘세상의 중심-가온누리’가 되길 바란다.

2023-10-12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세력들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사람이나 폭력이 아닌 법이 지배하는 국가원리’를 법치주의(法治主義)라고 한다.‘법 우위의 원칙에 따라 모든 국가 작용을 법규범에 따르게 함으로써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려는 원리’를 일컫는 말이다. 오늘날 대다수 국가들이 법치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그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진보된 통치원리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일 것이다. 국가권력을 단순히 형식적인 법률에 구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헌법의 실질적인 법 가치에 구속시키는 원리, 즉 모든 국가권력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할 의무를 지게 되고, 모든 법률은 그 헌법의 가치를 실현할 때에만 법률로서의 효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문재인 좌파정권은 좌경화된 정치세력이 어떻게 법치주의를 파괴하는지를 잘 보여 주었다. 그들이 ‘촛불혁명’이라고 찬양하는 대규모 군중시위부터 초법적인 요소가 없지 않았다. 그 세를 휘몰아 대통령을 탄핵하고 좌파정권을 탄생시켰고, 그야말로 민중혁명인 듯 일거에 방송매체를 장악하고, 적폐청산을 명목으로 우파정권 인사들을 모조리 사법처리하는 등 정치권의 좌경화 물갈이를 단행했다.대통령을 탄핵으로 몰아간 격앙된 민심을 지속적으로 붙잡아 놓기 위해서는 포퓰리즘과 프로파간다가 필수라는 걸 알았다. 그런 전략이 적중해서 21대 총선에서 180석을 확보해 입법부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공수처법과 검경수사권조정법(검수완박), 임대차3법, 기업규제3법, 노동3법, 남북관계협력법(대북확성기, 대북전단 금지), 언론 중재법 등을 무소불위로 밀어붙였다. 정권이 바뀌어도 입법부는 조금도 위축되는 법이 없이 사사건건 새 정부의 발목을 잡고 지난 정권과 좌파정당의 비리를 덮기에만 혈안이다.문재인 정권의 사법부 장악은 법치파괴의 결정판이었다. 좌경화 판사들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회장을 맡았던 김명수 춘천지방법원장을 대법원장에 임명하면서 정부의 눈치를 보는 사법부로 만들었다. 그 좋은 예가 조국 사건, 드루킹 사건 등에 유죄를 선고한 임성근 판사에게 국회가 탄핵을 강행하려 하자, 그것을 이유로 임 판사의 사직서를 받아주지 않은 것이다. 그래 놓고 국회에 나가서 거짓말까지 하였으니 대한민국 사법부가 행정부와 입법부의 하급기관으로 전락한 것이다.김명수 대법원장 행태에는 사법부의 독립이나 법의 공정성, 사회정의구현 같은 기본적인 법의식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법연구회 출신들로 사법부의 요직을 채우는 등 코드인사를 자행하고, 관례를 무시하고 서울 중앙지법에 김미리 부장판사를 4년 동안 유임시켜 울산시장 부정선거에 대해서는 기소한지 2년3개월 동안이나 뭉개는 재판지연을 하게 했다. 김명수는 대법관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곳곳에 그가 심어놓은 판사들은 여전히 좌편향적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다. 최근에 이재명 야당대표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서울중앙지법 유창훈 판사도 김명수가 심어놓은 사람이다. 국회에서 체포동의안이 가결 되었음에도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영장을 기각한 것도 그런 연유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3-10-12

DGB금융그룹과 김태오 회장의 행보

홍석봉 대구지사장 DGB대구은행이 창립 56주년을 맞았다. 대구은행은 1967년 최초의 지방은행으로 출범한 후 반세기 넘게 지역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왔다. 대구은행은 지난 6일 56주년 창립기념일을 맞아 전 직원이 나서 사회공헌활동을 하고 지역민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자축했다. 하지만, 만 56년이 된 대구은행의 안팎 사정은 그렇게 녹록치 않아 보인다. 급격한 디지털화 등 금융환경 변화와 금융 당국에서 조여오는 지배구조 개선 요구 등에 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특히 김태오 DGB금융지주 회장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다가 주춤한 시중은행 전환은 선결과제다. 그간 제기됐던 CEO리스크 극복과 각종 일탈행위로 드러난 내부통제 부실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전임 회장에 이어 불거진 CEO의 사법리스크는 DGB금융그룹의 골칫거리다. 어떻게 해서든지 털고 가야 한다. 그리고 증권계좌 불법 개설로 실추된 은행의 신뢰도 빨리 회복해야 한다. 책임 소재를 가려 문책하고 재발방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금융감독원과 금융위원회 수장이 최근 1주일 사이 DGB금융그룹과 김태오 회장에 대해 연달아 경고장을 날렸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5일 김 회장의 3연임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회장후보추천위원회 구성을 앞두고 불거진 연령제한 규정을 바꾸려는 시도와 관련,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며 현 회장이 재선임될 수 없다며 못 박았다.국정감사에서도 지적됐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대구은행의 불법 계좌개설 파문이 시중은행 전환 심사 과정에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라며 대구은행이 추진 중인 시중은행 전환에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대구은행의 불법 계좌개설 파문을 비롯한 비자금 조성, 채용비리, 캄보디아 공무원 뇌물 증여 등 대책과 질의에 대한 답변 과정에서 나왔다.김태오 회장은 2018년 5월 전임 박인규 회장이 불법 비자금 조성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됨에 따라 경영 공백이 생긴 DGB금융지주의 구원투수로 영입됐다. 이후 연임에 성공했고 2년간 대구은행장을 겸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캄보디아 투자와 관련, 검찰에 기소됐다. 황병우 은행장과 사외이사 선임 등과 관련해서도 말이 나왔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이 김 회장의 3연임을 염두에 둔 행보가 아니냐는 것이 금융계 안팎의 시각이었다. 여기에 불법 계좌 개설이라는 돌발변수가 생겼고 회장후보 관련 규범 변경 논의가 일자 김 회장의 3연임 논란이 불거졌다. 금감원은 이참에 DGB금융의 지배구조 전반을 살펴보고 있다.김 회장의 임기는 내년 3월 주총까지다. 경영안정 등 치적도 있지만 사법리스크와 내부관리 문제는 DGB금융그룹에 큰 부담이다. 금융당국은 경고음을 보내며 DGB금융그룹과 김 회장을 압박하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벌써 김 회장의 퇴진과 후임자를 거론하는 분위기다. DGB금융그룹이 하루빨리 털고 일어나길 바란다. 신뢰를 되찾고 시중은행 전환을 성공리에 마무리해 전국적인 은행으로 거듭나는 것이 지역민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다.

2023-10-12

최강 예비군

우정구 논설위원 인구가 적어 예비군 의존도가 높은 이스라엘의 군병력 운용 방식에는 많은 나라들이 관심이 많다.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스라엘은 약 40만명의 예비군을 긴급 소집했다. 이때 외신들은 “이스라엘처럼 빠르게 예비군을 소집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 불가능한 일”이라 평가했다.이스라엘은 인구 780만명으로 상설군은 17만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유사시에는 45만명의 예비군을 현역처럼 부릴 수 있어 막강한 전력을 자랑한다.이스라엘 남성의 의무 복무기간은 3년이고 여성은 2년이다. 이들은 함께 입대해 소부대를 편성하고, 복무기간이 끝나면 해당 부대를 통째로 예비군 부대로 전환시킨다.전환된 부대는 이후 약 20년간 매년 소집 훈련을 같이 받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때 이들은 평생 전우이자 친구로서 전우애를 다지게 된다. 이런 전우애가 막강한 군사력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만이 가진 독특한 예비군 운용방식이자 장점이다.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통치하는 이슬람 무장단체 하마스와 이스라엘간 전쟁을 보면서 특별히 눈길이 가는 뉴스 중 하나가 이스라엘 예비군의 귀국 행렬이다. 각국에 흩어져 생업에 종사하던 이스라엘인들이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으로 공항으로 속속 집결되는 모습은 참으로 참신하고 이색적이다.로이터 통신은 “프랑스 파리의 국제공항에도 유럽에서 이스라엘로 돌아가려는 이스라엘 청년들이 줄을 섰다”고 보도했다.중동에 많은 나라와 적을 하면서도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이스라엘에는 이런 막강한 예비군이 건재하기에 국토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3-10-12

소설 ‘달꽃’과 ‘덴동어미전’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며칠 사이 두 권의 소설을 읽었다. 250쪽 내외 분량의 짧은 소설이라 단숨에 읽을 정도로 부담스럽지 않았다. 둘 다 여성 소설가의 작품에 여성이 주인공인데다 경상도 사투리를 활용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었다.‘달꽃’은 지난 8월에 나온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작가 이화리는 경주에서 나고 자라 경주를 문학의 뿌리로 삼은 작가다. 20년 전 잠깐의 인연이 있어 아주 가끔씩 소식을 주고받기도 하는 사이다. 작품활동을 왕성하게 하진 않지만 글이 야물고 내공이 깊다. 신간이 반가웠다. ‘촌년’ 작가라고 밝힌 그녀는 ‘촌이야기’를 ‘촌말’로 쓰겠다고 작가의 말을 대신했다. 작심하고 경주를 배경으로 경주 사투리를 사용하겠다는 거다. 130년 전쯤 전 경주 안강, 현곡 등을 배경으로 경주의 이야기를 경주의 말로 쓴 ‘달꽃’은 여성만의 신체적 생리적 능력을 이야기한다. 터부시되어온 여성의 달거리를 인간의 존엄과 우주적 신성으로 드러냈다. 또한 여성에게만 강요했던 순결 이데올로기를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꾸짖고 달래고 어루만진다. 방언학자 이상규는 발문에서 “통상 터부시되어온 달거리와 경상도 방언의 고유성을 오묘하게 복원시킨 소설”이라며 여성들에겐 위안과 감사를 경주인들에겐 토착적 언어의 선물이 될 것이라며 치하했다.일부러 찾아 읽은 ‘덴동어미전’은 경북대 도서관에 소장된 ‘소백산대관록’이라는 필사본 속에 있는 내방가사 ‘화전가’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화전가는 경북의 여성들이 짓고, 필사하고 낭송하는 문학인 내방가사 중 흔한 유형의 가사다. 그 중 ‘경북대본 화전가’는 구성이 독특하고 내용과 묘사가 특히 뛰어나서 문단에서 크게 평가하는 작품이다. ‘소백산대관록’이 1938년 필사되었는데, 작중 1886년(고종 23년) 괴질에 대한 언급이 있어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도 130여 년전쯤으로 거슬러 짐작할 수 있다. 경북 영주 순흥을 배경으로 ‘덴동어미’라는 등장인물이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담의 장편가사이다. 이방집 무남독녀로 태어난 그녀가 네 번의 결혼과 재혼을 반복하며 살아온 굴곡진 이야기를 화전놀이라는 여성들만의 유희 장소에서 수다로 풀어낸 대서사시이다. 이 가사의 배경이 영주 순흥이고 덴동어미가 이곳 출신인데다 화전놀이에 참여한 여성들이 영주 인근에서 결혼하여 온 여성들이라 이 지역의 사투리가 주로 쓰였다. 덴동어미가 30여 년을 예천, 상주, 경주, 울산, 영해를 떠돌아다니는 동안 그 지역의 방언들이 사용되기도 했으나 주로 경북 북부지역의 사투리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경상도 사투리 구사가 예사롭지 않은 박정애 작가 역시 경북 청도 출신이었다.경북 출신의 여성 소설가가 경북의 사투리로 쓴 130여 년 전의 여성이야기라는 점에서 두 소설은 많이 닮았다. 주인공 여성들의 인생유전이 남달랐음에도 그들을 따뜻하게 보듬고 스스로 당당하고 서로 격려하는 장면 또한 닮은꼴이다. 사투리는 눈으로 읽기보다 소리내어 읽어야 맛이 사는 글말이다. 나직히 소리내어 읽으니 나는 아예 소설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곳 그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얘기하고 있었다.

2023-10-11

경북예술의 미래지향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높아지는 하늘과 서늘한 바람 결에 산과 들의 빛 어림이 나날이 짙어가고 있다. 푸르던 들판은 차츰 황금물결로 넘실대고, 산자락의 잎새는 가볍게 흔들리며 엷게 물들어가고 있다. 청록을 자랑하던 수풀은 기온의 변화에 하나씩 잎사귀를 떨구거나 변색으로 수런대며 서서히 산하를 물들일 채비다. 이른바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번째의 봄’이라는 가을은, 햇살과 바람과 구름과 이슬이 번갈아 초목을 쓰다듬고 어우르며 두번째의 봄을 부르고 있다.그렇게 가을이 오면 사람들의 가슴도 설렘과 그리움으로 물들기 마련이다. 화사한 단풍에 젖어 구르몽의 시를 읊조리기도 하고 흩날리는 낙엽따라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는가 하면,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파란 하늘과 오색영롱한 풍엽은 감성의 바다에 빠져들게 하기도 할 것이다. 눈으로 보이고 귀에 들리는 자연의 변주곡이 온갖 상념(想念)의 촉수를 자극하는 10월은, 다채로운 축제와 전시·공연이 많고 각종 행사가 줄을 잇는 문화의 달이기도 하다.대표적인 것이 10월 첫 주부터 열린 경북예술제가 아닐까 싶다. 경북예술인들의 창작의욕을 고취시키고 예술을 통해 도민의 정서순화에 이바지하며 새로운 문화 경북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제45회 경북예술제’ 개막식이 지난 6일 경산에서 열렸다.민족의 스승이신 원효대사, 설총선생, 일연선사를 기리는 삼성현(三聖賢)역사문화공원 야외공연장에서 경북도 행정부지사, 경산시장 등의 내빈과 경북예술인, 시민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억의 노래가락과 신명난 타북 마당, 경북예술상 시상, 축하공연 등이 진행되는 동안 노을 마저 곱게 피어나 시종 흥겹고 아름다운 예술제의 분위기에 젖어 들었다.개막식을 시작으로 (사)한국예총 경상북도연합회 산하의 8개 단체에서는 경산시 및 기타 지역에서 부문별 특색있고 독창적인 전시, 공연 등 한마당 축제의 장이 성황리에 펼쳐졌다. 문인협회에서는 경북예술센터에서 ‘2023 경북문인 글과 그림전’을 다채롭게 선보이고, 미술협회에서는 아카이브 영상으로 온라인 작품전을 열었는가 하면, 사진과 음악을 비롯해 팝스 연주회, 연극, 국악한마당·무용공연 등 다양한 장르의 전문성을 살린 작품과 공연을 준비하여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도민들에게 풍부한 볼거리, 예술향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경북예술의 정체성과 위상을 재정립하고 지속가능한 문화융성의 기틀을 다지는데 일조했다.경북예술인들의 땀과 열정으로 펼치는 경북예술제는 경상북도 최대의 문화축제이다. 장르별, 지역별 작가들의 예술적 가치와 문화적 창조력이 지속적으로 발현될 수 있도록 창작활동을 지원하여, 지역 고유의 풍성한 문화유산과 잠재력을 발굴, 접목하여 미래지향적인 21세기 대한민국 예술발전의 한 축을 담당해 나가야 할 것이다.정치와 경제, 인구 등의 중앙집중현상이 심화되고 있다지만, 문화와 예술의 기반은 얼마든지 지역성을 살린 특성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문화로 소통하고 예술로 교감하는 일상이 윤택하고 아름답듯이, 지역 문화예술의 발전이 곧 지역민들의 삶의 질을 한층 높여줄 것이다.

2023-10-11

아이라는 세상

배문경수필가 “당신이 이 세상을 있게 한 것처럼 아이들이 나를 그처럼 있게 해주소서. 불러 있게 하지 마시고 내가 먼저 찾아가 아이들 앞에 겸허히 서게 해주소서.” -김시천의 ‘아이들을 위한 기도’ 중에서‘행복육아’란 주제로 공모전이 있었다. 심사위원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백 여 편이 넘는 에세이와 동영상이 그 정도의 숫자로 전달되었다. 나도 자식을 키웠는데라고 생각했는데 내용의 일부분은 교집합이었고 때론 개성이 있고 대부분의 내용은 유사했다. 단지 내가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 다 키운 사람으로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엄마가 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렵게 임신을 해도 유산이 되거나 임신이 안 되어 기도하는 마음으로 인공수정을 선택한 모성(母性)이 눈물겨웠다. 엄마가 되고 싶은데 주어지지 않는 한계 속에서 얼마나 많은 부부가 좌절할 것인가.오래전 난소가 하나 밖에 없는 친구가 임신이 안 되어 병원을 찾았고 여러 번의 실패에 병원을 다녀와 길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때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고 눈물 흘리던 친구가 생각난다. 서너 명의 여자들이 얼마나 기뻤는지 길거리에서 손을 잡고 펄쩍펄쩍 뛰었다. 그 아이가 이제는 대학을 다니고 있다. 이처럼 아이를 잘 키우겠다는 기도는 읽는 내내 나 자신을 낮은 곳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만들기에 충분했다.한 생명을 잉태해서 열 달이란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나 아닌 타자를 몸속에서 키우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다. 더더욱 쌍둥이 엄마가 겪을 힘듦이 글을 통해 잘 나타나 있었다. 하나도 힘들다는데 다둥이인 경우 배수(倍數)로 고난한 시간을 경험했으리라. 워킹맘들의 힘듦 또한 시간의 배분과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이제 낮 시간 국가에서 아이들을 돌봐주고 키워준다니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아이 숫자가 적어진다.어느 순간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듣기 힘들어지고 아이들의 재롱이 사라져감을 느낀다.지금 한국은 아이를 낳지 않는 나라로 가장 빨리 국민이 사라질 나라 1위다. 임신과 육아 그리고 교육에 이르기까지 큰 책임 앞에서 삶의 사래질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임신과 육아 그리고 교육에 이르기까지 큰 책임 앞에서 회피한다. 많은 미혼과 기혼의 남녀가 결혼을 미루고 출산을 포기하고 있다.전대미문의 이런 상황에서 국가의 정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 득을 보겠노라고 얼른 임신을 선택하는 경우는 여전히 드물다. 모성의 힘듦 뿐만아니라 아빠들의 절반의 노력들이 돋보였다. 아내와 아이를 케어하는 내용이 신선하기조차하다. 아내를 위해 본인이 아침을 만들고 아이를 위해 과일을 썰어 둔다는 아빠. 손녀손자를 위해 유치원차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마칠 때 차를 기다리며 느끼는 감회는 따뜻했다. 자녀를 키울 때는 몰랐던 애틋함이 묻어났다. 젊은 할머니 할아버지는 충분히 바쁘다. 그래도 내 자녀를 위해서 손자손녀를 위해 충분히 아름다운 시간을 배려하는 경우는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아이를 키울 때는 바빴고 정신없이 보낸 세월이었다. 이제 다 커서 어엿한 직장인으로 성장한 자식을 보는 것은 흐뭇하다. 자식들이 힘들어 할 때 내리사랑으로 손자손녀를 돌봐주는 것도 큰 기쁨이 아닐까. 유명한 음악가이자 시인인 한 분은 외국에 있는 딸을 위해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아이를 돌봤다. 그 아이를 위해 시집을 냈을 정도이다. 그 사랑의 깊이를 보는 듯하다.에세이와 동영상에서 돌발적이고 신선한 많은 이야기들, 사랑의 문집이었다. 사랑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든든하고 고마운 일인가. 좀 더 아이들이 세상을 밝힐 아름다운 씨앗이 되도록 배려할 일이다. 오늘 아침 출근 길에 어린 소녀가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공원에 나와서 함께 운동을 하고 있었다. 눈을 비비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고맙구나. 고맙구나.우리에게 내일은 바로 아이들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사랑한다. 우리들의 미래여!”

2023-10-11

신유일주(辛酉日柱)

육십갑자 중 오십여덟 번째는 신유(辛酉)이다. 천간(天干)의 신금(庚金)과 지지(地支)의 유금(酉金)은 모두 금(金)의 성질로 정교하게 세공된 보석이며, 은장도 같은 형상이다. 동물로는 흰 닭이다.신유일주는 완제품 보석처럼 정교하고 화려하지만, 위험한 아름다움이 내재해 있다. 섬세함과 잔인함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숙살지기를 품고 있다. 숙살지기는 가을의 쌀쌀한 기운을 말한다. 이는 만물의 성장을 멈추게 한다. 실제로는 성장에너지를 거두어 저장하는 행위이기에 열매를 만드는데 집중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살리는 기운이기도 하다.건전한 사람이 많고, 자립심이 강하여 혼자 힘으로 성공하는 자수성가형이다. 고난이 찾아와도 굳센 마음으로 이겨내는 힘이 강하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강한 만큼 타인의 의견을 듣지 않고 갈등을 스스로 자초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신경이 예민하고 냉정하기에 고요하고 평온한 것을 좋아한다.특징으로는 직관력이 발달하고 주관이 확실하여 부지런하며 강직한 성품이다. 자기 판단이 맞다고 생각하면 다 믿어버리는 기질이 있다. 한 번 꽂히면 끝까지 가는 성질 때문에 크게 성공할 수 있지만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60갑자에 3대 고집(을묘, 임자, 신유)이 있다. 그 중에서 신유가 가장 강하다. 고집은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고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는 성미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조선시대 이광려(1720∼1783)는 벼슬이 참봉에 불과했지만, 덕행과 학식이 높아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백성을 배고픔에서 구하려는 고집과 집념으로 고구마 재배에 뛰어들었다. 중국에 가는 사신이나 역관에게 종자를 부탁했으나 허사였다. 그래서 일본 통신사로 가는 조엄에게 부탁해 고구마 한 포기를 구해 집에서 시험 재배했으나 실패했고, 동래부사 강필리에게 부탁해 몇 포기를 구했으나 또 실패하고 말았다.이광려는 실패했지만 그의 구민(救民) 노력에 감명을 받은 강필리가 뒤를 이었다. 따뜻한 남해안 지역에 고구마를 심어 성공했으나 북상하지 못했다. 이어 김장순이 등장하여 선종한이라는 사람과 합작해 서울에서 시험재배에 성공한다. 서경창이라는 사람은 아무 지위도 없는 선비였다. 그는 실학을 연구하면서 식량문제 해결에 노력하여 북쪽지방의 가난한 백성들도 고구마의 혜택을 받도록 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다음 차례로 전라도 관찰사 서유구는 모든 자료를 종합하여 ‘종저보’를 저술한다. 그에 의해 고구마는 남쪽 거의 모든 지역으로 전파된다.이런 숱한 노력의 결과로 1900년대 초 고구마는 전국적으로 재배되었다. 그나마 뜻있는 선비들의 수백 년에 걸친 고집스러운 노력 때문에 고구마 토착화가 이루어졌다. 고구마에는 이 땅의 가난한 백성들을 기아에서 구하고자 했던 이름 없는 선인들의 땀과 노력과 집념이 묻어 있다.신유일주 남자는 재주가 있고 자립심이 있으며 인정을 베풀 때는 봄눈 녹듯이 다정하다. 허나 냉혹하고 잔인한 면도 내재하고 있다. 머리가 좋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편이다. 결혼할 때 여자의 외모보다는 능력을 우선시한다. 여자는 자기를 보석처럼 빛나게 해주는 남자를 선호한다. 남편을 친구나 동료처럼 대하는 경우가 많고, 금전에 대한 집착이 강해 알뜰하며 낭비가 없는 편이다. 남녀 모두 고집으로 충돌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신유일주의 유(酉)는 닭이며, 12지지 중의 대장이다. 그래서 우두머리를 뜻하는 추(酋)로도 쓰인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이 온다라는 닭이다. 대단한 집념이 있는 싸움닭이며, 죽는 줄 알면서도 나름대로 정의감으로 외길을 가는 성격이다. 닭의 역할은 어둠의 시기에 새벽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혁명적 기운이다.천간 신(辛)은 음(陰)에 속하는 여자다. 찬바람이 휙휙 부는 마지막 잎새처럼 앙팡지며, 추운 겨울도 끝까지 버티는 맵고 찬 보석 같은 여자다. 타인을 위해 대가없이 희생하는 구도자적 정신도 겸비하고 있다. 하지만 남들이 보면 어딘가 취한 것 같다고 해서 술 주(酒)에도 사용된다. 배우자를 끝까지 사랑하며, 사별하면 다시 배우자를 찾는 것도 닭 유(酉)의 성질이다.남자에 취하건, 사랑에 취하건, 어딘가에 의지해서 취해야만 사는 사람. 남자가 그러한 여자를 만나거나, 여자가 그러한 남자를 만나면 정말 멋있는 일이다.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 소설 ‘귀여운 여인’에 나오는 주인공 올렌카다. 올렌카는 누군가를 사랑해야만 살 수 있는 여자였다. 류대창명리연구자 올렌카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여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울하던 때에 전형적으로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극장의 공연매니저 쿠킨을 만나게 된다. 그가 힘들어 하고 짜증내는 모습을 보면서 연민을 느껴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와 결혼한다. 그가 죽자 올렌카는 다시 우울해진다. 그러던 중 목재상 프스토발로프와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한다. 잉꼬부부로 소문난 그들을 죽음이 갈라놓았다.그러나 올렌카의 사랑은 또 이어진다. 대상은 다르지만 사랑의 속성은 동일하다. 자기 집 별채에서 세 번째 사랑을 찾은 것이다. 세 들어 살고 있는 수의사 스미르닌은 군대를 따라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된다. 몇 해가 지나 수의사가 어린 아들 샤샤와 함께 돌아왔다. 올렌카는 자신이 낳은 아이가 아니었음에도 모성애의 기쁨에 빠져 행복해 한다.올렌카가 귀여운 것은 그녀가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고 누군가와 함께할 때 행복해 한다. 자크 라캉의 ‘타자의 욕망’이 자신의 욕망으로 둔갑하여 자신의 욕망이라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견해라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남편의 생각인 것이다. 혼자가 된 그녀는 늙어가지만, 어린 샤샤를 만난 후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서 스스로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에게 주려고 한다. 사랑받길 원하는 자는 상대가 자신을 다시 한 번 정성스럽게 포장하여 보내주기를 바란다.

2023-10-11

대추와 정치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혼사를 치르고 우리 집 식구임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시부모는 새 며느리 치마폭에 대추를 던져주며 아들딸 많이 낳고 건강하게 살도록 기원한다. 하필 대추였을까. 장석주 시인은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라 하였다. 한 알의 대추가 마치 태풍, 천둥, 번개와 같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끝내 이기고 견디어 검붉은 빛깔 멋진 대추를 선사하듯이, 새색시와 새신랑도 삶을 잘 헤쳐가기를 기원하면서 한 줌 대추를 안겼겠지.태풍과 천둥과 번개가 없는 삶은 없다. 어려움과 시련이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이의 살아가는 길 위에는 시련과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심리학자 스콧펙(Scott Peck)도 ‘삶은 어렵다(Life is difficult.)’고 간단명료하게 정리하였다. 개인의 삶이 어렵다면 사람이 모인 집단과 사회가 걷는 길도 쉬울 수는 없다. 무엇이라도 거두고 이루기 위하여 우리네 살아가는 여정은 힘들고 어렵다. 시련과 어려움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지혜롭게 견디고 슬기롭게 이겨내어 보다 나은 열매가 열리도록 길을 닦아야 하는 것이다. 지치고 힘든 마음을 가져다주는 일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우쳐야 할 것인가. 지나가야 할 수많은 어려움들 가운데 찾아온 태풍과 천둥과 번개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얻어야 할 것인가. 오늘 우리가 가진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나면 우리는 또 어떤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인가를 기대해야 하지 않을까.나라가 어느 모로 보아도 어려운 일로 한 가득이다. 허리띠를 졸라맬 여유도 없을 만큼 일상이 어렵다는데 정치는 선거 놀음에 여념이 없다. 교육이 무너져 사방에서 아우성인데 정치는 표밭갈이에만 심취해 있다. 미래가 안갯속처럼 도통 보이지 않는데 정치는 과거로만 치달리고 있다. 나라 밖은 저만큼 달려가는데 나라 안은 시간이 멈춘 듯 갑갑한 마음. 왠지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느낌은 필자에게만 드는 생각일까. 아시안게임에서 돌아온 젊은 선수들에게서나 겨우 힘을 얻는 국민은 하루하루가 태풍이고 천둥이며 번개가 따로 없다. 구청장 보궐선거가 결판이 나면 무엇이 조금 바뀌려나 기대해 보지만 정치가 지나온 길을 되짚어 보면 그것도 그리 기댈 것이 되지 못한다.대추는 또한 몸을 따뜻하게 하며 젊게 해 준다고 하였다. 특별한 약성보다는 조화와 영양의 효능이 있다는 것이다. 시련을 이겨낼 뿐 아니라 그런 결과 주변까지 맑고 밝게 하며 따뜻한 화합의 기운마저 보듬어 내라는 의미로 새색시는 대추를 한아름 받아들었던 것이다. 태풍과 천둥과 번개를 이겨낼 뿐 아니라 이전보다 훨씬 나은 빛깔로 변화해 가는 모습은 한 알 대추에서도 관찰도 가능하다. 우리 정치도 오늘 만난 어려움에 빠져있을 일이 아니다. 견디고 이겨낼 뿐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그 자리에서 사라져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익어가는 대추를 바라보며 정치가 나라를 살릴 것을 기대해 본다.

2023-10-11

이색 ‘모자(帽子)페스티벌’

홍석봉 대구지사장 조선 후기 풍자 시인이자 방랑 시인 김병연(金炳淵)은 김삿갓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 때 선천 부사로 있다가 투항한 것을 비난하는 시로 장원한 것을 수치로 여겨, 일생을 삿갓을 쓰고 단장을 벗 삼아 전국을 방랑했다. 풍자와 해학의 시로 퇴폐한 세상을 조롱했다. 100년 전 경성에서는 보릿짚이나 밀짚으로 만든 ‘맥고모자’가 유행했다고 한다. 이렇듯 모자(帽子)는 우리의 생필품이었다. 모자를 쓰는 것은 성인을 상징했다. 스무살이 되면 처음 모자를 쓰는 ‘관례’라는 성인식을 했다. 명예의 상징으로 여기고 의복의 한 부분으로 취급했다. 집 안에 들어갈 때도 신발은 벗어도 모자는 벗지 않았다. 식사 때도 모자를 썼다. 모자는 장신구 역할을 넘어 신분과 계급, 직업, 나이, 성별을 상징하고 구별하는 수단이었다. 조상들은 삿갓이나 갓(흑립), 패랭이 등 다양한 종류와 용도의 모자를 사용했다. 구한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조선을 ‘모자의 나라’라고 평할 정도였다.모자는 햇빛 차단과 보온, 먼지 방지, 안전, 멋, 신분표시 등의 목적으로 머리에 쓰는 용품이다. 서양에서도 성인은 남녀 불문하고 모자를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우리나라 최초로 ‘모자’를 주제로 한 축제가 열린다. 13일부터 15일까지 상주 경상감영공원에서 ‘2023 상주세계모자페스티벌’이 개최된다. 우리 전통모자와 세계 70개국 이상의 전통모자 등이 ‘세계모자전시관’에 선보인다. 25명의 출연자가 모자를 돌려쓰며 게임을 즐기는 등 다양한 놀이와 공연이 마련돼 있다. 상주시가 야심차게 준비한 ‘세계모자페스티벌’에 관심이 뜨겁다. 이번 주말 이색적인 모자 축제가 기대된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0-11

시달리는 마음

타인에게는 쉽게 할 수 있지만 나에게는 못하는 말. ‘원래 모든 사람은 부족한 점이 있어. 부족하다는 사실에 너무 얽매이면 안 돼. 네가 가진 것들에 귀를 기울여야지.’ 친구에게든, 같이 문학을 하는 사람이든, 혹은 학생에게든,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해준다. 그게 세상을 사는 꽤 좋은 마인드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부족한 부분만 바라보면서 사는 삶이라니, 너무 지치지 않나?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런 건 그저 타인의 질투어린 시선이나 동경어린 시선 속에서만 있는 것이고, 그 시선에서 살짝 벗어나보면 모든 사람은 잘난 점 한 두 가지와 부족하고 미진한 여러 가지 결여를 제각기 가진 ‘사람’에 불과하다. 불완전하고, 어딘가 비틀려있고, 혹은 자신이 저지를지 모를 실수에 불안해하는 사람.그러니 너무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어차피 모든 사람은 제각각 모자라고, 약간은 바보 같고, 혹은 비틀린 구석이 한 두 가지쯤은 있기 마련이라고. 단지 서로 모자란 부분이 다르고 바보 같은 구석이 달라서 네가 눈치 채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게 온전히 타인을 위한 말인가 하면, 그렇진 않다. 오히려 나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타인에게 해주며 내 모자란 마음을 채우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나는 늘 내 부족한 부분들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어느 나라든 그렇겠지만, 한국은 유독 나이에 따라 요구되는 것들이 많은데 나는 그런 것들을 잘 충족시키며 살아오진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때가 되면 대학에 진학하고, 때가 되면 면허를 따고, 때가 되면 군대를 가고, 때가 되면 취직을 하고, 때가 되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한 번도 제 때에 해보거나, 잘 이뤄낸 적이 없는 것 같다. 대신 나름의 경력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적도 있지만, 그것들이 과연 등가로 비교될 수 있는 것들일까?딱히 자기 비하를 하자는 건 아니지만, 은연중에 타인에게 그런 시선을 느낄 때가 있다. 30대 중반이 된 이후로 더 크게 느끼는 것 같다. 아직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거나, 아직 결혼을 하지 못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할 때면 뭔가 결격사유를 가진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은 시선을 느끼기도 한다. 처음엔 이게 나의 자격지심이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그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면 이렇게 사람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이렇게나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하지만 중요한 건, 그들이 나의 삶을 제대로 평가하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그저 필사적으로 자신이 이뤄낸 것들을 평가받고 싶은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가 해낸 결혼을 너는 못했지. 내가 이룬 정규직을 너는 못했지. 내가 해낸 것들을, 너는 해내지 못했지 하고.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삶을 과대평가하고 싶은 사람들. 예전엔 그런 사람을 만날 때면 ‘성격 참 이상하네’하고 생각하곤 넘겨버리곤 했었지만, 최근에는 그런 사람들이 세상의 절대 다수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어쩌면 그들도 자신의 결점이 두려운 건 아닐까. 그래서 자신의 결점을 바라보는 대신에 어떻게든 자신이 이뤄낸 요구들을 생각하고, 타인의 단점을 들춰내면서, 자신의 결점을 바라보기를 피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자신의 결점을 바라보는 건 슬프고 괴로운 일이지만, 타인의 단점을 들춰내는 건 꽤 즐겁고 나름의 쾌감을 주는 일이니까. 그리고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나 자신이 꽤 괜찮은 삶을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곤 하니까. 그 과정에서 누군가 조금 우울해지게 되더라도,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니까.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타인을 동원하는 사람은 자존감이 높은 걸까, 아니면 극심하게 자존감이 낮은 사람인걸까. 스스로든 채울 수 없는 자족감을 채우고자 타인의 삶을 멋대로 재단하는 사람이라면, 그건 적어도 건강한 마음은 아닐 것 같다. 어쩌면 그것도 자신의 부족한 부분들에 시달리는 똑같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들도 나도, 결국엔 똑같이 자신의 부족한 부분에 시달리는 사람들인 셈이다.우리의 결여와 결점들은 누구의 시선에서 결정된 것들일까. 우리가 구태여 비슷한 수준으로 모든 일들을 잘 처리하면서, 타인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너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내면화하게 만드는 건 대체 누구에 의한 것일까. 내가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 삶도 꽤 괜찮은데. 좀 부족한 거 있어도 제법 살만한 인생인데. 고민이 많아지는 30대 중반의 하루다.

2023-10-10

꽉 닫힌 마음

명절이 지나면 자취방의 냉장고가 풍성해진다. 엄마가 싸준 음식 때문이다. 갈비부터 시작해 김치찜, 전복장, 닭발, 육개장까지. 어느 것 하나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게 없다.내가 만들면 왜 이런 맛이 안 날까? 엄마 등 뒤를 괜스레 기웃거리고 요리 비법을 배워보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어도 내가 만든 음식은 묘하게 싱겁거나 짜다. 엄마는 그런 내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다. 김치찌개 그거 김치에 물만 넣으면 되는 건데, 뭐가 어렵다고 그래? 그런 말을 들으면 억울하다. 내 말이 그 말이니까. 똑같은 재료로 맛을 내지 못하는 내 문제가 뭔지 나도 참 궁금한 것이다.그런 고뇌가 길어지면 휴대전화를 들고 배달 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하게 된다. 거기엔 온갖 종류의 음식이 다 있다. 한식, 일식, 중식, 양식… 휘황찬란한 요리는 물론, 아이스커피 한 잔도 속전속결로 배달되는 시대 아니던가. 태국 여행 중 먹었던 것과 똑같은 맛을 자랑하는 똠얌꿍부터 프랑스 유학파 파티시에가 만든 마카롱, 요즘 유행하는 마라탕이나 탕후루도 클릭 한 번이면 집안에서 편안하게 먹을 수 있다.그러니 몸이 지치고 힘든 날엔 자연스레 배달을 찾게 된다. 식재료를 썰고 볶아내고 가지런히 담아서 먹고 치우는 것을 생각하면 배달 음식의 가격이 꽤 합리적이라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문제는 먹고 나서 항상 후회한다는 것. 집에서 만든 밥을 먹을 때의 느낌과는 다르다. 이상하게 속이 더부룩하다. 한두 입은 맛있는데 그 후엔 물려서 쳐다보기가 싫다. 배는 부르는데 어쩐지 헛헛한 기분도 든다. 플라스틱 용기에 음식이 담겨온다는 것도 달갑진 않다. 나의 한 끼에 너무 많은 쓰레기를 배출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들기 때문이다.저번에 주문한 동태찌개는 포장 용기가 덜 닫혔는지 국물이 흥건하게 흘러있었다. 그걸 받아들었을 때의 난감함은 배고픔마저도 잊게 했다. 가게에 항의할까 하다가 그만두지 싶었다. 일부러 뚜껑을 닫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실수한 거지. 누구나 그렇듯이.그러고 보면 엄마의 음식이 담긴 용기는 하나같이 꽉 닫혀 있었다. 아무리 힘을 줘도 도무지 열기가 힘들었다. 고무장갑을 낀 채로 낑낑대고 숟가락으로 텅텅 두드려도 요지부동이던 뚜껑을 만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신경질적으로 쏘아댔다. 왜 이렇게 세게 닫았어? 아무리 해도 못 열겠단 말이야. 그러면 수화기 너머로 엄마의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고맙다거나 잘 먹겠다는 말보다 반찬통 못 열겠다는 말이 먼저 나간 것에 후회하는 것도 잠시, 어떻게 알아서 잘 좀 해보라는 엄마의 말에 발끈해서 몇 마디 더 쏘아붙이고 마는 일이 부지기수였다.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꽉 닫힌 반찬통을 보고 있노라면 나 자신이 너무나 무력하게 여겨진다. 뚜껑 하나 못 여는 사람. 내가 먹을 음식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사람. 한 사람의 몫을 해내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 걸까. 거기다 뭘 잘했다고 엄마에게 신경질을 내는 걸까. 다른 사람들의 행동은 너그럽게 넘어가면서 왜 엄마에겐 유독 박하게 구는 걸까. 탓하지 않아도 될 것까지 탓한 내 모습이 참 못났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엄마는 이제 반찬통의 뚜껑을 적당히 느슨하게 닫는다. 대신 비닐로 몇 번이고 감고 또 감는다. 뭐 이렇게까지 쌌대. 괜히 쓰레기 많이 나오게. 나는 또 그렇게 툴툴대면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담긴 용기를 열어본다. 맛깔스러운 냄새가 확 끼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역시나 맛있다. 감히 내가 흉내 낼 수 없는 맛이다. 간은 짜지도 싱겁지도 않다. 적당히 달짝지근해서 감칠맛이 돈다. 이런 반찬이면 입 짧기로 유명한 나도 공깃밥 두 그릇 뚝딱 비워낼 수 있다. 부른 배를 탕탕 두드리면 자연스레 엄마의 손이 떠오른다. 투박하리만치 길고 곧은 손. 가끔은 엄마가 미련하다고도 생각됐다. 직장 한 번 쉬지 않고 아이 셋을 키우면서 집에서 한 밥을 꼬박꼬박 먹였다. 지금도 그렇다. 명절이면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음식을 내온다. 왜 맨날 저렇게 음식을 해. 그냥 사 먹지, 하면서 혀를 내둘렀던 적도 있다.알고 있다. 온 힘을 주어 반찬통을 꽉 닫는 엄마의 마음을. 외부의 먼지가 들어갈까, 내부의 것이 흘러넘칠까, 노심초사하는 엄마의 얼굴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난 엄마 밥이 제일 맛있더라. 나의 그 한마디로 충분하다는 듯이 소녀처럼 와르르 웃는 엄마.그 웃음을 완벽히 밀봉된 용기에 꽉꽉 채워 아주 오래 간직하고 싶은 요즘이다.

2023-10-10

한글날을 기념하는 방법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10월 9일은 577돌 한글날이었다. 전국적으로 우리 글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공유하기 위한 각종 행사가 개최되었다. 우리 대학에서도 국어문화원이 중심이 되어서 한글날을 기념하는 학술대회와 한글을 소재로 한 다양한 체험활동을 진행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필자는 매년 반복되는 한글날의 각종 이벤트를 무심히 넘기거나 어학 전공자들의 전유물로 생각했다. 공휴일이란 편안함이 더 크게 다가왔던 탓이다.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한글날에 우리 문화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글 창제 및 반포를 기념하는 한글날은 필연적으로 ‘대한민국’이란 정체성을 생각하게 만들지만, 우리나라의 세계적 위상이 몇 년 사이 부쩍 높아졌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한류가 있었지만, 최근의 상황은 K-팝, K-푸드, K-콘텐츠 등 다양한 K-컬처에 세계인이 주목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BTS’가 상징하는 K-팝과 ‘오징어 게임’으로 전 세계인의 이목을 사로잡은 K-콘텐츠가 앞에서 끌고 K-푸드, K-뷰티 등이 뒤따르는 K-컬처는, 국가적 지원을 동력 삼아서 더욱 그 규모를 키우고 있다.하지만 마냥 자부심을 느끼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다. 지난 8월 140여개국 4만명의 대원이 참석한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가 ‘K팝 콘서트’로 마무리되었다. 알다시피 잼버리는 준비 부족과 운영 미숙 등으로 일부 국가 대원이 중도에 퇴소하고, 태풍의 영향으로 야영지에서 조기 철수를 결정하는 등 파행적으로 운영되었다. 세계적 대회의 파행을 막고자 K-컬처를 대안으로 내세운 정부의 방침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잼버리 정신’과 한참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자랑스러워야 할 K-팝이 이렇게 소비되는 것에 찜찜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영어 중심주의는 어떤가? 아파트 공화국 대한민국에 솟아있는 거의 모든 아파트의 이름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영어다. 우리나라에 유학을 온 외국인 대학원생들은 한국어를 몰라도 학위를 받는 것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최근 사회적 논란이 된 ‘문해력’도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심심한 사과’ ‘사흘’이란 단어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은 한자어나 순우리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의미이다. 그동안 관습적으로 알고 있다고 믿었던 단어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 왜, 생겨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원인을 따져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말을 몰라도 일상에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심심한 사과’‘사흘’과 같은 단어가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삶의 구조에 있다.한글날을 제대로 기념하기 위해서는 이념과 문화를 구분해야 한다. 이념이 당위적으로 한글의 우수성(혹은 K-컬처)을 홍보하는 행위의 근간이라면, 문화는 대중의 정신과 사고에 미치는 한글의 중요성을 제도적으로 구축하는 행위이다. 이제라도 한글이 상징하는 문화가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기 위한 고민을 해야 한다. 1년에 한 번, 일회성 이벤트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2023-10-10

연륜의 힘, 그리고 그 아름다움

최선희 경운대 교수 “늙은이 너무 불쌍해하지 마라. 늙어도 살맛은 여전하단다. 그래주고 싶어 쓴 것처럼 읽히기도 하는데 그게 강변이 아니라 내가 아직도 사는 것을 맛있어하면서 살기 때문에 저절로 우러난 소리 같아서 대견할 뿐 아니라 고맙기까지 하다. 물론 내가 맛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단맛만은 아니다. 쓰고 불편한 것의 맛을 아는 게 연륜이고, 나는 감추려야 감출 길 없는 내 연륜을 당당하게 긍정하고 싶다.”박완서 작가가 예순을 훨씬 넘긴 나이에, 노년의 삶을 형상화한 소설 ‘너무도 쓸쓸한 당신’서문에서 밝힌 내용이다. 어쩌면 노년을 당당하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작가의 이런 각오는 모든 노년세대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지나온 삶은 수많은 희로애락과 함께 켜켜이 쌓아온 경험으로 숙성된 내공을 가졌지만 현실적으로 용인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존재가치를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현재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18.5%로 고령사회이고 2024년 내년이면 노년세대가 10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어 초 고령사회로 진입할 것이라 한다. 이런 속도로 인구 노년화가 진행되면 노인 평균연령이 100세가 되는 시대가 도래 할 것이고 그에 따른 여러 사회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이런 인구 고령화 현상은 자칫하면 노인차별주의와 같은 부정적인 인식을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노인차별주의란 단지 늙었다는 이유로 우리가 노인을 향해 갖는 부정적인 태도와 행동을 의미한다. 실제 학생들에게 ‘노인’ 하면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보라 했더니 “고지식하다, 보수적이다, 잔소리와 불평이 많다, 쇠약하다, 지루하다” 등의 부정적인 표현을 많이 했다. 이런 인식은 세대 간 갈등의 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불식시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으로 노년의 긍정적인 모습을 이해하고 공감하도록 해야 한다.노년세대가 가진 가장 긍정적인 태도와 의식은 무엇인가. 바로 인생의 연륜이 가진 아름다운 내면세계일 것이다. 연륜은 나무의 나이테와도 같다. 무수한 나이테를 가진 늙은 수양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드리우며 우리에게 시원한 안식처를 제공하듯이 주름진 노년의 여유로운 표정은 우리의 힘든 삶을 보듬어줄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이 경험한 인생의 지혜가 우리들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사람마다 느껴지는 강도는 다르지만 오랜 세월 동안 무르익은 그들의 경험은 저마다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다.지난 10월 2일은 노인의 날이었고 이 달 10월은 경로의 달이기도 하다. 매년 이맘때면 100세를 맞은 노인을 위한 청려장(장수지팡이) 전달, 노인복지 증진을 위해 헌신한 개인이나 단체에 대한 표창, 영정사진 촬영 등,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린다. 인구 20% 이상을 차지하는 초 고령사회를 앞둔 노년의 시대에 이런 일회성 행사보다 노년의 연륜을 인정하고 그 사회적 역할에 대한 구체적 정책을 기대해본다.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맞게 될 노년의 삶, 그대로의 존재가 인정되어 권리와 의무가 부여될 때 그들은 연륜 속에 감추어진 아름다운 보물을 풀어놓을 것이다.

2023-10-10

하태경 險地출마, 여당 혁신으로 이어져야

심충택 논설위원 내년 4·10총선을 6개월 앞두고 오늘(11일) 실시되는 서울 강서구청장 선거 결과가 주목을 받는 가운데, 지난 주말부터 국민의힘에도 내부혁신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부산출신 하태경 의원이 당 혁신을 위한 총대를 멨다. 하 의원은 지난주말 “내년 총선에서 정치적 고향인 해운대갑구를 떠나 서울 험지에서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3선인 하 의원은 국회의원이 한 지역구에서 세 번 넘게 연임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했었다.하 의원이 민주당 정청래 최고위원의 지역구인 마포을에 출마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도 솔깃하다. 아마 여당 중진, 특히 손쉽게 국회의원 선수(選數)를 늘려온 TK(대구·경북), PK(부산·경남·울산)지역 의원들에겐 하 의원의 서울험지 출마 선언이 ‘올게 왔다’는 압박감으로 작용할 것이다.하 의원의 지역구포기 선언은 당 지도부를 향한 채찍으로 들린다. 지금 여당 지도부는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이 30%대 박스권에 갇혀 꼼짝 못하고 있는데도, 하나같이 먼 산 구경하듯 하고 있다. 오직 이재명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공격에만 총력을 쏟으며 반사이익에 기대는 모습이다.하 의원처럼 기득권을 내려놓으며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사람이 지금까지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내년 총선은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전쟁 같은 선거가 될 것이다. 진영간 이데올로기 갈등이 지금보다 심각한 때는 없었다. 지난 21대 총선에서 국민의힘은 영남권을 제외하곤 거의 모든 지역에서 민주당에 졌다.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쯤이면 당이 비상상황에 들어가 있는 것이 맞다. 그러나 당 안팎을 보면 긴장감이나 역동성이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총선 승패가 결정될 수도권 판세가 위기상황임을 나타내는 지표가 쏟아져 나오고 있음에도, 대통령실 핵심참모나 당 중진들은 쉽게 당선되는 영남권만 기웃대는 모습이다. 여당은 지금 국민에게 혁신과 변화의 에너지를 보여줄 때다. 그러려면 현 정부에서 혜택을 많이 받은 중진들이 총선 승리를 위해 기득권을 버리고 당에 헌신해야 한다.여당이 수도권에서 이기려면 중도층 쪽으로 외연을 확장하는 방법밖에 없다. 중도층은 이념보다는 바람이나 감성에 흔들린다. 그들의 입맛에 맞는 선거전략을 짜는 것이 중요하다. 최선의 전략은 당 지도부와 중진들의 기득권 내려놓기다. 집권당내에서 총선불출마나 인적쇄신, 적지 출마론 같은 ‘자기희생적 뉴스’가 쏟아져 나오면 중도층은 여당에 눈길을 줄 것이다. 하 의원처럼 민주당의 수도권 중진 지역구에 일찌감치 출마선언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민주당은 지금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을 부결시키면서 민주주의의 근간인 삼권분립을 위협하고 있다. 내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다수를 차지하면 이런 일은 다반사로 발생할 것이다. 상대를 타도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이다. 우리나라가 합리적인 다수 힘으로 운영되는 정상적인 국가가 되려면, 내년 총선에서 이런 세력이 헤게모니를 잡는 것은 꼭 막아야 한다.

2023-10-10

메디시티 대구 위상 살려야

우정구 논설위원 대구시는 지난 2009년 메디시티 대구를 선언했다. ‘대한민국 의료특별시 대구’가 슬로건이다.대구를 글로벌 헬스케어 허브도시로 육성시켜 대구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겠다는 대구시의 야심찬 정책의 하나다.대구는 비수도권에서 유일하게 100년 된 의과대학을 품은 도시다. 경북대학 의과대학은 올해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일제 강점기인 1923년 대구의학강습소를 시작으로 대구의학전문학교 등을 거쳐 6·25전쟁 중이던 1952년 국립경북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승격했다.4개 의과대학과 6개 종합병원, 3천800여개 병의원, 2만여 의료인력 등을 가진 대구는 국내 최고 수준급 의료인프라를 가진 곳이다. 대구 의료인의 역량은 코로나19를 극복한 위기 상황에서 잘 드러났다. 코로나 발생 53일만에 확진자 0명의 신기록을 세웠다. 대구 의료인의 코로나 팬데믹 극복은 세계가 인정할 정도다.의료 기술면에서도 우수하다. 대한민국 최초 팔이식 수술 성공과 세계 최초 모발이식 수술 등 자랑거리가 많다. 조선시대 최대 약령시가 대구에 세워져 대구는 한의학 도시로도 명성을 떨친다.이런 역사적 전통과 의료인의 자부심으로 대구는 의료관광산업 분야에서 한해 수 만명의 외국인 환자를 유치하고 있다. 명실공히 메디시티의 입지를 잘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지방에서 서울로 원정 치료간 암 환자가 100만명에 이른 것으로 밝혀져 충격이다. 대구와 경북서도 18만명의 환자가 서울로 원정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의료 역시 타분야처럼 수도권 쏠림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결과여서 안타깝다. 메디시티 대구의 분발이 더 있어야겠다./우정구(논설위원)

2023-10-10

연구개발비 삭감하면서 의사과학자 양성한다고?

유영희 작가 어떤 사안이 발생했을 때 고전 한 구절 인용하는 방식은 진부하면서도 울림을 주는 묘한 매력이 있다. 며칠 전 ‘논어’ 한 구절을 읽다 보니, 역시 단순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맛이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천 개의 수레를 보유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는 신중한 태도로 백성의 형편을 잘 헤아려 정책을 실시하고, 말과 행동을 일치시켜서 백성에게 믿음을 주며, 세금을 허투루 쓰지 않고 백성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2024년 예산안은 여러 분야에서 삭감되었는데, 삭감된 내용을 보면 더 놀란다, 현 정부 출범 당시 중점 육성하겠다고 한 반도체, 인공지능, 양자, 우주, 데이터 분양까지 삭감되었기 때문이다. 여성과학기술인 육성 예산 15억원을 비롯하여 과학기술 인력 양성 사업 전반에 걸쳐 940여 억원이 삭감되었다. 이것은 윤석열 대통령의 RD 이권 카르텔 한 마디에 빚어진 사태다. 9월 5일, ‘국가 과학기술 바로 세우기 과학기술계 연대회의’가 출범해 과학기술기본법에 있는 절차도 무시했다고 항의하며 예산 지키기에 나섰지만 얼마나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낙관하기 힘들다.그런데 한편에서는 대통령의 한 마디로 의전원이 설립이 가시화되고 있다. 지난 2월 윤석열 대통령이 카이스트에서 의사과학자 육성 대학원 설립에 대한 긍정적 메시지를 보낸 후 카이스트의 의전원 설립이 속도가 붙었다. 포스텍도 2028년을 목표로 의전원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의사과학자의 필요성은 두 말이 필요가 없다. 화이자에서 mRNA 백신을 개발하여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를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독일의 우구르 사힌, 외즐렘 튀레지 박사 부부가 바로 의사과학자이다. 오랜 기간 과학계의 mRNA 연구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여성 과학자 카탈린 커리코는 드류 와이즈만과 함께 mRNA가 면역 체계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발견하여 백신 개발에 기여한 공으로 올해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이처럼 중차대한 의사과학자가 우리 사회에서 양성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과학자에 대한 홀대 때문이다. 카이스트가 미래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의사과학자를 배출한다고 해도 진료하는 의사의 평균 연봉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대우로 과연 계속 이들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가 하는 현실이 의사과학 연구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지금도 과학고등학교 졸업생의 의대 쏠림 현상이 노골적인데, 의전원 졸업생을 의사과학자로 붙들어두기는 더 어렵다. 현재 배출된 의사과학자에 대한 지원이 더 절실하다는 반대 의견이 타당하게 들리는 이유다. 게다가 기초의학을 가르칠 교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에서 카이스트나 포스텍에서 설립할 의전원에서 얼마나 내실 있게 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가 하는 비판도 많다.무엇보다 연구개발비는 삭감하면서 의사과학자를 양성한다니, 믿음이 가지 않는다. 어떤 정책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신중한 절차를 거쳐 백년을 내다보는 정책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다가온다.

2023-10-09

577돌 한글날을 맞으며

김규인수필가 2023년 10월 9일은 577돌 한글날이다. 문자를 기념하는 날로는 세계에서 유일하다. 이는 한글이 그냥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세종대왕의 지시하에 만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문자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문화의 바탕이 되는 날을 다시 맞는다.세상에는 자기 말을 가지면서도 이를 표현할 글자가 없는 나라가 더 많다. 그런 가운데 너무나도 멋진 한글을 가진 우리는 복 받은 사람들이다. 해외에서 한글로 적힌 간판을 보거나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는 한글이 한국 사람답게 만드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어리석은 백성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마음을 헤아려 만든 한글 창제의 훌륭한 뜻을 알면 마음마저 젖어 든다. 577년 전에 이런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애쓴 통치자가 우리나라에 있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글을 읽고 자기 생각을 글로 쓰는 것은 가장 기본적 권리이다. 백성을 향한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그런 한글이 우리나라에서 수난을 당한다. 젊은 사람들은 말을 줄여 쓰느라 국적도 없는 말을 한다. 처음 듣는 사람은 그 뜻을 알 수가 없다. 궁금하여 물어보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줄여서 쓰는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구슬이 구르는 소리 같은 말이 듣기에도 불편한 말이 된다. 왜 이렇게까지 우리말을 비트는지 알 수가 없다.오랜 기간 중국과의 문화 교류에 따른 한자가 유입되고, 36년의 침략으로 남은 일본어의 흔적은 수십 년이 지난 아직도 곳곳에서 나타난다. 서양 문물의 유입과 함께 들어온 외래어의 영향도 점점 늘어난다. 물건을 팔면서도 경쟁적으로 남의 나라말을 빌려서 쓴다. 교통의 발달로 다른 나라로 이동이 편리한 세상에서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요즈음은 자연스러운 범위를 벗어나 인위적으로 늘어나는 경향이 강하다.경제 위기 상황을 맞은 요즈음 외국 언론이나 금융기관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무분별하게 들어온다. 방송이나 신문은 우리말로 순화하지 않은 채 경쟁이라도 하듯 기사를 선점하기에 바쁘다. 뱅크 런, 본드 런, 로크인 효과, 뱅크데믹 같은 단어는 뜻을 짐작만 할 뿐 금방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지금은 한류가 세계 문화의 주인공이다. 우리말로 된 드라마와 영화를 보는 사람이 늘어난다. 우리말로 만든 노래를 부르고 우리나라를 찾는 사람도 늘어난다. 한류를 몸으로 체험하고 싶어 비행기에 오른다. 산과 문화재와 현대식 건물이 아우러진 서울을 보고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정작 조금만 더 눈을 크게 뜨고 보면 다르게 생각한다. 높이 솟은 아파트에는 ○스테이트, ○○캐슬, ○○파크, ○ 플래티넘, ○샵 같은 외래어를 마주하고 중심가로 들어서면 상가의 간판들은 외국의 도시로 착각하게 한다.

2023-10-09

해결과제 남긴 영양 수비면 능이버섯축제

장유수 경북부 사흘간 영양군 수비면 발리리 일원을 뜨겁게 달궜던 능이버섯축제가 지난 8일 막을 내렸다.영양군과 수비면 능이축제추진위원회에 따르면 이번 축제기간 1만여 명의 관광객과 소비자들이 축제장을 찾았고, 지역의 농·특산물의 구매가 이어지는 등 침체된 면단위 농촌 상권 활성화와 지역 농·특산물 판매의 기폭제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적잖은 성과를 거둔 능이버섯축제지만 과제도 남겼다.일회성이 아닌 지역 농·특산물 판매 및 홍보 등 수비면을 관광명소로 탈바꿈시킬 원동력이 되기 위해선 능이버섯축제도 발전이 필요한 것이다.우선 축제가 지향하는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청정자연의 보고 ‘제 1 능이’로 불리는 귀한 능이버섯 고유의 정체성을 살려 다양한 능이버섯요리체험과 직접 구매한 버섯을 손질해 담아 갈 수 있는 등 소비자와 관광객들이 체험하고 참여 할 수 있는 독창적인 프로그램이 미흡했다는 지적이다. 축제라는 명분아래 단지 장삿속을 채우려한다는 인상마저 느끼게 하는 판매와 먹거리 등에만 열을 올리는 모습은 눈총을 받았다.특히 능이버섯요리경연대회와 막걸리페스티벌 등은 수비지역 마을주민들만 참가해 능이라는 테마로 소비자와 관광객들이 참여 할 수 있는 다양하고 독특한 축제 문화를 선보였어야 했지만 마을잔치 수준의 축제에 그쳤다는 평가다.또한 축제의 한 축을 차지한 메인무대인 공연장은 전력부족으로 음향의 질이 떨어지는 등 축제장 동선들과 동떨어진 이질감으로 인해 모두가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을 녹아내지 못했다는 쓴 소리도 나오고 있다.교통 부분에서도 보완이 필요해 보였다. 행사와 안전과 함께 교통은 가장 역점을 뒀던 만큼 주민들의 큰 불편을 초래하지 않은 채 통제와 안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지만, 단체 관광객들을 위한 큰 그림의 교통 대책은 보이지 않았던 점도 아쉬운 부분으로 꼽힌다.끝으로 주민 참여가 제대로 이뤄진 축제냐는 반문에서 나오는 아쉬움과 기대다. 수비능이축제추진위가 주관하고 수비면 기관들과 자생단체들이 후원하는 등 영양군과 영양축제관광재단도 적극 나서며 함께 했지만 수비면민들뿐만 아니라 영양군민들의 공감대를 얻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행정기관의 의존도는 여전히 높았지만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했다는 지적이다.이번 능이버섯축제에 대한 주민들의 참여가 이뤄진 객관적인 평가는 중요하다. 이번에 얻은 교훈을 밑거름삼아 미흡한 부분들을 보완하고 수정해 변화시킨다면 지역사회의 경제발전과 함께 관광객들 모두에게 좋은 기회가 제공될 것이다.영양/jang7775@kbmaeil.com

2023-10-09

고딕건축의 통일성을 완성한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고딕의 대성당 건축은 서양 중세미술의 결정체라 부르더라도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중세가 추구했던 정신적 가치가 대성당 건축을 통해 구체적인 형태로 완성된 것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기술이 동반되었기 때문이다. 정신과 형태와 기술이 한 지점에서 만나 이루어낸 것이 고딕의 대성당 건축이다.중세 고딕의 대성당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다. 12세기 중엽 처음 등장한 고딕양식이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쳐 파리의 노트르담이 지어질 즈음 고딕만의 안정된 건축 언어를 찾을 수 있었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건축의 초석을 놓은 이는 교황 알렉산더 3세(재위 1159∼1181)인 것으로 알려진다. 1163년 교황이 파리에 체류한 일이 있는데 이 때 성당이 지어졌다. 당시 파리의 주교는 모리스 드 쉴리(Maurice de Sully)라는 사람이었다. 주교는 건축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모금을 했고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후원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교회건축은 주제단이 있는 동쪽 부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182년 동쪽 부분의 건축이 마무리 되면서 주제단 아래 지하 크립트에 성유물이 안치되었다. 교회건물의 몸통에 해당하는 주랑과 측랑 공사는 1180년과 1200년 사이 완성되었고 1230년경 내부 주랑의 채광을 확보하기 위해 4층이었던 벽면 구조를 3층으로 수정하면서 넓은 창문들을 설치했다. 주랑과 익랑이 교차하는 교차랑 위로 첨탑이 올라갔고 측랑 외벽 버팀부벽 사이사이 공간에 소예배당이 마련되었다. 소예배당은 측랑에서부터 주제단으로까지 연결되어 있어 평면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의 모습이 거대한 배처럼 공간의 통일성을 이루어낸다. 신랑의 천정에는 6분할된 교차형 늑재궁륭이 설치되어 건축의 견고성을 한 층 높여주었다.주제단이 위치한 동쪽 바깥 벽면에 거대한 공중부벽이 설치된 것은 1296년과 1320년 사이이다. 고딕 대성당에 인상적인 외형을 입혀준 공중부벽은 장식적인 요소라기보다 붕괴위험을 낮추기 위한 중요한 건축공법이다. 1258년부터 기존에 협소했던 남쪽과 북쪽 익랑 확장공사가 시작되었다. 익랑의 확장공사가 마무리되었을 때 가장 눈에 띠는 변화는 남북 익랑 파사드 상부에 크고 경쾌한 장미창이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두 곳의 장미창은 서로 짝을 이루며 북쪽은 구약성서의 장면으로 남쪽은 신약성서의 장면으로 장식되었다.1200년경 시작된 서쪽 정면 파사드 공사가 1245년 무렵 마무리되면서 대성당의 장엄한 모습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십자형 구도의 전형적인 5랑식 바실리카 형식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길이가 122.5미터 폭이 12.5m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웅장하다.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면에는 세 개의 출입문이 설치되어 있다. 각각의 출입문 위에 설치된 팀파늄은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중앙 출입문 상당 팀파늄에는 ‘최후의 심판’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으며, 우측에는 성 안나, 좌측에는 성모 마리아를 주제로 한 이야기가 나타난다. 출입문 바로 위층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 스물여덟 명이 전신 입상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어 ‘왕들의 회랑’으로 불린다.이 조각들은 프랑스 혁명기 때 모두 파손되었다가 19세기에 복원된 것이다. 왕들의 회랑 위층 중앙에는 지름이 9.6미터에 이르는 대형 장미창이 들어가 있다. 장미창 위로 일련의 기둥과 아치가 고딕의 전형적인 창틀 트레이서리 모양으로 줄지어 있어 파사드의 무게감을 한층 덜어주면서 경쾌한 느낌을 불어 넣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파사드 가장 높은 곳에 20미터 높이의 뾰족한 종탑 두 개가 짝을 이루며 위용을 뽐내야 했지만 아쉽게도 실현되지 못했다. 대신 안정적이고 네모진 모양의 종탑이 올라갔다./김석모 미술사학자

2023-10-09

지질 속 생명의 흔적, 의성 공룡발자국

의성 제오리의 한적한 도로변에는 비스듬히 세워진 절벽 모양의 바위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다. 금성산의 화산활동으로 지질의 위치가 변화된 그 바위 위에는 움푹 파인 동그란 자국들이 무수히 남겨져 있다. 이를 전문가들은 공룡발자국이라 했다. 특히 바위 면적 대비 국내 최대의 발자국이 남겨져 있으며,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발자국 화석산지와는 다른 특별한 면이 있다고 한다. 사실 일반인 막눈으로는 동그란 알 모양의 자국을 제외하고 발자국처럼 생긴 형태를 구분해 낼 방법이 없었다. 당연히 그 많다는 공룡의 보행렬도 글로 된 지식만 확인하고 실물과 연관하지 못했다.제오리 공룡 발자국은 의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지질 명소 가운데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 가운데 하나이다. 아무래도 공룡발자국 화석산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첫 케이스이기도 하고, 1천600㎡라는 작은 면적에 총 384개의 발자국이 고밀도로 남겨져 있으며, 조각류 발자국이 우세한 다른 지역의 화석산지에 비해 용각류가 더 많이 남겨진 희귀한 화석산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도로변에 위치하여 지나가다가 잠깐 둘러보기에 접근성도 나쁘지 않다.공룡은 크게 도마뱀의 골반(용반류)과 새의 골반(조반류)으로 형태를 구분한다. 용각류와 수각류는 도마뱀 골반이고, 조각류는 새의 골반에 속한다.용각류는 주로 4개의 다리로 걸으며, 긴 목과 긴 꼬리·커다랗고 뚱뚱한 몸에 비해 엄청나게 작은 머리를 가진 초식 동물이다. 기린처럼 목을 길게 빼고 잎을 먹을 수 있게 신체가 발달하였다. 쥐라기와 백악기에 광범위하게 퍼졌다가 멸종되었다. 수각류는 주로 이족 보행을 하는 육식형 공룡으로 트라이아스기 말에서 백악기 말까지 생존하였다. 어류나 벌레를 잡아먹는 종·타조처럼 빠른 달리기가 가능한 종·티라노사우루스와 같은 포식자·벌새처럼 작은 종·악어와 같은 종 등 매우 다양한 종이 이에 속한다. 하지만 생김새만 보면 조반류가 용반류에 비해 더 창의적인 형태를 지니는 듯하다. 조반류는 예전에는 조각류·검룡류·곡룡류·각룡류·후두류로 나누었다. 좀 직관적인 분류명들이라 쉽게 그 특징을 추측할 수 있다. 조각류는 쉽게 얘기하면 새의 튼튼한 다리와 오리주둥이를 닮은 공룡류를 칭한다. 두 발과 네 발을 모두 사용했으며, 이빨이 발달하였다. 검룡류는 꼬리가 검 같거나 검처럼 생긴 침이 있는 종류로 뒷다리가 길고 머리가 작고 목이 매우 짧다. 곡룡류는 등과 옆구리에 가시가 있고 갑옷이나 곤봉 모양의 꼬리를 가진 공룡이다. 각룡류는 삼각형 모양의 큰 머리뼈와 굵은 목 그리고 입이 앵무새 부리를 닮았거나 뿔이 있다. 공룡 중 가장 늦게 등장하였고 백악기 후기에 생존했었다. 후두류는 일명 박치기에 특화된 공룡으로 머리뼈가 엄청 단단하다.제오리 공룡발자국 화석산지에서는 총 35개의 보행렬이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19개 보행렬은 용각류의 것이고, 14개의 보행렬은 조각류의 것이라고 한다. 나머지 수각류의 발자국도 조금 남겨져 있다. 이렇게 적은 면적에 많은 발자국이 남겨져 있는 것은 서식하던 공룡들이 무리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하다.제오리 인근에서는 만천리 아기공룡발자국 화석산지도 발견되었다. 2008년 제오리 인근을 조사하다가 가로 5미터·세로 7.5미터의 바위에 찍힌 발자국을 확인하였다. 총 20마리의 공룡들이 8개의 보행렬을 그렸는데, 총 126개의 발자국이 찍혀있다. 이 화석은 아기공룡의 보행렬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지만, 그 보행렬의 길이가 4.35미터로 세계 최장의 길이라는 점도 꽤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처음 발견 당시에는 용각류 아기공룡의 발자국으로 생각되어졌다. 그러나 심층 조사에 의해 두 발로 빠르게 걷다가 잠시 멈춘 후 다시 네 발로 천천히 걷는 조각류 아기공룡의 발자국으로 밝혀졌다. 같은 노면에 수각류와 용각류의 발자국도 함께 있어 당시 공룡들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또 제오리 인근 탑리에서는 울트라사우루스 골격 화석이 국내 최초로 발견되었고, 최근에는 남대천 일대에 발가락 마디까지 잘 보존된 공룡발자국 화석산지가 발견되었다. 남대천의 발자국은 20여개의 초식공룡과 8개의 육식공룡으로 추정하고 있다.이렇게 공룡발자국 화석산지가 많은 의성은 공룡들의 세계를 상상해보기에 좋다. 또한 조문국박물관과 고분군, 금성산 칼데라와 빙계계곡과 같은 다양한 지질 환경 등 생각보다 풍부한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관리나 제반 시설이나 일반인을 위한 설명 등이 매우 미흡하다. 막상 일반인이 찾아가도 이해가 가지 않고 그 가치를 파악할 수 없다면 보존이나 보호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일반인 막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자세하고 체계적인 보조시스템이 구축되길 기대해 본다./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3-10-09

한글의 맛

홍석봉 대구지사장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한생 연분이며 하늘 모를 일이런가….’ 정철의 사미인곡 일부다. 정철이 지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관동팔경은 가사문학의 극치로 꼽힌다.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이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동방의 이소요, 우리나라의 참된 문장은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이 3편뿐”이라고 극찬했다. 사미인곡 등 3편은 우리나라의 이소(離騷)지만, 한자로는 쓸 수가 없다. 구전과 한글로 전해질 뿐이다. 어떤 이가 칠언시로 ‘관동별곡’을 번역했지만, 아름답게 될 수가 없었다. 내용은 전달할 수 있었지만, 원작의 표현 맛이나 묘미가 살아나지 않았다.‘….가시는 걸음걸음/놓인 그 꽃을/사뿐히 즈려 밟고 가소서….’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청록파 시인 박두진이 해방의 기쁨을 표현한 ‘해’라는 시의 일부다.국민이 애용하는 시다. ‘사뿐히 즈려 밟고 가라’는 말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라는 표현은 영어로도, 불어로도, 그 어떤 언어로도 그 속에 담긴 애틋한 마음과 벅찬 감흥을 제대로 표현할 수는 없다. 우리 글의 묘미는 한글로 표현했을 때 그 깊이를 더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인도의 승려인 구마라습은 “천축인의 찬불사는 극히 아름답지만 이를 중국어로 번역하면 단지 그 뜻만 알 수 있지, 그 말의 오묘한 뜻은 알 수 없다”고 했다.한글의 감칠 맛은 아무리 외국어로 번역을 잘 해도 그 오묘한 뜻과 맛은 표현하기 어렵다. 시어로 남아있는 한글의 아름다움이 더욱 그렇다. 한글 파괴와 줄임말이 난무하는 한글날이 애닯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0-09

중도층의 표심이 두렵지 않은가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제22대 총선이 6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여야 모두에게 사활이 걸린 선거다. 여당이 과반을 얻지 못하면 국정의 동력을 잃고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이 불가피할 것이며, 야당이 대선·지선에 이어 총선까지 패배한다면 최후의 버팀목인 입법 권력마저 상실하기 때문이다.누가 승리할 것인가?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를 쥐고 있는 중도층의 표심을 잡는 정당이 이긴다. 총선은 결과가 뻔한 영남과 호남, 그리고 여야 각각 30% 안팎에 묶여 있는 콘크리트 지지층이 변수가 되지는 못한다. 총선의 승패는 전체 지역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수도권에서 갈릴 것이며, 이 때 30%에 달하는 중도층의 선택이 결정적 변수가 될 것이다.중도층은 어떤 사람들인가? 레이코프(G. Lakoff)는 “이슈에 따라 보수적 또는 진보적으로 투표하는 이중개념주의(biconceptualism) 소유자”라고 했다. 이들은 ‘이념이 아니라 이슈’에 따라 움직이는 ‘스윙보터(swing voter)’들이며, ‘무지한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현명한 실용주의자’이다. 정치팬덤들과는 달리 진영정치에 구속되지 않고 이슈와 상황에 따라 합리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다.그럼에도 여야의 정치적 극단주의(political extremism)는 갈수록 태산이다. 윤 대통령은 여당 연찬회에서 “제일 중요한 게 이념”이라고 역설했고, 국무회의에서는 장관들에게 ‘전사’가 되어서 “싸워 달라”고 주문했다.대통령이 요구한 ‘이념전쟁’에 지지층이 동의할지는 모르지만, ‘실용’을 중시하는 중도층은 비토(veto)그룹으로 돌아설 수 있다. 최근 여론조사(한국갤럽, 2023년 9월22일) 중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부정평가(59%)가 긍정평가(32%)의 2배 가까이 된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야당의 극단주의는 또 어떤가? 이재명 대표 역시 ‘개딸’에 의존하는 팬덤정치로 일관해왔다. 자신의 사법 리스크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국회의 체포동의안 통과에 격분한 개딸들은 비명계 의원들에게 욕설은 물론 살해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팬덤에 편승하는 극단의 정치가 지지층을 결집시킬 수는 있겠지만 중도층의 마음을 잡을 수는 없다.이처럼 대통령의 이념 리스크와 야당대표의 사법 리스크는 모두 총선에 부담요인이 되고 있다. 중도층은 사법 리스크에 기대어 반성 없는 여당도, 이념 리스크에 기대어 성찰 없는 야당도 싫어한다. 권력자의 입만 쳐다보는 ‘친윤’과 ‘친명’의 똑같은 편향적 행태, 그리고 지지자들의 목소리만 듣는 ‘뺄셈의 정치’로서는 중도 확장이 불가능하다.따라서 총선을 앞둔 여야는 중도층을 잡기 위한 혁신경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여당은 ‘용산의 하청업체’로 전락한 당정관계를 재정립하는 동시에, 이념보다 실용을 모색해야 하고, 야당은 ‘친명’과 ‘비명’의 갈등을 극복하는 한편, 팬덤정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급하다. 문제는 총선 공천권을 쥐고 있는 여야 최고 권력자의 목에 누가 먼저 ‘혁신의 방울’을 달아서 외연을 확장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2023-10-09

민심이 천심이라고?

홍석봉 대구지사장 고염무(顧炎武)는 천하와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분하고 ‘나라를 지키는 것은 그 군주와 신하가 민생을 위해 일을 도모하면 되지만 천하를 지키는 것은 지체가 낮은 필부에게 책임이 있다(天下興亡 匹夫有責)’고 했다. 고염무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던 혼돈의 시기에 활동하던 사상가다. 당시 관리와 귀족들은 청나라의 점령과 악행에 분노했다. 반면 일부 식자층에선 명나라의 멸망에 대해 보다 본질적인 문제점을 찾기 위해 인문학적 성찰을 시작했다. 그 화두의 중심이 고염무의 ‘천하흥망 필부유책’이었다. 중국 사회의 자각운동의 시작이었다.영국 출신의 마이클 브린 전 외신기자 협회장은 ‘조작 여론조사가 먹히는 요지경 나라’라는 책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법이 아닌 야수가 된 인민이 지배한다’고 설파했다. 한국은 민심에 따라 정권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민중에 대한 경고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죽인 이도 무지한 민중들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조익순 전 고려대교수는“과거 조선은 양반들 때문에 망했으나 지금은 민중이라는 탈을 쓴 좌익 빨갱이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조 교수는 그리스, 로마와 같은 한때 세계 최강의 나라들이 멸망한 이유도 바로 내부로부터의 붕괴 때문이었다고 했다. 정신적 타락과 사회질서의 붕괴로 자기결정 능력을 상실한 것이 그 근본 원인이었다고 분석했다.독일의 한 경제신문은 최근 “오염처리수가 과학적으로 문제가 없음에도 많은 한국인이 공포에 떨고 있고 야당인 민주당이 이를 이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광우병, 사드 전자파, 후쿠시마 오염수 괴담으로 우리 사회가 심한 홍역을 앓았다. 좌파 세력의 선동이 원인이다. 그 피해는 엄청나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지지율이 줄곧 30%대에 머물고 있다. 좌파와의 싸움을 밀어부치고 타협하지 않는 정치력 탓이 크다. 하지만 좌파 세력들의 선동 및 시위와 무관하지 않다. 나치 독일의 선전가 괴벨스는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했다.중국 축구를 응원한 포털 다음과 드루킹 사건에서 보듯 네티즌과 정치세력에 의한 여론조작이 심각하다. 거짓과 진실이 혼재된 상황 속에 거짓 정보를 가려내기란 쉽지 않다. 필부들에겐 더욱 어렵다. 필부는 부하뇌동하기 마련이다. 절제되지 않고, 무책임한 민중과 민심은 자칫 망국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다. 거기에 집단 광기까지 더해진다면 위태롭기 짝이 없다. 한때 TV를 바보상자라고 칭한 적이 있다. 민중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돌려놓고 무디게 만들어 놀이와 유흥에 빠지도록 했다. 정치인에게 민중의 각성은 위험하다.여론조사 전성시대다. 하지만 정치 여론조사는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 없다. 침묵하는 다수의 여론은 반영되지 않는다. 여론조사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이유다. 그저 추세만 확인하는 데 그치는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민심은 천심’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민심은 곧 정의’라는 믿음이 허망하게 깨지고 있는 요즘이다.

2023-10-05

청소년 비만

우정구 논설위원 비만이란 체내에 지방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된 질병을 일컫는 말이다. 체중이 정상 범위보다 높지만 근육량이 많고 체지방률이 낮은 경우는 비만이라 하지 않는다.과거 먹을 것이 부족했던 사회에서는 비만인 사람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비만 자체가 부와 여유로움의 상징으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우리나라도 1970년대까지만 해도 살이 찐 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으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한국인 비만율은 1998년에는 26% 정도였다. 이것이 2005년 30%를 넘어섰고, 2020년에 38.3%였으나 코로나 영향으로 2021년에는 37.1%로 감소했다. OECD 기준으로 볼 때 한국의 비만인구는 OECD 평균의 4분의 1수준으로 매우 낮다.한자 문화권으로 분류되는 한국과 중국, 싱가포르 등 동남아국가들은 서구에 비해 비만 정도가 낮다. 채식위주 식습관을 가진 베트남은 세계적으로 비만이 가장 낮은 나라다.문제는 비만이 불러오는 질병에 있다. 고열량 저영양 가공식품이나 음료 등을 즐겨 마시면 당뇨나 고혈압 등의 만성질환에 쉽게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서구화된 식생활에 익숙해지면 고도비만도 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우리나라 청소년의 비만이 늘고 있어 부모들의 경각심이 요구된다는 소식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비만으로 진료받은 중학생이 4년전보다 3.1배 늘었고, 또 같은 기간 20대 청년층에서는 당뇨 환자수가 47%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인의 대표적 길거리 음식인 고당분의 탕후루같은 식품류가 청소년의 건강을 위협한다고 한다. 청소년기 비만 가볍게 보다가는 큰코다칠 일이 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3-10-05

‘같아요’ 증후군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언제부턴가 말끝마다 “같아요”를 남발하는 말버릇이 유행하고 있다. 텔레비전을 보면 요즘 젊은이들은 대다수가 “너무 좋은 것 같아요”, “너무 슬픈 것 같아요”, “너무 맛있는 것 같아요” 따위의 말투를 입에 달고 있다. 자신의 감정이나 체험을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말하는 습관도 문제지만 어법에도 맞지 않는 말이다. 정상적이지 않은 현상이 일반화 되는 것은 일종의 증후군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같다’는 말은 ‘다르지 아니하다, 전과 변함이 없다’는 뜻의 형용사다. 그리고 ‘~ㄴ 것, ~는 것, ~ㄹ 것, ~을 것’ 등의 뒤에 쓰여서 추측이나 불확실한 단정을 나타내기도 하고, ‘미루어 생각할 때나, 생각이나 느낌을 듣는 사람의 감정이 상하지 아니하도록 부드럽게 표현하고자 할 때’도 쓰인다. 그렇듯 어엿한 우리말이지만 부적절하게 남용되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너무 좋은 거 같아요”는 어법에 맞지 않는다. ‘너무’라는 부정적 의미의 부사도 적절치 않지만, ‘아주 많이 좋다’는 감정을 표현하는 말에는 ‘같아요’라는 추측이나 불확실한 짐작을 나타내는 형용사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런 말이 아무런 거부감도 없이 통용된다는 것은 우리말에 대한 상식적인 수준의 인식도 없다는 걸 의미한다.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의 교양과목으로도 국어를 배우면서 우리말에 대한 그 정도의 상식도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국어교육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같아요’라는 말투가 젊은이들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 것에는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제주대학교 김재왕 교수는, 첫째로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잘라 말하는 것은 각박하다는 생각 때문이고, 둘째는 젊은 세대들의 자신감 상실·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한 자세·책임을 피하려는 성향 등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가 있고, 셋째로는 사고력의 퇴화를 그 원인으로 꼽고 있다. ‘넘쳐나는 인터넷 정보, 참고서 수준의 알찬 교과서, 유려한 영상교육, 풍부한 참고서 등 학습 환경의 개선으로 표면적인 문제해결능력이나 수리능력은 향상되었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사리분별능력, 응용능력 및 언어표현능력 등은 오히려 퇴락한 것’이라는 설명이다.사회적·심리적 요인이 언어의 혼탁을 가져오는 것이지만, 역으로 혼란스럽고 천박한 언어가 청소년들의 정서나 심성에 미치는 영향도 막대한 것이다. 우리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인성과 가치관을 갖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올바른 언어생활이 중요하다. 올바른 언어가 올바른 생각을 갖게 하고, 올바른 생각에서 올바른 행동이 나오기 마련이다. 공기의 오염, 토양의 오염, 바다의 오염 못지않게 언어의 오염도 우리 삶을 해치는 공해라는 각성이 일어야 한다.특히나 요즘은 좌파 정치인들과 동조하는 극렬 팬덤이 쏟아내는 온갖 거칠고 사악한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그런 말들에 오염되지 않고 올바른 언어습관을 갖도록 교육현장에서 각별한 노력이 있기를 바란다. 한글날을 앞두고 해보는 쓴소리다.

2023-10-05

장묘 문화가 바뀌고 있다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이번 추석에도 가족묘를 찾아가 술 한 잔씩을 정성스레 올렸다. 조모님은 파주의 묘지에, 부모님은 대구의 공원묘원에, 그리고 1년 전 귀천한 동생은 의왕의 납골당에 모셔져 있어서 한 바퀴 순회하듯 마음 경건히 둘러보았다. 그런데 추석 연휴가 길어서인지 성묘객들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아 조용한 분위기였다. 기일(忌日)이나 한식날에도 찾아보려 했었지만 추석에 한 번 찾아가는 것도 어려워 묘지관리는 맡기고 있다. 덕분에 산소는 깔끔하게 벌초가 되어 있어 고마웠다.우리의 장묘문화도 많이 바뀌었다. 유교문화를 전통으로 한 매장(埋葬)도 90년대부터 변하기 시작하여 요즘은 화장(火葬)이 90%를 넘고 포항지역만 해도 81.4%라고 한다. 화장 후에도 납골당에 정갈하게 봉안하기보다는 수목이나 잔디밭에 묻는 자연장(自然葬)이 더 많다고 하니 후손들의 관리 불편에 따른 심정이 조금 묻어있는 것 같다. 산에 봉분을 만드는 일반 매장은 유족의 경제적 부담과 함께 1인 가구와 핵가족의 증가, 고령화 등으로 인해 1년에 한 번도 성묘하지 못하는 죄스러움도 있을 것이고, 수해의 우려와 교통편 등을 생각하더라도 넓은 추모 공원 등에 안치하는 것이 좋아서 앞으로의 장묘문화가 될 것 같다.우리나라의 묘지 면적은 국토의 약 1%이고 매년 20여만 기의 묘가 만들어지고 있어 10년 이내에 묘지공급의 한계가 우려되는 장묘 대란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예측도 있다. 2001년 제정된 장사(葬事) 관련 법은, 매장은 국토를 잠식하고 자연환경을 훼손한다는 관점에서 화장과 봉안, 자연장을 장려하며 묘지 조성은 허가를 받도록 하고 있다. 현재 전국에는 약 1천800만 기의 묘지가 있으며 그중 3분의 1 정도가 무연고 묘로 조사되어 각 지방자치단체는 분묘 개장과 이장을 권고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규정을 마련하고 있다.산행하다 보면 산 능선과 아늑한 계곡에서 많은 무덤을 보게 되는데 거의 다 벌초도 되지 않고 손상된 방치 묘소로서 버젓이 큰 비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잘 나가던 집안이었던 같은 데도 돌보는 후손이 없는 듯하며 마음이 아프다. 명심보감에서 읽은 ‘살아서 백 년간 몸을 보전하기 어렵고 죽어서는 백 년 동안 무덤을 보전하기 어렵다(難保百年墳)’는 글귀가 생각난다. 무덤은 명당이어야 한다며 배산임수니 좌향이 어떠니 하며 풍수를 보곤했지만 이제는 세상도 바뀌어 명절 때 벌초하고 성묘하기 위해 교통이 편리하고 경관이 좋은 곳이 명당이 되겠다.점점 화장이 증가하는 추세를 따라 포항시는 2021년에 친자연적 장례문화를 구축하고 편리한 장사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계획으로 추모공원 설립지를 공모했었지만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가 올해 다시 모집한 결과 남부의 장기면을 비롯한 7개 지역이 참여 의사를 밝혀 추진력을 얻고있다. 약 10만 평 규모에 80%는 공원화하고 20%는 화장시설, 봉안시설 등을 갖추어 2025년 3월 개원을 목표로 포항지역의 대표적 명승지로 만들려고 한다.우리의 장묘문화도 시대의 흐름과 국민의 사회적 의식 변화로 바뀌어가겠지만 고인에 대한 추모의 정만은 마음에 한껏 안고 가야 할 것이다.

2023-10-05

세리머니의 쓴 맛

홍석봉 대구지사장 농구의 버저 비터는 경기종료를 알리는 버저소리와 함께 성공된 골을 일컫는 말이다. 엎치락뒤치락하는 농구경기에서 버저 비터로 승부가 뒤집히는 일이 적지 않다. 축구 경기에서도 종료 직전 터진 골이 승부를 되돌려 놓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관중과 팬에겐 짜릿한 감동을 선사한다. 특히 연장전 종료 직전 터지는 골은 더욱 극적이다.1970년대 고교야구의 명문인 군산상고는 9회말 역전극의 대명사였다. 1971년 황금사자기 결승전의 짜릿한 역전우승은 군산상고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9회 말 투아웃 투스트라이크의 절체절명의 상황에 극적인 안타를 터뜨려 역전 우승의 기적을 만들었다. 여기서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가 탄생했다. 이후 군산상고는 고교야구 메이저 대회를 석권하면서 여러 차례 1점 차 역전승을 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했다.육상 경기와 스케이트 경기에서도 막판 불꽃같은 질주로 승부를 뒤집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처럼 스포츠 경기에서 막판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하는 뒤집기 승부는 그만큼 팬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준다. 상대방으로 봐선 막판 방심했다가 천려일실이 된다. 그런 일이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벌어졌다. 막판 1위를 자신하고 세리머니를 하다가 뒤따라온 선수에게 지고 마는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한국 남자 롤러스케이팅 대표팀이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3000m 계주에서 결승선 통과 직전 우승을 확신한 만세 세리머니를 하다 간발의 차로 대만에 추월 당해 금메달을 놓쳤다. 딱 0.01초 차이였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점을 잊고 방심한 탓이다. 계주 마지막 주자의 방심의 결과는 메달 색깔을 바꿔놓았다. 매사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값진 교훈을 남겼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0-04

우리 글엔, 자존심도 없나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여기서부터 원스푸드(Once Food)거리입니다’. 무슨 말일까. 관광지로 제법 이름난 국내 어느 도시 사거리에 걸린 현수막이다. 한글로 또박또박 적힌 글이라 읽을 수는 있었지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군민 플로깅챌런지’라 큼지막하게 적은 현수막도 보인다. 영문자의 도움도 없어 아예 그 뜻을 가늠조차 못하겠다. 어느 병원은 아예 ‘Moocheok Joeun Hospital’이라 상호를 내걸었다. 찬찬히 읽어 ‘무척좋은병원’이라 새기겠지만, 이래도 되나 싶은 떨떠름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한글인가 영어인가. 한국인가 미국인가. 민족의 명절 추석을 지내면서, 우리는 ‘우리의 것들’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지 아연해 졌다.‘Special Live Dinner Buffet’라고 광고를 하거나 ‘Forest Camping BBQ’라 버젓이 적어 알린다. ‘프레시랍스터’와 ‘핑크새먼디쉬’가 맛있는 집이라며 손님을 모은다. 그런 표현을 보면서도 별 생각없이 이해하고 넘기는 소비자들도 문제가 아닐까.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우리글과 우리말이 무너져 내린다. 언젠가 로스앤젤레스 등 외국의 거리를 한국말 간판으로 물들인다더니, 이제는 우리나라 길거리에서 우리말이 사라져 간다. ‘원스푸드’가 음식점에서 음식물을 두 번씩 사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니 그 뜻은 오히려 고맙다. ‘플로깅’도 운동을 하면서 쓰레기도 줍는 캠페인이었다니 곱지않게 보았던 마음이 오히려 미안하다. 관광지라지만 이왕 한글로 적을 거였다면, 보다 새기기 쉽게 표현할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한가위 명절을 지나며 우리는 우리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보듬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한글날이 다가오는데, 중국글자 한자(漢字)를 힘들어 했던 백성들을 위해 글자를 만들었던 세종 임금의 마음도 다시 새겨본다. 우리가 우리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우리말과 한글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업수이 여길 때 남들은 우리를 또 얼마나 하찮게 여길까. 멋진 우리말을 버젓이 두고 외래어와 외국표현에만 익숙해지면, 우리말과 우리글은 또 얼마나 빠르게 사그라들까. 때로 습관과 태도는 의지적으로 지켜야 한다. 대상이 우리만의 것이었을 때, 그걸 지킬 사람은 우리 밖에 없다. 세계화와 글로벌이 대세라 해도, 우리만의 고유한 멋과 맛은 소중하게 간직하며 지켜낼 때 빛이 나지 않을까.한가위 보름달은 어디에도 떴지만, 온겨레가 명절로 섬기기는 우리뿐이 아닐까. 정겹고 아름다운 전통은 지켜야 하고, 몸에 배어 습관이 된 문화는 키워야 한다. 밖으로부터 흘러든 문화와 영향도 어렵지 않게 받지만, 우리의 모습과 부딪힐 땐 잘 생각해야 한다. 때로 우리보다 나은 무엇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 문화 안에 깃든 정서와 흐름은 소중한 것이다. 우리가 가진 무엇이라도 함부로 가벼이 여겨 쉽사리 팽개치는 잘못은 없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작은 나라지만 문화적 정체성과 경제적 영향력은 간단하지 않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소중히 여기고 다루어야 한다.

2023-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