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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조상의 얼을 찾고 뿌리를 생각한다는 이상루(履霜樓)

선조의 묘를 지키고 제사 지내는 재사(齋舍)는 조상숭배가 삶의 일부분인 조선시대는 어떤 가치기준보다 우선했다. 또한 거대한 문중의 단합과 세 과시도 된다. 여러 제도와 가치기준이 변해도 조상숭배만큼은 형식적이라도 이어질 것이다. 안동은 어느 지역보다도 혈연으로 연결된 강한 유대감과 조상숭배는 거의 종교적인 수준이라 유독 재사가 많다.#. 진성이씨 도솔원 재사하늘도 코로나에 감염되었는지 예전 같지 않게 지리한 장마가 이어지고 있다. 전국적인 장마로 경주 집을 나설 때도 빗방울 정도였는데 영천, 군위, 의성을 지날 때는 쏟아지는 폭우에 모든 차들은 토끼같이 달리다가 순한 양이 되어 두눈을 껌뻑껌뻑 거북이같이 아니 두꺼비처럼 엉금엉금 기어갔다. 빗속의 전쟁이었다. 방송에서는 특집으로 물난리를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한때라고 서안동 IC를 빠져나와 학가산 온천 길 접어들자 큰 울음 터뜨렸던 하늘의 눈물도 그쳤다. 푸른 초록의 물결이 싱싱한 여름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얼마 안가서 왼편 길옆에 송원군 묘소 입구를 알리고 유허비 지나자 곧바로 두솔원 재사가 나온다.두솔원 재사(兜率院齋舍)는 진성이씨 안동 입향조 송안군(松安君) 이자수(李子隋)의 묘소를 지키고 묘제를 받들기 위한 재실이다. 건물이 전체를 사각으로 빈틈없이 감싼 북부지방의 특징으로 1천700년대에 옮겨온 건물인데 최근에 보수를 해 놓았다. 얼마나 건물이 낡았는지 옛 부재는 드문 드문 보일 정도다. 재실건물들은 묘소에 재를 지내기 위한 공간이라 1년에 한두 번 모이는 장소이기에 빈집을 관리하는 격이라 빨리 손상된다.이 소박한 건물 처마 밑에 앉아있는 인상 좋은 아저씨께 묘소까지 거리가 얼마쯤 되는지 물었다. 300m 정도라 하여 우산 들고 올랐다. 시멘트포장 끝나고 수풀 우거진 산을 조금 오르자 ‘청초 우거진 골’이 아니라 잡초 무성하게 허리만큼 솟아 아래위 무덤은 윤곽이 드러나지 않고 석물과 비석만 풀밭에 솟아있었다. 강한 비 내린 뒤라 산새도 우짖지 않고 길옆에 두꺼비 한 마리가 엉거주춤 걸으며 온 산천을 지키고 있었다.#. 홍건적과 송안군 이자수이민족의 지배를 받으면 백성은 고통스럽다. 유럽이나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장구한 역사의 중국도 이민족의 침략과 지배로 큰 고통을 당하는데 송나라를 멸망시킨 몽고족의 원나라 지배하에 고려도 부마국으로 전락하였다. 원나라는 몽고인을 최상으로 두고 그 밑에 몽고족을 보좌하는 색목인(色目人)을 두고 최하로 한인(漢人)과 남인(南人)을 두고 통치했는데 특히 남인은 몽고에 끝까지 저항한 남송사람들이라 더욱 핍박받았다. 자연재해가 나면 지금처럼 토목의 장비가 없을 때 인력으로 복구할 수밖에 없다. 1351년 대홍수로 범람한 황하의 수리로 수많은 농민들이 징발되어 민심의 동요를 일으키자 이 틈을 타서 한족의 송나라를 부흥한다는 기치를 걸고 백련교라는 비밀결사대를 기반으로 홍건적의 난을 일으킨다.홍건적은 백련교와 세상을 구제한다는 미륵교 신자들이 동지의 표시로 붉은 천 조각으로 머리를 싸매어 홍건적이라 불렀다. 우리나라 동학군같이 대부분 농민들로 구성된 홍건적은 처음에는 세력을 떨치다가 관군에 의해서 진압되고 끝까지 살아남은 주원장은 결국 원을 무너뜨리고 한족의 명나라를 세운다. 이 홍건적이 관군에 쫓겨 만주로 후퇴하여 2차에 걸쳐 고려를 침략한다.1359년(공민왕 3년)에 4만의 홍건적이 평양까지 함락한다. 그러나 이방실, 안우 등이 이끄는 고려군의 추격으로 거의 궤멸시켰다. 이후에도 홍건적은 수군(水軍)으로 황해도, 평안도 해안을 침입하다가 1361년(공민왕 10년)10월에 10만의 홍건적이 2차로 침입한다. 이때 수도 개경이 위험하자 공민왕은 피난길에 오르고 개경은 함락되어 수개월동안 잔학함을 당해야했고 원주까지 함락당한다. 12월에 복주(안동)까지 피난 온 공민왕은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임명하여 홍건적 토벌에 나선다. 정세운은 이방실, 안우, 김득배 장군들과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수복한다. 이때 이성계는 사병 2천명을 이끌고 적장 사유 등의 목을 베는 등의 큰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낸다.진성이씨는 진보현(청송 진보면)의 토착 향리였다가 시조격인 이석이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의 큰아들 이자수(~1365~)는 고려 공민왕 홍건적의 침입 때 고려 조정은 군대에 공을 세운 관료들에게 봉군, 통헌 등의 명예직(첨설직)의 벼슬을 주었다. 이자수도 진보현의 향리였는데 정세운 장군을 따라 큰 공을 세워 송안군에 봉해져 신분이 높아졌고, 세습으로 내려오던 향리(鄕吏)도 면하고 판전의시사의 벼슬도 지냈다. 이자수는 안동 입향조가 되어 퇴계 이황 같은 큰 학자가 나와 수는 많지 않아도 진성이씨(진보이씨)는 양반으로의 기반을 단단히 구축한다.#. 재사 이상루안동의 중요한 문중의 재사는 안동 서쪽 서후면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 그것은 음택, 양택의 조건이 좋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선조가 터를 잡고 뿌리를 내린 깊은 인연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두솔원을 지나 서후면 사무소 가는 길에 안동 장씨. 풍산 유씨 재사가 연거푸 있고 경당 장흥효 고택이 도로에서 보이고 그 옆에 성곡 전원마을이 있다. 조금 지나면 서후면 사무소가 나오고 오른쪽 남으로 조금 가면 옛 경당 고택이 있었고 광풍루 정자가 쓸쓸히 있다. 조금 아래로 가면 학봉 종택과 간재 종택, 사육신 단계 하위지 고택 그 아랫마을은 관물당 권호문 고택과 청성서원이 있다. 면사무소에서 왼쪽 북으로 가면 신라고찰 봉정사 가는 길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면 봉정사가 나오고 우측으로 200m만 가면 이상루가 길옆에서 안내한다.이상루(履霜樓)는 직역하면 밟을 리(履)에 서리 상(霜)자를 써서 ‘서리를 밟고 서 있는 위풍당당한 루(樓)’라는 뜻으로 의역하면 돌아가신 조상의 얼을 찾고 뿌리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학문과 덕행, 나아가 충효가 뛰어난 선조에 대해 제사지내는 건물이 재사인데 여기 이상루는 안동김씨 시조 김선평의 묘소를 지키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건물이다. 1750년(영조 26년)에 건축했고 지금의 터에는 1793년(정조 17년)에 28칸으로 길게 중건햐였다. 일부 건물과 루는 옮겨지었다. 이상루는 재사 건물이면서 누의 건물이 인상적이라 답사할 때 들리곤 하는 곳이다. 지난주에 왔을 때는 고택체험도 하기에 개방되어 있어 찬찬히 둘러볼 수 있었다. 단청 칠한 것과 천태암(天台庵)현판이 있어 예전에 천태암 절을 폐하고 이 건물을 지은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천민에 속했던 승려들은 양반의 노비와 비슷했기에 절을 순순히 빼앗겼을 것이다. 더구나 조선을 떨게 했던 풍양 조씨와 세도정치의 대명사 안동 김씨 문중에 스님들은 양반처럼 에헴 소리도 못 내고 눈물을 머금고 절을 두고 떠났을 것이다. 그래도 천태암 현판은 달아 놓았으니 일말의 양심은 있어 다행이다.혼자서 찬찬히 둘러보는데 점잖은 분이 나오신다. 안동김씨 후손인줄 알았는데 타성인데 10년 전에 수리하여 고택 숙소로 운영하는 이신자 관장님이다. 앞으로 5년만 더하고 그만 둘 생각이란다. 그때가 80살이 된다하시는데 스스로 80을 정년으로 택한 삶이다. 여기서 생활하다가 안동시내 집에 가면 답답하다고 하신다. 그런데 세찬 비 오는 오늘은 문도 잠겨 사람도 없고, 산새들도 고요히 숨어 골짜기 물 흐르는 소리가 적막을 깨운다.#. 안동김씨 김선평의 묘김선평의 묘를 예전에 보았던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오늘 다시 찾았다. 문 닫힌 이상루 앞을 지나 산허리 휘감듯이 조금 오르면 묘소가 있다. 경사진 산길 오르는 계단을 온통 장대석으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장인이 사라진 우리시대 혼히 없는 업자들의 작품이라 곳곳에 일그러져 있다. 석물에다 잔디로 잘 단장하여 왕릉같이 해 놓았다. 묘 옆에는 처참하게 부러져 누워있는 두 소나무가 묘한 여운을 준다. 검소한 진성이씨 이자수 묘와 화려하게 단장한 김선평 묘의 상반된 모습에 많은 생각에 잠긴다. 잔디를 심어 언제나 이 모습이고 이자수 묘는 일반 풀이라 잡초 무성하지만 때가 되어 벌초하면 깔끔해진다. 불교에서 마음공양이 최고이듯이 기리고 흠모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극한 마음이다.안동김씨 시조 김선평은 어떤 사람인가.후삼국이 각축을 다툴 때 고려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보다 열세였기에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다. 특히 신라 경애왕을 죽인(927년) 견훤과 공산전투에서 왕건 옷으로 변장한 신숭겸을 비롯한 8장수들이 순국(이때부터 공산을 팔공산이라 했다)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왕건이었다.왕건은 전열을 가다듬어 930년(경순왕 4년, 태조 13년)) 고창(안동) 병산전투에서 8천명의 후백제 견훤의 군사를 함몰시켜 결정적 승기를 잡는다. 고창성주 김선평과 장길, 김행이 향군을 이끌고 왕건을 도왔기 때문이다.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김선평에게 안동 김씨, 장길에게 안동 장씨, 김행에게 안동 권씨를 하사하고 삼태사로 모셨고, 고창은 안동 도호부로 승격시켜준다.그러나 숨은 공로는 안동의 안중구(安中嫗)라는 할머니가 독한 고삼(苦蔘)술을 빚어서 적장에게 취하게 한 뒤에 총공격하여 승리했다고 한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12·12 쿠데타때 반대파 장군들을 술 마시게 한 뒤 했던 것과 같이 술이 역사의 줄기를 바꾼 것은 너무나 많다. 장보고, 전봉준, 신돌석도 술에 죽어간 영웅들이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8-04

종택 정신 상징하는 누마루 사랑채의 ‘충효고가(忠孝古家)’

충과 효는 빛바랜 전통이라고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데 최소의 단위가 가족이라면 최대의 단위가 국가이다. 그 국가를 지탱하는 것도 가족과 사회이고 국가는 가족과 사회를 보호하면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충과 효의 갈림길에서 어떤 행동을 취하느냐가 그 사람의 진면목이 나타난다. 원주 변씨들의 충과 효를 실천한 안동 동호정과 간재 종택을 살펴보자.#. 원주 변씨 시조 변안렬과 굴불가“내 가슴에 구멍 뚫어 동아줄로 길고 길게 메어/ 앞뒤로 끌고 당겨 감키고 찢길망정/ 임 향한 그 높은 뜻을 내 뉘라서 굽힐 소냐.”“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년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앞 노래는 대은 변안렬(1334~1390)의 불굴가(不屈歌)이고 뒷 노래는 너무나 유명한 포은 정몽주(1337~1392)의 단심가(丹心歌)이다. 세계에서 가장 넓게 제국을 건설한 몽고가 세운 원나라에 고려는 부마국으로 90년을 넘게 이어오면서 고려왕은 원나라에 불모로 있다가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여 고려왕이 된다. 그래서 충숙, 충혜, 충렬 등 7명의 ‘충’자가 붙는 고려왕들은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다. 공민왕(1330~1374)은 충혜왕 때 원나라로 가서(몽고 이름 백안테무르) 위왕의 딸 노국공주와 결혼하고 원나라의 지시로 충정왕을 폐하고 왕이 되었다. 변안렬은 중국 심양 출신으로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고려로 올 때 호위해와 원주 변씨 시조가 된다. 고려에 귀화해서는 홍건적을 물리치고 운봉에서는 이성계와 왜구를 격퇴하고 위화도회군 때는 이성계의 부장으로 함께했다.변안렬은 정몽주와 마찬가지로 고려의 개혁은 찬성했으나 왕조를 무너뜨리는 이성계의 역성혁명에는 동의할 수 없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의 하여가(何如歌)로 마음을 떠본 이방원(태종)의 노래에 고려에 충성하겠다는 뜻을 정몽주는 직설적 은유의 표현이라면 변안렬은 구체적 언어로 표출했던 것이다. 특히 이성계의 아들 무안대군 이방번은 사위가 되어 이성계와는 친사돈이 되지만 가치관은 달랐다. 최영의 생질 김저(?~1389)는 여주에 폐위되어있던 우왕으로부터 이성계를 죽이라는 밀명을 받고 곽충보와 팔관회 참석 날 거사할 것을 모의하였다. 그러나 곽충보는 거짓으로 승낙하고는 이성계에게 밀고하여 27명이 처형되거나 유배된다. 이때 변안렬도 연관되어 처형당한다. 정몽주와 이색, 이숭인, 사위 이방번이 슬픔의 제문을 짓는다. 이성계도 변안렬을 죽이기는 했으나 뒤에 사면하고 자손들에게는 벼슬을 준다. 조선 건국 뒤 변안렬의 아들 변이는 도총제, 손자 변상복은 정종의 부마, 변상복의 조카 변효순은 태종의 부마가 된다.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를 고려의 삼은(三隱)에, 대은 변안렬과 도은 이숭인을 포함하여 고려에 충성한 오은(五隱)으로 불린다. 변안렬의 충절은 정몽주에 뒤지지 않으나 역사에 크게 빛나지 않은 것은 무보다 문을 숭상하는 전통의 원인도 있을 것이다.이런 무인기질은 남호 변협(1528~1590)과 변양걸(1546~1610)이 이어받았는지 변협은 활을 잘 쏘아 무과에 급제하고 을미왜변 때 왜구를 격파하여 장흥부사, 제주목사, 포도대장, 공조판서가 된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은 지옥의 세상이었다. 왜군의 살육도 문제지만 해마다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는데 구원온 명나라 군인들의 추태도 극에 달해 종로에서 술 취한 명나라 군졸이 토해낸 음식물을 굶주린 백성들이 게걸스럽게 핥아 먹었다. 명나라 군인들은 조선의 벼슬아치들을 능멸해도 대응하지 못하고 낙오병들이 때지어 다니면서 난동부리는 것을 무과에 급제한 변양걸이 막아내 훈련대장으로 복직되고 임진왜란 때 강화도를 지킨 공을 세웠고, 길주목사, 순천부사, 제주목사, 충청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다.#. 동호 변영청과 동호정원주 변씨가 안동 서후면 금계리에 정착한 것은 변안렬의 6대손 변광이 안동 권씨 권철경의 사위가 되면서다. 지금과는 다르게 그때는 주로 처가살이 하면서 그곳에 정착하여 일가를 이루고 살았다. 큰아들 동호 변영청(1516~1580)은 금계에 살면서 동호파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셋째아들 변영순(1523~?)은 봉화 거촌으로 이사하여 집성촌을 이루어 수온당 종택 등으로 이어왔다.동호 변영청은 어릴 때부터 지혜롭고 총명하여 주위의 주목을 받았고 명종(재위1545~1567)이 등극할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3년 뒤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간다. 주로 언관 등의 일을 보다 뒤에 남원부사, 대구부사, 청송부사 등의 외직을 보내면서 선정을 베풀고 청렴한 선비의 삶으로 살았다. 동호정(東湖亭)은 1551년(명종6년) 어린 명종을 수렴청정 하던 문정왕후의 친정 윤씨들의 전횡을 강한 어조로 상소하여 파직당하고 낙향한다. 처가가 있는 안동 동쪽 법흥리 고성이씨 임청각 언덕 낙동강이 보이는 곳에 동호정을 짓고 자신의 호도 동호라 한다. 이보다 19년 전인 1532년 중종(1506~1544)의 사돈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파직당한 회재 이언적(1491~1553)도 고향 경주에 와서 나 홀로 즐긴다는 독락당(獨樂堂)을 짓는다. 독락당은 송나라 신종 때 급진적 개혁가 왕안석(1021~1086)의 신법에 온건론을 주장하던 사마광(1019~1086)이 스스로 퇴임하고 낙향하여 독락원을 지었듯이, 회재도 독락원을 그리며 지었을 것이다. 동호 변영청도 북송의 인종 때 곽황후 폐립문제로 재상 여이간과 대립하다 쫓겨난 범중엄((989~1052)이 동정호에 ‘등악양루기’의 문구를 상기하면서 낙동강가에 동호정을 지었을 것이다. 동정호는 호남성에 있는 중국 최대의 호수로 중국의 내노라 하는 시인묵객들은 자신의 포부를 쏟아내었다. 시성 두보(712~770)도 ‘등악양루’시에서“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물에 떠있구나(乾坤日夜浮)”로 노래했고, 범중엄의 ‘등악양루기’의 마지막 구절 “천하 사람들이 걱정하기에 앞서 걱정하고(先天下之憂而憂),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한 후에야 즐거워한다(後天下之樂而樂歟).”의 마지막 구절은 모든 관료들이 가슴에 새겨들어야 할 명구다. 그래서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가 중국 문명의 보배 같은 정신유산으로 범중엄을 유사 이래 천하 최고의 일류급 인물이라고 극찬했던 것이다.동호 변영청이 죽자 임청각 처가에 살던 가족들은 선조의 터전이었던 서후 금계로 왔고 동호정도 퇴락하였다. 후손들이 선조의 자취를 보존하고자 1926년 후손들이 옛 터전금계로 옮겨지은 동호정을 찾았다. 학봉종택 건너 마을 산언덕에 있었다. 서산에 지는 햇살마냥 사람 떠난 동호정은 말없이 서 있었다.#. 간재 종택의 충과 효와 간재정동호정에서 대각선 건너편에 있는 간재 종택은 몇 달째 안동에 오면서 올해만 세 번째 찾았다. 언제나 차분한 웃음으로 반겨주는 간재의 11대 주영숙 종부와 변성렬 종손이 있어 더욱 정감이 간다. 종택 입구 연 밭 위에 거문고소리에 학이 춤을 추는 금학정 정자는 근래에 세웠고 그 앞에 소나무 군상들이 정자와 어우러져 운치를 더한다. 다른 종택과는 다르게 충과 효를 상징하는 정려각과 홍살문이 시선을 끈다. 간재 변중일(1575~1660)은 동호 변영청의 손자로 효심이 남달라 임진왜란 때 병든 조모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는 지극한 효심에 감동 받은 왜병이 병간호 잘하라며 다른 왜병이 해치지 못하게 징표로 칼을 주고 간다. 그래서 하늘이 내린 효자로 칭송받았다. 군량미 100석을 상주 진영으로 보내고 18세의 어린나이에 형 변희일과 곽재우 의병장 아래서 왜적과 싸웠고 정유재란 때도 의병으로 왜적과 싸워 충과 효를 실천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동쪽언덕에 검소한 간재정을 짓고 간재기를 쓴다. 사람을 평가할 때 입체적으로 분석해야 되지만, 위급한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 알려면 기문을 보면 알 수 있다.다산 정약용은 수오재기에서, 갈암 이현일은 갈암기에서, 간재는 간재기를 통해서 자신의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나타낸다. “일찍이 군자의 도는 중도(中道)로 가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며, 중도는 성덕(成德)이 아니면 할 수 없으나 치우치면 지향하는 사람이 미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감히 성덕자가 될 수 있는 것을 바라지 않지만 또한 지향이 없는 사람도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간(簡)에서 뜻을 취한 까닭이 어찌 중(中)을 버리고 치우침에서 취한 것이겠는가로 자신의 뜻을 삼았다.종택의 본채와 이어진 누마루 사랑채는 예서로 묵직하게 쓴 충효고가(忠孝古家)가 간재 종택의 정신을 상징한다. 본체의 대들보가 자연스런 멋은 좋은데 너무 굴곡이 급반전하여 악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집 뒤에 불천위 위폐를 모신 사당을 둘러보고 외따로 떨어진 간재정으로 갔다. 백일홍이 충과 효를 실천했던 선비의 정열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 간재정도 간재가 소박하게 지어 거문고를 곁에 두고 학문하면서 강학을 하던 곳이었는데 후손들이 줄여서 지은 것인데 단정한 맛이 난다.현대사회는 개인단위로 삶이 형성되어 있어 집안과 여러 문중이 함께 모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간재 종부와 종손이 구심점이 되어 매년 8월이면 9녀2남의 가족, 친지들과 외손, 안동의 여러 문중 분들을 모시고 만남으로 정을 쌓고 음식으로 기쁨을 주고받으며 화합하는 ‘열친회(熱親會)’는 본받을만하고 칭찬받아 마땅하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7-28

‘不事二君’의 절개…‘사육신’ 단계 하위지의 충절

사람이 숭고한 것은 신념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신념이 자신보다 국가나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라면 더욱 옷깃을 여미는 것이다. 단계 하위지(1412~1456)는 사육신중의 한 명으로 당시 유학자들의 최고의 가치인 불사이군의 원칙을 철저히 따른 것이다. 모든 가치기준은 시대마다 달라 그 시대상황을 우선 고려하고 지금의 시대와 견주어야 된다.그리고 멸문지하를 당했는데 후손은 어떻게 이어졌는가. 사육신 중 순천박씨 박팽년과 진주 하씨 하위지만 드라마보다 더 극적으로 후손이 이어진다. 그 하위지를 모신 창렬서원은 후손으로 명맥을 이어온 종택 옆으로 옮겨왔다.#. 사육신과 단계 하위지“낳았느냐.”“낳았느냐”“낳았느냐.”이렇게 하늘에서 세 번 묻는 소리가 난 뒤 사육신의 대명사 성삼문(1418~1456)을 낳아 이름을 삼문(三問)으로 지었다지만, 하위지를 낳자 집 앞의 계곡물이 붉게 물들어 사흘 동안 흘렀다 한다. 피비린내 나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는지 하위지는 자신의 호를 예사롭지 않은 붉은 계곡 단계(丹溪)로 했다. 지금 중국의 단동(丹東)은 옛 안동(安東)인데 마오쩌뚱(毛澤東)이 공산화 하면서 동쪽을 붉게 물들인다고 단동으로 바꾼 것이다.세종(1397~1450)도 20살(1418)에 왕이 되어 32년 동안 재위(1418~1450)하면서 우리 민족에 농업, 과학, 특히 한글창제 등의 빛나는 업적을 남긴다. 그리고 자신같이 학문은 좋아했지만, 병약한 첫째 아들 문종(1414~1452)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문종은 재위(1450~1452) 2년 만에 죽는데 불안한 마음에 어린 세자를 문무를 겸비한 김종서와 황보인 등에게 잘 보필하라고 부탁하고,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신숙주 등에게도 당부한다.12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 문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단종(1441~1457)은 불과 1년(1453)만에 수양대군은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계유정란) 영의정이 되어 실권을 쥐고, 동생 안평대군도 죽여 버려 조카 단종은 형식적인 왕으로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1455년 단종을 보필했던 중신들을 제거한 한명희, 권람 등의 강요에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상왕이 된다. 특히 옥쇄를 세조에게 받칠 때 성삼문은 옥쇄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자 세조(1417~1468)의 눈과 마음에 찍힌다.이때 집현전 학사들과 불사이군으로 무장된 신념에 가득 찬 뜻있는 신하들은 울분을 토하며 1456년 단종 복위 운동을 한다. 거사 날을 미루자 함께하기로 했던 김질(1422~1478)이 겁에 질려 장인 정창손에게 밀고하여 주모자 17명의 거사주역들이 잡히고 사육신은 능지처참된다.하위지는 형 강지와 함께 남들이 얼굴을 모를 정도로 공부에 몰두하여 1438년에 식년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에 근무했으나 병약하여 사직을 반복한다, 그때마다 세종은 경상감사에게 그를 보살피라고 특별히 부탁할 정도로 그를 아꼈다. 그는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조복을 던져버리고 고향 선산으로 낙향해버린다.수양대군이 단종을 폐하고 왕이 되어 그를 간곡히 불러 일단 부름에 응하여 예조참판에 승진한다. 그러면서 마음은 단종에 가 있어 세조가 주는 녹봉을 방에 쌓아두고 먹지 않았다.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하여 국문을 받을 때 세조가 재주를 아껴 모의한 사실을 고백하면 용서하겠다 하자 “이미 반역의 죄명을 씌웠는데 죽이면 되지 무엇을 더 물어요.” 이처럼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성삼문은 불에 달군 쇠로 맨살을 지지는 작형(灼刑)을 당했고 유응부는 살가죽을 벗기는 참혹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복하지 않고, 성삼문 등을 돌아보면서 “서생(선비)과는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중국사신 초청 연회 날 칼로 거사하려 할 때 그대들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획이 아니오’하더니 오늘의 화를 당했구나.” 일갈하면서 세조에게 “이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없는 선비에게 물어보라”하고는 입을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세조는 더욱 화가 나서 달군 쇠를 배 밑에 지지게 하니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쇠를 집어던지고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하위지는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을 당하고 가족은 연좌제에 걸려 쑥밭이 되어버린다. 조선은 명나라의 ‘대명률’을 따랐는데 모반죄나 대역죄는 능지처참하고, 연좌제를 적용하여 아버지와 아들은 16세 이상이면 목매 달아 죽이고, 15세 이하이거나 어머니, 딸, 아내, 할아버지, 손자, 형제, 자매, 며느리는 모반죄를 고발하여 공을 세운 자의 노비로 삼으며 재산은 몰수한다고 되어있다.고향에 있던 16살 하호, 14살 하박 두 아들이 사형을 받게 되었을 때 금부도사가 차마 죽일 수 없어 살아날 방법을 알려주자 어린 둘째 하박은 “아버지가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어찌 살아남기를 바라겠는가.”하고는 태연히 죽었다 한다. 형 강지, 동생 가지와 소지, 두 아들이 모두 죽어 절손되었다. 그러나 10세 미만이었던 미성년자 하분(형 강지의 아들), 하귀동(동생 히기지의 아들), 조카 하포는 살아남았다. 숙종 때 복권되면서 왕명으로 하귀동은 하원으로 개명하여 아들 자징(自澄 소지의 손자)으로 대를 잇게 했다.#. 초라한 종택과 쓸쓸한 창렬서원아침에 출발하여 안동 서후면 교리의 창렬서원에 도착했다. 송암 권호문의 종택과 창성서원이 옆 마을에 있다. 배산임수의 아늑한 전형적인 마을이 아니라 길옆 두어 채 집 뒤에 가파르고 경사진 산이 가난의 때가 졸졸 흐르는 외딴곳이다. 지난번에도 왔지만 문이 잠겨 있어 사진 찍기도 뭐하여 그냥 돌아섰던 곳이다. 집 앞에서 풀 뽑는다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종부를 만났다. 서원보고 사진 좀 찍으려 왔다니까 어디서 왔느냐 물었다. 경주에서 왔다 하면서 수오재 고택에 산다니까 어렴풋이 경북의 고택 종부들 특강할 때 나에게 강의 듣고 뒷 풀이 술 잔 나눈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종택 옆에 비탈진 서원입구에 높은 유의문(由義門)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충신의 위폐를 모신 서원이라고 이해하면서 들어갔다. 대문을 열어주시고 음료수를 갖고 오신다. 한사코 거절해도 권하여 받았다. 다리 수술하여 불편한 몸으로 돌아서면 자라는 풀과의 전쟁이야기, 사육신 하위지 선조이야기를 풀어놓으신다.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하는 거사를 함께 하기로 한 안동김씨 김질이 고변하였다고 지금도 종손은 안동김씨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신단다. 세조가 김질을 불러 대질 신문하자 성삼문은 “이놈, 김질아! 너는 글깨나 읽었다는 선비 놈이 하루도 못되어 일신의 영화만을 노려 친구를 배반하느냐? 이 더러운 놈 같으니!”했던 김질이었다.종부에게 선조는 선산이 고향인데 어떤 연유로 안동에 정착하였는지 여쭤보니 하위지의 동생 아내(하위지의 제수)가 봉화 금씨라 봉화에 왔다가 안동으로 오게 되었단다. 서원은 비탈진 협소한 공간이라 경사가 급했다. 좋은 목재로 잘 지은 서원은 아니다 보니 건물 그 자체에서 주는 품격이나 권위는 없었지만, 당시의 시대상으로는 신하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다 처참한 죽음을 당하고 온 가족이 몰살하는 비극을 당하고 이름만 충신으로 남게 된 서원이다. 지금의 종손은 건축업을 하여 1년에 관급공사 7개 정도 따다가 생활에 어려움은 없다하니 다행이다.생육신 남효온의 추강집 ‘육신전’에 하위지 인품을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이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비록물이 고였더라도 그 질펀한 길을 피하기 위해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또한 세종이 양성한 인재가 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했는데, 그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 그를 높여 우두머리로 삼게 된다.”고 했으니 침착 과묵한 엘리트 청백리였다.이 창렬서원은 1804년(순조 4년)에 창열사를 지어 위폐를 봉안하고 1809년(순조 9년)에 안동 서후면 송야리에 창렬서원을 창건하고 그 뒤 사람의 중의로 서후면 이개리로 이전했다. 1868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1989년 서후면 교리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다.능지처참당하고 길가에 버려진 사육신들의 시신을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이 거두어 노량진 언덕에 묻었다 한다. 민간에서만 전해오다 육신묘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1679년(숙종5년)에 왕이 노량에 군사검열을 가는 길에 육신묘의 흙을 북돋우고 나무를 심었으며, 1681년에는 사육신 묘역에 사육신을 위한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웠고 1691년 관원을 보내 사육신묘에 제사를 올리게 했다. 원래 4신(성삼문, 이개, 박팽년, 유응부)만 있다 하위지, 유성원과 군사동원의 총책임자 김문기가 추가로 인정되어 사육신이 아닌 사칠신(死七臣)이다.뒷산에서 내려다보니 어쩔 수 없이 서있는 듯한 창렬서원과 송야천 위로 중앙선 고속화철도의 흉물스러운 다리가 마음을 어지럽힌다. 충신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삶이 아름다운 삶인가?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7-21

길을 떠나야 세상이 보인다… 겨울 청량산 기행 떠나는 송암

지금은 건축가가 설계하고 건축주는 돈만 주기 때문에 건축주 자신의 혼을 담은 집이라기보다 건축가의 작품이다. 옛날 사람들은 건축주가 건축가였다. 스승 퇴계가 5채를 직접 터를 골라 지었듯이 제자들도 스승을 닮아 송암 권호문(1532~1587)도 자신의 뜻대로 집을 짓는다.문학하는 선비학자로 평생을 자연에 묻혀 살면서 덕망이 높아 송암을 모신 청성서원은 1608년(선조41)에 세웠다가 1767년(영조 43)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짓는다.#. 청운의 꿈을 접고충과 효가 절대적 가치를 차지하는 조선시대,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최고의 효도는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가는 입신양명이었다. 양명학이 심학을 중시한다면 주자학은 현실참여가 요체인데 조선은 주자학만이 정통이어서 특히 벼슬에 나가 가문과 집안을 살리고 주위에서 선망하는 만큼 부모의 기쁨이었다. 자연을 벗 삼기 좋아하는 농암 이현보가 당상관이 되자 농암의 어머님 권씨 부인은 종들에게 선반가 환영시를 지어 부르게 할 정도로 큰 기쁨이었고 최상의 효였다. 송암도 안동 권씨 금수저 집안에 태어나 공부하기 위한 백 그라운드도 최상이었다. 어머니는 퇴계의 큰형 이잠의 딸이라 퇴계는 외종조부가 되기에 15살에 퇴계의 문하에 들어가 임종까지 지켜본 제자로 혈연과 학연이 연결된다.송암은 어릴 때는 아버지 권육에게 글을 배워 6살 때부터 글을 읽었다. 사람은 어릴 때 습관이 평생을 간다는 말이 있듯이 송암은 책을 들고 자신의 집을 감싸고 있는 청성산의 백운암, 분암 등의 절에서 독서를 하였던 문학소년이었다. 송암도 평생을 안동에 살면서 자연과 벗 삼아 학문과 문학에 매진하는 삶을 산 것이다. 옛 선비들이 글 읽기 좋은 장소가 절이었고 80년대까지 고시원 역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는 달라 당시 철저한 신분사회에서 절에 가면 최고의 대우를 받고 스님을 종 부리듯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송암도 주위의 봉정사, 청량사, 도산서원, 소수서원 등에서 학문의 깊이를 더해갔다.18살(1949년)에 아버지를 여의고 30살(1561년)에 어머님의 당부로 부(賦)와 시(詩)의 문예창작 능력을 보는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생원시, 진사시(사마시)에 합격한다고 벼슬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균관에 입학자격이 주어진다. 그리고 3년 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시묘 살이 하면서 죽만 먹을 정도로 슬픈 예를 다한다. 그때 “애당초 과거에 뜻을 둔 것은 어머니 때문인데 이제는 급제한들 누가 자랑스러워하며 과거공부해서 뭣하겠는가.”하였다.37살(1568년)에 무슨 갈등이 생겼는지 집 뒤 청성산에서 학봉과 과거공부에 몰두한다, 학봉은 합격하고 송암은 떨어져 이때부터 본격적인 자연과 벗하며 문인의 길로 접어든다. 퇴계가 심신 수양했던 청량산을 자신의 산(吾家山)이라 했듯이, 송암도 호를 청성산의 바위와 산 이름을 딴 송암, 청성으로 했다.1585년 학봉은 17년 전 송암과 과거 공부했던 청성산을 자신의 은거지로 생각했는지 “청성산의 절반을 저에게 기꺼이 주시지 않겠습니까?”라는 편지를 쓴다. 송암은 학봉에게 청성산 반을 떼어준다. 학봉은 석문정사를 지었고, 지금도 청성산의 소유권은 그때 그대로다. 보통사람은 하기 힘든 통큰 선비였다.#. 한서재를 짓고초야에 묻혀산 선비 송암 권호문이 살았던 안동 서후면 교리에 있는 송암 고택과 청성서원에 갔다, 우리나라 지명에 교리, 교촌은 향교가 있던 자리인데 여기도 고려시대 관학인 향교가 있었다. 입구에 두어 집 있고 막다른 골에 송암 종택이 외롭게 있다. 종택 입구에 송암이 20살(1551년)때 지은 한서재가 퇴락한 채 서 있다.여기를 선택한 한서재기(寒棲齋記)에는 “시냇가를 거닐다가 우연히 소나무 밑 아슬아슬한 바위모서리에 앉아서 멀리 바라보니, 충분히 깃들어 살만했다. 이에 산 능선을 깎아 초가를 지었다. 한 칸은 따뜻한 방으로 하고, 두 칸은 시원한 마루로 만들었다.…. 유유자적하며 물상을 찾아다니노라면 들판의 푸른 풀, 긴 제방의 파란 버들, 봄날의 안개와 가을의 비. 아침 햇살과 저녁 노을 등이 사시사철의 아름다운 흥취를 제공해주며 세속의 티끌 묻은 생각을 씻어준다.” 그리고는 이곳에서 즐기는 여덟 가지를 읊는데 고요한 밤, 그윽한 창가에서 책을 덮고 홀로 앉아 달그림자 비추면 거문고에 노래를 실어 회포를 푸는 대월음(對月琴)이 마지막 여덟째라 했다. 이곳을 보고 와서 이 글 쓰고 있는 지금의 경주 수오재에는 달 대신 밤비가 하염없이 내려 청마루에 나가 앉았다. 처마에서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빗소리와 개구리 울음이 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송암은 달을 감상하면서 거문고에 노래를 불렀지만, 필자는 만물과 부딪힌 빗소리와 개구리 합창에 방해가 될까봐 단소는 불지 않자 온 몸에 소리가 스며드는 대우성(對雨聲)이었다. 절이 공부하기는 좋아도 일시적이지 장기적으로는 힘들고, 정자는 가유(可留) 지언정 불가거(不可居), 즉 머물 수는 있어도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창작공간이 필요하여 송암은 한서재를 지은 것이다. 여기서 송암은 끊임없이 내면의 이치에 몰두했다.#. 관물당과 청량산기행한서재 뒤에는 사람 살지 않는 종택이 좁은 골짜기를 꽉 메우듯이 앉아있다. 종택 안에 있는 관물당은 1569년 송암이 38살에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송암은 관아당(觀我堂)이라 했는데, 스승 퇴계가 “사물을 관찰하면서 대상을 눈으로 보는 것은 마음으로 보는 것만 못하고, 마음으로 보는 것은 이치로 보는 것만 못하다.”는 뜻의 관물당(觀物堂)으로 바꾸어준다. 송암은 25세 때 청량산을 유람하고 108운의 장편시를 퇴계에게 지어 올리자 퇴계는 “시를 자세히 보니 병폐가 적지 않다. 말을 길게 하고자 한 까닭에 지루하고 산만하다. 운을 가득 채우려고 어려운 문자를 끌어대다가 쓸데없이 길어졌다…” 이런 따가운 지적과 혹독한 비평은 퇴계의 수많은 제자 중에 문학을 이어받은 최고의 제자가 된 것이다.이 관물당을 짓고 다음해 1570년 39살 송암은 겨울에 한 달가량 청량산 기행을 떠나와서 기행문을 완성한다. 시도 1천700여 수가 있지만 기행문은 그 사람의 향기와 살아있는 진솔한 글이라 글쓴이의 내면을 알 수 있다. 기행작가인 필자도 선현들의 기행문을 아끼고 사랑한다. 송암도 겨울 청량산 기행을 계획하고 책과 지필묵, 벗과 퇴계에게 드릴 단술 두 항아리와 채소, 과일을 챙기고 떠나려하자 많은 사람들이 왜 하필 겨울 혹한이냐고 의아해 한다. 가다가 만난 지인들도 산은 봄, 가을이 좋고 겨울은 적합하지 않다 한다. 단 퇴계는 “그 산은 겨울 경치가 좋지, 다만 바람이 몰아칠 때는 숲이 흔들리면서 온갖 소리가 나고 다시는 잠잠해질 같이 않으니, 모름지기 남향으로 난 작은 암자가 있는 조용한 곳을 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청량산 유람할 때 스님들이 길잡이에 심부름하고, 절에 도착하면 늙은 승려가 엎어질 듯이 달려나와 맞이하는 당시의 하늘과 땅 차이의 신분을 여실히 보여준다. 송암은 술을 매우 즐겨 떠나올 때 술 챙겨왔고 만나는 지인과 밤새 마시고 시를 주고받는 낭만이 넘치는 선비였다. 술을 마시고 흥이나 스님 둘을 불러 술병과 벼루와 종이를 들게 하고, 치원대에 올라 쉬고 있을 때 안중사 승려 대여섯 명이 나와 맞이한다.밤에 늙은 승려가 “노스님께서 저녁에 돌아가셨습니다.”고 하자 송암은 “죽고 사는 것은 떳떳한 이치이다. 천지 만물 가운데 오래 살며 죽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어찌 슬퍼하랴.이런 객관적 입장이 숙소 벽에 붙어 있는 김계순(1534~1570)의 시를 보고 먹이 아직 마르지도 않은듯한데 먼저 죽어 손으로 이름을 어루만지며 한참동안 슬퍼한다. 청량산 기행 중에 퇴계의 위중을 승려들이 알려와 곁에서 임종을 지켜보고, 시중든 사람이 70여 명이 있는 가운데 돌아가시자 태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꺾이니 그 슬픔을 어찌하랴 또 많은 눈이 내려 얼어 죽는 사람도 생기고 통곡은 이어진다.어젯 밤부터 진종일 비가 내리는 오늘은 검사, 인권 변호사, 시민운동가, 서울시장의 기득권을 가졌지만, 약자 편에서 많은 아름다운 일을 해오다 성 추행 의혹의 치욕적인 불명예를 죽음으로 사죄했지만, 새로운 불씨를 남긴 박원순 서울시장의 장례식이다.필자를 인터뷰하고 이틀을 우리 집 수오재에서 자면서 경주의 문화유적을 안내했던 인연으로 마음이 우울하고 먹구름이다. 그래서 세상 모든 죽음은 나와의 관계에서 슬픔의 강도가 달라진다.관물당을 나와 송암을 모신 청성서원으로 갔다. 1608년에 세워 1767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었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1909년 도내 유림들의 뜻에 따라 복원한 것이다. 사람은 배우는 것보다 접하는 것이 더 중요하듯이 길을 떠나야 세상이 보인다. 백두산기행을 남긴 당주 박종(1750~1793)은 험한 백두산을 떠날 행장도 준비 안 되었고, 아이도 앓고 있어 주위에서 만류하였으나 박종은 ‘만일에 근심걱정 다 가시고 행장을 갖추어 준비된 후에 가자면 평생을 기다려도 가볼 날이 없을 거라며 떠나듯이, 송암도 부인이 호랑이한데 물리는 일이 많아 걱정하자 “공부는 겨울에 하는 것이 좋다.”라고 하면서 청량산으로 떠난 것이다./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7-14

부용대와 만송정, 그리고 이름만으로 가슴 울리는 하회

우리나라 수많은 마을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마을이 안동 하회마을이다. 우뚝 솟은 절벽, 마을을 감싸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옛 마을의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난 극복의 명재상 유성룡이란 대스타 때문이다. 스승 퇴계가 건축에 깊은 애착을 가졌듯이 서애도 30살에 낙수(落水)의 서쪽 언덕 밑에 서당을 지으려 할 정도로 건축에 일가견이 있다.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자신의 호를 서애(西厓·서쪽 언덕)라 했다. 서애는 풍산에서 옮긴 병산서원 장소도 정해주었고, 원지정사도 지었으며 말년에 옥련정사도 지었다.#. 흐르는 강물, 부용대와 겸암정사하회, 이름만으로 가슴이 울리던 곳이다. 필자가 1985년에 처음 왔을 때 순수했던 하회마을은 눈물 나는 정겨움이었다. 그 뒤 많이도 와 보았지만 외부에 알려질수록 비례하여 점점 빤질빤질하게 망가져 지금은 철저히 상업화되어 자연 경관만 거시적으로 보고 미시적인 마을 구석구석은 보지 않는다. 오늘도 마을입구에서 마을을 피하고 강둑을 걸었다. 하얀 연꽃이 활짝 피어 여름의 서곡을 알리고 강둑의 벚나무도 세월이 흘러 굵은 나무에 잎이 무성하여 햇볕도 막아주고 바람도 일렁거린다. 하얀 백사장과 흘러가는 강물을 보니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의 눈물 나는 동요가 그림처럼 선명히 떠올라 깊은 정서의 우물로 빨려 들어간다.하회마을의 압권은 강 건너 조용히 서있는 부용대 바위다. 마을이 속세라면 강과 부용대는 극락인데 만송정 솔숲이 속세와 극락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예전에는 나룻배로 강을 건넜다면 지금은 섶다리를 놓아 걸어가는 낭만도 있고 부용대 가기도 쉬워졌다. 고운 모래를 적시고 흘러가는 강물은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가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강물에 뛰어내리고 싶지만 마음만 강물에 적시고 부용대로 올랐다. 짜릿한 긴장감이 강물에 휘감긴다. 절벽 아래로 강물보다 넓은 백사장과 만송정, 기와집과 초가집이 적당히 어우러진 하회마을이 꿈결마냥 속삭이듯 고요히 숨 쉬고 있다. 올려다보는 앙시법(仰視法)은 우러러 보는 맛이 있지만, 이처럼 내려다보는 부감법(俯瞰法)은 드라마틱한 아름다움을 던져준다. 부용대 절벽 산길 타고 적당히 내려가면 은자가 조용히 사색하며 학문을 펼칠 수 있는 겸암정사가 나온다. 서애의 형 겸암 유운룡((1539~1601)이 1567년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을 위해 지었고 하회마을 앞의 만송정 솔숲도 조성했다. 겸암은 16살 때부터 퇴계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31살에 또다시 향시에 합격하자 퇴계가 너무 연연한다고 나무라자 벼슬에 뜻을 접었다. 퇴계가 죽고 34살에 아버지의 권고로 고관의 자손에게 주어지는 음직(蔭職)으로 낮은 벼슬을 시작한다. 1584년, 46살에 동생 서애는 판서의 직위에 있을 때 인동현감을 6년 한다. 이때 목민관으로 경위표를 만들어 세금부정을 막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워준다. 이 경위표에 힌트를 얻은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새로운 경위표를 만들었다.명리를 떠나 민중을 위해 선정을 베푼 목민관으로 서애를 큰 인물로 키우는 뒷받침을 했고, 징비록 내용 일부는 겸암의 조언이 들어있다. 주인도 출타중이고 겸암도 떠난 정자에 올라 필자가 여러 번 여기에 앉아 특강했던 기억이 새롭고, 정자를 반질반질하게 잘 관리해놓은 후손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발길을 돌렸다.#. 서애와 옥련정사겸암정사에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화천서원을 지나 옥련정사에 갔다. 서애가 1589년에 지은 집인데 단단하고 기품 있게 잘 지었다. 지금은 담장을 수리 중이었고 휘어진 소나무는 옥련정사를 더욱 품격 있게 한다.지승유인(地勝由人), 땅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명승지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하회마을이 자연경관도 뛰어나지만 서애가 없었다면 하회의 명성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서애는 어떤 사람인가.“천자(天資)가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했다. 학문을 열심히 익혀 종일 단정히 앉아 있으면서 몸을 비틀거나 기댄 적이 없으며, 남들을 대할 적에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고 말수가 적었다.” 한편 “이해가 앞에 닥치면 동요를 보였기 때문에, 임금의 신임을 오래 얻었으나 곧은 말을 드린 적이 별로 없었고, 정사를 오래 맡았으나 잘못된 풍습을 구해내지 못하였다.” 이렇게 상반된 인물평을 ‘선조신록’에는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공통적으로‘총명하고 기상은 활달하였으며 몸가짐이 단정하고 박식하여 사람을 탄복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다’고 했다.서애는 외가인 의성현 사촌리에서 강원도 관찰사 유중영의 둘째로 태어나 21살 때 퇴계 문하에 들어간다. 그가 주자의‘근사록(近思錄)’을 들고 퇴계에게 요목(要目)을 물어나가자 퇴계는 “이 젊은이는 하늘이 낸 사람이다”며 칭찬하였다. 25살 때 별시문과 병과로 합격하여 과직에 나가 영의정 하는 51살 때까지 당쟁의 소용돌이에서도 난관을 잘 헤쳐 나가 27년간 고위관리로 순탄한 벼슬을 지냈다. 서애가 임진왜란을 온몸으로 총괄하여 극복하였으나 전란 중 화의를 주장했다고 파직되어 이곳에 조용히 지내면서 전쟁 때 백성들의 고통과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의 교훈을 적은‘징비록’을 완성한다.#. 전쟁의 참혹함여러 경로를 통해 일본의 침략정보가 있었지만, 학봉 김성일이 일본의 침략은 절대 없다는 결정적 잘못된 보고로 전쟁대비도 제대로 못한 원인도 있지만, 속수무책으로 참혹하게 당한 것은 선조의 무능과 동, 서로 갈라진 당파싸움, 그리고 썩은 관료들 때문이었다.율곡 이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의 한 사람이면서 임진왜란 때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1천700여 명을 모아서 승병들과 합세하여 청주를 수복하고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 금산으로 향하다가 그의 전공을 시기한 관군의 방해로 대부분의 의병들이 해산되고 겨우 700여 명의 의병으로 금산전투에서 모두 전사했던 중봉 조헌(1544~1592)이 전쟁 중에 올린 상소를 보자. 1583년 북쪽 오랑캐가 침입했을 때 백성들로부터 신의를 잃은데 있다고 보았다.그때 상민은 양민으로 올려주고 벼슬길도 열어준다고 했고, 군량을 바치는 자도 서얼의 신분을 면해주고 벼슬길도 열어 주겠다고 하여 용기 내어 적의 머리를 베어왔으며, 군량을 가진 자들은 재산을 다 털어 먼 경원까지 실어와 바쳤다. 그러나 전란이 평정된 후 권력을 잡은 신하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목숨을 걸고 싸운 자의 공은 인솔 장수 정언신(1529~1591)에게만 돌아가 북도의 용사들은 배신감에 원한을 삭였다. 조헌의 길고 긴 상소문을 보면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그는 “하찮은 종이라도 공이 있는 자를 승진시키어 우러러보는 백성들에게 감동을 주소서.”라고 절규했다.같은 시대 조선 중기 한문 4대가로 정주학자인 영의정 신흠(1566~1628)도 “오늘날 벼슬아치들을 보면 거의가 뇌물을 쓰고 등용된 자이거나, 아니면 임금의 사랑을 받는 권력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권력자가 뒤를 봐주는 자들이다.” 뇌물에서 시작한 자는 항상 탐욕으로 끝나고, 권력에서 시작한 자는 항상 포악으로 끝난다 했다.임란 당시 서울의 참혹함을 서애는 “1592년(선조 25) 4월 30일 임금의 어가가 서울을 빠져 나가자 백성들은 맨 먼저 장예원과 형조(법무부)를 불태웠는데, 이 두 곳이 공,사 노비들의 문서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을 불태워 궁궐이라고는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리고 왕세자 임해군의 저택과 병조판서(국방부장관) 홍여순의 집이 불탔는데 모두 적들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 백성들이 태웠던 것이다.” 잠시 떠났던 백성들도 돌아와 적들과 함께 물품을 매매하고 점포들은 사람들도 가득찼고, 적첩(신분증)을 주어 자유롭게 출입하니 적들의 노역에 순종했다. 심지어 “누군가가 적을 죽이려 계획하면 밀고하여 그를 잡아다가 종루 앞이나 숭례문 밖에서 참혹하게 불로 지져 죽였다.” 왜군들이 서울을 빠져나가면서 하룻밤에 성안의 집들을 모조리 불태웠고,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 버려 얼마 남지 않았다. 살아남은 백성 중에는 굶주림과 유행병으로 죽은 자가 열 명 중에 팔, 구명이나 되었다면서 “결국 우리 백성들은 더할 수 없이 큰 액운을 당한 것이다. 아무리 사람의 실수에서 빚어진 결과라지만 이 역시 운명이 아니겠는가?”라고 기록해 놓았다.서애의 이엽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보자. 포로로 잡혀가서 수군대장이라고 하니 풍신수길이 매우 융성하게 대접해주고 은과 비단 등도 주고 큰 집을 주어 편히 살도록 했다. 이엽은 그 물품들을 일본사람들에게 뇌물을 주어 환심을 사고 붙잡혀온 백성 수십 명과 도망치려다 현상금 쌀 200석에 우리 백성이 밀고하여 이엽은 배를 찔러 자결하고 나머지는 다 붙잡혔다. 왜장은 죽은 이엽의 뱃속에 소금을 넣어 풍신수길에게 보고 한 뒤 그의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매어달고, 잡혀온 수 십 명은 산채로 불태워 매우 참혹하게 죽였다.당파적인 시각도 있겠지만, 조헌은 적과 화친을 주장하다가 적을 불러들인 서애를 진회보다 더 크다고 했고, 정여립 사건 때 수많은 인재들 1천 여 명이 옥사당할 때 동인을 구해주지 않았다고 비난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학봉을 잡아오라고 하여 압송되어올 때 서애는 적극적으로 변호하여 직산까지 잡혀오던 학봉을 경상도 초유사로 보내게 하고 그가 죽자“평생 동안의 지우는 오직 그 한 사람뿐이었다”통곡하는 뜨거운 우정도 있었다.이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서애는 국난극복의 총 지휘자로 나라를 구한 위인으로 추앙받아 마땅하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7-07

수많은 사연을 안고 자연과 어우러진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

우리나라 서원 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아름다움을 던져주는 서원이 병산서원이다. 이 병산서원은 속세의 극락같이 저만큼 앞에는 병풍이 두른듯 병산이 펼쳐져 있고 그 아래 강물은 소리 없이 흐느끼며 백사장을 적시고 흘러간다. 화산(花山), 이름하여 꽃의 산에 앉은 병산서원은 크지도 작지도 않게 알맞은 규모로 당당하게 앉아있다. 많은 사연을 안고 기막힌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어 자연과 조화로운 이상적인 건축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준다.#. 드라마틱한 병산서원병산서원 가는 비포장 길 입구에 들어섰다. 산허리를 끼고 도는 비포장 길은 고맙기도 하면서 아련한 옛 사연을 던져준다. 저만큼 아래 강물은 흐르지 않고 정지되어 있는듯해 그리움도 멈추어버린다. 주차장 입구에서 병산서원 가는 길에 흙벽집이 아련한 삶의 흔적이 아련 거린다. 복례문을 지나자 만대루가 기다리고 있다. 왼쪽에 조그마한 연못 광영지가 옛 사람들의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天圓地方)의 우주관을 만들어놓았다. 병산서원은 평지가 아니라 산 언덕을 이용한 점층법으로 단을 쌓아 기하학적 구성원리로 자연 속에 있으면서 자연을 온통 끌어당기는 자연과 일체된 건축으로 한국 건축의 백미로 통한다. 서원의 주인공건물은 강당이다.강당 동쪽 명성재는 원장실, 서쪽 경의재는 부원장 겸 교무실인데, 아래 동쪽 동직재는 나이 많은 원생들의 기숙사이고, 서쪽 정허재는 나이 젊은 원생들의 기숙사다. 이 강당에서 과제를 받은 학생들이 보름에 한 번 열리는 강회 때 원장 앞에서 필기시험 아닌 구술시험을 친다. 여기서 합격해야 다음 과제를 받고, 유급되면 통과 못한 과제로 다시 공부해야 된다. 강당 뒷문을 열면 백일홍 여러 그루가 세월의 무게만큼 굵기가 사람을 압도한다. 장판각, 존덕사, 신문, 진사청 건물들 앞에서 호위하듯이 도열해 있다. 선비의 열정을 나타내는 백일홍은 스승 퇴계가 매화를 유독 사랑했듯이, 서애 류성룡(1542~1607)은 백일홍을 많이 좋아했던 모양이다. 목판을 보관한 장판각이 보인다. 책이 귀한 시절 필사본으로 공부하지만 필사는 사람에 따라 오, 탈자가 많이 생겨 책으로 인쇄할 수 있는 목판은 대단히 중요한 출판 기능을 했다. 존덕사는 서원의 선현봉사와 교육의 2대 기능 중 하나인 서애 류성룡과 셋째아들 수암 류진(1582~1635)의 위폐를 모신 곳이다. 강당과 동서재 그리고 제향공간으로 서원의 기능은 족하다. 그런데 병산서원의 압권은 이 중요한 기능도 아닌 휴식과 행사의 부수적인 공간인데 병산서원을 스타로 만든 것이 만대루다. 서원이나 궁궐 누각, 정자 등을 이름 붙일 때 사서삼경의 문구에서 많이 따오는데 조선 유학자들이 그토록 사모하던 주자(주희)의 무이정사(武夷精舍)에 만대정(晩對亭)이 있고, 삼국지의 유비가 최후를 맞이한 곳이 백제성이다. 당나라 시성 두보(712~770)는 그‘백제성루(白帝城樓)’의 시 /강도한산각(江度寒山閣) 강은 겨울 산의 누각을 건너고,/….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 푸른 병풍 같은 산은 늦도록 마주 대할만하고./ 에서 따왔는데 여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이름만으로 가슴 설레는 병산서원교회나 성당, 절 등은 종교적 신앙의 대상이라 사람을 유혹하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화려하거나 권위적이다. 서원은 유교적 엘리트들을 교육시키고 선현을 배향하는 엄숙한 공간이라 검소하고 담백하다. 그리고 병산서원은 부분과 집합을 조화롭게 잘 배치하여 자연 속에 있으면서 자연을 끌어들여 자연과 하나 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상이 접목된다.이 병산서원의 모태인 풍악서당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복주(안동)로 가기 전에 풍산 산성에 머물 때 풍산현의 지방유림 자제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감동받아 서책과 땅(지금의 풍산중·고)을 주어 유생들이 더욱 학문에 열중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도 하고(서원총람·1978년), 영가지(1608년)에는 1551년 권경진 등에 의해 창건했다 한다. 세월이 흘러 서당 가까이 집들이 들어서 시끄러워지자 서당을 옮길 궁리를 하다가 서애가 부친상을 당해 하회에 와있을 때 유생들이 자문을 구하자 서애는 병산(지금의 자리)가 적당하다고 하여 풍악서당을 1572년(선조 5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당’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1607년에 중건하고, 1614년 서애와 셋째 아들 류진을 배향한 존덕사 사우를 건립하면서 서원이 되었다. 1620년 여강서원(호계서원)에 서애의 위폐를 모셔 가면서 퇴계의 좌, 우 상석에 누구를 모시느냐의 병호시비가 시작된다.국가가 공인해주는 사액서원은 라이벌 학봉을 모신 임천서원이 1618년(광해군 10년), 호계서원이 1676(숙종 2년)에 사액 받았는데, 이 병산서원은 1863년(철종14년)에 받았으니 퇴계 적통싸움에서 제자군단 많은 학봉파에 밀린 것이다. 새옹지마라고 당쟁의 근원지인 임천서원, 호계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헐렸지만, 병산서원은 소외된 약자의 입장이라 서원의 건강성을 유지하여 철폐되지 않았던 것이다.그 옛날 여기서 공부하던 원생들이 과거에 급제라도 하면 서원에 못 들어오는 광대들은 이 만대루 아래서 풍악을 울리고 유생들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여흥을 즐겼다. 이 만대루가 신분의 경계선이 되었다. 지금의 복례문은 동쪽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텅 비어있어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지금의 만대루가 좋지만 여기에 방도 넣었다가 없앤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나 건축이나 처음부터 완벽한 것이 아니라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서 완결되는 것이다.#. 만대루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코로나19 덕분에(?) 대낮에 혼자서 만대루에 한참을 앉아서 푸른 병산의 절벽을 마주 대하고 백사장을 옆에 끼고 말없이 흐르는 강물을 보았다. 수백 명의 여러 답사객들을 데리고 나름대로 열변을 토했던 지난 일이 주마등같이 스친다. 나는 얼마나 감동을 주었는가? 필자가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초대 총무로 유홍준 대표와 환상의 콤비가 되어 전국을 기행 할 때 병산서원과 백사장 모래밭에서 가슴 벅찼던 밤, 어느 여름 보름날 진주 삼현여고 독서반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이 만대루에서 병산과 강, 허공의 달을 대하면서 안동의 안상학 시인의 이육사 문학과 나의 병산서원 특강이 달빛에 익어 허공에 맴돌다 강물에 젖었던 그 밤이 새록새록 하다.이 병산서원의 강당이나 동, 서재 그리고 만대루의 청마루 바닥은 언제와도 반질반질하여 신발 벗고 오를 수 있어 고마울 따름이다. 전국에 수많은 고택문화재, 특히 공간이 넒은 누정은 청소가 안 되어 신발을 벗을 수 없다. 여기 병산서원은 30년 넘게 서원 옆에 사시면서 매일 관리해온 류시주 님의 덕분이었다. 40~50명의 단체가 잠잘 수 있는 공간이 마땅치 않을 때 하회식당 겸 민박집이 유일할 때 단체로 몇 번이나 숙식했던 인연으로 인사 드리러 갔는데 출타 중이라 못 뵙고 왔다. 70대 후반인 지금도 이틀은 청소하시고 4일은 하회마을 보존회서 청소하고 있어 생기 도는 병산서원이 되어 만대루에 하염없이 앉아서 흐르는 강물을 볼 수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지난봄에 안동산불의 발원지가 저 건너 병산이라 탄 흔적이 보인다. 물은 간을 넘지 못해도 바람은 넘을 수 있는데 남동풍이 병산서원을 살렸다.사람들은 달빛이 강물에 부서지거나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 저마다 생각을 하게 된다.유학자들이 흠모하던 공자도 흘러가는 물을 보고 생각에 잠기자 제자 자공이 “왜 물만 바라보십니까” 물었다. 공자는 “물의 이치만 생각하고 있다. 물은 참으로 위대하다. 물은 만 번 꺾여 흐르지만,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 이것은 사람이 사는 의지와 같다.” 공자가 한국에 살았다면 동이 아니라 남으로 흐른다 했을 것이다. 세상 모든 이치는 자기가 사는 자연환경의 기준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다. 중국은 우리의 동고서저(東高西低)가 아니고 서고동저(西高東低)라서 동으로 흐르기 때문에 공자가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땅 덩어리 큰 중국의 산수는 기상천외한 것이 많다. 중국 사람이 그린 산수화는 실경이라도 그것을 흉내 낸 우리의 산수화는 관념화가 되는 것이다. 조선 후기 영, 정조시기에 조선의 문예부흥인 실학이 잠시 꽃을 피울 때 겸재 정선(1676~1759)의 진경산수화가 나오고 기름기 있는 중국서예가 아닌 원교 이광사(1705~1777)의 동국진채가 나왔다. 연이어 혜원 신윤복(1758~?)은 춘화도를 그려 궁중의 도화서에서는 쫓겨나지만 비디오 없는 시절에 양반들은 끽끽거리며 좋아했던 것이다. 양반들만 갖던 병풍을 거상들 중에 소금장수도 집에 소유했으니 그들의 눈높이로 맞춘 것이 단원 김홍도(1745~1806?)의 씨름도 등등의 풍속화인 것이다. 그때 조선의 깨어 있는 유학자들은 실학을 들고 나왔지만,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모든 세계는 중국이었고 공자, 맹자의 자구 하나 가지고 티격태격 했던 것이다. 그 옛날 유생들은 여기 만대루에 앉아서 흐르는 물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강은 산을 넘지 못해 병산 큰 바위에 부딪힌 강물은 하얀 그리움을 토하듯이 병산서원 앞에 은빛 고운 백사장을 쏟아내고 하회로 흘러가는데….만대루에서 내려와 백사장 강가에 닿으니 물이 정지한 것이 아니라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멈추었던 그리움이 다시 긴 그리움으로 살아난다. 물은 흘러야 된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6-30

400년 간 ‘병호시비’ 논란 종지부안동시, 국비·도비 등 들여 호계서원 복원

#. 여강서원에서 호계서원으로1575년(선조8년) 여산촌(안동댐으로 면자체가 없어진 월곡면 도곡동) 오로봉 아래 백련사 절터에 지방 유림들의 공론으로 퇴계의 위폐를 봉안하고 후학들에게 학문을 강론하기 위해 여강서원을 건립한다. 그러다가 1605년 대홍수로 유실되어 1606년 북쪽 100보 위에 다시 지었다. 1620년(광해군12년) 추가로 위폐가 봉안된 학봉 김성일(1538~1593)과 서애 유성룡(1542~1607)의 좌 배향 자리다툼이 시작된다. 즉 누가 상석인 퇴계의 좌 배향에 영의정(국무총리) 지낸 서애를 두느냐, 관찰사(도지사)로 4살 많은 학봉을 두느냐로 첨예하게 다툰다. 당시 서애의 제자이며 대학자였던 상주에 은거중인 우복 정경세에게 자문을 구한다. 우복은 5살 이상 차이가 나면 연장자로 대접하여 나란히 걷지 않는다는 견수(肩隨)와 한나라 때부터 시작된 고위직은 어디 가더라도 전용석에 앉는다는 절석(絶席)의 예를 들어 영의정과 관찰사가 같이 앉을 수 없다는 것으로 서애가 좌 배향이 된다. 당시 학봉의 후학들은 스승은 서애보다 4살 많고 학식이 뛰어나다며 반발했지만 세력이 약해 마지못해 따라야했다.여강서원은 1676년(숙종2년) 임금으로부터 ‘호계’라는 이름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명실공히 사액서원이 되어 국비로 운영하는 경제적 기반을 다진다.잠재적 불씨는 안고 있다가 1805년 영남의 4현으로 불리는 서애, 학봉,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의 신주를 문묘에 배향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또다시 서애와 학봉 간 서열문제가 불거진다. 4명의 자손들이 서울에 모여 학봉, 서애, 한강, 여헌 나이순으로 상소를 조정에 올린다. 서애 쪽에서는 서열이 잘못됐다고 독자적으로 상소를 올렸고, 조정에서는 두 상소 모두 기각해 버린다. 이렇게 되자 한강, 여헌의 사림들이 대구 이강서원에 모여 독자적으로 상소할 것을 결정하고 영남 유림에 통보하자 안동의 유림들은 서애, 학봉 양파의 싸움을 중단하고 한강, 여헌 양파를 규탄하는 통문을 띄우기로 결정하고, 전주 류씨 무실파 호고와 류희문에게 통문을 작성케 했는데 학봉, 서애 순으로 작성했다. 이에 서애 파는 순서가 잘못 됐다며 학봉파와 다툼이 재촉발 되었고, 1812년 학봉의 후학들이 호계서원에 대산 이상정의 위폐를 추가로 모시자고 주장하자 서애 후학들의 반발로 호계서원과 절연을 선언해 버린다. 이로 인하여 안동 유림들은 호계서원과 병산서원으로 갈라서고, 퇴계는 제자 싸움에 도산서원으로 학봉은 임천서원으로 서애는 병산서원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적통의 자리다툼과 병호시비왕조나 기업, 가문들이 1대에는 서로 도우며 창업에 힘쓰다 2대가 되면 이해관계에 따라 형제를 죽이기도 하고 원수가 되기도 한다. 학통도 마찬가지로 스승의 제자일때는 동문수학으로 동창, 동기가 되기에 장점은 치켜세워주고 단점은 보완해주다가 스승이 죽은 뒤는 달라진다. 퇴계가 죽고 도산서당을 도산서원으로 사액 받고 퇴계의 모든 글을 망라한 문집을 발간하게 된다. 이때 15살에 퇴계 문하에 들어온 월천 조목은 그림자처럼 퇴계를 수발하면서 학문을 익혔다. 사후에도 극진히 사모하여 죽을 때까지 퇴계를 흠모하면서 추앙했다. 죽어서는 퇴계 제자 368명(편지 한 두통 등의 인연되는 모든 사람) 중에 유일하게 도산서당에 배향되고, 예안(지금은 안동) 인근의 조목, 금난수, 이덕홍, 김부륜, 김택룡, 금응협, 금응훈 등이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학맥을 이어간다. 퇴계의 팔고제자(八高弟子) 중에 중앙정계에 입신양명한 서애와 학봉이 합심하여 안동에 퇴계를 모시는 여강서원(1575년)을 만든다. 일종의 도산서원 분원 역할 격이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애는 전란의 영의정으로 임금을 호종하면서 전쟁과 외교를 총괄한다. 학봉은 일본 침략을 잘못 보고한 죄로 선조가 죽이려하자 서애가 기회를 주자고 하여 경상도 초유사, 관찰사로 의병을 모집하고 1차 진주성을 지켰지만, 2차전을 앞두고 진주관사에서 병사했다. 월천은 학문하는 청빈한 선비의 삶으로 동생과 두 아들을 데리고 곽제우 의병장 휘하에서 의병활동 했다. 1594년 서애의 일본과의 화친을 격렬히 반대하며 후배 서애와 갈라서게 된다. 그리고 퇴계의 문집을 발간할 때 월천은 퇴계의 전체 글을, 서애는 선택하여 만들자는 2차 충돌이 일어난다.학봉은 1593년, 월천은 1606년, 서애는1607년 세상을 떠나고 위에서 말한 대로 1620년 퇴계 좌, 우에 학봉과 서애 중 누구의 위폐를 모시느냐의 병호시비가 시작된다. 서로 도와주던 학봉과 서애가 이제 위폐문제로 집안 문중의 자존심에다 학맥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치열한 논쟁으로 죽기 살기로 싸운 것이다. 흔히 영남학파의 종장으로 점필제 김종직→회재 이언적→퇴계 이황으로 이어졌지만, 퇴계에서 봉우리가 우뚝 솟아 퇴계 학통의 적통싸움까지 복잡하게 얽혀있다. 도산서원에 유일하게 배향되었지만 집안의 재력받침과 우뚝한 제자가 없었던 예안파의 월천(月川)은 시냇물의 달처럼 사라졌고, 달마는 인도에서 선종을 뿌리내리지 못해 동쪽 중국으로 가서 1대조가 되듯이, 퇴계의 학맥 적통은 안동서쪽 서후 금계의 학봉과 풍산 하회의 서애로 이동했다. 학봉파와 서애파의 합심으로 월천의 예안파를 따돌린 두 파는 깊은 계곡의 외나무다리의 무림(武林)이 아니라 낙동강가의 백사장에서 서로 통혼도 없이 원수같이 지냈지만, 죽이지는 않는 무강(武江)의 혈투를 192년(위패모신1620~신주 갖고 간 1812년) 동안 퇴계 적통서열 싸움이 병호시비다.#. 흥선 대원군과 되살아난 신묵패 호계서원 복원세도정치에 이골이 난 흥선대원군은 상갓집 개 형세하면서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서원이 학풍은 사라지고 도적의 소굴이 된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병호시비와 인조반정 이후 300년 집권한 노론에 소외된 영남 남인의 아픔도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둘째아들 개통이(이재면)를 왕(고종)으로 등극시키고 첫 해에 서원에 경고문을 보낸다. 대원군의 서원철폐의지가 확고해지자 유생들은 정치적인 감각으로 흥선대원군의 직계 인평대군을 모시는 서원도 세운다. 대원군은 이것마저 철폐해버린다. 대원군이 당시 영의정 김병학에게 “서원이 온통 백성만 더럽게 괴롭히니 이게 웬 꼴이냐? 집집마다 서원을 만들고 한 사람을 대여섯 곳에서 모시는게 서원이냐? 제현을 존중한다면서 온통 지네 조상 모시는 게 서원이냐? 정말 책을 읽고 싶다면 향교 가서 읽어라. 향교는 장식이냐? 고종도 “너넨 서원이 없으면 성현을 존중할 줄 모르니?”했다.대원군은 조선의 3대 악으로 첫째가 평안도 기생, 둘째가 전라도 아전, 셋째가 충청도 양반이라 했는데 충청도 양반은 서원의 패악을 일컬음이다. 서원은 고려 말 사찰의 부패를 극복하고자 유교국가 이념을 실천할 엘리트 양성소였는데 꼭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병호시비도 양측 간 깊어진 갈등을 해소 하려고 대원군이 힘을 쏟았지만 실패하자 전국에 덜 타락한 47개만 남기고 모조리 훼철해 버릴 때 안동은 40개의 서원 중 도산서원과 병산서원만 남았다. 병파, 호파로 갈라선 블랙홀에 빠진 영남의 유림들은 어느 한쪽으로 붙어야했다. 비병비호(非屛非虎)했던 퇴계 후손들도 비양비상(非兩非商)으로 양반도 상놈도 아닌 것이 되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했다. 퇴계도 학봉도 서애도 말이 없는데 못난 제자, 문중들이 죽은 사람 시체 가지고 싸우는 격이다.학봉이 태어난 내앞 마을과 송림을 거처 임하댐으로 갔다. 대원군이 실각하자 헐어진 7년 뒤(1878년) 호계서원은 모실 신주도 없으니 강당만 세웠고, 1973년 안동댐 수몰로 임하댐 코밑으로 옮겼다. 호계서원 터는 잡초만 무성했다. 2013년 김관용 경북도지사와 안동시장의 중재로 서애, 학봉 문중과 40여 문중 합의 하에 호계서원 복설추진위원회에서 좌 배향에 서애, 우 배향에 학봉과 추가로 대산 이상정을 배향하기로 했다. 임하댐 여수로 물보라 습기에 견디지 못하고 국비, 도비 65억여 원 들여 국학진흥원 옆산 중턱에 옮겨 놓은 곳을 두 번째 갔다. 예전에 서원의 묵패가 관과 백성들에게 재산 갈취였다면, 지금은 국민세금(국비, 도비)을 뺏는 신묵패다. 이미 신주 없어 서원기능도 잃었고, 교육기능이 사라졌고 국가에서도 철거했는데, 예전의 90여 칸으로 “유교문화 및 인성교육의 장으로 교육생과 관광객유치로 지역경제에 큰 보탬이 된다”는 안동시라면 ‘정신문화수도’가 아니라 ‘정신문화부패수도’를 표방하는 것이다. 의미도 없지만 꼭 세우려면 문중 돈으로 해야지 국비, 도비로 한다는 것은 문중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퇴계, 서애, 학봉이 하늘에서 수치스러워 할 것이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6-23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청계 김진 6父子가 한 곳에 모셔진 사빈서원

이 땅에 유학이 들어온 삼국시대부터 훌륭한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유교적 이상사회를 꿈꾸는 청정한 마음으로 향촌사회를 교화하고 학문을 닦을 때까지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타락의 구렁으로 빠진다. 급기야 향촌과 관위에 군림하면서 온갖 피해를 주어 국가의 기틀까지 흔드는 지경에 이른다.#. 서원의 발생과 비약적인 발전삼국시대부터 도입된 유학은 시험(과거)으로 관리를 선발하기에는 공평하면서 효율적이었다. 고구려 말기에 도교가 수용되어 세력을 떨쳤지만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는 불교가 국교였다. 조선은 고려 말에 타락한 불교를 대신하여 유교가 국교가 된다. 고려의 충신들은 벼슬에 나가지 않다가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든 세종을 거쳐 성종 때부터 유학으로 다져진 신진사대부(사림세력)들이 관리로 등용되어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다. 그러나 잠시 꽃을 피우다가 연산군 때 사화(사림의 화·무오, 갑자, 기묘, 을사)로 인한 피의 숙청을 당한 사림세력들은 낙향하여 향촌의 자녀들을 가르친다. 서원은 정치적인 의심도 받지 않고 꾸준히 학문을 연마해 나갔다. 또 관학(공립)인 향교가 공부는 하지 않고 술판 벌이는 타락의 수렁에 허우적거려 사립 학교격인 서원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향교가 도심에서 반경 5리(2km) 안에 두었다면 서원은 도심의 소음을 떠난 자연 속이 입지적인 조건이었다.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소수서원)도 숙수사 절터에다 지었듯이 이제 불교(절)에서 유학(서원)으로 공간의 이동이 되었다.서원은 중국의 당나라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고려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선비들이 학문을 강론하고 석학이나 충절로 죽은 사람을 제사지내는 즉 강학(유학)공간과 선현봉사 두 기능이 합쳐질 때 서원이라 하고 유학의 엘리트 전사를 키우는 곳이다.공자의 가르침(사상)이 유학이라면 성리학은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의 준말로 인간과 우주에 대한 철학이다. 공자의 유학에다 재해석한 것이 성리학이고 주자학도 성리학의 일부인데 송나라 주희가 사고체계를 세웠다 하여 주자학이라 한다. 성리학은 주희의 주자학, 정호, 정이의 정주학, 왕양명의 양명학, 육구연의 심학, 신유학, 도학, 이학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주자학, 정주학만 주류를 이루어 진보적인 양명학이나 나머지는 이단으로 배척하여 다양성이 결핍되어 학문이 경직되었다.고려 말 순흥(영주) 출신 안향이 성리학(주자학)을 처음 도입한다. 1543년(중종38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백운동사원이 처음 세워진다. 그러나 이때는 선현봉사의 사묘(祀廟) 기능이었던 것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정착, 보급하는 일등공신이다. 충신이나 명현을 제사하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세운 사설기관인 서원을 공인화 하고 존재를 알리기 위해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구하여 관철시킨다. 사액서원이 되면 권위는 물론이거니와 서원의 명칭을 부여한 현판과 서적, 노비 등을 내렸다. 퇴계의 고향 예안의 역동서원을 설립주도하고 10여 곳 서원에 대해서는 건립에 참여하거나 서원기(書院記)를 지어 보내는 등 보급에 주력하였다. 전국 도처에 서원이 세워지면서 명종연간에 18개소를 시작으로 사림세력이 주도권을 쥐게 된 선조 때 본격적으로 발전하여 60여개가 생기고 22개가 사액서원이 된다.이처럼 붕당정치와 사림들의 서원보급운동으로 전국 도처에 세워지면서 숙종 때는 서원(167개 중 사액 105개)과 사우(174개 중 사액 200개)를 합친 사액서원이 305개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상숭배가 극에 달해 별 내세울 학문적 업적, 행적이 없는 인물이라도 자손들과 제자들이 돈 있고 권력에 줄이 있으면 서원을 세웠다.급기야 전국에 천(909개)여개가 생긴다. 이중 경상도가 유독 많이 생기는데 전국서원 417개 중 173개 사우 492개 중 151개 이중 200개가 사액 받았으니 서원천국이었다.#. 공자가 살아 나와도 용서하지 않겠다세상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물도 고이면 썩는 것과 같이 서원의 남발은 국가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 서원폐단의 첫 상소는 1644년(인조 22년) 영남 감사 임담이었는데 숙종 초까지는 서원옹호론이 우세하여 오히려 167개소가 더 생긴다. 서원통제가 적극성을 띤 것은 1703년(숙종 29년)에 전라감사 민진원이 조정에 알리지 않고 서원을 세우는 경우 지방관을 논죄하는 상소를 왕(숙종)이 받아들여 강제성을 띈다. 1713년에는 예조판서 민진후의 요청으로 1714년 이후부터는 첩설(疊設)을 엄금하고 사액을 내리지 않을 것을 결정했다. 1717년 숙종이 1703년(숙종 29년) 8도의 관찰사에게 1703년 금령 후 창건한 서원을 조사하게 하여 1719년(숙종45년) 왕이 직접 하나하나 존폐를 결정하였고, 특히 경상도 서원에 훼철을 단행하다가 숙종이 죽어 중단되었다. 숙종과 장희빈의 아들 경종 때 대사성 이진유의 주장으로 1703년 이후의 첩설서원은 그 편액을 철거하였다. 그러나 새로 집권한 노론은 소론의 노론 서원에 대한 보복이었다 하여 영조즉위 후 편액을 다시 걸었다. 이후 영조는 서원이 분쟁을 유발하고 정국을 혼란시키는 요인으로 판단하고 탕평의 일환으로 1714년 이후에 설립된 사원, 사우, 영당 등의 모든 제향기구 192개(서원 19개, 사우 173개)를 훼철시킨다. 정부지원이 끊기자 서원들은 악랄한 방법으로 재원을 마련한다. 전국의 서원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우암 송시열을 모신 청주의 화양서원과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을 모신 과천의 사충서원이었다. 서원에 제사 경비를 마음대로 정해놓고 세금 고시서보다 더 강력한 묵패를 관아나 부호들에게 보낸다. 묵패에 찍힌 대로 안내면 고을 원님은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르고, 부호들에게는‘부모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않았다.’ ‘자식을 잘 가르치지 않았다.’‘양반에게 대 들었다’식으로 잡아와서 서원에 무릎 꿇게 하여 사형(私刑을 가하고 관가(서원에 감옥이 없어)에 가두게 했다. 이 묵패는 전국 어디에나 통했다. 도깨비 방망이였고, 체포영장이었다.화양서원에는 평소에도 수 백 명씩 왕래하고 제삿날에는 수만 명의 유생들이 몰려와 숙식을 화양서원아래 복주촌(福酒村)에서 한다. 이 복주촌은 겉으로는 상민이 운영하는 것 같지만 서원 직영이라 여기에 종사하는 상민들은 서원의 원노(院奴)에게 주어지는 군역, 부역을 면제받았다. 마침내 고종을 등극시킨 첫해(1864년) 대원군(1820~1898)은 극에 달한 서원의 횡포를 “사람이 옛 현인을 높이고 사모하여 서원과 향사를 세운 것은 본래 그 학문을 익히고 그 정신을 밝히려는 것이었도다. 조정에서도 이에 따라 액호를 내리고 토지와 일꾼을 준 것은 그 뜻이 훌륭했고 그 은혜 두터웠도다. 그런데 어찌하여 말류(末流)의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게 되었는가? 글 읽는 소리가 쥐죽은 듯 들리지 않고, 술이나 마시고 다투면서 이기려는 일이나 벌이며, 군역을 피하는 자들이 반이 넘게 정한 원노에 끼어들게 하고, 평민을 학대하는 자들이 공공연히 사람들을 잡아들이게 하면서 이익만을 찾아 나선다. 서로 본받아 사사로이 서원을 이곳저곳에 세워 곳곳에 서원이 바라보일 정도이며, 공갈 협박을 일삼고 다투기를 그치지 않는다. 서원, 향사를 세운 본뜻이 어찌 이러했겠는가? 옛날 현인이 이를 알았다면 반드시 즐거이 제사를 흠향하지 않고 수치로 여길 것이다.”이런 분부를 내리는데 썩어빠진 유생들은 대원군의 서원정책에 반기를 들고 횡포를 일삼던 유생들이 반성은 커녕 기승을 부리자 전국에 횡포가 적은 47개만 남기고 화양서원, 사충서원 포함하여 모조리 헐어버렸다. 철원매주(撤院埋主) 즉 신주는 땅에 묻어버렸다.급기야 전국의 유생 수 만 명이 경복궁 앞에서 상투적인 문투로 상소문을 들고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버티자 대원군은 코웃음을 치면서 “공자가 살아 와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통쾌한 말을 남긴다. 대원군이 실각하자 전국 곳곳에 서원을 다시 세운다.#. 사빈서원과 임천서원안동 내앞(천전)마을에 들르고, 근처의 사빈서원으로 갔다. 기능 잃은 서원의 빈 건물만 나그네를 맞이하고 있었다. 의성김씨 중흥조 청계 김진과 그의 다섯 아들(약봉, 귀봉, 운암, 학봉, 남악)의 덕행을 추모하고 후학양성을 위하여 1710년(숙종36년) 후손들과 사림이 건립했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철거했다. 1882년(고종 19) 영남 사림의 공론에 따라 강당과 사우만 다시 세운다. 임하댐 수몰로 1987년 임하리로 옮겼다가 2011년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긴다. 혼자서 이리저리 둘러보고 임천서원으로 갔다.임청각을 지나고, 안동여고, 안동MBC를 지나 안동 시외터미널에서 동쪽 호암마을 산중턱의 임천서원은 방치되어 귀신이 나올 것 같았다. 임천서원은 학봉 김성일의 도와 학행을 기리기 위해 1607년(선조 40) 임하현에 세웠다가 1618년(광해군 10)에 사액 받았다. 1847년(헌종 13) 서후면 엄곡촌으로 옮겼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훼철되었다가 1908년(순종 2)과 1809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이 서원도 학봉종택 근처로 또 옮긴단다./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6-16

詩 ‘촉석루 삼 장사’ 메아리치는 퇴계 이황 제자 학봉 김성일 종택

학봉 김성일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임진왜란과 학봉은 피와 살 같이 붙어다니는 인연의 원죄로 고통스런 아픔이다.의성 김씨 문중의 입장에서는 퇴계학을 정통으로 받은 긍지이고 자랑스러운 선조이다. 퇴계와 서애, 학봉은 오늘날까지 추앙받고 있는 안동의 3대 스타이다. 이 학봉종택은 지금의 자리에 있다 오른쪽 멀지 않은 곳에 옮겼다가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임진왜란과 학봉 김성일1592년 4월13일 20여 만 명의 왜군이(왜군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700여 척의 배에 1만8천 명) 부산에 상륙한다. 부산과 동래성을 함락하고 김해를 거처 서울로 진격하고, 최강성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울산, 경주를 거쳐 북상한다. 조선은 명장 신립장군을 믿었으나 충주 탄금대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웠으나 전멸했다. 불과 2주일 만인 5월 2일에 서울을 점령한다.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로가 명나라에 망명을 타진한다. 성난 백성들은 왜군이 오기 전에 제일 먼저 노비문서가 있는 장예원과 형조건물을 불태우면서 경복궁이 사라진다.1590년 일본은 100년의 혼란한 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국가를 만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는 66주를 통치하는 실질적인 왕(관백)이었다. 평화기가 되면 싸움이 전공인 무사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다. 새로운 싸움터가 조선이었다. 공공연히 명나라와 조선을 치겠다고 여러 경로를 통해서 알려온다.쓰시마(對馬島)도주가 1588년 10월과 1589년 6월 두 차례나 사신을 보내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고, 1590년 3월6일(음) 조선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할 뜻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허균의 형)과 200여 명의 조선 통신사는 대마도를 거처 일본으로 간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11월에야 도요토미를 만나고 근 1년만인 1591년 2월(음력)에 부산에 도착한다. 이들이 가져온 국서도 무례한 말투로 ‘정명가도(征明假道)’로 침략의 뜻이 분명히 들어있었다.선조 앞에서 황윤길은 미리 올린 보고서와 같이 바닷가에 배가 수백 척이나 있는 것을 보았고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사 김성일은 민심을 동요시키려 한다고 비판하면서 절대 침입하지 않는다고 했다. 같은 동인인 허성도 침략해온다 했다.선조는 워낙 상반된 견해라 도요토미의 생김새를 묻는다.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이라했고, 학봉은 “생김새는 쥐 같고 원숭이처럼 작고 못 생겨서 우리나라를 침략할 위인이 못된다”고 격하하였다. 결국 당시 실권을 쥔 동인의 의견대로 침략에 대비하지 못했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정여립(동인)과 관련되는 모든 사람 1천 여 명을 죽여 버린다. 이때 실각해있던 서인 정철이 총 취조관이 되어 조선인재 대부분(동인)이 죽음을 당해 임진왜란 때 고전을 면치 못하는 원인도 되었다. 술 좋아하며 관동별곡, 장진주사 등의 글로 국문학적으로는 한 획을 그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자신과 서인들의 권력을 위한 악랄한 사람이다. 통신사가 떠날 때는 서인들이 정권을 잡았다가 정철이 선조의 후궁의 아들 광해군을 후계자로 추천했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아 동인이 집권여당 되어 있어 논란 끝에 동인 김성일의 주장이 채택되어 적극적인 방비가 없었다.전쟁이 나자 선조는 황윤길의 의견을 무시한 것을 후회하고 잘못 보고한 김성일을 파직하고 죽이려 하자 영의정 유성룡은 “지금 죽이나 나중에 죽이나 차이가 없다. 차라리 김성일에게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여 경상도 초유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관군을 지휘하여 1차 진주성을 지켜냈으나 2차전을 앞두고 관사에서 병사했다.#. 전쟁의 상처와 치욕의 승리. 학봉의 얼굴임진왜란 7년 동안 왜군이 분탕질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수하여 우리가 승리했다고 한다. 형식적으로는 승리이고 내용은 처참한 패배다. 국경을 사이에 두고 한 전쟁도 아니고 우리 땅에서 살육당하며 치른 전쟁에다 참혹한 고통과 치욕의 상처를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전쟁이 일어나면 모두가 고통이지만, 여자와 노약자와 어린 아이들이다. 특히 여자들이 당하는 고통은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한다. 임진왜란 여러 기록 중에 왕을 호종한 근신들은 안전한데서 장계를 보고 대략을 짐작했다면, 형조좌랑으로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수은 강항(1567~1618)의 ‘수은간양록’, 이순신이 모함 받아 옥중에서 죽게 되자 적극 말려 그를 구한 약포 정탁(1526~1605)의 ‘용사일기’, 김성일 휘하로 들어가 의병 모으는 큰 공을 세우고 학봉의 진주서 죽음과 안동의 이장까지 기록한 송암 이노의 ‘용사일기’, 경상도관찰사 김수와 김성일의 막하참모로 여러 가지 전술을 건의하여 의병군이 승리하는데 기여한 효사재 이탁영(1541~1610)의 7년(1592년 3월9~1599년 11월) 기록의 정만록(征蠻錄) 등 여러 자료가 많이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의 대스타 이순신과 서애 유성룡의 난중일기와 징비록이 있는데, 난중일기는 7년(1592년 1월1일~1598년 11월17일)간 총 2천539일간에 진중내외의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인데, 946일이 빠져있어(정만록은 10일 빠졌다) 한계가 있다. 징비록도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전쟁의 참상을 회고하고 반성하며 뒷날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녹화방송이라면, 앞의 기록들은 전쟁의 현장에서의 직접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것이라 생방송 같아 더욱 실감난다.정만록 기록 중에 차마 눈뜨고 못 볼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상주에 살던 사부(師傅)인 하락(河洛)은 영남의 명사인데 왜적과 싸우다 대부인을 모시고 처와 자부와 함께 피난 중에 왜적에 잡히어 부자를 죽이고 자부를 보리밭으로 끌고 가서 10여 명의 적이 욕을 보이고는 놓아주었는데 목을 매어 죽었다.(1592년 7월 2일) “여자 하나를 붙잡으면 부자형제를 가리지 않고 30~40명이 서로 윤간하여 죽게 한다. 서책을 찢어서 더러운 것을 닦는다 하며, 장독에다 오줌 누어 사람에게 먹도록 한다니 그 소행을 어찌 말로 다하랴…. 몸이 늙음을 원망하며 통곡할 뿐이다.(1592년 7월 7일) “호남 미녀가 많이 포로로 잡혀왔는데 애걸하여도 불태워 죽였다. 하니, 참혹하여 들을 수가 없다.(1592년 8월 2일)수은간양록에는 “적선 수천 척의 배 안에는 우리나라 남녀가 태반이나 되고 바닷가에는 시체가 너저분하게 쌓였다. 울음소리가 하늘에 사무치고…. 도무지 살고 싶지 않았다…. 나를 버리고 달아난 노비는 모두 살았건만 주인을 못내 잊어 차마 가지 못한 자는 적에게 온통 살해되다니…. 나의 둘째형의 아들 가련이는 겨우 여덟 살인데 목이 심히 타서 짠물을 마시고 구토설사를 하다가 병이 생겨 누워있는데 왜놈이 별안간 달려들어 그를 바다에 내던졌다.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오랫동안 그치지 않았다.(1598년 9월 24일)정유재란때 도요토미는 “사람마다 귀는 둘이 있어도 코는 하나이니 너희들은 조선인의 코를 베어 바침으로써 수급(머리)을 대신할지어다”이리하여 왜군 한 놈이 코 한 되씩을 소금으로 절여서 수길에게 보냈는데 보내온 코는 수길의 검열을 거친 다음 한데 모아서…. 묻었더니 하나의 구릉을 이루었다. 그렇게 한지 일 년도 안 되어 소금으로 제놈(수길)의 배때기를 절였다.일본승려 게이넨(慶念)의 기록에는 ”일본 병사들은 포악하고 잔인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베어죽이거나 포로로 잡아서 사슬로 목을 묶어 끌고 갔다. 부모는 자식을 찾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울부짖는 그 광경은 ‘지옥도’에서도 그려져 있지 않은 비참한 것이었다…. 오늘도 한 병사는 손을 모아 애원하는 조선인 부모를 그 자리에서 칼로 베어 버리고 아이는 끌고 갔다.이처럼 전쟁은 참혹한 것이다. 그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은 대략 6만~10만명(일본 학자들은 2만~5만), 돌아온 자는 8천482명(한국학자 이상희) 정도다. 부모형제 죽음을 목격하고 불탄 고향산천을 두고 끌려와 농촌이나 무사집의 노비로 비참한 생활을 하며 원한 맺힌 한을 품고 죽어갔다.안동 봉정사 가는 서후면 길옆에 학봉종택이 있다. 학봉종택 높은 솟을대문을 지나자 고택에 서양식 별장같이 잔디와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는데 고즈넉하고 편안한 고택의 맛은 흐르지 않고 도식적인 관공서 건물 같다. 아마도 학봉이 중국에 사절로 갔다 와서 중국풍울 가미해서 그럴 것이다. 학봉이 살았던 이 종택은 원래 이 자리였으나 침수가 잦아 오른쪽 가까이 소계서당으로 학봉의 8세손 광찬이 1762년에 옮겼다가 1964년에 다시 옮겨온 것이다. 예전부터 많이 왔던 곳이라 잠시 둘러보고 학봉 유물을 모아놓은 운장각으로 갔다. 학봉의 초상화를 오랫동안 보면서 학봉을 생각했다. 여러 기록과 초상화에 나타난 학봉은 문무를 겸비한 원칙에 충실한 대쪽 같은 선비였다. 이 초상화를 그린 화가 김호석 친구에게 전화하여 학봉의 초상화가 없는데 어떤 기준으로 그렸나 물어보니 문중의 대표적인 20명의 얼굴사진을 조합하여 그렸는데 모두 자기와 닮았다고 하더라며 초상화 봉안할 때 초헌관으로 참석했단다.학봉이 당파적이든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하던 전쟁만큼 큰 일이 없는데 잘못된 허위보고로 7년 동안 온 나라가 찢어지는 고통을 당한 죄 값은 우리 민족에게 영원히 씻을 수 없다. 공자도 하늘이 용서 못할 죄는 지어서는 안 된다(獲在於天 無所禱也)했는데….”/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6-09

예술인 장계향 그리고 소설가 이문열… 문향이 깃든 마을

현대 삶의 조건에서 주거지역은 산지보다 넓은 평지를 선호하지만, 농경사회에서는 산이 있고 냇물이 흐르는 산골이 살기가 더 좋았다. 영양은 높고 낮은 산이 감싸고 맑은 냇물이 흐르면서 바닷가에서도 적당히 떨어져있는 그야말로 현실 속에 무릉도원을 꿈꿀 수 있는 곳이다. 영양은 글자 그대로 영양가 높은 곳이다. 그래서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하자 1640년, 석계 이시명과 장계향은 영해에서 가솔 30여 명을 데리고 이 마을에 정착한다. 그때부터 재령이씨 집성촌이 된다. 이런 연유로 주곡고택과 유우당고택을 석보 주남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온다.#. 문화의 향기가 스며있는 두들마을 가는 길영덕, 청송 진보를 거쳐 영양가는 길에 접어들었다. 신록이 자신의 존재를 마음껏 뽐내고 있는데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가 일상화되어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고 어쩌다 차들만 간혹 만날 뿐이다. 아마 조선시대의 풍경이 이랬을 것이다. 석보로 접어들자 길옆에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동상이 길손에게 조선 독립을 외치고 있었다. 남자현(1872~1933)은 어릴 때 한학을 공부하고 남편 김영주가 의병으로 1896년 청송진보전투에서 전사하자 민족 계몽운동 하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유복자 김성삼을 데리고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그의 생가 터에 동상과 순국비와 집을 지어놓았지만 관리가 허술하여 마당에는 징그러운 뱀이 가까이 갈 때까지도 떠날 줄을 모르고, 청마루에는 오래전에 죽은 새가 쓰러져 있었다. 이상하게도 독립운동한 집이나 유적지에는 엉망으로 관리할까.두들마을 전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외곽부터 찬찬히 둘러보았다. ‘두들’의 뜻대로 언덕을 끼고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제일위의 산기슭에 음식디미방 문화체험원은 한옥으로 잘 지었지만, 어느 왕조의 궁궐 같았다. 휼륭한 사람 선양하고 알리는 것은 중요하지만 대한민국 곳곳에 관광객 유치란 역사적 사명을 띠고 대규모위락시설과 건물들을 짓는다. 인구는 줄고, 관이 동원하지 않으면 대규모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시대는 지났다. 이렇게 큰 건물 지어놓고 관리는 어떻게 할까. 걱정스럽다.지금은 개인의 브랜드화에다 혼밥, 혼술에 홀로여행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더구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화될 조짐이다. 문화체험원 아래는 옮겨온 주곡고택이 초라하게 웅크리고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다.#. 옮겨온 주곡고택과 유우정고택주곡고택은 석보 주남리에 유학자 이도(1636~1712)가 지은 집을 1830년에 이곳에 옮겨지은 집이다. 이 고택도 따뜻한 남부 지방의 안채와 사랑채가 분리되어있는 개방형이 아니라 추운 북부지방의 환경에 따라 사랑채 안채가 서로 스크램 짜듯이 부둥켜안고 있는 ‘ㅁ’자형(뜰집형)의 집이다. 사람이 살지 않으니 윤기 사라진 고택이 더욱 스산했으나 집 앞에 하얀 찔레꽃 향기가 일말의 생기를 넣어주고 있다.두들마을 중간에 석계고택과 장계향 유허비가 있고 연이어 여러 고택들이 있는데 음식디미방 전시관, 교육관, 예절관, 유물전시관, 체험관 등 온통 마을 곳곳에 너무 많이 해놓았다. 마을 왼쪽 끝에는 석보 주남리에 이상도(1773~1835)가 죽기 2년 전인 1833년에 지은 집을 후손 이돈호(1869~1942)가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처음 건립한 이병도의 장남 이기찬의 호가 유우당이라 그대로 당호로 하였다. 이 집을 옮긴 이돈호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한 파리장서사건에 가담한다. 이 유우당에서 태어난 조카 이병각(1910~1941)은 청년, 민중운동을 한 항일시인으로 시와 산문, 평론을 넘나드는 작품 활동을 하다가 일찍 요절하여 빛을 발하지 못했다. 병든 몸으로 직접 한지에다 붓으로 쓴 시집 첫 장에 ‘가장 괴로운 시대에 나를 나허주신 어머님께 드리노라’며 괴로운 식민지 시대를 대변한다.“동풍이 불면 호수는 외로워지고/ 나의 소녀는 나비처럼 지쳐진답니다./ ‘연모(戀慕)’ 한 구절과 /밤은 외로운 창에 기대여/ 차운 달과 함께 새움니다.” 회야곡(悔夜曲) 한 구절로 그의 시상을 떠올려본다.그 옆에 붙어있는 석간고택은 석계 이시명과 장계향의 넷째 아들 항재 이승일(1631~1698)의 7세손 좌해 이수영(1809~1892)의 집이다. 이수영의 5세손인 소설가 이문열이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을 보냈던 집이기도 하다. 석간고택 앞에는 석천서당이 단단하고 힘 있게 버티고 있었다. 석계 이시명이 입향하여 초가로 강학을 하던 곳인데 후손과 유림이 중건하여 재령이씨 집성촌인 이 두들 마을의 문필이 이어지게 하여 이문열 같은 우뚝한 소설가가 나온다. 안동의 전주유씨 무실파 유씨들도 기양서당의 교육이 문필이 끊어지지 않는 맥이 이어져 유안진 시인도 이런 자양분을 받고 자란 덕분이다.#. 광제원과 원리(두들)마을과 일그러진 영웅 이문열우리나라 의술이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오른 시발점은 1885년 널리 은혜를 베푼다는 광혜원이고, 국민의 질병치료목적으로 1900년에 설립한 국립병원이 광제원이다. 그래서 이 마을도 조선시대 광제원이 있었다고 원리마을이다. 석계는 교육으로, 장계향은 빈민들과 어려운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광제원이 생기기 260년(1640년 입향)전부터 그 역할을 수행했다. 신사임당은 율곡 같은 천재를 낳았지만, 자아가 뚜렷한 자유분방한 예술가였는데 국가에서 장려한 현모양처라면, 시댁과 시가 그리고 헐벗고 굶주린 이웃들에게 베푼 진정한 현모양처이다. 공자도 인(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 사랑의 첫 번째 조건은 무엇일까. 상대방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 출발해야 된다.검소한 건물의 석계고택 위에는 80~90년대 소설로서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이문열의 집필실 겸 광산문학연구소를 둘러보았다. 너무 크고 웅장한 건물을 둘러보고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베스트셀러 덕분에 엄청난 인쇄가 들어와 고향 문중 땅을 사서 한국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문학도를 양성하기 위하여 문학연구소를 개인 사비로 한옥을 지었지만 지금은 인쇄수입이 거의 없는 상태라 유지하지 못하는 유령의 집이 되어버렸다. 뜻은 좋았으나 작가들 대부분은 공간이 작아도 자신만의 방에서 우주적인 무한한 상상력과 집필욕구가 생기는 것이지 이렇게 ‘ㅁ’자로 붙어있는 큰 건물은 세미나용이지 창작의 산실은 아니다. 큰 세미나용 1채 정도를 짓고 나머지는 방 하나 청마루 한 칸, 부엌과 화장실 공간의 원룸식 조그마한 한옥 한 채씩 지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흔히 가수가 자신의 노래 가사 대로 산다는 말이 있다. 차중광은 27살에 낙엽 따라 가버렸고, 권혜경은 ‘산장의 여인’노래대로 쓸쓸히 죽었고, 곡예사의 첫사랑같이 줄을 타며 잠시 행복하다가 50살에 가버린 박경애, 반면에 무명가수에서 ‘쨍하고 해뜰 날’로 쨍한 송대관도 있다. 인기 작가 이문열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책 제목같이 추락하는 일그러진 영웅이 되어버렸다. 2001년 지역감정, 이념, 색깔론을 편향된 극우적인 발언으로 ‘이문열돕기운동본부’에서 전국에서 모은 733권을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의 이문열의 작업실 ‘부악문원’ 앞에 가서 “반납 받지 않으면 고물상에 10원에 팔아 버리겠습니다.”의 고통스런 아픔을 겪어야 했다.현대의 수많은 베스트셀러들이 고전으로 후세까지 남아있을 책들은 있을까.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은 70년대,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는 80년대에 감성에 어울리는 소설들이다. 대중의 인기란 물거품 같은 것이다. 예전에는 ‘권력의 프레임’으로 걸출한 영웅이나 카리스마적인 최고의 지도자가 그 시대를 끌어갔다면, 다원화된 지금은 ‘평등의 프레임’으로 각자 개인의 영웅시대가 되었다.한국최고의 인기작가 반열에 오른 대중작가였고, 한국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명이었지만, 대중에게 잊혀져가는 것은 왜일까. 장편 30편, 중단편 60편이 넘고,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쏟아냈다. 이문열 작가의 말대로 “모친이 임신했을 때 좌익 활동을 하는 부친을 도와 전단지를 돌리다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갔다. 부친이 “배 속에서부터 치열하게 싸우는 투사라며 이열이라고 이름 지었다. 좌익투사이름을 타고난 내가 ‘보수우파골통’소리를 듣는 상황이다.”고 했다.두들마을은 차와 관광객 위주로 꾸미다보니 옛 삶의 애환이 묻어나는 골목길도 없다. 너무 많은 장계향 체험관을 지어 활용도가 떨어져 2002년 19억원 들여 지은 장계향 예절관과 유물관을 이문열의 광산문학연구소와 합쳐 경북도와 영양군이 25억원 들여 ‘이문열 문학관’을 짓는다.건축가 김수근은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것은 넓을수록 좋다.“고 했고 근대건축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Miss Van der Roeh)는 “덜 장식적이어야 더 아름답다.”라고 건축미학의 역설을 설파했다. 우리시대 “모든 건축은 쇼핑센터가 되었다.”고 네덜란드 건축가 렘 클하스의 말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

2020-06-02

최초 한글요리서 ‘음식디미방’ 장계향이 태어나 자란 경당종택

댐으로 마을이 수몰되고 대규모 공단으로 마을이 사라질 때 옮기는 고택이 많지만 예전부터 우리의 한옥집들은 필요에 따라 많이 옮겨지었다. 안동의 경당 종택도 인근 마을에서 옮겨지은 것이다. 집은 누가 살았고 어떤 사람이 태어난 것도 중요하다. 경당종택은 퇴계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경당 장흥효가 나고 살았고, 경당의 무남독녀 딸로 최초의 한글 요리서 ‘음식디미방’의 주인공 장계향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 시대를 뛰어넘는 아버지와 딸의 파격적인 아름다움세상의 모든 아버지들 대부분은 딸을 사랑하고 아낀다. 그러나 시대의 상황이 남존여비. 남녀유별이 정치, 사회의 이데올로기로 굳혀진 조선시대에 딸에게 한문을 가르친다는 것은 깨어있는 선각자가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다. 경당 장흥효는(1564~1633)는 12살 때 이웃의 학봉 김성일에게 학문을 배운다. 어릴 때부터 행동이 단정하고 침착하여 꼭 필요한 말만 했다는 심지 곧은 내향형의 선비기질을 타고났다. 그는 배움에 그치지 않고 이치를 탐구하며 깊게 사유하고 실천하는 선비였다. 학봉 뿐 아니라 서애 유성룡과 한강 정구에게 사숙했으니 세분 모두 퇴계의 수제자들이다. 뿌리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세분의 장점을 흡수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마침내 퇴계에서 학봉으로 이어진 맥을 받아 제자이며 사위가 되는 석계 이시명과 그의 아들 갈암 이현일에게 고스란히 전해준 훌륭한 학자이자 교육자이다. 부인은 봉화 닭실의 권씨 부인으로 18년 만에 낳은 딸이 장계향(1598~1680)이다. 그가 태어날 때는 온 조선이 쑥밭이 되어버린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7년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시작되는 5일 뒤에 태어난다. 권씨 부인은 병약하여 더이상 아이를 낳지 못해 장계향은 무남독녀가 된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아버지가 글을 가르치면 뜻을 이해하고 문학적인 감수성이 뛰어나 이웃마을의 백발의 노인이 군대 떠나는 아들 때문에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백발의 늙은이가 병이 들어/ 서산의 해처럼 위급하네/ 두 손 모아 기도하지만/ 하늘은 어찌하여 응답이 없나./ 이처럼 가슴 찡한 ‘학발시(鶴髮詩)’를 짓는다. 비 내리는 한옥은 선경의 경지를 품어낸다. 계향은 내리는 비를 보고 /창밖에 소소소 내리는 비/ 소소소 소리가 자연스럽네/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있으니/ 내 마음 또한 자연스럽네./ 감수성을 듬뿍 담아 ‘소소음(簫簫音)’을 노래한다.황진이가 자신의 신분의 한계를 알고는 시와 공부를 접고 기생의 길로 갔지만, 계향은 안동 장씨 학자의 노른자 집안이었지만, 여자의 한계는 있었다. 15살의 계향도 여자는 집안일을 해야 하고, 시를 짓고 글을 쓰는 것은 여자가 할 일이 아닌 시대의 한계를 알고 글과 시를 접고 밥하고 음식 하는 현모양처의 길을 들어선다. 어머니 친정 안동 권씨의 봉화음식과 안동의 음식이 융합된 음씩 솜씨가 무르익은 19살에 아버지의 제자 석계 이시명(1590~1674)에게 시집간다. 석계는 임진란 때 안동, 예안 의병장으로 순국한 광산김씨 김해의 딸이 1남 1녀를 낳고 죽은 상태라 계향은 재처로 들어간다. 아무리 아끼는 제자라도 무남독녀 외동딸을 아이가 둘에다 8살 많은 기혼자의 재처로 보내는 아버지도 대단하다. 물론 이런 제약을 뛰어넘는 석계의 학문과 인간 됨됨이가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선택은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학문은 사위 석계와 외손 갈암 이현일(1627~1704)에게 이어졌고, 계향과 석계는 죽을 때까지 서로 귀한 손님을 대하듯 공경하며 살았다. 부부가 서로 공경함은 시대와 상관없이 지켜야할 중요한 덕목이다.1622년, 어머니 권씨가 죽자 홀로 남은 아버지를 돌보기 위하여 친정에 머물며 아버지를 보살피고 대를 잇기 위해 재혼을 권유한다. 딸 계향의 권유에 60살의 아버지 경당은 안동 권씨와 재혼하여 3남 1녀를 낳아 가문의 대를 이어간다. 새엄마는 계향보다 10살이나 어린 15살이라 친정의 허락을 받아 3년간 친정집에 머물며 어린 새어머니에게 친정의 살림살이를 가르친다. 이때 어린 아들들을 데리고 와서 외할아버지께 배우도록 하여 퇴계 학맥을 잇는 대학자로 키워낸다.1933년 아버지가 죽자 3년 상을 끝내고 8살의 이복동생을 데리고 와서 학문을 가르친다. 조금 뒤에는 새어머니와 3남매를 영해로 모시고 와서 아버지 제사와 혼인까지 챙겨준다.대학자 아버지 경당과 현모양처의 딸 계향은 윤리를 뛰어넘는 아름답고도 인간적이고 파격적인 사랑이다.#. 경당과 장계향의 흔적을 찾아서안동 서후면 봉정사 가는 길에 경당종택을 찾았다. 추운 북부지방 안동의 집들같이 사방으로 감싼 ‘ㅁ’자형의 고택이고 경당종택의 편액이 유난히 큰 글씨였다. 이 사랑채에서 결혼하고도 18년 동안 자식 없이 학문에 매진한 경당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외동딸 계향이 총명했지만 아들 없는 아쉬움을 숙명으로 받아들였을 경당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그럴수록 학문에 더 깊이 빠져들었을 것이다. 아들로 대를 잇고 출세하는 속세적인 시대상황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또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붕괴 직전의 불행은 백성의 삶에 파탄으로 이어지고 학문과 현실사이에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 책상위에 ‘대통령’을 붙이고 공부했다더만 경당은 공경할 ‘경(敬)’을 책상 위에 써 붙이고 생활의 신조로 삼았다.장계향도 병약한 어머니 때문에 얼마나 마음 아팠을까. 200리 떨어진 영해로 시집갔어도 그리고 홀로된 아버지를 위하여 돌봐주면서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한다.지금의 고택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경당과 장계향이 태어난, 옮기기 전의 춘파마을의 광풍정 정자로 갔다. 옛 정자는 아름답다. 좋은 경치가 필수적이니 자연 속에서 자연을 관조할 수 있는 것이 정자다. 원래 경당 고택이 이 정자 옆에 있었고 이 정자는 경당이 거의 말년(1630년대)에 초당을 지어 문인들에게 강학하던 곳이다. 지금의 기와정자는 지역의 유림들이 1838년에 개축한 것이다. 광풍정(光風亭) 뒤에는 큰 바위 덩어리가 흔들림 없는 경당의 마음같이 버티고 있다. 그 바위에 능주 목사를 지낸 김진하(1793~1850)가 세로로 남긴 ‘경당장선생제월대’ 새겨놓은 글씨가 있다. 그 바위 위에 제월대(霽月臺) 건물은 멀리서 보면 괜찮아도 옆에서 보면 건물의 짜임새도 없고 격도 떨어지는 건물이라 바위를 모독했다. 상량을 보니 단기 4319년(1986) 건립한 졸작이었다. 왜 우리시대 짓는 건물들은 예전 고택보다 못할까.장계향이 마지막 생을 다한 영양 석보 두들마을을 가는 길에 근처의 의성 김씨 학봉종택을 보고 조금아래 원주 변씨 간재종택으로 갔다. 어깨 힘이 잔뜩 들어간 학봉종택을 보다 낭만적인 아름다움이 흐르는 간재종택을 보니 답답했던 마음에 왠지 모를 기쁨이 흘렀다. 오늘 보는 고택들은 예전에 봉정사 가는 길에 많이도 들렸던 고택들이다. 마침 잔잔한 맑은 미소 머금은 소녀 같은 주영숙 종부와 착하고 선량하게 보이는 변성렬 종손과 잠시 차 한 잔에 의미 있는 대화가 행복했다.#. 안동의 신사임당, 영광과 상처, 그리고 죽음누구나 한 평생 살면서 슬픔과 기쁨도 있고 말 못할 사연과 고통도 있다. 또 영광이 있으면 상처도 있다. 장계향을 현모양처의 대명사 신사임당(1504~1551)과 비교해서 안동의 신사임당이라고 한다. 장계향이 무남독녀였다면 신사임당은 아들 없는 여형제만 있었고, 두 분 다 시, 서, 화에 시경에 사서삼경까지 익힌 유학이 스며있는 교양인이었다. 묘하게도 19살에 결혼하는 것과 친정부모 각별히 챙기는 것은 같다. 신사임당이 7자녀 중에 걸출한 율곡 이이(1536~1583)를 낳았다면, 장계향은 7남 3녀(1남1녀는 전처 소생) 중 갈암 이현일을 낳았다. 수명은 신사임당과 율곡 모두 48살에 단명하였다. 이에 비해 장계향은 83살, 갈암도 78살까지 장수하며 살았다. 신사임당이 결혼할 때 축첩이 관례였고 제도화되었지만 첩을 안 두기로 약조했는데 남편 이원수는 딴 살림 차린다. 신사임당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인데다 남편과 격이 맞지 않아 괴로운 나날이 쌓여 병이 들어 스트레스로 죽었을 것이다. 허난설헌이 남편 김성립보다 격이 높아 비극의 생을 마쳤듯이…. 이에 비해 장계향은 서로 아버지에게 학문을 익혀 남편 석계와 격이 맞았을 것이다.1640년 인량에 살던 석계와 장계향은 30여 명의 식솔을 데리고 영양 석보 두들마을에 정착한다. 13년 사는 동안 큰 흉년들고 전염병에 시어머니 죽고, 큰딸은 친정 와서 아이 낳다 죽고. 둘째딸은 친정에 어머님 뵈러 왔다가 죽는 불상사에 더 깊은 영양 수비면 산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아이들 장래를 위하여 안동으로 옮기고 마지막은 두들마을로 돌아와 친정과 시댁의 온갖 길흉사를 치루고 ‘음식디미방’책 쓰고 죽는다. 두들마을은 온통 장계향의 음식테마 건물이 들어차 있다. 석계고택은 검소하게 살다 숨을 거둔 장계향 다운 소박하고 퇴락한 건물이었지만, 지금의 장계향 테마 건물들은 궁전 같아 장계향이 웃을까, 슬퍼할까./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

2020-05-26

영남학파 거두 갈암 이현일 어머니는 ‘여중군자’ 장계향

물은 이념을 초월하여 국경을 넘고 인위적인 행정구역을 무인지경으로 거침없이 달려간다. 산이 막히면 돌고 돌아 산을 배려해주고, 절벽에 닿으면 몸으로 부딪치되 되돌아 나오는 수용과 공존을 반복하면서 유유히 흘러간다. 그래서 안동 임하댐으로 안동 지역만 수몰된 것이 아니라 이웃 청송 진보면 일부도 수몰된다. 갈암 이현일 종택도 청송 진보 광덕마을에서 영덕 창수면 인량마을로 1992년 옮겨 짓는다. 유서 깊은 종택을 옮길 때는 함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 여건을 고려한다. 갈암이 인량마을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고 태실을 묻은 곳이라 태생적 인연이 되는 고향으로 옮겨온 것이다.# 영해는 어떤 곳인가지금은 행정구역이 나누어지고 한미한 읍으로 전락했지만 고려시대는 동해안에서 가장 큰 도시로 조선시대까지 영해부로 이웃 청송 영양까지 도호부사가 관장하던 곳이다. 우리시대 영덕 하면 대게가 떠오르지만 영덕(영해도호부)은 넓은 벌판의 농산물과 풍부한 해산물이 경제적 기반으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라 정계의 실세들이 거쳐간 곳이다. 송나라 주희의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한 안향, 영남학파의 종장 점필제 김종직이 영해부사를 거쳐 갔다.물산이 풍부하다는 것은 좋은 면도 있지만, 수탈의 원인이 되어 탐관오리들은 중앙으로 진상하면서 자신도 치부하여 백성은 고달파진다, 영해부사 이정은 자신의 생일잔치에 초대해놓고 떡국 한 그릇에 30금을 받는 탐관의 소굴이었다.우리 역사에 역성혁명이나 쿠데타는 위로부터의 권력싸움이라면 밑으로부터의 혁명인 동학농민혁명(1894년)의 전초전이 영해서 일어난다. 이 지구상에서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고 표방한 동학만큼 인간을 성스럽게 대한 것은 없을 것이다. 동학교도 이필제는 영해에 있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찾아와 최제우가 순교한 3월 10일(음력)을 기해 1871년(고종 8년) 교주 신원과 반봉건투쟁을 외치며 전국의 동학교도 600여 명이 영해부를 습격하여 부사 이정을 “…. 정사를 잘못하여 세상을 어지럽혔고, 백성을 학대하고 재물을 탐한 죄.”를 꾸짖었지만 끝내 반성하지 않다가 목이 잘렸다. 관아의 돈 130냥을 영해읍내 5개동에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관의 보복은 가혹했다. 90명은 잡혀죽고 20명이 귀양 가고 60여 명이 수배 당했다. 이필제는 능지처참 당했고 부인과 가족, 친족 모두 죽였다. 이처럼 영해지방은 봉기 이후 대대적인 관의 탄압을 받지만 그들의 저항정신은 23년 뒤(19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졌고, 1896년 의병운동 때 태백산 호랑이로 통하는 평민 의병장 신돌석 장군을 낳았고, 1919년 영해 독립만세운동으로 이어갔다.#. 유서 깊은 영덕 인량 전통테마마을영덕 강구 지나 축산면을 들어서자 신돌석 장군이 생각나고, 수창면의 인량마을 동쪽의 괴시리 전통마을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이었던 목은 이색이 태어났고, 인량마을은 고려 개혁정치의 상징 공민왕의 스승이었던 나옹 왕사와 퇴계 학맥을 이은 갈암 이현일 등이 태어난 유서 깊은 고을이다. 인량마을 입구에 들어가자 갑자기 불어오는 세찬바람에 익어가는 보리가 이리 저리 몸부림친다. 화가 이숙자의 보리밭 그림이 연상되면서 문둥(한센병) 시인 한하운의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닐니리…./ 나환자 이면서 인간적 고통의 고독을 노래한 슬픈 ‘보리피리’시가 떠올랐다. 인량 마을 중간에 체험학교에는 사람 하나 없는 마당에 당나귀 한 마리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다.체험장 좌,우로 인량2리 1리로 나누어진다. 1리에는 용암종택이 앞에 있고 오른쪽 뒤에 있는 삼백당은 영천이씨 농암 이현보(1467~1555)의 넷째아들로 강원도 관찰사 했던 이중량(1504~1582)종택이다. 넓은 공간에 큰 규모이고, 사람 없는 고택에 고양이 한 마리가 안채 대문 구멍에 얼굴을 내밀고 길손을 빤히 보고 있다. 왼쪽 위에는 2층 누각의 평범한 처인당 고택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2리에는 마을도 넓고 고택들이 여기 저기 많이 몰려있다. 마을 중간에는 함양박씨 3형제(의연, 의열, 의훈)가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헌신한 가슴 찡한 사적비가 마을의 긍지를 높인다. 조금 뒤에는 강파 권상임의 고택이 청백리다운 담백한 낭만이 흘러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는(儉而不陋 華而不侈) 말이 떠올라 내 마음도 즐겁다. 강파 고택 뒤에는 1450년대 지은 안동 권씨 부정공파 영해 입향조 오봉 권책의 종택인데 200여 년 뒤에 불타고 다시 지은 것이다. 좌측에 백산정은 우리 시대 정신은 사라지고 단가대로 업자가 지은 유치찬란한 한옥이라 눈과 마음이 괴롭다. 아마도 문중에서 돈 각출하여 지었을 것이다.영해지역에서 많은 공로를 세웠다는 만괴헌 신재수 고택에 들어서자 마음이 몹시도 아팠다. 잘 정리하면 매력적인 집인데 온갖 잡다한 물건들은 어지럽게 놓여있고 사랑채 겸 정자는 기둥도 기울어졌다. 아, 그때 안채에서 몸과 다리가 불편한 어르신이 힘겹게 나오시길래 차마 눈을 마주치기가 송구하여 말없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나왔다. 제일 위에 자리 잡은 재령이씨 영해 입향조 이애의 충효당 종택은 인량 마을에서 전망은 가장 좋았다. 마침 서울 살다가 10년 전부터 충효당에 있다는 파종손은 “한 10년 사니까 전문 셰프 되었다.”며 맑게 웃는다. 나오면서 이름을 묻자 웃으면서 “몽룡입니다. 아니 이몽룡, 아직도 춘향이는 기다리고 있답니다.” 한 바탕 웃으면서 나왔다.#. 갈암 이현일과 종택사람의 일생은 시대에 따라 좌우되고 집안의 환경은 인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고조부 이애는 영해로 장가들어 인량마을 입향조가 된 인연으로 갈암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시명의 첫 부인은 임진왜란 때 순국한 광산김씨 김해의 따님이고 둘째 부인이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한 경당 장흥효의 무남독녀 장계향이다. 장계향은 우리나라 최초의 요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안동의 신사임당으로 칭송받는다. 여기서 난 갈암은 외할아버지와 아버지 학문을 전수받아 퇴계학의 적통을 이어받는다. 산림처사로 학문에 매진하던 갈암은 남인의 거두 미수 허목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가 이조판서까지 오른다. 갈암의 시대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한 인조때부터 숙종의 시기인데 숙종의 인현왕후(서인)와 장희빈(남인)의 붕당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갑술옥사 때 68세의 나이에 홍원으로 귀양 간다. 조선시대 학문의 중심은 주자학이었다. 연구하는 입장에 따라 율곡 학통을 이어받은 기호학파는 김장생, 조헌, 송시열, 권상하로 이어진 서인이었다. 김종직→ 이언적→ 퇴계로 이어진 영남학파는→학봉→경당→갈암은 다시→대산→정재로 어어준 영남 남인의 종장이 된다.갈암은 학문을 이룩한 경지도 크고 뚜렷하지만 필자가 주목하고 좋아하는 것은 호를 고상하지 않은 칡뿌리 갈(葛)자를 쓴 것과 해박한 역사지식에 자연과 벗하되 현실을 깊이 사유한 문장과 시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의 ‘수오재기’는 자신을 지키지 못한 회한을 가슴 뭉클한 반성의 문장이라면, 갈암 이현일의 ‘갈암기’도 자신을 갈고닦아 칡처럼 다양한 용도로 세상에 쓰임을 각오하는 훌륭한 문장이다. ‘갈암기’도 칡을 빗대어 자신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칡이란 재질은 질기고 깨끗하며 마디는 길고 부드러워서 꼬아서 새끼를 만들 수도 있고 짜서 베를 만들 수도 있으며 두건을 만들기도 좋고 신발을 만들기도 좋으니…. 이제 내가 칡으로 만든 갈건으로 술을 거르고 칡으로 만든 신발로 서리를 밟으며 칡으로 만든 베를 몸에 걸침으로서 더위를 막고 칡으로 만든 줄로 지붕을 얽어맴으로써 비바람에 대비한다…. 이에 나의 사사로운 용도를 넉넉히 하고 나의 분수에 맡겨둘 뿐 남에게 도움을 바라지 않으며 순진하고 소박한 천성을 지니고서 그럭저럭 자족한 삶을 살뿐이니 이러한 상태를 극도로 미루어 간다면 거의 갈천씨의 무리일 것이다. 그래서 나의 이름을 삼고 싶은 것으로는 그 의의가 칡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내가 이 때문에 다른 좋은 것들을 다 제쳐놓고 이 칡을 취하였던 것이다…”인량마을 입구에는 무안박씨 영해파 입향조 청어당 종택이 애국지사 박주억 생가에 새로 지어 놓아졌고 옆 뒤에는 인량교회가, 조금 옆에는 청송 진보에서 옮겨온 갈암 종택에 화사한 꽃들이 나그네를 맞이하고 있었다. 새로 지어 놓은 솟을대문은 너무 높아 안채와 어울리지 않는다. 옮겨온 종택은 소박 단정한 지족의 선비 같았고, 잘 관리한 고택에 온갖 꽃들을 잘 가꾸어 놓아 자연을 좋아한 갈암 선생이 흡족해 할 것 같다. 정원 정리하고 있던 종부께 인사드리니 수줍은 미소로 “낫 들고 꼴이 말이 아닙니다.” 하시고 종손께 알리고 식혜와 다식을 내어 오신다. 12대 종손 이원흥님과 퇴계, 학봉과 서애, 호계서원, 병산서원 등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집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곡식이 농부의 발자국 소리 듣고 자란다더만 집과 정원은 손 가는 만큼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마치 미인같이…. /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

2020-05-19

단단하고 내실있고 담백한 맛이 나는 정겨운 고택

#. 구미 해평과 일선리 문화재마을 가는 길안동 임하댐으로 수몰지역인 무실, 박곡, 용계, 한들 마을에서 70여 가구의 대규모로 옮겨온 일선리 마을을 입체적으로 보기 위해 군위군 소보면 시골 산길로 하여 해평으로 들어갔다. 해평(海平),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직역하면 바다 평야다. 내륙이지만 산을 등지고 흘러내리는 물은 습문천이 되어, 기름진 평야를 끼고 유유히 젖줄 되어 흘러가는 낙동강에 온몸을 맡긴다. 두 물줄기가 기름진 충적평야의 옥토를 만들어 주는 곳이라 이름에 걸맞다. 해평에서 일선리 문화재 마을에 가기 전에 길 좌, 우 야트막한 산(낙산고분군)에 가야 및 원삼국시대와 통일신라의 고분 205기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어 오래전부터 토착지배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신라 최초로 눌지왕 2년(418년)에 아도화상이 세운 도리사가 있고, 통일신라시대의 낙산리 3층 석탑이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신라가 쇠약해지는 말기(907년)에 후삼국이 각축을 펼 때 견훤이 일선군과 남쪽 10여 성을 점령하여 후백제가 경상도 북부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936년(고려 태조 19년) 왕건이 선산 알리천에서 최후의 승리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다. 이때 김선(金宣)은 왕건을 도와 큰 공을 세워 일선김씨를 하사받고 이 지역 대표적 가문이 된다.해평면은 지금이야 구미국가공단으로 한적했던 구미에 편입되었지만, 고려시대부터 현으로 독립관청이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해평을 본으로 하는 성씨만 해도 해평 윤씨를 비롯하여 해평 김씨, 해평 손씨, 해평 유씨, 해평 길씨, 해평 전씨 등으로 짐작할 수 있다. 낙산 고분군을 조금 더 가면 길옆에 가슴 찡한 의로운 개 무덤이 있다. 해평에 사는 하급관리였던 김성원(또는 노성원)은 출퇴근도 개와 같이하면서 아낌없이 보살펴 주었다. 어느 날 이웃동네에서 술이 잔뜩 취하여 집으로 오는 도중에 풀밭에 쓰러져 깊이 잠이 들었다. 불이나 주인이 위험에 처하자 강으로 달려가 몸을 적셔 풀밭을 뒹굴어 불길이 잡히자 기진맥진하여 주인 옆에 쓰러져 죽었다. 깨어난 주인은 자신을 위해 온몸으로 불 끄고 죽은 개에 감동을 받아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이와 같은 의로운 개 기록은 많고 임실의 오수에도 이와 비슷하다. 신라 때 김개인(金蓋仁)도 술 취해 잠들고 불이 나자 냇가에 달려가 물 묻힌 개가 방화선으로 불 끄고 죽는다. 이것은 고려 고종(1254년)때 문인 최자의 보한집에 실려 있고, 1973년 교과서에 실려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함부로 개 같은 놈 하면 안 된다. 개보다 못한 놈이 많다. 그 김개인은 죽은 개를 위한 슬픈 견분곡(犬墳曲)을 짓는다.#. 안동에서 해평으로 옮겨온 일선리 문화재마을1987년 임하댐으로 3개군 6개면 41개 동네가 사라졌다. 그중 박실, 무실, 한들, 용계마을 사람들이 고택 문화재와 함께 옮겨왔다. 70가구가 동시에 옮기려면 집터와 농지가 필수적인 조건이라 전주류씨 무실파 문중차원에서 추진위원회가 구성된다. 안동 남후면, 예천 신풍면, 상주 중동면, 구미(당시 선산) 해평면 후보지 중에 해평 낙산리(이주하고 일선리로 바꿈)를 선택했다. 안동과 멀었지만 농지와 집터 확보가 가능했고 학문을 좋아하는 류씨 문중은 이중환이 택리지에 “영남 인재 반은 선산에 있다.(嶺南人才在一善)”라고 하였듯이, 선산은 불사이군의 상징 야은 길재와 영남학파의 종장 김종직과 그의 아버지 김숙자. 의병장 허위 등 안동과 비견될만한 문향이 서려 있는 것에도 한몫했다. 집터 200평~5천10평은 추첨으로 분양받고 농사지을 논 12마지기(1천400평)를 각각 불하받아 조상대대로 살면서 정 들었던 고향을 떠나 낯설은 구미 해평 낙산리에 정착하여 오늘의 일선리 문화재마을을 이루었다.일선리 문화재마을에 들어섰다. 필자는 예전에 이 마을에 와서 바둑판같이 구획해놓아 군 막사나 관공서 관사 같아 실망하고 아쉬웠지만, 다만 옮겨놓은 고택들 하나하나는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관광차 밀려오던 일선리 휴게소는 썰렁하고 그 옆에는 매매를 내놓아 마을의 쇠락을 알린다. 버스 기다리는 할머니 한 분과 잠시 대화했다. 마을이 수몰될 때 있는 사람들은 대구나 도시로 나가고 보상 없이 아무것도 없이 온 사람들이 다 부자 되었단다.젊은이는 나가고 한 사람도 없고 70살 지난 사람이 가장 젊단다. 집터와 농지를 불하받을 때 집터는 1평 6천500원, 논은 1평 3천500원이었는데 있는 사람들은 맞돈(현금의 경상도말)주고 샀고, 없는 사람들은 20~30년 연부로 하여 이제는 전부 다 갚았고, 모두다 부자 되었다고 한 번 더 힘주어 강조하신다. 여기가 안동보다 교통 좋고 병원 가깝고 여건이 좋다 하시면서 79살 나이만 알려주고 이름은 끝내 밝히지 않고 버스에 오르신다.마을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서 뒷산을 오르다 마침 약통 메고 밭일하러 오는 어르신을 만나 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지금 일선리 마을은 산을 깎아 터를 만들고 하천부지를 개간하여 논을 분양했단다. 집터 분양가는 6천원 조금 더했는데 융자는 8~9천원이었다. 전주 류씨 무실파의 70가구에 안동 권씨, 진성이씨, 의성김씨 타성 몇 가구가 왔고, 있는 사람들은 안동으로 제일 많이 나가고 대구에도 많이 갔다 하신다. 고향 생각 나지 않으시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하룻밤 자고 나면 생각나 1년에 서너 번은 안동 갔는데 차차 고향 생각이 멀어지고, 10년 지나서는 긴요한 일 아니면 가지 않습니다.”33년 지난 지금은 어떠십니까? “생각이야 간혹 나지만 모든 여건과 농사짓기가 안동보다 좋고, 여기 선산사람들은 우리를‘안동 산중 사람’이라고 놀려도 우리를 양반대접 해줘서 고맙다”하신다. 그 대신 밭이 귀해 산비탈 쪼아서 조금 하고 이 뒷산도 국유지였는데 군수에게 부탁하여 문중에서 산 것이라 했다. 아들딸 4남매 객지에 나가고 아내와 행복하게 농사일 하며 사시는 모습 보니 성자 같아 보였고, 대화 내내 웃음 머금은 온화한 미소는 진정 아름다운 이 시대 양반을 뵌 것 같아 겸손해지고 마음이 행복했다. 그리고 바로 앞에 흉물처럼 짓다 만 현대식 건물을 물어보았다. “짓다가 부도가 났고, 좀 옳찮은 사람인데, 사기가 농후한 사람입니다.”안동 앙반 다운 말씀이었다.#. 내려다본 구미와 일선리 고택들드론 없이 내려다본 사진 찍으려면 발품을 팔아 산 위를 올라야 된다. 신록의 좁은 산 오솔길은 정겨웠지만 한참을 올라야 했다. 이윽고 경주 남산모양으로 큰 바위 여러 개가 집단으로 엉켜있어 기뻤다. 여러 바위 덩어리 중 평평한 큰 바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듯 반가웠고 고마웠다. 아래를 내려다본 풍경은 가히 일품이었다. 왼쪽 저 멀리는 구미 금오산이 옹골차게 중심을 잡아준다. 오른쪽은 선산이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에 평화로움을 맡긴다. 발아래 일선리 마을이 질서 정연하게 있고, 왼편에는 해평 들판의 옥토가 풍요롭게 누워있는 기막힌 장면을 연출한다. 갈 길 바쁜 나그네는 배고픔도 잊은 채 한참을 서성거리다 내려와 옮겨온 고택들을 둘러보았다. 고택 하나하나 다양하여 온갖 사연과 애환이 있겠지만 전주 류씨 무실파 고택들 특징은 외유내강의 선비 같은 맛이나 화려하거나 큰 건물 보다 단단하고 내실있고 담백한 맛이 나 정겨웠다.경사진 마을의 제일 위에는 옮겨온 고택들인데 서로 형제같이 붙어 있다. 우측 위에 동암정은 정면 3칸 원기둥의 단단한 아름다움의 정자였다. 길 건너 용와 고택은 박곡에서 옮겨왔는데 찬찬히 눈 맛을 즐길 수 있었다. 침간정은 건실하게 폐쇄형의 실용적으로 지어 정자 맛은 없었고, 안채는 정면 6칸의 비교적 큰 건물이었다. 제일 중심에 있고 큰 수남위 종택은 임진왜란 전에 지은 건물로 힘과 균형이 어우러진 잘 지은 집이라 박곡의 종택다운 위엄이 있었다.옆에 호고와 정자도 멋 부린 단단한 기교가 넘친다. 임하댁은 높은 단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건물인데 비교적 오래된 고택이 아니기에 크게 권위적으로 지었다. 그러나 집의 짜임새는 알맞게 배치했다. 그 위의 대야정 정자는 난간도 하여 담담한 멋을 부린 아름다운 정자였다.바둑판 같게만 구획하지 않고 자연스런 골목을 만들었다면 아름다운 고택마을이었겠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보는 사람은 객이고 사는 사람들이 만족하고 행복해하니 성공한 이주마을이었다. /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

2020-05-12

물에 잠겨있는 마을 굽어보는 수애당의 당당한 위용

안동댐과 같이 임하댐 물속에도 여러 마을과 집성촌이 있었다. 대부분 그대로 수몰되고 일부고택들만 다른 지역으로 옮겨지었다. 그러나 온갖 사연과 애환이 묻어있는 정겨운 집들과 골목까지 옮겨온 것이 아니기에 그 아련한 향수는 고향 잃은 실향민들의 가슴에 멍들어 있을 것이다. 그중 박곡, 무실(수곡)마을의 전주 류씨 무실 집성촌의 집들 중에 수몰지 근처로 옮겨지은 기양서당, 무실 종택과 수애당, 그리고 강(임하댐) 건너 언덕으로 옮긴 정재 종택을 찾아 나섰다.안동에 8주째 매주 가다 보니 봄을 두 번이나 만끽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남쪽 경주에서 북쪽 안동까지 약 400리 거리의 간격에 1주일 정도 꽃의 개화기 차이 때문이다.#. 조상의 음덕과 집성촌의 사연지금이야 문중보다 개인의 삶과 행복이 더 중요한 시대지만 그래도 조상 중에 큰 벼슬했거나 학식이 뛰어나면 긍지를 가슴에 안고 있다. 안동만 하더라도 진성 이씨들은 벼슬보다 자신을 갈고닦는 수양에 힘쓴 조선 성리학의 거봉 퇴계 이황을, 풍산 유씨들은 국난 극복의 명재상 서애 유성룡으로, 영천 이씨들은 가사문학의 선구자인 농암 이현보로, 고성 이씨들은 독립운동 집안의 석주 이상룡으로, 의성 김씨들은 학봉 김성일로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산다. 전주 류씨 류습의 7대손 류윤성이 서울에 살다 영주의 반남 박씨 사위가 되어 처가살이 와서 낳은 아들 유성은 안동 내앞(천전) 의성김씨 청계 김진의 사위가 처가의 농장이 있는 무실(수곡)에 정착하여 전주 류씨 무실파의 입향조가 된다. 신부의 집에 사는 처가살이 하는 ‘남귀여가혼’은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등살에 친정과 환경이 전혀 다른 시가 댁에 시집살이하듯이, 처가살이하는 신랑은 고향산천과 부모형제와 친구들과 이별하고 처가에 산다는 것은 늘 긴장 속에 살았을 것이다. 실향민들 1세대는 가슴에 한이 있지만 2세대는 다르듯이 처가살이 1세대 지나면 자신의 고향이 되기 때문에 괜찮다. 그래서 1세대 처가살이 분들은 긴장과 스트레스 때문인지 일찍 죽는다. 어린 아이들은 외갓집의 보살핌 속에 성장한다. 그 이어진 친가와 외가의 문중은 후대까지 끈끈한 연결고리가 된다.우리나라 집성촌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양동마을은 처가입향(妻家入鄕)의 대표적인 마을이다. 손소는 풍덕 유씨 류복하의 무남독녀 사위로 처가살이한다. 큰 아들 손백돈은 처가살이하다 요절하고, 둘째아들 우재 손중돈이 청백리가 되어 오늘날 양동마을을 이룬다. 경주 손씨(양동 손씨) 입향조 손소의 사위 이번(1463~1500)도 양동마을에 처가살이하다 37살에 죽는다. 그의 큰아들 이언적은 외삼촌 손중돈에게 학문을 익혀 동방5현으로 영남학파의 종장으로 오늘날 양동 이씨(여강이씨)의 집성촌이 되었다.무실마을의 입향조 류성(1533~1560)도 27살에 어린 아들 두 명 두고 요절한다. 외갓집의 보살핌 속에 자란 큰 아들 기봉 류복기(1555~1617)는 임진왜란 때 최소로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의병과 창녕 화왕산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작은 아들 류복립은 외삼촌 학봉 김성일을 따라 진주성을 지키다가 순절하여 후손이 없다. 그래서 지금 무실파 자손들은 기봉의 후손들이다. 그리고 청계 김진이 쓸려고 한 묘터를 사위 류성이 일찍 죽자 양보한다. 그 터가 명당이라 무실 류씨들이 발복하여 많은 학자와 선비가 나왔다는데 필자는 운명은 자기가 개척하고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이지 풍수의 명당론은 허구라고 생각한다. 조선시대 민사소송의 대부분이 묘지싸움이다. 양동마을의 양동 손씨, 양동 이씨들과 같이 의성 김씨와 무실 류씨들도 이런 끈끈한 인연으로 이어온 것이다. 입향조 유성의 묘터를 준 외가에 고마움으로 의성김씨 청계 김진의 제삿날 제물을 보내준다고 한다.#. 임하댐과 기양서당, 무실 종택과 수애당경주에서 안동 중심부나 서쪽으로 갈 때는 어쩔 수 없이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가지만 동편 임하댐 쪽으로 갈 때는 동해안을 끼고 영덕 청송 진보로 가거나 오늘처럼 청송 길안 쪽으로 가면 낭만이 흐르는 아름다운 길이 된다. 청송 송소 고택 앞을 지나 길안 쪽으로 굽이굽이 시골길은 눈물 나는 정서가 있다. 산기슭에 마을이 오순도순 이어지고 협소한 논에 비탈진 밭의 풍경은 옛 시골의 애환 어린 아련한 풍경이라 더욱 살갑게 다가온다. 용계리에 접어들자 임하댐 맑은 물이 녹색 산천의 풀빛과 어우러져 아득한 태고의 신비로 젖어든다. 15미터 위로 옮겨놓은 용계리 은행나무는 반달 전에 움트지 않던 은행잎이 힘겨워 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싹트고 있었다. ‘도연교’아래 좌, 우의 임하댐은 환상적이라 한참을 보고 또 보았다. 의성김씨 지례파의 낭만과 비극이 교차되는 도연폭포 바위가 머리만 드러내고 있었다.댐 아래에서 옮겨온 기양서당으로 갔다. 세종 때 학자인 회헌 류의손(1398~1450)과 임진왜란 때 의병장 기봉 류복기(1555~1617)의 위폐를 모시고 기봉의 후손들이 수학과 휴식을 위한 서당이다. 강당은 5칸 원기둥에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데 단단하고 야무진 짜임새의 속이 꽉 찬 건물이다. 역락당(亦樂堂)으로 한 것으로 보아서는 학문의 즐거움을 실천하겠다는 무실 류씨들의 마음이 담겨있는 듯하고, 담벼락에 붉은 꽃들은 나그네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근처에 무실 종택과 수애당으로 갔다. 망향정 정자는 튼실하게 잘 지어져 댐 아래 잠겨있는 마을을 굽어보고 긴 수애당이 당당한 위용을 뽐내고 그 위에는 무실 종택이 말없이 있는데 붉은 꽃들이 간간히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무실파 대종택은 1600년 말이나 1700년초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정면 7칸 측면 6칸의 긴 건물이다. 안채를 둘러싼 긴 사랑채 한쪽을 정자형으로 돌출시켜 실용과 멋을 부렸다.#. 수애당의 류효진 종손, 정재종택과 류성호 종손집이란 건물과 터도 중요하지만 누가 사느냐가 더 중요하듯이 집과 사람이 일체감을 보일 때 아름답고 정겨운 것이다. 필자는 문화유산의 폐사지나 고택을 쓸 때 스님을 만나거나 고택주인을 연락해놓고 만나지는 않는다. 당사자를 만나면 장점만 부각하고 단점은 감추고 안면 때문에 객관적으로 쓰기에 제약을 받는다. 혹 인연되어 만나면 인사 정도 하고 만다.먼저 바깥을 쭉 둘러봤다. 길고 큰 건물이라 가정집이라기보다 객사나 관공서 같았다. 수애 류진걸이 1937년에 지은 건물이라 이 시기 일제강점기 때 지은 집 대부분이 크고 곧은 나무를 사용한 특징 때문에 정감이 흐르거나 낭만적인 맛은 없다. 당시에 이런 규모의 집은 큰 갑부라야 가능하다. 집안에서 여러 아궁이에 군불 때고 있기에 대문을 두드리며 불렀다. 잠시 후 문이 열려 류효진님 아닙니까? 그렇습니다만, 저는 경주에서 왔는데 잠시 구경해도 되겠습니까? 아 예, 하면서 다정하게 대청으로 안내한다. 차를 대접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했다. 독립운동 양성학교 협동학교 출신 수애당 지은 류진걸 조부는 토목기술자였는데 돈은 엄청 많았고 만주철도 기술자라 김일성이 안 보내주어 북한에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단다. 건물 하나하나 살펴보니 곧은 나무로 빈틈 없이 잘 지은 집인데 대들보도 곧은 목재라 고택에서 휘어져 꿈틀대는 맛이 풍기는 긴장은 없다. 그래도 옳은 생각을 간직한 한량기질의 낭만이 흐르는 주인장이라 집에 생기가 돈다.수애당 주인장은 한사코 점심 대접하겠다고 따라나서 같이 수곡다리 건너 정재 고택으로 갔다. 외따로 언덕위에서 임하호를 내려다보고 있는 정재 종택은 퇴계 학통을 계승한 정재 류치명(1777~1861)의 고조부 양파 류관현(1692~1764)이 1735년에 지은 건물이다. 안채에 비해서 정면 6칸인 사랑채가 유독 커 보였다. 이 사랑채와 지례예술촌의 지산서당, 오류헌, 수애당 건물을 ‘고 대목’이라는 사람이 지은 집인데 수애당은 제일 마지막에 지은 집으로 미완성이었다는 류성호 종손의 설명에 의문이 풀렸다. 그리고 무실 류씨들의 건물에 낭만이 흐르는 계자난간이 없는 것은 음풍농월을 경계하고 학문하겠다는 뜻이란다.수애당 문정현 종부와 정재 종택의 김영한 종부는 필자가 1박2일 종부, 종손들 특강할 때 인연으로 경주 우리 집 수오재도 왔다갔는데 두 분 다 출타중이고 수애당 종손이 정재 종손과 나를 납치하듯이 진보까지 태워가 점심 대접한다. 피를 맑게 하는 정재 종택의 가양주 ‘송화주’는 종택에 오면 맛보여 주겠다했는데 몇 년 만에 왔지만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종부 없는 종택은 앙꼬없는 찐빵 격이지만 현대의 종부들은 집에서 하염없이 손님만 접대하는 시대는 지났다. 류효진 종손은 안동서 술 사겠다고 한사코 수애당에 자고 가라며 강하게 잡았으나 마음 아프게 정을 뿌리치고 와야 하는 내 마음도 아팠다. /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

2020-05-05

눈 맛을 즐겁게 하는 국탄댁

임하댐으로 의성김씨 지례파 집성촌 지례마을이 수몰되면서 마을위의 산으로 옮겨지은 고택들이 ‘지례예술촌’이라면 나머지 고택들은 각자의 길을 가듯이 여기저기 흩어져 옮겨지어졌다. 그러나 머나먼 타향객지에 떠난 것이 아니라 수구초심(首丘初心), 즉 근본을 잃지 않고 죽어서라도 고향땅에 묻히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의성김씨가 임하에 뿌리내린 내 앞(천전)마을이나 옆 마을로 옮겼다. 국탄댁과 오류헌 고택은 근처 임하마을로, 치헌 고택은 내앞 마을로 옮겨지었다.코로나19 때문에 전국이 우울한데 안동은 큰 산불까지 겹쳐서 가는 마음 찹찹하다.#. 국탄댁과 이우당, 오류헌 고택국탄댁은 1757년 국탄 김시정이 임동면 지례마을에 지었는데 임하댐 건설로 1988년에 이곳 임하마을로 옮겨지은 고택이다. 집의 구조는 보통의 안동 고택들과 같이 사랑채가 앞에서 안채를 감싸고 있는 ‘ㅁ’자 형태로 지은 집이다.나지막한 동산을 끼고 잘 관리되어 예전부터 여기에 있었던 고택 같았고 집도 잘 가꾸어 놓아 눈 맛을 즐겁게 했지만, 굳게 닫힌 대문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여기같이 국가의 세금으로 보존 유지해주는 문화재 고택들은 안채야 사생활로 보호해준다면 최소한 대문은 열어놓아야 된다.저만큼 떨어져있는 오류헌 가는 길에 정자가 일품인 안동 권씨 부정공파 임하지파 이우당 권환의 종택에 갔다. 인조 18년(1640년)에 지은 연륜 쌓인 고택이라 눈 맛을 즐겁게 했다.대문에 들어서자 높은 단을 쌓은 우람한 정자가 앞을 가로막았지만 정자 그 자체가 아름다워 수용할만했다. 평지의 집안에 이렇게 높게 단을 쌓은 정자는 보기 드문 현상인데 평지다보니 내려다 보기 위한 융통성이다. 담백하고 검소한 낭만이 흐르는 정자와는 사뭇 다르게 굵은 원기둥에 화려한 멋을 부려 사찰의 대웅전 같았지만, 온갖 멋을 부려도 아름다움이 풍겨 칭찬 할만하다. 마스크 낀 채로 일하고 있던 친절한 종부는 어디서 왔냐고 묻고는 남편을 불렀지만 사양하고 잠시 머물다 오류헌으로 갔다.오류헌은 특히 대문으로 권위를 세우는 안동양반들 집 같아 향기로운 마음으로 들어가고 싶은 길손을 주눅 들게 한다. 대문은 열려있어 여봐라 외쳐 댈 필요도 없지만, 뛰쳐나올 돌쇠도 없는 시대다. 돌쇠는 사라졌는데 마나님은 존재하니 간간히 화제에 오른다.대문 위를 보니 경오(庚午) 4월 13일 상량이고 목재 색깔이 고택에서 우러나오는 짙은 깊이가 아니라 덜 숙성되어 그리 오래되지 않아 연대를 추정해보았다. 예전에 조그만 대문이 있었더라도 큰 사랑채 지으려면 통로가 필요하다. 담을 허물거나 대문을 뜯는다. 그리고 집을 짓고 대문을 만들지 대문 만들고 짓지 않기 때문에 1870년(경오년)과 1990년(경오년)은 아닐 테고 1930년(경오년)에 지금의 대문을 세웠을 것이다.경주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신라시대 석물들을 보면 인공으로 가공한 뒤부터 연대를 추정하는데 천년의 세월이 흐른 흔적과 700년, 500년은 확연히 다르다. 오류헌은 지례마을 입향조 지촌 김방걸(1623~1695)의 3남 목와 김원중(1658~1724)이 21살 때인 1678년에 지은 집이다. 이 오류헌 고택도 지레마을에 있던 것을 임하댐 건설로 이곳 임하마을로 옮겨온 것인데 1920년 사랑채를 개축했다고 써놓았다. 대문에 들어서자 넓은 마당에 석물들이 여기저기 놓여있고 긴 사랑채가 큰 규모로 앉아있다. 정원과 새로 지은 5칸 사랑채에서 안채가 주는 약간 어눌하면서 순박한 모습의 고택과는 엇박자지만 건축이란 어느 것이 옳고 그른 것은 없다, 시대에 따라 건축주의 필요에 의해서 지어지는 것이다. 다만 아름답거나 실용적이냐의 차이와 집의 격이 따를 뿐이다.오류헌 대문에서 오른쪽 가까이 논가에 홀로 서 있는 임하리 3층 석탑이 묘한 여운을 준다. 예전에 필자가 안동 동편으로 답사 오면 내앞(천전)마을과 여기 임하리 3층석탑 보러 왔다가 국탄댁, 이우당, 오류헌을 둘러보는데, 오늘은 고택 보러 왔다가 곁눈질하여 탑을 보고 간다. 이 석탑에서 좌우로 보면 이 세 고택이 시야에 안기는데 신라, 고려시대 불교천지에서 조선의 유교, 유학의 세상으로 공간의 이동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소박한 치헌 고택과 내앞 마을푸른 물결 잔잔히 흐르는 임하교를 건너 내앞 마을 치헌 고택으로 갔다. 이 고택도 지례마을이 수몰지역이라 이곳으로 1988년에 옮겨왔다. 30년을 훌쩍 넘겨 이 마을과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한눈에 소박하고 담박하여 군더더기 없이 나를 내세우지 않는 고택 같아 정겨움이 밀려온다. 반면에 하루하루 먹거리의 현실과 이상적인 선비의 도 사이의 괴리현상에 고뇌하는 가난한 선비의 집 같아 마음이 아련하다. 벽채도 보통의 기와집처럼 하얀 회벽이 아니라 누런 황토흙벽이라 몹시도 정감이 가면서 마음이 짠하다. 정원도 깔끔하게 잘 가꾸어 놓았는데 유독 붉은 철쭉꽃이 파리한 선비의 붉은 열정 같은 느낌이다.안채도 조그마한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라 공간이 협소하여 툇마루도 없고, 1칸의 청마루만 있는 조촐하고 단아하다. 대문달린 사랑채도 좌우로 2칸의 맞배지붕에 측면 1칸이라 공간이 협소하고 아담하고 긴 ‘-’자 형이다.이 고택은 국탄 김시정의 셋째 아들인 치헌 김영운(1765~1841)이 정조 9년(1785)에 21살 때 분가하면서 지은 집이다. 묘하게도 오류헌 고택은 지촌 김방걸의 셋째 아들 김원중이 21살 때 지었고, 치헌 고택도 국탄 김시정의 셋째 아들 김영운이 21살 때 지은 집이다.주인은 1년에 두세 번 오고 강릉서 몇 달 전에 와서 고택 관리하면서 행랑채에 산다는 분께 집을 잘 가꾸어 보기 좋다고 인사드리고 내앞 마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골목마다 사람 없고 간간히 보이는 분들은 마스크로 무장하여 코로나 시기의 일상을 보여준다. 단체와 가족단위의 답사객들도 없으니 여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젊은이도 아이들도 보이지 않는다.귀봉 종택은 귀봉 김수일의 아들 김용(1557~1620)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1590년 과거에 합격했으나 잠시 벼슬하다 병으로 낙향하였다. 얼마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선조)이 피난간 곳으로 달려가 왕을 호종 하면서 매일의 일상을 기록한 호종일기(1593,8~1594,6)가 중요한 자료가 된다.또 하나 눈물겨운 존경의 마음으로 보아야 될 것이 백하 김대락(1845~1914) 독립운동가의 고택 ‘백하구려(白下舊廬)’다. 천석꾼 집안의 전 재산을 팔아 서간도로 이주하여 독립 운동한 김대락이 1885년에 지은 집이다. 1907년 자 신의 집을 협동학교 교사(校舍)로 내주고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경제력과 학문을 두루 갖춘 집안이었지만 타민족의 지배하에 살 수 없다고 만삭의 손부와 67살의 행동하는 선비 김대락은 정이 묻은 이곳을 떠난다. 여형제 김우락 여사는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아내로, 여동생 김락 여사는 단식 순국한 향산 이만도의 며느리로, 남편 이중업은 파리장서사건 주도한 독립운동가 아내로, 독립운동한 집안이라 향기가 깃든 곳이다.이 마을에서 기려야 할 또 한 분이 무장 독립운동단체 서로군정서 참모장 김동삼(1878~1937) 선생이다. 만주와 상해 임시정부서 특출한 활동을 하다 만주사변 뒤 일본 경찰에 체포돠어 1937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한다. 그의 생가 입구에는 마스크 낀 동네분들이 협동으로 모내기할 볍씨 준비에 한창이고 몇 발자국 옮기면 태극기 펄럭이고 ‘독립운동가 김동삼 선생 생가터’ 표지석만 선생을 위로하고 있었다. 마당에는 산불조심 깃발 단 트럭 한 대와 개 한마리 앉아있고 화단에는 감잎이 연노란 새싹을 틔우고 있었다.마을 옆에 한옥으로 잘 지은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이 지난 3월에 왔을 때도 오늘도 휴관이라 언제쯤 보이지 않는 코로나로부터 독립할지, 독립운동 산실의 내앞 마을에서 염원해본다./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4-28

산과 푸른 하늘·임하호, 그리고 오롯하게 자리 잡은 고택

할아버지의 재력과 아버지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이 지금시대에 최고의 조건이라지만, 산업화 이전 1980년대 까지만 해도 잘난 조상 덕에 ‘에헴’ 하면서 폼 재고 살았다. 주로 조선시대 학식이나 벼슬로 이름을 알린 조상이 한명 나오면 중시조가 되어 그 이름의 음덕으로 오늘까지 긍지를 갖고 산다. 중시조에서 시조보다 더 큰사람이 안 나오면 경주최씨 설씨 등과 같이 신라 최치원과 원효와 설총까지 소급하여 이어온다. 해남 윤씨들은 고산 윤선도로, 손소, 손중돈, 회재 이언적은 양동 손씨, 양동 이씨의 후손들은 자부심을 안고 살았다. 안동은 유독 중시조가 많다. 진성이씨는 퇴계 이황, 안동김씨는 고려의 김방경, 풍산류씨는 서애 류성룡, 의성김씨는 학봉 김성일, 영천이씨는 농암 이현보, 그리고 중시조에서 방계로 뿌리에 뿌리를 물고 이어져 거대한 문중이 된다. 지촌 김방걸도 의성김씨 지례 입향조가 된다. 그 흔적이 지례예술촌이다.#. 장희빈과 남인, 지촌 김방걸인물은 그 시대와 밀접한 인연을 가진다.의성김씨가 임하댐을 중심으로 문중으로 번성한 것은 김만근(1446~1500)이 임하현 일대 강력한 기반을 가진 해주오씨 오계동 집안에 장가들어 처갓집 재산을 물려받고 내 앞(川前)에 정착하고부터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큰 문중 대부분이 처가살이하여 처가재산을 물려받았거나 아내의 지참금으로 부를 형성한다.김만근의 손자 청계 김진(1500~1580)은 자신의 입신을 포기하고 아들 교육에 헌신하여 다섯 아들(약봉 극일, 귀봉 수일, 운암 명일, 학봉 성일, 남악 복일)을 퇴계 문하에 보내 모두 과거에 합격시켜 명문가 반열에 오른다. 청계는 아내를 일찍 잃고도 젖 달라고 우는 아이를 양손에 부둥켜안고 나오지 않는 자신의 젖을 물려 울음을 그치게 했던 눈물겨운 부성애를 갖고 있었다. 지촌 김방걸의 고조부가 청계 김진이고 증조부가 약봉 극일이다. 지촌 김방걸은(1623~1695)은 인조(1623~1649) 원년에 태어나 숙종 때 활약한 인물이다. 38세에 과거 병과에 급제하여 주로 사간원 성균관 등 언론과 학계에 머물었던 언관으로 50대 초부터 21년간 숙종과 인연을 맺어 전남 화순 동북 귀양지에서 73세에 죽는다.숙종 하면 장희빈과 사랑 놀음과 착한 인현왕후로 각인되지만, 숙종은 5군영과 남한산성, 북한산성을 쌓아 국방을 튼튼히 하였고, 세금폐단을 획기적으로 막은 대동법을 전국에 확대했다. 이처럼 군사와 경제에 큰 업적을 쌓았지만 여인의 치마 속에 가려졌다. 숙종의 여인 장희빈(장옥정)과 인현왕후는 둘 다 왕비가 되었다가 폐위되었다. 인현왕후는 34살에 죽고, 장희빈도 42살에 사약을 받고 죽은 시대가 낳은 비극의 여인들이었다.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은 서인(노론)의 핵심이었고, 장희빈의 숙부 장현은 왕의 통역관으로 무역으로 오빠 장희재와 서울에서 돈(현금)이 가장 많았던 중인출신이었다. 안동선비들은 동인에서 남인세력으로 장희빈과 운명을 같이했다. 선조 때 김효원과 심의겸으로 동인, 서인으로 갈라진 붕당이 동인은 정여립 사건 때 서인은 숙종 6년(1680) 경신대축출 때 남인을 강하게 처벌하자는(노론), 온건하게 하자는(소론)으로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다투다 숙종 때는 극에 달한다. 그런데 김효원 심의겸 둘다 퇴계의 문하생이었다.장희빈이 아들(경종)을 낳아 세자로 책봉되고 인현왕후가 폐출(1689년)되자 지촌 김방걸은 언관으로 책임을 느껴 낙향한다. 장희빈은 왕비가 되고 기사환국으로 남인 천지가 된다. 5년 뒤 숙종은 폐위시킨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남인들을 대거 숙청하는 갑술옥사(1694)때부터 온 조선천지는 노론, 소론세상이 되고, 영남의 남인세력들은 몰락한다. 이때 ‘구운몽’의 저자 남구만은 소론의 우두머리가 되어 영의정이 된다.72세의 대사성(지금의 국립서울대 총장) 김방걸은 갑술옥사 때 고향 지례로 귀향하지만 며칠 만에 화순 동북으로 귀양 가서 독서로 나날을 보내다 73세의 일기로 죽는다.정치란 생물과 같아서 이해관계에 따라 변한다. 숙종은 장희빈의 매력에 빠지기도 했겠지만, 역관집안에 현금 제일 많은 부자의 딸이고. 청나라와도 긴밀한 관계가 있어 숙종에게 도움이 되었고, 역관 즉 중인층의 지지가 왕권 강화에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인층의 지지가 노론, 소론으로 기울자, 숙종도 장희빈과 남인을 버렸다. 장희빈은 친정 쪽의 재력을 이용하여 남인들을 업고 정권을 잡으려다 실패한 것이다.# 지례예술촌은 어떤 곳인가임하댐을 끼고 천천히 달렸다. 댐 위에 망향비를 보니 함께 살았던 한실댁, 대추월댁, 유천댁, 원촌댁, 주실댁, 각골댁, 동골댁, 곰모댁, 턱골댁, 마질댁, 추월댁…. 밑에 류건원, 하식, 갑이, 봉년, 앙팔, 병태, 태수 오봉, 영복…. 이름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여기 실향민이 아닌 필자도 마음이 울컥거리는데 여기 살았던 실향민들은 고향 잃은 상실감에 얼마나 마음이 아리고 쓰릴까? 갈 수 없는 고향은 희망이라도 있지만, 사라진 고향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상처일 것이다.필자는 1987년부터 한국문화유산 답사회 초대 총무로 유홍준 대표와 회원들과 전국으로 기행할 때와 울산시민역사기행 대표를 할 때 지례예술촌을 90년 초에, 단체로 두 번 숙박했었다. 그때는 버스로 비포장 길 산속을 한참 돌고 돌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오늘은 아스팔트로 잘 닦여진 대낮에 산천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갔다. 입구에 들어서자 흩어져있던 문중의 비석들을 모아놓고 지촌 김방걸 유허비를 크게 세워놓았다. 평소 습관대로 전체를 보고 느끼기 위해 산책로 따라 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았다. 곳곳에 시인 김종길 촌장답게 아름다운 시를 세워놓아 시심을 자극한다. 호수(임하댐)의 물결은 보드랍게 속삭이듯 고요하다. 도화꽃 춘정에 몸부림치니, 산 벚꽃 하얀 속살도 봄바람에 흐느껴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석양에 장대들고 낚시터로 내려가니./ 폭포에 산들바람 버들 솜이 휘날리네./ 모래위의 갈매기야 날아가지 말게나./ 너를 해칠 마음 없어진지 오래거니./”지촌 김방걸의 ‘낙연(도연폭포)조어(落淵釣魚)’시인데 오늘 같은 봄의 정경이다. 여기에서 오른쪽 산 넘어 임하댐에 수몰되어있는 도연폭포에서 직계증손자 난곡 김강한(1719~1779)과 고손자 낙유재 김시기(1751~1779)의 비극적인 죽음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재야선비 김강한이 3월 21일에 죽자 장례는 5월 23일로 정했으나 장례날이 가까워오자 계속되는 장마에 강 건너가 장지여서 앞당겨 장례를 치른다. 상주 김시기는 상여에 올라가 관을 붙들고 불어난 강물을 건너다 센 물살에 상두꾼들은 급류에 휘말리자 상두꾼들은 상여를 내버려두고 헤쳐 나왔지만, 아들은 뛰어내리지 않고 상여를 붙잡고 가다 도연폭포 아래로 곤두박질 쳤다. 나라에서 효자명부에는 올렸지만 자신의 목숨과 바꾼 효였다. 1965년 7월 고려대불교학생회에서 상원사 보산스님 다비식에 참석하고 내려오다 불어난 계곡물을 건너다 10명이 급류에 휩쓸려가 죽은 사건이 떠오른다.동쪽 산등성이 오르자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묘를 단장하고 있었다. 조상숭배가 극에 달한 안동을 보는 것 같았다. 고택 뒤에는 소나무 한그루가 아래 고택을 지켜주고 있는 듯하다. 미인은 혼자 외롭게 있을 때가 아름답듯이, 소나무도 한 그루 쓸쓸히 있을 때가 고독한 아름다움을 풍긴다.건물들을 살펴보았다. 지촌이 40세 무렵에 지은 안채와 바깥채는 소박하면서 담담한 기품을 풍긴다. 지촌 사후에 지은 지촌제청 건물도 엄청 크고, ‘지산서당’ 건물은 웅장하고 어깨 힘이 잔뜩 들어간 위압적인 형상이다. 기둥도 너무 굵고 다포식의 화려한 절집 같아 권위적인 사또가 집무를 보는 동헌 같다. 이 모든 건물을 임하댐 수몰지 지례마을(아래 200m)에서 옮겨지어(1985~1989) ‘지례예술’을 만든 시인 김원길 촌장의 집념이 대단하다.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르는 코로나 정국이라도 다른 고택들은 대문은 열려 있었는데, 여기는 굳게 닫힌 대문에 ‘숙박 손님 외 절대 출입금지’문구가 무릉도원에 왔다가 갑자기 속세의 현실로 나를 안내했다.필자가 경북의 종손, 종부들 대상으로 특강할 때, 촌장님도 같은 날 강의를 했고 밤새 술잔을 나누었던 인연이 있기에, 인사나 하려고 대문을 두드렸다. 촌장님은 없고 손자와 며느리는 경계하는 표정으로 들어가 남편을 보내 맞이한다. 내가 더 미안해하고, 번갯불에 콩 튀기듯이 가볍게 빨리 보고 나왔다./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

2020-04-21

전통과 현대의 만남…구름 위의 행복한 마을 ‘구름에’

#. 벚꽃 속에 파묻힌 안동민속촌과 열녀 서씨봄을 더욱 봄답게 하는 벚꽃들은 잎에게 물려준 경주와 달리 안동에는 벚꽃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대단한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의 생가 임천각과 군자정, 7층 전탑을 가로막아 철길을 낸 일제의 만행은 흉물이지만, 강 건너 민속촌 주위는 울긋불긋 꽃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80~90년대 수학여행이나 산업시찰, 답사 때 필수코스가 춘천의 소양강댐과 안동댐이었다. 안동댐을 의미 없이 보고 민속촌으로 갔다.안동댐 수몰지에서 옮겨온 고택들 대부분이 기와집들이지만, 안동민속촌에는 초가집들이 몇 채 옮겨놓아 깊은 향수를 느끼게 한다. 안동댐 주위의 대부분 지형이 그러하듯이 가파르게 경사진 좁은 골짜기 층층이 한 채씩 놓여있다. 기능 잃은 물레방아가 맑은 물을 쉼 없이 머금고 하얀 물줄기로 토해내고 있었다. 처음 만나는 이원모 기와집은 멋 부리지 않은 담백한 맛이 흐르는 질박한 집이었다. 대문 붙은 사랑채와 안채가 한 몸 같이 ‘ㅁ’형으로 둘러진 집은 사랑채와 차이를 둔다고 했겠지만, 안채가 너무 높아 없어도 자존심 강한 안동다운 형식 같았다.연이어 영천 신령(영천의 옛 지명)에서 옮겨온 돌담집의 돌담은 한없이 정겨워 눈물이 날 것 같다. 댕기머리에 대바구니 들고 봄나물 캐러가는 수줍은 봄 처녀의 하얀 웃음소리가 돌담에 아련하다. 돌담 앞에 소나무가 멋없이 쑥 솟아있어 돌담 집을 방해하는데 가지를 자르든지 소나무를 없애면 정겨운 돌담집이 살아나겠다.그 옆에 돌담에 속삭이듯 피어있는 앵두꽃은 왜 이리 가슴을 울릴까. 박명실 초가집도 안동댐 수몰로 옮겨왔는데 추운 겨울을 위해 남부지방의 개방된 집이 아니라 폐쇄적으로 실용의 공간배치를 했다. 조그마한 디딜방아를 보니 삶의 애환이 물씬 풍긴다.그 위의 이춘백 초가집도 다른 초가집들과 마찬가지로 기둥은 크고 튼튼한 것으로 바꾸어놓아 옛 정겨운 초가집 분위기는 아니지만, 서까래는 연기에 검게 그을린 옛 그대로 복원해 놓아 다행히 옛 향수가 난다. 다음 박분섭의 까치구멍 집은 안동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특이한 가옥 구조다. 안방, 건넌방, 부엌, 외양간 등등의 생활공간이 한 건물 안에 모여 있어 외양간 가축의 악취와 부엌 취사 연기를 밖으로 배출하는 연통구조이다.이 민속촌이 지금은 텅텅 비어 야외 박물관이 되었지만, 필자도 답사 단체를 데리고 와 몇 번이나 먹었듯이, 여기 초가집을 술과 안주, 밥을 파는 주막 겸 식당으로 활용했던 곳이다.제일위 가파른 산 언덕 위에는 영양의 석보에서 옮겨온 통나무집(귀틀집)에는 마침 갈대로 지붕을 이고 있었다. 예전에는 동네사람들이 품앗이 하듯이 했다면 지금은 일당 받는 인부들이 한다. 내려다본 초가지붕들은 아련한 그리움이 샘솟는 정겨운 풍경이었다.여기 민속촌에는 2기의 비가 있는데 고려시대 권백종(단종의 외증조부)의 효를 기리는 비가 있고 다른 하나는 공자의 이름 틀에 희생된 기구한 여인 이천서씨 열녀비가 봄바람에 떨어지는 꽃비를 맞으며 길손을 맞이하고 있었다. 시집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김창경)과 사별하고, 몸이 불편한 시부모도 외아들 잃은 슬픔에 병을 얻자 며느리 서씨는 지극정성으로 간병했으나 세상을 떠났다. 즉시 시부모를 따라 죽으려다 장례를 치루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가련한 여인의 열녀비다. 나이(1795~1817) 겨우 22살로 4계절 중 봄만큼 고통을 안고 살다갔다. 전국에 수많은 열녀 중에는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죽어도 시가에서 죽어라’는 당시의 윤리에 친정에도 갈 수 없었다. 결국 오갈 때 없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여 죽음을 택한 형식은 열녀지만, 내용은 무언의 강요에 희생된 슬픈 열녀가 많다. 수줍은 앵두꽃도 화사한 벚꽃도 사람 없는 화려한 적막 속에 서 있다. 바람에 떨어지는 꽃잎도 시대의 윤리에 희생된 수많은 꽃다운 열녀들의 혼령과도 같다.#. 고택들의 향연 ‘구름에’ 리조트민속촌에서 계속 올라 성곽을 지나면 기와 고택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여기도 안동댐 수몰지에서 옮겨온 고택 7채를 2012년에 ‘SK’, 문화체육관광부, 경상북도, 안동시가 4자간 협의로 SK의 사회적 기업 행복전통마을에서 운영하는 ‘구름에’리조트다.고택하면 귀신 나올 것 같고 불편하다고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2000년대 서울 북촌 한옥 살리기부터 전국적인 열풍이 불어 전남에는 지원해주는 정책으로 많은 한옥들이 들어섰지만 일률적인 모텔에 기성품 한옥 같아 느낌도 감동도 없다. 서울, 인천, 여수, 경주 등등 전국에 한옥호텔이 많이 들어섰다. 경주 ‘라궁’도 5성급 호텔요금으로 잠시 인기 반짝이다가 문 닫았다. 지금은 신라호텔에서 한옥호텔을 야심작으로 짓고 있다. 고택이주는 오랜 세월의 무게감을 현대 한옥에 어떻게 스며들게 하느냐가 관건이다.갈수록 좁아지는 북쪽 골짜기에 제일 큰 계남고택을 맨 앞에 제일 작은 박산정(博山亭) 정자를 제일위에 알맞게 잘 배치해 놓았다. 밑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고택 하나하나 살펴보았다.입구의 계남고택은 나라를 잃자 순국한 향산 이만도 등 독립운동가 25명을 배출한 도산면 하계마을이 수몰되어 옮겨온 고택이다. 정면 7칸 측면 7칸으로 퇴계 이황의 8대손 이귀용이 지은 종가다. 성리학으로 무장된 안동 선비들의 고택들은 화려하거나 웅장하지 않듯이 이 집도 규모는 크지만 담백하고 검소한 고택이다. 뒤에 칠곡고택은 퇴계의 10대손인 이휘면(1807~1858)의 고택(1831년 건립)을 이육사의 고향 원촌에서 옮겨온 고택이다. 나란히 붙어있는 3칸 서운정(栖雲亭) 정자는 탁 트인 서쪽을 한없이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자리 잡았다. 모든 숙소가 그러하듯 화장실을 어떻게 만드느냐가 관건인데, 서운정만 둥근 욕조 갖춘 숙소여서 목욕 좋아하는 분들의 취향을 저격했다.중간에 우향각과 강동제사 주위에 붉게 물든 도화꽃이 핑크빛 봄을 알리고 있었다.제일 위에 있는 박산정 정자는 집보다 마음 수양하는 정자에 더 심혈을 기울이는 안동의 정자 표본 같다. 아래 정자들과 마찬가지로 기둥이 크면 힘은 있어 보여도 부드러운 낭만이 흐르지 않는다. 이 박산정도 좌우 2칸을 방으로 두고 중앙 1칸을 대청마루를 두었는데 힘 있고 단단한 맛이 흐른다. 아궁이가 정면에 있어 이채롭다. 아래 정자들이 사각기둥을 사용했는데 원기둥이라 한결 돋보인다. 공조참의를 지낸 이지(1560~1631)가 학문수양을 위해 1600년대 초기에 지은 정자다.32살 때 참담한 임진왜란을 당하여 동생들과 함께 의병에 가담했으니 인생 중반에 이런 정자를 짓고 누릴만한 참된 선비였다. 안동댐으로 인해 두 번이나 옮기는 운명이었지만 여기서 마지막 생이길 바라면서 옆 골짜기에 있는 한옥체험공간 ‘예움터 마을’을 둘러보았다. 구인당 좌우로 주자의 권학문, 매월당의 화개화사, 도연명의 권학문과 사시가 주련에 붙어있다. 주자의 시적이며 교훈적인 권학문보다 도연명의 직설적인 권학문 ‘젊음은 다시 오지 않고….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가 와 닿는다.활짝 핀 벚꽃을 가슴에 안고 안동 시내를 빠져나오는 곳곳에 나부끼는 21대 국회의원 선거 문구는 가짜보수, 진짜 보수로 서로 도토리 키 재기로 항변하고 있다. 선비의 고장,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는 안동에서, 정치란 자신의 이익보다 사회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정치의 도(道)인데…./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4-14

생가는 철거를 앞둔 방치된 집 같아 참담하다

흔히 죽음에 대해서 아무도 모르는 3가지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를 모른다는 것이고, 누구나 아는 것 3가지는 누구나 죽고, 오는 순서 있어도 가는 순서 모른다는 것과 아무도 동행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러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인생은 무엇을 먹고 사는 것 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듯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던 자신을 위하던 죽음은 숭고한 의미를 지닌다. 이육사!그 이름만으로 우리민족의 가슴에 뜨거운 불덩어리 기운을 안겨 주었다. 이육사가 나고 자라 혁명적 자양분을 흠뻑 받았던 고향 원촌마을과 묘소, 안동시내로 옮겨놓은 고택을 숙연한 마음으로 찾아 나섰다.#. 나라 위해 몸 바친 숭고한 사람들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에다 농경 정착생활이라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지만, 유목민들이나 척박한 땅에서는 생존을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조건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약 1천여번이나 외침을 당하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때마다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의병이 되어서 바람 앞에 등불인 나라를 구했다. 당시 세계최강 중국 수나라와 당나라, 몽고와의 끈질긴 전쟁과 7년의 임진왜란 등등의 국난을 당할 때 마다 온 백성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적의 침입을 막아냈다.이육사(1904~1944)가 살았던 조선말을 보자.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권 쟁탈전이 된 조선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민영환(1861~1905)은 조약파기와 찬성파 대신들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결국 “영환은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황은에 보답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형제에게 사죄 하노라.” 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민영환은 명성황후의 척족이라 일찍부터 출세의 길이 열려 고위직에 있었고, 그의 자결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켜 백범 김구와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으로 몰려가 땅을 치며 통곡했다.당대 최고의 권문세가 출신인 민영환이 자결하자 ‘자결’ 도미노 사태가 전국으로 번져나갔고, 의병들은 명성황후시해사건(을미왜변) 이후 전국에 들불처럼 일어났다. 나라 망한 일제강점기에 양녕대군 16대손 왕족이라고 내세운 이승만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 두 번이나 장원하고도 나라의 혜택을 받지 못한 매천 황현(1855~1910)은 “나라가 선비를 양성한지 500년이나 되었지만, 나라가 망하는 날 한 명의 선비도 스스로 죽는 자가 없으니 슬프지 않은가. 하면서 절명 시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낮을 찡그린다./ 무궁화 이 강산이 속절없이 망하였구나./ 가을 등잔불 밑에 책을 덮고 수 천 년 역사를 회고하니/ 아 참으로 이 세상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어렵구나.’ 등의 절명 시 4수를 남기고 더덕 술에 아편 타마시고 순국한 선비도 있다.#. 혁명가 이육사지금이야 어디서 태어나 어디에 살던 여기저기 옮겨 사는 유목민적 삶이라 태어난 고향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80년대 중반까지의 고향은 절대적인 자양분을 받았다. 그래서 작가는 어릴 때 형성된 정서로 평생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이육사가 16살까지 살았던 고향 원촌은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저 멀리 산들이 병풍처럼 줄지어 서있고 낙동강이 푸른 물 간직한 채 절벽의 바위를 때리고 자갈에 부딪히면서 모래를 적시고 흘렀다. 산을 등지고 있는 마을은 옹기종기 모여 살았고, 강과 마을 사이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말달릴 수 있는 넓은 벌판이 펼쳐져있다. 가히 무릉도원이라 할만하다.이런 고향분위기지만 이육사는 고단한 시대에 태어나 식민지 현실에 정면으로 부딪치며 헤쳐나가다 감옥에서 순국 했다. 어머니 허길 여사는 대법원장 출신 의병장 허위(1854~1908)의 4촌형 범산 허형의 딸이고 퇴계의 진성이씨 집안에 안동의병장 이인화부터 수많은 독립지사들 집안이었으니 6남매 모두 독립운동가였다. 이육사는 17살 되던 1920년 온 가족이 대구 남산동으로 이사 갔었고, 이미 한학을 했지만 일본과 중국유학을 한다. 1925년에 형 원기 동생 원유와 함께 약산 김원봉(1898~1958)이 이끄는 항일무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고,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으로 3형제가 대구형무소에 3년 복역한다. 그때 수인번호가 264번이라 이원록에서 이육사로 바꾼다. 기자생활(1929~1937) 8년 하면서 1931년에 대구격문사건으로 두 번째 구속되고 풀려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입학하여 졸업 희곡작품이 “토지가 농민에게 공평하게 분배되고, 완전한 노동자, 농민이 지배하는 사회”를 꿈군 ‘지하실’이다. 17번이나 투옥과 구금되었으나 강철 같았던 의지의 이육사는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에 베이징의 일본총영사관 지하 감옥에서 한 많은 가슴을 부여잡고 눈을 감았다. 유골은 먼 친척 이병희와 동생 원창에게 전해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0년대 고향 뒷산에 부인 안일향 여사와 나란히 누워있다.이육사의 첫 시는 1933년 ‘황혼’, 39년에 ‘청포도’, 유고집에 ‘광야’등 총 36편의 시를 썼다. 100여 편의 시를 쓴 윤동주는 일본유학 가기위해 창씨개명 했지만, 맑은 영혼으로 자아를 성찰하는 아픈 마음으로 쓴 시가 참회록이었다면, 이육사는 가슴에 강철 같은 뜨거운 불덩이안고 맑고 웅혼한 시어를 폭포수같이 품어낸 혁명가이며 독립운동가, 시인 이였다.#. 생가와 기념관이육사문학관이 있는 고향 원촌마을은 예전에도 몇 번 왔고, 이번에는 매주 왔지만 안 가 본 묘소와 안동시내로 옮겨온 생가도 지금 모습 보려 늦은 오후에 안동으로 출발했다. 남쪽과 북쪽의 위도 차이로 경주는 꽃 봄이 완연하지만 안동은 지구가 자전하는 만큼의 속도로 천천히 꽃 봄이 오고 있었다. 춘분이 지난 4월 초순이라 6시가 지났는데도 하늘에 해는 밝았다.안동시내 태화동 비탈진 언덕에서 마주친 생가는 꼭 철거를 앞둔 방치된 집 같아 참담했다. 입에서 욕이 주저리주저리 나왔다. 정갈하게 수리하여 문화재 돌보미 한명이라도! 이육사가 어떤 사람인가.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청포도)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한(광야)- 시 한 구절에 얼마나 가슴 조였던가. 그런데 생가를 이렇게 방치하다니. 문패도 대문 열쇠도 녹슬고 잠겨진 채 있었고, 좁은 마당에 활짝 핀 앵두꽃도 애처로운지 꽃 웃음도 흘리지 않았다.원촌마을에 들어서니 어둠이 내려앉아 불빛만 전설을 간직하고 있었다. 문학관 입구에는 강철 같은 선비 혁명가 시인이 고향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학관 위에는 생가가 원형이 변질되어 생가로서의 기능이 훼손되어 고증을 거쳐 육우당(육형제 우의를 기린다는)을 복원해 놓았다고 했다. 참으로 소가 웃을 일이다. 어떤 자가 고증했기에 이따위로 했는지 기가 찬다. 일부는 원형이 변질되었더라도 그 생가를 보완해서 세워야지 오리지널 진품을 두고 모조품 만든 격이다. 1976년 안동 태화동에 안동댐 수몰로 옮겨놓은 생가는 방치는 되었지만, 70~80%는 그대로였기 때문이다.우리나라 문학인들이나 큰 스님들 생가 복원 하는 것 보면 눈뜨고 못 본다. 산청에 성철스님 생가 복원해 놓은 겁외사는 생가는 온데간데없고 으리으리한 한옥에 웅장한 절, 그리고 스님의 동상까지 세워놓아 산청군과 제자들은 검소했던 성철스님을 똥칠했다. 경주에 박목월 생가는 흔적도 없고 그 위 언덕에다 이상한 건물을 지어 놓고 동리목월문학관을 국민세금으로 수백억 들여서 불국사 옆에다가 세워놓았다. 스승을 핑계 삼아 문화가 뭔지도 모르는 안목 없는 제자들의 경로당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일반사람들은 향기를 못 느끼게 해놓았다. 이 육우당도 이육사의 채취와 향기도 없고 영혼 없는 박제된 건물이라 안타깝다. 날은 점점 어두워 산길 이육사 묘소에 한참을 오르니 등위에는 반달 지나 보름으로 커가는 달빛이 산길을 비추고 있었다. 아직도 2km 남아 혼자서 망설이다 아쉬운 발걸음 되돌려 내려왔다.문학관에서 조금 내려오면 청포도 공원이 생가 터였고, 그 옆에 고택다운 운치 있는 목재고택이 단정히 앉아있다. 그 고택에는 이육사 아들은 일찍 죽었고, 1943년 청량리역에서 북경으로 압송되어가면서 욕심 없이 남을 배려하라고 지어준 4살 딸 옥비(沃非)에게 ‘다녀오마’ 마지막 말 남기고 생이별한 딸이 살고 있다. 그 옆 진성이씨 원촌파 종손 이재철 변호사의 ‘원대고택’은 필자가 옮기지 말고 수리만하라고 자문해준 집이고, 그 옆에 사은구장 고택은 독립운동가 이원영 목사집이다. 가슴이 아픈 만큼 밤하늘도 어둡다. /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

2020-04-07

독립기념관만 화려하면 뭣하나…

사람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떤 처신을 하는가가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특히 나라를 잃었을 때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고 자신의 영달을 꾀한 짐승보다 못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으면서 자신의 목숨도 버린 가슴 뭉클한 독립투사도 있다. 사람을 보는 기준은 다양하지만 죽음부터 역 추적해 보면 그 사람의 진면목을 강렬하게 알 수 있다. 안동은 기초단체로는 제일 많은 353명이 독립운동으로 포상 받은 독립운동의 성지다.향산 고택과 치암고택 가기 전에 향산 이만도((1842~1910) 선생이 순국했던 예안 인계리 순국유허비를 보고 태어난 하계마을과 치암 이만현(1832~1911)의 고향 원촌마을을 보고 갔다.#. 나라운명의 변곡점과 독립운동의 요람 안동‘추로지향(鄒魯之鄕)’. 추나라 맹자와 노나라 공자 고향의 출생지를 딴 이 한마디로 안동은 유학의 본 고장임을 입증한다.그러나 신라 고려시대까지는 불교문화가 융성하여 성덕왕 23년(724)에 만든 강원도 상원사 (왕실(세조)의 원당이었음) 범종은 성덕대왕 신종(경덕왕 1년·742)보다 18년이나 앞서는데, 조선 8도에서 가장 좋은 종으로 선발해 갔다. 소리가 웅장하고 맑아 백리(40km)까지 울렸다는 이 종은 원래 안동에 있었던 것이다.봉정사의 극락전도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앞선 시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다. 현존하는 국내 전탑 5개 중에서 여주 신륵사와 칠곡 송림사 전탑 외 법흥사지 7층 전탑, 일직 조탑리 5층 전탑, 안동역 앞의 운흥동 5층 전탑 등이 모두 안동에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안동은 나라의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고비마다 결정적 역할을 한다. 930년 후삼국 각축의 혼란기에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안동 병산전투에 안동의 토호세력 김행, 장길, 김선평의 향군들 도움으로 견훤 군사 8천명을 무찔러 후삼국 통일의 확고한 기틀을 만들어 고려가 후삼국을 평정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나라 대개의 성씨가 그러하듯 태조 왕건은 김행(金幸·안동 권씨), 장길(張吉(장정필)·안동 장씨), 김선평(金宣平)·안동김씨)에게 삼태사(三太師)로 공훈을 기렸다. 그리고 1361년 홍건적 난으로 공민왕(10년)은 수도 개경(개성)에서 안전한 복주(안동)에 피신 왔다. 유학이 건국이념인 조선왕조에서는 퇴계 이황의 우뚝한 유학자에 선비의 고장이 되었고, 명재상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참혹한 위기 때 국난극복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한입합방으로 나라가 망하자 안동의 선비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가솔들을 데리고 만주로, 단식으로 순국하고, 만세운동으로 나라 찾는 숭고한 일에 일생을 바친다. 고성 이씨 임청각, 의성김씨 집성촌의 내앞 마을과 진성 이씨 하계, 원촌마을에 수 십 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된 명예로운 안동이었다.그러나 오늘날 안동은 과연 ‘한국정신문화의수도, 선비의 고장’다운가? 상징적인 사건이 2019년 5월 김종길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장은 자유한국당(통합당) 황00 대표가 안동에 왔을 때 “보수가 궤멸해가는 이 어려운 처지를 건져줄 우리의 희망의 등불이요, 국난극복을 해결해줄 구세주”고 라고 추켜세웠고, 박원갑 경북 향교재단 이사장은 “100년마다, 1세기 마다 사람이 난다 그러는데 건국 100년, 또 3·1절 100년에 나타난 것이 황00 대표”라고 주장했다. 왕조시대보다 더 심한 마치 맹신도가 사이비 교주에게 하는 소리 같아 참담했다.다행히 “안동을 대표하는 유림이 한 정당 대표에게 ‘희망’ ‘등불’ ‘구세주’라고 칭송했다.”“선비라면 정치권력에 쓴 소리와 바른말을 해야지 아첨이나 하고 있으니 안동출신으로 너무 부끄럽습니다.” “친일적폐 속물적 부유로 변질한 소인배 유림을 규탄하고 그릇된 유림의 역사인식과 현실풍토를 성토하기 위하여 안동 문화의 거리에서 1인 시위를 한다”는 서애 류성룡의 14대손 류돈하(38)같은 참 선비다운 젊은 분이 있어 위안을 삼았다.#. 지조의 선비 향산 이만도와 부끄러움을 아는 치암 이만현져버린 매화를 대신하여 진달래, 개나리, 살구꽃, 자두꽃, 도화 꽃에 벚꽃 마저 활짝 피어버린 경주를 뒤로하고 안동으로 향했다. 산천은 화사한 꽃단장할 자신의 역할을 서서히 준비하고 있었다. 안동 북으로 조금가자 길옆 바위에 새겨놓은 ‘자력갱생’이 왜 ‘각자도생’으로 연결되고 꽉낀 마스크는 ‘자가격리’ ‘원천봉쇄’가 연상될까. 와룡 지나 예안 인계리 가는 길은 가난해도 이웃과 정 나누며 오순도순 살았을 억척스런 안동사람들이 연상된다. 향산 선생이 순국했던 장소는 도로 옆에 비석만 쓸쓸히 서있고. 옆에는 향산의 주손 이동석 시민운동가의 수목장한 소나무가 푸른 향기를 품고 있었다. 앞면은 백범 김구가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기 전 마지막 쓴 글씨고 뒷면은 위당 정인보의 유려한 문장으로 새겨져있다.‘향산 공원’이라 해 놓았는데 이렇게 작은 공원은 처음 봤다. 여기서 향산 고택이 있던 하계는 강 건너 직선거리 7km로 멀지않지만 안동댐으로 한참을 돌아야했다. 가는 길에 도산서원에 만개한 매화의 짙고 그윽한 향기 보고, 듣고, 음미하며 퇴계 종택에 갔다. 굳게 닫힌 솟을대문에는 손소독제가 잡귀 쫓는 벽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안동댐으로 사라진 하계마을은 산비탈 경사진 퇴계묘소에서 내려다보니 흔적도 없고 저 멀리 강물은 말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산 고개 넘어서면 이육사 생가 터에 문학관이 들어서 있고 꽤 넓은 벌판이 펼쳐져있다. 이 마을에서 치암 이만현은 퇴계 11대손으로 나라 잃자 비분강개해 세상을 떠났다. 바위에도 부끄러워한다는 치암(恥巖) 이만현의 고택이 있던 자리에도 강 버들만 무심히 늘어서있다.이제 안동시내 안막동 좁은 산골짜기로 옮겨온 향산과 치암의 고택을 찾았다. 치암 고택은 4칸으로 큰집은 아니어도 절제된 균형미에 1칸은 정자형식의 누마루를 만들어 소박하고 단정한 낭만이 흘렀다. 고택체험 숙소로도 개방하여 하나하나에 손이 많이 간 고택이었다. 장독대며 연못 그리고 예쁜 꽃들로 잘 꾸며 고택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크지도 않은 공간을 잘 배치하여 여러 채가 있어도 답답하지 않았고 주인공 본채를 위하여 자신은 드러내지 않는 조연 역할을 충실히 하여 서로가 상생하며 살았다. 치암 고택에는 유독 글씨를 많이 붙여놓아 뜻은 좋지만 의미가 반감된다. 치암고택과 신독(愼獨), 청풍헌(淸風軒) 정도만 있어도 홀로 부끄러움을 아는 맑은 선비의 바람이 불어 좋으련만…. 마당에 잔디도 정갈한 백토였으면 더욱 담백한 고택의 맛이 날텐데.퇴계는 낙향해 “진나라 도연명은 굳은 절개의 상징인 소나무와 국화 그리고 대나무를 심어 정원을 만들었다. 그런데 고고한 풍경을 지닌 매화를 왜 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며 절우사 뜰에 소나무, 대나무, 국화와 맑은 향기 지닌 매화와 연못에 연꽃을 심어 이 다섯 친구와 자신을 육우(六友)라 했다. 지금의 장복수 종부의 손맛으로 퇴계를 기리는‘ 육우원 다과’를 개발했다.앞에 향산 고택으로 갔다. 대문과 사랑채가 좁게 붙어있어 답답했다. 맞배지붕의 사랑채 뒤에는 ㄷ자 안채가 허술하게 서있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옳은 일에 신념을 바치고 독립운동을 하면 이렇게 된다는 산역사의 본보기 같아 마음이 울컥했다. 이집이 어떤 집인가. 향산 이만도는 과거에 급제하여 양산군수 홍문관 교리하다 1896년 예안 의병대장 활동에 1905년 을사늑약파기와 을사오적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 1910년 경술국치 뒤 일제통치를 부정하며 24일 단식 끝에 순국하였고, 아들 기암 이중업(1863~1921)은 파리장서운동 주도했다. 기암의 두 아들 이동흠과 종흠은 대한광복회 활동으로 옥고를 치루었던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문의 고택이 아닌가. 특히 향산의 며느리 김락(1863~1929) 여사의 눈물겨운 굴곡진 삶은 인간으로 느낄 수 있는 온갖 고통을 겪었다. 남편(이중업), 두 아들(동흠, 종흠), 언니 김우락(1854~1933)은 노비 풀어주고 신흥무관학교 세우고 상해임시정부 초대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부인, 친정오빠 백하 김대락(1845~1914)은 자신의 집 ‘백화구려’는 안동지역 애국계몽운동의 학교로 내주고 경술국치이후 67세의 고령에 마을 주민 150명과 서간도로 망명했다. 자신은 3·1만세운동 예안면 시위에 참여했다가 달군 인두로 눈을 지짐 당해 두 눈을 잃었으니 이 모진 수모와 지옥 같은 현실을 어떻게 견디어 내었을까. 온몸으로 나라에 바친 분들이 살았던 고택이 이렇게 방치될 수 있는가. 문중에서 관리하다보니 한계가 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하루빨리 정갈하게 관리하여 후세사람들이 옷깃을 여미는 교육의 장이 되어야 되지 않겠는가.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더니, 독립기념관만 화려하면 뭣하나. 8도 의병대장으로 서대문형무소 첫 순국자였던 구미의 왕산 허위의 장 손자 허경성은 대구서 짜장면 배달해야했고, 임청각의 고성 이씨 석주 이상룡의 손자, 손녀는 해방된 나라에서 고아원에 지내야했다. 김락 부인이 태어난 내앞 마을 ‘백화구려’ 가는 길은 하늘도 슬픈지 안개비 산천을 울리고 있었다. /글·사진= 이재호 기행작가

2020-03-31

웅장하면서 아름다운 탁청정

집은 장소와 터가 중요하다.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본래의 장소를 떠난 집은 무미건조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진기한 보물들을 모아놓은 박물관을 ‘명작들의 공동묘지’라 하지 않던가. 오늘 가는 오천문화재단지의 군자마을도 1972년 안동댐 수몰로 광산 김씨 예안파의 중요한 고택 20여 채를 옮겨놓은 곳이다. 같은 수몰지에서 옮겨온 것이라도 농암 종택이 분천마을과 비슷한 상류의 가송리로 옮겼다면 군자마을은 인근 산중턱으로 옮겨와 주위의 자연환경은 볼품 없지만, 집 그 자체에서 풍기는 고택의 향기는 대단하다. 우선 군자마을 주위를 살펴보기 위해 와룡면에서 예안 쪽으로 광산김씨 종택 긍구당을 지나 돌고 돌아 도산서원에서 흘러가는 낙동강을 보면서 이끼마을 선성현문화단지를 둘러 군자마을을 포위하듯이 보고 갔다.#.안동과 구곡(九曲)문화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성리학은 신성불가침의 국가이념이었고 중심철학이었다. 그 성리학을 집대성한 남송의 주희(주자·1130~1200)는 선비들의 흠모를 넘어 숭모의 대상이고 롤 모델이었다. 주희는 중국 복건성 무이산에서 주자학(성리학)을 성립했고, 주자가 머물렀던 무이정사에서 서원의 모범으로 삼았고, 무이산 계곡에 이름붙인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받아 조선의 사대부들은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구곡을 정하여 자연과 일치되는 이상을 현실에서 실현했다.경남 고성에는 아예 무이산이 있듯이 주희를 흠모한 회재 이언적(晦齋·1491~1553)도 자신의 호 첫 자를 주희 호 회헌(晦軒)의 첫 자로 삼고 경주 옥산계곡에 4산5대와 9곡을 만들었고, 퇴계 이황(1501~1570)은 도산 구곡을 정하고 도산 12곡을 노래했다.퇴계도 군자마을에 제자 후조당 김부필(1516~1577)과 탁청정 김유(1491~1555)가 있어 자신이 지은 도산가 “안개와 노을을 집으로 삼고,/ 풍월로 친구삼아/….라고 노래했을 것이고, 분천마을의 농암을 만나서는 배위나 바위에 앉아 먼저가신 농암 이현보를 생각하면서 어부가를 부르며 자신의 4곡 “봄바람 부니 꽃은 산에 가득 피어있고,/ 가을밤에는 달빛이 누대에 가득하니.” 를 읊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희가 무이구곡에서 5곡(탁영)을 ‘산 높고 구름 깊어 숲이 언제나 안개구름에 어둑하다.’노래하며 그곳에 무이정사를 지었듯이 1565년 65세에 낙향한 퇴계도 자신이 지은 도산 12곡에다 도산서당을 마련하고 “오곡이 깊은 산 들어가니 은거하던 선비는 어디 있는고,/ 산 앞에 높은 대(臺)가 있고 대 아래에 물이 흐르는구나./ 그리고 청량산으로 가면서 고산정에서 제자 금난수와 학문을 논하면서 “고인도 나를 보지 못하고/ 나도 고인을 보지 못하니./ 했을 것이고, 청량산 코앞에 와서는 ”청산은 어찌하여 영원히 푸르며/ 흐르는 물은 또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가./ 하면서 자신을 자연에 맡기고 다시 담담하게 학문에 몰입했을 것이다.율곡 이이(1536~1584)도 해주 수양산 석담에 머물면서 무이산 은병봉에서 따온 은병정사를 지어 고산9곡을 정하고 고산가를 불렀다. 공자의 나라 중국을 사모함이 지나쳐 죽을 때 망한 명나라의 ‘만동묘’에 제사지내라 했던 우암 송시열은 속리산 화양계곡에 머물면서 화양구곡을 정한다.이처럼 온 조선의 강과 계곡에는 100개가 넘는 구곡이 생긴다. 그중 경상도가 55개(51.4%)로 반이 넘고 충북이 22개로(20.56%)를 차지한다. 단일 지역으로는 안동이 10개로 제일 많은 것은 청량산에서 맑은 물이 낙동강으로 흘러오면서 강물은 산을 넘지 못하기에 물줄기가 계곡과 절벽이 부딪쳐 곡(曲)을 만들면서 구곡문화가 생겨난 것이다. 인걸이 자연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걸을 만들었지만, 그 자연에 의미를 부여하고 감칠 맛나게 살려내는 것은 사람이다. 여기에 성리학으로 무장된 안동선비들은 주로 상류 낙동강 변에 살았던 자연환경이 구곡문화의 이상향을 만들게 했다. 퇴계가 죽을 때 ‘저 매화 분에 물주라’며 그토록 아꼈던 매화가 도산 서당 앞에는 꽃망울 터트리고 앞마당에 왕 버들은 흡사 구곡같이 휘어져 용트림하고 있었다.#. 명작들의 공동묘지 고택 박물관1972년 안동댐으로 곡(曲)들 일부는 수몰되어 원래의 기능을 잃었고, 마을도 사라지고 사람도 떠났지만 괜찮은 고택들은 여기저기 옮겨져 있다. 대개의 고택들이 사람이 살지 않아 생동감 없는 녹화방송같이 박제된 모습으로 앉아있다. 원래부터 있던 하회마을이나 양동마을 같이 기와집 초가집이 어우러진 마을이 아니라 문화재 고택들만 옮겨와서 정감 없는 ‘고택들의 야외박물관’ 같은 곳이 군자마을이다. 그러나 고택 하나하나 애정의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도 박물관에서 명품을 보듯이 잔잔한 여유와 옛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군자마을을 들어서자 마을을 감싸고 있는 경사진 산에 잡목들을 정리하여 미끈하게 쭉 뻗은 소나무들이 사람 하나 없어도 생기를 불어넣어 고택들이 한결 돋보였다. 혼자서 마음껏 눈과 마음을 호사했다. 임진왜란 때 영남의병대장으로 순국한 근시재 김해(1555~1593) 선생의 숭고한 비를 보고 왼쪽 산위에서 전체를 조망하고 내려와 군자마을 입향조 후조당 김부필(1516~1577)의 종택에 딸린 별당 후조당으로 갔다. ‘ㄱ’자집으로 흐트러짐 없는 단단한 격을 품고 있었다. 남부지방의 개방형이 아니라 기둥과 기둥모두를 여름이면 들어 올리는 합각문으로 꽁꽁 싸매어 답답해 보였으나 추운 안동지방의 자구책이다.대청마루에 퇴계가 제자에게 써준 ‘후조당’ 편액은 멋 부리지 않는 퇴계의 정직 담백한 글씨가 외롭게 걸려있다. 그 옆에는 정면 6칸의 단정한 누각형식의‘운암정사’가 붉은 매화와 봄의 향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붙어있는 설월당 정자도 4칸 누각형식으로 단정한 낭만을 드러내고 그 앞에는 아직 피지 못한 자목련이 매화에 질세라 검붉은 자색 꽃을 살며시 밀어내고 있었다, 마치 금붕어가 알을 낳듯 몽우리 진 수많은 자목련이 봄 햇살에 엷은 미소 머금고 속삭이듯 나오고 있었다. 하염없이 자목련이 다 필 때까지 옆에서 기다리고 싶었으나 이성의 발걸음은 파청정 정자로 향하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고택들을 돈보다 정신을 추구하는 광산김씨 문중의 힘으로 옮겼다니 대단한 일이다.#. 힘과 멋이 어우러진 탁청정과 낭만의 낙운정잘난 사람들만 다 모아놓아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가 있듯이 여기도 광산김씨 문중의 내노라 하는 고택들을 옮겨 놓았지만 군자마을의 스타는 탁청정과 김유이다.탁청정은 김유(1491~1555)의 호에서 따온 이름인데 멱라수에 빠져죽은 비운의 충신 초나라 굴원(BC343~BC223)의 어부사 중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에서 따왔고, 정자치고는 엄청 크다. 종이 웅장하면 맑기 어렵고, 맑으면 웅장하기 어려운데 이 정자는 웅장하면서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격이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 한옥도 하나의 로망으로 전국에 수없이 짓고 있는데 규모만 크고 멋도 울림도 없는 것은 안목 없는 졸부들의 천박한 과시용 때문이다. 그래서 신은 공평하여 안목 있으면 돈이 없고 돈 있으면 안목 없는 것이다. 퇴계나 남명이 기거한 도산서당이나 산청의 산천재를 보라. 대유학자들도 최소한의 공간으로 소박하면서 절제의 미를 품어내지 않던가. 건물 특히 정자는 주인의 철학과 안목, 인품이 스며있기에 결국 주인이 누구냐가 중요한 포인터가 된다. 원래 정자는 자연 속에 있는 듯 없는듯해야지 크면 자연과 분리되는데 이 탁청정은 크면서도 드라마틱한 장쾌한 미를 발산한다. 정자에 올랐다. 규모도 그렇지만 조선의 최고급 소나무들로 마음껏 멋을 부렸다. 김유 사후에 명필 석봉 한호(1543~1605)의 힘 있고 옹골차게 쓴 ‘탁청정’은 정자에 어울리는 화룡점정을 찍는다.그러면 이 정자의 주인 김유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토록 큰 정자와 옆에 있는 큰 살림집을 지을 수 있었을까. 보통의 선비들이 그러하듯 과거보아 입신양명하는 것이 최고의 원하는 코스였다. 김유는 생원시에는 합격했지만 계속 낙방하여 과거를 단념하고 형님을 대신하여 부모님 봉양하면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낭만적인 삶으로 방향을 바꾼다. 고모가 남긴 유산으로 경제적 고민 없이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런 경제적 복을 사람접대와 1541년(51세)에 고래 등 같은 정면 6칸의 안채와 이런 멋진 정자를 지었다. 지금이야 먹방이 대세이고 남자 셰프들의 전성기지만 김유는 600여 년 전에 전통요리책 ‘수운잡방’을 지었다. 121가지 요리를 소개하는데 주로 술 담는 법 61항목, 김치가 17항목이다.집의 당호를 보면 주인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 수 있듯이 ‘수운잡방(需雲雜方)’은‘역경’에 “구름 위 하늘 음식과 주연으로 군자를 대접한다(雲上于天需君子以飮食宴樂)”에서 따온 것으로 의미하는 바가 크다. 경제력에다 벼슬하지 않아 집 짓는데 올인 할 수 있었다. 마음껏 멋 부린 격조 있는 명품 정자를 지었던 김유는 행복은 부와 명승보다 좋은 관계에서 온다는 것을 웅변으로 보여준다. 탁청정이 근엄하고 권위적인 본부인이라면, 탁청정 아래 낙운정(落雲亭)은 수줍은 듯 낭만이 흘러 아름다움은 다 갖추었으면서도 말없는 첩 같아 연민의 정이 흐른다. /글·사진= 이재호 기행작가

2020-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