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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길고 넓게 두른 담장과 노목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당당한 품격의 영해향교

영해와 평해의 해(海)는 바다해지만 물산이 풍부하고 바다처럼 넓다는 의미도 포함될 것이다. 비록 평해와 영해가 울진과 영덕으로 편입되었지만 넓고 크기로는 한 수 위다. 영해도 큰 고을로 넓고도 넓은 벌판과 물산이 풍부하여 그만큼 수탈도 많이 당하는 운명이었다. 그래서 탐관오리를 처단하고 조선을 뒤흔든 이필제의 난이 일어난 영해였다.영해의 향교도 좋은 위치로 잘 옮겨 오늘날 문화 전달의 매개체 역학을 하기에 좋은 장소로 손색이 없다.#. 설레임 안고 가는 영해 향교와 관아사람도 매력이 있어야 설레임이 있듯이 지역도 마찬가지로 말 못할 아픔이나 굴곡진 변곡점이 있어야 애착이 가고 이끌리게 된다. 영해는 지금은 면으로 격하되었지만, 원래 고구려의 우시군(于尸郡)이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는 유린군(有隣郡)이 되었다. 고려 초인 940년(태조 23년) 예주(禮州)로 시작하여 1259년(고종 46년) 잠시 덕원소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다시 예주로 잠시 환원했다가 1310년(충선왕 2년) 영해부로 강등되어 약 600여년 장구한 세월을 이어오다 1896년 영해군이 되었다. 오늘날 영덕군으로 편입되어 영해면이 된 것은 1913년이다. 모순된 봉건사회와 외세에 저항한 영해의 기질이 곳곳에 흐르고, 고택들이 즐비한 인량 전통마을과 괴시리 전통마을이 숨 쉬고 있어 더욱 발걸음 가볍게 영해를 찾았다. 평지에 자리 잡은 영해면은 군 단위의 읍 모양 넓게 펼쳐져 있고 로터리가 그 옛날 영광의 흔적을 안고 영해 3·18 독립만세운동 기념탑과 의연하게 길손을 맞이하고 있었다.옮겨온 영해향교에 갔다. 산언덕에 넓게 자리 잡은 영해향교는 향교로서의 권위와 격이 풍겨 마음이 즐거웠다. 초라한 영덕향교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건립시기도 고려시대인1346년에 지어졌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은 조선 중기 1529년(중종 24년)이었다. 건물도 당당하여 한껏 권위를 세우고 있었다. 건물 자체를 보고 즐기는 맛이 차곡차곡 채워졌다. 길고 넓게 두른 담장도 노목이 품어내는 연륜과 주고받으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향교에서 내려다본 영해는 큰 고을이었다. 우측 발아래는 영해의 옛 이름 예주생활관 건물이 위용을 자랑하고 담장 끝에 고목의 앙상한 가지는 허공에 맨살을 드러낸 채 파란 하늘과 속삭이고 있었다. 사람 없는 영해향교를 찬찬히 둘러보고 옛 영해부 관아가 있던 영해면사무소로 발길을 돌렸다.옛 관아(영해면사무소)는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야트막한 산언덕 읍성 안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거의 없애버려 옛 관아 건물은 흔적도 없다. 다만 정문 우측에 조금 남아있던 책방관사(부사의 보좌가 살던 곳)를 복원해 놓았다. 읍성의 흔적도 거의 없고 높게 쌓은 축대는 일본성 같은 기분이 든다. 정문 들어가 왼쪽 끝에는 영해부사와 군수 했던 관리들이 자기를 잊지 말라는 공덕비, 그것도 영원히 잊지 말라는 오매불망비가 즐비하다. 이들은 얼마나 선정을 베풀었을까? 아니면 얼마나 수탈했을까?#. 백성의 고혈을 짜는 관리들영해관아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지만 150년 전 어마어마한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800년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면에서 꽃을 피우던 정조가 죽자 12살 어린 순조가 등극하고 외척 안동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1860년대는 민란의 시대라 할 만큼 혼란스러웠는데 임술민란으로 통칭되는 1862년(철종 13년) 진주 단성에서 시작하여 전국에 37회나 일어났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서양세력의 각축장으로 변하는 암울한 위기의 연속이었다. 관찰사와 수령은 돈과 뇌물로 사고팔아 심할 때는 부임도 안했는데 또 다른 부임자가 오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돈과 뇌물로 벼슬하면 온갖 명목으로 수탈하는 탐관오리해야 본전을 찾는다. 더 착취하여 큰 뇌물로 더 큰 벼슬을 하였고, 과거도 대리시험에 온갖 부정으로 세도가들이 독차지했다.이 시기에 태어난 이필제(1825~1871년)는 봉건사회의 모순을 몸소 겪고 자란다.1860년 4월에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1823~1863년)는 1863년(철종 14년) 11월20일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경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합송되어가는 길목인 조령 초곡에 수 천 명의 동학교도들이 햇불을 들고 눈물을 흘리는 광경을 본 38살의 이필제(본명 이근수)는 동학에 입교한다. 이필제는 교주 최제우가 처형당한지 7년째 되는 1871(고종 8년)년 3월10일 밤 9시 600여명의 동학도인과 농민이 교조신원과 관의탐학을 규탄하고자 탐관의 소굴로 알려진 이곳 영해부관아를 포위했다. 한밤중에 갑작스런 군중의 침입에 당황한 포졸들의 발포로 1명이 죽고 1명이 부상당했지만 관아를 점령했다. 이필제는 도망가던 영해부사 이정을 붙잡아 관아 뜰에 꿇어앉히고 죄를 물었다. “…. 백성을 학대하고 재물을 탐한 죄”등등을 꾸짖었지만 끝내 반성하지 않자 죽였다. 소를 잡아 나누어먹고 탈취한 관아의 돈 140을 자신들의 경비 40냥을 썼고, 100냥은 영해읍 5개동에 헐벗은 농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정부에서도 어떤 적인지도 몰라 당황했고 이웃고을의 수령들은 영해봉기에 두려움에 떨며 모두 다 도망갔다. 이필제는 어떤 연유로 영해까지 와서 혁명을 하게 되었는가?#. 혁명가 이필제1825년(순조 25년) 충청도 홍주(지금의 홍성)에서 시골양반으로 태어난 이필제는 1860년 진천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 무과에도 합격했으나 관직은 없는 선달로 충청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세상물정을 몸소 체험하면서 변혁의 불길을 당기고 있었다. 1850년 25살에 외가인 경상도 풍기에 갔을 때 헌헌장부에 학식이 뛰어나 외삼촌 안재벽, 안재억은 풍기 서부면 교촌에 사는 이름난 선비 허선에게 소개시킨다. 허선은 이필제의 시 ‘남정록’을 보고 “…. 대양국(大洋國·서양나라)은 오래지 않아 천하를 소동시켜 우리에게 심한 독을 끼칠 것이다. 서쪽으로 대양을 누르고 북쪽으로는 흉노를 막는 일이 그대에게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원컨대 그대는 자애하여 늙은이의 말을 노망들었다 하지 말고 진충보국하여 큰 공훈을 세우라”고 극찬한다. 조선시대 포도청에 관한 기록 ‘우포도청등록’에 전한다. 이리하여 이필제는 자신이 진인 즉 메시아로 정감록의 정도령을 자임하며 이때부터 나라를 바로잡고 북벌하여 중국까지 정벌한다는 꿈을 키워간다.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명나라 태조(주원장)도 거지 아이 300명으로 일을 일으켰느니, 사람의 일은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1천명의 군사로 동쪽으로는 일본 대마도를 치고, 서쪽으로는 중국을 쳐서 한 달 안에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허무맹랑하다고 할 수 있지만, 1842년 아편전쟁 당시 영군은 20척 함대에 4천군사로 4억 중국을 제압했으니 큰 꿈을 꾸는 혁명가에게는 망상이 아니다. 이런 이필제가 어떤 연유인지 1859년(철종 10년) 4월에 영천으로 귀양와 1860년 1월에 풀려난다. 1869년 진천거사를 계획했다가 밀고로 실패하고, 12월에는 남해거사를 준비하다 여의치 않아 포기한다. 다음해 1870년 2월 28일 산청 덕산 에서 사람들을 모아 진주관아를 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기로 했는데 밀고하는 자가 있어 진주봉기는 실패하고 영해로 온다. 1871년 2월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찾아온다.이필제는 “한 번 선생(최제우)의 수치를 씻고 창생의 재앙을 구하고 이어 중국에서 왕조를 창업하는 것입니다…. 스승께서 동쪽에서 받았으므로 그 도를 동학이라고 하였으니, 동(東)은 동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영해는 우리의 동해입니다. 3월 10일이 선생께서 돌아가신 날이니 그 날에 거사하겠소.”이필제는 북벌보다는 교조신원에 비중을 두어 무력봉기는 반대했지만, 봉기할 것을 결심하여 동학교도들이 대거 모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영해관아를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주민들의 호응이 없어 관군의 공격을 피해 일월산으로 향했다. 조령 초곡에서 단양을 중심으로 거사를 준비하다가 거사 직전 조령별장의 수색으로 피했다가 1871년 8월 2일 문경에서 체포되어 12월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교수형을 당하였다.그에게 자금을 보내주고 후원해준 공주부호 심홍택(沈弘澤)은 포도청 심문에서“우연히 그와 친하게 지내게 되었는데, 언어와 거동과 풍채가 과연 훌륭하여 평생 처음 보는 뛰어난 남자였다. 이런 인품과 기질로도 ‘출신’의 이름을 면치 못하는 것이 실로 가긍하여 천금을 아끼지 않고 도와준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요, 그 사람을 깊이 아꼈기 때문이다.”했다. 심홍택은 매맞아 죽었고 아들 심상학은 옥에 갇혔다.뛰어난 문장솜씨에 시도 잘 지었고, 나라를 걱정하며 눈물을 흘리는 그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고, 반듯한 용모와 기개로 믿음을 얻었고, 탁월한 용병술과 인품으로 모든 사람을 이끌었던 이필제는 봉건의 모순을 타파하고 동양의 황제가 되려는 큰 야망을 품은 탁월한 혁명가였다. 영덕의 의병장 신돌석 장군도 (당시에는 영해)서 태어나 큰 영향을 받았고, 동학혁명을 이끈 전봉준도 자신의 자를 이필제가 이름 썼던 명숙(明叔)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이 영해관아는 영의정 허적(1610~1680년)이 경상도 관찰사 때 영해에 순찰 왔다가 객사에 머물면서 원통하게 죽은 16살 과거급제자가 몽달귀신으로 나타나 원한을 풀어주는 이야기기 있다. 밀양에 원통하게 겁탈당하고 죽은 아랑의 이야기같이 전국에 비슷한 몽달귀신 이야기가 비슷하다. 우리 시대도 이런 몽달귀신이 많이 나와 법의 이름으로 온갖 조작을 하여 원통하게 죽은 억울한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 주었으면 좋겠다. 백두산 기행과 동경기행을 쓴 당주 박종도 이곳 영해에 16년 귀양와 죽었다. 끝 /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

2020-12-29

영덕하면 대게?…복사꽃 무릉도원과 의병장 신돌석 장군이 떠오른다

#. 안쓰러운 영덕 향교바닷가 영덕 강구항을 지나서 북으로 가다가 내륙으로 조금 들어가면 영덕읍이 나온다. 영덕 향교는 집들이 빼곡히 들어선 골목길 접어들어 숨은 듯이 말없이 길손을 맞이한다. 보통의 향교가 시내중심부에 있기에 평지에 넓게 있거나 산을 백그라운드로 등지고 있는데 영덕향교도 조그마한 언덕을 등지고 있지만, 아파트가 점령해버려 숨이 막힌다. 규모도 작고 사람 하나 없는 향교는 그냥 마지못해 서 있는듯 했다. 영덕향교가 옮겨와야 할 운명이었다 하더라도 지금의 영덕향교는 초라함을 넘어 안쓰러웠다. 이처럼 집이나 건물들은 장소가 대단히 중요하다.향교나 서원은 일정한 법칙에 의해 지어지기에 문을 들어서면 중심 되는 강당이 중앙에 있고 좌,우에 강학 공간인 동무, 서무가 있다. 뒤에는 제향공간인 대성전이 있는데 영덕향교도 이를 충실히 따랐다.영덕향교는 1410년(태종 10년) 영덕읍 덕곡리에 창건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영덕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면서 이 향교를 교실로 사용한다. 향교의 존재가치로 중요한 위폐는 영덕읍 화개리의 가옥을 구입하여 봉안한다. 10년 뒤(1924년) 영덕공립보통학교의 교사가 신축되면서 위폐를 다시 옮겨온다. 1940년에는 1군 1향교의 방침에 합병된 영해향교의 위폐를 옮겨와 봉안하고 영덕 향교의 위폐는 묻어버린다.1950년 우리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으로 영덕 향교건물들은 불타고, 1965년 영덕 유림들의 뜻을 모은 성금으로 화개리 현 위치에 옮겨지은 것이 오늘날의 영덕 향교인 것이다.아쉬움 안고 큰길로 나오자 길옆에 항일 의병장 신운석(1839~1896년) 장군 순국기념비가 오늘의 영덕을 지켜보고 있다. 제국주의 일본이 야금야금 조선을 집어삼킬 때 분연히 일어나 맞서다 죽은 선열들이 많다. 이 근처에서 태어난 신운석 장군도 1896년 영덕의진의 의병장이 되어 일본군과 영덕에서 격렬한 전투를 치르다 패하고 피신해 있다가 체포되어 고진 고문에 혀를 깨물고 항거하다 총살당한 분이다. 머리 숙여 묵념하고 축산면 신돌석 생가로 향했다.#. 생가는 쓸쓸하고옛 영해지역인 영덕 축산면 도곡리 신돌석(1878~1908년) 생가를 찾았다. 사람 하나 없는 주차장에 생가도 수리한다고 어수선하여 예전에 왔을 때보다 더욱 쓸쓸했다. 그러면 이곳에서 자랐던 신돌석(본명 신태호) 장군은 어떤 사람이었는가.생가 인근 도곡2동(복대비) 외가에서 태어난 1878년은 조선왕조의 막바지로 온갖 모순을 안고 기울어져가는 시기였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장이 된 조선은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운명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이런 어지러운 세상에 시대의 운명을 안고 태어나 보통사람이 하기 힘든 역사의 한 획을 긋는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신돌석은 장대한 신체로 힘이 장사로 많은 일화를 남긴다. 그리고 어릴 때는 상당한 개구쟁이였고 골목대장을 뛰어넘는 동해안을 휘젓고 다니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파악한 민족을 사랑한 의병장이었다.1894년은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걸고 동학농민 혁명이 일어난다. 다음해인 1895년 8월에 일본낭인(무사)들이 밤중에 궁궐에 침입하여 민비(명성황후) 사진 들고 민비와 비슷한 궁녀들을 칼로 찔러 죽이고 시체를 불태워버린다. 이른바 민비시해사건인데 전국의 의병들이 분을 참지 못하고 일어난다. 신돌석도 1896년 3월 13일 19살 나이에 영해에서 100여명의 의병을 모아 일본군을 습격하는 등의 많은 업적으로 영해의병의 중군장이 되어 일본에 큰 타격을 주었다. 1905년 강압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이 빼앗기는 주권국가로의 지위를 잃었다. 이에 신돌석은 동생 신경우와 1906년 생가가 있는 이 도곡 마을에서 다시 300여명의 ‘영릉의병장’이 되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전쟁이란 정신력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무기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을 한방에 보내 버린 것도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폭탄이었다. 만약이란 가정 하에 3차 대전이 일어난다면 핵으로 인간은 말살될 운명에 처해있다. 의병들이 아무리 민족적 울분으로 용맹한 정신으로 무장했더라도 막강한 신식무기의 일본을 상대하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신돌석이 용맹을 떨칠 수 있었던 것도 동해안 산악지대를 이용한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이었다.이 생가도 1850년경 신돌석 장군 아버지 신석주가 지었으나 1940년 일제는 독립의지를 꺾고자 불태워 일부는 무너졌고 1942년 일부를 새로 지어 기와집으로 꾸몄으나 1955년 현재의 초가로 복원했고 2020년 다시 수리하고 있다. 뻥 뚫린 벌판에서 모진 겨울바람이 소리 없이 날아온다.신돌석 장군 흉상.#. 태백산 호랑이의 업적신돌석 장군의 의병들은 군율이 엄격하고 민폐를 끼치지 않아 가는 곳마다 호응을 얻어 보호를 받았고 아버지는 가산을 털어 아들을 도왔으며 매부도 처남도 모두 신돌석 장군 휘하의 의병에 참여했다. 상놈 의병장이 양반을 능멸했다고 목을 쳐버리는 일이 횡행하던 당시 평민 신분으로 의병장이 된 신돌석 장군 의병 휘하에는 양반들도 있었으니 그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다. 어릴 때 30리 떨어진 서당에서 학문을 익힌 것도, 울산에 만석꾼 아들로 판사 그만두고 대한광복회 총사령관이던 박상진 의사 이강년 의병장들과도 깊이 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웃고을 울진 평해 월송정에 올라 “단군의 옛터가 쇠퇴함을 한탄하네./ 남아 스물일곱에 이룬 것이 무엇인가./”이처럼 한탄하면서 사나이 포부의 시 한 수 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자랄 때 동학혁명과 고향 영해에는 탁월한 혁명가 이필제의 난(1870년)을 듣고 자란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스포츠나 전쟁에서 뛰어난 기량의 선수도, 지략이 뛰어난 장군도, 승리하는 업적이 없으면 빛을 발하지 못한다. 그러면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칭을 얻은 신돌석 장군의 업적은 무엇인가?300여 명 휘하의 의병으로 영해부에 주둔해있던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고, 울진에서는 바다에 떠있는 일본 병선 아홉 척을 부수었다. 울진은 1890년부터 일본어부와 수산업자들이 전복과 해삼 등 자원을 쓸어가 어민들의 원성이 높았던 지역이다. 1907년에는 의병들이 3천여 명으로 많은 의병부대가 되어 동해안 영덕, 울진, 영양, 청송, 경주와 강원도 일대까지 일본군을 공격하여 일본인들은 신돌석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신돌석 명성을 듣고 해산당한 구식군대와 전국에서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의병을 말리러온 영해군수 경광국은 “누가 그 의기를 그르다고 하랴마는 독단으로 군대를 일으키려하니 말리려온 것뿐이오. 눈빛은 햇 불같고 다리는 하늘을 건널 만 하니 참으로 장군이로다.”했고 박은식(1859~1925년)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영해에서 봉기한 평민출신 의병장 신돌석의 부대는 일월산과 백암산을 근거지로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했다.#. 도끼에 목은 날아가고이렇게 되니 일본군들은 신돌석 장군 잡는데 혈안이 되었다. 투항자 면책특권의 귀순법으로 죄를 묻지 않는 회유정책과 현상금을 걸었다. 결국 여기에 우리의 영웅은 쓰러진다. 인간생존에 직결되는 기후가 의병들에게 겨울은 혹독하여 의병들도 흩어지고 군량미도 떨어져 1908년 따뜻한 내년을 기약하고 전략적으로 해산한다.“지금 적들의 무리들이 현상금을 걸고 내 머리를 구하는데…. 짐승 같은 무리에게 생명을 빼앗기기보다 차라리 서쪽으로 건너가서 만주나 중국으로 가서….” 이런 마음을 먹고 몸을 피해 다니다가 1908년 12월 11일 밤 9시쯤 영덕군 북면 눌곡(현 영덕군 지품면 눌곡)의 옛 부하였고 고종사촌(이종, 외사촌 설도 있음) 김상렬(일명 김자성) 형제 집으로 갔다. 상금에 눈이 먼 형제는 반갑게 맞이하고 독한 술을 먹이고 12월 12일 밤 1시쯤 깊이 잠든 신돌석의 목을 도끼로 내리쳤다. 김상렬 형제는 그의 시체를 메고 일본 군대로 갔다. 신돌석의 머리라고 상금 달라 하니 일본군 장교는 “산사람 잡아오라했지 죽여오라 했느냐”며 호통치고 돌려보냈다.일본 측 기록은 김상렬, 김도룡 부하와 갈등이 빚은 결과로 우리 측은 현상금(몰래 상금 주었다는 설) 때문이라 했다. 또 돌로 쳐 죽였다는 설도 있다. 시체는 영덕군으로 옮겨져 시신확인 작업을 거쳐 가족에 인도되어 생가 뒷산 봉우리에 묻혔다가 1971년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부인 한재여 여사는 모진 고초를 겪으며 불에 탄 집에서 힘든 삶을 살았고, 유일한 외아들은 독이 든 과자를 먹고 죽었다.이렇게 하여 귀신처럼 나타났다 사라졌기에 태백산 호랑이라 불린 신돌석 장군은 처참하게 죽는다. 그것도 일본군과 싸우다 죽었으면 덜 원통하지만 현상금에 마음이 뒤집힌 동족 친척에게 죽었으니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생가에서 나와 신돌석 장군 유적지를 성역화해 놓은 곳에 갔다. 곳곳에 흩어져 있던 유허비와 기념비도 옮겨 놓았다. 전시관과 사당을 혼자서 쓸쓸한 마음 안고 둘러보았다./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

2020-12-22

밭 갈던 농부가 발견한 ‘봉평 신라비’… 월송정이 바다와 숨쉬는 낭만의 울진

우리가 까마득한 옛날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문자로 알 수 있는 시대를 역사시대라면 문자 이전의 시대인 선사시대는 유물이나 그림을 통해서 유추할 뿐이다. 역사시대라 하더라도 기록의 문헌이 다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기록유물 중에 돌로 새긴 석비가 그래도 오래간다. 신라시대 비석은 동해안을 중심으로 많이 분포한다. 그 중 하나가 울진의 봉평신라비다.#. 죽변 봉평리 신라비의 기막힌 사연갈수록 도로는 거미줄 같이 이어져 전국 어디라도 빠르게 갈 수는 있지만 감동은 반감 된다. 가히 길 공화국이라 해도 손색없는 대한민국이다. 경주에서 울진은 도로를 넓게 잘 닦아놓아 시간은 단축되어도 꽤 먼 거리다. 그러나 구불구불 해안 따라 이어진 바다를 옆에 끼고 가던 옛길의 그 낭만적인 운치는 사라졌다.울진은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어서 남쪽 후포에서 북쪽 북면까지 길게 놓여있다. 안동도 댐 때문에 수몰지가 많아 옮겨진 고택이 많지만 울진도 이상하리만치 옮겨진 고택들이 많다. 다만 가정집 보다는 정자나 향교를 옮겨 울진을 몇 번이고 오갔다. 가을에는 그래도 희망을 푸른 바다에 담아 왔지만, 12월 겨울바다는 코로나19 여파로 온 세계와 전 국민이 움추린 쓸쓸함을 안고 왔다. 비석박물관 입구에는 울진에 흩어져 있던 강원도 관찰사, 평해 군수, 울진 현령들이 무슨 선정을 베풀었는지 선정비와 오매불망비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3개나 세워놓은 한심한 현령 김태희도 나그네 발길을 멈추게 한다. 주인공 봉평리 신라비를 옮겨놓은 전시관은 코로나19 때문에 문은 닫혀있고 뒤에는 전국의 유명한 25기의 비석을 실물대로 세워놓았다.1988년 1월 20일 울진 봉평리의 주두원씨는 자신의 논에 긴 돌이 박혀있어 농사에 방해되어 포클레인으로 빼내어 하천에 버렸다. 두 달 뒤인 3월 20일 권대선 봉평리 이장은 버려져있는 이 돌을 정원석 하기 위하여 지나가는 포클레인으로 마을 옆 빈터로 옮겨놓는다. 촉촉이 내리던 비는 돌에 묻었던 흙을 씻어내어 희미한 글씨가 보인다고 이장이 울진 군청에 알리고 군에서는 도에 알려 여러 사람을 거쳐 신라시대 석비임이 밝혀진 것이다. 이와 같이 중요한 유물이 세상에 알려질 때는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발견되거나 알려지는 것이 허다하다. 울진의 봉평리 신라비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가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봉평리 비에 담겨진 내용이 신라 봉평비는 어떤 내용을 새겨놓았는가. 높이 204cm로 금이 간 변성화강암의 자연석에 한 면에 400여자(398자)를 신라 특유의 예서, 해서체 중간 형태로 한자를 예술적으로 새겨 넣었다. 아직까지도 완벽한 해석을 못하는 것은 그냥 돌인 줄 알고 포클레인으로 이리저리 옮길 때 떨어져 나간 알 수 없는 30여자의 글씨가 있고, 신라식의 독특한 한문을 사용해 해석하기가 난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를 두고 내용은 고구려에서 신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울진은 고구려인 되기도 신라인 되기도 애매하여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무슨 사건인지 모르지만 지금의 울진(거벌모라, 남미지)지역 신라로 편입되는 과정에 울진 주민들이 길이 좁고 험한 이야개 성에 불을 지르고 성을 침범하는 항쟁을 일으키자 신라중앙군(大軍)으로 반란을 진압한다. 524년(법흥왕 11년) 1월 15일 법흥왕(매금왕)과 13명의 고위 귀족들이 모여 명을 내린다. 신라육부는 사후처리로 칡소(얼룩소) 잡아 피가 솟는 것을 보고 재판한다. 관련자에게 장육십대, 장백대 등의 형을 부과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스린다. 그래서 이 비를 울진에 세운 것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방민에게 주지시킨다는 내용이다.법흥왕은 법을 흥하게 했다는 이름대로 불교를 공인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신라의 23대 왕이다. 그런데 이 석비를 새길 때 법흥왕(牟卽智寐錦王)이라 하지 않고 매금왕이라 했다. 충주 남한강변에 있는 중원 고구려비(423년 추정)에 이런 내용이 있다. “고구려왕이 점령하고 신라왕(매금·寐錦)과 오랫동안 형제(동생)의 연을 맺는다.” 그리고 이 봉평 신하 비를 세운 524년은 법흥왕 11년인데 삼국사기에는 “가을 9월에 왕이 남쪽변경에 순행하여 영토를 넓혔는데 가야국왕이 와서 만났다.”는 기록뿐이다. 그 다음해인 525년에도 “봄 2월에 대아찬 이등을 사벌주의 군주로 삼았다.”고 기록돼 있다. 전자는 봉평 신라비가 없었다면 울진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는 것이고, 525년에도 울산 천전리 각석에 525년과 539년에 각석한 명문으로 신라시대를 폭넓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돌에 새긴 신라비와 울진의 향기지난 8일부터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신라비 중에서 가장 오래된 포항 흥해읍 중성리 신라비를 특별전시 하고 있어 울진 봉평리 신라비를 보고 와서 13일에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갔다. 평소에는 빽빽했던 경주박물관도 가족들만 간간히 보이고 한산하여 온전히 신라를 만날 수 있었다. 신라비 중에서 가장 먼저 새긴 501년(지증왕 2년)의 중성리 신라비는 포항에서 특별 손님으로 전시되어 입구에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글씨도 신라 특유의 서체로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크지도 않은 자연석에 새겨놓았고, 여러 남산신성비와 명할 산성비도 동시에 모아놓았다.임신서기석 비가 30cm 정도 높이로 앙증스럽게 서있다. 임신년(552년, 651년, 682년, 732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하늘,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도를 집지하고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일 이를 어기면 하늘에 큰 죄를 지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이런 내용으로 두 신라 젊은이의 단단한 결심을 느낄 수 있다.필자는 80년대부터 남한에 흩어져 있는 신라 비는 다 보았다. 대개의 신라 석비들이 자연석 돌에다 가공 없이 그냥 새기는데 드물게 이차돈 순교비는 6각형으로 다듬고 글자 하나 하나도 바둑판 그리듯 선을 그어 5면에 글자를 새겨 넣었다.한 면은 이차돈의 목이 잘려 땅에 떨어지고 흰 피가 솟구치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그림을 새겨 넣었다. 이 순교비는 817년(헌덕왕 9년)에 만든 것이지만 이차돈이 26살인 527년(법흥왕 14년) 순교 때의 장면이다. 여기에 이차돈의 아버지 길승(吉升)의 이름이 나오고 봉평 신라비에는 길선(吉先)으로 나오는데 활동 연대가 같으니까 표기 혹은 발음의 유사성으로 같은 사람을 지칭할 것이다.현재까지 발견된 신라비 중에 포항 중성리비가 가장 오래되었고 뒤를 이어 503년 포항 냉수리비, 532년 창녕비, 551년 단양적성비, 555년 북한산 순수비. 668년 마운령과 황초령비가 줄을 잇는다.8회에 걸쳐 울진을 마무리하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우선 행정구역이 삼국시대는 고구려에서 신라로, 조선시대 대한민국 때는 강원도에서 경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운명이었다. 울진읍을 지나다보니 강원도 이용원 간판이 강원도의 흔적을 안고 있었다. 대게도 울진이 원조지만 명성은 영덕에 빼앗겼고, 전국 최고의 금강송 소나무에서 나오는 송이도 명성은 봉화의 송이축제에 빼앗겼다. 최고의 질 좋은 노천탕 덕구온천과 백암온천도 부곡, 수안보, 온양, 동래온천에 비해 빛이 바랬다. 김시습의 송이 예찬 시로 위로를 삼아야 하는 슬픈 운명의 울진이다. 그래도 울진은 깊은 산과 넓고 푸른바다를 안고 천년고찰 불영사와 2억5천만년 전에 형성된 석유굴, 관동팔경 중 제1경 망양정, 월송정이 바다와 숨쉬고 있는 낭만이 흐르는 아름다운 고장이다.송이를 예찬한 선조들의 글도 많고 여러 문헌에도 전한다.목은 이색은 “예전 사람들은 신선이 되겠다며 불로초를 찾아다녔는데, 신선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은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송이버섯을 먹는 것이다.”했고 추석을 앞두고 친구로부터 받은 송이에 감동하여 “존경하는 스님을 찾아가서 고상히 즐기겠다.”는 감사의 글을 남겼다. 노계 이인로는 “소나무와 함께하고 복령의 향기를 가진 것”이라 했다. 세종도 명나라 황제께 송이를 보냈고, 연산군은 송이 욕심에 송이 금표지역을 처음 정했고, 왕만 54년 한 영조도 송이를 평생 즐겼고 83세 마지막까지도 송이를 찾았다 한다. 다방면에 많은 글을 남긴 서거정(1420~1488)도 “팔월(음력)이면 버섯 꽃이 눈처럼 환하게 피어라. 씹노라면 좋은 맛이 담박하고도 농후하네. 송이 예찬 시를 남겼다.일본에서도 한국의 송이 향을 “마츠타케올”이라 하여 최고로 친다. 외갓집이 울진이었던 매월당 김시습(1435~1493년)은 “고운 몸은 아직도 송화향기 서렸네. 마자 이가 시원한 것 깨달았네. 말려 다래끼에 담았다가 가을되면 노구솥에 푹푹 쪄서 맛보리라.”고 송이를 노래했다. 산속의 황금이라는 송이는 북한의 묘향산과 금강산에 많이 나지만, 분단되어 갈 수 없는 곳이고, 강원도 양양, 삼척, 경북 봉화, 영덕, 경주 남산 등에서 나지만 지금은 안동, 청송, 청도, 창녕 등에서도 난다. 동의보감에는 “송이는 맛이 매우 향미하고, 송기(松氣)가 있다. 나무에서 나는 버섯 가운데서 으뜸이다.”고 적었다.어우야담에 진기한 음식으로 묘향산과 금강산의 송이버섯구이를 꼽았다. 송이는 양양 것도 좋지만, 울진 송이를 최고로 친다. 그것은 소나무의 향과 해풍, 기온이 만들어낸 천혜의 자연조건 때문이다.봉평 신라비가 처음 있었던 자리에 가보니 예전에 보았던 기억은 아련한데 가까이 붙어있는 죽변 해수욕장에서 불어오는 푸른 동해 바람이 온갖 생각에 잠기게 한다./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

2020-12-15

율곡 이이가 백세의 스승으로 칭송한 고독한 천재 방랑자 매월당 김시습

울진향교도 두 번이나 옮기는 우여곡절을 겪지만 개교하는 학교의 교사로 교육기능을 다한 울진교육의 요람으로 큰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번화가에서 벗어나 초라한 향교가 되어있다. 월계서원도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었다. 지리적으로 산이 막혀 낙후된 지역인 울진은 귀양 오거나 무슨 연고로 와서 지방민에게 질 높은 학문의 세계로 이어지게 했다. 가정 이곡과 매월당 김시습, 만휴당 임유후, 조위 등의 문장으로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 머물면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용히 숨 쉬고 있는 울진향교늦은 가을과 초겨울이 교차되는 계절은 나아감을 멈추고 자신을 뒤돌아보는 시간이다. 만물이 생동하는 꽃피는 봄과 폭염의 더위를 알차게 보낸 사람들은 수확의 열매라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반성하며 새로운 다짐으로 희망의 내년을 기약하는 게 우리네 삶이다. 그러나 이것도 인간의 의지대로 작동이 안 되는 빨간불이 켜졌다. 그렇게 잘났다고 교만하던 인간을 능가하는 알 수 없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인간의 의지가 무력해지는 것도 받아들이고 자연을 파괴한 인간의 원죄라는 반성부터 먼저 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 동식물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해야 된다. 오늘은 하늘도 감응 하는지 먹구름 짙게 드리우다가 간간이 햇빛으로 새로운 희망을 준다.이런 어수선한 마음으로 울진 향교에 들어섰다. 정면 골목 좌우와 경사진 향교 주위를 집들이 고만고만하게 들어서 있어 도회지의 달동네와 조선시대를 연상케 한다. 향교 뒤에는 산이 가파르게 받치고 있다. 이웃 평해 향교가 고려시대 창건했다면 울진 향교는 한참 늦은 1484년(성종 15년)에 월변동에 창건했다가 1697년(숙종 23년)에 고성리 성저동으로 옮겼다. 여기서도 인연이 안 되어 1872년(고종 9년)에 현 위치로 옭기는 우여곡절을 겪는다.산 아래 비탈지고 협소한 공간이라 동무도 없고 균형도 미흡하지만, 이 향교에서 1908년 사립명동학교가 개교되고, 1945년 해방 후에는 울진국민학교(현 울진남부초등학교)가 개교했다.뒤이어 지금의 울진고등학교는 1946년 9월에 울진공립초등중학교로 설립하여 이 울진향교를 가교사로 개교하여 사용한 울진교육의 출발점으로 큰 역할을 한 곳으로 의미를 부여해야 된다. 시간을 되돌려 이 향교에서 조선 중기에 근처 근남면 수곡리 출신 예언가 격암 남사고와 울진 선비들의 일화도 아른거린다.향교를 나와서 비탈진 골목길을 걸어서 산으로 올랐다. 벽화가 군데군데 보여 생기가 돈다. 우리나라 곳곳에 벽화가 많이 그려져 있는데 간간이 멋있고 세련된 것도 있지만 대개가 어설픈 것은 프로 화가들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거의 봉사 차원에서 아마추어들이나 미대생들이 아르바이트로 그리다보니 그런 것이다. 그러나 벽화가 굳이 세련될 필요는 없다. 그 골목과 주위와 조화를 이루면 된다. 여기에는 나라 사랑의 주제로 유독 태극기가 많이 그려져 있다. 마침 마스크 쓴 채 혼자서 그리고 있는 한 분도 화실에서 그림 배우는 분이었다.산 정상에 가까워지자 우리나라 최고의 질 좋은 소나무 고장답게 미끈하게 쭉 뻗은 붉은 적송의 울진 금강송들이 호위하듯 위세를 뽐내고 있다. 울진은 바닷가에 있다 보니 왜구의 침입이 잦아 이곳에는 고읍성과 고현성이 소실대고 6번이나 옮긴 특이한 읍성인데도 흔적은 거의 없다. 산 정상에는 애국선열들을 기리는 충혼탑(옛 사친정터)이 서있고 일제강점기에 신사 세웠던 자리에는 해방이 되자 망향대를 세워놓았다. 다시 내려오자 비탈진 골목길에 할머니 한 분이 무, 배추 몇 포기를 손수레에 싣고 가는 모습에서 오늘날 쇠락한 향교를 연상하게 된다.#. 두 효자비와 산속에 숨어있는, 옮겨온 월계서원울진향교에서 하천 따라 월계서원 가는 길가에 두 효자비가 있다. 신안 주씨 효자 주경완은 아버지 주세홍이 학질로 1년 넘게 앓자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묻힌 종이를 태워 술에 타 드려 효험을 보았고, 아버지가 큰 종기를 앓자 추운 겨울에 밤새워 기도하여 토용(土龍·지렁이)을 구하여 그 약으로 낳게 하였다. 어머니도 종기를 앓자 아버지 방법대로 하여 낳게 하였고,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시묘 살이 3년 동안 죽만 먹고 정성을 다해 부모에 효도했다고 1578년(선조 11년)에 정려했다. 지금 비는 1879년(고종 16년)에 세웠다.그 앞에는 울진 장씨 장서린의 효자도 어릴 때 아버지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죽만 먹었다. 홀어머니께 효도하면서 외출하면 반드시 밤중이라도 집으로 돌아왔고 때로는 호랑이가 태워주었다는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도 전한다.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어머니 입에 넣어 소생시켰고, 3년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예를 다 하였다고 1633년(인조 11년)에 정려했다. 예전에는 효자들은 달리 방법이 없어 주로 손가락 잘라 피를 드리는 방법이 유일했다. 손가락 자른 효자가 양성된 그 시대 효의 한 단면이다.큰길가 밭에는 중년 지난 부부가 무, 배추 뽑기에 한참이고 허공에 매달려 있는 시래기가 초겨울 바람에 일렁인다.여기서 하천을 따라 가다가 다리 건너 조금 오르니 숨은 듯이 월계서원이 겨울 햇살을 받고 있었다. 서원 앞에는 산줄기가 언덕 되어 싱싱한 소나무를 꼿꼿하게 세워두고 있었다. 월계서원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서원은 아니고 울진 장씨 관시조인 장말익과 그의 8세손 장양수를 배향하는 문중적인 성격이 강하다. 울진 장계 호월리에 1856년(철종 7년)에 월계사로 출발하여 1862년(철종 13년)에 월계서원으로 사액 받았다가 1868년(고종 5년)에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5년 현 위치로 옮겨 광복 후 월계서원으로 복칭 되었다.이 서원은 국보각의 특이한 건물이 하나 있다. 장양수급제패지(張良守及第牌)로 현존하는 패지(위임장등의 공식문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려시대 과거제도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그 옆에 장씨 유허비에는 늙은 부부가 떨어진 낙엽을 포대에 정성스럽게 주워 담고 있었다.#. 매월당 김시습과 울진에 머물다 간 사람들고려시대 ‘죽부인전’으로 유명한 가정 이곡(1298~1351년)은 원나라에서 벼슬하고 아들이 유명한 목은 이색이다. 원나라에서 벼슬한 과거급제 자 중에 정식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이곡이 유일하다. 그는 영해 괴시리 마을이 처갓집이라 관동, 울진지방을 주유하면서 선사관, 월송정, 성류굴기 등의 많은 글을 남겨 그 향기가 전한다.고독한 방랑자 매월당 김시습(1435~1495년)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울진의 선사 장씨(仙槎 張氏)라 울진과는 깊은 인연이 있다. 여덟달 만에 글을 알았고 천부적 자질을 본 외할아버지가 말을 못해도 뜻이 통하는 한문 ‘천자문’을 우리말보다 먼저 가르쳤기에 김시습은 자라서도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붓과 먹을 쥐면 마음속의 생각을 글자로 다 써냈던 신동이었다. 3살 때부터 외할아버지께 글을 익혀 그때부터 사를 지을 줄 알았다. 1439년 봄 5살의 김시습에게 70살의 정승 허조(1369~1439)가 찾아왔다. 늙은 나를 위해 ‘老(노)’자로 시구를 지어 보아라. 하니 곧바로 “老木開花心不老(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다).”했다. 5세 신동 이야기는 유명한데 김시습을 존경을 넘어 숭배한 윤춘년(1514~1567년)의 기록은 “다섯 살에 세종께서 승정원에 부르시어 시로 그를 시험한 뒤 크게 칭찬하시고 비단 50필을 내려주시며 스스로 가져가게 하니 선생은 비단 끝을 이어 매어 어깨에 끌고 가버리니 모두가 놀라 자빠졌다. 이에 이름이 온 나라에 진동하여 ‘오세’라 불렀지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고”고 기록해 놓았다.김시습은 훗날 50세 무렵에 그 시절을 기억하며 “아주 어릴 때 황금 궁궐에 나갔더니 영릉(세종)께서 비단 도포를 내리셨다. 지신 사는 날 무릎에 앉히시고 내시는 글을 쓰라고 졸라대었지. 참 영물이라고 다투어 말하고 봉황이 났다고 다투어 보았건만, 어찌 알았으랴 집안이 기울면서 굴러 떨어져 쑥밭에서 늙을 줄이야!”라 읊었다.7,8세에 유가경전을 통달했고, 아홉 살에는 시문을 즉석에서 지을 줄 알았다. 이런 그가 15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어 외가의 농장이 있는 울진의 어머니 묘소를 지키며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다. 어머니의 3년 상이 끝나기도 전에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조숙한 천재는 송광사서 불교에 귀의하고 설잠(雪岑)의 법명을 썼다.훗날 “열다섯에 어머니 여의고,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자랐지만 할머니도 곧 땅 속 몸이 되시어 홀연 쓸쓸해졌지.”라고 회고했다. 병약한 아버지는 계모를 두었고 김시습 자신도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 못했고 불행한 삶을 시(전하는 시만 2천200여수)로 달래야 했다. 뒷날 정통유학자인 퇴계 이황은 색은행괴(索隱行怪) 하는 하나의 이인(異人)이라고 비판했지만, 율곡 이이는 “백세의 스승으로 공자를 보려거든 그를 보아라.”고 극찬했다.김시습이 울진 주천대를 자주 찾았지만 주천대란 이름을 지은 만휴당 임유후(1611~1673년)가 1628년 동생 지후가 반란음모로 발각되어 숙부인 예조판서 임취정(1561~1628년)과 두 아들이 죽임을 당하자 사직하고 주천대 옆에 집을 짓고 서 20여 년간 살았다.조위(1454~1503년)는 김천 출신이지만 아버지 조계문이 울진 현령으로 있을 때 8살 때 울진에 왔다가 14살 때 다시 내려와 공부했다. 매형이 점필제 김종직이라 그이 영향도 많이 받지만 무오사화 때 연루되어 순천 귀양지에서 죽는데 어릴 때 울진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문학적인 자양분을 듬뿍 받아 홍귀달(1438~1504년)은 “구름이 흐르며 무지개를 토하는 만장의 문장”이라고 평했다./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

2020-12-08

문장에 능하여 선조대 문장 8대가 이산해, 평해 유배시절 수많은 詩文 남겨

향교는 사학인 서원과 달리 관학이라 도심지 주변 5리 내에 있어야 되기에 잘 옮기지 않는데 울진과 진보, 영덕, 영해 등 동해변에 있는 향교들은 자주 옮겼다. 그것은 행정구역의 변경이 가장 큰 원인이다. 평해도 원래 군으로 독립되어 있다가 울진군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읍성도 도심지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 도심 속에 있다보니 그 기능이 사라지고 도시화로 개발되면서 없어지는 운명에 처했다. 평해 읍성도 일부만 남아 그 흔적도 희미하다.#. 동네북이 된 평해사는 사람은 변함없는데 행정의 편의따라 동네북처럼 이리저리 마음껏 휘둘린 평해는 고구려 때는 근을어(斤乙於), 신라 때는 명주, 고려 때는 동계, 조선시대는 강원도에 속했다. 울진을 우진아현(于珍也縣), 평해를 근을어라 부르다 고려 초에 평해로 불렀으며 충렬왕 때 군으로 되었다. 1914년 강원도 평해군은 울진군에 흡수되고 평해면은 기성면에 편입되고 월송면이 평해면으로 된다. 1963년 강원도 최남단 울진군은 경상북도 최북단 군으로 바뀐다. 또 평해면이 1980년 평해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오늘의 평해는 행정의 변화에 따라 쇠락한 시골의 전형적인 면 단위 같이 북적대는 사람도 없고 한산하다. 평해 중·고등학교가 산언덕에 제일 큰 건물이 되어 웅장하게 버티고 있다. 읍사무소 오른편으로 가파르게 오르면 평해 향교가 산비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평해 향교의 역사는 1484년(성종 15년) 조선시대 지은 울진향교보다 127년 빠른 1357년(공민왕 6년)에 명수학교라는 이름으로 반월산 아래에 지었다가 1407년(태종 7년)에 김한철 군수가 지금의 성릉동으로 옮겨지었다. 우리나라 향교 어디를 가나 문은 잠겨있고 1년에 한두 번 제사지내는 것 뿐이다. 간간히 예절교실이나 충효교육 하는 것 외는 방치수준이라 완벽하게 제사지내는 반쪽 형식만 남았다.조선의 제도와 법의 기틀을 만든 삼봉 정도전(1342~1398년)은 “학교는 풍화지원(風化之源)인 동시에 인재가 이곳으로부터 배출되며 나라를 다스리고 어지럽게 하는 것은 결국 인재의 성쇠에 달려있고, 인재의 성쇠는 오로지 학교의 흥폐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향교는 서울의 성균관(태학, 국학)과 함께 국가의 지방관학으로 8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고려시대부터 시작한 향교는 조선에 들어와서는 지방의 관학으로 제향과 강학을 동시에 담당했던 곳이다. 조선에서는 각 지방에 1읍1교의 원칙을 두어 전국 각지에 1교씩 향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했다.#. 고향사람과 귀양자가 본 428년 전의 평해“풍진 세상에 무, 문관으로 분주히 살아왔다.(風塵奔走武文間), 나이가 들어서야 고달픈 새로 돌아왔다.(暮境方知倦鳥環). 크게 한하는 것은 고향마을이 도회지와는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꽉 막혀서 이곳 사람들은 좋은 스승을 만날 수도 없고 아무리 똑똑해도 배경이 없으니 중앙에 나아가 출세할 수도 없는 울진(평해)사람들을 보고 매우 가슴 아프다.그러나 이곳 고향 마을이 비록 작지만, 맑고 고요한 마을로 이곳은 호중계(壺中界·신선이 머무는 곳)라 한다고 하였다. 이곳은 태백산의 한 가지로 나누어진 모태(母胎)가 되는 산이며…. 황여일(1556~1622년)이 동래부사를 끝으로 고향 평해 기성 사동으로 돌아와 해월헌을 만귀헌으로 고쳐짓고 쓴 글이다.다음은 1590년 영의정이 된 아계 이산해(1539~1609년)가 2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정을 잘못 운영해 왜적의 침입을 초래했다는 죄목으로 파직당하고 평양에서 다시 탄핵을 받아 강릉, 동해, 삼척을 거처 지금의 울진 평해로 와서 쓴 ‘기성풍토기’다.“내가 처음 유배지로 갈 때 기성 경내로 들어서니 날이 이미 캄캄하여 사동의 서경포에 임시로 묵게 됐다. 이 포구는 바다와의 수십 보가 채 안 되고 띠 풀과 왕대 사이에 민가 10여 채가 보였는데, 집들은 울타리가 없고 지붕은 겨릅과 나무껍질로 이어져 있었다. 맨땅에 한참을 앉았노라니 주인이 관솔불을 밝혀 비추고 사방 이웃에서 사람들이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그들은 남자는 쑥대머리에 때가 낀 얼굴로 삿갓도 쓰지 않고 바지도 입지 않았으며 여자는 어른 아이 없이 모두 머리를 땋아 쇠 비녀를 지르고 옷은 근근이 팔꿈치를 가렸는데, 말은 마치 새소리와 같이 괴이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비린내 때문에 코를 감싸 쥐고 구역질이 나려 했으며, 이윽고 밥을 차려왔는데 소반이며 그릇이 모두 고약한 냄새가 나서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주인 할아범과 할멈이 곁에서 수저를 대라고 권하기에 먹어보려 했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이에 내가 몹시 놀라 벽지에는 반드시 별종의 추한 인종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살고 있나 생각했다.”‘해빈단호기’에서는 그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바닷가의 단호(바닷가에 사는 미개인의 집)란 것으로 기성에만 열한 곳이 있으니 사동도 그 중 하나라 했다.연이어 ‘기성풍토기’를 일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토질이 척박해 곡식을 심기에 적합하지 않으니 분뇨를 거름으로 주지 않으면 양식을 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집집마다 거처 가까운 곳에 뒷간을 지어두는데 이는 남들이 분뇨를 훔쳐갈까 염려해서다…. 물은 맑지도 차지도 않으며 독한 기가 항상 자욱이 피어 병이 들었다 하면 거의 일어나지 못하는 탓에 온 고을에 노인이 적다…. 이 지방의 풍속이 귀신을 숭배해 집집마다 작은 사당을 짓고…. 여인으로서 다소 의식이 풍족 한자는 모두 무당이다. 성씨는 손씨와 황씨가 많고 명색이 향교에 소속됐다는 이들도 글은 모르고 모두 활을 잡는다. 인심은 순박한 듯하지만 실상은 싸움과 소송을 좋아한다…. 사람을 안장할 때는 대다수 산꼭대기에 묻고 혼인을 할 때는 굳이 먼 곳에서 배필을 구하지 않으며 예법은 소략하나 적서(嫡庶)의 구별은 분명하다…. 생산되는 어종은 은어, 복어, 광어, 방어, 대구, 문어 등인데 맛이 그다지 좋지는 않다.”#. 옛 평해의 특이한 사람들이보다 12년 전(1580년)에 45세에 강원도 관찰사로 온 송강 정철은 평해 군수의 융숭한 영접을 받으며 관동팔경 중 여기 평해에 월송정과 망양정 두 곳을 자신의 감정에 취한 신선의 입장에서 노래했다. 반면에 아계 이산해가 54세 영의정에서 3년이나 평해에 귀양살이 하면서 쓴 ‘안주부전’은 이런 내용이다. “내가 황보리에 와서 우거하게 되었을 때 마을 사람들이 다투어 인사차 왔는데 그 말석에 삿갓으로 몸을 덮었고 턱에서 땅까지의 거리가 한 자도 채 못 되는 사람이 있었다…. 아 참으로 매우 괴이한 일이다. 옛날에 한양서 보았던 그 여자도 여태껏 잊히지 않아 괴로운 터에…. 어쩌면 천지 사이에 사람으로서 형체를 갖추지 못한 자가 둘이 있는데 내가 이들을 다 본 것이 아닐까. 그런데 내가 황보리에 산지 오래되어 그 사람됨을 알고 보니, 언어와 응대가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민첩하였고 인사(人事)와 조백(早白)과 곡절들을 모두 마음속에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몸은 불구이지만 마음은 불구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씨름을 잘하여 상대와 붙었을 때는 마치 모기가 산을 흔들려는 것처럼 터무니없어 보이다가 비틀대는듯 상대의 가랑이 사이로 파고들어 허리춤을 잡고 다리를 걸면 누구도 손길 따라 넘어지지 않는 이가 없어 비록 무인이나 장사라 할지라도 그를 이기는 사람이 드물었다. 아들 넷을 두었다…. 아, 사람의 정신과 재기(才氣)가 육신에 구애받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러기에 사람으로서 불구인 자로, 미치광이,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 멍청이 등 이러한 사람들이 어찌 한량이 있으리오. 그렇지만 또 육신은 멀쩡하면서 마음이 불구인 자들이 있으니, 이 둘을 서로 비교해 본다면 과연 어떠하겠는가. 황보리에 살던 그 사람은 안(安)씨이고 이름이 응국(應國이다.”귀양은 개인적으로는 불행이지만 그 지역사람들에게는 선진학문을 배울 수 있는 행운이다.사람은 관직이 승승장구하고 거침없이 잘 나갈 때는 사물을 세밀하게 보지도 못하고 사람의 향기도 알지 못한다. 그러다가 귀양 가면 대부분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죽음인데 고통과 외로움을 잘 승화시키면 훌륭한 문학과 예술이 잉태되는 것이다. 이산해도 평해에 와서 글씨와 문장이 더욱 깊이가 있게 되었다. 1536년(중종 31년)에 아버지 이지번이 귀양 왔던 평해 곽간의 집에 자신도 귀양살이하는 운명의 인연에 아버지가 벽에 쓴 시를 보관하고 있었다. 이산해는 토함 이지함의 조카로 정치적으로는 동인에서 대북파의 영수였지만 글씨와 문학에도 뛰어났다. 그의 문집 ‘아계유고’의 시 840수 중 483수가 평해서 쓴 것이다. 허균은 “초년에는 당시를 배웠고 만년에 평해로 귀양가 있으면서 조예가 극도로 깊어졌다.”고 평했다.그러나 평해로 귀양온 그의 불행은 옷깃을 여미게 한다. 큰 아들은 20세에 이미 요절했고, 이덕형(1561~1613년)에게 시집간 둘째딸은 왜적을 피해 자결했고, 며느리도 죽고, 넷째아들도 병으로 죽었다.삼척부사 이사충의 아들 이윤은 어머님 병이 위독해지자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드리고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드려 한 달을 연명케 하였고 아버지가 병이 위독하자 열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몇 달을 더 살게 하고 3년 시묘 살이 했던 효자비가 있다.이웃에 사는 안응준이란 일곱 살 아이는 어머니가 병으로 죽어가자 손가락 잘라 피를 넣어 아침에 깨어났다고 이산해는 적고 있다.1676년(숙종 2년)에 평해 출신 승려 처경(處瓊)은 소현세자의 유복자를 사칭하다가 처형당하는데 평해 손도의 아들로 용모가 매우 수려했다고 하는데 무슨 이유일까?./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

2020-12-01

조선 최고 예언가로 통하는 남사고, 그리고 독립운동가 주진수와 만화가 이현세

울진의 옛 이름이 선사(仙69CE)인데 중국 한나라 무제 때 장건이 선사를 타고 은하수에 올라 직녀를 만나서 베틀을 괸 돌을 얻어왔다는 고사다. 이런 신비한 이름의 울진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자연환경으로 천년 석회석 자연동굴인 성류굴이 왕피천 옆에 바싹 붙어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그리고 높고 깊은 계곡의 줄기만큼이나 얽힌 인생에 희망을 던져주는 예언을 한 격암 남사고의 생가와 만화가 이현세의 벽화거리가 있다.#. 신비한 울진 성류굴과 조선의 예언가 남사고우리나라는 제주도와 태백산을 중심으로 천년동굴이 분포되어 있다. 제주도는 화산으로 인한 용암동굴이라면, 울진의 성류굴은 석회암 동굴로 이루어져 있다. 태백산맥의 석회암지대(카르스트지형)가 물에 녹으면서 생긴 것인데 단양의 고수동굴이 대표적이고 영월의 고씨동굴, 북한 영변에 동룡굴, 삼척의 환선굴, 울진은 성류굴이 같은 지형으로 형제같이 분포되어 있다.울진의 성류굴은 왕피천 물이 흘러들어 석회암 지형에 침식작용을 일으켜 만들어진 동굴로 1963년에 발견했다는데 잊혀졌다가 알려진 것이 1963년이란 것이지 신라시대부터 있었다는 명문이 있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근남면에서 왕피천을 따라 성류굴 가는 길에 플래카드가 바람에 나부끼는데 필자가 살고 있는 경주 글씨가 보여 한 번 더 보게 되었다. “축 김진영 경주시 5급(사무관)진급 노음초 36회, 제동중 3회 동기회” 삭막한 도시에서는 볼 수 없고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다니다보면 000자녀 박사. 000아들 사법시험합격. 003남 00장군진급 등등으로 서로 격려해주고 기뻐해주는 인정이 남아있다. 중소도시 학교 주위에는 00회 졸업 00합격, 00 시장, 00 국회의원 당선 등등이 심심찮게 붙어있다.왕피천 건너편에서 성류굴을 살펴보니 물가에 높다한 바위산이 우뚝 솟아 온 가을 햇살을 받고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 구경하기가 어렵다. 매표소에 두 남녀 관리인 외는 아무도 없는 성류굴에 안전모 쓰고 혼자 들어갔다. 중국의 동굴같이 배를 타고 넓은 동굴 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미로 같은 협소한 동굴을 둘러보면서 문득 임진왜란 때 이 동굴에 피난민들이 들어갔다가 왜군들이 불 지르고 입구를 막아버려 고통스런 죽음을 당한 그 찢어지는 참담함이 상상만으로도 아픈 고통이 느껴진다. 그리고 임란 때 근처 절에서 불상을 이 동굴에 모셔두었다고 성류굴(聖留窟)이라 했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울진에 신라의 봉평비가 존재하듯이 동해안 강릉(하슬라주)까지 신라의 영역이라 진흥왕(540~576년)이 성류굴에 다녀갔다고 석각해놓았다. “560년 6월 잔교를 만들고 뱃사공을 배불리 먹였다. 여자들은 교대로 보좌하며 펼쳤고, 진흥왕이 다녀가셨다. 세상에 도움 된 이(보좌) 50인이었다. (庚辰6月日 柵作8257父飽 女二交右伸 眞興王擧世益者五十人)”이 성류굴이 생성연대는 공룡이 지구상에 출현한 2억5천만년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월송정과 마찬가지로 신라 화랑 4명과 신선들이 신비한 절경에 놀았다고 선유굴로도 불린다. 삼국유사에는 신문왕 아들 보천 태자가 장천굴(掌天窟)에서 수구다라니경를 암송했는데 2천년 된 굴의 신이 불교에 감화되었다. 그 보천태자가 머물렀다고 해서 성류굴이라 했다.성류굴을 나와 왕피천 건너 산속 수곡리로 들어가면 격암 남사고 생가터와 유적지가 나온다. 여기도 유물관에 관리인 한 명 외는 아무도 없다. 남사고의 생가터로 추정하여 집을 짓고 서원과 전시관을 그 앞에는 공원을 조성해 놓았는데 생가터는 아무래도 저 산 밑이지 이 곳은 아닐 것이다.세상이 어지러우면 비기와 예언서 등이 나온다. 남사고가 살았던 조선중기는 거센 파도가 속으로 일렁일 때이다. 이 시기에 태어난 남사고(1509~1571년)는 유학자로써의 소양을 갖추고 그 밝은 지혜를 바탕으로 예언서를 쓴 것이다. 시골의 향시에는 합격했으나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하자 “자네는 남의 운명은 잘 알면서 자기운명은 알지 못하고 해마다 과거시험에 헛되이 나가는가.” 그는 웃으면서 “사심(私心)이 움직이면 술법도 어두진다네.”이처럼 예언에는 능통했지만 자신의 사익(私益)을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독립운동가 백운 주진수와 만화가 이현세의 벽화거리우리나라 마을이름을 보면 유식하게 매화마을을 매곡으로는 많이 사용하지만 울진 매화면은 아예 알기 쉽게 매화면(옛 원남면)으로 해버렸다. 매화면 소재지로 들어서면 내륙으로 들어와 있는 산골 마을이라 아늑하다. 평화로운 시기라면 정을 나누며 오순도순 정겹게 살 것인데 나라 잃으면 모든 것이 산산조각난다. 이곳 매화에는 울진교육의 요람이고 항일운동의 발상지이다. 백암 주진수(1878~1936년) 애국지사는 울진(죽변면 후정리 매정동)에서 태어나 일생을 교육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였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907년 지역유지들과 울진에 매화만흥학교를 설립하였고, 신민회 강원도 책임자로 활동하며 사동, 영해, 안동, 강릉 등에 학교 설립을 도왔다. 김구 선생과 조선총독부와 대립되는 도독부를 설치하여 활동하다 총독암살사건(일제의 조작)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의 옥고를 치루고 만주로 건너가 이시영, 이상룡 선생들과 신흥강습소를 세우고 만주 3·1만세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김좌진, 이범석 장군의 참모로 청산리대첩에서 17명의 일본군을 죽이는 공을 세운다. 1926년에는 고려혁명당 중앙위원으로 당을 이끌기도 하였다. 그토록 열망하던 조국의 독립은 보지 못하고 1936년 59세에 주창열, 주창근, 두 아들을 남기고 만주에서 생을 마쳤다.가을햇살 받은 매화면 소재지 벽에는 매화대신 예술이 꽃피어 있었다. 천천히 걸어가면서 만화를 영화 보듯이 살펴보았다. 마치 영사기 돌아가듯이 발걸음 속도대로 필름 장면이 바뀐다. 이현세 고향이라고 만들어 놓았는데 부모님 고향이고 자신은 엄마 뱃속에서만 고향이었다. 울진에서 살 방법이 없어 어머님이 포항 변두리 농촌에 이사하여 농사짓다가 한 많은 사라호 태풍 때 농경지가 휩쓸려 더이상 대안이 없어 경주에 정착한다. 미술대학을 가려했으나 색약으로 쓰라린 가슴안고 포기하고 만화가의 길로 접어들어 ‘공포의 외인구단’, ‘까치’ 등으로 천대 받던 만화가 일약 대중의 마음을 뒤흔드는 위업을 이루었다.#. 가을을 슬프게 하는 말들한 분야에서 정상에 오르면 말이 진리가 되고 철학이 된다. 벽에 그려진 만화 대사 중에 걸음을 멈추게 하는 몇 문장들이 보인다. “벽을 눕히면 길이 된다.” “네가 원하는 곳에 집중해” “아부지(아버지)요 김유신이 더 씨(쎄)지요?” 그러자 아부지는 “끝까지 살아남는 놈이 씬(센) 놈이다.” “이 노무 세상에서는 살아남는 놈이 씬(센)놈이다.” 다음 문장에서 억센 경상도 특유의 특질이 필자를 묘한 생각으로 끌어간다. “주디(입) 닥치라 마! 돈은 인자부터 천지 빼까리(엄청 많이 무한대)로 들어올끼다.”“천지 빼까리” 이 말은 경상도 사람들이 옛적에 하던 말인데 올 가을 나훈아 콘서트 때 소크라테스를 갖고 논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노래 가사를 던지면서 이 말이 회자되었다. 보통사람이 공인된 방송에서 했다면 역겹지만 어느 단계에 들어간 사람은 어떤 말을 해도 천박하게 안보이고 설득력이 있다. 맞아 가면서 터득하여 챔피언 된 권투선수 홍수환은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였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일반 사람들에 각인되는 것은 한 구절이다. 올 가을에 생을 마감한 삼성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만 남았다.이 가을에 유독 슬프게 하는 것은 코로나도 있지만, 국가를 개인 기업으로 활용한 이명박 전 대통령이 17년 감옥 가면서도 창피하고 송구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나를 가둘 수는 있어도 진실은 가둘 수 없다”고 진실을 모독 한 것이 슬프다. 그래서 MB회고록을 본 노회찬은 “786쪽 어디에도 철학과 고뇌는 없고 변명과 합리화만 넘쳐나는군요. 회고록은 이렇게 쓰면 안 된다는 소중한 교훈을 주는 책, 돼지고기 한 근 값인데 돈 주고 사서 볼 책은 아닙니다”라 했다. 정치인 아닌 고건, 안철수, 반기문 등등 다크호스로 잠시반짝이다 사라지는 것이 대선 지지율인데 현직 윤석열 검찰총장이 대선 지지율이 높다고 난리다. 자기는 부하가 아니다 해 놓고 아래 검사들은 부하로 취급한다. 대전 지검에 갈 때는 때지어 마중 나온 검은 양복 입은 검사들 보니까 보스 마중 나온 부하 같고 “등 두드려주려 왔다”고 하는 말과 행동이 꼭 조폭 두목 같고 안마 총장 같아 슬프다. 국민을 불모로 정의를 부르짖는데 자기들 식구들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선별적 고무줄 정의하는 검사들도 슬프다. 1963년 JP(김종필)는 일본 오히라 마사요시(大平五芳) 외상과 비밀회담할 때 독도를 “손톱만 한 섬, 차라리 폭파시켜 없애버립시다”에서는 섬뜩한 슬픔을 느끼지만 그래도 “자의 반 타의 반”이란 유명한 말을 남기면서 정치는 허업(虛業)이라며 “국민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 정치인의 희생정신인데 정치인이 열매를 따먹겠다고 하면 교도소 밖에 갈 때가 없다”는 바른말을 했다.50년 전(1970년)에 하루 16시간 재봉틀 미싱공들이 시급 100원 받을 때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며 한국노동운동의 불꽃을 피우고 약자를 사랑하고 분신한 22살 전태일의 외침이 아직도 이어지는 현실이 슬프다. 대선패배를 불복하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도 슬프지만, 전 재산 29만원 뿐이라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뻔뻔함도 슬프고, 4·15총선을 부정선거였다고 외치는 사람들도 슬프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강남에 건물주 되는 것이 꿈”이라는 청소년들이 슬퍼지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슬픔을 딛고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한다. /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

2020-11-24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詩 한 수 남기고 東海로 행방을 감춘 충신

울진(蔚珍)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진짜 보배가 빽빽하게 많다는 뜻이다. 사람도 이름값 하듯이 울진은 흔히 3욕으로도 불릴 정도로 보배로운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 태백산맥 큰 줄기의 우리나라 최고 질 좋은 금강송 군락지의 산림욕, 망양, 구산, 후포 등등의 해안을 끼고 있는 해수욕, 응봉산 깊은 산속에서 용솟음치는 백암온천과 덕구 온천욕이 그것이다.운암서원은 구산해수욕장 가는 길옆으로 옮겨지었고 바닷가 구산에서는 울릉도로 떠나는 수토사들이 바다가 잔잔하기를 기다리던 대풍헌이 옛 흔적을 남기고 있다.#. 두 번이나 옮긴 소박한 운암서원울진에는 옛 평해 기성지역에 서원이 집중되어 있다. 기성면 정명리에 평해 황씨 황응청과 황여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71년(현종 12년)에 지방 유림들의 뜻으로 명계서원을 세웠고, 노동서원도 기성면 황보리에 있는데 1816년(순조 16년)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을 사모하여 울진지역의 유림들이 노동서원을 세웠다. 두 서원 다 1868년(고종 5년)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었다가 명계서원은 1881년 강학소를 세웠으며 1983년에 복원하였고, 노동서원은 1913년 강학소와 영정을 봉안했다가 1921년에 중건하였다. 명계서원은 서원기능 중 반쪽인 선현봉사의 기능은 하고, 노동서원은 평해 구씨(丘氏) 재실로 사용한다. 중국 한나라 때 평해 황씨 시조되는 황락이 평해에 올 때 같이 온 구대림 장군이 평해 구씨 시조가 된다. 이 운곡 서원은 전국적인 스타서원이 아니고 울진이란 한적한 동해바닷가의 조그마한 서원에 불과하다. 건물도 초라하거니와 공간배치라도 잘 했으면 소박한 맛이라도 날 텐데 너무 공간이 협소하여 보기가 불편하다. 차라리 주차장을 옆으로 하고 마당 공간을 충분히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여기는 백암 김제, 물제 손순효 두 분을 모셨는데 김제는 평해 군수로 있을 때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나라 잃은 관리로 망국의 한을 품고 시 한 수 남기고 동해(東海)로 행방을 감춘 고려의 충신으로 기우자 이행과 마찬가지로 불사이군의 두문동 72현(杜門洞七十二賢) 중의 한 분이다.물제(勿齊) 손순효는 성종 때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인 도승지를 지냈고 성리학과 문장이 뛰어났고 대나무 그림을 잘 그렸다 한다. 도승지를 연상하니 김대중 정부 때 동서화합의 상징으로 울진출신 김중권 비서실장이 생각난다.이 운암서원은 1826년(순조 26년) 온정면 반암동에 세웠다가 1833년(순조 33년)에 온정면 노은동으로 옮겼다. 전국에 천여 개의 서원들이 온갖 민폐를 끼쳐 1868년(고종 5년)에 47개만 남기고 전국의 수많은 서원을 철폐할 때 운암서원도 철거한다. 그러나 대원군이 실각하자 전국 곳곳에 서원을 다시 세우는데 그때 이곳 구산리로 이전하여 세우면서 임진왜란 때 비안현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상주에서 순절한 백계 김희도 함께 배향했다.이 운암서원은 다른 서원과 달리 서원이 해단(海壇)이란 글씨의 건물이 있었다. 그것은 이 서원이 생기기 전인 1789년(정조 13년) 유림에서 제단을 만들어 김제 선생의 불사이군 충절을 기렸다가 서원으로 옮긴 것이다.#. 울릉도 출발지 구산마을과 대풍헌월송정에서 옛 길 따라 올라가면 길옆에 모래하천과 동해의 바닷물과 합수되어 물이 넘쳐 1603년(선조 36년)에 놓은 ‘평해 북천교비’가 세워져있고, 조금 위에는 운암서원이 초라하게 서있다. 곧이어 구산해수욕장이 나오고 해안으로 바짝 들어가면 포근하고 정겨운 구산마을이 나온다. 해안가에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의 바쁜 손놀림, 울릉도와 독도의 모형을 만들어 놓았고 옛 사람들이 타고 가던 수토선이 놓여있다. 길 건너 산언덕 아래로 가면 조선시대 울릉도에 벌목과 어로행위를 하는 일본인들을 토벌하고 육지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 들어간 죄인들을 수토하기 위해 수토사 들이 바다가 잠잠하기를 기다리는 대풍헌(待風軒)이 세월의 흔적을 안고 서있다. 대풍헌은 원래 동민들이 사용하던 동사(洞舍)였기에 대풍헌과 기성구산동사 현판이 걸려있다. 그 앞에 ‘수토문화전시관’이 주인공 대풍헌 건물보다 크고 어리하게 지어 놓았지만 코로나에 문은 닫혀있다. 뒷산을 올랐다. 확 트인 바다 아마도 수토사들이 여기에 올라 바다의 기후를 살펴보고 울릉도로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도 각오해야 되기에 희생자가 많았을 것이다. 그 추모광장이 엄숙하게 놓여있다. 언제부터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 써놓은 기록을 살펴보면 논농사도 지었고, 폭포와 산림 우거진 섬, 사람이 오를 수 없는 죽도(독도)도 묘사해 놓았다. 풍랑을 만나 4척 중 한 채는 수장된 1794년(정조 18년) 6월 3일 무오기록을 보면 숙연해지고 아찔하다. “항해 중 유시(酉時·오후 5~7시)에 갑자기 북풍이 일며 안개가 사방에 자욱하게 끼고, 우레와 함께 장대비가 쏟아져서 일시에 출발한 4척의 배가 뿔뿔이 흩어져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는데, 만호가 정신을 차려 군복을 입고 바다에 기원한 다음 많은 식량을 물에 뿌려 해신(海神)을 먹인 뒤에 격군들을 시켜 횃불을 들어 호응케 했더니, 두 척의 배는 횃불을 들어서 대답하고 한 척의 배는 불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또 1882년 (고종 19년) 6월 5일 기미 기록은 “우리나라 사람 중에 호남인이 제일 많은데 전부 조선(造船)을 하거나 미역과 전복을 따며 그 밖의 타도 사람은 모두 약재 캐는 일을 위주로 하였다고 한다. 고종이 하교하기를 “이 내용을 총리대신(總理大臣)과 시임(時任) 재상들에게 이야기 하여 주어라. 지금 보니 한시라도 등한히 내버려둘 수 없고 한 조각의 땅이라도 버릴 수 없다”하였다고 전한다.내려와 길 건너 수토선과 울릉도와 독도 모형을 한 번 더 살펴보고 아늑한 해안가 구산마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울릉도와 독도를 지킨 사람들지금이야 배로 2시간이면 갈 수 있지만 섬이 많은 남해안과 달리 동해안은 섬이 있다고는 상상하기 힘들어 예전에 울릉도는 이어도 같이 상상의 섬이었다. 그러면 언제부터 울릉도와 독도의 존재를 알았을까? 최초의 기록은 512년(지증왕 13년) 아슬라주(강릉) 군주 이사부가 우산국(울릉도)을 정벌하여 “6월에 우산국이 신라에 속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다.그리고 고려 때는 울릉도와 독도를 행정구역에 편입시키고 백성을 옮겨 살게 했다. 조선에 들어서는 백성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모든 섬을 비워두는 공도(空島)정책을 한다. 그래서 태종 때 두 번 (1403년, 1406년) 세종 때 세 번(1419년, 1425년, 1438년) 울릉도에 사는 사람들을 육지로 데리고 온다. 그중 태종 때 울릉 안무사 김인우는 거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기 위해 출항하는데 갑자기 풍랑이 거세지며 갈수록 심해졌다. 지난 밤 꿈에 해신이 나타나 동남동녀 2명을 섬에 남겨놓고 가라 했는데 개의치 않고 출항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린아이 둘을 섬에 내려놓으니 잔잔한 바다가 되어 무사히 왔다. 몇 년 뒤 궁금하여 섬에 남은 두 아이는 수색했더니 유숙했던 그곳에 둘이 껴안은 채 백골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 성하신당을 지어 매년 음력 3월 1일에 제사지내며 두 영혼을 위로해주고 있다.울릉도와 독도 하면 잊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 있다. 동래부의 노꾼 안용복(1658~?)은 왜관을 드나들며 일본어를 잘했다. 1693년 3월 울산 어부 40여 명과 울릉도에 고기 잡다 7척의 일본 어부들과 마주쳤고 조선바다라고 호통쳤으나 오히려 안용복과 박어둔을 납치해 가버렸다.7개월 억류되어 있으면서도 대담하고 논리적으로 호키 주 태수에게 강력히 항의하여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鬱陵島非日本界)”라는 문서를 받아온다. 협상에 유리하도록 안용복은 높은 조선관리관복을 입고 1696년(숙종 23년) 5월에 가서 에도의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 땅임을 확약 받고 8월에 오자 조정(노론)에서는 나라의 허락 없이 국제문제를 일으켰다고 안용복을 사형시키라고 벌떼같이 일어난다. 결국( 소론, 서인) 신여철(1634~1701년)은 “용복이 한일은 말할 수 없이 놀랍기도 하지만 나라에서도 할 수 없는 일을 그가 해내었으니 공로와 과오가 맞먹는다고 할 만합니다. 사형으로 논단할 수 없습니다” ‘구운몽’의 저자 소론 남구만(1629~1711년)도 “안용복을 죽임은 대마 도주만 기쁘게 할 뿐”이며 “사람됨이 걸출하고 영리하니 보통사람이 아니다. 마땅히 살려두어 뒷날에 쓰자”고 하여 죽음을 면하고 영동으로 귀양 간다. 그 뒤 행방은 알 수 없다. 국가가 관직을 주거나 시킨 것도 아닌데 일본을 두 번이나 가서 담판지은 뜨거운 용기와 실천력으로 우리 땅 이라는 것을 문서로 받아낸 엄청난 일을 한 대가는 귀양과 파멸이었다. 나이 40에….또 성종 때 김한경은 왕명으로 삼봉도(울릉도, 독도)를 탐사하고 보고를 하였으나 바다에 무지했던 당시 관료들에 의해 허위보고 혐의로 처형당하고 딸 김귀진도 노비로 끌려간 비극도 통탄스런 아픔이다. “이 땅이 뉘 땅인데”외치며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하여 독도 경비를 펼친 홍순칠(1929~1986년)같은 분들과 같이 국가보다 국민들이 울릉도와 독도를 지켰다. 그래서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년)은 ‘성호사설’에서 “안용복은 바로 영웅호걸이다. 미천한 일개 군졸로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누대에 걸쳐 벌어진 분쟁을 종식 시켰으며…. 뛰어난 인물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상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형을 운운하고 귀양을 보내어 꺾어버리기에 급급하였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했던 말이 아픔으로 마음을 때린다./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

2020-11-17

망양정에 올라보니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가

#. 선조들이 남긴 망양정의 그림과 글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우리나라의 해안에는 경치 좋은 절경이 많지만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푸른 물결 넘실대는 동해안이 단연 손꼽힌다. 그 중에서도 관동팔경이 유명한데 이 망양정을 관동팔경 중에 제일로 친다. 이 망양정같이 높은 곳에 세운 것은 단순히 주변경관을 높은 곳에서 바라보기만이 아니라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 그 이치를 알아 하늘과 땅의 본질을 깨닫고 인간의 이치를 깨우치고자 하는 깊은 뜻이었다.또 이런 누각이 허물어지고 퇴락하면 힘을 모아 다시세우는 이유를 여말 선초의 문신으로 이방원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했고 왕권강화의 기틀을 마련한 하륜(1347~1410년)은 “누(樓) 하나의 망가짐과 세워짐으로 한 고을의 슬픔과 기쁨을 알 수 있고, 한 고을의 슬픔과 기쁨으로 한 시대의 도(道)의 오르내림을 알 수 있다”고 정리했다.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 시절 황제나 왕들은 천하절경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그래서 화공을 보내 그려오게 하여 그림으로 간접 감상하는 것이다. 그 중 숙종은 동해와 인연이 많다. 직접 방문하여 망양정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시원했겠는가. 경복궁의 갇힌 공간에서 인현왕후와 장희빈, 그리고 후궁들 간의 피 터지는 질투의 사랑에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그리고 신하들의 물고 물리는 처절한 당파싸움에 얼마나 진절머리가 났을까. 이런 숙종이 강원도 관찰사에게 관동팔경을 그려오라 하여 보고는 이 망양정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면서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친필 편액을 내렸다. 그리고 1689년(숙종 29년) 여기에 직접 와서 시 한 수를 짓는다.‘뭇 봉우리 첩첩히 둘러있고/ 성난 파도 거친 물결 하늘에 닿아있네/ 이 바다 변해서 술이 된다면 어찌 한갓 삼백 잔만 기울이겠는가.’라고 흉금에 쌓인 감정을 바다에 풀어 놓았다. 호학의 군주 정조대왕(1776~1800년)은 여기에 오지는 않았지만 시 한 수를 짓는다.‘푸른 하늘에서 해가 바다에 비치니/ 그 누가 이 망양정을 알아보겠는가./ 눈을 크게 뜨고 보니 마치 공자의 집 같이 보이고/ 종묘와 궁궐의 담장도 뚜렷하게 보이는구나.’고려 말의 어지러운 시대에 곧은 성품으로 이재현, 이색 등과 뜻을 같이했던 정추(1333~1382년)가 이곳에 와서는 ‘망양정 위에 오래도록 서 있으니/ 늦은 봄이 가을 같아서 마음 더욱 비감해지네./…. 일만 골짜기 알천 바위가 잇달아 놓였는데/ 산을 따라 돌아가고 산을 따라 오는구나/ 큰 물결에서 구름 일어 하늘을 다 감싸고/ 바람은 놀란 물결을 보내어 언덕을 치고 돌아오네. ’비장하면서 우수 어린 감회를 쏟아낸다.생육신으로 5세 신동이라 불리었던 매월당 김시습은 ‘십리 모래밭에서 큰 바다를 바라보니/ 바다와 하늘이 드넓고 아득한데 달빛은 푸르구나./금강산은 바로 지척인데 속세와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구나./ 사람은 명아주 한 잎가에 떠 있구나.’라고 읊었다.송강 정철(1536~1593년)이 1580년(선조 13년)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로 와서 지은 유명한 ‘관동 팔경’ 가사 중 망양정을 보자. “하늘 끝을 끝내 못보고 망양정에 올라보니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가? 가뜩이나 성난 고래(파도)를 누가 놀라게 하였기에 물을 뿜거나 하면서 어지럽게 구는가?…. 저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흰 연꽃 같은 달덩이를 어느 누가 보내셨는가? 이렇게 좋은 세상을 다른 사람 모두에게 보이고 싶구나.” 신선주를 가득 부어 손에 들고 달에게 묻는 말이 “옛날의 영웅은 어디 갔으며 신라 때 넷 신선은 누구더냐? 아무나 만나보아 영웅과 사선(四仙)에 관한 옛 소식을 묻고자 하니 사선(四仙)이 있다는 동해로 갈 길이 멀기도 하구나.”라고 가슴 벅찬 낭만을 풀어내었다.위의 서인 정철 때문에 이곳 평해로 귀양 온 동인의 영수 아계 이산해(1539~1609년)는 ‘바다를 베개 삼아 위태로이 서있는 정자를 바라보니 눈앞이 탁 트이고/ 정자에 올라와 있으니 가슴속이 확 씻기는 것 같구나/ 긴 바람이 불고 저녁달이 떠오르니/ 황금궁궐이 옥 거을 속에 영롱하게 비치노라.’라고 지었다.수서 박선장(1555~1616년)의 ‘망양정’ 시는 ‘가슴을 여니 아득히 삼신산은 먼데/ 눈길 닿는 저 끝까지 만경창파 펼쳐있네/평생에 바다 보이는 뜻 이루고자 하시거든/ 그대 부디 망양정에 올라보시게나‘라고 적었다. 당주 박종(1735~1793년)은 매월당 김시습(1435~1493년)과는 무슨 인연인지 300년 시차를 두고 태어난 해와 죽은 해가 똑같다. 1767년 9월 25일 33살의 박종은 경주 구경을 떠나면서 동해안 3도 27개 군을 거쳐 1천700리를 걸어서 4개월 9일 만에 경주에 도착한다. 그 과정에 망양정 기행문을 남기는데 아마 지금같이 11월초가 될 것이다.그의 망양정 기행문은 “울진부에서 남쪽으로 40리를 가면 바닷가에 있는데 그 위에 지은 정자를 망양정이라 한다. 바다의 풍경을 보기가 청간정과 같다. 대개 바다는 천지간에 가장 호탕한 것으로서 천지도 삼킬 듯 아득히 그 끝을 알 수 없으니 정말로 천하에 더없이 좋은 경관이다. 구구한 강이나 호수의 풍경과 어찌 견주어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북방 해변에서 태어나 바다를 보는 것은 하루 세 때뿐만 아니었다. 그러나 청간정 기행에서 예전에 보았던 그 고향 풍경을 잊어버렸으니 이 또한 새 것을 좋아하고 낡은 것을 싫어하는 성정에서 나온 것이다. 눈에 익은 풍경이라 하여 그 평가에서 정당성을 잃는 것은 마음의 거울이 공평하지 못함에서 기인된 것이니 이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 정자에 숙종의 어제 시가 걸려 있다.”처음 옮겼던 이 망양정에서 한참을 서성인 아둔한 나그네는 푸르디 푸른 넒은 바다에 세상의 근심을 던져버리고 바다에 마음을 맡겼지만 시 한 수 못 짓고 내려왔다. 파도는 쉼 없이 밀려와 바위를 때리고 하얀 포말은 허공에 사라지고 울고 있는 동해바다를 가슴으로 안고 발길을 돌렸다. 인근 바닷가 철망에는 동해의 오징어들이 가지런히 매달려 해풍을 쪼이고 있었다.#. 관동 팔경의 유래와 두 번 옮겨온 지금의 망양정울진 근남면의 왕피천을 따라 바닷가로 가면 그 옛날 실직국왕이 피난 왔다는 왕피천 건너 울진 엑스포공원과 케이블카가 왕피천 물위로 쉼 없이 왔다갔다를 반복한다. 왕피천 끝나는 곳에 망양정 해수욕장은 지난 여름의 뜨거웠던 잔영만 아른거린다. 망양정해수욕장에서 250m 위로 오르면 옮겨지은 망양정이 나온다. 옛 망양정 자리보다 높이 솟은 산봉우리에 옮겨지은 망양정은 옛 망양정과 비슷한 풍광을 주지만, 바닷가에 바싹 붙어 있어 긴장감을 주면서 넓은 동해바다를 온통 끌어안는 옛 망양정의 기막힌 장소만큼은 못하다.‘바다를 바라보는 정자’라는 뜻의 망양정은 월송정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에 여기서 아래로 15km 떨어진 기성면 망양 해안가에 세웠으나 세월의 무게에 견디지 못하고 허물어진 것을 평해 군수 채신보가 1471년(성종 3년) 현종산 남쪽 기슭에 이전하였다. 1517년(중종 12년) 해풍과 비바람에 파손된 것을 1518년에 중수하였고, 1590년(선조 23년) 평해 군수 고경조가 중수했으나 허물어져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다. 1854년(철종 5년) 울진현령 신재원이 옮길 것을 제안했으나 재정을 마련하지 못하였고, 울진현령 이희호가 군승 임학영과 1858년(철종 9년) 에 근남면 산포리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여기서도 허물어진 것을 1958년 중건하였으나 퇴락하여 2005년 기존 정자를 해체하고 새로 건립한 것이 지금 있는 것이다.관동팔경은 관동(옛 강원도 동해안지역) 지방의 수많은 경승지 중 특히 손꼽히는 경승지 8개의 명승지를 지칭하는데 평해의 월송정과 망양정(지금은 울진으로 옮겼음), 삼척 죽서루, 강릉 경포대, 양양 낙산사, 간성 영랑호, 고성 삼일포, 통천 총석정이다. 이중 통천 총석정과 고성 삼일포는 1953년 휴전선으로 현재 북한지역이고 아래 월송정과 망양정은 1962년 강원도에서 경북으로 분리되어 지금의 강원도는 남북으로 2개씩 찢어졌다. 그리고 이 망양정이 인근도 아니고 이렇게 멀리 옮겨온 것은 울진에는 관동팔경이 없어 옛 평해에 2개(월송정, 망양정) 있어 하나를 갖고 갔다고도 한다. 숙종의 ‘관동제일루’ 편액도 을진 객사에 보관했다가 잃어버렸단다.정호승 시인은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언제나 찾아 갈 수 있는….” 이라고 했다. 그렇다. 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필요하다.이렇게 망망대해를 보면서 호연지기를 기르기도 하지만 저마다 바다를 대하는 관점은 다를 것이다. 필자는 탁 트인 망양정 같은 바다도 좋아하지만 이런 곳은 순간의 상쾌함은 있어도 가슴 시린 잔잔한 여운은 없다. 그래서 기암괴석에 은빛모래 소곤대는 아련한 사연이 있는 푸른 동해바닷가를 가슴에 담고 있다. /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

2020-11-10

누각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잃은 채 단군의 옛터가 쇠퇴함을 한탄하네…

관동(關東)이란 지명은 우리에게 푸른 동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연상하게 하지만 1923년 대지진으로 무고한 조선인이 살해당한 관동대지진과 일제강점기 때 만주의 악명 높은 관동군이 연상되기도 한다. 일본은 관토 지방을 관동이라 하고, 중국의 관동은 낙양 동쪽 하남성과 산동성을 일컫고 근현대에 들어서는 산해관 동쪽 만주(동북)지역을 일컫는다.성종 때 전국을 10도로 편성할 때 서울, 경기를 관내라 하고, 북쪽을 관북, 동쪽을 관동이라 했고, 좁은 의미로 대관령의 동쪽이니 오늘날 강원도의 영역이다. 울진이 옛 강원도에 속해 월송정과 망양정도 관동팔경이라 한 것이다.#. 관동팔경의 최남단 월송정관동 8경 중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정자가 울진군 월송정이다. 이 월송정도 지금 위치보다 450m 아래에 있었는데 홍수로 몇 번이나 유실되어 지금의 위치에 옮겨지었던 것이다. 울진의 남쪽 끝 기성에 접어들어 옛 국도 변에 월송정을 알리는 큰 대문이 웅장하게 서있다. 곧이어 평해 황씨 종택과 시제단이 나오고 좌우 솔밭의 호위를 받으며 헤집고 가면 끝자락에 양촌 권근(1352~1409년)의 ‘소를 타는 즐거움’의 글을 새겨놓았다. 권근은 목은 이색의 수제자로 여말선초의 학자로 유머러스 하면서 달관한 경지의 글을 필자는 익히 보아 왔든 터라 더욱 반가웠다. 그 옆에는 달밤에 소를 타고 산수를 즐기는 기우자 이행(1352~1432)의 행적과 고려에 머물던 일본 승려 석수윤(釋守允)이 그린 ‘월하기우도(月下騎牛圖)’를 새겨 놓았다. 여기를 그의 호를 따 ‘기우자의 길’로 명명했다.기우자 이행이 누구인가?이름과 자, 호가 예사롭지 않다. 이행(李行) 이름과 자 주도(周道·여러 길을 두루 다닌다)’만 보아도 평생 나그네이고 호 기우자(騎牛子)는 ‘소를 타는 사람’이니 진정한 나그네이지 않은가? 여말, 선초의 학자로 그가 단순히 소 타고 술동이 싣고 음풍농월이나 했다면 그냥 낭만적이라 별 의미가 없지만, 국가를 위하여 크나큰 일과 고위 관직에 있으면서도 직필로 자신의 명분과 가치관대로 살았기에 그 낭만이 더욱 빛나는 것이다. 즉 오늘날 제주도(탐라국)가 우리나라에 편입되는 큰 역할을 한다. 1386년(우왕 13년)에 탐라국으로 건너가 탐라국 성주 고신걸을 설득하여 그 아들을 고려로 데리고 와 그때부터 제주도는 실질적으로 고려 땅이 되었다.개경에 살던 이행이 열 살 때인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외가(평해 황씨)인 이곳에 피난 와서 살게 된 것이다. 17살에 생원시, 20살에 문과 급제할 때 시험관이던 목은 이색(1328~1396년)의 제자가 되는데 같은 나이에 이색의 최고 수제자인 권근과 절친이라 권근이 기우설(騎牛說·소를 타는 즐거움)이란 낭만이 흐르는 명문장을 남긴다.“나도 평소 아름다운 산수를 찾아다니기를 좋아하지만 그런 것은 근심 걱정이 없을 때라야 가능한 일이라서 자주 즐기지는 못한다. 평해에 사는 나의 벗 이주도(李周道)는 근심걱정이 없는 사람이다. 달 밝은 밤이면 가금씩 소 잔 등에 술동이를 싣고 산수 좋은 곳을 찾아 나선다.….사물을 볼 때 빨리 보게 되면 거칠어지고 천천히 보면 그 묘미를 다 얻을 수 있는데, 말은 빠르고 소는 느리므로 소를 타서 느리게 가고자 한 것이다.…. 세상만사를 뜬 구름 같이 여기고 맑은 저녁 바람에 휘파람을 불며 유유자적하여 고삐를 잡고 소 가는대로 내버려둔 채 마음껏 술을 따라 마시면 가슴이 유연해져서 더할 수 없는 즐거움 있는 것이다.….” 이 글도 권근이 20대에 쓴 것이니 이행도 이미 20대에 소 타고 달밤을 노니는 대 낭만의 자유인이었다. 후반기의 삶은 대사헌, 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거치지만 강직하여 자신의 소신을 지킨다. 이색의 제자 중에 두 부류가 있다. 정도전 권근 같이 이성계의 조선개국 참여파와 정몽주, 이행 같이 조선개국에 참여하지 않는 두 부류가 생긴다. 이행은 정도전이 ‘고려사’를 편찬할 때 고려 말의 사관들은 뒤가 두려워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관한 사실을 거짓을 섞어 적당히 쓰자 춘추관 학사로 있던 이행은 태조가 죄도 없는 우왕 창왕, 변안렬 등을 죽였다고 직필했고, 정몽주를 죽인 조영규를 만고역적이라고 처벌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를 이유로 태조 2년(1593년)에 조영규의 탄핵으로 이곳으로 귀양 오는 묘한 인연의 땅이다. 그 뒤 태조와 태종이 벼슬길을 종용했으나 스승 이색과 같이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아들에게는 자기와 처지가 다르니 출사(出仕)할 것을 권한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 월송정 주차장 입구에는 경기체가로 관동별곡, 죽계별곡을 지은 안축(1287~1348년·순흥 안씨 호 근재)의 유허비가 길옆에 세워져 있다. 월송정 입구에 솔밭이 나그네를 맞이하는데 예전보다 소나무가 많이 자라 조금 볼만했지만 멋있고 울창한 솔밭을 보려면 50년, 100년 후에 후세들은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월송정에 머물다 간 사람들의 흔적솔밭 사이를 걸어 아무도 없는 월송정에 올랐다. 눈앞에는 여인의 살결보다 더 고운 하얀 백사장과 푸르다 못해 시린 물빛의 푸른 동해바다가 파란하늘과 격정의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월송정은 1326년(고려 충숙왕 13년)에 존무사 박숙이 처음 지었다가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의 핵심 박원종이 강원도 관찰사 때 중건했다. 퇴락한 건물을 1933년 일제강점기에 다시 중건하였으나 말기에 미군폭격기의 목표가 된다 하여 일본해군이 헐어버린다. 해방 후 1969년 재일교포들이 철근콘크리트로 전망대식 현대건물을 지었으나 옛 모습과 같지 않다고 헐어버렸다. 지금의 월송정 건물은 1980년 7월에 지은 것이다. 현판에 최규하 전 대통령의 범생이체 글씨가 있는 것은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의 서슬퍼런 시절 잠시 임시 대통령 했기 때문이다. 월송정은 충북괴산, 경남 고성, 대구, 청송 등 전국에 많이 있지만, 이중 울진의 월송정이 단연 스타 정자다. 그것은 바닷가의 장소와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감회어린 작품이 있기 때문이다.여기 월송정은 고려시대 처음 세울 때는 달구경 하고 감회어린 시를 짓는 정자가 아니라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망루 역할로 지었다. 그러나 사람은 전쟁 중에도 사랑이 피고 독서하고 시를 짓듯이 모든 것은 한 가지 역할만 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 월송정을 노래한 이는 수도 없이 많지만, 숙종의 어제시. 안축의 시, 그리고 이행의 시 등이 걸려있다.이행은 ‘평해 월송정’시에 “동해의 밝은 달이 소나무에 걸려있네/ 소를 타고 돌아오니 흥이 더욱 깊구나./ 시 읊다가 취하여 정자에 누웠더니/ 선계의 신선들이 꿈속에서 반기네.”라 적었다. 이행이 부귀권세 물리치고 험난한 길을 걸었지만 젊을 때부터 소 타고 여유롭게 노닌 자유인이라 당시의 수명으로는 보통사람들의 두 배를 산 81살까지 살았다.숙종의 ‘월송정’시는 “화랑들 옛 자취 어디 가서 찾을 고/ 만 그루 큰 솔들, 빽빽한 숲이라네./ 눈 앞 가득 흰 모래밭 백설인 것 같고/ 누에 올라보니 한 눈에 이는 감흥 그칠 줄을 모르겠네.”라고 노래했다. 동인의 영수였고 한음 이덕형의 장인인 아계 이산해(1539~1609년)가 여기에 귀양 와서 쓴 글을 보자.“월송정은 군청소재지의 동쪽 6~7리에 있다. 그 이름에 대해 어떤 사람은 ‘신선이 솔숲을 날아서 넘는다(飛仙越松)는 뜻을 취한 것’이라하고, 어떤 사람은 ‘월(月)자를 월(越)자로 쓴 것으로 성음이 같은 데서 생긴 착오’라고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월(月)자를 버리고 월(越)자를 취한 것은 이 정자의 편액을 따른 것이다.…. 아아. 이 정자가 세워진 이래로 이곳을 왕래한 길손이 그 얼마이며, 이곳을 유람한 문사가 그 얼마랴. 그 중에는 기생을 끼고 가무를 즐기면서 술에 취했던 이들도 있고, 붓을 잡고 묵을 놀려 경물을 대하고 비장하게 시를 읊조리며 떠날 줄 몰랐던 이들도 있으며, 호산(湖山)의 즐거움을 자적하던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 같은 자는 이들 중 어디에 속하는가? …. 또한 솔을 심은 사람은 누구며, 솔을 기른 사람은 누구며, 그리고 훗날 솔에 도끼를 댈 이는 누구일까?”그렇다. 겸재 정선(1676~1759년)이 1738년 63세때 먼 친척 우암 최창억을 위해 그린 ‘관동명승첩’11폭 중 한 폭인 ‘월송정’ 그림을 보면 큰 소나무 빽빽하고, 월송정 아래에 건물도 몇 채 있다. 울창했던 솔숲은 일제강점기에 베어버렸고, 다시 소나무 심은 사람은 1956년 이 마을 사는 손치후라는 분이 사방관리소의 도움을 받아 해송 1만5천 그루를 심었던 것을 고맙게 보고 있는 것이다.신라의 화랑부터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수많은 문객들이 거쳐 갔지만 인근 영해에 귀양 왔다가 16년간 고생하다가 죽은 당주 박종(1735~1793년)의 ‘관동팔경’ 기행문 중 ‘월송정’을 보자.“망양정에서 남쪽으로 삼십 리를 가서 솔밭 사이로 나가 바다를 가면, 강가에 화려한 정가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평해의 월송정이다. 오른쪽으로는 솔숲이 산과 가지런히 울창하고 왼쪽으로는 하얀 모래가 파란 바다에 끝없이 펼쳐져 있으며, 또 앞으로는 강이 들판을 가르고 흘러 한 폭의 비단 띠를 끄는 듯한데 두어 고을의 연기마저 노을인양 떠오르니 모두 한없는 정취를 자아낸다. 영랑이 놀았다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니랴!”이외 수많은 사람들의 감회어린 글들이 있지만, 근처 영덕 출신 태백산 호랑이 평민 의병장 신돌석 장군(1878~1908년)이 1904년 27살에 여기 월송정에 올라 지은, 대찬 포부의 시 한 수를 읊는다.“누각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잃은 채/ 단군의 옛터가 쇠퇴함을 한탄하네./ 남아 스물일곱에 이룬 것이 무엇인가/ 가을바람 불어오니 감개만 솟는구나.”의 시가 저 아래 동헤의 파도치는 물결마냥 일렁인다. /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

2020-11-03

월송정과 푸른 동해바다·백사장 그리고 소나무가 아름다운 평해 황씨 종택

울진 하면 반공의 세대에게는 끔찍한 울진삼척무장공비 “공산당은 싫어요” 이승복 어린이(조선일보의 각색)가 생각나고 관동팔경의 월송정과 망양정 그리고 성류굴과 불영사 후포해수욕장 등등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강원도인지 경북인지 헷갈리는 것은 예전엔 강원도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그 지역의 이름 따라 성씨의 본관을 따르는데 울진의 평해를 본관으로 하는 평해 황씨가 있다. 그리고 해월헌 건물을 종택으로 옮겨놓았다.#. 우리나라 성씨의 유래사람은 처음에는 자기를 낳은 어머니만 확실히 알고 아버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모계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모계사회가 나타났다가 뒤에 부계사회로 전환되지만, 모계, 부계 할 것 없이 원시사회는 조상이 같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모여 살았다. 이와 같이 인류사회는 혈연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원시시대부터 씨족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하였다. 자기 조상을 숭배하고 동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씨족의 명예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각 씨족들은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기 명칭이 있었을 것이다. 그 명칭은 문자를 사용한 뒤에는 성으로 표현하였다. 동양에 있어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었으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명이나 산, 강 등의 이름으로 성을 삼았다.중국도 하(夏)은(殷)주(周)시대 이전에는 남자는 씨를, 여자는 성을 호칭하였다가 후대에 성씨가 합쳐졌던 것이며 씨는 신분의 귀천을 구별하였기 때문에 귀한 자는 씨가 있으나 천한 자는 이름만 있고 씨는 없었다.중국의 성씨제도를 수용한 우리나라는 고려 초기부터 지배층에게 성이 보급되면서 성은 부계혈통을 표시하고 명은 개인의 이름을 가리키게 되었다. 한국의 성씨는 가족 전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부계의 혈통만을 표시하며 본관과 성을 결합해 혈족의 계통을 나타낸다. 본관은 성씨가 시작된 시조의 관향 명칭이며 그 지역명인 본관을 성과 함께 써서 혈족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중시조에 따라 다양한 종파를 구분한다.그 결과 성은 그 사람의 혈연관계를 분류하는 기준이 되며 이름은 그 성과 결합하여 사회성원으로서의 개인을 남과 구별하는 구실을 한다. 이름 자체만으로는 독립된 인격행위를 할 수 없으며 어디까지나 성을 보조하는 기능을 가진다.성은 그 사람이 태어난 부계혈통으로 신분이나 호적에 변동이 생긴다 하더라도 혈통이 변하는 것이 아니므로 일생동안 아니 죽어서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 관습법이다.우리나라 성씨의 특징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그것을 수용 보급하는 과정에서 성씨체계가 특이하고 고유한 점이 많다. 우리나라 성은 가족 전체를 대표하는 공동의 호칭이 아니라 부계위주의 그 자체의 칭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이 변동되더라도 성은 변하지 않아 호주와 다른 성의 어머니 며느리가 한 가족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한 가정의 성은 같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의 성씨가 같은 부부동성주의가 원칙인 외국인들은 개가하면 또 성이 바뀌기에 우리를 이상하게 본다. 이웃 일본도 일가일씨주의(一家一氏主義)다. 세상은 넓고 다양하여 아직도 지배층만 성이 있고 이름만 있고 성이 없는 나라도 많다. 천민들도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고, 오늘처럼 누구나 본관(本貫)과 성(姓)을 갖게 된 것은 처음으로 민적법을 시행한 1903년(융희 3년) 이후 1909년부터이다. 당시 성이 없던 사람이 가졌던 사람의 1.3배나 되었다.그리하여 귀화인을 제외한 우리나라는 2003년 기준 286성이고, 중국은 6천931여개, 일본은 12만3천여 개나 된다. 인구는 김씨(21.6)가 가장 많으며 이, 박, 최, 정씨의 5대 성이 인구의 50%이상을 차지한다.#.평해 황씨 종택여행과 답사를 떠날 때 식당을 예약하는 사람은 이과 형이고 필자같이 문과형의 자유로운 영혼은 단체를 제외하고 식당을 예약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의 답사 일정은 있어도 어디로 튈지 어디에 머물지 돌출 상황 때문에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식당을 고른다. 주로 돈 주고 광고한 인터넷의 맛 집은 절대 찾지 않는다. 더구나 줄서서 번호표 받아 대기하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라 하지 않는다. 잘 모를 때는 기사식당 가면 후회는 하지 않는다. 현지 택시기사들은 매일 사먹기 때문에 입맛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오늘도 영덕 강구 못미처 순간의 감을 잡고 들어갔다. 사람 하나 없고 주인 아주머니는 김치 담는다. 갈 길이 바빠도 매일 매일 김치 담는다는 주인 아주머니의 정성에 푸른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기다리는데 사람들이 줄줄이 온다. 이상하게 필자가 식당에 들어가면 손님이 없다가도 사람들이 들어왔다. 맛있게 잘 먹고 나왔다.평해 황씨 종택 입구에 들어서니 황씨 시조 황락의 유허비가 서있고 ‘관동팔경월송정’의 큰 문이 소나무와 어울리게 서 있다. 종택 입구 담벼락 앞에는 애국지사 국오 황만영 선생 기념비가 종택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여러 황씨 중 평해 황씨를 종장으로 삼는 이유는 시조 황락이 중국 한나라 때 구대림(평해구씨 시조) 장군과 베트남(옛 교지국)에 사신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울진군 기성(지금의 평해) 월송정 근처에 표류하고 정착하여 황시 시조가 되기 때문이다.처음엔 지명 따라 기성 황씨의 시조가 되고, 기성이 평해로 바뀌면서 평해 황씨로 굳혀졌다. 평해 황씨는 우리나라 황씨의 종가로 시조 황락의 첫째아들 기성군으로 봉해진 황갑고의 후손들이다. 황갑고의 후손 중에 금오장군 태자검교 황온인을 시조로 한다. 황씨는 창원황씨 상주 황씨 우주 황씨 등등의 여러 황씨들이 있는데 조선의 명기 황진이(黃眞伊)는 우주 황씨 황 진사의 서녀(庶女)이다.입구에 들어서자 황씨 여러 문중에서 시조제단 참배기념비와 황씨 문중에 한자리한 분들의 비가 맨 앞에 선명히 서 있다. 봉사재 종택 건물은 오래되지 않았고 제단과 여러 건물과 정자 등도 새것으로 잘 가꾸어 놓았지만 주위를 감싸고 있는 소나무군락이 장쾌한 맛을 풍긴다. 역시 소나무는 언제 보아도 아름다움이 흐른다.#. 평해 황씨 해월헌 종택월송정과 푸른 동해바다와 백사장을 보고 다시 나와 평해 황씨 해월 종택으로 향했다. 황씨 종택서 옛 국도 타고 불과 100m 쯤 지나 길 아래 전병모. 전술모 형제 효자비에 갔다. 정선 전씨 전종복의 둘째, 넷째아들로 평소에도 부모님을 예를 갖추어 봉양하다가 아버지가 큰 종기로 위중해지자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고, 변의 맛으로 병세를 판단하여 약을 쓰고, 꿩고기를 구하여 원기를 회복시키고자 하였고, 아버지 병환을 자신이 대신해 달라고 하늘이 빌었단다. 병세가 위독하자 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시게 하고 부모님이 죽은 뒤에는 여막을 치고 정성을 다하여 묘를 지켰다 한다. 그래서 지역의 선비들이 건의하여 조정에서 1894년(고종31년) 형제에게 정려하였고 통정대부도정을 추증하였다. 이후 1913년 후손들이 효자비를 세웠다. 병원이 곳곳에 있는 지금 시대로는 이해기 힘들지만 그 당시는 그렇게 하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지극한 효심으로 최선을 다한 효자였다. 초라한 정려각 뒤로 소나무 몇 그루가 효자의 정성을 위로해주고 있는 듯했다.기성면 사동마을 평해 황씨 해월헌 종택에 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종택 전체를 수리 중이었다. 고택 감상하고 좋은 사진 찍기는 어려웠다. 마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끝 산자락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소나무가 산에서 감싸는 비슷한 지형이라 순간 안동의 간재 종택의 축소판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종택의 주인공 해월 황여일(1556~1622)은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임진왜란 때는 도원수 권율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운 문무를 겸비한 분이었다.어수선한 종택을 살펴보고 종택을 감싸고 있는 경사진 산언덕에서 내려다보았다. 역시 전체를 조망하는 데는 위에서 아래로 보는 부감법이 백미다. 빽빽이 둘러진 소나무의 위용은 강한 힘과 기상이 꿈틀대는 것 같다. 울진이 어떤 지역인가. 우리나라 최고의 질 좋은 금강송 군락지가 아닌가. 경사가 급한 산의 소나무는 꼿꼿이 힘 있게 종택을 호위하고 있었다. 마당에서는 포클레인이 기중기에 흙을 담아 지붕에 올려주면 와공은 받아서 흙을 깔고 기와를 이고 있었다. 아래서 흙뭉치를 둥글게 만들어 지붕에 던지면 받아서 기와 이던 장면은 단원 김홍도의 그림에서나 가능하다.필자가 1997년 수오재를 옮겨지을 때 흙을 지게에 지고 지붕에 올랐고, 지금은 한옥 짓는 모든 집에 장비로 흙을 지붕에 올린다. 이곳 종택으로 옮겨온 해월헌 고택은 해월 황여일이 33살(1588년)때 뒷산 중턱에 지어 바다를 바라보았고, 63세(1618년)에 동래부사를 마치고 낙향해서는 ‘나이 들어 왔다’는 의미의 만귀헌(晩歸軒)으로 고쳐달았다. 19세기 중엽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짓고 다시 호를 해월헌으로 환원했고 글씨는 선조 때 영의정 했던 아계 이산해(1539~1609)가 평해로 귀양 와서 쓴 글씨다.이산해는 북인의 영수로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토함 이지함의 조카인데 그가 쓴 해월헌기에는 “군자의 마음은 바로 광대하고 고명하여 길이 변치 않는 바다와 달인 것이다. 지금 그대가 이로써 헌(軒)의 이름을 삼았으니 마음을 보존하는 도리를 얻음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시속 가운데서도 변치 않는 것인가.”옛 선비들의 문장은 지금의 문장가와 격이 다르다. 집 앞에 초가집은 애국지사 황만영의 생가를 복원해 놓았다. 마을을 빠져나오다 시골집 감나무의 감이 푸른 하늘의 기운과 맑은 가을 햇살에 알몸인양 붉히고 있었다./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

2020-10-27

종은 울어야 생명인데…보존상태 점검한다고 꽁꽁 감싸놓아…

종은 허공에 매달려 있어야 할 운명으로 태어난다. 그래야 허공을 울리는 종소리를 온 산천에 알리는 것이다. 절에서의 범종은 지옥의 중생을 위하여 울리지만 속세에서는 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성덕대왕신종은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들어 봉덕사에 걸었던 것이다. 그 봉덕사는 홍수(추측)로 절은 흔적도 없고 종만 북천가(지금의 경주세무서)에 뒹굴다가 네 번이나 옮기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리고 종을 매달았던 종각도 종 따라 옮겼다가 지금은 종과 종각은 따로 떨어져 있다.#. 성덕대왕신종을 4번이나 옮긴 사연신라 33대 성덕대왕(701~735)이 죽자 아들 경덕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종을 만들다 완성하지 못하고 릴레이 하듯이 바통을 이어받은 아들 혜공왕이 완성한다. 771년(혜공왕 7년)까지 34년의 길고 긴 시간과 신라장인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완성하여 봉덕사에 걸었던 것이다. 명작들은 각고의 노력과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성덕대왕신종이 있었던 네 곳과 마지막 자리 잡은 곳을 향하여 집을 나섰다. 처음 성덕대왕신종을 달았던 봉덕사 터였다고 추측하는 지금의 경주세무서(또는 성동동 제1사지)에 갔다. 현대식 건물이라 느낌이 없었지만 옛 봉덕사를 상상해보았다. 이 정도 오랜 세월과 씨름하여 만든 종을 둘 절이라면 보통 절은 아닌 국찰이었을 것이다. 언제 어떤 연유로 절이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고 종만 뒹굴었던 것이다. 세무서 안이야 업무 때문에 간간이 왔었지만 오늘은 혹시라도 봉덕사의 흔적표지석이라도 있는지 외각을 다 둘러보았지만 없었다.이 봉덕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절 무너져 돌 자갈에 묻히게 되니./ 종 홀로 황량하게 버려졌었네./ 아이들이 두들기고 소는 뿔을 비볐다네.”의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봉덕사’시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절이 폐사된 것을 알 수 있다. 19톤의 무거운 종이 본래의 자리에서 멀리 떠내려 갈 수는 없으니 북천냇가 인근인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홍수 때문이라는 것도 가능성의 추측일뿐이다. 어떻든 지진이나 홍수 등의 천재지변으로 봉덕사는 없어지고 거대한 종만 뒹굴었던 것이다.다시 이 종을 1460년(세조 6년) 경주부윤 김담이 영묘사(지금의 흥륜사) 옆에 옮겨 걸었다. 첫 번째로 옮긴 흥륜사를 찾았으나 스님 하나 보이지 않고 고요한 가을 햇살이 적막을 깨우고 있었다. 여기서 나온 턱이 깨어진 웃을듯 말듯한 수막새는 신라의 미소로 대표된다. 잘 정리된 도심 속의 흥륜사를 뒤로하고 이곳에서 1506년(중종 원년) 경주부윤 예춘년이 읍성 남문 밖 봉황대 곁에 종각을 짓고 성덕대왕 신종을 옮겨달았던 봉황대로 갔다. 종각건물은 봉황대 우측 옆에 지어져 있는 옛 사진대로 찍어 보았다. 이제는 절에서 명복을 비는 역할이 아니라 성문개폐와 군사 징집할 때 종을 쳤다. 무덤 주인을 알 수 없는 이 봉황대 앞에는 1924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금관이 나온 금령총(126호분)은 다시 정밀발굴하고 있었고, 길 건너 붙어있는 금관총은 1921년 우리나라 최초의 금관이 나온 곳인데 몇 년 전에 정밀 발굴하였던 곳이다. 봉황대 꼭대기에는 6·25때 포진지를 구축했던 곳이고 민가집들이 즐비하여 동네 뒷동산이었고 아이들이 죽으면 봉황대에 묻었다. 그러나 이 성덕대왕신종은 여기서도 인연이 다하여 나라 잃은 일제 강점기인 1915년 (구)경주박물관(지금의 경주문화원)으로 종각과 종을 옮긴다. 북으로 1km도 안 되는 (구)경주박물관으로 향했다. 문화원 들어가서 왼편에 쓸쓸히 서있는 종각으로 갔다. 매끄럽고 고운목재라기보다 울퉁불퉁한 목재를 사용하여 힘 있고 단단한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19톤의 종을 말없이 달고 있었던 종각은 지금도 경주문화원 문 들어가자마자 왼편에 초라하게 서있다. 경주문화원 본관건물은 향토 사료관으로 사용하는데 그 앞에 어울리지 않는 하늘 높이 솟은 긴 나무가 바싹 붙어 있다. 1926년 10월 스웨덴 구스타프 6세 황태자와 태자비 루이즈가 기념식수한 것이다. 이 본관 건물 왼쪽으로도 정착하지 못하고 60년 있다가 1975년 현재의 국립경주박물관에 시멘트로 종각을 짓고 건물은 그대로 두고 종만 옮긴다. 건물 종각은 여기에 있는데 종은 떠났으니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영원한 이별이었다.#. 세계최고의 봉덕사종은 어떻게 옮겼을까?마지막 둥지를 튼 국립경주박물관으로 갔다. 코로나 때문에 손 소독하고 신분증과 전화번호 기재하고 들어갔다. 월요일 오전이라 사람은 간간히 보였고 곧바로 성덕대왕신종으로 갔다. 종을 보호한다고 꽁꽁 감싸놓아 들판에 볏단을 비닐로 감싸놓은 듯하고 정육점에 고기 매달아 놓은 것이 연상되어 안타깝다. 2022년까지 3년 동안 보존상태를 점검한다고 해괴하게 해놓았다. 다른 유물과 달리 종의 역할은 몸을 맞으면서 소리를 울리는 것이라 종은 깨어질 때까지 치다가 그때 보존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박살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박물관이 유물의 보존이 최우선이지만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종을 모독하는 것이다.세계에서 제일 큰 종인, 성덕대왕신종보다 10배나 더 큰 200톤의 러시아 크레물린 궁전의 ‘황제의 종’은 만들다 깨어져 한 번도 쳐보지 못했고, 마국의‘자유의 종’도 깨진 채로 보존되어 있다. 종교의 의례같이 매일 치는 것도 아니고 1년에 한번 치면 100년은 쳐도 100번인데 그 정도 쳐도 아마도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수명이 다 할 때까지 맑은 깨달음을 전해주고 생명을 다하는 종은 얼마나 장엄한 아름다움인가?종은 무엇으로 평가하는가. 가수가 아무리 춤을 잘 추어도 노래가 안 되면 백 댄스를 해야 하듯이 종은 명복을 빌고 시간을 알리더라도 소리가 아름다워야 된다. 즉 종소리는 부처의 음성을 삼았기 때문에 얼마나 공을 들였겠는가. 서양종은 안에서 쇠와 쇠가 부딪치기 때문에 딸랑거리는 가벼운 쇳소리라 깊은 울림이 없다. 이에 비해 우리의 종은 나무로 금속을 치기에 소리가 융화되고 화합하여 부드럽고 장중한 깊은 울림이 온다.이 성덕대왕신종이 모양과 소리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지만 세계최고의 종이다. 여러 서양학자들도 극찬했지만 그중 독일의 고고학자 켄멜 박사는 “이 종이야말로 세계 제일의 종이라 부를만하다. 만약 독일에 이 같은 종이 있다면 종 하나만 가지고도 훌륭한 박물관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했다. 필자는 2002년 10월 9일 한글날 옆에서, 2003년 개천절에는 반월성 위에서 직접 들어보았다. 첨단 기계가 못 잡아내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맥놀이 현상의 여음을 들을 수 있었다. 녹음해놓은 테이프나 CD로는 그 여음을 못 잡아낸다. 성덕대왕신종 소리 듣고 다른 종소리 들으면 깡통 치는 소리가 들려 듣기 힘들다.그래도 종에 새겨놓은 630자의 서문과 200자의 명이 명문장이다. “성덕대왕신종 명을 한림랑 김필해(또는 김필계, 김필오)는 왕명을 받들어 짓는다.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밖에 있으니 보려 해도 볼 수가 없고, 진리는 천지간에 진동하나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비유의 말을 내세워 오묘한 진리를 알게 하듯이 신종을 달아 일승 (一乘)의 원음을 깨닫게 한다. 경술년(771년) 12월 해와 달은 한층 빛나고, 음양의 기운은 고르며, 바람은 부드럽고 하늘은 고요하여 신종을 이루었다. 그 모습은 태산이 우뚝 선 것 같고, 그 소리는 우렁찬 용의 소리 같았으며, 위로는 지극히 높은 하늘과 아래로는 지옥에 이르기까지 막힘없이 울리어 보는 이는 기이함을 느끼고 듣는 이는 모두 복을 받을 것이다. 명문장이라 심금을 울리는 깊은 감동을 받아 가슴에 담아놓고 있다.종 왼쪽 하단에 세로로 깊게 파인 자국은 이 종의 가루를 끓여먹으면 남자를 낳는다거나 낙태된다고 파갔던 것이다. 종의 북쪽 아래는 주종 대박사 박대나마 기념비가 있다.성덕대왕신종은 어떻게 옮겼을까?1398년(태조 7년) 남한산성 주조소에서 종을 완성하고 한양(서울)의 보신각으로 옮길 때 1천300명의 군졸을 동원하여 10일에 걸쳐 옮겼다. 이에 비해 성덕대왕신종은 같은 시내 권에서 서로 3km를 넘지 않아 비교적 쉬웠을 것이지만, 현대적인 장비가 없던 시절에 소나 말을 이용한 그들만의 노하우는 있었을 것이다. 1975년에는 대한통운의 트레일러로 옮기면서 종과 트레일러의 총 50톤을 통과할 수 있는 다리가 없어 약간 둘러오는데 이제는 높이가 6m나 되어 당시 전깃줄이 걸려 한전 전공들이 차가 지날 때마다 전깃줄 끊고 다시 이었던 것이다. 경주시민 10만 명이 뒤따랐다는 전설적인 광경이었다.성덕대왕신종을 복제한 종은 제야의 종을 치는 서울의 보신각종, 미국 로스앤젤레스 인근에 있는 미국건국 200주년 기념 종(korean Bell of Friendship), 2016년 구 경주시청 자리에 신라대종이 있지만 소리는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이 종의 수난만큼 사라질 뻔한 큰 위기를 맡는다. 조선초기 숭유억불정책으로 전국에 종들을 녹여 무기를 만드는데 이 종도 대상이 되었지만 세종대왕의 특별조치로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이다. 한글 창제한 것만으로도 우리민족에게 위대한 업적이었는데 역시 세종은 성군이었다.종은 울어야 생명인데 지금은 생명 없는 죽은 종을 매달아놓아 안타깝다./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

2020-10-20

기러기(雁) 하늘을 날고 오리(鴨) 물위를 헤엄치는 안압지

지금은 너무나 많이 알려져 주말이면 사람으로 미어터지는 동궁과 월지(옛 안압지)는 신라 때 이름인 임해전 건물 한 채만 연못가에 쓸쓸히 서있었다. 그 임해전을 배경으로 갓 쓰고 낚시하는 인상적인 사진 한 장을 보고 이 건물이 어디 갔는지 궁금했는데 활터 호림정으로 옮겨간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 옛 안압지 여러 사진을 보았다. 밀짚모자 쓰고 낚시하는 사람, 지팡이 집고 담소하는 두 사람 뒤에 임해전 누마루에 앉은 사람, 그 앞 댓돌에 앉은 사람과 걸어오는 사람이 한 장의 사진 속에 녹아나 있었다.#. 안압지 보름달밤 기행을 회상하며필자가 경주에 오기 전부터 경주의 문화유적 핵심은 이미 보아왔지만, 25년 전에 경주에 정착하여 경주 곳곳의 문화유적을 스캔하듯이 다양한 시각에서 살펴보았다. 90년대 초부터 보름달밤 기행도 안내해 왔었는데 답사 객들은 왕릉이나 절터에서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고 하였다. 특히 인공의 불빛 하나 없던 안압지의 보름달밤 기행은 먼 먼 태고의 신비가 감돌아 신라 궁녀들의 하얀 웃음이 달빛에 젖는 듯했다. 지금의 안압지 야경이 좋다고 하지만 잠시의 시각적 유혹은 있겠지만 깊은 울림은 없다. 야간관광을 위해 지금같이 온 유적지에 불 밝혀 놓으면 깊은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아스라한 감흥은 없다. 즉 하향평준화 시킨 것이다.660년 신라가 당나라와 힘을 합쳐 백제를 평정했던 태종무열왕의 바통을 이어받은 아들 문무왕은 668년 고구려마저 평정한다, 그러나 새로운 복병 당나라가 신라마저 삼켜 버리려는 야욕에 또다시 당나라와 전쟁 중인 674년에 이 동궁과 월지(안압지)를 만든다. 당나라에도 대명월지라는 연못이 있었고 백제도 궁남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전쟁 중에 이런 연못들을 보고 힌트를 얻었을 것이다.지금 정비가 잘된 동궁과 월지의 이름은 신라 토기 파편으로 알게 되었고 조선 초기에는 기러기(雁)가 하늘을 날고 오리(鴨)가 물위를 헤엄치는 연못이라고 시인 묵객들의 시심을 자극하는 안압지(雁鴨池)라 불러왔다. 지금은 처음 불리었던 신라 때의 동궁(東宮) 또는 월지(月池)로 명칭을 바꾸었다. 1975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하면서 여기 동궁과 월지는 연못을 정비하다가 배, 주령구, 불상, 출톼근 카드역할의 목간, 등등 3만여 점이 쏟아져 나와 2년9개월 동안 6만 5천여 명의 인원으로 발굴하였다. 27동의 건물터 중에 지금은 3채만 복원해 놓았다. 그때 남아있던 임해전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지었다고 헐게 되어 1977년 황성공원 호림정 활터로 옮겼던 것이다.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유적지를 찾을 때는 휴일은 피하고 평일 날을 택한다. 그래야 유적과 온전히 침묵의 대화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같이 금요일 한글날과 겹친 황금연휴가 지난 월요일 아침은 사람 없어 더욱 좋다. 더구나 동궁과 월지는 우리 집 수오재서 차로 5분 정도의 거리라 마음이 홀가분하다. 예상대로 몇 가족 조금 보이고 서쪽 3동 건물을 지나 한 바퀴 돌 때는 사람 하나 없는 자유를 만끽했다. 서편 건물 지 주위에 좁은 돌 수로는 직각으로 꺾이면서 중간에 물을 모으는 구덩이도 있었다. 최근에 위덕대 박홍국 박물관장은 방화용 수로라고 논문에서 밝혔다. 그렇다면 건물에 불이 났을 때 방화용 수로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건물 있는 서쪽에는 완벽한 직선으로 동쪽 무산 12봉은 곡선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 중간 연못에는 섬 3개가 도교의 삼신산(봉래, 영주, 방장)이 떠있다. 옛 이름 안압지대로 하늘에 기러기는 없었지만 물에는 오리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바람은 나뭇잎과 소리 없는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선녀들이 산다는 무산 12봉 제일 꼭대기에 오르니 세찬 가을바람에 선녀가 옷자락 휘날리듯 나뭇잎이 허공을 맴돌며 떨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이른 낙엽이 떨어지면 월명스님의 ‘제망매가’ 한 구절이 떠오른다. ‘삶과 죽음의 길 여기 있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한 가지에 나고서도 가는 줄을 모르겠구나! 아아!….#. 황성공원과 호원사지, 호림정과 선정비호림(虎林), 글자 그대로 호랑이 숲이다. 지금은 황성공원으로 불리지만 예전에는 호림 숲이었다. 호랑이가 나올만한 숲인가. 지금같이 아파트나 건물들이 없었던 신라시대는 소금강산 줄기로 봉긋 솟은 숲을 이루었을 것이다. 먼저 봉긋 솟은 황성공원 산길을 올랐다. 참나무와 산죽 사이로 바위들이 제각각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야트막한 산이지만 사방에 경주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빌딩들이 시야를 가리고 서쪽은 나무가 솟아 하늘만 보인다. 말 탄 김유신 장군상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건립 문에는 “박정희 대통령각하께서 명각 휘호를 내리시어…. 1977년에 경상북도에서 세웠다”고 새겨놓았다. 그런데 말의 자세를 보니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다 멈추는 자세여서 칼 빼어든 김유신이 멋쩍어 보인다.다시 내려와 남쪽으로 숭고한 호랑이 처녀의 넋을 기리는 호원사를 찾았다. 예전에는 가정집 장독이 석탑 위에 있었던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지금은 집은 철거했지만 아직 정비 안 되어 철망만 둘러져있고 잡풀들이 마음껏 자라나 있었다. 여기가 어떤 곳인가. 신라에는 음력 2월8일부터 보름까지 탑돌이 하는 풍습이 있었다. 38대 원성왕 때 화랑 김현이 탑돌이하다 마지막 남은 처녀와 눈이 맞아 이슥한데 가서 달빛 같은 정을 통하고, 처녀는 호랑이임을 고백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오빠 호랑이를 대신하여 죽는다. 한번 정을 통한 사랑의 연으로 호랑이 처녀의 죽음 덕분에 출세한 김현이 호랑이 처녀를 위하여 호원사를 세워주고 명복을 빌었던 곳이다.1977년 안압지에 있던 임해전을 옮겨온 호림정으로 갔다. 5칸 겹집의 건물 한 칸은 한단 내려 2층 누각으로 하고 좌우 한 칸에 방을 넣었다. 옆에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 존재감이 반감되었다. 건물 난간 옆에는 경주부윤과 벼슬했던 사람들의 비석들이 줄지어 두 줄로 모아놓았다. 비석 앞줄은 14개였고 뒤에는 15개였다. 내 키 177cm보다 큰 비석이 네 개나 되었다. 철비 한 개가 눈길을 끌고 머리 잘린 조그마한 비석에 눈이 간다. 관리로 재임 중에 선정을 베풀었다고 고마움을 영원히 잊지 말자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인데 진짜 선정을 베푼 관리는 이런 비석 세우지 않는다. 이 단단한 돌을 깨트릴 정도면 얼마나 악행을 저질렀을까. 비석을 살펴보니 잊을 망(忘)자도 푹 파버렸다. 함부로 공덕비 세우는 것 아니다. 하늘은 몰라도 산천초목만 알아주어도 족하지 않은가.#. 활의 역사와 경주 호림정일본이 칼을 휘두르는 무사의 민족이라면 우리나라는 옛부터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 동이(東夷)라 불렀다. 특히 단단한 물소 뿔과 참나무, 단단하면서 유연한 대나무와 산뽕나무, 자작나무로 만든 각궁은 사정거리가 145m로 35m인 일본, 120m인 유럽에 비해서 세계최고 수준이다.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활을 쏘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구려 고분 무용총의 수렵도는 힘차게 달리는 말위에서 뒤돌아보면서 쏘는 파르티안 궁법을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단원 김홍도의 활 쏘는 코치의 그림도 등장하듯이 우리 민족은 활쏘기가 일상화되었다.조선의 활쏘기는 문과 무과 모두 과거시험의 필수과목이었고 선비들은 활쏘기가 육예의 하나로 교양으로 삼았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시험 자체가 없어져 국궁도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활쏘기 금지령을 내렸다.활 잘 쏘는 사람을 신궁 명궁 강궁이라 하는데 고구려의 주몽은 한 여인이 물동이 이고 가는데 어떤 사람이 활을 쏘아 구멍이나 물이 쏟아지자 주몽이 활을 쏘아 구멍을 막아버리는 일화가 있다. 고려 말(1380년 9월) 이성계는 남원 운봉 황산에서 20살 전설의 왜장 아지발도(阿只拔)의 투구꼭지를 쏘아 투구를 떨어트리고 이지란이 얼굴을 쏘아 죽인다.활로 인생 역전하는 경남 함안의 설화도 있다. 기골은 장대한 천하장사였지만 천애 고아로 아무리 일해도 별 희망이 없어 한양으로 떠나 세상물정을 알아본다. 가식으로 척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활 통을 매고 활량으로 가장하여 전국을 돌다 경주에 이르니 활 잘 쏘는 사람을 찾는 방이 붙어 있었다. 경주 큰 부잣집에서 밤마다 귀신 새가 나타나 귀신 새를 잡을 사람을 찾은 것이다. 총각은 죽을 각오를 하고 호언장담 한다. 나무 위에 숨었다가 새를 걸터타고 뛰어내려 죽였다. 그리고는 새의 목에 화살을 꽂았다. 그리하여 부잣집 딸과 결혼하여 꿈같은 세월을 보내는데 장인은 사위의 활솜씨를 자랑하고파 상품을 내걸고 활쏘기 대회를 한다. 안절부절 하던 사위의 차례가 되었다. 활시위를 당긴 채 허공만 바라보는데 보다 못한 아내가 재촉하며 시위 잡은 손을 비틀었다. 때마침 하늘을 나르던 기러기 한 쌍 중 한 마리가 화살에 맞아 떨어졌다.경주에는 해방 전부터 신라정이라는 활터가 있었다. 서천, 북천가 에서 활을 쏘았다. 1957년에 지금의 서편에 정자도 없이 호림정 현판을 걸고 활을 쏘았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는 반월성에서 과녁만 두고 쏘았다. 1977년 지금의 자리에 안압지의 임해전 건물을 옮기고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필자도 이곳에서 잠시 활을 배운 인연이 있다. 호림정 출신으로 최고인 9단은 없고 8단은 다정 김헌우 한 분 있고, 전국에 여 궁사는 5단이 18명인데 경북 최초의 5단은 배운지 7년 되는 김현지 사범이다./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

2020-10-13

진보의 변천 만큼 사연 많고 몇 번이나 옮기는 우여곡절 겪은 향교

청송 진보는 우여곡절이 많은 묘한 곳이다. 진보현, 진보군으로 독자적인 행정체제를 지속하다가 마지막에 청송군으로 편입되어 지금은 한적한 면 소재지로 남아있는 곳이다. 한때의 영화는 추억과 잔영이 남듯이 진보 곳곳의 문화유적이 그 옛날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우선 행정단위에 있는 국립 관학인 향교가 있다. 그 향교는 진보의 변천만큼이나 사연도 많아 몇 번이나 옮기는 우여곡절을 겪는다.백호서당도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어 1989년에 임하댐 상류 반변천 산기슭 위에 옮겨지었다.#. 진보는 어떤 곳인가청송 진보는 사면이 산으로 쌓여있는 분지형이라 강원도 양구의 펀치볼의 축소판 같다. 아무리 번성했던 고을도 행정단위가 축소되어 관청이 옮겨가면 잔영만 남는다. 진보현으로 영화를 누렸지만 청송으로 편입되어 면으로 쪼그라졌다. 강물이 흐르면 그 주위는 퇴적물이 쌓여 비옥한 옥토가 되고 인근에 산이 있으면 땔감으로 밥을 짓고 난방을 하였던 것이다. 이런 조건이 갖추어진 곳이라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다. 통일신라 신문왕 때 전국을 9주5소경을 설치할 때 청송지역은 상주와 명주(강릉)에 분할 예속되어 있었고 757년(경덕왕 16년) 전국 주현의 대대적인 명칭변경 때 칠파하현은 진보현으로 되고 이때 진보현은 문소군으로 편제된다. 신라 말에 강성해진 지방호족의 연합체인 고려시대에 청송지역의 대표적인 호족은 선필과 홍술이다. 진보현의 촌주 홍술은 922년(태조 5년) 고려에 귀부했고, 왕건은 그를 문소군으로 파견해 의성부성 주장군으로 삼고 후백제를 방어하게 한다. 고려시대 지역 토성의 대표적 인물이 청송 심씨 심홍부와 진성(진보)이씨 이자수 등이 있다.조선시대는 청송군과 진보현 두 고을로 존속하다가 1418년(세종 즉위년) 진보현 속현 청부현은 소헌 왕후 심씨의 본향이라고 청부현과 진보현 두 고을 명칭 한자씩 따서 청보군으로 승격한다. 그러나 진보현 백성들이 관아가 멀어 불편한 점이 많다는 청원으로 송생현과 합쳐 청송군이 되고 1459년(세조 5년)에는 세조의 어머니 소헌 왕후 심씨를 기리기 위해 청송을 도호부로 승격하고 1423년(세종 5년) 현으로 독립한 진보현은 1474년(성종 5년) 고을 사람이 현감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폐현되어 청송도호부에 편입된다. 1478년(성종 9년)에 복구되어 이어오다 1895년(고종 32년) 2차 갑오개혁 때 효율적인 지방통치를 위해 23부제(府制) 실시할 때 진보현이 진보군으로 개편된다. 1914년(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전국 부, 군의 통폐합에 따라 진보군은 갈기갈기 찢겨 청송군에 편입되어 완전 소멸된다. 남면은 청송군 파천면 일부로 편입, 북면은 영양군의 남면, 영양면, 입압면의 일부로 편입, 동면은 영양군 석보면, 동면의 낙평리는 영덕군 지품면으로 흡수된다. 오늘날 진보는 상리면, 하리면, 서면을 보듬고 청송군 진보면으로 겨우 이름만 남았다.#. 청송서 진보 가는 길청송서 국도31번 타고 진보로 가는 길은 왼편에 맑게 흐르는 용전천을 끼고 가다 산길로 접어들면 길가에 왕평 이응호(1908~1940)의 ‘황성옛터’의 노래비가 소나무 숲에 서있다. 황성옛터는 한국인 최초의 작사, 작곡 가요이고 왕평은 1930년대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중심인물이었는데 공연장에서 연기하다 쓰러져 33살에 죽었다. 영천이 고향인데 아버지가 사는 이곳 파천면 송강리 수정사 입구 산기슭에 묻혔다.진보 중심부 들어가는 완만한 능선에 진보 출신 소설가 김주영의 ‘객주문학관’이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격상으로 8월 25일부터 별도 해제시까지 휴관한다는 플래카드가 선명하게 붙어있다. 그 옆에는 ‘객주’의 소설가 김주영 제22회 만해 문예대상 수상을 축하하는 플래카드만 바람에 휘날린다.협소한 청송읍 보다 넓은 평지의 진보는 소도시 같은 분위기다. 왕건 영정을 모시는 사당에 갔다. 주위의 큰 고목들이 진보의 녹슬지 않은 역사를 말해준다. 들어가는 출입문에는 사람 없고 왕거미 줄이 얼굴에 달갑지 않은 촉감으로 맞이한다. 건물 안에는 영정도 위패도 없었다. 왕건의 겉옷에 두르는 붉은 띠가 바람에 날려 이곳에 떨어진 것이 신령스럽다고 지었단다. 옆에는 인조 잔디 깔린 체육시설에 아래를 볼 수 있는 전망대 데크를 해놓았다. 아래는 영양에서 흘러온 반변천이 안동 임하댐으로 향하고 강 건너 광덕산 아래 진보향교와 광덕마을이 보이고 오른쪽 저 멀리는 검은 마음의 범죄자를 수감하는 이름도 유명한 청송교도소가 아스라하게 보인다. 녹색우 거진 산천에 교도소의 하얀 건물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저 속에 갇혀있는 분들이 저 하얀 건물같이 하얀 마음 되길 바란다. 강가에 움푹 파인 물가에 혼자서 낚싯대 드리운 사람은 무엇을 생각할까?반변천을 가로지르는 긴 광덕교 건너자마자 왼편에 길게 이어진 뚝 길은 소도시 시골전원의 오솔길 마냥 낭만이 흐른다. 강변의 초가을 상큼한 바람을 맞으며 걷는 것도 괜찮고 벚꽃 피는 봄이나 익어가는 가을날은 더욱 낭만일 것이다.우측마을 길 따라 구불구불 들어가면 길 왼편에 송만정(松巒亭)고택이 길손을 반긴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의병장과 창녕 화왕산 전투에서 뚜렷한 공을 세웠던 송만 권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863년 후손들이 세운 정자이다. 북부지방의 양식대로 건물이 온통 감쌌지만, 대청마루 2칸에 좌우에 방을 넣고 그 앞에 누를 한 칸씩 지은 대단한 낭만과 매력이 넘친다.#. 진보향교와 백호서당 그리고 급발진 차진보향교는 송만정에서 조금 더 오르면 마을 끝 산기슭에 있다. 시내 중심부에 있어야 할 향교가 외진 곳에 있으니 서원같이 느껴졌다. 대문에 진보향교 글씨의 먹물이 빛바랜 만큼이나 향교도 기능 잃고 있다. 진보향교는 1440년(태종 4년)에 창건했다고 여러 기록이 나오는데 1440년은 세종 23년이라 어느 하나가 오기다. 1694년(숙종 19년) 광덕산 기슭으로 1882년(고종 18년) 구읍으로 1886년(고종 23년) 현재의 위치로 세 번이나 옮겼던 것이다. 외삼문, 강학공간의 중심대는 명륜당과 동, 서재가 있고, 내삼문과 대성전이 남아있다. 대성전에는 제향의 공간이니 공자를 위시한 중국의 성현들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명륜당 앞 좌우에 동서재가 있는데 진보향교는 명륜당 뒤에 있어 특이하다. 명륜당에는 “충(忠)과 의(義)의 뜻을 새기다” 플래카드가 빛바랜 향교를 지키고 있었다. 사람하나 없는 향교에 온갖 풀벌레 우짖는 소리와 가느다란 바람 소리 뿐이다. 발아래 땅에는 수많은 개미가 소리 없이 열심히 가고 있었다.향교를 둘러보고 향교 앞에 있는 잘 손질해놓은 대문 없는 고택으로 들어갔다. 주인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덕광임업’회사를 경영하는 젊은 주인 권상희 대표였다. 집안의 고택을 구입했고 수리하여 고택체험 숙박으로 할 계획이란다. 고택은 이런 젊은이들이 많이 살아야 활기차고 생동감이 있다.다시 광덕마을로 나와 북쪽마을 오른쪽 기슭에 귀암 권덕조의 뜻을 기리는 정자에 갔다. 숙부인 충재 권벌에게 배웠고 아들이 송만 권준이다. 방치되어 퇴락할 때로 퇴락한 모습이다. 건물은 찌그러지고 풀들이 무성한데 후손들이 세운 송덕비는 선명했다.내려와 산 고개 넘자 세장마을이 나온다. 마을입구에서 좌회전하여 조그만 다리를 건너 산길로 접어들었다. 이정표에는 1.5km라고 새겨져 있다. 산 중턱 시멘트 길에 몇 개의 다리를 건너자 강(반변천) 언덕 위에 옮겨온 백호서당이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강 아래를 보니 염소들과 거위들이 바위를 놀이터 삼아 한가롭게 놀고 있었다.서당 문은 열려 있고 풀은 무성하고 사람 하나 없는 서당에 올랐다. 힘 있고 품격 있게 잘 지었는데 원장도 유생도 없어진 빈 공간에 산새들만 구슬피 울고 세찬 강물은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강 건너 저 멀리는 진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백호서당은 숙종 때 유학자 존재 이휘일(1619~1672)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당시 청송 현감 조명협의 발의로 영남유림과 진보향중에서 1757년(영조 33년)에 건립한 것이다. 임하댐 수몰로 1989년 상류인 이곳에 옮겨온 것이다. 존재 이휘일의 어머니는 최초의 한글 음식요리서 ‘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이고, 아버지는 석계 이시명, 동생은 퇴계 학통을 적통으로 이어받은 갈암 이현일이다. 흐르는 강물과 백호서당을 뒤로하고 진보 시내 전통시장에서 소설 속의 ‘객주’를 생각하며 보부상들도 먹었을 소머리국밥을 맛있게 먹었다.청송, 진보를 답사하고 와서 일요일 오후에 핸드폰과 지갑을 잃어 버렸다. 지갑보다 전화번호와 사진자료 많이 있는 핸드폰이 문제였다. 핸드폰에 찍어왔던 신문연재 사진이 없어 난감했고, 더구나 월요일은 신문연재 마감 날이라 사진만 찍으러 청송으로 다시 갔다. 백호서당 사진 찍고 시동 걸고 출발하는데 차가 손살 같이 달린다. 브레이크를 꽉 눌렀는데 힘없이 쑥 들어가고 어디를 박고 멈춰야 했다. 오른쪽은 까마득한 낭떠러지고 중간에 시멘트창고 건물 앞에는 목재 파레트가 쌓여있어 거기에 박았다. 차는 멈췄지만 심하게 찌그러졌다. 아직 신문에 보낼 사진을 찍으러 청송까지 가야했다. 마침 주인이 와서 상황을 보고 몇 번이나 천만다행이라고 하시면서 어머님과 밭일 하다가 평소 같으면 이 시간(오후 4시정도)에 오지 않는데 오늘은 어머님이 ‘야야 집에 가봐라” 하시어 왔단다. 외딴집 주인 권오찬님은 법 없이도 살 착한 분이고 고마울 따름이다. 자차보험 있어도 부담금 50만원과 차 수리 이틀 렌트비 20만원 주었다. 급발진은 현대차하고 하란다./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10-06

웅장하면서 위압감 주지 않는 유장한 아름다움 흐르는 운봉관

청송, 청주, 청도는 이름만으로도 맑아 보이듯이 마을이나 도시의 지명을 보면 대략을 짐작할 수 있다. 청송하면 무언가 푸르고 맑아 보이는 이미지에다 주왕산, 달기약수, 주산지, 청송 심씨 등등이 연상된다. 청송 곳곳에 ‘산소카페’란 슬로건에 청송사과를 브랜드화 하고 있다. 관학인 향교는 고을의 중심에 있기에 반경 5리(2km)를 벗어날 수 없다. 청송향교는 1693년(숙종 19년) 부사 이문징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었다. 그리고 세종의 왕비 소헌 왕비가 청송 심씨여서 청송은 극진한 대우를 받는다.#. 육지속의 섬 청송청송은 동으로 영덕, 서로는 의성, 남으로는 영천. 북으로는 영양, 북서로는 안동으로 둘러싸인 육지속의 섬같이 고립되어 있는 듯하지만 주왕산의 독특한 산세와 맑은 기운 가득한 곳이다. 청송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 신선이 사는 세계’란 뜻인데 풍속은 검소하고 인간의 도리를 잘 지키며(尙儉率), 사람은 순박하고 습속은 순후하다(民淳俗厚)고 하였다.아침저녁으로 처량하게 울어대는 풀벌레소리는 가을을 재촉하고, 청송의 산과 들은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청송향교에 도착하니 제일 먼저 청아루가 엷은 미소로 맞이하고 자신은 비스듬히 기울고 있는 가을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보통의 향교는 대문 겸 루가 있고 좌우에 동무, 서무에 중앙에 명륜당이 중심을 잡고 일직선으로 공자와 성현들의 위폐를 모신 대성전이 있는데 청송향교는 경사진 뒷산에 공간이 협소하여 옆에다가 지어놓았다. 그리고 대성전은 수리중이라 청아루부터 올랐다. 어느 읍면 도시할 것 없이 하늘로 치솟는 건물 때문에 시야가 막힌다. 2층 누각인 청아루에서 앞을 보니 오른쪽에 교회 철탑 두개가 시대가 바뀌었음을 알린다. 기숙사인 동무, 서무, 명륜당 어디에도 유생들과 교관은 없고 푸른 풀들만 속삭이듯 바람결에 공자 가라사대(子曰), 공자 가라사대(子曰) 재잘거린다. 기둥 위에서 종으로 지붕을 받치고 있는 굵다란 들보들은 푸른 녹색 용들이 꿈틀거리는 듯하고, 건물의 이력을 말해주는 청아루 중수기가 여기저기 붙어있다.조선시대 지방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목적으로 성현의 위폐를 봉안, 배향하는 향교는 중심 되는 관청 인근에 있다. 청송향교는 1426년(세조 8년)에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1606년(선조 39년)에 국동에 대성전을 건립했고, 1629년(인조 7년)에 부사 이구징이 강당과 동무, 서무 등을 보수, 중수했다. 그러다가 1693년(숙종 19년) 부사 이문징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청아루는 1700년(숙종 26년) 부사 이상훈이 증축하고, 1869(고종 6년) 부사 이현기가 대대적인 개,보수를 하였고 1962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대성전은 1975년 보수하여 지금 또 보수 공사하고 있었다.명륜당이 향교건축의 중심이다. 이를 기준으로 모든 건축이 들어서기 때문이다. 기능 잃은 향교는 각종 예절교육, 충효 교육 등등을 부정기적으로 프로그램 하는데 청송향교는 ‘산소카페 청송에서 즐기는 풍류체험’의 플래카드가 텅빈 명륜당에 붙어 있었다. 오른쪽 위에는 지금의 청송군청이 온 청송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푸른 청송의 이미지답게 푸른 유리창문으로 해놓았다.#. 청송 심씨 소헌 왕비의 본향, 찬경루와 운봉관우리나라에서 왕비의 본향이라고 이런 귀한 대접을 해준 곳은 아마도 청송뿐일 것이다. 더구나 직접 태어난 고향도 아니고 단지 청송 심씨라는 본만 같을 뿐인데 이런 어머 어마한 대우를 받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향교에서 내려와 청도의 중심부에 소헌 왕비의 이름을 딴 소헌 공원에 갔다. 예전에 처음 왔을 때 깜짝 놀랐다. 시골에 이런 큰 고택이 있다니 마치 종묘같이 길게 늘어선 건물은 무슨 사연이 있기에 더구나 경주, 안동도 아닌 청송 산골에….소현왕비(1395~1446)는 조선 27명의 왕들 중에 가장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1397~1450)의 왕비인데 인품이 훌륭하다고 칭송을 받는 만큼 개인의 고통은 심했다. 소헌왕비의 아버지 심온(1375?~1418)과 할아버지 심덕부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건국에 참여한 개국공신으로 세종대왕 때 영의정을 하고 있었다. 심온은 세종의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동생 심청은 처형당했고 자신은 의주에서 압송되어 수원고향에서 자결해야 했다. 태종 이방원(1367~1422)이 누구인가. 조선건국과 왕권이란 목적에 조금도 방해가 되면 형제들도 죽여 버리고 26살 때 56살 포은 정몽주(1337~1392)를 죽이고 조선의 틀을 만든 삼봉 정도전(1342~1398)도 죽여 버린다. 그리고 자신의 처남 민무규 형제 4명마저도 처형시키지 않던가. 18년 왕 하다 어질고 총명한 셋째아들 충녕(세종)을 왕으로 앉히고 자신은 상왕으로 있으면서 병권은 쥐고 있었다.소헌왕후(1395~1446)가 14살에 12살의 충녕군과 결혼할 때는 3째 아들 세종이 왕이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나 왕비가 되자마자 삼촌과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리고 어머니는 종이 된다. 심온을 제거한 신하들이 태종이 죽고 나면 왕비의 복수를 두려워하여 폐출을 주장했지만 왕비 심씨가 자손을 많이 나았으며 세종과 금슬도 좋다는 이유로 태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태종 자신도 처남 4명을 죽였지만 자신의 아내인 원경왕후 민씨는 왕비로 남겨두었다.그리고 시아버지 태종(이방원}이 죽고 4년 뒤(세종 8년)에야 아버지 심온의 명예가 회복되고 어머니도 신분이 회복된다.태종은 외척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 후궁제도를 법으로 정한다. 그래서 세종은 왕비 신씨에서 조선의 왕비와 후궁 전체에서 제일 많은 8남 2녀를 낳았고, 7명의 후궁에서 10남 2녀를 두었다. 태종이 법제화한 후궁제도는 양반가문에서 간택하게 했으나 세 번째 후궁부터는 출신을 따지지 않게 했다. 왕의 선택권을 넓혀주고 궁녀들도 간택될 수 있는 최소한의 희망을 주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 그래서 무수리 출신 영조의 어머니 최씨도 후궁이 될 수 있었다.친정이 쑥밭이 되고, 성군이었던 세종도 호색이라 7명의 후궁이 들어왔으나 속으로 곪아터지고 분노를 삼켰을지 모르지만 겉으로 질투는 하지 않았단다. 그래서 세종대의 왕비와 후궁들은 겉으로는 분란이 없었다.#. 친정의 몰락과 맞바꾼 현모양처맨 앞에 2층 찬경루 건물에 갔다. 찬경루는 소현 왕후를 배출한 경사를 찬양한다고 1428년(세종 11)에 청송군수 하담이 건립하였고 화재로 불타자 1688년(숙종 14)에 다시 지은 것이다. 누의 이름은 하담의 청을 받은 당시 경상관찰사 홍여방이 찬경루 기문에 “지금까지 왕후와 왕족이 끊이지 않은 복을 누리고 있으니 이 누각에서 보광산에 있는 소헌 왕후의 시조 묘를 바라보면 우러러 찬미하게 되어 찬경(讚慶)이라 이름 지었다.”는 아부성 이름이다. 정면4칸 측면4칸 이층이니 16칸이 된다. 소헌왕후의 8왕자들이 각 2칸씩 지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지어낸 말이다. 막내 영응대군(1434~1467)은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바위 위에 잘 살려 지은 누이고 지방유생들의 백일장 장소로 사용했다. 송백강릉(松栢岡陵) 현판 글씨는 소헌왕후의 셋째아들로 시, 서, 화에 뛰어나 3절이라는 평을 받은 안평대군(1418~1453)의 글씨인데 이 건물 지을 때는 11살이라 그 뒤에 쓴 것이다. 이 건물에서 바라보이는 보광산에 청송 심씨 시조 심흥보의 묘가 있고 저 앞의 용전천 냇물이 불어나 건너지 못하면 여기에서 묘사를 지냈다고 한다.오른쪽 옆에는 청송 심씨 유허비가 서있다. 그 뒤에 운봉관으로 갔다. 이 건물도 찬경루 지을 때 같이 지은 공공 숙박기능인 객사건물인데 굉장히 길고 멋있게 지었다. 서산에 비스듬히 길게 비친 건물 기둥의 그림자가 건물의 당당한 위용을 자랑한다. 웅장하면서 위압감을 주지 않는 유장한 아름다움이 흐른다. 한참을 맴돌다 사람 없는 넓은 청마루에 누워버렸다. 때마침 상큼한 바람이 불어와 하루의 피로를 날려버린다.잠시 생각에 잠긴다. 아마도 소헌왕후는 짧은 행복 긴긴 고통이었을 것이다. 친정이 박살 나도 어찌할 수 없는 참담함, 아들 8명이나 낳았지만 다섯째 광평대군은 20살에, 일곱째 평원대군은 19살에 천연두에 걸려 죽는 아픔도 겪는다. 며느리 복도 없어 두 번이나 세자빈을 내쫓고 세 번째 세자빈은 아들(단종) 낳았지만 다음날 산후병으로 죽었다. 4남 임영대군과 막내인 8남 영응대군의 부인도 병 때문에 쫓아내었다. 특히 첫 번째 큰며느리 휘빈 김씨는 학문은 좋아했지만 여색은 별 즐기지 않는 남편(문종)의 사랑을 되돌린다고 좋아하는 여자 신발 뒷 굽을 잘라다 불에 태워 술에 타마시게 하거나 봄에 교접하는 뱀과 붉은 박쥐를 가루 내어 세자(문종) 몰래 먹였다. 이런 회괴한 일들을 시어머니 소헌왕후가 알게 되어 국모의 자질이 없다고 쫒아냈다. 두 번째 며느리 봉씨는 독수공방하다가 동성애(레즈비언) 하여 쫓겨났다. 소헌왕후는 온갖 영욕을 가슴에 담고 52살에 쓸쓸히 죽었다.청송은 1418년(세종 원년)에 소헌왕후 심씨의 본향이라고 보배로운 청보군(靑寶郡)으로 승격하고 송생현과 합하여 청송군으로 개칭하였다. 1459년(세조 5년) 안덕현을 병합하여 청송도호부로 승격시켜준다. 이곳 소헌 공원에서 청송→영양→봉화→영월로 걷는 240km 구간의 첫 출발지다. 입구에 청송고을을 다스린 수장들의 송덕비가 있는데 군수 장승원이 이 있었다. 치적이 교량신축인데 관찰사 시켜달라고 20만 냥(당시 관찰사 뇌물 값이 20만 냥) 들고 허위 의병대장에게 찾아간 칠곡 부호였다. 물론 받지 않았다. 허위는….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9-22

힘과 멋, 그리고 단정한 아름다움이 흐르는 송소고택 사랑채

지금의 부자들은 주식, 건물, 예금 등등이지만, 예전의 부자들은 쌀 몇 석을 하느냐에 따라 등급이 매겨졌다. 꼭 만석이 아니라도 쌀이 현금보다 더 위력적일 때 큰 부자를 칭할 때 만석꾼이라 했다. 그 아래는 팔 천석, 오천 석은 없고 천석꾼으로 칭한다.쌀은 넓은 바다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나기에 어마어마한 넓은 땅이 있어야 가능하다. 전라도 김제평야 같은 넓은 땅이 없는 경상도 그것도 산이 많은 북부 청송지방에서 만석꾼이 가능할까? 경주 안강 평야의 토지를 소유했기에 가능했다. 청송에 덕천 민속마을과 지경리(호박골)에서 옮겨온 만석꾼 송소 고택을 나그네 심정으로 둘러보자.#. 만석꾼은 어떻게 만석꾼이 되었는가부자는 누구나 꿈을 꾸지만 이루기는 더 어렵다. 또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키기는 더 어렵다. 봉건사회에서는 왕이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가질 때 개국을 도왔거나 반정 같은 쿠데타가 성공하면 도운 사람에게 공신전을 준다. 그리고 조선 중기까지 남자들이 장가들면 주로 처가살이 하는데 아들 없는 집의 사위가 되면 그대로 물려받는다. 재산을 나누어주는 오늘날 상속의 개념인 분재기를 보면 그때까지는 아들딸 구별 없이 나누어 주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란 초유의 국난을 당한다. 유교가 국시인 조선시대는 충과 효는 절대적 가치기준이었다. 그래서 조상을 모시는 제사는 어떤 명분보다 중요하여 국난을 당하자 절손되면 제사가 끊어질 위기상황에서 장자 한 사람에게 몰아주어 집안에 대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 만석꾼이나 부자들 대부분이 조선 중기 이후부터 이어진다.또 댐이나 호수, 못 등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 농사란 것은 운 칠(7) 노력 삼(3)이 아니라 하늘이 거의 좌우한다. 가뭄 들고 요즘같이 수해 당하면 땅 외에 담보가 없는 소농들은 부잣집이 금융기관이었다. 먹을 것 없는 춘궁기에 지금의 은행 가듯이 땅문서 들고 부잣집에 빌고 빌어 가을 추수하여 갚겠다고 약속하여 위기를 넘긴다. 다행히 풍년이 되면 갚을 수 있지만 흉년이 들면 갚지 못하고 고스란히 담보물 농토는 부자의 소유가 된다. 다른 대안이 없는 소농들은 소작인이 되거나 그것도 못하면 유랑 걸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원망으로 부자 된 사람들이 많고 아름다운 부자 되기가 어려운 것이다.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서 토지조사 할 때 남북한 통틀어 만석 할 수 있는 토지소유자는 대략 40명 정도였다. 오늘날로 치면 만석꾼은 10대 대기업이고 천석꾼은 100대 기업 정도와 비슷할 것이다.경북에 대표적인 만석꾼은 경주의 최 부자와 청송의 심 부자(송소 고택)댁이다. 최 부자가 12대로 이어왔다면 심 부자는 9대를 이어왔다. 둘 다 대단한 부의 대물림이다. 최 부자 1대 최진립은 무인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공으로 공신전을 받는다. 벼 직파재배와 하천개간으로 수확량이 많은 것도 있지만, 흉년에 땅문서 저당 잡아 소유했고 흉년에 땅도 샀다. 땅이 없는 사람들은 더이상 살아갈 방법이 없자 밤중에 3대 최국선의 방에 복면하고 문서 찾아 찢고 불태운다. 그래도 사람은 심하게 해치지 않았다. 엄청난 수모였지만 최국선은 법률상 합법이라도 그것이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갖고 있던 집문서를 찢었던 것이다. 수모당한 원한을 갚지 않고 흉년에 땅 사지 않는 것을 실천한 최국선도 대단했다. 흔히 부자가 3대 못 간다는 옛말이 있는데 12대 만석꾼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 뒤부터 최 부자집은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 없게 하라는 육훈과 육연으로 오늘날 극찬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칭송받는 것이다.송소 고택도 영조 때 심처대가 어떤 이유로 만석꾼으로 이어오다가 7대손 송소 심호택(1862~1930)은 밤에 복면하고 침입한 도적 떼들이 위협하자 재치 있는 마나님이 “사람을 해치지는 마라”하고는 곳간 문을 열어주고 마음껏 가져가게 했다. 그러고는 남은 재산으로 지은 것이 오늘날 청송의 송소 고택이다. 흔히 ‘부자는 본능을 통제하고 가난한자는 본능대로 산다.’는데 예전에는 본능대로 살았던 사람은 부자 되고 본능을 통제한 사람은 오히려 가난했다.#. 사라질 번한 송소 고택지금은 청송을 대표하는 고택으로 유명세를 타는 송소 고택이 되었는데 없어질 뻔한 위기상황도 있었다. 필자가 문화유물을 보고 느낀 감동을 세상에 전해주려고 1995년 문화유적이 가장 많은 경주에 정착하여 사라져가는 고택을 1996년부터 옮겨 짓고 있었다. 구미에 미군정 때 수도경찰청장 했던 장택상 고택을 10억에 판다고 하여 가보았다. 인동 장씨 집성촌의 높다란 산언덕에 지었는데 마당도 협소하고 집이 품위와 격이 없었다. 다만 대들보 하나는 필자가 수없이 본 고택 중에 제일 아름답고 멋있었다. 그 뒤 궁금하여 가보았는데 4억 주고 샀는데 수리비가 더 많이 들었다는 한정식하고 있던 주인의 말이었다. 그리고 청송에 송소 고택을 2억(4억에 내놓았다가 팔리지 않아)에 판다고 하여 가보았다. 오래전부터 비워둔 집이라 폐가에서 주는 쓸쓸함이 묻어났다. 여러 채의 큰 규모였지만 품격이 없는 고택이었다. 다만 대문 왼편에 있는 사랑채만은 낭만이 흐르면서 품격도 있어 아름다운 매력이 풍겨 탐이 났다. 그러나 청송에 산다면 모를까 이미 경주에 정착했고 멀쩡하게 있는 집을 옮겨오지는 않고 없어지는 고택만 옮겨오기에 나와는 인연이 아니었다. 그 뒤 송소 고택은 지금의 심재오 종손의 풍산금속동료 박경진씨가 2003년부터 2010년 8월까지 7년 동안 임대하여 전국에 알리는 큰 역할을 했다. 그 이후 서울에 살던 종손이 내려와 이어오고 있다. 이 마을 어느 종부와 잠시 대화했는데 2억은 아니고 경매가 5억이고 계속 유찰 되고 그것을 안 누나가 구입하여 지금은 외동 심재오 동생 소유로 이전했단다. 그때는 100억대의 빚을 진 상태였고 그런 우여곡절 끝에 오늘날 전국적으로 각광받고 덕천 마을도 살아나 천만다행이다.장마도 아닌데 비가 계속 이어지다가 오늘은 다행히 하늘이 구름을 잔뜩 머금어 비를 막고 있어 고마웠다. 몇 번이나 왔어도 답사 객들 기행안내로 왔고 오늘은 혼자서 찬찬히 마을을 포위하듯이 앞산, 뒷산에 올라 마을 전체를 살피고 송소 고택에 들어갔다.#. 덕천 민속마을의 이모저모높다란 대문은 부자나 권력자의 권위의 상징이다. 대문 위에는 송소 고택이 아니라 근대 서예가 위창 오세창의 전서로 깔끔하게 쓴 송소고장(松韶古莊)이다. 송소(松韶)라는 뜻대로라면 심호택은 한 풍류 한 상당히 낭만적인 부자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하기야 부자라도 낭만이 있어야 이런 집을 짓지 않겠나. 장이란 대저택을 상징하는데 강릉의 선교장이 대표적이다. 들어서자마자 좌우를 가르는 담이 남녀유별의 상징으로 왼쪽은 남자들이 사랑채로 출입하고 오른쪽은 여자들이 안채로 들어가게 나눈 것이다. 왼쪽의 사랑채는 송소 고택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올 때마다 옛정 그리운 애인마냥 한참을 서성인다. 야무지고 힘 있고 멋 부리면서 거드름 피우지 않는 단정한 아름다움이 흐른다. 이 송소 고택은 여러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어 담과 문들이 많아 축소한 작은 궁전 같다. 사랑채 우측담장을 끼고 있는 곳에 필자가 처음 왔을 때는 있었다. 그 7칸 건물이 불타고 없어져 99칸에서 92칸만 남았다. 이 집을 1880년에 지었다면 송소가 19살 때이다. 안채 후원 담에는 기와 구멍이 3개인데 사랑채 담에는 6개다. 사랑채서는 안채를 볼 수 없지만 안채서는 기와구멍을 통해 볼 수 있도록 했는데 한 구멍에 사랑채 쪽으로 기와 2개로 구멍을 뚫은 지혜가 대단하다.안채 들어가는 입구에서 뒤돌아 밖을 보면 대문이 오른쪽에 비켜있다. 경사진 뒷산을 등지고 안채정문에서 앞산을 바라보니 정면에는 봉긋한 봉우리가 마치 공을 올려놓은 것 같아 풍수에서는 밥그릇 뒤집어 놓은 것이라 하고, 좌우로 펑퍼짐하게 솟아있는 것은 곡식 쌓아놓은 것 같은 노적봉이라 한다. 하기야 곡식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으니 만석꾼이 될 수밖에?오른쪽 옆문으로 연결된 송정고택은 장작불 때는 연기가 아련한 고향의 정서를 풍긴다. 주인은 불 때고 유난히도 털이긴 덩치 큰 삽살개는 그 옆에서 태평하게 누워있다. 풀 무성한 뒷산 경사진 산길 오르면 벤치가 놓여있고 ‘철기장군 명상 길’이라 해놓았다. 철기 이범석(1900~1972)은 김좌진 장군과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고 해방 후에는 초대 국무총리를 엮임하고 “조국, 이 말처럼 온 인류 각 민족에게 강력과 감동과 영향력을 주는 말은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송소 고택 왼쪽 옆의 ‘백일홍’ 카페가 예쁘게 꾸며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마을중간 쯤에 있는 찰방공 심당(1606~1674)의 종택인데 지금의 집은 1933년에 지어 100년도 안되지만 소뱍하고 검소하여 정감이 간다. 특히 반질반질하게 손질을 잘해놓아 주인을 칭찬해주고 싶다. 초전 댁은 2칸짜리 사랑채가 힘 있고 멋있게 지었다 청마루 위 대들보가 세 개가 나란히 힘 받치고 있고 건물지은 연대를 안채 처마 끝 기와에 가경(嘉慶1795~1820) 11년을 새겨놓아 1806년에 지은 것을 알 수 있다. 마을 끝 부분에 있는 창실 고택은 송소 심호택의 동생 심시택이 1917년 분가하면서 지은 규모 큰 집이다. 다시 마을 반대방향 끝에 풍산금속 유찬우(유청) 창업주가 어릴 때 살았던 초가집에 갔다. 길 다란 초가 본채와 사랑채와 2칸의 별채 등은 정겹고 좋았지만 그 앞에 시멘트로 웅장하게 멋도 맛도 없게 지어놓은 학산정(鶴山亭)은 흉물이었다. 하느님은 공평한지 돈 있으면 안목 없고 안목 있으면 돈이 없는 모양이다./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9-15

아늑하고 풍광이 아름다운 고택… 목은 이색의 유년시절을 그리다

지금이야 병원에서 아이를 낳지만 예전에는 친정 가서 아이를 낳았다. 산후조리는 아무래도 시어머니보다 친정 엄마가 심리적으로 편안하기 때문이다.영덕 영해의 괴시리 마을은 영양 남씨들의 집성촌으로 400여 년간 이어져 내려오고 있지만, 처음엔 함창 김씨들이 고려 말에 괴시리 마을에 살았다. 그때 이 마을 함창 김씨 딸과 사랑을 맺어 장가온 사람이 가정 이곡이었다. 그의 장모가 영양 남씨였고, 아들 목은 이색은 외가인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목은 이색이 태어난 집터에 고택 한 채를 옮겨놓았고 그를 기리는 공간으로 해 놓았다.#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길고 긴 여름 장마가 끝나자 연이어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태풍이 동해안을 할퀴고 간 상처는 깊었다. 자연 앞에 초라한 인간이 어떤 반성과 겸손으로 해야 자연의 재해가 멈출까? 지구 온난화가 태풍의 가장 큰 원인인데 그 온난화를 만든 인간은 어디쯤에서 욕망을 잠재울까? 태풍으로 상처 깊은 영덕 강구 지나 영해 괴시리 마을은 조용히 아픈 상처를 보듬고 숨죽이고 있었다. 괴시리 마을 중간에서 경사진 산길을 오르면 협소한 골짜기가 나온다. 끝까지 오르면 흡사 자궁모양 제법 넓은 공간이 나오고 맨 위에는 이 마을의 ‘스타’ 목은 이색이 태어난 집터가 나온다. 아직도 더운 여름이지만 생가 터 뒤 솔밭에 들어서자 동해의 시원한 바람이 몸에 안겨 오히려 시원했다. 벤치가 몇 개 놓여있고 이색이 고향 그리며 쓴 관어대소부(觀魚臺小賦) 원문을 길게 세워놓았고 그 옆에 친절히 번역도 해놓았다. 눈으로 한번 읽고는 매미소리 벗 삼아 소리 내어 두 번이나 음미해 보았다.“관어대는 영해부에 있는데, 동해를 내려다보고 있어 암석의 낭떠러지 밑에 유영하는 고기들을 셀 수가 있으므로 관어대라 이름 한 것이다. 영해부는 나의 외가가 있는 곳이므로….”“영해의 동쪽 언덕 일본의 서쪽물가엔 흰 파도만 아득할 뿐 그 나머지는 알 수가 없네 물결이 움직이면 산이 무너지는 듯하고 물결이 잠잠하면 닦아놓은 거울 같도다…. 관어대 밑에는 파도가 일지 않아서 고기들을 내려다보면 서로 같고 다른 놈 있어 느릿한 놈 활발한 놈이 제각기 만족해 하누나…. 아 우리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니 내 형체를 잊고 그 즐거움을 즐기며 즐거움을 즐기다 죽어서 내 편안하리. 물아가 한 마음이요 고금의 한 이치인데 그 누가 구복 채우기에 급급하여 군자의 버림받기를 달게 여기랴 슬프도다….”자신이 태어난 고향의 바닷가를 그리워하면서 이렇게 묘사해 놓았다.그러면 목은 이색은 어떤 사람이었나.사람을 완벽하게 평가는 할 수 없지만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어떤 삶을 살았나를 살펴보면 큰 맥락은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가정 어디에서 태어났는가가 그 사람의 일생을 좌우할 수 있고, 어떤 스승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직업으로 평생의 동반자 배필이 누구냐가 결정적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과 교우하는가는 그 사람의 살아가는 가치관과 직결된다.목은 이색이 태어난 1328년(충숙왕 15년)의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에서 벗어나는 몸부림을 치는 격동의 시대를 산 사람이다.이색(1328~1396)의 아버지 가정 이곡(1298~1351)은 죽부인으로 잘 알려졌지만 원나라에 유학 가서 36세(1333년)때 과거에 2등으로 합격하여 벼슬할 때 이색은 6살 어린 나이로 고향에 있었다. 8살부터 고향 한산 술정산 절에서 글을 읽고 14살에 강화도에 가서 공부하였다. 그리고 14살 어린 나이에 성균관시에 합격하여 벼슬 하면서도 공부는 열심히 하였다. 17살 때는 봄에는 삼각산, 가을에는 감악산, 겨울에는 청룡산에서 공부하였다. 18살에 고향 근처 대둔산으로 내려와서 글을 읽었다. 이때 북경에서 벼슬하고 있던 아버지 이곡이 시로 아들의 공부를 격려한다.“사내로 태어났으면 황제의 서울에서 벼슬을 해야지./ 자신을 세우려면 부지런히 공부하는 수밖에./ 천하가 작다고 한 공자의 말씀을 너는 기억하겠지./자신이 태산에 높이 올랐기 때문이란다./아비는 30년 전에 독서를 게을리 해서 머리가 희끗해지며 헛이름을 한탄한단다./ 너는 지금부터 한 순간이라도 아껴 배우거라./부귀는 오직 그 길 뿐이란다.”이색은 이처럼 아버지의 영향을 듬뿍 받고 원나라와 고려에 이름을 떨치는 대학자가 된다.어느 부모인들 자식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냐만, 이보다 앞선 고려 중기 대표적인 문장가 이규보는 자신은 그렇게 술을 좋아하지만 아들 삼백이 자신을 닮아 어릴 때부터 술을 많이 마시자 아삼백음주(兒三百飮酒 1, 2) 시를 지어준다.“너 어린 나이에 벌써 술잔을 기울이니 몇 년 못가서 창자가 녹을까 두렵구나./네 아비 늘 취하는 버릇만은 배우지 마아라./한 평생 남들이 미치광이라고 놀린단다./한 평생 망친 게 모두 다 술 때문인데 너까지 좋아할 건 무어냐./삼백이라 이름 지은 걸 이제야 뉘우치니 날마다 삼백 잔씩 마실까 두렵구나.”지금 시대는 부모와 자식 간에 가벼운 일상을 문자로 주고받을 뿐 부모를 감동시키고 자식을 울리는 깊이가 없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아버지 이곡과 아들 이색은 다 같이 원나라에 과거 급제하여 벼슬을 하면서 뛰어난 문장으로 고려를 위하여 많은 역할을 한다. 그의 소설 ‘죽부인전’은 대나무(죽부인)는 18살 연상의 소나무(송)와 결혼하여 남편이 신선이 되어 돌로 변하자 쓸쓸함과 외로움에 술로 세월을 보내도 지조를 지킨다는 내용이다.사람을 사고파는 인사설(人肆說)은 원나라에 있다가 고려의 개성골목을 지나다 얼굴 아름답게 꾸민 여자들이 예쁨으로 등급 매겨 몸을 파는 여사(女肆), 공문서 작성하고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이 뇌물을 받고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는 관리시장(吏肆·사람시장), 가뭄과 홍수로 입에 풀칠도 못하자 부모는 어린자식을 팔고, 남편은 아내를 팔며, 주인은 종을 팔려고 시장에 줄지어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나 그 값은 너무 싸서 개나 돼지 값만도 못하였고, 해당 관청의 관리들도 수수방관했다.이곡은 이 세 가지 시장이 없어지지 않는 한 그 불미스럽고 가증스러운 결과가 장래에 틀림없이 여기에 머물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했다.원 황제에게 올리는 글에서도 속국 된 고려의 비참한 참상을 조목조목 알리며 시정을 바라는 명문장이다. “고려 사람들은 차라리 남자는 살림을 내보내 따로 살도록 할망정 여자는 집에서 길러 부모와 같이 살기를 바라는 풍속이 있습니다. 지금 고려에 사신으로 가는 자들은 모두들 고려 여자를 자기들의 처첩으로 삼아 데려오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한 번 중국의 사신이 나오면 온 나라가 시끄러워 닭이나 개까지도 편히 살 수가 없습니다. 이 사신들은 이렇게 빼앗아 온 여자들을 모아놓고 잘생기고 못생긴 사람을 고르는데, 때로는 그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욕심을 채워주면 아무리 예뻐도 그냥 놓아주고 그보다 못한 여자를 데려가기도 합니다. 일 년에 두 번이 나 한 번씩 일어나고 한 번에 40~50명 된답니다. 선발된 처녀들의 부모와 종족들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니 그 애처로운 소리는 밤낮으로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의 슬픈 참상은 차마 볼 수가 없고, 그들은 우물에 빠져 죽거나 목을 매어 죽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흘리다가 시력을 잃는 자도 있어서 이러한 참상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곡의 상소문은 원나라 혜종 황제를 감동시켜 공녀의 요구를 금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때는 원나라도 사양길에 접어들어 간신과 탐관오리들이 득실거려 황제의 힘이 미약했기 때문에 혜종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이곡의 상소문은 원나라 학자들이 앞을 다투어 구해보고 천하명문이라고 감탄했다 한다.이곡의 아들 이색은 훌륭한 아버지보다 더 빛나는 이름으로 남는다.그도 손자 맹균에게 “먼저 심술(心術)을 바르게 하고 그런 다음 문장에 힘써라”는 당부의 시를 보낸다. 고려로 와서는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새로운 학문 성리학을 가르치고 20년 동안 과거시험을 여섯 차례나 주관하여 137명 정도의 제자를 배출하였다. 자신은 익재 이제현의 제자였고 그의 제자들은 스승 이색과 같이 불사이군의 자세로 충절을 다한 정몽주, 길재, 이숭인 등이 있고, 새로운 조선왕조 창업에 큰 역할을 하는 정도전, 권근, 하륜 등이 있다. 이색이 가장 아낀 제자가 권근이고, 하륜도 이색의 아들 이종덕을 사위 삼는다. 이색은 한산부원군, 문하시중 등의 재상을 지내고 우왕의 사부가 되어 꺼져가는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반대한다.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조선건국에 반대한 친구 이색을 서인으로 삼아 장흥으로 귀양 보내고 종신토록 양반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붓을 꺾었다 한다. 아들 종학도 곤장 100대를 때려서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종학은 한 달 뒤 귀양지에서 죽었다.이성계는 당시 최고의 학자이자 사림의 존경을 받던 이색이 자신의 건국을 도와주기를 바랐는데 이색은 선비의 지조로 끝까지 반대하자 분풀이로 귀양 보내고 두 아들도 죽였다. 세월이 지나면 분도 풀리듯이 1년 뒤 이성계는 이색을 사면시켜주고 친구의 예로 술잔을 나누고 잔치도 베풀었다. 이성계는 여러 조건으로 새 왕조에 참여하기를 권했지만 이색은 망국대부로 남았다. 1396년 파란만장한 격동기를 살다가면서 백이정, 우탁, 정몽주와 함께 경학의 대가였던 이색이 죽자(고려 왕족을 바다에 수장시켰듯이 이색도 남한강서 배가 폭파되어 죽는데 이성계가 시켰다는 설) 이성계(태조)는 매우 슬퍼하면서 3일이나 조회를 파하고 사신을 보내 정중히 제사지내고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내린다. 목은 이색이 남긴 수많은 문장이 있지만 “차라리 오늘 버림을 받을지언정 다음에 어리석은 비웃음을 받지 않겠다”는 말이 귓전을 울린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9-08

모자람 없이 뽐내지 않고 담백하고 정겨운 고택

지금의 산업화 정보화 사회에서는 온갖 것으로 고부가가치를 창조하고 만들어 내지만 오랜 세월동안 이어져 내려온 정착 농경시대는 땅이 최고의 가치이고 하늘이었다. 그래서 봉건사회의 모든 전쟁은 땅 따먹기 싸움이었다. 우리나라 전통마을에 즐비한 기와집들은 오늘날 강남의 빌딩숲에 해당한다. 대표적인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의 경제적 기반의 물적 토대는 인근에 풍산들판과 안강 들판이었듯이, 영덕 수창면의 기와집 즐비한 인량 전통마을과 영덕 영해면의 괴시리 마을도 마을 앞에 넓게 펼쳐진 벌판 덕분에 물질적 토대가 형성된다.괴시 마을은 고려 말에 함창 김씨가 처음 살았고, 조선 중기(명종 때)에 수안 김씨, 영해 신씨, 신안 주씨 등이 살다가 1630년(인조 8년) 영양 남씨들이 정착하였다. 남씨들 세력이 강했는지 다른 성씨들은 떠나고 영양 남씨들의 집성촌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동해변의 영덕 괴시리 마을 가는 길사람은 밥만 먹다가 때론 라면과 피자도 먹고 싶고, 산골에 있다가 간혹 넓은 바다를 보고도 싶어진다. 안동은 안동댐과 임하댐으로 옮겨온 고택들이 전국에서 제일 많아 아직도 안동에 남겨둔 것이 많아 발목이 잡혀(?) 전국으로 못 나가고 있다. 조금 잠잠해지던 코로나가 다시 창궐하여 온 나라가 어수선하여 광활한 바다를 품어보고 안기기도 싶어 동해변의 영덕 영해의 괴시리로 출발했다. 경주에서 영덕 가는 길은 자꾸만 일직선 도로를 만들어 산이 해안가에 붙어있는 지역 빼고는 바다와 멀리 떨어져 아쉬웠다. 포항 영일대해수욕장, 흥해를 지나자 도로 옆 언덕에 흥해 향교가 그 옛날의 영화를 안고 힘겹게 앉아있다. 더구나 코밑에 차가 쉼 없이 주야로 달려 고통이 심한데다 조금 지나자 길가에 ‘이명박 대통령 고향마을’ 팻말이 더운 여름의 코로나 만큼이나 감동을 못주고 서있다. 그러나 주위의 넓은 벌판이 푸른 춤을 추어 자연이 인간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곧이어 청하가 나온다.청하는 지금은 포항에 편입되었지만 예전에는 현으로 포항보다는 한 수 위였다. 청하초등학교 자리가 청하현 관아 자리였다. 거쳐간 현감이야 수도 없이 많지만 겸재 정선(1676~1759)이 현감 한 것에 주목한다. 관념의 중국 산수화에서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인왕제색도’ ‘금강산전도’등의 진경산수를 그려 한국회화사에 큰 획을 긋는다. 그가 청하현감 할 때 인근 송라면의 내연산을 찾았던 흔적이 제3폭포 움푹 파인 바위에 ‘갑인추 겸재 정선(甲寅秋 謙齋 鄭善)’의 조그마한 석각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 각인된 스타일로 예행 연습한 결과 걸작 ‘금강전도’가 완성되는 뜻 깊은 곳이다.청하에서 영덕까지는 해안가라 푸른 물결 넘실대는 동해를 곁눈질하며 올라갔다. 온통 대게간판과 ‘블루영덕’의 알림판이 푸른 영덕과 연결된다. 이 해안 길을 동해와 남해가 만나는 분기점인 부산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770km 해안 걷는 길을 ‘해파랑 길’이라 하는데 경주 구간 해파랑 길을 ‘감포 깍지길’이름을 붙이듯이, 영덕 해파랑 길도 ‘영덕 블루로드’로 부른다. 이 해파랑 길(동해안 전체구간)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만들 때 필자가 자문위원 하면서 최대한 해안 절벽에 붙여서 만들라고 자문해 준 기억이 새롭다.대게로 유명한 영덕이지만 울진 분들은 실제 대게는 영덕보다 울진에서 더 많이 잡는데 영덕이 선점했다고 아쉬워한다. 마치 고래하면 울산인데 실제 포항이 고래가 더 잡혀(공식적으로는 포경금지인데 그물에 잡히거나 등등으로 고래 고기는 끊어지지 않는다) 한 마리 1억 넘는 밍크 고래를 울산의 큰 상인들이 포항서 구매하여 울산서 판매하는 것과 같다.영해 괴시리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청량한 매미소리가 더운 여름을 날려 보내고 있었다.#. 고택에 백일홍 붉게 물들고마을 시작되는 남쪽 끝에는 영해중고등학교가 높게 서있다. 주차장엔 이색의 시비와 영양 남씨 종친회서 만든 비가 세워져있고 영감댁 고택이 제일 먼저 길손을 맞아준다. 전체를 조망하고 마을을 둘러보기로 하여 이색의 산책길로 접어들었으나 수풀이 무성하여 발길을 돌려 마을부터 먼저 둘러보았다. 마을은 예전보다 많이 가꾸어져 있었다. 예전과 비교하면서 천천히 나그네 되어 이집 저집 살펴보았다. 몇몇 집들은 숙박도 하고 간단한 차도 팔았지만 코로나 여파로 개점휴업이라 사람 구경하기 힘들다. 그래도 집안에 간간히 붉은 백일홍이 8월의 마지막 여름의 정열을 불태우며 고택에 생기를 넣어주고 있었다. 천전 댁(내 앞 댁) 고택은 손님 받는 집답게 집 곳곳을 정갈하게 잘 관리해 놓아 기쁜 마음으로 한참을 둘러보았다. ‘ㅁ’형의 전형적인 북부지방의 형태지만 사랑채를 높게 올려 지어 별도의 독립된 집같이 해놓았다. 석류가 탐스럽게 붉음을 토하고 그 옆에 능소화도 주황색 꽃으로 은근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본채에서 중문을 거치지 않고 마당 끝의 텃밭으로 드나드는 조그마한 쪽문의 아름다움에 눈길이 간다. 150년도 안된 1876년에 지었지만 집과 마당과 텃밭의 규모가 이상적이라 선비가 유유자적하며 살만한 집이라 더욱 정감이 갔다.1600년대에 괴시 마을 입향조 남두원의 장남 남붕익이 지었다는 영양 남씨 괴시파 종택은 마을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그러나 문들을 새것으로 많이 수리해놓아 고택의 맛이 덜했다. 그 앞의 물소와 고택은 길고 개성 있게 지었는데 내부전체를 수리 중이라 어수선했다. 산 오르는 길옆에 경주댁은 남아있는 괴시 마을의 고택들이 남씨들이 지은 것인데 반해 먼저 입향 했던 수안 김씨가 살았던 고택이다. 대문채가 천전댁과 같이 별도로 되어있다.마을 중간에서 산 위로 올라 마을과 넓은 벌판이 펼쳐진 그림 같은 풍경을 조망했다.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도로 저편은 장수면으로 인량 전통마을이다. 고려 때 나옹화상의 고향이고 조선중기 석계 이시명과 그의 아내로 최초의 한글 요리책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장계향, 그리고 그의 아들 갈암 이현일이 태어난 곳이다.#. 옮겨지은 괴정과 영양 남씨산에서 내려와 다시 북쪽으로 백희재 고택부터 살펴보았다. 구계댁 사랑채 고택 방향이 특이하다. 보통 사랑채는 안채의 방향대로 짓는 것이 일반적인데 여기는 안채가 서향이라도 ‘ㅁ’자로 감싸서 서향의 단점이 보완되지만 사랑채는 그대로 노출되어 긴긴 여름 햇살이 힘들게 하기에 사랑채는 남향으로 앉히고 서향의 측면도 판자로 막아버렸다. 주인의 실용적인 감각이다. 이와 같이 예전에는 집주인이 건축가였다. 혜촌 고택은 사랑채의 높낮이로 변화를 주면서 돌출 시킨 집주인의 낭만이 보인다. 1766년(영조 42년)에 괴정정자를 지은 괴정 남준형이 지은 대남 댁도 개성 있게 지었고, 북쪽 끝의 영은 고택은 다른 고택에 비해 멋스럽게 지어 눈 맛이 상큼하다. 북쪽 마을 앞에는 고려 말의 의식 있는 문장가 가정 이곡과 그의 아들 목은 이색 두 분의 유적을 추모하는 유허비를 세워 놓았다. 이 유허비는 1796년(정조 20년)에 경상감사 이태영이 영해부사 황은에게 세우게 하였고 마멸이 심하여 1971년 영해군수 이상복이 괴시 마을 남영종의 도움으로 새로 세웠다.남씨의 시조는 신라 경덕왕 때 영의공 남민(南敏)으로 시작하여 고려 중기에 와서 의령, 영양, 고성 남씨로 분파된다. 괴시리 입향 조는 앞에서 말한 대로 남두원 이래로 지금까지 400여년을 이어온 영양 남씨 집성촌으로 문향을 간직하면서 고래등 같은 특출한 고택은 없어도 모자람 없이 뽐내지 않고 담백하고 정겨운 고택들로 오랜 전통을 이어온 것에 고마운 마음이다. 이런 문필의 분위기라 영양 남씨들도 여러 문장가가 배출되는 자양분이 되었다.이 마을에서 옮겨온 고택은 목은 이색이 태어난 생가 터에 옮겨 지은 고택이 있고, 유허비 옆에 괴정이 있다. 이 괴정은 1766년(영조 42년)에 괴정 남준형이 이곡과 이색 부자의 유허지에 지은 것이다. 처음 지을 때는 연못을 앞에 둔 서향이었으나 1817년(순조 17년) 괴정을 중건하면서 지금과 같이 남향으로 옮겨지었다.이 괴정을 지은 남준형의 글을 보면 밭 갈고 씨 뿌리는 전원생활하면서 담담한 선비로서의 이치를 깨달은 삶을 살았던 분 같다. 괴정 앞에 있는 ‘삼을 심으면서’ 시에는 “삼 심고 밤새도록 비가오니/…. 괴화나무 아래에 앉아 시를 읊네 / 전원에서 늙은 계획 이루어졌으니/ 이로부터 그 계획 어기지 말기를.”‘늙음을 읊으면서’에서는 “총명은 유한하나 이치는 무궁한데/ 부질없이 책속에서 예순 살 늙은이 되었네/ 요즘 다시 천화(天花)가 책상 가득 떨어져/ 흑백을 가져다가 청홍으로 바꾸었네” 행장에서는 “맑아도 풍속과 괴리되지 않고/ 개결해도 남을 끊어버리지 않으며/ 청렴한 상처를 입히는 데에 이르지 않고/ 주밀해도 인색한데에 이르지 않으니 참으로 문무의 재능이 온전하다” 하였다. 묘갈명에는 “늙고 병들고 곤궁한 어른을 집에 맞아 모시돼 아버지처럼 섬겼다. 곤궁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도와주었다. 이를 미루어 노인을 편안히 모시는 양노회도 만들었다. 영해부에 자금이 서리의 사유재산으로 돌아가자 괴정공은 두, 세명의 향 중 노성한 이와 함께 고루 절약하여 주민들에게 세금을 덜어 주었다. 세상물정에 어두운 선비가 곡진히 삼가는 그런 무리들과는 달랐다.특히 행장과 묘지명은 그 사람의 일생을 응축해 놓은 것이다. 괴정 남준형은 크게 알려진 분은 아니지만 뜻과 글이 좋고 참다운 선비 같아 그의 글을 음미하면서 한참을 서성거렸다./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9-01

고려 공민왕과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현판을 만날 수 있는 영호루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쌓여있고 산과 어우러진 강과 하천, 냇가가 많아 전국 어디에나 누(樓)와 정자(亭子)가 있다. 이 누와 정자를 합쳐 누정이라 하고, 여기에 당(堂), 대(臺), 각(閣), 헌(軒) 등도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누는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공공의 성격을 띄고 정자는 작은 공간으로 개인의 수양과 정신적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공통점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몸소 보고 느끼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는 것이다. 안동의 영호루도 낙동강 가에 지어져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오다가 위치 선정이 잘못되어 많이 유실되어 지금은 반대편 산위에 지어져 수해걱정은 없지만 시멘트 콘크리트로 볼품없이 지어 전국의 누 중에는 최하품이 되어 버렸다.#. 누(루)는 언제부터 생겼을까?언제부터 누가 생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이 집을 짓고 살 때부터 원두막 형태의 휴식공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기록상으로는 신선들이 누에서 살기를 좋아하므로 전설적인 삼황오황제때 황제는 오성십이루(五城十二樓)를 짓고 신인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사기’의 기록으로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원수지만 한배를 탄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오나라 왕 합려(闔閭)가 백문루(白門樓)를 짓고 월나라 왕 구천을 도와 와신상담(臥薪嘗膽)끝에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인 서시(西施)를 오나라에 보내 멸망시킨 범려(范蠡)가 구천(勾踐)을 위해 비익루(飛翼樓)를 세웠다는 기록도 있다.우리나라는 삼한시대에 춘천의 소양정(昭陽亭) 자리에 이요루(二樂樓)가 있었다고 구전(口傳)으로 전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으로는 고구려는 기원전 17년(유리왕 3년)서로 앙숙인 유리왕 계비 화희(禾姬)와 치희(稚姬)를 별거시키기 위해 따로 별궁을 지었고, 백제는 391년(진사왕7년 ) 궁전을 중수하면서 자금성의 이화원 같이 못을 파고 산을 쌓았다는 것으로 누를 추정할 뿐이다. 636년(무왕37년) 망해루(望海樓) 등을 짓는다. 신라는 삼국유사의 사금갑(射琴甲)에 나오는 21대 소지왕이 488년 천천정에 갔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동궁과 월지에 임해전을 짓고 불국사에는 범영루를 짓듯이 여러 사찰에도 누가 있었을 것이다. 월상루에서 연회를 베푼 헌강왕 등의 기록으로 궁궐과 부속건물에 지었을 것이다.고려시대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불교국가라 절을 중심으로 많은 누가 생긴다. 안동 봉정사의 덕휘루, 부석사의 안양루, 그리고 해안가에는 왜구의 침입이 심해 통영 수군진영에는 남쪽을 진압한다는 진남루(鎭南樓)가 있듯이, 경주 기림사 같이 해안가 큰 절에도 진남루가 있고, 대개의 산사에는 누가 있다.유학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는 누정이 절정에 달한다. 궁궐의 누정은 경복궁의 경회루같이 연회장소의 목적에 충실하게 실용적으로 지은 것 빼고는 경복궁의 향원정과 부용정 같이 치장과 구조가 매우화려하다. 관청이나 서원 등에는 누가 있고 특히 성리학적 이상을 추구하는 선비들의 누정은 대체로 화려함보다 검소하고 담백하다.#. 영호루의 영광과 상처사람이나 건물이나 한때의 영광도 있지만 상처도 있다. 특히 안동의 영호루는 큰 영광과 명성을 얻었고 그 명성만큼 상처도 컸다. 영광은 10만 홍건적의 참입으로 복주(福州·안동)까지 피난온 공민왕이 70일 있으면서 강가의 영호루에 올라 활 쏘고 말 달린다. 공민왕은 어릴 때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대륙의 웅혼함을 익혔을 것이다. 그래서 말도 잘 타고 그림과 글씨도 잘 썼다. 말달리는 ‘천산대렵도’ 그림도 자신을 생각하며 그렸을 것이다. 서원이나 누정에 누구의 글씨가 있느냐에 따라 그 건물의 위상이 달라진다. 홍건적을 물리친 후 개경으로 갔어도 안동 영호루서 추억을 잊지 못해 1366년‘영호루’ 편액 글씨를 써준다. 이 공민왕의 어필(御筆) 편액 때문에 영호루는 더욱 격이 올라갔다. 영호루가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최소한 공민왕이 피난온 1363년(공민왕 12년) 이전에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누정기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격이 달라진다.영호루의 누정기는 고려 말의 문인 담암 백문보(1303~1373)가 1368년(공민왕 17년)에 썼는데 익제 이재현과 제정 이달충과 함께 고려 국사를 편찬했고, 청렴결백하고 정직하며 특히 문장이 뛰어났다.“영호루는 호수를 굽어보고 있어 기둥과 서까래, 대마루와 들보가 물속에 거꾸로 비쳐 그림자가 어지럽게 일렁인다. …. 큰 강은 옷깃과 띠처럼 둘러앉고 물은 돌아서 호수를 만들었다. 무릇 물의 근원과 지류가 머리를 간장(艮方)에 두고 꼬리를 곤방(坤方)에 둔 것으로서 하늘에 있는 것을 은하수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복주의 글 잘하는 선비와 걸출한 인재가 가끔 이 정기를 타고 그 사이에 탄생한다.…. 이 누(樓)가 은하수처럼 근원을 간방에 두고 꼬리를 곤방에 둔 강물을 누르고 섰으니, 하늘의 문채와 같은 임금의 현판글씨를 얻어 금벽(金碧)의 단청으로 새겨서 오는 세상에 밝게 빛나게 함은 마땅한 일이다. 임금의 덕의 밝은 빛이 이곳에 강림하여 몇 천 년을 두고 우러러보며 흠모하게 되었으니, 나라 일의 기틀에 불행함이 있었던 것이 도리어 누(樓)를 위하여 다행이다.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조선시대는 누정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았고 또한 즐겼다. 안동은 유학의 메카라 할 정도로 퇴계를 비롯한 수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되어 전국의 한 가닥 한다는 학자와 문인들은 안동에 오면 영호루가 필수 코스라 보고 느낀 감흥을 시 한 수로 남겼다.우선 위치 선정 문제였다. 도심 속에 있는 관공서의 누들은 도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지만 그 외의 누들은 강가나 언덕 위의 전망 좋은 위치에서 자연을 내려다보는 부감법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지어지는데 안동 영호루만 강가 낮은 지역에 지었다. 왜 그랬을까. 우리나라는 도심이나 마을을 형성할 때 집 뒤에 산이 겨울에 북풍을 막아주고 앞에는 적당한 농경지에다 강물이나 냇가가 흐르는 배산임수의 지형을 이룬다. 영호루는 누의 입지조건은 지형적으로 불리하고 좋은 위치는 아니었다. 평양의 부벽루에 한 번, 그 외 진주의 촉석루와 밀양의 영남루, 울산의 태화루 등등 많이도 가 보았지만 이런 누들은 도심 앞을 흐르는 강물 절벽이나 산언덕 위에 세웠는데 안동은 도심에는 절벽이나 언덕이 없어 홍수로 몇 번이나 사라지는 수난의 상처를 당한다.#. 수난의 상처, 망쳐 버린 영호루올 여름 긴 장마라 낙동강 물도 불어 영호루를 찾았다. 누런 흙탕물이 유유히 흘러간다. 위에 안동댐과 임하댐이 없다면 장관을 이루며 흘러갔을 것이다. 이 낙동강 물을 보니 어릴 적 물 구경 갔던 기억이 새롭다. 내 고향 의령은 동으로 낙동강을 경계로 창녕이고 남으로는 남강을 두고 함안과 경계를 이룬다. 사람들은 물, 불구경을 좋아한다는 말이 있듯이 수재민의 아픔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어린나이 때 의령의 동쪽 끝에 살았던 필자는 요즘같이 비가 많이 내리면 동네 형들을 따라 산 너머 낙동강 가에 물 구경 갔었다. 강가의 바위위에서 내려다본 낙동강 물은 무서웠다. 평소보다 넓게 펼쳐진 강물이 저 건너 벌판에는 유유히 흘러가는데 발아래 바위산에 부딪히면서 세차게 흘러가는 강물위에 떠내려 오던 집과 소들이 소용돌이 물결에 빨려들어 사라졌다가 저 아래서 솟구치곤 했다. 무시무시한 강물로 기억된다.그 옛날 큰 홍수 때 백사장 가에 있었던 영호루도 그렇게 떠내려갔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세워진 영호루는 1547년(명종 2년) 홍수로 유실되어 공민왕이 쓴 영호루 현판이 낙동강 하구 김해에서 찾았다는 것이 실감난다. 6년 뒤(1552년)에 중창한다. 1775년(영조 51년) 홍수로 다시 중건했고, 1792년(정조 15년) 홍수로 떠내려가 유실되어 4년 뒤 1796년(정조 19년)에 중수하고 1820(순조 20년) 청음 김상현의 7대손 안동부사 김학순이 중수하고 낙동상류영좌명루(洛東上流嶺左名樓)큰 글씨를 남긴다.이후에도 수난은 계속되어 일제 강점기인 1934년 대홍수로 누각이 유실되어 영호루 금자현판이 떠내려가 선산군 구미리 부근의 강물속에서 다시 찾았다. 이 터 빈터만 남았다가 1969년 12월 안동시, 군민이 ‘영호루 중건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원래의 자리에서 정하동 지금의 강 건너 산위로 옮겨짓는다. 그런데 왜 시멘트 콘크리트로 지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망처 버린 것이다. 같은 시기 진주의 촉석루도 1241년 창건되어 중건과 중수를 8차례나 해오다 임진왜란과 6·25때 완전소실 되었다. 안동과 마찬가지로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들의 성금으로 목조로 아름답게 지은 것이 지금의 촉석루다. 뒤쪽으로 오르니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 ‘영호루’편액이 있고 앞에는 공민왕이 써준 한문‘영호루‘가 있다. 1층 기둥 옆에는 중년 남녀가 건식을 사와 먹고 있었고, 2층 누에는 혼자서 운동하는 젊은이가 있었다. 김학순의 큰 글씨가 눈을 놀라게 하고 김종직의 중수기와 고려와 조선의 기라성 같은 선인들의 시판을 일이이 세어보니 47개였다. 지면의 한정으로 좋은 시들을 인용 못하지만, 고려 말의 호영 이집(1327~1387)의 ‘영호루 유별’ 중에 “술은 떨어지고 석양은 다락에 비치는데(酒盡夕陽樓),/ 떠도는 괴로움은 언제나 끝날까(行役何時了)”의 시 구절이 가슴을 친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8-25

이름대로 많은 물과 깊은 인연으로 두 번 이사한 수다재(水多齋)

근대화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도시로 도시로 뿔뿔이 흩어져 살았지만 농경사회에서는 같은 집안끼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즉 피를 통한 혈연중심의 삶을 지탱해왔다. 그중에서 안동이 유독 강하고 많았다. 진성 이씨는 안동 북쪽의 도산을 중심으로 그 아래 강 건너 분강 마을은 영천 이씨, 횡성 조씨, 예안의 단양 우씨, 그 아래는 광산 김씨, 평산 신씨, 반변천의 무실, 박곡은 전주 유씨, 내 앞 마을은 의성 김씨, 흥해 배씨, 서쪽에는 안동 권씨. 진주 하씨. 원주 변씨, 안동 장씨, 안동 김씨, 풍산 유씨 등등의 여러 문중을 중심으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고성 이씨들은 낙동강과 반변천(임하댐)이 합수되는 곳에 강을 두고 남, 북으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고성 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의 신도비와 수다재원이 엄마의 애절한 사연이 있는 귀래정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어은정과 재사가 나오고 150여 미터만 더 가면 고성 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1419~1480)의 붉게 입힌 글씨의 신도비가 있고, 그 이증을 제사 지내는 수다재 재사가 있다. 1600년대 지어져 1974년 안동댐으로 면자체가 없어진 월곡면 미질동에서 예안면 기사리로 옮겼다가 다시 1998년 여기로 옮긴 기구한 운명의 수다재(水多齋)는 이름대로 많은 물과 깊은 인연으로 이증의 신도비와 함께 두 번이나 옮겨야 했다.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1368~1429)의 여섯 째 아들인 이증은 영산현감을 지냈고 안동에 오게 된 연유는 안동의 아름다운 산수에 반해 정착한 곳이 지금의 임청각 터였다. 그의 둘째 아들이 여기 인근에 귀래정을 지은 이굉(李汯)이고, 셋째 아들이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李洺), 그가 지금의 임청각을 짓는다.수다재는 이증의 묘제를 지내기 위하여 지어진 건물인데 입구부터 온갖 다육이가 줄지어 놓여있다. 문 열린 대문에 들어서서 주인은 불러도 없고 빈 공간은 다육이로 채워 놓았다. 본채는 안동 서럽게 높게 지었고 ‘ㅁ’자로 높낮이를 정해 공간을 많이 활용하게 했다. 좁은 공간을 부엌과 광, 뒤주 등으로 제실의 용도에 맞게 복잡하면서 오밀조밀하게 해 놓았다. 재사 건물은 용도가 제사지낼 때 편리성으로 지은 것이라 살림집 같은 정이 흐르거나 아늑한 공간이 아니라 큰 매력은 없다. 한옥의 공간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워두는 여백의 미가 있어야 한결 여유로운 맛이 나는데, 좁은 공간에 분재와 다육이가 빽빽하여 답답하고 어지럽다. 그러나 이 건물도 안동 김씨의 이상루 재사 같이 활용하는지 주인의 손길이 나 반질반질하다.#. 반구정과 권정달수다재와 마주보는 가까운 곳에 반구정 재사와 반구정이 있다. 이 반구정은 강 건너 임청각을 지은 이명의 여섯 째 아들 반구옹(伴鷗翁) 이굉(李肱)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1530년대에 지은 건물이다. 자신의 호도 갈매기와 벗하는 늙은이 반구옹을 했으니 이 분도 인근에 귀래정을 지은 삼촌 이굉 같이 낙동강의 갈매기를 보면서 귀거래(歸去來) 한 것이다. 귀래정이 전국에 있듯이 이 반구정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파주 임진강변의 반구정인데 세종 때 무려 18년이나 영의정 지낸 황희(1363~1452)가 87세(1449년)의 나이에 사임하고 지은 것인데, 그래도 3년이나 갈매기와 벗하면서 살았으니 청백리의 아름다운 명재상이라 천복을 준 것이다. 정자라기보다 4칸의 반듯한 살림집 같았고 방을 좌우에 한 칸씩 넣어 실용적인 정자였다. 안동의 유림들이 시회와 향회를 자주 열었다 하고, 선비들의 출입이 잦아 서원모양으로 동, 서재를 지어 마치 작은 서원 같았다. 반구정 옆에는 조그마한 재사 건물이 있고 문화재 수리하는 분들이 건물을 수리하고, 문 칸 방에서는 할머니 한 분이 방에서 막 나오고 있었다.다시 신도비기 있는 길가로 나오자 카페 내부는 수리중인데 대문에 눈에 띄는 이름이 보였다. ‘권정달 장군 향리고택’. 그가 누구인가 한때 나르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실세 아니었던가. 12·12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국보위 상임위원장 밑에서 실세 중의 실세, 보안사 대령 출신 권정달 아니던가. ‘정의 사회를 구현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창당한 민정당의 사무총장에, 안동 권씨 가문의 막강한 파워에, 국회의원 등등. 책을 좋아한 필자가 옛날에 사 본 ‘여자가 눈물을 흘릴 때’ 책이 떠오른다. 남편 권정달에게 이혼당한 그의 부인 용인순의 책 제목이다. 사랑은 두 사람 사이만 아는 일이라 무어라 말할 수 없지만, 재혼한 부인 덕에 안동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다. 국제적인 감각을 가진 도영심 유엔세계관광기구 재단 이사장이 권정달 국회의원이 실세일 때 재혼하여 같이 국회의원도 했다. 특히 시댁 안동의 탈춤을 세계에 알리고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도 경주가 아닌 안동으로 오도록 한 공로가 크다. 양반들이 괄시한, 상민들의 욕구 해소인 하회 탈춤을 1990년대 초부터 알리는데 노력하여 ‘안동 국제탈춤페스티벌’이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알 수 없지만 23회째가 된다.#. 어은정과 문무를 겸비한 고성이씨 쓰리 스타반구정을 지은 이굉의 아들인 어은 이용도 반구정에 은거하면서 아버지와 같이 자신의 호를 정자 이름으로 하였다. 아버지가 나르는 갈매기와 벗한다면 자신은 물속에 숨은 물고기(漁隱)로 했으니 더 침잠하는 삶이다. 1570년(선조 3년)에 지었다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인데 안과 밖 모두 명호서원(明湖書院) 현판이 붙어있다. 명호서원은 고성 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의 아버지 이원과 갑자사화 때 사사된 이주를 제향했던 곳이다.이 건물도 안동댐 수몰로 1974년 와룡면 도곡리에서 이곳으로 옮겨 지은 집이다. 붙어 있는 재사 건물은 작지만 알차고 다부진 건물이었다. 여기도 고택체험 하여 정리는 어느 정도 되어있었다. 문은 열려 있고 불러도 사람 없어 사진 찍으며 건물을 살펴보는데 자전거 끌고 안주인이 왔다. 세찬 비 온 뒤라 어수선함을 감당하기 힘든지 잠시 사진 찍고 어은정 구경 왔다고 정중하게 말해도 시무룩한 채 아무 반응도 없어 무안해서 그냥 나왔다. 담 옆에 마을 정자에 노인 분들 조그마한 은행 알로 윷놀이하고 있었다.중국에서 건너온 고성 이씨의 시조는 이황(李璜·퇴계 이황과는 동명이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노자(老子·이름은 이이(李耳) 율곡 이이와 동명이인)다. 구전되어 오는 전설적인 이야기지만 노자의 어머니가 81년 동안 임신했다가 오얏나무(자두나무) 아래서 낳았다 하여 오얏나무 이(李)를 성으로 했다 한다.행촌 이암(1297~1364)은 고려 말의 조맹부의 송설체의 명필이었고, 1361년 10만의 홍건적이 침략해올 때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 가는 중 행촌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호종공신 1등으로 되었다, 그러나 정세운 이방실, 김득배 등이 홍건적 토벌에 큰 공을 세우고도 죽임을 당하자 수문하시중 벼슬을 사임하고 강화도로 은퇴 했다가 3년 뒤에 죽는다. 무엇보다도 그가 남긴 ‘단군세기’의 저자라 빛난다. 그의 제자 중에는 목은 이색이 있다.고성 이씨가 낳은 걸출한 인물은 조선을 뒤흔든 이괄(1587~1624)이다. 문무를 겸비한 이괄은 영의정 이원의 6세손으로 어린 나이에 관직에 나가 지략이 뛰어나고 문무를 겸비한 걸출한 풍운아였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에 합류하여 머뭇거리고 늦게 온 김류를 대신하여 반정을 성공시킨,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권력 주변에 한자리 하려고 불나비처럼 모여든다. 특히 쿠데타를 하면 논공행상이 있고 권력에 진입하기 위해 거짓 밀고도 한다. 1624년 문희, 허통, 이우가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 기자헌, 한명련, 이시언, 정충신 등이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고 고변한다. 반정의 최고 공로자 이괄, 광해군 때 영의정 지낸 의리와 명분을 내세운 지조 있는 학자인 기자헌, 왜란 때 많은 무공을 세운 이시언, 의병장 권율 휘하에서 큰 전적을 올린 무신 한명련 등을 지목했다. 엄중한 조사 끝에 무고가 밝혀져 조사담당관이 고변자를 사형 시키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반정 공신들은 이괄을 잡아와서 신문한 뒤에 부원수작을 해임시키자고 했다. 인조는 이괄의 외아들 전을 모반의 사실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압송하라고 명한다.역모로 몰리게 되면 죽음이란 것을 간파한 이괄은 부하들과 의논하여 금부도사 고덕상, 심대림, 선전관 심지수를 목을 베고 이괄의 난이 시작된다. 1624년 1월 22일 항 왜병 100명을 선봉에 1만의 군사로 파죽지세로 2월 10일 서울까지 점령한다. 인조는 2월 8일 공주로 피난 간다. 이괄은 선조의 아들 홍안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성공하는 듯했으나 도원수 장만과 마지막 전투에서 패하고 이괄은 헌명련 등과 패잔병 수백 명을 데리고 2월 15일 이천에 머물 때 마지막 부하장수 기익헌과 이수백은 자신들만 살기 위해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베어 조정에 바친다.안동의 임청각(臨淸閣)은 1519년 이명(李洺)이 양반가로서는 최고치인 99칸의 집으로 현존하는 민가로는 가장 커서 유명하고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1858~1932)과 집안에 독립운동가 10명을 배출하였기 때문에 더욱 유명하다. 500년 가까이 고성 이씨 종가로 이어오다 나라 잃자 조상의 신주 묻고 나라 찾겠다고 전 재산 팔아 만주로 떠난 그 희생정신은 길이길이 기억하고 선양해야 된다. 신흥무관학교를 새워 독립군을 양성한 석주는 독립자금이 부족하여 몰래 임청각 집까지 팔아서 독립운동 했다. 문중에서는 십시일반 돈을 모아 사들였고,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2002년 국가에 헌납한 아름다운 실천의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집 앞에는 일제가 앙갚음으로 철길로 반 토막 내어 상처 입은 용이 되었다./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8-18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보낸 이름모를 여인의 지고지순의 순정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은 누구나 갖고 있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벼슬이 직업인 사대부들은 파직당하거나 은퇴하면 고향으로 돌아가 전원생활을 한다. 그러나 시절이 하 수상하면 벼슬을 던지고 귀거래(歸去來)를 실천하는, 신념으로 사는 선비도 있다. 아니면 처음부터 학문을 닦으며 산림에 묻혀 한평생 전원에서 보내는 산림처사 선비도 있다. 여기 안동의 귀래정은 이광(1440~1516)이 말년에 은퇴하여 지어 몇 년 동안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던 곳이다. 그리고 애절한 편지를 쓴 원이엄마의 남편 이응태가 태어나 살던 곳이다.#. 독특한 귀래정과 도연명의 귀거래사안동부의 “동남쪽에 있는 귀래정(歸來亭)이라는 정자는 예전에 유수(留水·조선시대에 개성, 황주, 강화, 수원 등 요긴한 곳을 맡아 다스리던 정2품의 벼슬)를 지낸 이광이 지은 것이고 동쪽에 있는 임청각(臨淸閣)은 고성이씨들이 대를 이어 사는 집으로 이것들이 영호루(映湖樓)와 함께 이 고을의 명승지다.” 이중환(1690~1756)이 ‘택리지’에서 귀래정을 이렇게 써놓았다.이 귀래정과 임청각, 영호루(강 건너로 옮기기 전)는 낙동강가에 서로가 바라볼 수 있는 삼각형으로 위치해 있다. 예전에 단체 답사객들을 데리고 올 때는 버스 세울 때가 없었는데 오늘은 혼자라 주차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 하늘의 변화는 수시로 바뀌어 비가 오락가락한다. 강물은 불어 흙탕물에다 건물들이 가득하여 예전 조선시대의 풍경은 상상으로 그리는 수밖에 없다. 이 귀래정을 멋스럽게 지은 이광은 고성 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1419~1480)의 둘째 아들로 25세에 진사, 4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 성주목사 등을 지내다 갑자사화(甲子士禍)때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의 일당으로 몰려 관직이 삭탈되었다. 그러다가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1506년)뒤 충청도병마절도사, 경상좌도수군절도사, 개성유수 등을 지내다 1513년(중종 8년)에 나이(74세)가 많아 사직하고 고향 안동에 내려왔다. 낙동강과 임하천이 합수되는 옛 경승지였던 이곳에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글 뜻과 흡사하여 ‘귀래정’이라 지었다.고려와 조선의 한 문장 하는 사람들은 도연명의 귀거래사가 롤 모델을 삼아 귀래정을 많이 지었고 글을 남겼다. 목은 이색(1328~1396)은 독귀거래사(讀歸去來辭)에서 “흰머리 되어 길게 읊조리니 나도 이제 끝이런가./ 문 닫고 그저 ‘귀거래사’나 읽으리라.”했고 신숙주의 아우 신말주(1439~?)는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내몰고 왕이 되자 벼슬을 버리고 순창으로 낙향하여 자신의 호를 딴 귀래정을 짓고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면서 은둔생활을 했다. 농암 이현보(1467~1555)는 1542년(76세)에 은퇴하고 여기 귀래정 위의 낙동강 상류의 예안(지금 안동) 분강 마을로 와서는 명농당(明農堂)을 지어 벽에 도연명의 ‘귀거래도’를 걸어놓고 귀전록(歸田錄) 3수중 ‘효빈가’에서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하며 말만 할뿐 갈 사람은 없네, 잡초 우거진 들판 아니 가면 어찌 할꼬,” 노래하고 장수 집안이라 89세까지 은퇴하고 13년을 강호에 묻혀 살다 갔다.도연명(365~427)은 동진(東晋)시대 평택현령으로 있을 때 상사에게 굽신거리는 것이 체질에 맞지 않아 “내 어찌 쌀 다섯 말의 봉급을 위하여 그에게 허리를 굽힐 소냐.”며 405년(41살 때) 사직하고 지은 작품이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돌아가자! 내 고향 잡초우거진 고향으로…. 지난일 탓한들 부질없음 깨닫고…. 지금 생각 옳고 지난일 그름 이제야 깨닫네.…. 술 단지 끌어당겨 나홀로 한 잔 드니…. 정원을 거닐며 아치를 이루어가고 사립문은 달아 놓았지만 늘 닫혀 있다. …. 고요히 해는 지고 외로이 서있는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나의 마음은 평온으로 돌아온다. 가리라! 돌아가고파 돌아왔는데 다시 무슨 미련을 두랴! 세상과 내가 가는 길 다르니 어찌 다시 벼슬길 구하겠는가…. 부귀는 내 원하는 바가 아니요 신선은 기약할 수가 없네.…. 동쪽 언덕에 올라 노래 부르고 조용히 맑은 물에 가서 시를 지으며 자연의 조화를 따라 돌아가려 하니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이렇게 전원에 돌아와 23년을 살다가 죽는데 세상 어디에나 현실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돌아온 지 3년 만에 집이 홀랑 불타고 말년에는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술과 시와 문장은 벗 되어 평생을 함께했다.#. 이응태와 원이엄마의 애달픈 편지지금이야 폰으로 문자를 주고받고 편지는 거의 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지만, 휴대폰 나오기 전까지는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예전에는 필자도 편지를 많이 썼지만 지금은 거의 하지 않고 아주 드물게 한다. 그러면서도 우체부 아저씨의 빨간 오토바이 올 때마다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늘 편지를 기다린다.“‘워늬(원이) 아버님께, 아내가’ 자내(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자네(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가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어서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가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 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이렇게 끝내놓고 그래도 미련이 남아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보내고 혼자 남은 한 여인의 서럽고 애달픈 사연 담은, 가슴 뭉클한 편지다. 1586년 6월 1일 31살에 죽은 남편 이응태(1556~1586)의 장례까지의 짧은 기간 중에 이렇게 써서 관속 가슴 위에 넣었던 것이다. 그리고 413년 뒤인 1998년 4월 14일 안동 정하동 택지개발로 고성이씨 문중 묘 이장하던 중 이 편지가 나온 것이다.이 편지는 이응태의 무덤(귀래정에서 500m)에서 나온 75점의 유물 중 하나인데 아버지 이요신, 형 이몽태가 쓴 만시(輓詩), 부채에 쓴 한시, 장신구 등이 나왔다. 이 중 머리맡에서 나온 미투리는 이응태가 병중일 때 원이 엄마가 머리를 잘라 눈물을 삼키며 만든 것이라 또 한 번 깊고도 아픈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미투리를 싼 한지가 훼손이 심했지만, 남아있는 글자 중에 “내 머리 버혀….(머리카락을 잘라 신을 삼았다).” “이 신 신어 보지….(못하고 돌아가셨다)”는 지고지순의 순정이 보인다. 인근의 이응태 할머니 문씨의 묘에서는 온전한 미라가 나왔고, 이응태는 하얀 피부에 수염까지 그대로 있었고, 수의로 180cm의 훤친한 키에 호남형의 장부였음을 알 수 있다.남편의 옷과 자신(4점), 그리고 어린 아들의 옷(1점)까지 넣은 여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더구나 남편과 꿀 같은 사랑을 나누었던 사이라 슬픔이 극에 달했을 것이다.원이 엄마 편지 외에 아버지와 형이 쓴 편지 9통도 있었다. 아버지 이요신이 ‘아들 응태에게 부치는 편지(子應台寄書)’에서 묻힌 이의 이름이 ‘응태’임을 알 수 있었고, 형 몽태의 편지에는 “31년 동안 아우와 함께했다”의 글에서 31살에 죽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원이 엄마는 이름도 성도 모른다. 다만 옷의 치수로 160cm 정도의 키에 5살 아들 원이, 그리고 뱃속에 잉태되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이응태는 여기 귀래정에서 태어나 원이 엄마와 결혼하여 처가에 살다가 병들어 귀래정으로 와서 죽었다. 원이 엄마는 그 뒤 아이들 데리고 ‘진보흥부로 옮겨가 살았음(移居眞寶興阜구)’의 고성이씨 족보의 단서로 친정(영양군 흥구리)으로 가서 한 많은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아무도 없는 귀래정을 둘러보았다. 이응태와 원이엄마가 살았던 귀래정은 도로 개설로 묘가 있는 산쪽 20m 정도 옮겨져 집 안에 있던 500년 넘는 은행나무는 집 밖에 있다. 이 은행나무는 그때의 슬픔을 알고 있을 것이다. 집 옆에는 원이엄마의 편지글을 석각해놓았고, 큰 길 건너 안동지청 앞에는 미투리를 가슴에 꼭 안고 있는 원이 엄마의 동상이 슬픔을 머금고 서 있었다. 슬픔에 젖은 능소화도 빗물에 떨어져 뒹굴고, 한 송이 능소화가 슬픔 머금은 원이 엄마를 위로하고 있었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