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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웅진·사비 탈환” 기치 내건 백제 부흥군의 최전방 요새

신라에 선도산이 있었다면, 백제엔 칠갑산이 있었다. 무열왕과 진흥왕 등 여러 명 신라 왕의 유택이 자리했고, 역사적 의미는 물론, 미학적 완결성까지 빼어난 마애여래삼존불이 아래를 굽어보며, 신라의 태동을 알린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선도산 성모(聖母)의 설화가 떠도는 곳이 선도산 일대다. 신라, 고구려와 함께 이 땅에서 명멸했던 고대왕국 중 하나인 백제에도 선도산에 필적하는 성스러운 산이 없을 까닭이 없다. 백제 또한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며, 한때 한반도의 절반 가까이를 통치했던 국가였으니. 백제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왜 칠갑산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칠갑산이 있는 충청남도 청양을 향했다. 포항에서 KTX 기차를 타고 대전까지, 대전에서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청양군까지. 청양 시내에서 장곡사와 백제문화체험박물관 등이 있는 칠갑산 입구까지는 하루에 6번 운행한다는 시내버스를 이용했다. ◆칠갑산은 백제의 얼이 담긴 천년사적지 사실 칠갑산에 얽힌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가수 주병선의 노래는 귀에 익숙하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베적삼이 흠뻑 젖는다”로 시작하는 유행가다. 산간을 태워 힘겹게 농사를 지었던 화전민의 애달픈 삶이 담긴 가사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불려졌다. 애잔한 곡조로. 하지만, 이번 취재는 노랫말 속 칠갑산이 아닌 백제 역사 속에 스며든 칠갑산의 정체성과 그림자를 찾아가는 길. 먼저 ‘위키백과’를 찾아봤다. 칠갑산에 관한 짤막한 설명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런 것이다. “칠갑산(七甲山)은 충청남도 청양군에 있는 산이다. 1973년 3월 6일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백제는 이 산을 사비성 정북방의 진산(鎭山)으로 성스럽게 여겨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그래서 산 이름을 만물생성의 7대 근원 칠(七)자와 싹이 난다는 뜻의 갑(甲)자로 생명의 시원(始源) 칠갑산(七甲山)이라 경칭해 왔다. 또 일곱 장수가 나올 명당이 있는 산이라고도 전한다. 충청남도의 중앙에 자리 잡은 이 산 동쪽의 두솔성지(자비성)와 도림사지, 남쪽의 금강사지와 천장대, 남서쪽의 정혜사, 서쪽의 장곡사가 모두 연대된 백제의 얼이 담긴 천년사적지다.” 백제 도읍지의 주된 산이며, 나라에서 직접 제사를 올린 산. 거기에 세상 만물이 생겨난 공간으로 여겨 이름을 지은 칠갑산은 멸망한 나라를 되살리려 한 ‘백제부흥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백제부흥운동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역사 속에서 사라진 660년부터 663년까지 왕족과 병사 등이 중심이 돼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던 부흥운동을 뜻한다. 청양 시내에서 점심을 먹은 후 버스를 타고 칠갑산 초입에 도착해 먼 곳을 바라봤다. 가까이 완만한 능선 너머 웅장한 산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1400여 년 전 국가를 잃은 백제의 왕과 귀족, 백성들의 슬픈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백제부흥운동의 역사적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660년 신라 김유신의 5만 군대는 육로로,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의 10여 만 군사는 바닷길을 통해 각각 백제를 공격해 왔다.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지금의 충남 부여)으로 쳐들어오자, 백제 의자왕(641∼660)은 태자 효(孝)와 함께 웅진성(지금의 충남 공주)으로 피난하고, 제2왕자 태(泰)가 남아 사비성을 고수했으나 전사자 1만여 명을 내고 패했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복신·흑치상지·도침을 중심으로 한 인물들은 661년 1월 일본에 가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扶餘豊)을 옹립하고, 백제부흥운동을 꾀하였다.” 여기까지가 백제가 신라에 병합된 과정과 백제인의 부활 의지를 요약한 것이다. 위의 과정을 거쳐 백제는 700년에 가까운 시간 속에서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다가 온전히 사라졌다. ◆청양은 사라진 백제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한 지역 공주대학교 이효원의 논문 ‘청양 지역 백제부흥운동 연구’는 각종 고고학 자료를 검토해 현재의 청양군 일대가 사라진 백제를 되살리기 위한 부흥운동의 본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있다. “백제부흥운동 발호 당시 두시원악이라는 이름으로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청양 지역은 부흥운동의 핵심적인 활동이 웅진·사비 지역의 탈환이라는 기치 아래 진행되는 동안 최전선으로서 역할을 했을 것이다. 특히 열기현은 직접적인 전장이 된다는 점에서, 고량부리현과 사시량현은 임존성의 배후성이 되면서도 한티·대치 같은 육로나 무한천·지천 같은 수로를 통해 전장으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로 쓰인다는 점에서 활약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의 선도산이 한 고대왕국의 시작을 알리고, 전성기가 어떠했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라면, 백제의 칠갑산은 침몰하는 배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또 다른 고대왕국을 되살리기 위한 싸움이 벌어졌던 곳이었다. 가뭇없이 흘러버린 기나긴 세월. 칠갑산에 남아 있는 백제의 흔적을 찾아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닐 듯했다. 웅진·사비시대 배후도시였던 청양지역 출토 유물 전시 청양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은 청양 시내에서 자동차로 10분, 버스를 이용해도 2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이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깔끔하게 꾸며진 전시실과 각종 문화체험을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거기에 더해 한때 한국 금 생산량의 70% 이상을 채굴한 청양군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금광체험관 등이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한국관광공사는 다음과 같이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을 소개하고 있다. “백제시대 토기를 굽는 가마를 형상화하여 만들어졌다. 1500년 전 백제 가마터, 청기와, 최익현 유배도, 공자상 탁본, 황금복 거북이와 같은 5대 명품과 금광체험관, 농경문화체험관, 1960년대 추억의 옛거리 전시관, 한상돈 기념관, 유상옥 기증실, 정승공원으로 구성돼있는 박물관이다. 주말에는 토기 만들기, 나만의 컵 만들기, 백제의복 체험 등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부여족 계통의 온조 집단이 현재의 서울 지역으로 내려와 세운 나라다. 웅진과 사비는 백제의 수도였던 도시.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의 청양역사실엔 웅진과 사비 시대 왕도 인접 지역인 청양에서 발굴된 도성 내 건축물인 궁궐, 사찰, 관공서에 사용된 기와와 전돌, 토기 등이 다수 전시돼 눈길을 끈다. “백제의 문화가 가장 화려하고 왕성했던 웅진·사비 시기의 수도 배후 도시로서 도성의 건축물에 사용된 기와와 전돌, 왕실과 수도에 거주하는 이들의 사용한 토기 등을 생산해 공급한 장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던 곳이 청양군”이라는 부연도 이어진다. 이외에도 백제문화체험박물관 특별기획 전시실에선 등짐을 지고 조선 팔도를 오갔던 보부상의 유래와 흔적을 살펴볼 수 있고, 과거 1960~70년대 우리의 생활 모습을 재현한 공간과도 만날 수 있다. 부모와 자녀 세대가 함께 보며 이야기 나눌 소재로 그저 그만이다. 농경문화전시관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우리 땅에 존재했던 고대왕국의 하나인 백제의 역사가 궁금한 여행자라면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서의 시간이 즐거울 수밖에 없을 듯하다. /글·사진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4-10-29

통일 앞둔 신라의 거대 불사 이끈 무열왕

먼저 아주 먼 나라 이야기 한 토막. 현재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로 불리는 탈레반이 통치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그곳 바미안주(州)에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부처의 형상이 있었다. 이름하여 ‘바미안 석불’. 그 바위 불상이 어떤 연유로 만들어졌고, 누가 폭탄을 터뜨려 파괴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 같다. 불상을 포함한 바미안 석굴사원은 아프가니스탄 힌두쿠시 산맥의 암벽을 파서 만들어졌다. 절벽 양쪽 끝자락에 커다란 불상이 조각돼 있었다. 서쪽 불상은 높이 55m, 동쪽에 자리한 불상도 38m 높이로 크기부터가 사람들을 압도했다. 통상은 서쪽 불상이 대중적으로 더 인지도가 높았다. 각종 서적과 신문 기사에 의하면 바미안 불상은 아프가니스탄이 불교 문화권이었던 6세기에 만들어졌다. 그리스 조형미술에 영향 받은 간다라 양식의 불상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도 등장한다. 이는 유서 깊은 불교 유산이라는 의미. 그런데, 2001년 바로 이 바미안 석불이 먼지로 사라진다. 탈레반에 의해 폭파된 것이다. 1996년 아프가니스탄 일대를 통치하게 된 탈레반은 이슬람 교리를 이유로 ‘형상을 가진 우상의 숭배’를 일체 금지한다. 부처의 모습을 한 석상도 이 교조적 정책을 피해가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 내 불교 유적지의 대부분이 로켓포에 의해 형체도 없이 파괴됐다. KBS를 포함한 한국의 방송사는 바미안 석불이 탈레반의 포격으로 부서지는 장면을 TV 화면으로 가감 없이 보여줬다. 비단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류의 공동자산이라 할 유물이 역사 속으로 허망하게 사라지는 모습에 경악했다. 아직도 우리들 기억 속에 선명하다. ◆서라벌 서악의 불상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은… 무열왕릉과 진흥왕릉 등 여러 기의 왕릉이 산재했고, 선도산 성모라는 신라의 태동을 알린 여신의 설화가 전하는 경주 선도산엔 신라가 불교왕국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유물이 우뚝 서 있다. 마애여래삼존불 혹은, 아미타삼존불입상 등으로 불리는 돌에 새긴 부처의 형상이다. 이와 관련된 문화재청의 요약된 설명을 읽어보자. “선도산 정상 가까이의 큰 암벽에 높이 7m나 되는 거구의 아미타여래입상을 본존불로 하여, 왼쪽에 관음보살상을,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상을 조각한 7세기 중엽의 삼존불상(三尊佛像)이 서있다. 서방 극락세계를 다스린다는 의미를 지닌 아미타여래입상은 손상을 많이 입고 있는데, 머리는 완전히 없어졌고 얼굴도 눈이 있는 부분까지 파손되었다. 그러나 남아있는 뺨, 턱, 쫑긋한 입의 표현은 부처의 자비와 의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취재를 위해 3~4차례 찾아간 경주 서악 선도산 일대. 마애여래삼존불의 미학적 완성도는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석불을 뛰어넘는 것 같았다. 크기는 작지만 섬세함과 치밀한 바위 조각 기술은 신라 석공들의 빼어난 솜씨를 미루어 짐작하게 했다. 인터넷 공간을 떠도는 흑백사진 한 장도 눈길을 끌었다.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초반에 촬영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엔 아미타여래입상 앞에 선 남루한 차림의 사내가 보인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사진 속 사내는 현실 바깥 피안(彼岸)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문화재청은 이 사진 속 석불들이 아름다운 이유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미타여래입상의 넓은 어깨로부터 내려오는 웅장한 체구는 신체의 굴곡을 표현하지 않고 있어 원통형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범할 수 없는 힘과 위엄이 넘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묵직해 보이며, 앞면에 U자형의 무늬만 성글게 표현하였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자비의 관음보살은 내면의 법열(法悅)이 미소로 스며나오는 우아한 기풍을 엿보게 하는데, 어느 것 하나 소홀하게 다룬 데 없는 맵시 있는 솜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본존불에 비해 신체는 섬세하며 몸의 굴곡도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 중생의 어리석음을 없애준다는 대세지보살은 얼굴과 손의 모양만 다를 뿐 모든 면에서 관음보살과 동일하다. 사각형의 얼굴에 눈을 바로 뜨고 있어서 남성적인 힘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마애여래삼존불이 가진 특징과 미학적 완성도 마애여래삼존불(아미타삼존불입상)은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로 이어지던 시기의 불상 조각으로 본존불은 높이 7m, 관음보살상은 높이 4.55m, 대세지보살은 높이 4.62m로 파악되고 있다. 크기와 규모에서는 앞서 언급한 바미안 석불에 밀리지만, 예술성 측면에선 결코 뒤지지 않는 이 불상은 특징이 적지 않다. 흥미로운 사실까지 섞여 있다. 아래는 명지대 미술사학과 최선아 교수의 논문 ‘신라 陵墓(능묘)와 추선 佛事(불사): 서악동 고분군과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입상’의 한 대목이다.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입상(마애여래삼존불)은 여러 면에서 이례적이며 특별한 존상이다. 우선 본존과 협시(夾侍·좌우의 보살상)를 안산암과 화강암이라는 서로 다른 석재로 조각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기존 연구에서도 주목했듯 이처럼 別石(별석·각기 다른 돌)으로 삼존을 구성한 것은 거의 유례가 없다. 더욱이 본존을 이루는 안산암은 경도가 높아 가공하기 어려우며, 상의 현재 상태에서도 확인되듯 쉽게 균열이 생겨 불상 제작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석재다.” 본존불만이 아니다. 옆에 선 보살상은 재료가 된 석재가 인근에서 발견되지 않기에 ‘대체 어디에서 돌을 가져왔으며, 어떤 방법으로 산 정상부까지 무거운 석재를 옮겼을까’라는 의문을 부른다. 이에 관해 위의 논문은 이런 부연을 덧붙이고 있다. “보살상을 이루는 화강암은 한반도에서 석불을 제작한 이래 꾸준히 사용한 석재로, 신라에서도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의 제작 이전부터 화강암으로 불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안산암으로 이루어진 선도산 일대에서는 화강암이 전혀 산출되지 않기 때문에 두 보살상은 다른 곳에서 채석해 온 돌로 만든 것이다. 해발 약 390m에 달하는 선도산 정상까지 화강암 석재를 옮겨와 높이 4.5m에 달하는 보살상 두 구를 만들었다는 것은 상의 제작에 상당한 노동력과 기술이 수반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마애여래삼존불, 누가 무슨 이유로 세운 것인지… 그렇다면 이 세 불상은 언제, 누가, 무슨 이유로 만든 것일까? 이 의문에 ‘나무위키’는 “마애삼존불상은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통일신라 초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전체적인 형태는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국보 제109호)의 본존,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국보 제201호)의 본존과 매우 흡사하다”고 간략하게 답한다. 이보다 조금 더 구체적인 걸 알고 싶다면 ‘신라 陵墓(능묘)와 추선 佛事(불사): 서악동 고분군과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입상’을 읽어보길 권한다. 이 논문은 7세기 전반과 650년 전후, 그리고 661~663년 등 그간 다양한 의견이 제시돼온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의 제작 시기를 능묘의 조영과 관련하여 쓴 글이다. 논문의 국문초록(國文抄錄)을 아래 인용한다. “불상의 지리적,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 산의 정상에 6m가 넘는 대불을 조성할 당위성이 가장 높은 시기로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시기, 즉 무열왕 재위기(654~661)를 제시했다. 여기에는 선도산이 6세기 전반 법흥왕 이래 신라 중고기 왕의 능역으로 사용되었지만, 7세기 전반에는 왕릉의 입지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 그러나 654년 김춘추의 즉위 이후 다시금 왕의 능역으로 선택되었다는 점이 주요한 근거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생전에 수릉을 축조하는 관례와 문흥대왕으로 추존된 김용춘의 묘를 이장했을 가능성을 고려해 선도산을 다시 능역으로 선택한 것을 무열왕대로 추정했으며, 산의 정상에 그 아래 왕릉들을 조망하는 방향으로 대형의 아미타상을 세운 것 역시 같은 시기일 것으로 보았다…(후략)” 만약 이런 추정에 힘이 실린다면 무열왕 김춘추는 삼국통일의 주춧돌을 놓은 동시에 통일을 앞둔 신라의 거대 불사를 이끈 왕으로 다시 한 번 이름을 높이는 셈이다.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10-22

건국시조 박혁거세의 神母이자, 女山神은 중국 황제의 딸?

경주의 선도산은 아미타삼존상(仙桃山 阿彌陀三尊像)이라는 신라 불교예술의 미학적 완성도를 보여주는 유적과 무열왕릉,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 등으로 추정되는 왕의 유택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더불어 신라 건국 신화와 관련된 ‘성스러운 어머니’의 스토리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건국 신화’란 한 나라를 만든 시조의 이야기 또는, 왕조가 시발점이 된 설화를 지칭한다. 풀어 쓰면 국가를 세우게 되는 계기와 그 이후의 역사를 다루는 이야기가 바로 건국 신화다. 인류사에서 유래가 드물게 1000년 가까이 존속되며, 찬란한 문화예술 전통을 이어간 신라왕조의 장구한 역사. 당연지사 그에 걸맞은 ‘드라마틱한 건국 신화’가 없을 리 없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을 포함한 고문헌에 기록된 신라의 건국 신화를 옛이야기 스타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라벌(신라)에는 6개의 촌락이 있었다. 이를 ‘육부촌’이라 불렀다. 각 촌락에는 촌장이 있어 크고 작은 마을 일을 결정했다. 6촌장들은 화백회의를 열어 민주적 만장일치제를 통해 마을의 대소사를 진행했다. 기원전 69년. 화백회의에선 왕을 추대해 백성들이 보다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여섯 촌락의 촌장들이 서라벌 남산에 올랐고, 거기서 내려다본 한 우물가에서 신비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것을 발견했다. 우물가에 머물던 흰 말이 하늘로 올라간 후 주변을 살피니 커다한 알 하나가 있었다. 그 알에서 사내아이 하나가 나왔는데, 몸에서 빛이 나고, 짐승들도 아이를 경배하듯 고개를 숙였다. 여섯 마을 촌장들은 박혁거세라 아이의 이름을 짓고 왕으로 모셨다. 알에서 나온 아이는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 하고, 스스로 거서간(최고 통치자) 자리에 올랐다.” ◆고대 건국 신화 속 성스러운 여성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채미하의 논문 ‘한국 고대 신모(神母)와 국가제의(國家祭儀)’는 건국 신화가 가지는 특징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거기에선 ‘건국의 영웅’을 낳아 기른 ‘성스러운 어머니’가 언급된다. 신라와 백제, 고구려의 신모(神母·신의 영역에 있는 어머니)는 물론 멀리 고조선시대 신모까지. 이런 설명이다. “건국 신화는 초현실적·초자연적인 내용을 전함과 동시에 국가의 창업이라는 역사적 사건도 포함하고 있다. 한국 고대 건국신화 역시 신화적 요소와 역사적 요소가 있다. 이러한 한국 고대 건국 신화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다양한 연구들이 있어 왔다. 이중 신모(神母)는 건국 영웅을 낳고 그들을 기르며 새로운 국가를 건설 내지는 건설하기 위해 떠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거나 시조의 조력자로 나온다. 이와 같은 신모로는 고조선의 웅녀와 고구려의 유화, 백제의 소서노, 신라의 선도산 신모와 알영, 금관가야의 허왕후, 대가야의 정견모주가 있다. 그리고 이들 신모는 죽은 후 국가제의의 대상이기도 했다.” 까마득한 옛날 한 나라가 세워지는 데는 탁월한 힘과 빼어난 지략을 갖춘 영웅의 스토리가 필요했다. 고대국가의 ‘건국 주도자’는 대부분이 남성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상당수 설화나 전설이 그렇듯 건국 신화에도 여성은 반드시 등장한다. 신라라고 예외일 수 없다. 바로 그 여성이 ‘선도산 신모’와 ‘알영’ 등이다. 그렇다면 알영은 어떤 인물일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펼쳐 본다. “박혁거세가 왕이 된 후 어느 날이다. 서라벌의 알영 우물가에 닭의 형상을 한 용이 나타난다. 그 신비한 짐승의 겨드랑이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으니 그녀가 바로 알영이다. 미모가 빼어났고, 피부는 백옥처럼 맑았다. 하지만, 흉측하게도 인간의 입술이 아닌 닭의 부리가 달려있었다. 놀란 사람들이 서둘러 북쪽 냇가로 데려가 깨끗하게 몸을 씻기니 마침내 닭의 부리가 떨어졌다. 이 여자아이가 자라 열세 살이 되자 박혁거세가 아내로 삼았다. 서라벌 백성들은 자신들의 왕과 더불어 왕비가 된 알영까지 성인(聖人)으로 받들며 기뻐했다.” ◆신라의 첫 번째 왕 박혁거세를 낳은 사람은… 신라 건국 신화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고대왕국 서라벌의 첫 번째 통치자 박혁거세다. 한양대 고운기 교수는 그의 책 ‘인물한국사’에서 박혁거세에 관해 “기원전 69년에 태어났다. 동해안의 한 바닷가에서 어진 사제 의선의 지도를 받아 성장해 우리나라 고대왕권국가의 문을 여는 신라를 세웠다”고 쓴다. 이는 “고구려의 동명왕보다 20년 먼저, 백제의 온조왕보다 40년이 앞선 시점이었다. 그는 어진 왕이었으며 지혜로운 왕이었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인 서기 3년, 혁거세는 하늘로 올라가고 7일 뒤에 몸만 땅으로 흩어 떨어졌다”는 것 역시 고 교수의 설명이다. 박혁거세의 아내는 앞서 쓴 것처럼 ‘닭의 부리를 가지고 태어난 여성’ 알영. 그렇다면 신라를 태동시킨 ‘지혜롭고 어진 왕’ 박혁거세의 어머니는 누구일까? 백마가 머물다 떠난 서라벌 어느 우물가에 놓인 알에서 박혁거세가 나왔다는 난생설화(卵生說話·사람이 알에서 탄생했다는 이야기)에 기반한 신라 건국 신화의 또 다른 주요 등장인물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 기술돼 있다. “선도산 신모(仙桃山神母)·선도 성모(仙桃聖母)라고 불리는 전설 속 인물은 중국 황실의 딸로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해동(海東)에 와서 머물렀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자 아버지가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솔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으라고 했다. 이에 솔개를 놓아 보내자 선도산으로 날아가 멈추므로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아 지선(地仙)이 됐다. 오랫동안 이 산에 웅거하면서 나라를 지켰는데 이상하고 신령스러운 일이 많았다. 그녀가 처음 진한(辰韓)에 와서 성자(聖子)를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었으니 반드시 혁거세(赫居世)와 알영(閼英)을 낳았을 것이다.” ◆선도산 신모에 관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 사람이 알을 낳았다는 것 자체가 합리성과 이성을 갖춘 21세기 사람들의 과학 상식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신라의 건국 신화는 자그마치 2000년 전에 만들어진 이야기. 과장과 허구가 배제될 수 없다. 현재 존재하는 사람들 중 누구도 직접 본 바 없으니,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의 어머니(선도산 신모)’는 풍문과 설화, 고문헌의 짤막한 기록에서만 그 모습을 희미하게 드러낸다. 그러니, 그녀의 삶과 죽음, 행적 역시 기록자에 따라 엇갈릴 수밖에 없다. 하나의 의미망 안에 포획하기가 어려운 걸 넘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 등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고운기의 ‘인물한국사’로 돌아간다. “고려 예종 11년(1116년). 김부식이 송나라 조정에 갔다. 일행을 접대하는 송나라 사람 왕보(王9EFC)가 사당에 걸린 선녀의 초상을 보여주며 ‘옛날 어느 제왕의 딸이 바다 건너 진한에 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곧 해동의 첫 임금이다. 그녀는 오랫동안 선도산에 살았는데 이것이 그 초상화’라고 말했다. 일연의 ‘삼국유사’ 감통편은 선도산 신모 이야기로 시작된다. 신모는 본디 중국 황실의 딸로 이름은 사소(娑蘇)였다. 신선의 술법을 익혀 동쪽 나라에서 살았다. 신선이 되어 집을 짓고 지낸 곳이 서연산(西鳶山)이었다. 그 신모가 진한에 왔을 때 성스러운 아들을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게 했다.” 이상이 두 고문헌의 기록을 풀어 쓴 것이다. 이것만으로는 선도산 신모를 둘러싼 비밀이 명쾌하게 풀렸다고 할 수 없을 듯하다.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10-15

“성모사에서 고백을 하면 사랑도 쉽게 잉태되겠지”

선도산과 서악마을 일대는 신라 천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수많은 설화와 흥미로운 전설이 깃들어있다. 그 이야기들은 소설의 소재로도 얼마든지 사용이 가능할 터. 부침을 거듭했던 한 국가의 역사 이상으로 개인의 기억도 귀하고 소중하다는 걸 일깨워주는 김도일 작가의 단편소설을 2회에 걸쳐 분재(分載)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선도산과 서악마을이다. /편집자주 책방은 열한 시에 문을 열어 여섯 시에 닫는다. 영업시간을 가급적 지키는 편이지만 상황에 따라 조금 빨라지기도 하고 반대가 되기도 한다. 오늘도 마당 가장자리에 심어 놓은 봉선화와 백일홍에 물을 주고 호두가 헤집어놓은 잔디를 손보느라 십 분 정도 늦게 문을 열었다. 책방을 방문하려면 마을 중간에 있는 경로당 마당에 주차를 하고 안쪽으로 이삼 분쯤 더 걸어야 한다. 대문을 열고 잔디 마당을 가로질러 한옥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실내화를 갈아 신어야 들어올 수 있는 책방은 주로 독립 출판사에서 낸 소설과 에세이, 그리고 경주에 관련된 엽서와 기념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책방의 식구는 나와 엄마 그리고 열두 살 강아지 호두까지 셋이다. 커다란 무덤들을 품고 있는 마을 한가운데 있는 책방은 원래 아빠가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던 집이었다. 요양원에 계시던 할머니가 삼 년 전에 돌아가시면서 집의 상속인이 독자였던 아빠의 외동딸인 내가 되었다. 아빠는 내가 열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시절부터 살던 집은 낡기도 했거니와 할머니가 요양원에 들어가면서는 사람이 살지 않아 폐가나 다름없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일본으로 가 살던 엄마와 나는 처음에 집을 처분하려 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코로나에 걸린 내가 제때 치료받지 못해 패혈증으로 진행되어 죽기 직전까지 간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왠지 고국이 그리워졌다고 할까. 거기에다 이국에서 딸을 잃을 뻔했던 엄마가 외국살이에 대한 염증이 깊어져 계획이 바뀌게 된 것이다. 할머니와 아빠의 유산과 엄마가 모은 돈으로 집을 새로 짓다시피 고친 후 카페와 책방 중 뭘 할까 고민을 했는데 큰 병을 앓은 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카페 일은 무리일 것 같아 책방으로 결정했다. 오랫동안 출판사에서 일했던 엄마의 영향도 컸다. 책방 옆에 딸린 조그만 밭은 엄마를 위한 것이다. 지금도 엄마는 꽤 유명한 소설 전문 번역가이다. 부모님은 일본에서 처음 만났다. 엄마가 그곳에 산 지 일 년 정도 지났을 때쯤 아빠는 막 유학을 와 한인 학생들 모임에 처음으로 나갔는데 고향 사투리가 정겨워 둘이 자연스럽게 친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가 외국살이 선배로서 도움이 되는 정보도 주고 이것저것 챙겨주다 보니 아빠가 엄마에게 빠지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럼, 엄마는 아빠에게 언제 관심이 갔던 거야?” “이성으로? 음, 글쎄? 아빠 고향을 들었을 때?” “같은 경상도인 것은 처음부터 알았다며?” “그땐 그냥 고향 사람이라 반가웠던 거고. 아빠 집이 어딘지 알았을 때,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곳곳에 널린 커다란 무덤들, 높이 올라 하늘을 가리는 나이 많은 소나무, 아주 옛날엔 글 읽는 소리가 담 밖으로 들렸을 서원과 이것들을 아우르는 마을, 그리고 마을을 안고 있는 뒷산까지… 아빠를 보면 모든 것들이 뚜렷하게 떠올랐어. 그러다 보니 아빠를 한 번 더 보게 되고, 그러면서 또 정이 들고.” “뭐야? 뭔 말인지 도통 모르겠네.” “그러니까 아빠가 살던 동네가…. 엄마가 첫사랑과 처음으로 데이트를 한 곳이거든.” 엄마의 첫사랑이라는 남자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하고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책장 서랍 속에서 종이봉투 안에 있는 사진 뭉치들을 발견했었다. 요즘 유행과는 많이 다른 머리 모양과 화장들이 신기하고 재밌는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들이었다. 지금의 나보다 서너 살이나 어린 엄마와 친구들은 하나같이 앞머리를 봉긋하게 말아 고정했고 진한 자주색 립스틱으로 입술을 굵게 칠했었다. 우리는 정리를 잠시 멈추고 사진을 앞에 두고 웃었는데 엄마의 웃음에는 반가움과 회상이, 내 웃음에는 신기함과 촌스러움에 대한 놀림이 들어있었다. 한 장씩 넘기던 사진 중간에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는 남자의 팔짱을 끼고 있는 엄마가 있었다. “어머나, 이게 여기 있었네. 잃어버리거나 버린 줄 알았는데.” 사진마다 언제 찍었고 옆에는 누구누구라는 걸 어린애처럼 알려주던 엄마가 여기에서는 말을 잊은 채 한참을 사진 속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어릴 때 헤어졌던 가족을 만난 듯한 표정으로. “엄마, 엄마? 누구야? 누구냐니까?”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골판지박스로 둘러싸인 방 안에서 오랜만에 엄마와 한 이불을 덮고 누웠다. 온전치 않은 몸으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움직이고 자정이 넘어 겨우 몸을 누였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옛날얘기 해줘.” “엄마도 옛날얘기 잘 몰라.” “아니, 엄마 첫사랑 이야기 말이야. 언제 만났어? 얼마나 사귄 거야? 왜 헤어진 건데?” “야, 헤어지긴… 시작도 안 했는데.” 짝사랑이었던 것이다. 학교와 과를 정해 원서를 내고 시험을 쳐서 대학을 가던 시절, 시험장에서 앞뒤로 앉았던 엄마와 Y는 오리엔테이션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금세 친해졌다. 마치 오래된 친구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엄마의 눈에 누가 봐도 낯선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게 불편해 보이는 옆자리의 남자아이가 들어왔다. ‘누가 봐도’라고는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감정을 알아채고 먼저 다가가 챙기는 것은 엄마의 타고난 능력이다. 엄마가 그 남자에게 말을 붙인 것을 계기로 엄마와 Y, 그와 옆에 J까지 네 사람은 친해져 한동안 붙어 다녔다. 사랑의 감정을 우정으로 덮은 채로. “근데 왜 그 남자한테 마음이 갔던 거야? 잘 생기지도 않았고, 엄마 스타일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 왜 끌렸을까? 그 친구가 좀 어두운 구석이 있었거든. ‘나 우울한 사람이요’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게 아니라, 평소에 농담도 하고 웃기도 잘하다가 긴장이 살짝 풀릴 때 보이는 어둠 같은 거 이해해?” “알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아 저 사람의 어둠은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거다, 그러니까 내가 저 사람의 어둠을 없애줘야겠다, 그런 연민 같은 거였어?”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어둠까지는 맞아. 근데 연민은 아니었어. 그냥 그 어둠에 공감한 거지. 일종의 동질감이랄까?” 남들 앞에서는 언제나 밝은 얼굴의 엄마였다. 엄마의 마음 안에 어둠이 없지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엄마한테 직접 얘기를 들으니 이상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두 달쯤 지났을까, 한밤중에 목이 말라 방문을 열었다가 식탁에 엎드려 있는 엄마를 보고는 문을 다시 닫았던 때가 있었다. 일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든 건지, 울고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엄마가 안고 있는 슬픔에 대해 자각하는, 처음으로 엄마가 불쌍하다고 생각되는 시간이었다. 아빠는 엄마의 어둠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 이해를 표현하지 않을 정도로 섬세한 아빠는, 무덤덤하고 푸근한 모습으로 엄마 옆에 가만히 있어 주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비바람에 떨어진 벚꽃잎이 거리에 떨어져 대책 없이 젖던 날, 엄마는 무슨 이유인지 우울해하는 Y를 데리고 술을 마셨다. 시장 안 분식집에서 막걸리를 평소보다 많이 마신 둘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한 엄마가 숨겨 왔던 짝사랑에 관해 Y에게 털어놓았다. 다음 날 술이 깬 엄마는 부끄러움에 잠시 몸부림을 쳤지만 한 편으로는 후련했고 이왕 이렇게 된 거 기회를 봐서 직접 고백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Y에게는 남자에 대한 이런저런 감정들을 솔직하게 얘기를 했고 조언을 구하기도 했는데 신통할 정도로 상대방의 감정을 읽을 수 있던 엄마의 능력이 그때 왜 Y에게는 통하지 않았는지 불가사의한 일이다. 엄마의 적절한 고백 기회는 곧 찾아왔다. 전공수업의 조별 과제를 구실로 둘이서 유적지로 답사를 가게 된 것이다. 남자의 불성실한 학업 태도로 인해 대부분 그와 같은 조가 되는 것을 반기지 않았기에 둘이 한 조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과제는 여러 유적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무열왕릉과 선도산으로 정한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거기에 성모사라는 사당이 있는데 신라를 세운 이의 어머니를 모신 곳이거든. 한 나라를 세운 아이를 잉태한 분의 사당이라는데, 거기서 고백을 하면 사랑의 감정쯤은 쉽게 잉태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지만 사랑을 앓고 있는 스무 살의 간절한 바람이라 생각한다. 첫 데이트 날(물론 엄마만의 생각이다), 점심을 먹은 후 두근거리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를 써가며 고백의 장소를 향해 올랐다.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는 중에 사람들이 오며 가며 하나씩 쌓은 돌이 탑을 이루고 있었다. 엄마는 뒤따라오던 남자가 거기에 돌을 하나 보태는 것을 보았다. “정상 바위에 새겨진 삼존불 앞에서 걔가 그러더라. 자기랑 Y가 사귀다가 헤어졌는데 자기가 모난 구석이 많은 게 이유였다고. 자기는 앞으로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타이밍 참 기가 참 기가 막히지 않냐? 고백도 못 해보고 차인 거지,” 그 후 엄마는 두 사람과 마주하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Y에게 떠들어 댄 것이 너무 부끄러웠고 두 사람 이별의 이유가 엄마에게 있는 것 같아 미안해 미칠 지경이었다. 매일 학교에 가는 것이 고통이었고 그러다 보니 전공에 대한 회의도 들었기에 다음 해에 휴학을 하고 큰이모가 있는 일본으로 갔다. “그 후로는 그 아저씨랑 Y를 본 적이 없었던 거야?” “걔가 군인일 때 누구 결혼식에서 얼굴을 본 것 같고… 아, 자퇴서를 내러 갔을 때가 마지막이었구나. 아빠를 만나고 있었을 땐데 그래도 마음이 좀 이상하더라. 헤어지고 나서 눈물도 좀 흘렸던 것 같고. Y는 한 번도 못 봤어. 연락이 닿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 “그 돌탑 말이야. 거기 가면 아직 그 아저씨의 마음이 있을 수 있겠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쌓인 탑이니까. 비바람에 무너지지 않았으면 돌무더기 아래에서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받치고 있지 않을까? 시시하지?” “그러게…. 흔한 삼각관계네. 본인들은 심각했겠지만…. 이제 잠 온다.” 한국에 오면 뒷산에 꼭 가 봐야지 생각했는데 지금껏 한 번도 오르지 못했다. 산을 오를 체력이 될지 겁이 나기도 했고 책방 문을 열고 운영하는 게 예상했건 것 보다 일이 많았다. 엄마는 올라가 봤을까? 오늘도 아침부터 무척 더운 날씨다. 물기를 못 빨아들인 텃밭의 콩과 들깨가 창백해진 이파리들을 땅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엄마는 밭 전체가 충분히 젖을 정도로 물을 준 다음 책방으로 올 것이다. 호두는 잔디 속에서 무얼 봤는지 앞발로 흙을 한 무더기 파헤쳐 놓고 지금은 마루 밑에서 혀를 쑥 내밀고 엎드려 있다. 방금 튼 에어컨이 책방 안을 식히기도 전에 첫 손님이 들어왔다. 귀밑머리가 하얘지기 시작한, 50대 초중반쯤 되어 보이는 큰 눈이 왠지 익숙한 남자였다. 책방을 둘러보는 남자를 신경 쓰며 전날 매출을 정리하고 있는데, “아이고 무슨 날씨가 이렇게 덥대? 호두야!” 마당을 들어서는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 끝) 김도일 소설가 소설가 김도일(49)은 2017년 ‘포항 소재 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자신의 생활 터전인 포항과 경주 등 경상북도 일대를 소설의 무대로 삼는 경우가 많다. 명료한 문장과 곡진한 세계 인식으로 주목받는 그는 소설집 ‘어룡이 놀던 자리’를 썼고, 공동창작집 ‘당신의 가장 중심’ ‘작은 것들’ ‘쓰는 사람’ ‘최소한의 나’ 등에 필자로 참여했다.

2024-10-01

그때 두고 온 내 마음은 아직 거기에 남아있을까?

선도산과 서악마을 일대는 신라 천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수많은 설화와 흥미로운 전설이 깃들어있다. 그 이야기들은 소설의 소재로도 얼마든지 사용이 가능할 터. 부침을 거듭했던 한 국가의 역사 이상으로 개인의 기억도 귀하고 소중하다는 걸 일깨워주는 김도일 작가의 단편소설을 2회에 걸쳐 분재(分載)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선도산과 서악마을이다. /편집자주 부처와 보살들이 새겨진 암석은 오랜 세월 동안 깎이고 패이고 닳아져 있었다. 특히 중앙의 불상은 그 훼손 정도가 심하여서 얼굴의 절반 이상은 형체를 알 수 없었고 바위가 깨지면서 날카롭고 뾰족한 흔적을 남겨 놓았다. 그나마 양쪽 보살들은 세월을 따라 부드럽게 닳아 형체만 희미했을 뿐 날카롭지는 않았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한 자리에서 한참 동안 불상을 바라봤고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떨어져서 보면 평범하지만 가까워질수록 날카로움과 뾰족함을 드러내는 것이 나와 똑같았다. 보살들의 밝은색과는 달리 검은 바위에 새긴 모습 또한 근본이 어두운 내 성격에 비교되었다. 이것은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저 바위들의 본성처럼. 그래서 내 마음과 달리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멀어지게 하는 것인가? 가슴이 답답해졌다. 신문사에 있는 선배에게 전화가 온 것은 해가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 막 접어들 때였다. 수은주를 뚫을 듯한 기세가 한풀 꺾일 시간이었지만 한낮의 더위에 의식마저 녹아 방바닥에 흥건히 고인 기분이었다. 에어컨 바람 앞에서 의미 없이 TV 리모컨만 괴롭히다가 수신 단추를 눌렀다. “김 선생, 내가 어제부터 매주 연재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경주 선도산에 관한 이야기야. 매번 취재 기사만 올리면 독자들이 식상해하니 연재 중간에 김 선생 소설이 한두 번 들어갔으면 좋겠어. 생각 좀 해보고 답을 줘요. 나와 시간을 맞춰 취재를 같이 가보는 것도 괜찮고.” 평범한 원고청탁의 전화였다. 그러나 통화의 여운은 한참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저 깊은 곳으로 내려간 얇은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게 느껴졌다. 마치 잊고 있었던 커다란 기억이 삼십 년을 시간을 거슬러 떠오르는 것을 예고하듯. 1994년, 대학 학보사의 오월은 창문 너머 캠퍼스의 활기찬 기운과는 다른 세상이었다. 총학생회 출범식을 앞두고 취재 방향을 정하고 대학방송국, 교지편찬위와 공동기자단을 꾸릴 준비, 처음으로 큰 행사를 경험하는 1학년 수습기자들을 교육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대학의 낭만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고달픈 기자 생활을 못 견뎌 다 떠나버리고 3학년 편집장 선배와 2학년인 나와 동기, 이렇게 셋이서 격주로 신문을 내야 했다. 그래서 사망한 북한 지도자의 분향소를 설치해 논란이 된 다른 지역 대학의 취재도 나 혼자 가야 했고 학교 재단 비리를 파헤치는 단체의 움직임도 놓칠 수 없었다. 수업은 고사하고 집에도 들어가지 않은 채 학보사에서 먹고 자는 게 일상이었다. 소파의 높낮이를 등으로 느끼며 잠에 빠져 있는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전날 밤도 선후배들과 결론 나지 않을 주제로 떠들며 냉동식품과 과자를 안주 삼아 소주를 나눠 마신 후 그대로 쓰러진 것이었다. 두통과 속쓰림에 괴로워하며 일어나니 학보사에는 아무도 없었다. 테이블을 더듬어 담배를 찾았지만 치우지 않은 테이블 위에는 종이컵마다 가득 박힌 담배꽁초만 역한 냄새를 내고 있었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어, 네가 웬일이냐? 들어와. 담배 있냐?” “어제도 여기서 잤냐? 와, 냄새 지린다. 아무리 집에 안 들어가더라도 좀 씻고 다녀라.” 같은 과 친구 H가 가방에서 새 담배를 꺼내 갑 채로 던지고는 앉을 만한 자리를 찾았다. 나는 내 책상 의자에 앉아 담배의 비닐을 벗겨 불을 붙이고는 옆 책상의 의자를 친구에게 내주었다. “과는 잘 돌아가지? 교수님들도 다 잘 계시고? 안부 좀 전해주라. 근데 누추한 분께서 이 귀한 곳에는 어쩐 일이냐?” “저 주둥이는 여전하네. 아무리 여기 꿀단지가 있어도 한 번씩 수업 들어와서 성의도 좀 보여라. 교수님 화 많이 나셨어. 이번에 조별 과제에도 참여 안 하면 너 졸업할 때까지 교수님 수업 들어오지 말래. 전공 교수가 들어오지 마라는 건 너 졸업 안 시키겠다는 거야 임마. 내가 교수님께 사정사정해서 너랑 같은 조 하겠다고 했어. 너 인간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말이야. 어쩌다 너 같은 놈하고 친구가 돼서 내 청춘이 꼬이는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우연히 내 오른편에 앉은 H와 그 오른편에서 이미 H와 친해 보이던 Y, 군을 전역하고 입학을 해 또래보다 네 살이나 많은, 왼편에 앉아 있던 J형과 나는 처음부터 마음이 맞아 학기 초부터 붙어 다녔다. 숫기 없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쩔 바를 모르고 힘들어하는 게 그들에게 전달되었는지 내게 제일 먼저 말을 건 사람이 J형이었고 두 번째가 H였다. 1학년 수업은 시간표가 거의 똑같았기에 우리는 학교에서 늘 함께였고 내가 학보사 일로 하교가 늦어지면 그들은 학교 근처 시장에 있는 분식집에서 나를 기다렸다. 2학기가 되자 수습 딱지를 떼고 정식 기자가 되었고 학보사 일은 더 바빠졌다. 어쩔 수 없이 수업을 빠질 때가 많았고 과제물 제출도 빼먹기 일쑤였다. 이미 학사경고를 예상했고 그렇게 된다면 2학년이 되기 전 휴학과 입대를 선택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렇기에 학사경고를 면한 성적은 꽤 의외였다. 나를 위해 J형이 대리출석을, H와 Y는 과제물을 대신 써서 제출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이렇게 나를 이해해주고 바라는 것 없이 나를 챙겨주는 그들이었다. 특히 H는 한 번씩 학보사로 생사 확인을 한다며 찾아와 시험 족보와 담배 따위를 던지고 가며 나를 물가에 내놓은 동생 취급하듯 했다. 학보사 사람들이 H를 내 여자친구로 오해를 해 이를 전해 들은 넷이서 크게 웃은 적이 있었다. 답사지인 무열왕릉으로 가려면 기차로 한 시간 반을 달려 역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야 했다. H가 시키는대로 일회용 카메라 하나만 챙긴 나와 달리 H는 배낭에 무언가를 가득 담아 왔다. 2명이 조를 맞춰 수행해야 하는 과제는 포함해야 하는 요구사항이 하나 있었는데 반드시 답사지에서 조원 두 명이 들어간 사진을 찍어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누군가 혼자 과제를 하고 나머지 하나는 숟가락만 얹는 (나 같은) 얌체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임을 알았기에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시내버스에서 내리자 벌써 열한 시 반이 지나 있었다. 주말이라 사람들이 많았고 도로 건너 넓은 주차장에도 버스와 차들이 가득 차 빈 곳을 찾기 어려웠다. 무리를 지어 놀러 온 사람들 속에 섞이니 내 마음에도 공간이 생기는 것 같았다. 흐리지 않지만 희고 두꺼운 구름이 높은 곳 군데군데에서 태양열을 가려 주어 덥지 않은 상태에서 푸른 하늘을 누릴 수 있는 날씨였다. H는 내게서 받은 카메라로 입구의 조감도를 찍었고 나는 뒤에서 H의 배낭을 멘 채 그녀가 하는 것을 지켜보며 담배를 피웠다. 왕의 무덤과 그 뒤로 왕을 호위하듯 네 기의 무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무덤과 무덤 사이에는 생의 활력들이 소란스럽게 돌아다녔다. 살아서는 고귀한 존재였다가 죽어 누운 자리가 구경거리가 된 기분은 어떨까를 생각하며 사진 찍는 H를 따라다녔다. “야, 여기에 내려놓고 거기 앞주머니에 자리 있을 거야. 그거 깔고 가방 안에 있는 것 꺼내 예쁘게 한 번 차려 봐. 누님이 시장하시다.” “또 오라버니한테 까분다. 근데 이게 다 뭐냐? 너희 집 식당이나 반찬가게 같은 거 차렸냐?” “야, 말도 마라. 새벽부터 이거 준비하느라고 아주 죽는 줄 알았다. 이 누님이 어디서 죽도 못 얻어먹을 것 같은 너 먹이려고 이 고생을 한 거 아니겠냐.” “오, 좀 감동인데? 우리 H 시집보내도 되겠다. 그러고 보니 오늘 좀 차려입은 것 같다? 얼굴에도 분칠 좀 한 것 같고.” “쉰 소리 그만하고 먹기나 해, 물도 먹어가며. 야, 근데 나한테 장가오는 남자는 확실히 땡잡을 것 같지? 이 차린 것 봐라. 내가 만들었지만…… 감동이다 감동.” 준비한 음식은 내가 좋아하는 것 위주였고 맛도 상당히 좋았다. 맛있는 음식과 끊이지 않는 즐거운 대화, 맑은 공기와 선명한 색깔의 경치는 우리 앞에 놓인 과제를 잊게 했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처럼 여행이나 소풍을 나온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점심을 먹고 왕릉을 둘러본 후 나가기 전 아기를 유모차에 태운 부부에게 우리 둘의 사진을 부탁했다. 친밀한 포즈를 취하라는 아기 아빠의 요구에 나는 손가락으로 V를 그렸고 H는 내게 팔짱을 꼈던 것 같다. 왕릉 옆에 있는 마을에서 선도산 정상까지는 삼십 분 거리의 산길이었다. 술과 담배에 몸을 맡긴 대가를 근육과 폐의 고통으로 치르는 것 같았다. 따라오는 기척이 없자 한심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기다려주는 H와 가다 쉬다를 서너 번 한 후 겨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의 저질스러운 체력과는 별개로 산 정상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러나 낮은 높이와는 달리 산은 아래로 도시와 도시를 감싸고 펼쳐진 들판, 그 평야를 가르는 고속도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풍경을 제공하였다. 바위를 품고 있는 산 정상에는 절벽 한쪽을 깎은 불상 셋이 있었는데 여기가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였다. 부처와 보살들이 새겨진 암석은 오랜 세월 동안 깎이고 패이고 닳아져 있었다. 특히 중앙의 불상은 그 훼손 정도가 심하여서 얼굴의 절반 이상은 형체를 알 수 없었고 바위가 깨지면서 날카롭고 뾰족한 흔적을 남겨 놓았다. 그나마 양쪽 보살들은 세월을 따라 부드럽게 닳아 형체만 희미했을 뿐 날카롭지는 않았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한 자리에서 한참 동안 불상을 바라봤고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떨어져서 보면 평범하지만 가까워질수록 날카로움과 뾰족함을 드러내는 것이 나와 똑같았다. 보살들의 밝은색과는 달리 검은 바위에 새긴 모습 또한 근본이 어두운 내 성격에 비교되었다. 이것은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저 바위들의 본성처럼. 그래서 내 마음과 달리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멀어지게 하는 것인가? 가슴이 답답해졌다. “진짜 보살이라도 되었나? 왜 그리 넋을 놓고 있어?” “H야, 내가 왜 수업에도 들어가지 않고 학보사에 눌러있는지 아냐? 물론 학보사 사정도 있지만 사실은 Y 때문이다. J형이랑 넌 몰랐겠지만 우리 작년에 잠시 사귀었어. 그런데 Y가 싫다네. 가까워질수록 내가 어두운 사람이래. 친해질수록 너무 날카로워서… 그래서 자기가 상처를 많이 받는단다. 내 의도와는 달리 걔는 그렇게 느꼈나 봐. 그런 말 듣고 관계가 일방적으로 정리되니까 Y 얼굴을 마주할 용기라 안 나더라. 반박할 수도 없고. 그러니까 학보사는 내 도피처야. 앞으로 누굴 만나도 상처만 줄 것 같아.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이런 내가 앞으로 누굴 좋아할 수 있겠냐? 아까 올라올 때 돌탑에 돌 하나를 보태면서 Y에 대한 마음, 이성으로서 누굴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탑 위에 얹었다. 하, 털어놓고 나니 시원하네. 어이 친구, 그만 내려가자.” 다음 해 H는 휴학을 한 후 일본으로 갔고 나는 입대를 하였기에 자연스럽게 우리 넷이 모이는 일도 사라졌다. 내가 말년 휴가를 나왔을 때 J형이 결혼했는데 식장에서 만난 H는 학생 때의 선머슴 티 대신 우아하고 성숙한 여성이 되어있어 아직 군인인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복학을 하고 자퇴 신청서를 들고 온 H와 다시 만났다. 전공을 바꿔 일본에서 공부를 새로 할 예정이며 유학 중에 만난 남자와 거기에 터를 잡을 예정이라고 했다.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앞날을 응원하고 헤어진 후 피운 담배 연기에 눈이 따가웠다. Y의 소식은 어느 곳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 돌탑 위에 마음을 두고 온 때문인지, 아직 닳지 못한 성격 탓인지 등 떠밀리다시피 한 결혼이 처참한 실패로 끝나버린 후 몇 번의 만남이 있었지만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십 년 동안 선도산 지척에 살며 거기에 한 번 가볼 생각은 왜 나지 않았던 걸까? 그때 두고 온 내 마음은 아직 거기에 남아있을까? 다음 주 잡은 선배와의 취재 약속 전에 혼자 삼십 년 전 그 길을 좇아 걸어봐야겠다. 소설가 김도일(49) 은 2017년 ‘포항 소재 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자신의 생활 터전인 포항과 경주 등 경상북도 일대를 소설의 무대로 삼는 경우가 많다. 명료한 문장과 곡진한 세계 인식으로 주목받는 그는 소설집 ‘어룡이 놀던 자리’를 썼고, 공동창작집 ‘당신의 가장 중심’ ‘작은 것들’ ‘쓰는 사람’ ‘최소한의 나’ 등에 필자로 참여했다. (계속)

2024-09-24

서악마을 곳곳 거대한 능들, 신라 천년 가족사·사연 서려

무열왕릉,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 그 외에도 왕이나 최고위층 귀족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묻힌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능(陵)들…. 선도산과 서악마을을 돌아본다는 건 신라 왕들이 조용하게 잠든 유택 사이를 방황하는 일과 다름없다. 신라 천년의 역사 속을 거니는 행위인 것. 진흥왕과 진지왕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였고, 삼국통일의 주춧돌을 놓은 무열왕은 진지왕의 손자다. 살아서 가장 가까웠던 이들이 죽어서도 1천년 이상을 지호지간에 묻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형상은 무언가 애틋하고 가슴 뜨거워지는 감흥을 보는 이에게 선물한다. 그게 최고 권력자의 봉분이 아니라 보통 백성의 무덤이라 해도 다를 게 없을 듯하다. 기자 역시 그런 감정을 피해갈 수 없었다. ◆진흥왕의 손자가 묻힌 진평왕릉에서 쓴 한 편의 시 신라사(新羅史)를 돌아볼 때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통치자 중 하나이며, 공적 또한 숱했던 진흥왕의 능을 찾았던 지난달 하순. 그가 아낀 장남 동륜(銅輪)의 아들, 그러니까 진흥왕의 손자이자 진지왕의 조카인 진평왕의 유택(幽宅)까지 찾아갔다. 할아버지와 숙부가 묻힌 선도산이 아닌 경주시 보문동에 위치한 진평왕의 능. 후텁지근한 바람 부는 한낮.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진평왕의 모습을 상상했다. “진평왕(眞平王)은 태어날 때부터 외모가 범상치 않았고 체격이 컸다. 거기에 지혜롭고 의지가 굳기까지 했다. 사냥을 무척 좋아해 이를 말리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다만, 죽은 뒤 무덤 속에서도 간언(諫言·왕의 잘못을 바로잡도록 하는 신하의 말)을 하는 충신에게 감동해 사냥을 그만둔다. 진평왕은 키가 11자나 되었으며, 천주사(天柱寺)를 방문했을 때 그가 밟은 돌계단이 한꺼번에 3개나 부서지기도 했다.” 다수의 신라 왕들에 관한 책과 논문을 읽고, 그들의 유택을 찾으며 보낸 몇 주의 시간 탓이었을까? 진평왕릉에 갔던 날 밤엔 다음과 같은 졸시를 쓰기도 했다. 제목은 ‘진평왕릉 훑어간 바람’. 화살 맞은 사슴이 악몽으로 돌아온 밤 청동가위로 길어진 초의 심지를 자른다 조부 진흥이 그토록 만류했으나 버리지 못한 사냥 취미, 그 탓인가 사찰 돌계단을 두부처럼 부순 완력도 열 자 아홉 치의 몸피로도 꿈을 막을 수야 일찌감치 정해놓은 장지가 땅꺼짐에 벌어지고 어젠 검은 그늘 만드는 까마귀 떼 다녀갔다고 품고 자던 마야부인 목을 틀어쥐고 식은땀 범벅으로 깨어난 미명 문득 내려다보니 무섭게 자라있는 발톱 왕의 의지로도 불가능한 일이 있다. ◆선도산, 조카와 숙부의 안식처...문성왕릉과 헌안왕릉 진평왕의 할아버지인 진흥왕과 진흥왕의 차남인 진지왕의 유택 외에도 선도산엔 왕의 지위에 올랐던 조카와 숙부의 안식처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문성왕릉과 헌안왕릉이다. 선도산 자락에서 볼 수 있는 두 능 역시 그다지 크고 화려하게 장식되진 않았지만, 고적한 풍경 속에 소박하게 솟아 있는 게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문성왕과 헌안왕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신라 46대 왕인 문성왕에 대해서 ‘나무위키’는 이런 설명을 들려준다. “신라 45대 신무왕 김우징의 아들로 신라 하대에서 애장왕(제40대) 이후 오랜만에 등장한 적장자 군주다. 김제륭, 김명, 장보고로 이어진 반란의 시대를 끊어내고, 통일신라의 수명을 늘린 수성 군주로 평가된다. 857년 승하했고 공작지(孔雀趾)라는 땅에 묻혔다. 문성왕은 죽을 때 유언으로 아들이 아닌 숙부 김의정(金誼靖)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자신의 아들이 아닌 숙부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공작의 발가락’이라는 묘한 이름의 땅에서 영원한 잠에 든 문성왕. 그렇다면 지금의 경주시 효현동이 문성왕 때는 ‘공작지’로 불렸던 걸까? 이에 대해서는 또 다른 취재가 필요할 것 같다. 그렇다면 조카로부터 왕의 권력을 받아 신라 47대 왕이 된 헌안왕의 삶은 어떠했을지. 헌안왕의 재위 기간은 857년 가을부터 861년 1월까지로 3년이 조금 넘는 짧은 시간이었다. 게다가 그에겐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다. 왕으로 있던 858년 봄과 여름에 이상 기후로 백성들이 굶주리자 서라벌 전역에 관리를 파견해 곡식을 나눠주는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제방을 쌓아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자 힘썼기에 ‘어진 군주’로 불리던 헌안왕은 당시 열여섯 살이던 사위 김응렴(경문왕)에게 양위(讓位·왕의 자리를 물려줌)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고문헌에 의하면 헌안왕 역시 ‘공작지(孔雀趾)에 묻혔다’고 기록돼 있다. (계속) 서악서원에 서려있는 김유신 설화 설총·최치원·김유신 서원에 위패 모실 때‘김유신 빼자’ 는 말에 꿈 속 나타나 불호령 경주 선도산 입구의 무열왕릉 지척엔 서악서원(西岳書院)이 자리해 있다. 서원(書院)은 조선시대 유교의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학자를 양성하기 위해 전국에 설립한 교육기관. 그중에서도 사액서원(賜額書院)이란 왕이 서원에 현판과 책, 노비 등을 하사함으로써 권위를 높여준 서원을 지칭한다. 서악서원은 사액서원 중 하나다. 서악서원엔 3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설총, 최치원, 김유신이 바로 그들.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셋 모두 여러 차례 이름을 들어봤을 사람들이다. 헌데, 이 가운데 김유신에 얽힌 흥미로운 사연이 옛이야기로 전해져 오고 있다. 조선시대의 야담을 모아 펴낸 ‘천예록(天倪錄)’에 실린 설화다. 서악서원이 사액서원으로 지위를 높일 즈음의 일이다. 김유신, 설총, 최치원 세 사람의 위패를 모두 모신 경주의 서악서원. 이 서원이 사액(賜額·왕이 서원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림)을 받게 되었을 때, 경주 유학자 중 한 명이 말한다. “설총은 중국 유교 경전을 이두로 풀이한 공적이 있고, 최치원은 문장으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김유신은 신라의 일개 장군으로 유학자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으니 김유신의 위패를 서원에서 빼야 한다.” 그런 말을 한 며칠 후. 그 유학자는 자다가 꿈을 꾼다. 갑옷을 입은 무사들이 그의 머리채를 잡고 서원 뜰에 꿇어앉혔다. 그때 나타난 김유신이 일갈한다. “유학자의 덕목은 충(忠)과 효(孝)가 아닌가. 위태로운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아가 삼국을 통일했으니 그것이 충이요, 입신양명으로 부모의 이름을 빛나게 했으니 그건 효다. 그런데, 감히 네가 나를 함부로 평가하느냐?” 꿈에서 깨어난 서생은 두려움에 떨면서 며칠을 앓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한다. 이는 김유신이 가졌던 정치·사회적 위상이 신라시대를 넘어 조선에 이르기까지 낮아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악서원 설립의 배경과 역사적 내력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가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다. 아래와 같다. “1561년(명종 16) 이정(李楨)을 중심으로 한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유신의 위패를 모시며 창건했다. 1563년(명종 18) 신라의 문장가 설총·최치원의 위패를 추가로 배향했다. 처음은 선도산 아래 서악정사(西岳精舍)로 창건해 향사를 지내오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돼 1600년(선조 33) 서원터의 초사(草舍)에 위패를 봉안했다. 1602년 묘우(廟宇)를 신축하고, 1610년 강당과 재사(齋舍)를 중건했다. 1623년(인조 1) ‘西岳(서악)’이라고 사액됐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헐리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09-10

가장 넓은 영토 지배했던 진흥왕과 아들 진지왕

신선이 먹는 복숭아가 열린다는 이야기가 떠도는 산. 서라벌 서쪽에 있는 거대한 봉우리라 해서 서악(西岳). 부처가 다스리는 불화 없는 이상향을 의미하는 서방정토(西方淨土), 또는 극락정토(極樂淨土). 지금의 경주시 효현동에 위치한 선도산(仙桃山) 일대를 신라 사람들은 위와 같이 받아들였다. 거대한 불상 ‘마애여래삼존불’이 내려다보는 곳에 다수의 왕릉이 솟았고, 신라의 첫 번째 통치자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숭배 받는 성모(聖母)가 기거했던 곳. 무언가 비밀스럽고 신비한 분위기 속에 갖가지 설화와 전설이 숨겨진 공간이 바로 경주 선도산이다. ‘두산백과’는 이곳에 자리한 유적, 그 가운데서도 왕의 유택(幽宅)으로 추정되는 능(陵)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이런 문장이다. “선도산 주변에 유적지가 많다. 경주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과 무열왕릉, 법흥왕릉, 서악리 고분군 등이 선도산 자락에 있다.” ◆신라시대 선도산의 위상을 짐작케 해주는 왕릉들 지난 주말 다시 찾은 선도산. 그 산 입구 무열왕릉을 지나 10~15분쯤 야트막한 산자락을 오르면 몇 기의 봉분(封墳)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크기가 경주 시내에서 볼 수 있는 대릉원의 봉분이나 황남대총과 달리 ‘거대함’과는 거리가 멀다. 어찌 보면 소박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서라벌 백성들에게 선도산이 어떤 의미를 지녔었고, 동시에 그 시절 서악의 위상을 떠올려보면 ‘왕의 영원한 안식처’를 그곳에 만들었던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게 분명하다. 동국대 사학과 최연식 교수의 논문 ‘선도산의 신성함을 바라보는 세 가지 입장’을 먼저 살펴보자. “선도산의 신라시대 위상과 관련해서는 산의 동편 자락에 조성된 왕릉들의 존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피장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법흥왕과 진흥왕의 능이 포함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근처에 있는 다수의 왕족 및 귀족들의 고분도 왕릉과 마찬가지로 6세기 후반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시기부터 이 지역이 왕실과 귀족들의 장지로 적극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두 명도 아니다. 다수의 신라 왕이 잠들어있다고 추정되는 선도산 초입은 그런 이유로 묘한 기운이 감돈다. 한여름 뙤약볕을 피해 왕릉 주변 소나무 그늘에 앉아 있으면 불어오는 한 점 바람도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 것. 그런데, 여기서 의문 한 가지. 진흥왕, 진지왕과 달리 무열왕은 6세기 아닌 7세기의 신라 통치자다. 7세기에 세상을 떠난 다른 왕들은 선도산 인근이 아닌 다른 곳에 묻혔다. 헌데, 어째서 무열왕릉은 선도산 입구에 조성된 것일까? 앞서 언급한 최연식의 논문이 아래와 같은 답을 들려준다. “7세기 전반기에 조성된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의 능은 모두 선도산을 떠나 왕경의 다른 지역에 만들어졌는데, 661년에 죽은 무열왕의 능이 다시 선도산 지역 기존 왕릉 옆에 조성된다. 이는 동륜계의 성골 출신이 아닌 진골로서 왕위에 오른 무열왕이 자신의 혈연 계보가 6세기 후반의 법흥왕·진흥왕·진지왕 등에 이어짐을 보임으로써 정치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결정으로 생각된다.” 이는 충분히 이해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주장이다. 고대국가는 선거라는 방식을 통해 통치권을 부여받는 현대의 공화정과 달리 권위와 신성(神性)을 바탕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였다. 신성과 권위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하늘이 선택한 자’라는 백성들의 무조건적 믿음이 있어야 했고, 존귀한 혈통임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을 터. 성골이 아닌 진골 출신 왕이라는 ‘정치적 약점’의 극복을 위해 무열왕은 ‘동일한 혈통’ 진흥왕에게 기댄 것이라는 추정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선도산 자락에서 영면(永眠) 중인 진흥왕은… 그렇다면 무열왕의 선대 혈족인 진흥왕은 어떤 사람이며 신라 역사에서 어떠한 역할을 한 권력자인지 궁금해진다. 534년에 태어나 576년 마흔두 살에 타계한 것으로 알려진 진흥왕은 ‘신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했던 왕’으로 유명하다. ‘위키백과’는 그의 삶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해 사상적 통합을 도모했다. 이를 토대로 신라는 고구려의 지배 아래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해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돼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됐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과 직통해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돼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진흥왕 때는 신라의 전성기였으며, 정복 군주로 불렸다. 고구려의 영토였던 원산만 훨씬 너머까지 진출한 흔적은 마운령비에서 알 수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삼국통일을 ‘무열왕이 기틀을 닦고 문무왕이 완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진흥왕이 있었던 것이다. 지속적인 정복 전쟁을 통해 고구려의 영토를 차지하고, 대가야를 병합했으며, 백제의 팽창을 저지했던 사람이 바로 진흥왕이었던 것. 그렇다고 진흥왕이 ‘비교할 대상이 드문 강한 무력을 가졌던 통치자’로만 기억되는 건 아니다. 윤희진의 책 ‘인물한국사’는 진흥왕의 예술적 심미안(審美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런 대목이다. “진흥왕이 지방을 시찰하던 중 가야 출신인 우륵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진흥왕은 우륵을 불러 가야금을 연주하게 했고, 552년 계고·법지·만덕 세 사람을 시켜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게 했다. 우륵은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친 뒤 왕 앞에서 연주하게 하니, 왕이 기뻐하며 크게 포상했다고 전한다.” ◆차남 진지왕도 진흥왕릉 곁에 묻혀 진흥왕은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 곳곳에 순수비(巡狩碑·왕이 살피며 돌아다닌 곳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를 세워 복속시킨 땅의 광대함을 내세워 자랑하려했던 ‘정복 군주’였다. 물리적인 힘과 예술적인 감각을 동시에 지녔던 인물이었음에도 진흥왕의 삶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그가 아끼던 장남 동륜(銅輪)이 572년 사망한 것이다. 진흥왕이 서른세 살이던 때다. 아들을 앞세운 참척(慘慽) 앞에서 그 슬픔이 왕이라고 달랐을까? 그렇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속으로는 피눈물을 쏟았을 터. 선도산 자락 진흥왕릉 지척엔 진지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무덤도 있다. 진지왕은 죽은 형 동륜을 대신해 보위(寶位)에 오른 진흥왕의 차남이다. 역사학계는 그를 아버지와 달리 인색하게 평가한다. ‘삼국유사’와 ‘화랑세기’ 같은 고문헌은 진지왕을 “방탕하게 생활하다가 끝내 폐위되어 쓸쓸하게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지왕릉이 다른 왕릉에 비해 작은 게 그런 이유가 있어서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재위 기간 역시 576년에서 579년까지로 3년 남짓한 시간이었기에 길지 않았다. 그럼에도 진지왕은 김춘추(무열왕)의 조부로 오랜 시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았다. 이것 하나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건 선도산 아래쪽엔 증조부(진흥왕), 조부(진지왕), 손자(무열왕)가 함께 잠들어 있다. 아버지 진흥왕은 20대에 요절한 아들 진지왕의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던 삶을 측은하게 생각하고 있을지.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09-03

평화로운 땅에 우뚝 선 깔끔하고 단아한 무열왕릉

묘호(廟號·왕이 죽은 후 살아생전의 공덕을 기려 붙인 명칭) 태종.시호(諡號·이전 왕이 사망한 후 다음 왕이 선대 군주에게 붙인 이름) 무열대왕.휘(諱·선조의 생전 이름)는 김춘추.비단 신라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만이 아니다. 중고교 시절 졸면서 역사 수업을 들은 학생이라도 한 번은 들어봤을 이름 무열왕 김춘추(603~661).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 백제를 병합하고, 고구려의 국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아들 문무왕(김법민)이 ‘삼한일통(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게 초석을 깔아준 사람이다.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삼척동자에게도 낯설지 않은 무열왕 김춘추의 능(陵)으로 추정되는 고분은 선도산 입구에 자리해 있다. 고문헌은 아주 짤막하게 그의 유택이 위치한 지역을 지목했다. 이런 문장이다.“661년 음력 6월. 59세로 무열왕이 죽었다. 그는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묻혔다.”추정하면 7세기 중반 신라엔 영경사라는 이름의 규모가 큰 절이 있었고, 그 절 북쪽이 여러모로 길한 땅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을 터. 왕의 장지(葬地)를 아무 곳에나 쓰는 경우는 없는 법이니까.법흥왕 때 불교를 국가의 공식 종교로 받아들였던 신라는 선도산 일대를 서방정토(西方淨土)라 부르며 ‘부처가 다스리는 평화로운 땅’으로 생각했다. 바로 그 서방정토 들머리에 존경 받는 왕의 시신을 매장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 ‘서방정토’에 잠든 무열왕 김춘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선도산 초입엔 공원 형태로 커다랗게 조성된 무열왕릉(사적 20호) 묘역이 있다. ‘마애여래삼존불’이 선도산 꼭대기에서 서라벌의 서악(西岳)을 내려다보는 형상이라면, 무열왕릉은 서악 입구를 지키며 우뚝 선 모습이다.부정할 수 없는 ‘불교왕국’ 신라가 성스럽게 여겨온 땅에서 영원한 잠에 든 무열왕 김춘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의문에 간명하게 답하는 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아래와 같은 설명이다.“태종무열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9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54~661년이다. 이름은 김춘추로 진덕여왕 사후 신하들의 추대로 즉위하여 신라 중대왕실을 열었다. 즉위 전부터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를 직접 오가며 탁월한 외교역량을 보여주었고, 김유신과 연합해 신귀족세력을 형성하여 보다 강화된 왕권 중심의 집권체제를 확립했다. 이후 친당외교를 통해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삼고 고구려와 백제를 공략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의 토대를 마련한 후 재위한 지 8년 만에 사망했다.”여러 가지 취재를 위해 지난 몇 년 사이 경주 선도산 자락에 위치한 무열왕릉을 네댓 번 찾았다. 그때마다 ‘참으로 깔끔하고 단아한 고분이구나’란 생각을 했다.철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주위 풍광도 좋았다. 다른 왕릉 주변에선 볼 수 없었던 귀부(龜趺·거북이 형상의 비석 받침돌)도 이채로웠다.무열왕은 신라 992년의 역사를 돌아볼 때 ‘왕 중의 왕’이라 불러도 이론(異論)을 제기할 역사학자가 별로 없을 정도의 행적을 보인 인물이다. 그의 학식과 외교 협상력은 탁월했고, 잘생긴 외모까지 돌올했다.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하고, 당나라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룬 7세기 중후반을 다룬 각종 학술논문에서도 무열왕 김춘추의 ‘튀는 행적’은 여러 차례 발견된다.“668년에 문무왕은 고구려를 평정하고 선조묘 종묘에 개선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태종(무열왕)에게 ‘일통삼한(삼국통일)’의 공덕을 올렸다 일통삼한은 삼한이라는 천하를 평정하였다는 의미로 신라의 왕이 삼한의 천자(天子·하늘을 대신해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라는 것을 뜻한다.”위의 서술은 경북대 사학과 안주홍의 논문 ‘신라 태종(太宗) 묘호(廟號)와 일통삼한 의식’ 중 한 대목을 인용한 것이다.‘하늘을 대신해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이란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문무왕은 무열왕의 아들. 하지만, 아무리 아들이라 해도 터무니없는 업적을 억지로 부풀려 아버지 앞에 바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거짓말을 해서 백성들의 비웃음을 부르는 건 부끄러운 일이므로. ◆ 고문헌과 학술논문에서 보여지는 무열왕은…무열왕은 신라 내부에서만이 아닌 당시로선 군사·경제·문화적 선진국이었던 중국 당나라에서도 높이 평가받았다. 조금은 우스운 비유가 될 수 있겠으나, 지금의 보이 밴드가 일으킨 ‘한류 열풍’ 같은 인기였다.동국대 사학과 김상현의 논문 ‘일연(一然)의 일통삼한(一統三韓) 인식(認識)’에서도 무열왕에 대한 국내외적 호평은 간명하고 명료하게 드러난다. 다음과 같은 형태다.“당나라의 황제는 김춘추의 풍채를 보고 ‘신성지인(神聖之人·고결하고 거룩한 사람)’이라 칭찬했다. 무열왕이 통치하던 시대를 백성들은 ‘성대(聖代·어질고 현명한 왕이 다스리는 시대)’라고 불렀다. 이는 태종무열왕에 대한 서술이다. 이러한 단편적인 기록만으로도….(후략)”이처럼 누구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탁월한 정치·외교적 성과와 영토 확장이라는 통치자로서의 업적을 보여준 사람이 묻힌 곳이라면, 그 시절 선도산과 서라벌 서악이 가졌던 위상 또한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지난 7월 하순. 무열왕릉을 찾았을 땐 무시무시한 폭염이 머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어지럽게 매미가 울고, 오후의 뜨거운 햇살이 괜한 짜증과 스트레스를 불러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무열왕릉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풀밭 그늘에 다리를 뻗고 앉아 1400여 년 전 드라마나 영화 같았던 신라의 역사를 떠올리니, 참을 수 없을 듯한 더위도 ‘한순간 지나가는 짧은 고통’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 무열왕 외에도 4명의 신라 왕이 묻힌 선도산무열왕이 잠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도산 입구 묘역엔 적지 않은 여행자와 경주시민들이 계절을 가리지 않고 드나든다. 남녀노소 불문이다. 그들을 위해 무열왕릉의 간략한 개요를 ‘위키백과’를 인용해 소개한다.“무열왕릉(武烈王陵)은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능이다.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4기의 큰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으며, 사적 제20호로 지정돼 있다. 경내의 비각에는 국보 제25호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있는데,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새겨져 있어 흥덕왕릉과 함께 신라 왕릉 가운데 매장된 왕이 명확한 능으로 보여지고 있다. 발굴·조사는 하지 않았으나, 형태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무덤에 비해 봉분 장식이 소박한 편이다.”세상 인간 대부분이 그렇듯 무열왕 김춘추도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몸 안에 지니고 살았다. 그에 대한 평가 역시 여타의 인물들처럼 호오(好惡)가 엇갈린다.“김춘추가 외교관일 때 일본과 중국은 그를 ‘잘생긴 외모에 빼어난 화술을 구사하는 사내’로 기록한다. 동맹을 맺었던 중국만이 아닌 적대국가였던 일본도 김춘추를 좋게 평가한 것”이라는 호평과 함께 “삼국통일 과정에서 대동강 이북을 포기한다는 협약을 당나라와 체결했고, 외세의 힘을 빌려 같은 민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민족주의 성향 사학자들의 비난도 받고 있는 것.어쨌건 세간을 떠도는 이런저런 이야기와는 무관하게 무열왕은 자그마치 1363년이란 긴 시간 동안 선도산 자락에 누워 웃지도, 울지도, 말하지도 않은 채 잠들어 있다. 그 잠은 편안했을까?선도산엔 무열왕릉 외에도 진흥왕, 진지왕, 문성왕, 헌안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있다. 당연지사 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거기도 가봐야 할 터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08-27

솔개가 멈춘 산에 자리잡고 나라를 도와 神異한 일을 일으켰다

고려시대 승려 일연이 쓴 역사서 ‘삼국유사(三國遺事)’. 이 책엔 기이한 설화와 신묘한 전설이 곧잘 등장한다. 그래서, 대중들에겐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보다 쉽고 재밌게 읽힌다.‘삼국유사’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불리는 ‘선도산 성모’와 관련된 이야기도 나온다. 이런 것이다.“(선도산 성모는)옛날 중국 황실의 딸로 이름은 사소(娑蘇)였다. 신선처럼 도술을 부릴 줄 알았던 그녀는 해동(지금의 한국)에 와서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딸을 걱정하던 황제가 편지를 써서 솔개의 발에 달아 보냈다. ’이 솔개가 멈추는 곳에 자리 잡고 살라‘는 내용이었다. 사소는 아버지의 말대로 솔개를 날렸고, 솔개가 멈춘 산에 머물면서 신선이 됐다. 그 산의 이름은 서술산(지금의 선도산)이었고, 신모(사소)는 오랫동안 거기 살면서 나라를 도와 신이(神異)한 일을 많이 일으켰다.”선도산 성모, 또는 선도산 신모로 불리는 설화 속 여성은 절벽에 세운 마애여래삼존불, 무열왕릉을 비롯한 여러 개의 거대 고분과 함께 선도산의 수수께끼를 푸는 주요한 3개의 열쇠 중 하나다.베일 속에 싸인 비밀스런 이 여성이 신라 당대에 가졌던 위상과 서라벌 귀족들과의 관계를 알아보는 건 흥미롭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몇몇 고문헌에 서술되는 내용만으론 구체적 실체가 선뜻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 ◆곤륜산 서왕모와 선도산 성모의 연결고리는...신라사 연구자들은 그간 각종 연구 논문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선도산 성모’에 접근하려 애썼다.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김태식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김태식은 그의 논문 ‘고대 동아시아 서왕모(西王母) 신앙 속의 신라 선도산 성모(仙桃山 聖母)’에서 중국 고대사와 연관시켜 선도산 성모를 설명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신라 건국신화에 의하면 건국 시조 박혁거세는 선도산 성모가 낳은 아들이다. 선도산은 경주의 서악이었다. 나아가 선도(仙桃)라는 이름 자체는 중국의 곤륜산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녔다. 즉, 중국 곤륜산 신화에서 서왕모가 지배하는 곤륜산에는 불로장생을 보장하는 선도(仙桃·먹으면 죽지 않는 복숭아)가 자란다고 했거니와, 이 런 모티브를 신라 왕도에 적용한 산악이 바로 선도산이었다. 선도산 성모는 신라 건국시조의 어머니인 까닭에 성모(聖母)로 추앙되었다. 성모란 신라라는 지상왕국을 낳은 최고 여신격이란 의미다. 이런 점에서 선도산 성모가 바로 신라판 서왕모였음은 명백하다.”인접한 나라의 고대 설화 속 여신과 신라의 ‘성스러운 어머니’를 연결고리로 묶어낸 김태식. 그렇다면 논문에서 언급되는 ‘서왕모’는 어떤 인물일까?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서왕모는 선도산 성모처럼 숭배 받는 여성이었다. 곤륜산에 살면서 신선들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지위를 누렸다.요지금모(瑤池金母), 왕모낭랑(王母娘娘) 등으로도 불린 서왕모를 과거 우리나라에선 통상 ‘왕모님’이라 칭했다.재밌는 건 크고 사나운 파랑새와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교활한 여우를 수족처럼 부렸고, 어린 아이의 정기를 빨아들여 항상 부드러운 살결과 젊음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다.선도산 성모에 얽힌 전설 또한 근엄하고 진지한 것만 있는 건 아니다. 재밌고 가벼운 에피소드도 존재한다. ‘삼국유사’를 다시 펴보자.“신라 54대 경명왕이 선도산으로 사냥을 나왔다가 사냥매를 잃었다. 성모에게 사냥매를 찾아주면 작위를 주겠다고 빌었더니, 사라졌던 사냥매가 왕의 책상 위로 날아와 앉았다. 이후 경명왕은 선도산 성모를 대왕(大王)에 봉했다.”◆세상을 쥐락펴락한 제주도 여신 이야기오래전 쓰인 몇몇 책에 파편적으로 등장하는 희미한 존재의 실체를 찾아다니는 건 어쩔 수 없는 사학자들의 고난이자 즐거움일 터. 선도산을 오르는 기자의 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수백 번을 거듭 오르내려도 선도산 성모가 “나 여기 있소”라고 모습을 드러낼 턱이 없음에도 그냥 무작정 그녀의 신위가 있다는 성모사(聖母祠)를 향했다. 비지땀을 줄줄 흘리며. 그 와중에 몇 해 전 한라산을 등반했던 때가 떠올랐다.역사가 5000년쯤 되는 국가면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매혹적인 설화나 신비한 전설 하나쯤은 지니고 있다.한라산이 있는 제주 역시 ‘거대한 여신’의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긴 시간 떠돌았다.제주도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여신 ‘설문대할망’. 다소 과장된 이 여신의 스토리를 ‘한국민속문학사전’은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태초에 탐라(제주도)에는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크고 힘이 센 설문대할망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누워 자던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 앉아 방귀를 뀌었더니 천지가 창조되기 시작했다. 불꽃이 굉음을 내며 요동치고, 불기둥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할머니는 바닷물과 흙을 삽으로 퍼서 불을 끄고 치마폭에 흙을 담아 부지런히 한라산을 만들었다. 치마폭의 흙으로 한라산을 이루고 치맛자락 터진 구멍으로 흘러내린 흙들이 모여 오름이 생겼다. 할머니는 몸속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 풍요로웠다. 탐라 백성들은 할머니의 부드러운 살 위에 밭을 갈았다. 할머니의 털은 풀과 나무가 되고, 할머니의 오줌 줄기에서 온갖 해초와 문어, 전복, 소라, 물고기들이 나와 바다를 풍성하게 했다. 그때부터 물질하는 해녀가 생겨났다.”신라의 선도산 성모, 중국의 곤륜산 서왕모, 제주의 한라산 설문대할망. 이들이 능히 해내지 못할 일이란 없었다.도망친 매를 왕의 곁으로 돌아가게 하고,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 복숭아를 키우고,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70km가 넘는 섬을 혼자서 만들고….고대 한국과 중국엔 ‘불능’을 모르는 절대적 힘을 가진 여성들이 있었다. 물론 설화 속에서지만. ◆‘만물의 어머니’로 불리는 여성은 서양에도 존재신라의 첫 번째 왕을 탄생시키고(선도산 성모), 신선들의 머리 위에서 세상을 다스리고(곤륜산 서왕모), 수천수만 사람들 삶의 토대가 될 섬을 만들어낸(설문대할망) 동양의 여신들.그렇다면 서양엔 이에 필적할 여신이 없을까? 당연히 있다. 동서양 불문 인간들이란 무엇이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걸 옮기는 걸 즐긴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앞서 언급된 동양 세 여신 수준에 이르는 서양 여신으로는 ‘가이아(Gaia)’를 내세울 수 있겠다. ‘만물의 어머니’이자 ‘신들의 어머니’로 지칭되는 여성이다. ‘그리스·로마신화 인물백과’는 가이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의인화된 여신이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또 다른 명칭으로 ‘게(Ge)’가 있다. 이 명칭의 어원적 의미는 ‘땅’ ‘대지’, 또는 ‘지구’다. 이름의 어원적 의미에서 추측할 수 있듯, 가이아는 모든 생명체의 모태인 대지를 상징한다.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에 따르면 가이아는 ‘카오스’와 더불어 혈연관계 없이 태초부터 존재한 신이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작가 히기누스의 ‘이야기’ 서문에 의하면, 가이아는 혈연관계에 의해 태어난 존재로 빛의 의인화된 신 아이테르와 낮의 의인화된 신 헤메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가이아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영생불멸 신들의 계보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모신(母神·어머니 신)으로….”어느 시대, 어느 장소건 삶이 유한한 인간은 불멸하는 존재를 동경해왔다. 선도산 성모와 가이아는 그런 부러움의 마음이 탄생시킨 고대 설화 속 숭배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계속)/홍성식기자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08-20

신라 첫 번째 왕 박혁거세의 母神이자, 신령한 산의 女山神

고대의 왕 혹은,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국가의 통치자는 다소간 과장되게 기록되거나 묘사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가 가졌던 권력의 크기와 보통 사람과는 구별되는 신성(神性)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조금 먼 나라 이야기지만 16세기 프랑스의 사례를 잠시 살펴보자.수도자에서 의사로 직업을 바꾸고, 거기에 소설가로까지 활동한 프랑수아 라블레(1483~1553)란 작가가 있다.그가 쓴 작품 중 하나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다. 한국에선 그다지 높은 인기를 누린 소설이 아니지만, 프랑스인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 작품”으로 추켜세우는 5부작 풍자소설.이 소설은 비교적 간단한 스토리로 이뤄져 있다. 왕인 가르강튀아의 기이한 출생과 해괴한 행적을 좇아가는 형식이다. 이는 그 당시 풍자소설의 기본적인 골격 중 하나이기도 했다. ◆무엇이건 범인(凡人)과는 달랐던 왕을 낳은 어머니는...소설에서 가르강튀아는 ‘어머니의 왼쪽 귀’에서 태어난 것으로 서술된다. 인간이 ‘자궁’이 아닌 ‘귀’에서 생겨난 것부터가 엄청난 상징과 은유를 담은 과장이 분명하다. 게다가 그의 먹성을 묘사하는 대목에 이르면 놀라움은 더 커진다. 이런 것이다.“소 16마리, 송아지 32마리, 염소 63마리, 양 95마리, 돼지 300마리, 메추리 220마리, 도요새 700마리, 수탉 400마리, 암탉 600마리, 토끼 1400마리, 산돼지 11마리, 사슴 18마리, 꿩 140마리, 오리, 왜가리, 황새, 칠면조….”어떤 인간도 위에 열거하는 것들을 한꺼번에 다 먹을 수 없다. 이는 15~16세기 부패한 귀족들의 퇴폐와 전횡을 꼬집어 풍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해학이 아니었을까 싶다.이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많이 먹는 왕’의 이야기는 흥미롭게도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에서도 나타난다. 아래는 ‘삼국유사’의 인용이다.“무열왕은 하루에 쌀 서 말과 꿩 아홉 마리를 잡수셨는데 경신년(庚申年)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는 점심은 그만두고 아침과 저녁만 하였다. 그래도 계산하여 보면 하루에 쌀이 여섯 말, 술이 여섯 말, 그리고 꿩이 열 마리였다.”출생에서부터 먹는 양까지 평범한 사람과는 판이하게 달랐던 왕들. 그렇다면, 그런 왕을 넣은 어머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신라시대부터 지금까지 선도산 성모(성스러운 어머니) 또는, 선도산 신모(신의 지위를 가진 어머니)로 불리는 여성은 신라의 첫 번째 왕인 박혁거세의 모신(母神)이자, 신령한 산의 여산신(女山神)으로 회자돼 왔다.1000년을 지속된 강력한 고대 왕조의 출현과도 연관성을 지니고 있으니, 선도산 성모(신모)의 존재는 출발부터가 기세등등했을 터. ◆건국 영웅 낳고 도움을 주며, 죽은 후엔 제의(祭儀)의 대상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채미하 강사의 논문 ‘한국 고대 신모(神母)와 국가제의(國家祭儀)-유화와 선도산 신모를 중심으로’는 신라를 포함한 고대 왕국의 건국신화 속 여성이 가진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건국신화는 초현실적·초자연적인 내용을 전함과 동시에 국가의 창업이라는 역사적 사건도 포함하고 있다. 한국 고대 건국신화 역시 신화적 요소와 역사적 요소가 있다. 이러한 한국 고대 건국신화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다양한 연구들이 있어 왔다. 이중 신모(神母)는 건국 영웅을 낳고 그들을 기르며 새로운 국가를 건설 내지는 건설하기 위해 떠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거나 시조의 조력자로 나온다. 이와 같은 신모로는 고조선의 웅녀와 고구려의 유화, 백제의 소서노, 신라의 선도산 신모와 알영, 금관가야의 허왕후, 대가야의 정견모주가 있다. 그리고 이들 신모는 죽은 후 국가제의의 대상이기도 하였다.”지금도 사당을 세워 성스러운 존재로 대접하는 선도산 성모에 관해서는 ‘나무위키’ 역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 건국 전의 인물이자 신라의 여신. 고대 한국 문화와 역사에 영향을 끼친 신으로 여러 문헌에서 언급됐다. 사후 경주 선도산의 산신으로 숭배됐다. 혁거세 거서간(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신라시대에 숭배 받은 여성 산신”이라 정의하고 있다.취재를 위해 두 번째로 경주 선도산을 찾았을 때다. 무열왕릉 뒤편에 자리한 진지왕릉 앞에서 한참 동안 굳은 각오(?)를 다졌다. 땡볕 내리쬐는 한여름에 산길을 꽤 오랜 시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선도산 성모사(聖母祠)까지 가기 위해선 그런 다짐이 필요했기 때문.마침내 성모사에 이르렀을 땐 섭씨 35도가 넘는 날씨임에도 어떤 서늘한 기운에 잠시잠깐 몸이 떨렸음을 고백한다. 이는 문학적 과장이나 엄살이 아니다.어쨌건 다음 연재에서는 성도산 성모, 또는 선도산 신모로 불리는 존재의 보다 내밀한 모습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우리 곁 ‘신라 보물’ 서악동 삼층석탑무열왕릉 입구에서 차를 꺾어 3분쯤 오르막길을 오르면 한국 작은 도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조용한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오가는 사람이 드물고, 땡볕 아래 산새 울음소리만이 청명한 곳. 정확한 주소는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705-1번지.바로 거기 신라인의 예술적 품격을 가감 없이 확인할 수 있는 ‘고대 보물’ 하나가 우뚝 서있다.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 慶州 西岳洞 三層石塔)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됐을 것으로 예측되니 만들어진 게 벌써 1400여 년 전.몹시 귀한 것임에도 너무 쉽게 만날 수 있어서였을까? 석탑이 가진 가치가 쉬이 짐작되지 않았다.이럴 땐 관련 자료를 찾아볼 수밖에 없다. 기자를 포함해 신라 역사를 잘 알지 못하면서, 호기심은 많은 이들을 위해 ‘두산백과’가 이 탑에 얽힌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준다. 이런 내용이다.“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제 석탑.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됐다. 전체 높이 5.07m, 기단의 너비는 2.34m다. 무열왕릉 북동쪽 경사지에 있는 탑으로, 모전탑(模塼塔) 계열에 속한다. 지면에는 두꺼운 장대석(長臺石) 4장을 동서로 깔아서 지대석(址臺石)을 삼았고, 그 위에 8개 돌덩이를 2단으로 쌓아 직육면체의 이형기단(異形基壇)을 구성했다. 경주 남산동 동삼층석탑과 비슷한 형태. 기단 상면에 탑신을 받기 위한 1장의 판석(板石)이 끼어 있는 것은 남산동 석탑에 있는 3단의 층급(層級)에 비해 생략된 형식으로 보인다. 그 위 3층 탑신은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1장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초층 옥신은 정육면체로 우주(隅柱)의 표시가 없으며, 정면 중앙에는 얕은 감형(龕形)으로 호형(戶形)을 만들고 그 중앙에 4개의 못자리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금속제의 수환(獸環)을 달았던 자리로 짐작된다…(하략)”삼층석탑 부근은 계절 따라 피는 작약과 구절초로도 유명하다. 신라문화원(원장 진병길)은 지속적인 노력으로 이 지역의 문화유적을 보호하고 알리는 활동을 해왔다.이 단체가 조성한 작약과 구철초 꽃밭은 역사 공부와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의 여유를 원하는 여행자 모두를 만족시켰다. 꽃이 만발하는 철이면 축제도 연다. 물론 이때면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모여든다.게다가 서악동 삼층석탑에서 불과 수십m 거리엔 왕릉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고분이 4기나 존재한다. 신라 진흥왕, 진지왕, 문성왕, 헌안왕이 바로 거기에 잠들어 있을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서악동, 혹은 서악마을 불리는 곳은 이처럼 ‘경주의 보석’ 역할을 하고 있다. 신라시대 땐 ‘부처가 다스리는 평화롭고 근심 없는 땅(西方淨土)’이라 불렸던 곳이 1천 년 넘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그 역할을 바꾸지 않고 있는 것이다.바로 그 가운데 모든 걸 지켜보고 기억하며 세파를 견뎌 온 서악동 삼층석탑이 있다. 그 탑을 쉽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이유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08-13

아미타신앙 뿌리 둔 ‘무열왕대 先代의 극락왕생’ 발원

튀르키예가 터키로 불리던 13년 전 여름. 1개월쯤 그곳을 여행했다. 서쪽은 유럽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현대적 도시로 변화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터키 최대 도시’로 불리던 이스탄불이 그랬다.반면 동쪽으로 갈수록 이슬람문화의 색채가 짙었고, 주민들 또한 보다 완고한 종교적 신념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한 나라에서 다양한 문화·종교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그 여행이 끝나갈 무렵. 터키와 이란 접경에 자리한 아라라트산(Ararat Mt.)을 찾았다. 무언가 수많은 비밀을 간직한 듯한 눈 덮인 산봉우리를 보며 무신론자인 기자도 잠시잠깐 외경(畏敬)을 느꼈다.실제로 아라라트산은 간단찮은 역사와 장대한 설화를 동시에 간직한 공간이다. ‘종교학대사전’을 펼쳐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터키의 동쪽 끝, 이란의 국경 근처에 솟아있는 화산이다. 터키 최고봉이며 터키어로는 알 다아(Agn Dagl)라고 부른다. 아라라트산은 두 개의 봉우리로 나뉘는데, 대(大)아라라트산은 5165m다. 만년설로 덮여 있다. 소(小)아라라트산은 3925m. 1829년 독일인 F. 파로트가 첫 등정에 성공했다. 전설에 의하면 ‘노아의 방주’가 그 산에 머물렀다고 한다. 산 인근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에게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국민의 단결과 통일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산으로 대접받는다. 아라라트는 기원전 9세기에서 기원전 8세기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왕국의 명칭으로서도 사용됐다.”아라라트산 기슭엔 흙으로 만들어진 매력적인 성(城)도 있다. 그 성 아래 조그만 마을 숙소에서 이틀을 머물며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경북에도 전설과 더불어 역사를 품은 성스러운 산이 있을까? 있다면 어디일까?” ◆아라라트산 이상의 감흥을 선물한 경주 선도산귀한 걸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선 수고와 고생이 필요하다. 때는 폭염이 시작되던 시기. 무열왕릉이 자리한 선도산 입구에서 ‘마애여래삼존불’이 우뚝 선 정상 부근까지는 꽤 오랜 시간 산길을 올라야 했다.기자는 물론 동행한 사진기자까지 포악한 흰줄숲모기로 추정되는 것들에게 수없이 목덜미와 팔을 뜯기고, 가져간 수건을 땀으로 온통 적시고서야 마침내 바위에 새긴 거대한 석불(石佛) 앞에 설 수 있었다.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을 본 첫 느낌은 ‘아, 이곳은 튀르키예 아라라트산 못지않은 이야깃거리를 간직한 성산(聖山)이겠구나’라는 것.세월이 마모시킨 불상의 모습은 온전치 않았으나,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aura·예술품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분위기와 격조)는 1400년의 시간을 무색하게 했다. 힘겹게 만난 불상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는 사이 등으로 흘러내린 땀이 서늘하게 식었다.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은 ‘선도산 아미타삼존상(仙桃山 阿彌陀三尊像)’으로도 불린다. 영남대학교 미학미술사학과 최미경의 논문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조성시기와 목적에 관하여’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된다.“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은 경주시 서악동 선도산의 정상 부근에 위치하며 현재 보물 제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도산 불상은 신라 불상 중에서 단석산 마애불상군을 제외하면 조성 규모가 가장 크고 신라 불상의 고유한 특징과 함께 중국 북제-수대(北齊-隋代)의 다양한 불상 양식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 일찍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불상이 위치한 선도산은 신라에서 서악(西岳)이라 불리며 선도성모(仙桃聖母·선도산의 성스러운 어머니)의 주재처로 숭상 받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선도산 아래에는 무열왕릉을 비롯하여 서악리 고분군 및 무열왕 후손의 묘가 있으며 불상은 선도산에서 이들 고분군을 내려 보는 것처럼 조성되어 있어 지리적 위치 또한 주목을 받았다.”이로써 기자가 당시 받았던 느낌은 터무니없는 상상이나 과장된 감정이 아니란 게 증명됐다.신라 불상 중 조성 규모가 두 번째로 크고, 서라벌 사람들이 숭배하던 여신(女神)이 머물렀던 곳으로 이야기되며, 통일제국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이름 높은 무열왕의 유택(幽宅)을 내려다보는 곳에 만들어졌으니. ◆중국 화산(華山)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앞서 ‘튀르키예의 명산’으로 불리는 아라라트산을 살펴봤으니, 가까운 나라 중국이 내세워 자랑하는 산 가운데 하나도 잠시 돌아보자. 화산(華山)은 ‘중국의 오악(五岳) 중 서악(西岳)’으로 불린다. 선도산이 신라의 서악이라면, 화산은 거대 대륙 중국의 서악인 것.중고교 시절 무협소설을 읽으며 지냈던 지금의 중년이라면 화산을 어떤 방식으로건 알고 있을 게 분명하다. 아래 상상출판에서 펴낸 ‘중국 시안 여행’ 중 이와 관련된 부분을 인용한다.“중국 무협에 관심 있다면 화산은 가장 궁금한 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김용의 ‘소오강호’에서 영호충이 화산 검종을 상대로 맞서 싸우는 장면, ‘신조협려’에서 북개 홍칠공과 서독 구양봉이 서로 내공을 겨루는 장면이 묘사되는 곳은 바로 화산과 화산 일대. 화산은 친링(秦嶺)산맥 동단에 최고 2437m까지 솟아 있고, 옆으로는 위수(渭水)가 흘러 웅장하게 느껴진다. 화산은 중국 도교의 성지이자, 무협의 근본이기도 한 오악(五岳) 가운데 서악(西岳)으로 불린다. 오악 중 가장 높고, 전체가 바위산의 분위기라 험준한 느낌을 준다. 더욱이 화산의 등산로는 외줄기로 등산객들 사이에서 난코스로 유명하다.”사실 무협소설은 과장된 상상력과 허풍을 재료로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대중적인 재미가 있다.우리가 통상 ‘설화’ ‘전설’ ‘민담’이라 부르는 것들도 마찬가지. 거기선 현실에서의 존재 가능성과 실현 가능성이 거의 제로(0)에 가까운 인물과 사건이 나오고 전개된다. 그래서 더 흥미로운 게 아닐까? 인간에게서 상상력을 거세한다면 삶이 얼마나 무료해질 것인가를 생각해보자.그러니, 성경 속 ‘노아의 방주’가 실재했다고 강변하는 종교인들과 축지법과 공중 부양이 무시로 등장하는 중국 무협소설을 마냥 “비현실적이라 한심하다”고 힐난하는 건 합리를 가장한 독선일 수도 있다. 어쨌건. ◆마애여래삼존불의 불사(佛事)는 누가 주도했을까?이제 다시 오늘의 주제어인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로 돌아가자.고대 신라인들이 부처가 다스리는 이상향 서방정토(西方淨土)로 인식했던 선도산 일대. 그 공간 가장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부드러운 눈길로 굽어보던 마애여래삼존불은 언제, 누가, 무슨 이유로 만들었을까?아주 기초적인 의문이다. 이 질문에 최미경의 논문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조성시기와 목적에 관하여’가 친절하게 답해준다.“조성시기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7세기 중엽으로 막연히 인식했으나 양식적 특징을 살펴본 결과 650~67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선도산 불상이 아미타삼존인 점에 주목하여 조성시기에 즈음한 아미타신앙의 형태를 살핀 결과 이는 ‘사자(死者·죽은 사람)의 극락왕생을 위한 추선(追善·죽은 사람 넋의 괴로움을 덜고 명복을 축원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공덕(功德·선한 행위로 쌓은 덕)으로 사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믿음’에서 조성된 것이라 하겠다.”여기까지가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이 만들어진 시기와 목적을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불상을 만든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논문은 이렇게 이어진다.“이러한 대규모의 불사는 일반 백성의 의지로 보기는 어렵고 지리적인 위치 등을 고려했을 때 불상의 발원 세력은 왕족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선도산 불상은 무열왕대에 선대(先代)의 왕생을 빌며 발원했거나, 혹은 문무왕의 발원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특히 불상의 양식을 고려하면 650년경을 전후로 한 시기에 무열왕의 발원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이로써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 조성 불사’ 주도자는 둘로 좁혀졌다. 무열왕 김춘추와 그의 아들 문무왕 김법민. 서라벌 역사의 궁금증 하나가 풀리는 순간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08-06

산자락 마다 왕릉·유택, 신라인들에게 ‘서방정토’로 불려

개개의 가문도 수백 년을 이어왔다면 크건 작건 갖가지 설화와 이야깃거리가 그 안에서 생겨난다. 고래로부터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고 옮기기 좋아하는 동물이었다. 누가 있어 그걸 부정할 수 있을까.신라는 1000년에서 8년 빠지는 992년간 존속했던 고대 왕조다. 중간중간 부침(浮沈)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지구 위 어디에도 이처럼 장구한 세월을 이어간 제국은 드물다. 이는 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그러니, ‘천년 왕국 신라’에 설화와 오랜 시간 인구에 회자될 이야기의 소재가 없을 까닭이 없다. 얼마든지 미루어 짐작 가능한 일이다.본지는 2024년 하반기 주요 기획연재 중 하나로 까마득한 옛날 신라 사람들 사이에서 신성시된 것은 물론, 현대에 이른 오늘까지 그 지역이 가진 사적(史的) 중요성에 많은 역사가들이 주목하는 선도산(仙桃山)을 취재·탐구할 계획을 세웠다. ‘경주의 신성한 보고(寶庫) 선도산’이란 타이틀 아래에서다. ◆2024년 현실에서의 선도산은 어떤 모습일까6월과 7월 두 차례 걸쳐 선도산 일대를 사진기자와 동행해 돌아봤다. 적지 않은 수의 왕릉과 경주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 중 하나인 울울창창한 소나무숲, 거기에 신령함이 깃들었다고 믿어온 거대한 석불(石佛)까지.답사 후 처음 든 느낌은 ‘과연 수십, 수백 가지의 전설과 민담, 수수께끼가 숨어있을 만한 비밀스럽고 신성한 공간’이라는 것이었다. “신라 역사의 보물창고(寶庫)”라 칭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신라 사람들이 비밀스럽고 신성한 공간으로 인식한 선도산과 그 일대를 오늘날 여행자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두산백과’가 이 의문에 담백하고 모던하게 답해준다.“선도산의 높이는 390m다. 경주시 형산강 서쪽 효현동에 위치하며 신라시대부터 지목도가 높았던 산이다. 신라 사람들은 이곳을 서방정토(西方淨土)로 여겼다고 전해진다. 경주의 서쪽에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서악’이라고도 불렀다. 그 때문에 선도산 주변엔 유적지가 많다. 경주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과 태종무열왕릉, 법흥왕릉, 서악리 고분군 등이 선도산 자락에 있다. 정상 가까이에는 서악동 마애여래삼존불상(보물 제62호)이 서있다. 그 외에도 선사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바위구멍 유적이 있다. 북쪽 자락에는 서라벌대학교, 신라고등학교, 경주정보고등학교, 월성중학교가 있고, 등산로도 잘 정비돼 있다.”실제로 그랬다. 선도산 초입에 자리한 태종무열왕릉 뒤편으론 진흥왕과 진지왕의 유택(幽宅)이 자리해 있었다.지금과 비교적 가까운 시기인 근대까지도 권력자들은 세칭 ‘명당(明堂)’에 터를 잡고 거기에 묻히기를 원했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었고, 묫자리가 후손들의 발복(發福)과도 연관된다는 믿음 때문. 그게 비과학적이라 할지라도.앞서 말했듯 신라는 이미 1000년 전에 존재했던 왕국. 과학과 합리에 관한 사람들의 인식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지식의 상향평균화가 이뤄지기 훨씬 이전 시대였던 것이다.인간의 삶과 죽음을 통제하고 관할하는 신령한 존재를 믿는 이들이 많았고, 무덤을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행운과 불행이 갈린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신라 사람들 역시 적지 않았다고 얼마든지 추측할 수 있다.이런 상황이었으니 왕이, 그것도 삼국통일의 주춧돌을 놓았다고 평가되는 태종무열왕이 묻힌 곳이니 선도산이 당대 신라에서 지녔던 위상이 어느 정도였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 가능하다. ◆왕들이 잠든 공간인 동시에 ‘성스러운 어머니’ 설화까지고대의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선도산은 오랜 기간 주요한 탐구 대상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학계의 논문을 모아놓은 데이터베이스에 ‘선도산’이란 키워드를 넣어보면 적지 않은 자료가 검색된다.한국사상사를 연구해온 동국대학교 사학과 최연식 교수의 논문 ‘선도산의 신성함을 바라보는 세 가지 입장’은 선도산이 왕릉이 집중된 공간만이 아닌 신라 역사의 여러 비밀을 함께 간직한 곳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런 대목이다.“경주 서쪽의 선도산은 경주평야 입구의 중요한 지역으로 신라시대뿐 아니라 이후에도 경주의 서악(西岳)으로 크게 중시되었다. 이곳에는 법흥왕과 진흥왕, 진지왕, 무열왕(태종무열왕)이 묻힌 것으로 알려진 왕릉들을 비롯해 다수의 상층 귀족들의 고분이 만들어졌고, 산 정상 근처에는 대형 아미타 삼존불상이 왕릉을 바라보고 서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시조를 낳은 존재이자 유력한 산신이라고 하는 선도산 성모에 관한 전승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유물과 유적, 전승 등은 선도산이 신라시대 이래 경주의 주요한 신앙적 공간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고려시대에는 동쪽 입구의 토함산과 함께 경주를 수호하는 양대 신성(神聖·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거룩함)으로 중요하게 제사된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후략)”최 교수의 지적처럼 여러 기의 왕릉과 더불어 선도산에서 주목해야 할 건 ‘신라의 시조를 낳은 존재이자 유력한 산신이라고 하는 선도산 성모’와 ‘아미타 삼존불상’이다.성모(聖母)가 뭔가? 속세의 것이 아닌 성스러움을 지녔기에 숭앙받은 존재를 말하는 것일 터. 그것도 1000년 역사의 왕국 첫 지도자를 낳았다면 ‘선도산 성모’의 위상 역시 드높았을 수밖에 없다.한국이 포함된 동양(아시아)만이 아니다. 미국처럼 역사가 일천한 국가는 아니겠지만, 수천 년 세월을 사람들이 살아온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현명한 통치자를 낳은 신성한 어머니의 설화’는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그렇다면 신라의 시조로 알려진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숭배 받아온 ‘선도산 성모’의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한국민속문학사전’은 비밀의 베일에 싸인 선도산 성모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선도산 성모는 신라의 시조모(母)로 알려졌으므로 신라 건국 시기에 출현한 존재로 볼 수 있다. 김부식이 송나라 사신으로 가서 접한 성모 숭봉(崇奉)의 일을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한 것이 최초의 자료다.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그녀는 선도산의 여산신(女山神)으로 신라 삼사(三祀·3가지 중요한 제사)의 대상이었으며 신사(神祠·신령을 모신 사당)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사람들이 성모의 일을 익히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제왕운기(帝王韻紀)’ 기록도 있다.”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도 서라벌이 만들어낸 보물보편적 신라인 대부분이 그 존재를 인지하고 있던 선도산 성모는 국가가 올리는 큰 제사의 대상 가운데 하나였고, 사당을 세워 장수와 행복을 빌며 영험을 얻고자 했던 숭배의 주체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다. 아래 인용하는 건 이와 관련된 ‘한국민속문학사전’의 부연이다.“선도산 성모는 여산신이자 시조모라는 특징을 지닌 점에서 가야산 정견모주, 지리산 성모와 유사하다. 동신성모 유화는 시조모이지만 산신으로 좌정하지 않은 차이가 있다. 여산신 신앙이 국조신화와 연계되는 것은 대체로 남방계 신화의 특징이다. ‘부계(父系)’의 탐색과 계승을 강조하는 다른 국조신화들과도 대조적이다.”흥미로운 설명이다.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선도산 성모가 알을 낳았다는 것인지? 그리고, 부계신화가 아닌 모계신화가 돌출한 건 신라가 모계중심 사회였다는 것인지? 강고한 유교적 가르침이 통치철학으로 작동했던 조선시대엔 ‘선도산 성모’가 어떻게 평가됐는지?의문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를 차근차근 짚어가며 관련 학설과 학자들의 주장을 들어보는 과정이 있어야 할 듯하다. 이는 ‘경주의 신성한 보고(寶庫) 선도산’ 연재를 이어가며 해결하고자 한다.다수의 왕릉, 선도산 성모 설화와 함께 주목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이 바로 그것.선도산 성모처럼 실체는 없고 떠도는 전설과 이야기만 남은 게 아닌, 눈앞에서 존재하는 실물이기에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이 가진 지위는 날것인양 싱싱하다.튀르키예 사람들이 성산(聖山)이라 부르는 아라라트산, “백만 가지 설화를 간직했다”고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화산에 필적하는 신비한 이야기를 담은 선도산의 역사 유적 ‘마애여래삼존불’ 이야기는 다음 회에서 이어가고자 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07-30

‘삼한일통’ 최선두서 이끈 무열왕 김춘추와 태대각간 김유신

서기 676년. 신라는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병합한 후, ‘7세기 아시아 초강대국’으로 불렸던 당나라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삼국통일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다.정치와 군사적인 면, 종교·문화적인 측면 등에서 고구려와 백제보다 발전이 늦었던 신라가 삼한을 하나로 묶어 통일왕국을 만들어간 과정은 드라마틱하면서 지난했다.탁월한 외교협상력을 발휘했던 무열왕 김춘추, 용장(勇將)과 지장(智將)의 면모를 두루 갖춘 김유신, 무열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침공과 당나라 격퇴의 선두에 섰던 문무왕 김법민,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나라를 위해 바치겠다고 맹세한 젊은 화랑들…. 이들 모두는 삼한일통의 주역이었다. ◆신라, 백제·고구려·당나라를 차례대로 무릎 꿇리다660년. 의자왕이 가장 신뢰했던 백제의 명장 계백이 5천결사대와 함께 황산벌(지금의 충남 논산 일대)에서 유명을 달리한다. 백제의 붕괴가 현실로 닥친 것이다. ‘삼한일통’이라는 정치적 명분과 함께 신라 무열왕에겐 사적인 원한도 있었다.‘황산벌전투’를 ‘딸과 사위를 죽인 의자왕을 향한 무열왕 김춘추의 복수극’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 건 아래와 같은 이유다.전북대학교 박노석 교수의 논문 ‘백제 황산벌전투와 멸망 과정의 재조명’은 ‘삼국사기-백제본기’ ‘삼국사기-신라본기’ 등의 기록을 검토해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초기에는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릴 정도로 영특한 군주였다. 재위 2년(642년)에는 직접 신라를 공격해 미후(737C7334) 등 40여 성을 빼앗았으며, 윤충(允忠)으로 하여금 대야성을 공격해 점령하게 했다. 당시 대야성주는 김춘추의 사위인 품석(品釋·아내는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이었는데, 윤충은 품석 부부가 항복을 하자 이들을 죽여 머리를 도성으로 보냈다. 이때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어 서서 앞에 사람이 지나가도 알지 못할 정도로 심한 충격을 받고 백제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고 한다.”아버지 무열왕이 백제를 병합한 1년 후 세상을 뜨자, 연이어 고구려 병합의 길에 나선 건 아들 문무왕 김법민이었다.고구려는 멸망 2년 전인 666년부터 극심한 내부 분열을 겪었다. 카리스마 넘쳤던 ‘탁월한 고구려의 전략가’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그의 동생과 세 아들 사이에서 정권을 제 앞으로 가져다놓기 위한 골육상쟁(骨肉相爭)이 벌어졌다.서울교육대학교 임기환 교수의 논문 ‘고구려 멸망기 신라의 군사 활동’은 고구려 붕괴의 전조(前兆)와 당시 신라와 당나라의 동맹 상황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다.“666년 6월 남생(연개소문의 아들 중 한 명)이 당으로 투항하면서 시작된 고구려에 대한 당(唐)의 공세는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될 때까지 약 2년 여에 걸쳐 계속됐다. 이 과정에서 667년부터 당군은 신라에 군사적 지원을 요구하고, 신라가 고구려 남부 전선을 압박하면서 결국 668년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은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신라는 당과 함께 승전국이 된다. 그런데 고구려 멸망 후 당은 신라의 공훈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드러낸다. 이는 백제 멸망 이후 당과 신라 사이에 내재된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백제 공격을 목표로 연합군을 구성했던 당과 신라는 백제 멸망 후 전후 처리과정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드러냈고, 고구려에 대한 공세 과정에서도 이러한 양국의 입장은 잠재되어 있었다.”평양성전투에서 거칠기로 이름 높은 고구려 군대는 굴복시켰으나, 위의 인용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또 하나 신라의 적’ 당나라의 야심은 깊고도 은밀했으며 동시에 컸다.통일된 삼한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야심을 시시때때로 드러낸 당나라. 신라에겐 백제와 고구려보다 더 강하고 위험한 적을 몰아내야 할 숙제가 남았다.백제·고구려 병합 과정에서 일등공신으로 역할 했던 김유신은 당시 일흔을 넘긴 노장(老將)이었음에도 수많은 전투 경험을 토대로 조카인 문무왕 김법민을 조력하며 당나라 축출에 앞장선다.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길고 길었던 싸움 끝에 676년 당나라 군대가 신라 땅에서 철수한다.‘나무위키’는 ‘나당 전쟁(신라와 당나라의 전쟁)’의 시각과 끝을 아래처럼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다.“서기 670년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 연합의 요동 선제공격으로 시작돼 676년 기벌포 전투까지 7년간 진행된 신라와 당 사이의 전쟁. 여기서 신라가 승리해 당나라는 한반도에서 확보했던 옛 백제, 고구려 영토를 잃어버리고 신라가 한반도를 지배하게 된다.” ◆ ‘삼한일통’의 두 주역 무열왕 김춘추와 태대각간 김유신모두 20회로 연재된 2023년 연중기획의 타이틀은 ‘신라의 삼국통일-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다. 이는 ‘삼국통일’과 두 인물이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관계라는 의미일 터. 실제로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은 삼한일통을 최선두에서 이끈 인물이기도 하다.김유신의 경우 보통의 사람들은 빼어난 군사적 역량을 가진 장수로만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군사전략에만 밝은 무장(武將)이 아니었다. 충남대학교 김수태 교수의 논문 ‘신라의 삼국통일과 김유신’ 한 대목을 읽어보자.“7세기 후반 백제의 멸망 이후 전개된 신라-당나라 관계에서 김유신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문무왕이 고구려의 멸망 직후 신하들에게 김유신이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돼 그 공적이 많았다’고 언급했듯이 그가 재상으로서나 장군으로서의 역할을 모두 잘 수행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그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그 모두를 서로 연결시키면서 활동한 인물이었던 것이다.”이처럼 문무(文武)가 동시에 밝았던 김유신을 손위 처남으로 둔 무열왕 김춘추는 신라는 물론, 백제·고구려·당나라를 통틀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치협상력과 외교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둘은 서로에게 ‘호랑이 등에 달린 날개’로 역할하며 삼국통일을 견인해낸다. 이는 이후 왕조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벤치마킹(Bench-marking)된다.이와 관련해 명지대학교 남재철 교수의 논문 ‘한문학을 통해 되돌아보는 삼한통일(三韓統一)의 역사2’를 인용한다.“조선조 지식인들은 태종 무열왕이나 문무왕이 김유신과 같은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군신 간에 화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삼한통일의 대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보았다.”◆ 화려한 불교예술 꽃 피운 문화왕국 통일신라7세기 말에 삼한일통을 이룬 신라는 ‘빛나는 불교예술 왕국’으로 성장한다. 전쟁과 전투에 사용됐던 국력을 문화·예술에 투자함으로써 동서양 어떤 고대 국가도 흉내 내기 힘든 ‘문화왕국’을 만들어갔던 것.그 생생한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 ‘동궁과 월지’, 그리고 ‘감은사’다. 현대에 들어서며 그곳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은 신라를 ‘황금의 나라’로 불리게 했고, ‘불교예술의 절정 속에 서있던 왕조’로 인식되게 했다. 다음은 ‘위키백과’의 설명이다.“월지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직후인 문무왕 14년(674년)에 황룡사 서남쪽에 조성됐다. 큰 연못 가운데 3개의 섬을 배치하고 북쪽과 동쪽으로는 무산(巫山)을 나타내는 12개 봉우리로 구성된 산을 만들었다. 이것은 동양의 신선사상을 상징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섬과 봉우리에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동물을 길렀다는 가장 대표적인 신라의 원지(苑池)다. 5년 후인 679년에는 별궁인 동궁을 건축한다.”감은사는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이룬 후 짓기 시작해 그의 아들인 신문왕 김정명이 즉위 직후에 완공한 사찰이다. ‘쌍둥이 석탑’으로 유명한 이곳에서도 여러 점의 진귀하고 화려한 신라 불교예술품이 발견돼 역사학자들을 놀라게 했다.지금으로부터 1천347년 전 이뤄진 삼국통일. 그 과정과 통일 이후 신라의 변화·발전 과정을 공부해보는 건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21세기 경주를 보다 밀도 높게 이해할 수 있는 의미 있는 행위임이 분명하다. (끝)/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10-31

나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전쟁에 뛰어든 젊은이들

화랑(花郞).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꽃 같은 사내’라는 뜻이다. 신라는 전략적으로 외모와 품성 모두가 빼어난 소년(청년)을 뽑아 나라의 지도자로 키웠다.삼한일통(삼국통일)에 이르기 위한 백제, 고구려, 당나라와의 전쟁과 전투가 끝없이 이어지던 7세기. 신라 화랑들은 그 명칭처럼 ‘꽃’이 아닌 매서운 ‘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경우가 더 많았다.신라가 통일왕국을 이루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두 사람, 즉 무열왕 김춘추와 태대각간 김유신 역시 젊은 시절엔 주목받는 화랑의 우두머리였다.660년. 국가의 명운을 걸고 백제와 맞붙었던 ‘황산벌전투’에서 1천400년 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인상적인 일화를 남긴 신라 청년 반굴과 관창 또한 화랑.그렇다면 화랑은 구체적으로 어떤 집단이었을까? ‘나무위키’는 “고대 신라에 있었던 소년들로 이루어진 심신 수련 및 교육단체다. 주된 목적이 심신 수련이지만 사실 창설 초기부터 관리와 군인 양성의 제도로 역할했다. 소년뿐 아니라 젊은 청년들도 많았다. 실제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으므로, 사실상 국가가 운영하며 주도한 소년병 제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강제하지 않았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화랑들끼리 주도해 전쟁에 참여했다”고 설명한다.‘위키백과’는 화랑의 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민간 청소년단체로서의 화랑도는 화랑과 그를 따르는 낭도(郎徒)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576년 이후 신라의 국방 정책과 관련해 이를 신라의 관에서 운영하게 되면서 조직이 체계화됐으며, 이들 화랑의 총지도자인 국선(國仙)을 두고 화랑의 예하도 수개 문호(門戶)로 구성하게 했다. 화랑의 지도자인 국선은 원칙적으로 전국에 l명, 화랑은 보통 3~4명에서 7~8명에 이를 때도 있었으며, 화랑이 거느린 각 문호의 화랑 낭도는 수백에서 수천 명을 헤아렸다.”앞서 언급한 것처럼 김춘추와 김유신은 ‘국선’ 출신이다. 김유신이 이끌던 화랑의 무리는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렸는데, 리더인 김유신은 물론 따르는 낭도들까지 용맹과 총명함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현대에 들어서 군사정권은 ‘화랑정신’ 교묘하게 이용하기도…10대와 20대 초반 청년들은 피가 뜨겁다.‘나라를 위해 내 한 목숨 바친다’는 대의명분(大義名分)만 있다면 싸움에 나서 죽기를 마다하지 않았다.당연지사 당나라, 고구려, 백제와의 전투에서 선봉에 섰던 화랑들 중에는 요절(夭折)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10대 소년 화랑 관창이 대표적이다.신라의 통치자 입장에서는 거룩한 순국(殉國)이었다.이런 화랑의 전통은 현대로 들어서면서 군사독재정권 시절엔 교묘하게 악용(?)되기도 했다.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최광식의 논문 ‘新羅의 花郞徒와 風流道(신라의 화랑도와 풍류도)의 관련 대목을 아래 인용한다.“화랑도는 군사단, 가무집단, 종교 제사집단, 인재 양성과 선발을 위한 수련집단의 성격 등 여러 가지 복합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戰士團(전사단)과 군사적 집회의 성격이 강조돼 왔는데, 이는 일제 시기 식민사학자들의 연구 경향을 답습한데서 기인한다고 보인다. 또한 이러한 연구는 군사정권 시기에 군인들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그들을 조국 통일의 역군으로서 신라 화랑도의 후예임을 강조해 통일의 역군으로 삼고자한 데도 그 요인이 있다고 하겠다.”이처럼 일부분에 있어선 비판적 태도를 취했지만 최광식 명예교수 역시 “신라시대에 활동했던 화랑도는 신라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들의 지도이념이었던 풍류도(風流道)는 신라의 정신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는 말로 화랑과 그들이 품었던 지향을 높이 평가한다. ◆화랑 김유신은 무(武)로, 화랑 김춘추는 문(文)으로 이름 떨쳐화랑도를 포함한 세상 어떤 ‘조직’도 다를 바 없다. 조직을 기반으로 크게 이름을 떨치고 입신양명(立身揚名)에 이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직의 규율과 강제 속에서 꿈을 펼치지 못하고 사라지는 이들도 많다.‘화랑’이라는 이름 아래서 최고의 권력을 움켜쥘 수 있었고, 1천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자신의 이름을 경향각처에 화인(火印)처럼 새긴 대표적 인물이 바로 김춘추와 김유신이다.한 사람은 신라의 지존(至尊)인 왕(무열왕 김춘추)이 됐고, 나머지 한 사람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겸 정무수석(태대각간 김유신)이 됐다. 그중 김유신은 화랑 역사에 대표적 무인(武人)으로 길이 남았다. 영남대학교 객원교수 이영찬의 논문 ‘김유신의 군인정신과 리더십 연구’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된다.“김유신(595∼673)은 신라의 무신으로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대업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15세가 되던 해 화랑으로 낭도를 이끌고 수련하다가 신라군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할 때 최초로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웠다. 이후 압량주 군주로서 백제군을 격퇴하고 통일 전쟁에서 뚜렷한 공적을 세우는 등 신라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했다. 당나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신라까지 침략하려 하자 그는 군사를 지휘하며 지도자적 임무를 수행했다. 이순신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오는 왜적을 물리쳤다면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당나라를 물리쳐 명실상부 자주독립의 국가를 만드는데 크게 이바지했다.”긴 부연이 필요 없다. 학자가 한 사람을 향해 이같은 최상급의 칭찬을 내놓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실상 김유신은 샤머니즘 차원에선 중국 초나라의 항우(項羽·기원전 232~202)처럼 무신(武臣·무관인 신하)이 아닌, 무신(武神·신의 반열에 오른 무관)으로까지 추앙받기도 한다.그렇다면, 신라 화랑 중 ‘문(文)’ 분야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긴 이는 누굴까? 맞다. 모두가 예상했듯 후에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다. 빼어난 문장에 더해 김춘추는 해사한 외모로도 주목받았다.21세기 한국의 몇몇 영화배우와 보이 밴드 멤버는 이웃나라에서까지 인기를 누린다. 잘생긴 얼굴로. 1천400여 년 전 김춘추도 그랬다. 현재의 중국을 통치했던 당나라의 고위 관료와 귀족 부인들은 멀리 신라에서 온 김춘추가 지닌 헌헌장부(軒軒丈夫)의 풍모에 매료당했다.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청년 김춘추가 당나라에서 누린 인기가 어떠했는지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다음과 같다.“김춘추가 태자로 있을 때 고구려를 치고자 군사를 청하려 당나라에 간 일이 있었다. 이때 당나라 황제가 그의 풍채를 보고 칭찬하여 ‘신성한 사람’이라 하고 당나라에 머물게 해 사위로 삼으려 했지만 김춘추는 이를 사양하고 신라로 돌아왔다.”비단 중국만이 아니다. 당시 신라와 적대 관계에 있던 일본에서조차 ‘꽃 같은 사내’ 화랑 김춘추의 매력을 “신라가 상신 대아찬 김춘추를 사신으로 보내왔다. 김춘추는 용모가 아름답고 이야기를 통해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이끄는 능력이 있었다”고 쓴다. 647년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이다. ◆반굴과 관창같이 안타깝게 허리가 꺾인 화랑도 적지 않아김춘추와 김유신처럼 젊은 시절엔 화랑의 리더로 주목받다가, 나이가 들어서는 권좌에 앉은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10대 혹은, 20대 어린 나이에 전장(戰場)에서 숨진 화랑도 적지 않다.역사학자들은 신라시대 전체를 통틀어 화랑의 숫자를 200~300명으로 추정한다. 그중 절반 이상이 하늘이 내린 자신의 명(命)대로 살지 못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반굴과 관창도 그들 중 하나다.‘황산벌전투’에서 신라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전술적 차원에서 희생된 둘 중 관창은 사망 당시 나이가 겨우 16세. 요즘의 중학교 3학년 또래 소년이었다.반굴 또한 갓 아들을 낳은 20대 초반 청년이었다. 김유신의 조카이기도 했던 반굴을 향해 그의 아버지 김흠순(김유신의 동생)은 “오늘 나라를 위해 죽어, 영원토록 이름을 남기라”고 아들의 죽음을 부추긴다.황산벌전투를 소재로 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에선 이 모습이 희화화 돼 그려진다.기자는 이 장면이 너무나 슬펐다. 아무리 그럴듯한 대의와 명분 앞이라도 ‘인간’ 반굴과 관창에게 두려움과 공포가 없었겠는가? 그들이 화랑이 아닌 화랑의 할아버지였더라도.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10-24

사후 162년 흐른 뒤 ‘흥무왕’으로 추존된 김유신

7세기 신라엔 ‘삼한일통(삼국통일)을 이끈 스타급 인물’이 여러 명 출현한다. 백제를 멸망시켜 딸 고타소(古陁炤)과 사위 김품석의 원수를 갚은 동시에 통일의 초석을 닦은 무열왕 김춘추, 강력한 군사대국 고구려가 무릎을 꿇게 만들고, 지속적으로 내정을 간섭하던 당나라를 나라 바깥으로 내쫓은 문무왕 김법민, 통일왕조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이뤄 문화·예술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신문왕 김정명 등.3명의 왕 모두가 삼국통일의 험로에서 큰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삼한일통 과정에서 가장 주목받아 마땅한 단 한 명의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던져진다면 아마도 대다수가 “김유신”이라 답할 게 분명하다.김유신은 673년 여름에 죽는다. 당시 그의 나이 79세. 외과 수술과 항암 치료제가 없던 시절. 남성의 평균수명이 마흔 살이 되지 않던 고대였음을 감안하면 150세쯤 산 것과 다름없다.김유신의 장례식은 성대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의 조카이기도 한 문무왕은 ‘김유신의 사망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비단 1천 필과 조 2천 석을 부조로 보내고 군악의 고취수(鼓吹手) 100명을 장례식에 보냈다. 김유신의 유해는 금산원(金山原)에 묻혔고, 왕의 명령으로 그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 무덤 앞에 세워졌으며 수묘인(守墓人)을 두어 무덤을 지키게 했다’고 한다. ◆사후(死後) 1천350년째 끊임없이 이어지는 신라의 ‘영웅 전설’김유신이 신라에서 지녔던 위상은 사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사망한 지 162년의 시간이 흐른 835년. 김유신은 마침내 그 지위가 왕으로 격상된다. 단군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를 기술한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김유신은 835년 흥무왕(興武王)으로 추존(追尊·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는 것)된다.”비단 통일신라 시대만이 아니었다. 김유신의 삶과 죽음은 이후 또 다른 왕조인 고려와 조선에까지 문헌과 구전(口傳)을 통해 전해졌다.까마득한 옛날인 1천350년 전 세상을 떠난 한 신라인의 이야기가 ‘영웅 전설’처럼 21세기인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이다.국회도서관 자료조사관인 박찬흥의 논문 ‘김유신 관련 사료를 통해 본 시기별 인식’은 신라에선 김유신이 거의 ‘신격화’ 됐었다는 걸 알려주고 있다. 이런 대목이다.“김유신은 살아 있을 때는 물론이고 죽은 뒤에도 신라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살아 있을 때는 태종과 문무왕을 보필하여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룩한 최고의 신하로 평가받았다. 당나라는 물론이고 고구려와 일본에서도 김유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 평가했다. 김유신은 죽은 뒤에도 태종(김춘추)을 도와 대업을 이룬 ‘좋은 신하’ 또는 ‘성스런 신하’라고 인식됐다. 또, 문무왕과 함께 ‘두 명의 성인’으로 추앙되었으며, 불교적으로 33천(우주의 중심)의 한 사람이 내려온 것이 김유신이라고 인식됐다.” ◆고려는 ‘신령스런 장수’로, 조선은 ‘신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한 왕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왕조가 등장하면, 이전 왕국의 영웅은 평가 절하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럼에도 김유신에 관한 평가는 고려와 조선에서도 결코 낮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높아졌다고 봐도 무방하다.심지어 고려는 김유신을 신(神)의 자리에까지 가져다 놓는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 역시 김유신을 지목해 만고충신(萬古忠臣)이라 추켜세웠다.앞서 언급한 논문 ‘김유신 관련 사료를 통해 본 시기별 인식’에서 이와 관련된 부분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고려 때 김유신은 신라에 이어 진천현 태령산의 사당에서 국가제사로 받들어졌다. 윤관은 김유신이 신령스러운 기적을 많이 일으킨 장군으로 인식했고, 이승휴는 김유신이 오묘한 병서를 얻어 무예에 뛰어났다고 말했다. 고려 말의 정추도 김유신이 기이한 능력을 가진 장수이고 큰 무공을 세웠다고 인식했다. 조선시기에서도 무열왕·문무왕과 신하 김유신의 절대적인 신임 관계로 인해 김유신이 큰 공적을 세웠다는 평가가 지속됐다. 그리고 김유신이 신라 왕조 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 보았다. 김유신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무(武)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됐다. 그리고 성리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김유신의 행적을 통해 그를 충신이라고 인식했다.”고려와 조선왕조의 평가만이 아니다. 일연의 ‘삼국유사’와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 고문헌에 등장하는 김유신의 청소년 시절 일화를 읽어보면, ‘이건 일반 인간에 대한 기록이 아닌 영웅 탄생 설화에 가깝구나’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한성대학교 한국고대사연구소 학술연구원 박승범의 논문 ‘김유신의 생애와 역사적 의의-그 가계(家系)와 활동을 중심으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서술된 이야기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김유신이 태어난 이후 청년기까지의 활동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한다. ‘삼국사기-김유신 열전’에서는 15세에 화랑이 돼 그를 따르는 이른바 용화향도(龍華香徒)를 거느렸다는 것과 17세에 고구려·백제·말갈 등 외적을 평정해 삼국을 아우를 뜻을 품고 수도하다가 신선으로 여겨지는 난승(難勝)이라는 노인으로부터 비법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이듬해인 612년 거듭된 적의 침입에 웅대한 뜻을 갖고 있던 중 보검이 영험을 얻었다는 것 등의 일을 전하고 있다. 이와 달리 ‘삼국유사’에서는 18세가 되던 해에 검술을 닦아 국선(國仙)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이미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정벌할 뜻을 갖고 있던 중 고구려 첩자의 꾐에 빠져 위기에 처했으나 신라 국가제사 중 대사에 해당되는 제장인 삼산(三山)의 신령들이 도움을 주어 위기를 벗어났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비판하는 역사학자도 있으나, 빼어나고 돌올한 인물인 것은 분명해이처럼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위업을 이룬 ‘신화적 존재’로 부각돼온 김유신이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우호적 시선으로 보지는 않는다. 사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좋아하는 인간’이란 세상에 없다.단재 신채호(1880~1936)는 한국 ‘근현대 민족주의 사학’의 효시이자 거두라 할 수 있는 인물. 단재와 그의 견해를 따르는 역사학자들은 김유신을 매섭게 질타한다. 단재의 저서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는 김유신을 지목해 ‘교활한 음모로 적국을 혼란에 빠뜨린 음험하고 무서운 정치가’라고 비판한다. 이에 수긍하는 후학들도 적지 않다.김유신에 관한 비판적 견해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개가 갸우뚱한다. 앞서 인용한 박승범의 논문은 기자의 의문에 이런 답을 들려주고 있다.“김유신 가문은 금관가야 왕족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될 영화를 잃어버리고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신라 사회에 편입되었다…(중략) 김유신 가문은 왕족으로서 누려야만 했던 지위와 영화를 신라의 유력한 가문이 되면서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김유신 가문은 정당한 전략은 물론이고 때로는 비열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모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이러한 김유신의 모습은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평생의 공적을 전장에서 세운 사람이 아니라, 음모로 이웃나라를 어지럽힌 인물’이라고 평가할 만큼 부정적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김유신과 그 가문이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과 의지의 산물이었다. 신라만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에 정복당한 다른 고대국가들은 최상의 경우 그 국명만 남겼을 뿐 구성원들의 존재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따라서 김유신이 보여준 생존전략을 단순히 협잡, 또는 음험함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길고 지루했던 여름이 끝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지난 주말. 경주시 충효동을 찾았다. 봄에 이어 김유신의 묘를 다시 한 번 둘러보기 위해서였다.기나긴 세월 동안 숭배와 비난의 목소리를 모두 듣고 있지만, 걸출하고 돌올한 신라의 명장(名將)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김유신.화려하게 조성된 ‘삼국통일 주역’의 봉분은 높고 거대했고, 개국공 순충장열 흥무왕릉(開國公 純忠壯烈 興武王陵)이라 적힌 비석은 후손들의 자랑이 되기에 충분했다.궁금하다. 김유신은 자신의 이름이 1천35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도 인구에 회자될 것을 스스로도 예견했을지.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10-17

고대 근친혼은 性적인 문제 아닌 권력 독점과 유지 수단

신라는 국가를 향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중시하는 사회였다. 신하가 왕에게 지켜야 할 신의(信義)도 화랑을 포함한 신라 귀족청년들이 교육받은 주요 덕목이다. 그건 통일 이전과 이후가 동일했다.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성(性)문화는 매우 자유로웠다고 추정된다. 오히려 1천여 년 전 신라 사람들이 21세기를 사는 지금의 우리보다 더 큰 성적 자유를 누렸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없지 않다.수원과학대 교양학부 류선무 교수의 논문 ‘신라시대의 성문화 연구’ 결론 부분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렸다.“신라시대는 모든 면에서 남녀가 동등한 위치에 오르게 된 단계였다. 남녀의 애정 윤리와 성 풍속도 남녀 동등하게 자유와 개방 정신 그것이었다. 이러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처용가(處容歌)’였다. 성적 욕구의 표현과 행위는 남녀가 서로 존중하는 풍조였다. ‘화랑세기’에서 미실은 세종전군, 사촌 오빠 사다함,진홍왕,진흥왕의 아들 동륜과 금륜,설원랑,자기 동생 미생 등과 혼인 및 사통하며 난음 행각을 펼치지만 그것이 윤리·도덕적으로 지탄을 받는 죄악이 아니었다.” ◆오늘날의 도덕적 잣대로 신라 성 풍속 해석하면 곤란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해 삼한일통(삼국통일)의 토대를 거의 완성한 7세기 중반 이후에도 위와 같은 성 풍속은 이어졌다.‘삼한일통의 양대 거두(巨頭)’라고 부를 수 있는 무열왕 김춘추와 태대각간 김유신. 김춘추는 친자매 둘 모두를 아내로 삼았고, 김유신은 여동생의 딸, 즉 조카를 두 번째 아내로 맞는다. 그것도 회갑을 넘긴 나이에.앞서 언급된 논문 ‘신라시대의 성문화 연구’에서도 이를 아래처럼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김유신의 동생인) 문희는 언니 보희로부터 상서로운 꿈을 사고 김춘추와 혼인해 딸 지소를 얻게 되고, 지소는 당시 외삼촌인 김유신과 혼인했다. 또한, 언니인 보희도 뒤에 김춘추의 후궁이 된다. 자매가 한 남자의 부인이 된 것이다. 삼촌과 조카딸, 고모와 친정 조카,외삼촌과 생질녀 등 친족관계 속에 중복된 혼인 관계로 짜여진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그럴 사람이야 없겠지만, 1천 년 전 이런 풍속만을 보고 “신라는 성적으로 몹시 문란한 나라”였다고 말하는 건 너무나 단순한 해석이다.동서양을 불문하고 고대 사회의 근친혼은 성적인 문제가 아닌 ‘권력의 독점과 지속적 유지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역할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그러니, 삼국통일이라는 당대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친 김유신과 무열왕 김춘추의 희생과 피땀을 ‘성적인 문제’ 하나만으로 폄하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그래서였을 것이다. 류선무 교수의 논문 ‘신라시대의 성문화 연구’ 또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신라의 남녀는 대등한 입장에서 상대의 의사를 존중해 강제적인 성폭력이나 강간 등의 성범죄는 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왕실이나 상류사회에서는 권력과 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족내혼(族內婚)이 일반적인 혼인의 형태였다. 어느 시대, 어떤 사회의 결혼제도나 가족의 형태, 성 풍속이 도덕적이냐 또는 야만적이냐, 문명적이냐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권리와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존중되는 가운데 각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성적 에너지가 발산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의 기계적이고, 상업적이고, 신경쇠약적인 병든 성 문화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건전하고 건강한 성 문화의 형성은 현대인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크나 큰 숙제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 뜻을 받드는데 최선을 다한 신라의 통치자들대부분의 고대 역사는 통치자와 세칭 ‘영웅’ 중심으로 기술된다. 그러니, 신라의 보통 사람들이 효(孝)에 관해 어떻게 인식하고 실천했는지 알기는 쉽지 않다.다만, 구전되는 설화나 전설을 들어보면 왕이나 귀족이 아닌 평민들 역시 부모를 극진히 섬기는 사람을 칭송했다는 건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의 왕들은 대부분이 효자였다. 결국은 왕도 누군가의 아버지고, 누군가의 자식이니까 효를 인간 행위의 근본이라 믿었던 것이다. ‘논어’ 학이편(學而篇)엔 이런 문장이 쓰여 있다.“부재(父在)에 관기지(觀其志)하고, 부몰(父沒)에 관기행(觀其行)하라. 삼년(三年)을 무개어부지도(無改於不之道)라야 가위효의(可謂孝矣)니라.이를 현대식으로 풀어 쓰면 대략 이런 뜻이 될 터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땐 그의 뜻을 따르고, 돌아가신 후에는 그의 행적을 살펴라. 그런 행위가 최소 3년은 지속돼야 그게 효의 시작이다.’이젠 앞서 이야기한 신라의 자유로운 성문화와는 다른 이야기다. 통일신라의 기틀이 닦이던 7세기 중후반 나라를 다스렸던 신라 왕들은 선왕(先王)인 아버지에게 효를 다했다.문무왕 김법민은 딸과 사위의 비극적인 죽음을 겪으면서도 삼한일통의 의지를 꺾지 않았던 아버지 무열왕의 뜻을 받들어 고구려 병합과 당나라 축출이라는 삼국통일의 마지막 숙제를 해결했다.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 김정명은 “사후(死後)에도 용이 돼 일본 해적으로부터 백성들을 지키겠다”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문무왕을 바다에 장사 지냈다.또한, 조부 무열왕과 부친 문무왕이 이뤄놓은 삼국통일의 기반 위에서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운 것도 신문왕이다.이 같은 문무왕과 신문왕의 행위를 ‘관기지(觀其志)와 관기행(觀其行)’이라 부르지 않으면 어떤 걸 그리 칭할 수 있을까.‘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펴낸 ‘통일신라 시기 2-불교문화’엔 핏줄로 이어진 바로 이 3명의 왕, 무열왕·문무왕·신문왕의 주요 행적이 짤막하게 요약돼 있다. 아래 그대로 옮긴다.“대왕암은 경북 경주시 양북면 앞바다에 있는데,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물리쳐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그리고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세웠다. 절이 다 지어지기 전에 왕이 죽었으므로, 아들인 신문왕이 재위 2년(682년)에 사원을 완성해 감은사라 했다. 문무왕은 평소에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돼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해 동해에 장사지낼 것을 유언하였는데, 그 뜻을 받들어 장사한 곳이 바로 대왕암이었다. 감은사 금당 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하는데, 실제 발굴조사에서 그 흔적을 발견했다.” ◆조부와 부친에 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신문왕이지만...신라는 물론, 이 땅에 존재했던 모든 왕조를 통틀어도 빼어나고 돌올한 업적을 남긴 임금으로 평가받는 게 신문왕의 할아버지(무열왕)와 아버지(문무왕)다. 그런 이유에선지 학계에서도 신문왕에 대한 평가는 조부와 부친에 비해 인색하다. 하지만, 통일신라 초기 신문왕이 진행했던 굵직굵직한 문화예술 프로젝트와 권력의 중앙 집중을 위한 노력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성격의 것들이 분명 아니었다.고대사 연구자 김용만의 ‘인물한국사’는 신문왕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681년 7월 1일 삼국통일의 영웅 문무왕이 세상을 떠났고, 16년간 태자 자리에 있던 정명이 왕위에 올라 신문왕이 됐다. 신문왕은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있던, 냉정하면서도 판단력과 실천력이 뛰어난 임금이었다.”그 시대 신문왕이 맡아야 했던 ‘자신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고문헌에 의하면 그는 삼국통일 직후 통치 기반을 단단하게 구축하고, 귀족들의 노동력 징발권도 과감하게 회수함으로써 고대 국가의 왕이 가져야 할 권위를 강화하고, 행정구역도 정비했다고 한다.이 정도면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3대를 지목해 “잘난 할아버지에 더 잘난 아버지, 그리고 만만찮은 손자”라고 표현하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닌 듯하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2023-10-03

한국문화 속 조명되는 김유신의 엇갈리는 역사적 평가

무능한 조선의 왕 선조에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라며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끝까지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임진왜란의 명장 이순신(1545~1598).오늘날로 말하자면 해군 작전사령관격인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활약하며 보여준 이순신의 지략과 기개는 5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2023년까지 여러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그리고, ‘장군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또 한 인물이 있다. 이순신보다 1천 년쯤 앞 시대를 살다간 김유신(595~673)이다. 이 두 ‘장군’은 한국에서라면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이름을 알고, 대략의 업적을 이해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시간을 뛰어넘은 ‘빅 스타들’이다.김유신이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노력으로 인격과 품성을 만들어간 것인지는 대구한의대 천인석 교수의 논문 ‘김유신의 생애와 사상’의 서두에 잘 설명돼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김유신의 탄생은 가야 왕족 출신 진골 귀족과 신라 왕족과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출생설화부터 신이(神異)한 능력을 지닌 그는 어려서부터 지식과 교양을 갖춘 부모로부터 훌륭한 교육 기회가 주어졌고, 성장하면서 문자 교육을 비롯한 경전 교육,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다양한 학술과 무예를 배웠다. 15세에 화랑이 되고, 18세에 국선(國仙·화랑들의 우두머리)이 돼 당대 최고의 화랑으로 교육받았다. 그의 가계에서 전수된 충효의 윤리와 합리적 사고, 화랑으로서 ‘세속오계’로 표현되는 신념, 그리고 가문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끊임없는 수양과 노력, 왕도정치의 지향이 그의 사상 형성의 기본이 됐다.” ◆역사의 평가가 엇갈리는 ‘문제적 인물’로서의 김유신인간의 내부엔 선과 악, 긍정적 면과 부정적 면이 공존한다. 누구라도 그렇다. 이 명제에선 김유신도 자유로울 수 없다. 수많은 고문헌에선 ‘충성스럽고 용맹한 신하이자 빼어난 장수’로 김유신을 표현하지만, 이와는 전혀 다른 견해도 분명 존재한다.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며, 근대 한국 역사학계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단재 신채호(1880~1936)는 김유신을 지목해 “민족의 배신자”로 냉혹하게 평가 절하했다.이와 관련된 논문을 읽어보자. 대구가톨릭대 임선애의 ‘한국문화와 김유신의 재현양상’ 중 일부를 아래 인용한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위대한 인물이지만, 역사학자 신채호에 이르면 김유신은 민족(고구려와 백제)을 배반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중략) 역사 기록물에 의하면 김유신은 영웅과 모략가라는 배치되는 단어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 연원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기록과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신채호의 저서)’의 주장이 대조를 이루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전자의 기록에서 보면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위대한 인물이지만, 후자의 주장에 이르면 김유신은 민족을 배반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김유신에 대한 양극화 현상은 이후 지금까지 한국문화 속에 조명되는 김유신의 재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후략)”위와 같은 역사학계의 평가만이 아니다. 김유신과 그 가족들의 ‘혼인 관계도’를 그려보면 지금의 상식으론 이해가 불가능한 걸 넘어 외마디 비명이 나올 정도다.잘 알려져 있듯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는 김춘추(무열왕)와 결혼해 후에 왕비(문명왕후)가 된다. 그런데,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유신의 또 다른 여동생 보희도 무열왕의 아내였다고 한다.고대 제국의 왕이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건 특별히 손가락질 받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같은 친자매를 동시에 데리고 산다는 건 유례가 드문 경우. 이 혼맥 형성의 배후엔 김유신의 권력욕이 있었다는 게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 ◆김유신 장군이 여동생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여기서 놀라기엔 아직 이르다. 김유신은 예순 살이 되던 해 두 번째 아내를 맞는다. 그런데 그 여성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 바로 자신의 여동생 문명왕후의 딸이다. 회갑 노인이 어린 조카와 결혼한 것이다.‘삼국사기’ 등에 지소부인(智炤夫人)이라 기록된 이 여성은 평소 “외숙부”라 불렀던 사람의 아내로 살게 된다. 이 이야기를 들은 기자의 후배 하나는 “사람 족보가 왜 그래요?”라며 정색했다.이는 1천~2천 년 전 신라였으니 가능한 이야기다. 근친간의 혼인은 그 사례가 김유신 가문만이 아닌 신라 왕족들 사이에서도 흔했다고 한다. 왜였을까?수원과학대 교양학부 류선무 교수의 논문 ‘신라시대의 성문화 연구’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위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읽힌다.“신라는 족내혼(族內婚·같은 씨족, 종족, 계급 안에서 배우자를 찾는 혼인)을 철저히 지켰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정치권력과 부귀영화를 자기 성씨(姓氏)로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의 결과였다. 한 번 왕이 되면 가능한 한 자기 집안 사람과 결혼하게 했다. 신라 초기에 박씨가 지배하는 동안 여덟 왕이 왕위에 올랐는데,그 중 여섯 왕이 박씨 왕비를 맞이했으며,왕권이 석씨(昔氏)에게 돌아가자 석씨 또한 자기 씨족만을 왕비로 맞이했다. 4세기에 김씨가 왕위에 오른 후 초기에는 과거의 왕족이었던 박 씨나 석씨를 왕비로 맞기도 했으나 왕권이 강화될수록 김씨만을 왕비로 맞이했다. 왕족 김씨는 상류사회 계층을 형성해 김씨 사이에서 출생한 자손을 성골(聖骨·골품제도의 최상위 계급)이라 하여 신성시하고, 이 혈통 내에서 혼인을 하도록 권장했다. 신라의 혼인은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부계외 모계,적서(嫡庶·적자와 서자)의 구별은 분명했지만, 여성의 지위나 인권은 남자와 거의 대등하지 않았다 한다.”◆자신의 아들을 처형하라고 문무왕에게 요구한 냉혹한 측면도2023년 현대인의 상식으론 이해가 어려운 혼인을 진행시키고, 스스로도 행한 김유신에게선 덕장(德將)이나 지혜로운 관료의 모습이 아닌 차갑고 냉정한 모습도 확인된다.원술(元述)은 김유신의 아들이다. 20세기 한국의 일부 권력자들은 전쟁이 없는 시대임에도 자신의 돈과 힘으로 아들을 병역의무로부터 해방시켜주곤 했다.신라의 국무총리이자 국방장관이자 합동참모의장 역할까지 동시에 수행했던 김유신은 이들과는 달랐다. 자식인 원술을 가장 위험한 전쟁터에서 싸우게 했다.거기까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성)라고 볼 수 있다. 비판받을 일이 전혀 아니다. 근현대 영국의 왕자들과 귀족청년들 또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전투에 앞장서기도 했으니까.헌데, 문제는 원술이 당나라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살아서 돌아왔을 때 발생한다.김유신은 아들 원술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화랑들이 금과옥조로 삼는 ‘세속오계’ 중 ‘임전무퇴(臨戰無退)’를 저버린 것이라 판단해서였다.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김유신은 자신의 조카이자 당시 신라의 통치자였던 문무왕에게 “못난 아들 원술이 왕과 우리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으니 목을 베어 죽임이 마땅하다”고 권유한다.대의명분(大義名分) 앞에서는 혈족과의 인연도 주저 없이 단숨에 끊어버리는 냉혈한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하지만, 문무왕은 그럴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김유신은 문무왕의 외숙부. 그러니, 원술은 문무왕의 사촌인 것이다. 일부러 패한 것도 아니고, 죽을힘을 다해 싸우다가 안타깝게 진 장수를, 그것도 친척을 죽이는 건 왕으로서도 못할 짓이었기에.이 이야기는 서울예술대학 설립자 유치진(1905~1974)의 희곡 ‘원술랑’에 구체적으로 담겼다. ‘나무위키’는 관련 내용을 아래와 같이 부연하고 있다.“‘원술랑’ 2막의 내용은 신라군이 당나라군의 계책에 속아 궤멸 수준으로 참패한 뒤 원술이 아버지 김유신 앞에 나타났고, 김유신은 ‘전우들이 죽어가는데 어찌 비겁하게 혼자 살아 돌아왔느냐’며 꾸짖자 원술은 부끄러운 마음에 자결하려 하다가 사신이 ‘계급을 강등시켜 나라 밖으로 내쫓으라’는 왕의 명령서를 들고 오자 물러가는 것으로 끝난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9-26

삼한일통 이룬 신라 ‘문화와 예술의 부흥’을 이룩하다

전쟁은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부정할 수 없는 비극이다. 그건 옛날과 지금이 다를 바 없다.신라는 백제와의 격전, 고구려와의 전투, 당나라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싸움을 오랜 시간 벌였다. 쉽게 이야기하면 7세기 중반과 후반 모두가 ‘전쟁의 시기’였다. 나라가 불길에 휩싸이는 경우가 흔했고, 많은 신라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긴 시간의 전쟁이 야기한 처참한 상황이 끝나고, 삼한일통(삼국통일)을 이룬 신라가 안정화의 길을 걷게 된 건 문무왕(김법민) 때에 와서다.아버지 무열왕(김춘추)과 외숙부인 태대각간 김유신의 조력을 등에 업은 김법민은 ‘삼국통일을 완성한 스타 주군(主君)’이 돼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7세기 후반 일이다.그렇다면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운 시절이 도래한 신라가 문무왕의 주도 아래 계획한 차기 프로젝트는 뭐였을까? 즉답하자면 ‘문화와 예술의 부흥’이었다. ◆건축물을 통해 왕실의 권위와 번성한 국가의 힘을 보여주다비단 신라만이 아니다. 전 세계 여러 고대·중세 왕조는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고, 강성한 국력을 내외에 보여주기 위해 거대한 건축물을 경쟁적으로 만들었다.2023년 현재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여행지 중 하나인 베트남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 베트남의 마지막 군주 국가 ‘응우옌(Nguyen)’은 중국의 자금성(紫禁城)을 모방한 화려한 궁전을 축조한다. 이른바 후에 왕궁(Hue Imperial Citadel)이다.베트남 중남부의 매력적인 여행지에 자리한 이 궁전은 응우옌 왕조가 빛났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아래는 후에 왕궁에 관한 ‘베트남 셀프 트래블’의 부연.“후에를 수도로 한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응우옌의 궁터로, 해자와 10km에 달하는 성곽으로 둘러싸여 시타델(Citadel·성채)이라고도 부른다. 프랑스와 미국 등 세계열강과의 전쟁을 거치며 많은 문화유산들이 소실됐으나, 종전 후 베트남 정부와 유네스코의 관심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돼 건물들이 복원되고 체계적인 관리를 받고 있다.”베트남과 이웃한 캄보디아에도 과거 번성했던 크메르 왕조의 흔적을 보여주는 압도적인 건축물이 존재한다. 앙코르 와트(Angkor Wat)다.한 해 수십 만 명의 한국인이 찾는 핵심 관광지이며, 프랑스와 독일, 영국과 스웨덴에서 1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온 유럽인들의 입을 벌어지게 만드는 완벽한 조형미의 사원.기자 역시 이곳을 4번 찾았고, 갈 때마다 이름난 이탈리아 로마의 어떤 성당보다 빼어난 미적 완성도에 감탄하곤 했다. ‘위키백과’는 앙코르 와트를 이렇게 설명한다.“캄보디아 시엠레아프 주의 앙코르에 위치한 사원으로, 12세기 초에 수리야바르만 2세에 의해 크메르 제국의 사원으로서 창건됐다. 앙코르 유적 중 가장 잘 보존돼 있으며, 축조된 이래 크메르 제국 모든 종교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맡은 사원이다. 처음에는 힌두교 사원으로 힌두교의 3대 신(神) 중 하나인 비슈누 신에게 봉헌되었고, 나중에는 불교 사원으로도 쓰였다. 옛 크메르 제국의 수준 높은 건축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동궁과 월지, 통일 완성한 신라의 화려한 문화예술 부흥신라는 베트남 응우옌 왕조와 캄보디아 크메르 왕조에 한참 앞서 신성함이 담긴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어냄으로써 통일을 이룬 나라의 무너질 수 없는 권위와 뻗어나가던 국가의 힘을 보여준다.예전에는 안압지(雁鴨池)로 불렸던 월지(月池) 일대에 신라의 탁월한 건축기술과 예술적 세련미가 담긴 다수의 건물들을 쌓아올리기 시작한 것. 그렇다. 바로 ‘동궁과 월지’다.동궁과 월지의 건설은 삼한일통을 이룬 문무왕의 ‘문화예술 프로젝트 제1호’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1978년 당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은 나라의 자랑 중 하나인 동궁과 월지를 지목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동궁과 월지는 경주시 인왕동에 위치해 있는 통일신라시대 궁원지로, ‘삼국사기’에는 문무왕 14년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宮內穿池造山 種花草 養珍禽奇獸) 또한, 문무왕 19년에는 궁궐을 화려하게 중수하고 동궁을 지었다’(重修宮闕 頗極壯麗… 創造東宮)고 쓰여 있다. 그리고,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월지 인근의 ‘임해전에서 연회를 개최하였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이와 같은 문헌 기록들은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연못과 건물지군, 그리고 ‘의봉4년(儀鳳四年)’ ‘조로2년(調露二年)’이라 새겨진 와전(기와와 벽돌)과 다수의 목간(木簡) 등으로 그 신빙성이 입증된 바 있다.”인공 호수를 파고, 왕자를 교육시킬 동궁을 짓고, 임해전 등의 미려한 건물을 만든 문무왕은 거기에 희귀한 꽃을 심고, 보기 드문 짐승들까지 풀어 신라 왕실의 힘을 보여줌과 동시에 어렵게 이룬 삼국통일이란 크나큰 성취를 백성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살아가는 내내 아버지 무열왕과 외숙부 김유신을 넘어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을 것이 분명한 문무왕 김법민은 내심 “선친과 외삼촌은 전쟁에서의 용맹만을 보여줬지만, 나는 문화와 예술에 대한 감각도 더불어 갖춘 성군(聖君)”이란 걸 은근히 자랑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물론, 이는 기자의 추측일 뿐이지만.어쨌건 현대에 들어와 동궁과 월지에선 발굴과 복원이 지속됐고, 그건 21세기인 지금도 진행형이다.복원된 1천400여 년 전 신라의 문화 유적이 2023년 오늘 경주를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에게 흥미로운 볼거리와 함께 문화적 자긍심까지 선물하고 있으니, 문무왕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慧眼)을 가진 통치자였던 듯하다. ◆신문왕, 대를 이어 문화예술 ‘주요 프로젝트’를 진행하다동궁과 월지는 경주 시내 한복판에 자리했다. 그러니, 경주를 찾는 남녀노소 거의 모두가 어렵지 않게 둘러볼 수 있다.첨성대와 대릉원(大陵苑), 거기에 최근에 ‘경주의 핫 스폿’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황리단길이 모두 동궁과 월지 지척에 자리했다. 말 그대로 신라 천년의 역사와 청춘들의 즐거움이 어우러지는 공간인 셈.그 정도의 감각적 만족으로는 무언가가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가용이나 택시, 혹은 버스를 타고 30분쯤을 달려 감은사(感恩寺)가 자리했던 터를 찾는다.동궁과 월지가 문무왕 김법민이 완성시킨 통일신라의 ‘랜드마크(Landmark)’라면 감은사는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김정명)이 긴 시간의 노력 끝에 만들어낸 통일신라 불교예술의 절정을 보여주는 공간이다.사찰의 이름인 ‘감은(感恩)’은 말 그대로 ‘은혜를 고맙게 여기다’라는 뜻. 누가 누구의 은혜에 감사하다는 것일까? 일연의 ‘삼국유사’에 이에 대한 해답이 담겼다. 다음이 그 내용이다.“신라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룬 후 나라를 더욱 굳게 지키기 위해 감은사를 짓기 시작했으며 신라 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즉위한 이듬해(682년)에 완공했다. 문무왕은 승려 지의(智義)에게 ‘죽은 후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고 죽었다.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大王巖)에 안장했으며, 신문왕이 선왕(先王)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그 이름을 감은사라 했다.”문무왕에게는 콤플렉스와 함께 큰 유산(遺産)을 물려준 두 사람이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무열왕과 김유신이 바로 그들.신문왕 역시 누구도 쉽게 물려줄 수 없는 커다란 물질적·정신적 자산을 선사한 사람이 분명 있을 터. 그는 다름 아닌 아버지 김법민, 즉 문무왕이었다.통일된 국가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고 떠난 아버지 문무왕은 신문왕에게 ‘마음 속 스타’였을 터.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이라는 비극 위에서 만들어진 통일신라. 그 시작점인 7세기 후반. 세계 어느 나라도 흉내 내기 힘든 ‘문화예술의 집적체(集積體)’ 감은사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계속)/사진 이용선기자/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9-19

거대한 고목 같은 아버지를 뛰어 넘으려 했던 문무왕

현대와 고대가 크게 다를 바 없다. ‘외교’는 국가 발전을 추동한다.이웃한 나라들과의 교류를 통해 얻어낼 건 얻어내고, 양보할 것은 양보함으로써 전쟁의 위험성을 줄이고, 경제 발전의 포인트를 찾아내는 건 7세기에도 중요한 일이었고, 21세기에도 여전히 중요하다.그래서다. 통치자에겐 ‘탁월한 외교 전략가’ 하나를 가지는 게 용맹한 장수 열을 가지는 것보다 더 큰 힘이 될 수 있다.그런 차원에서 청년 시절의 김춘추(무열왕·603~661)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받았다.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듬직한 신하였던 것.문무왕 김법민의 아버지 김춘추가 왕이 되기 전 어떤 외교적 성과를 보였고, 당시 초강대국 당나라에서 어떤 활약을 했으며, 그를 응접한 당나라의 태도가 어떠했는지는 ‘삼국사기’에 잘 기록돼 있다. 아래 인용한다.“648년 12월 김춘추는 아들과 함께 당(唐)에 입조하였고, 태종(太宗)의 환대를 받았다. 김춘추는 이곳에서 국학(國學)을 방문해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을 참관하였으며, 신라의 장복(章服)을 고쳐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했다. 당 태종으로부터 특진(特進)의 벼슬을 받고, 당에 체류하던 중 태종의 호출로 불려가 만나게 된 자리에서 백제 침공을 위한 지원군을 요청해 허락받았다…(중략) 김춘추가 신라로 돌아갈 때 당 태종은 3품 이상의 관인들을 불러 송별연을 열었고, 귀한 책과 글씨를 선물했으며, 장안성(長安城)의 동문(東門) 밖까지 나가 직접 전송했다.” ◆당나라 왕과 관료들 매료시킨 김춘추의 외교 전략위의 문장을 지금의 형식으로 풀어 쓰면 ‘마흔다섯 살 신라인 김춘추는 중국 당나라를 방문해 국립대학에서 하늘에 올리는 제사와 학자들의 강의를 참관해 주목받았고, 높은 벼슬까지 얻었다. 이와 더불어 백제를 공격할 병사들을 지원하겠다는 당나라 왕의 약속을 받아낸 후 성대한 환송연 끝에 귀한 선물을 잔뜩 가지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왔다’ 정도가 될 터.2023년 오늘날 이 정도의 외교 성과라면 차관은 장관으로, 장관은 총리로 승진했을 게 분명하다.삼국통일의 과정에서 무신(武臣)으로서 최고 능력을 발휘한 건 단연 김유신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빼어난 신라의 7세기 문신(文臣)은 누굴까? 답은 이미 나왔다. 김춘추다.김춘추는 중국어는 물론 일본어도 능숙하게 구사했으며,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외모에 반한 당나라 귀족부인들이 추파를 던졌다는 야담(野談)까지 전한다. 그는 안팎이 모두 매력적인 사내였던 것이다.역사학자 박현숙 교수의 논문 ‘삼국유사 기이편 태종 춘추공조의 내용 구성과 의미’에서도 김춘추라는 이름은 여러 차례 등장한다. 박 교수는 그에 관한 학계의 엇갈리는 평가까지 서술하고 있다. 이런 대목이다.“천년의 신라 역사에서 중요한 분수령을 들라고 한다면, 신라의 삼국통일일 것이다. 그리고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김춘추와 김유신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김춘추와 김유신은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그동안 우리 역사에서 조명을 받아왔다…(중략) 김춘추에 대한 평가는 ‘외교를 잘 구사해서 실리를 도모한 군주’라는 평가와 ‘외세 의존적이고 반민족적인 행위를 한 음모가’라는 평가가 상존하고 있다. 그러나 근래의 연구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보다는 삼국통일에 있어서 김춘추의 정치·외교적 역량을 파악하고, 그를 매개로 당시의 대내외적인 상황을 복원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아버지를 넘어서야 한다’는 김법민의 강박 관념돌올하고도 빼어났다. 김춘추는 그런 인물이다. 지나치게 잘난 부친을 둔 아들은 ‘어떻게든 아버지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가지기 십상이다. 이는 극복하기 어려운 콤플렉스가 되기도 하다.문무왕 김법민은 김춘추의 아들. 아버지가 잘 닦아놓은 고속도로 위를 달려 고구려를 병합하고, 당나라를 몰아냄으로써 삼한일통(삼국통일)의 구체적 그림을 완성시킨 사람이 바로 문무왕이다.하지만, 나무가 크면 그늘도 짙은 법. 문무왕은 평생 거대한 고목(古木)처럼 자신 앞에 버티고 선 아버지의 그림자를 넘어서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압박감 속에서 살았을 듯하다.캐나다 총리인 쥐스탱 트뤼도(Justin Trudeau·52)는 잘생긴 외모로 유명한 정치인이다.세계 각국의 대통령과 총리가 모이는 G8 또는, G20 정상회담에서 그는 여타의 지도자들을 압도한다. 190cm에 육박하는 큰 키에 영화배우 같은 얼굴. 거기에 더해 탁월한 친화력과 외교적 수완까지. 그런 트뤼도 총리 역시 ‘아버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현 캐나다 총리 쥐스탱 트뤼도의 아버지는 피에르 트뤼도(1919~2000) 전 총리. 나무위키는 피에르 트뤼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캐나다 자유주의 진영의 신화와 같은 존재. 근현대 캐나다가 배출한 몇 안 되는 세계사적 비중을 지닌 정치인이다. 오늘날 캐나다 국민들이 자부심으로 삼는 무상의료와 자유주의의 토대를 세웠다. 아들과 달리 보수진영에서도 호평 받는다. 현대 캐나다의 기조를 만든 위대한 정치인 중 한 명이다.”이쯤 되면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트뤼도 총리가 가졌을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미루어 짐작된다. 잘해봐야 “아버지를 닮았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뿐,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아버지는 훌륭한데 아들은 왜 저따위야”라는 비난을 받을 게 뻔하니까.아마 1천400년 전 문무왕 김법민의 심정도 그러했을 것 같다. 일생 부친 무열왕 김춘추와 비교되면서 살았을 터이니. ◆문무왕릉과 감은사를 돌아보고 쓴 졸시 한 편‘온전한 삼국통일을 이룬 영웅’이 아닌, 사는 내내 아버지와 외숙부 김유신을 뛰어넘기 위해 발버둥쳐야 했던 김법민의 감춰진 또 다른 모습이 분명 있을 것 같다.문무왕의 바다 위 유택(幽宅)과 용이 된 문무왕이 밤이면 찾아가 잠을 청했다는 감은사 터를 여러 차례 돌아봤다. 졸시 ‘문무왕의 잠’은 그때 기자의 머릿속을 떠돌던 복잡한 감정이 만들어준 것이다.신문왕이 울었다감은사 금당 아래를 들여다보며며칠째 아버지가 처소에 들지 않는다참꽃 매화 만개하고죽순도 무릎 높이로 자랐건만무엇이 하늘에 가닿지 못했나할아비 유택을 찾아 울어나 볼까아비는 문희 할미의 오줌에서 왔으니멀리 재 너머 바다는 푸르고쌍둥이 석탑 뒤로 해 떨어지는데잠을 잃은 용이 된 문무왕아들이 마련한 잠자리는 삼도천보다 멀고천자의 수중릉 희롱하는 흰 파도우울한 햇살 아래 일찍 온 제비 두 마리찬바람은 아직 그칠 기미가 없다.잘 알려져 있듯 문무왕의 유언은 “죽어서도 백성을 지키는 용이 될 것이니, 나를 산에 묻지 말고 일본 해적이 출몰하는 바다에 장사 지내라”는 것이었다.이는 끝끝내 아버지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아등바등 했던 문무왕 김법민의 마지막 ‘콤플렉스 극복 시도’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9-12

김춘추는 김유신이 과감하게 투자한 ‘블루칩’

출중한 능력에 빼어난 외모, 거기에 정치적 혜안까지 갖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아들은 마냥 행복하기만 할까?말이 나왔으니 연이어 질문 하나 더.그렇게 잘난 아버지는 물론, 나라 전체의 군사통솔권을 쥐고 수백 명 고위관료 위에 우뚝 군림한 외숙부까지 가졌다면 어떨까? 이 또한 조카에게 행복의 조건으로만 작용할까?한적한 평일 오후. 푸른 파도 일렁이는 경주 봉길리 해변에서 문무왕의 수중릉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런 의문들이 떠올랐다.661부터 681년까지 신라를 통치한 문무왕 김법민. 그는 무열왕 김춘추의 아들이며, 신라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의 조카다.재론의 여지없이 좋은 ‘외적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신라는 물론 660년 무너진 백제의 땅과 백성들까지 아버지에게 물려받았고,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과정에선 외숙부의 조력을 얻어낼 수 있었다.이건 각종 서적과 여러 고문헌을 통해 이미 상당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그런데, 기자를 포한한 몇몇 사람들은 다른 각도에서 궁금증을 가지기도 한다. ‘문무왕에게는 열등감이 촉발한 내적 콤플렉스와 갈등이 전혀 없었을까’ 하는 것.문무왕은 1천342년 전 사망했다. 죽은 사람을 불러내 직접 물어볼 방법은 없으니, 그의 내면 풍경은 그저 주관적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비교적 정답에 근접한 추측을 도출해내기 위해 일단 시간을 되돌려 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가 연애를 시작했던 시절로 가보자. 아직 문무왕이 태어나 전이다. ◆김유신, 김춘추라는 우량주(優良株)에 투자하다‘화랑세기’에는 김춘추와 문희가 맺어지게 되는 과정이 흥미로운 이야기 형태로 실려 있다. 그 시작은 이렇다.“어느 날 문희의 언니 보희가 잠 속에서 산에 올라 바라보니 서라벌에 홍수가 났다. 불길한 꿈이라 생각한 보희는 그 꿈을 동생 문희에게 비단을 받고 팔아버린다. 열흘 후 김유신이 김춘추와 축국(蹴鞠·남성들의 공놀이)을 하다가 실수로 김춘추의 옷을 찢어버리게 된다. 김유신의 부탁에 의해 바느질로 김춘추의 옷을 꿰맨 게 문희였다. 이후 김춘추와 문희는 사랑에 빠진다…(후략)”김유신은 신라가 아닌 몰락한 금관가야 출신이라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열등감의 극복을 위해선 신라 정통 귀족과 어떤 형태로든 이어지는 게 중요했다. ‘혼맥(婚脈) 형성’이 그 방법으로 선택된 듯하다.신라는 물론 당나라에서까지 탁월한 외교 협상력과 빼어난 문장을 인정받던 김춘추는 김유신이 미래를 보고 과감하게 투자한 ‘블루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그러니, 찢어진 옷을 수선한다는 이유를 들어 김춘추와 동생 문희를 만나게 한 건 철저하게 준비된 김유신의 계획이었을 터. ‘화랑세기’는 이렇게 이어진다.“1년쯤의 시간이 흐른 후 문희가 임신을 했다. 그때 김춘추에겐 이미 부인과 딸이 있던 상황. 문희를 받아들일 수도, 매정하게 내칠 수도 없었던 김춘추는 갈등했다. 그 갈등에 종지부를 찍은 건 김유신이다.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아기를 가져 집안을 망신시킨 문희를 태워 죽이겠다며 장작에 불을 붙인 것. 선덕여왕과 산책을 즐기던 김춘추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김유신의 집으로 뛰어갔고, 문희를 구한 뒤 자신의 집에 들인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춘추와 먼저 혼인한 부인이 죽었고, 문 희는 첩이 아닌 정식 부인이 된다”는 스토리.그게 신라시대건 현대건 인간의 통념상 동생을, 그것도 뱃속에 아기를 가진 누이동생을 불에 태우는 끔찍한 방법으로 죽이는 오빠가 존재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그러니, 장작에 불을 붙이고 문희를 겁박한 김유신의 행위는 요즘 말로 하자면 ‘할리우드 액션’일 가능성이 농후하다.‘어이, 김춘추. 이래도 내 동생 문희와 결혼하지 않을 거야?’라는 협박성 제스처 말이다.◆‘삼국사기’가 평가한 문무왕의 외숙부 김유신“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봉준호가 연출한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다. 1천400년 전 김유신에게도 ‘계획’이 있었다. 그 계획은 김춘추와 문희의 결혼이 성사됨으로써 절반 이상 성공된 듯하다.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김춘추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에 이어 신라 29대 왕이 된다. 김유신은 멸망한 나라의 망명객에서 왕의 손위 처남으로 신분이 격상됐다. 문명왕후(文明王后)가 된 동생 문희는 신라의 30대 왕에 오를 태자 김법민(문무왕)을 낳았다.김유신과 김춘추는 오랜 세월 서로가 서로에게 ‘호랑이 등에 달린 날개’ 역할을 했다. 당나라와 협정을 맺고, 백제를 병합하고, 신라 내부의 권력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둘은 부정할 수 없는 동업자 관계로 살았다. 삼한일통(삼국통일)의 주춧돌이 그 시절에 놓였다.생애를 걸고 베팅(Betting)한 김춘추라는 우량주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위치로 폭등했고, 아끼던 여동생은 다음 번 신라 왕 자리를 차지할 젖먹이를 출산한다. 바로 그 ‘젖먹이’ 어린 김법민을 바라보던 김유신은 얼마나 흐뭇했을까?김유신이 설계한 ‘혼맥 형성 프로젝트’는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수익을 가져왔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명성 또한 천정부지로 높아졌다. 능력과 행운이 합쳐진 결과였다.김유신 사후(死後) 5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을 때 김부식에 의해 쓰여진 ‘삼국사기’에서도 ‘신라 장군 김유신’의 높은 위상이 확인된다.그와 관련된 단국대학교 사학과 전덕재 교수의 논문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의 원전과 그 성격’을 아래 인용한다.“김유신열전은 ‘삼국사기’의 열전 10권 가운데 무려 3권이나 차지할 정도로 분량이 많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삼국사기’ 찬자(撰者·책을 쓴 사람)가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을 매우 숭앙하였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김유신열정 말미에 기술한 사론(史論)에서 ‘비록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용이 있었더라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다면 기록이 없어 알려지지 않을 뻔하였다. 그런데 유신과 같은 이는 사람들이 칭송함이 고려시대까지 끊이지 않고 있으니, 사대부가 알아주는 것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꼴 베고 나무하는 어린아이조차도 능히 알고 있으므로, 그 사람됨이 반드시 다른 이들과 차이가 있다’고 언급했다. 이는 고려 사람들이 김유신을 역사를 빛낸 위대한 위인으로 칭송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인데…(후략)” ◆문무왕의 업적 또한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지만…‘삼국사기’ 속 ‘열전’의 3할을 차지할 만큼 주요한 역사 인물인 김유신에게는 밀리지만, 문무왕 역시 허술하거나 만만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외숙부 김유신과 아버지 무열왕이 닦은 토대 위에서 문무왕 김법민은 빛나는 행보를 보여줬다.‘한국학중앙연구원’이 요약하고 있는 문무왕의 업적은 여타의 신라 왕은 물론, 이후 우리나라 왕조의 어떤 통치자와 비교해도 부끄러울 게 없어 보인다. 이런 설명이다.“왕에 오르기 전부터 외교 활동과 백제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즉위 초에는 백제 부흥세력을 제압했고, 666년엔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병합시켰다. 이후 삼국 전체를 자국 영토로 삼으려는 당나라의 노골적인 대규모 침공을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5소경제와 군사조직인 9서당의 단초를 마련해 확장된 영역의 통치를 위한 기반을 다졌다.”이처럼 괄목할 만한 삶을 살았음에도, 문무왕에게 드리워진 외숙부 김유신과 부친 김춘추의 그늘은 너무 크고 짙었다. 때론 그 그늘이 안온함이 아닌 부담감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다음번 기사에선 김유신과 함께 문무왕에게 콤플렉스를 안겼을 수도 있는, 또 다른 한 사람 ‘무열왕의 삶’은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까 한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