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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41·마지막회> 해병(海兵), 그 붉은 이름의 추억 / 포항 남구 이용진씨

1949년 4월15일 진해 덕산 비행장 누추한 격납고에서 적은 병력과 보잘 것 없는 장비로 대한민국 국군사에 빛날 첫 걸음을 내딛은 해병대(海兵隊). 그 후, 한국 전쟁과 월남전의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어 `무적 해병, 귀신 잡는 해병, 신화를 남긴 해병` 등의 애칭과 찬사를 받아 온 해병대 제 1사단이 본격적으로 포항에 주둔한 지도 반세기가 훨씬 넘었다. 수많은 해병들이 포항의 추억을 담으며 생활했고 혹독한 훈련을 받으면서도 태풍과 홍수, 폭설 다녀가는 세월동안 해병대는 언제나 포항시민과 함께 했다.“해병대를 제외하고는 포항을 말할 수 없지요. 오늘날 포항의 성장이 있기까지 바탕이 되었던 정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학도병의 애국 애족 정신과 얼마 전 고인이 된 박태준씨가 종합제철소 건립 당시 외쳤던 우향우 정신, 그리고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즉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해병대 정신이었습니다. 이 셋의 공통점은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임했다는 것이지요.”1969년 해병소위로 임관해 해병대 제1사단에 첫 발령을 받은 이용진(63)씨는 1983년 소령으로 예편 후 군무서기관으로 해병대 포항역사관 관장을 지내다 2006년 퇴임을 했다. 그의 기억을 들추자 해병이란 이름의 수없이 많은 청춘들이 일어선다. 부하도 동기도 선배도 상관도 붉은 명찰을 달았던 사람들이다.그가 임관 할 무렵, 나라 안팎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수도권과 영남공업권을 잇는 산업의 대동맥인 경부고속국도가 1970년에 완공되고, 그 해 영일만에서는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꿈을 건 포항종합제철소 건설의 대역정이 활기차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65년부터 72년까지 월남파병이 이어졌고, 68년 1월21일 무장공비들이 대한민국의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를 기습하려 침투했던 이른바 김신조 사건으로 전군이 긴장사태에 돌입하기도 했다. 해병대도 타군보다 짧았던 사병 복부기간이 36개월로 늘어나는 등 혼란기를 겪기도 했는데 당시 사병들 사이에서는 `신조 때문에 신세 조진 사나이`라는 노래가 돌기도 했다.“따블백(duffle bag)에는 마른 오징어와 고추장을 챙겨 넣었지요. 부모나 애인 사진을 품고 가기도 했지만 행여 마음이 약해지거나 당시 돌던 이설 때문에 일부러 챙기지 않는 해병도 있었습니다. 포항역에서 막상 군용 열차에 올라타고 보니 장교 계급장을 달아도 만감이 교차합디다. 과연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철수 무렵이긴 했지만 몇 명이 죽고 몇 명이 양다리가 잘렸다는 소식들이 월남에서 날아들었으니까요. 부산항 제3부두에서 뚜우 뱃고동이 울릴 때 흘러나오던 노래가 뭔지 아십니까? `잘있거라 부산 항구야` 였습니다. 단단히 무장한 마음을 완전히 풀어버리는 그 노래에 하나 둘 찔벅찔벅 눈물을 짜고 결국은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지요. 지금도 가끔 그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그는 70년 월남에 파병되었다. 본인의 의사만으로도 파병을 결정할 수 있었던 그때 유독 면회객이 많았다. 강원도, 전라도 골짜기에서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오는 가족들의 목적은 대부분 어떻게 해서든 파병을 만류하기 위해서였다. 부모 형제의 간곡한 설득에도 수많은 해병들이 월남으로 향했다. 사회에서 어두운 터널을 지났던 사람도 귀하디귀하게 자란 사람도 해병이란 이름 안에서는 똑같았다. 어렵고 힘든 상황 일수록 전우애는 두터웠고 충성심은 더욱 강해졌다. 죽을 지도 모르는 전선에 가면서 어찌 만감이 교차하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박 깎은 머리에 흰 이를 드러내고 악을 쓰며 전진하던 청춘들을 잊을 수가 없다.“타군 장교들이 해병대를 부러워했던 것 중 하나가 전령입니다. 육군은 당번이라고 하는데 역할은 똑같이 지휘관을 보필하는 것이지만 해병은 달랐습니다. 소대장 목숨 하나는 내가 지킨다는 사명을 지녔었지요. 월남전에 참가 했을 때 제게도 소수영이란 이름의 전령이 있었습니다. 평택이 고향이고 곱상한 얼굴에 말을 조금 더듬던 부하였지요. 필요한 것은 어디서든 구해 왔고 매복을 나가면 제 군장을 모두 짊어지고 절대 주변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적의 공격이 있을 때 저를 제 몸으로 덮은 적도 있구요. 상관을 향한 절대복종 정신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겹습니다. 부하이기 이전에 고마운 사람이지요. 그가 먼저 귀국을 하였지만 지금도 연락을 하며 삽니다.”해병은 충성심만큼이나 객기 또한 충만했다. 별스런 노래를 핏대 세우며 불러댔고 지고는 못사는 기질 때문에 사고도 많이 쳤다. 외출을 나가면 땡깡을 부리고 가끔은 젊은 혈기에 타군과 패싸움이 붙기도 했다. 지금 같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해안 훈련이나 작전을 나가면 민가에서 슬그머니 고추장 된장독도 들고 오고 덕장에 오징어도 걷어 왔다. 동네 아가씨도 꼬셔 보고 지순한 사랑으로 마음도 앓았다. 마을사람들에게는 어쩌면 골칫거리일 수도 있었으련만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 나라에 목

2011-12-26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40> 항구를 사랑한 댓잎의 노래 / 영덕 축산면 죽도산과 축산항 (2)

80여년 이어온 오목한 미항 축산항건져 올린 대게 만큼 인생사 갖가지 죽도산 대숲길을 걸어 내려와 축산항으로 간다. 1924년 3월 일제에 의해 동해안의 명태, 정어리, 청어의 대량 어획을 위한 항구의 개발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축산항은 축산포, 축산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우며 점차 아름다운 어항으로 발전하였고 1971년 12월 21일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동해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주요 어종인 오징어, 문어, 도루묵, 대게 등 생산물의 유통과 관광산업의 발달로 영덕군의 2대 어항으로 자리 잡았다. 죽도산, 봉화산, 말미산, 와우산이 동서남북으로 둘러싸고 있는 축산항은 오목한 내항의 풍경이 무척이나 푸근하다. 이른 새벽을 가르며 바다로 나갔던 어선들은 연신 대게를 푸느라 분주하고 경매 사이렌이 울리자 판장 지붕에 앉았던 갈매기떼가 일제히 날아오른다. 판장 건물을 따라 휘어지는 도로가에 다닥다닥 붙은 상점과 횟집들은 대부분 높이가 2층을 넘지 않는다. 아직 두 자리 국번의 전화번호가 적힌 곳도 있고 유리문에 직접 쓴 간판도 남아있다. 철공소와 민박집과 식육점 사이사이엔 유독 다방이 많다. 복다방, 죽도 다방, 갈매기 다방, 동해 다방, 저 정겨운 이름의 다방들은 김 오르는 커피를 끓이며 얼마나 많은 항구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을까? 축산항의 아름다운 풍경에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다.“우야노, 낮에 손님이 많아 찬이 다 떨어졌다. 팔아 묵을 상이 안된다. 지금이 멫신데 와 여지껏 밥을 못 묵었드노. 그라믄 찬이 없어도 내캉 한 술 뜰라나? 내도 지금 막 묵으려던 참인데. 방으로 드가라. 춥다”실비식당 남금숙(65) 할머니의 말투가 마치 오랜 세월 아는 사람을 대하듯 정겹다. 염치없이 들어선 할머니의 방은 낡은 벽지 냄새와 훈훈한 온기가 가득하다. 접혀 있던 둥근 나무상을 펴놓고 벽에 걸린 사진과 할머니의 손때 묻은 살림을 두리번거리는 동안 할머니 음식 차리는 소리 요란하다.“하마 삼십 년째 여그서 이래 산다. 영감? 울 영감 세상 뜬 지도 삼십 년이다. 식당 시작해 놓고 마 돌아가싰?? 맏이가 3학년, 둘째가 2학년, 막내가 네 살 때였다. 인자 다 치우고 막내만 남았다만 아이고 고생에 대해가는 말도 마라. 처음에는 국수를 스물 몇 그릇씩 머리에 이고 자전거에 매달고 배달을 했지. 항구에 일하는 사람들이 주문을 하면 가야지 우야노. 일하는 사람들이 어데 식당에 와가 팬하게 묵을 여가가 있노 말이다. 국수 장사 십 년을 하고 밥집을 시작했지. 어여 묵그라. 여그 낙지는 이래 생겼다. 초장에 찍어 묵으면 연하고 맛좋다.”방금 데친 낙지에서 뽀얀 김이 오른다. 찬이 없다면서도 둥근 상은 넘친다. 할머니의 손님은 포구의 일꾼들과 경찰, 군인, 선생 등 축산항에 생의 몇 구절을 푼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집을 떠나 온 그들에게 밥은 아무리 따뜻해도 성근 것, 할머니는 누이도 되고 엄마도 되고 이모도 되어 밥을 지었고 밥상을 차리는 횟수만큼 정이 쌓였다. 고향으로 돌아간 병사들은 올망졸망한 자식을 달고 찾아오고, 새파랗던 총각 선생은 밥을 먹다 눈이 맞은 처녀 선생과 부부가 되어 찾아왔다. 그들이 기억하는 축산항에는 할머니의 밥상이 언제나 따뜻하게 차려져 있는 탓이다.“요즘은 관공서도 새로 지아지고 공원도 맨들고 저 짝 죽도산에도 계단이 잘 나가 있지. 구경할 데가 많아. 봄에는 뭐시 미주구리 축제라카는 게 열리는데 공원에 무대로 놓고 쿵짝쿵짝하믄 관광객도 마이 온다. 미주구리에 무, 배, 양파, 쪽파, 참나물, 미나리, 물미역을 상그라 옇고 초고추장이나 막장에 비벼 묵는 막회는 을매나 인기가 좋다고. 여가 대게도 마이 잡히고 오징어도 마이 잡히고 괴기 맛이 참 좋아. 공장 같은 기 없으니 공기가 좋고 경치도 좋지”오후 축산항은 한결 여유롭다. 대게를 숨가쁘게 풀어 대처로 실어 보낸 배가 내항에 기대어 쉬고 용접하는 수리공이 잠시 다녀간다. 고양이도 떨어진 물고기를 물고 재바르게 빈 배로 숨어든다. 오른편 죽도산 등대는 햇살에 더욱 선명하고 하늘엔 흰구름이 신나게 논다.“대게요? 마이 잡았니더. 아까 참에 트럭으로 실아 보내고 또 작업을 하잖능교. 그란데 앤즉은 살이 그래 꽉 차지 않아가 돈으는 크게 안되지요. 다음 달 쯤 되믄 수량은 적어도 값은 좋습니더. 하모요. 마캐다 원조, 원조 하지마는 바다 밑바닥에 개흙이 전혀 없이 깨끗한 모래로만 이루어진 축산 바다 대게가 최고인기라요”새벽 두 시에 나갔다는 6.35톤 용성호 선주 김영진(53)씨가 연신 대게를 건져 올린다. 축산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젊어서 몇 년 수리공으로 외국에 나가 일을 했다. 아버지도 어부였으나 배 한척 갖지 못했으므로 배를 살 목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돌아와 배를 장만하고 바다에 삶을 걸고 살아가는 그에게 축산항은 대숲 푸른 죽도산과 고운 백사장과 어린 시절 동무들을 품은 고향이다.“어릴 적엔 천날 만날 죽도산에 기올라 갔지요. 대나무로 베어다가 딱총을 만들고 포구나무

2011-12-19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39> 항구를 사랑한 댓잎의 노래 / 영덕 축산면 죽도산과 축산항

댓잎 나부끼는 소리 그득한 `竹島山`70여년 바다 밝힌 등대 지금은 명소 강구항에 들어서자 겨울이 무럭무럭 김을 올리며 익어간다. 입구부터 빼곡하게 늘어선 상가 수족관 마다 대게가 가득하고 관광객과 상인의 흥정이 한창이다. 항을 벗어나자마자 이내 열리는 푸른 바다. 오르고 내리고 다시 휘도는 도로를 바다가 따라 나선다. 노물길을 지나고 경정길을 지나는 내내 명태, 청어, 양미리, 오징어 등 바다가 선물한 날것들이 말갛게 몸을 널어 말리며 한 생을 넘기고 있다. 힘겨운 고빗길에는 희망처럼 등대가 서있고 바다로 내달리는 기슭에는 온갖 풀들이 눈망울 같은 꽃을 피우고 접는다.강구항에서 고래불해수욕장까지 장장 50km에 이르는 해안길 도보여행길 블루로드 중 B코스 종착지에 해당하는 죽도산과 축산항. 축산은 지형(地形)이 소가 누워 있는 형국(形局)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남면(南面) 지역이었으나 1914년 3월1일 일제(日帝)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양장동, 차유동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축산동이라 하고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축산리가 돼 현재 축산 1,2,3리로 분동되었으나 아직도 마을 어른들은 골새마, 신기동, 아릿염장, 염장(鹽場), 웃염장, 장방등, 재궁마, 주막거리, 중간마 등 정겨운 지명들을 사용하고 있다.축산천 냇거랑이 바다로 흘러드는 곳에 블루로드 현수교가 있다. 다리를 건너면 와우산(66.3m)과 말미산(113,5m) 사이에서 마치 밥공기를 엎어 놓은 듯한 죽도산(87m)이 오목한 항구를 바라본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 영덕 일대를 살펴보면 영덕과 영해로 나누어져 있음을 살펴볼 수 있는데 눈에 띄는 것은 지금의 축산항이 있는 축산포 앞에 `축산(丑山)`이라는 섬이 바다에 떠있다는 것이다. 당시 축산섬이 지금의 죽도산인 셈이다. 섬이었던 이곳은 일제시대때 바다를 매립하여 육지와 연결 되었다. 300년 전에 오씨(吳氏)와 추씨(鄒氏)가 함께 대나무를 심고 죽산동(竹山洞)이라 했다는 곳, 산 전체에 대나무가 많다하여 죽도산, 혹은 죽산이라 부르는 이곳은 삼국시대 이후 왜적의 침입의 주 통로로 국가에서 수군만호(水軍萬戶)를 설치하여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고 한다. 그 후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를 침략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건설하였으니 역사의 대비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또한 죽도산은 명당으로도 알려져 있다. 옛날 일본의 한 중(僧)이 우리나라에 와서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명당산(明堂山)이라는 산은 모조리 사기 말뚝(쇠말뚝은 썩기 때문에)을 박아 인재 나는 것을 막았는데 한번은 지도에 있는 죽산에 대고 말뚝을 박으니 그 산으로 장군이 올라오다가 죽었다고 한다. 산 정상에 있는 죽도등대를 향해 나무 계단을 오르다 돌아보면 전해오는 일화를 알지 못해도 이곳이 분명 명당일거라는 기운을 감지하게 한다.등대로 오르는 길 가에 두 개의 작은 비석이 서 있다. 대나무 잎이 무성해서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망향대`다. 앞의 것은 세월을 말해주고 뒤에 선 것은 사연을 들려준다.`시조 영의공께서 고향을 그리고 바라보시던 곳으로 철종 무신년 봄에 의령 후손 영해 부사 상교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이곳 일가 진사 고에게 돈을 주어 경술년에 죽도에 세웠으나 풍상에 훼손되어 옛터에 새로 세웠다. 2010년 7월 남씨종친회`축산은 8세기 중기인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청주한씨(淸州韓氏)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나, 영양남씨(英陽南氏) 입향시조 유래로 더 유명하다. 즉, 경덕왕 14년(755년) 당(唐)나라 현종(玄宗) 연간에 김충(忠)이란 안렴사(按廉使)가 일본 사신으로 다녀오던 도중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이곳 축산에 표착(漂着)한 다음 신라에 살기로 청원하자 경덕왕이 남쪽에서 왔다 하여 남씨(南氏)로 사성(賜姓)하고 시호를 영의(英毅)라 내리고 식읍(食邑)을 영양(英陽)으로 정하였다. 이로써 남씨 시조가 되었으며, 뒤에 영양, 의령, 고성으로 분관되었다는 자료를 볼 때 이 비석은 영양남씨의 후손들이 세운 것이리라. 비석 곁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니 옛사람에게 다녀갔을 그 망망한 그리움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죽도산 해발 80m 정상에 하얀 등대가 하나 서 있다. 죽도등대다. 1935년 세워진 이 등대는 지금도 칠흑같은 망망대해에서 축산항으로 들어오는 어선의 안내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처음 세워진 당시에는 포항 장기와 울진 중간에서 북극성처럼 빛났다고 한다. 또한 고려시대 이후 왜적 방어의 방어선으로 적의 침략시 봉화대의 발화산으로 봉화를 올린 곳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죽도산은 군사보호시설로 묶여 있었다. 그러나 몇 해 전 죽도산 개발에 대해 조건부 승인을 받고 기존의 등대를 높이고 등산로와 산책로를 조성go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동해는 세상 근심을 덜어내고 잊게 한다. 푸르기 한이 없는 바다의 웅장하고 유유한 몸짓이 온몸 가득 차오른다. 죽도등대 바로 아래에는 쉼표처럼 `코난`이라는 찻집이 있다.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바다에 다가앉으니 혜령이란 이름의 아가씨가 차를 내어 준다. 바람이 대숲의 경사진 이마를 쓰다듬으며 바다로 달려간다. 산의 머리칼이 신나게 춤을 춘다.죽도산은 이름 그대로 대나무 세상이다. 간혹 키 작은 잡목이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신우대, 오구대 또는 이대라 불리는 시누대(失竹)가 빼곡한 숲을 이룬다.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면 댓잎 사이로 부는 바람의 노래가 온 산을 조용히 흔든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가녀린 댓이파리 젖는 소리에 내 귀도 젖겠다. 저들도 어느 계절인가 일제히 꽃술 올리기도 할 것이다. 한 때는 싸움터에 나가는 병사의 화살이 되고, 마당 빗자루가 되고, 담뱃대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방패연의 연살이 되어 하늘 높이 날기도, 청국장을 띄울 발장이 되기도, 물고기의 눈을 꿰기도 했을 것이다. `시누대 숲에 바람 분다. 왕대처럼 꼿꼿하지 못한 내가 무척 흔들린다`던 어느 시인의 시 구절처럼 누군가는 이 숲에 사연도 풀었으리라. 저기 축산항 어디쯤에서 늙어가는 청상의 사연도 대숲은 구구절절 쓰다듬었으리라.계속권선희시인

2011-12-12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38> 바다의 값 매기는 수산업 중매인 황보관현 씨 / 포항 구룡포

공판장은 긴장속 삶의 전쟁터순간의 판단이 손익에 결정적 한 이틀 계속되던 비바람은 그쳤지만 여전히 새벽 포구는 젖어있다. 피항해 스크럼을 짜고 정박해 있던 배들이 하나 둘 출항을 준비한다. 도처에서 오징어를 받기 위해 트럭들이 들어온다. 중매인들이 삼삼오오 서서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나눠 피운다. 플라스틱 바구니가 켜켜이 쌓이고 작은 포장집 어묵 익는 냄새 구수하다.구룡포항의 아침은 어종 부문별로 나누어진 세 군데 수산물 공판장이 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징어잡이 트롤선이 전용으로 드는 판장과 문어나 대게 등 잡어가 드는 판장은 7시, 오징어 활어와 선어가 드는 판장은 6시에 입찰을 보기 때문이다. 약간의 악조건에도 조업을 떠났던 `백경호`가 물살 가르며 입항한다. 저마다 고유 번호가 적힌 모자를 쓴 중매인들이 `백경호`로 모여든다. 선원들은 일정한 양의 오징어를 뭍에 올려 쏟아놓는다. 중매인들은 먼저 크기나 상태 등을 확인한 다음 다시 경매대로 돌아와 빙 둘러 선다. 그리고 경매사가 종소리로 입찰 시작을 알리면 저마다 책정한 값과 주문할 양을 적는다.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지만 척척 손발이 맞는 움직임이다. 구룡포에서 태어나 공판장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35번 중매인 황보 관현(52)씨, 구룡포수협 중매인조합장을 맡고 있는 그가 거기에 있다.“무조건 네 시에 일어나야 합니다. 술을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지만 가끔 이웃들과 늦게까지 어울릴 때가 있지요. 그러나 두 시에 들어가도 네 시, 세 시에 들어가도 네 시, 이건 무조건입니다. 기상이 안 좋은 날이라고 해서 쉬는 날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잡아 온 것을 그날 다 풀었지만 요즘은 배에서 저장했다가 선주들이 물량을 조절해 풀기도 하거든요.”그는 요즘이 가장 바쁜 계절이다. 추석을 지나 구정까지가 오징어 성어 기간이기 때문에 내년 사업 물량까지 모두 확보해야 한다. 수산물 중매인은 바다의 룰에 맞춰 살아가는 직업이다. 출근하기 전에 시세와 정보를 수집하고 배와도 정보를 교환해야 한다. 공산품과 달리 일정한 물동량이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날마다 긴장이다.“배가 들어오면 생산자가 수협에 위탁을 합니다. 수협에서는 경매사를 파견하고 지정 중매인들을 대상으로 경매를 하지요. 중매인들은 물건의 선도를 보고 어떻게 사서 어떻게 팔아야겠다를 결정하고 또 이 물건이 어느 지역에서 강세인지 빠르게 가늠해야 해요. 어찌 보면 그 시간이 중매인들에게는 삶의 전쟁터인 셈입니다. 경쟁을 해서 낙찰을 받아야 하니까요. 다른 중매인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순간의 판단이 연계된 거래처의 매출에도 영향을 미치니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입찰이 끝나면 곧바로 백화점이나 재래시장에 보내기도 하고 위탁 창고에 보관 했다가 값을 잘 받을 수 있는 시기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손해요? 물론 손해 볼 때도 있지요. 사람이 하는 일인데.”그가 처음 공판장에 발을 디딘 것은 1978년, 스무 살 때였다. 구룡포에선 꿈이 두 가지다. 하나는 선주요. 하나는 상인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양조장과 주산학원 등 상업을 주업으로 삼았던 탓인지 그는 상인이 되고 싶었다. 지금도 배는 한 번 나가면 1억 2억을 벌고 중매인은 하루에 20만원, 30만원을 벌어도 장사를 잘 해서 큰 상인의 길을 가고 싶다고 한다. 상고를 졸업할 당시 옆집에 항만 공사에 기사로 온 김두현씨가 있었는데 모친은 그에게 취직을 부탁했고 그때부터 항만 공사에 보조 역할을 시작했다. 얼마 전 과메기문화거리로 만들어진 공원, 그곳을 매립할 때 였다.“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술배달을 했는걸요. 집이 양조장을 했는데 아버지께서 잡기에도 능하셨지만 장기를 아주 좋아하셨어요. 화장실도 안가고 다섯, 여섯 시간을 내리 두셨지요. 주문이 오면 배달은 가야하는데 장기도 둬야하고 결국 `현아, 니가 좀 갖다 오너라` 이렇게 되었지요. 안갈 수도 없고 해서 가면 어른들한테 귀여움도 받고 기특하다는 말을 들었어요.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해요. 거 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잘한다, 잘한다 하면 으쓱해서 더 하려고 하지요. 술을 말통에 받을 때 세게 촤악 내리면 거품이 많아서 7홉이 될 수도 있고 8홉이 될 수도 있는데 칭찬을 해주는 집 술은 살살 따루게 되요. 배달도 빨리 갖다 주고 싶고 말이지요.”부지런한 천성이 먼저인지 주변의 칭찬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어릴 때부터 일은 무섭지 않았다. 항만공사 보조 역할을 시작으로 당시 중매인 조합장이었던 박삼만씨와의 인연이 닿았다. 교련복 바지를 입고 부지런히 오가는 어린 청년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가 운영하던 삼흥기업은 수산업을 크게 했다. 어선도 제일 많이 갖고 있었고 보망 창고도 있었으며 쌀가게와 낚시점도 운영했다. 임시 직원으로 발탁 되어 공판장 일을 했다. 일이 끝나면 오징어 건조도 하고 꽁치 잡는 그물에 납을 다는 보망 작업도 했다. 뿐만 아니라 뱃일도 봐주고 가게도 봐주고 쌀도 사러 가곤 했다. 꽁치가 많이 잡혀오면 그물을 항 안에 들여와 털었는데 그도 함께 털었다. 당시 월급이 4만 5천원이었는데 박삼만씨는 5만원이나 되는 용돈을 주기도 했다. 아버지와 갑장이었던 그는 늘 “현아, 현아” 부르며 정을 나눠 주었다. 신이 나서 일을 찾아 했던 삼흥기업 시절은 많은 업종과 사람들을 공부할 수 있었던 훌륭한 학교였다.3년 후, 좀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매형의 회사로 옮겨야만 했다. 마치 은혜를 배신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당시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2003년, `동우물산`이라는 이름을 걸고 창업을 했다. 공판장을 들락거린 지 25년 만에 본격적으로 중매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경매가 끝나자 판장은 또 한 번 출렁인다. 레일을 타고 오른 오징어들이 트럭에 실려 나간다. 선원들의 호쾌한 목청이 드높다. 어느새 한껏 솟아 오른 해가 젖은 포구를 말리고 있다. 지난밤 건져 올린 바다의 값을 매기고 돌아 나가는 그의 어깨에 햇살이 내려앉는다.권선희시인

2011-12-05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37> 양떡, 음떡마을 사이로 남아실 갈대밭은 휘돌고 / 울진 온정면

백암온천 길 끝 양떡·음떡마을땅 기름져 작물 풍성 복받은 곳 평해교를 지나 백암온천, 영양 방면으로 난 88번 지방도는 끝이 없을 듯 이어진 목백일홍 가로수 길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이라 하지 않았던가. 분명 열흘 가는 붉은 꽃이 없다 했건만 어인 사연을 품었길래 긴긴 여름 백일 동안이나 붉은 꽃잎 열병처럼 피워 댄 것일까. 약속처럼 껍질을 벗고 겨울 초입의 골 깊은 마을로 이방인을 안내하는 저 군상들. 스산한 바람이 불어도 떨굴 낙엽 한 잎 달지 않았다. 뜨거운 맨몸이다. 백암온천 부근에서 왼쪽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양떡, 음떡마을로 간다. 갈대 무성한 남아실 거랑이 안내하는 길 끝에 두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울진군 온정면 온정리. 양지마을 혹은 양남아로 불리는 곳은 1리요, 음지마을 또는 음남아로 불리는 곳은 2리다. 남아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사는 이 마을은 근래 들어 지역에서 나는 약초와 농산물을 이용해 음·양 체질에 따라 시루떡을 만드는 체험행사를 열면서 양떡, 음떡마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첫 추위에 바짝 긴장한 것은 텃밭이나 사람이나 매 한 가지, 촌부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집집마다 무청이 걸리고 가지런히 쌓은 장작더미가 높아졌다. 배추를 묶고 콩을 터는 마당으로 소금 자루를 배달하는 경운기 소리 크다. 마을의 좁은 골목엔 노란 택배회사 차가 서 있다. 이 집 저 집 공들여 지은 곡식이며 채소들이 대처로 나가 사는 자식들에게로 갈 채비를 한다.“이곳은 남아실의 성황당을 중심으로 수령 600여 년의 느티나무 숲이 우거진 천여 평의 한적한 공간, 천 년을 이어 살아 온 조상님들 정성이 담겨 있고 혼이 머물러 있다. 이에 유서 깊은 이 공간을 주민들이 뜻을 모아 정결하게 다듬어 공원을 조성하여 남아실 성황당 공원이라 이름하노니 선조의 정서가 서린 안식의 공간으로 남아실의 운명과 함께 할 지어다, 1994년 7월26일”양떡마을 한 쪽에 너른 공터가 있다. 느티나무, 회나무, 팽나무 등 한 눈에도 수백 년의 수령이 가늠 되는 고목이 우거지고 그 가운데 성황당이 자리하고 장수를 상징하는 우물터가 있는 이 공원은 양떡, 음떡마을 사람들에게 성지(聖地)이자 오래된 휴식터다.“성황당에는 할배, 할매를 모시고 있지요. 옛날부터 정월대보름 전 날이면 양쪽 동네 어르신들이 죄다 모여 제를 지냅니다. 돼지를 잡던가 소를 잡던가 떡과 갖가지 음식을 해서 제를 올리고 나면 온 마을 사람들이 나눠 먹지요. 또 양력 8월15일에는 광복 기념행사를 아주 크게 열어요. 6.25 사변 이후에 잠시 주춤하기도 했지만 줄곧 해 온 행사입니다. 어르신들은 만세를 부르고 젊은이들은 음식을 장만해 잔치를 하지요. 그 밖에도 온정리엔 동네로 나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동구신도 있고 산신당도 있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미신이라고 하겠지만 그런거 하고는 다르지요. 자연 속에 믿고 의지할 것이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잖아요.”마당에서 장작을 패던 전인걸(67세)씨는 이곳을 복 받은 동네라고 했다. 장뇌삼, 나물, 참나무 숯을 자연으로 부터 사시사철 얻고 땅이 기름져 농사가 잘 되며 큰 비가 와도 고이거나 넘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마을 깊숙이 난 길을 따라 성곡교 오른편으로 접어드니 소담한 산신당이 있다. 금줄이 휘날리고 누군가 따라 놓은 막걸리 한 잔에는 가랑잎이 떨어져 있다.“옛날에는 동네 사람들이 소 한 마리씩 다 멕였어. 어른들은 들일을 하고 주로 총각들이 소를 돌봤지. 그때 나이 많은 총각을 대총각이라 했는데 그가 지휘를 했어. 소가 나락을 뜯어 먹던지 곡식을 먹던지 하면 장날마다 모여 누 집 소가 누 집 나락을 얼마 먹었다 일일이 세알려서 벌금을 매겼지. 참 동네 법이 무서웠어. 안 내고는 못 배겼으니까. 그라고 정월 보름날에는 나물, 떡, 밥 여러 가지 음식을 해서 소한테 갖다 줬지. 어무이가 정성껏 차려서 외양간 소 앞에 내려놓으면 온 식구가 무얼 먼저 묵나 들바다 봤지. 소가 무엇에 입을 먼저 대는가를 보며 다음 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점 쳤던 거야. 밥을 먹으면 풍년이 든다고 했고 나물을 먹으면 흉년이 진다 했던가? 하도 오래전 일이라 가물가물 하네. 사람 상 만큼은 아니었지만 제법 공들여 차렸던 것 같애. 그기 무신 정답이었겠나. 보름 음식 장만하는 겸에 고생한 소도 좀 멕이고 뭐 이래저래 기대는 거였지. 그 뿐인가. 이 골짜기에서 광복도 맞고 사변도 지났지. 아이고, 말도 마. 일제 때 내가 소태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일본 선생들이 조선말을 쓰면 막 혼내고 했어. 사변 때는 북한군도 오래 머물렀지. 나갈 때도 여기와 있다 가고 드갈 때도 여길 들렀다 갔지. 나올 때는 그래도 해코지가 적었는데 후퇴할 때는 부상자 끌고 집집마다 쑤시며 난리를 직이곤 했어.”양떡마을에서 나고 자란 김형순(74)씨는 어린시절 남아실 거랑을 생생하게 추억한다. 물이 맑고 깊이가 적당해서 놀기에 좋았다. 음지마을 양지마을 아이들이 어울려 꺽지, 퉁수, 메기, 피라미, 묵지 등 물고기를 잡느라 해 저무는 줄 몰랐고 돌멩이를 들추면 고들고들한 다슬기가 까뭇하게 붙어살았다. 산등성이로 일찌감치 해가 넘어가면 눈부신 빛살에 거랑이 한껏 빛났다. 어느 해 큰 태풍이 지나고 난 뒤 거랑의 모습이 바뀌었다. 제방을 쌓은 후에는 아무리 큰 비바람이 와도 더 이상 범람은 없었다. 하지만 전에 없던 갈대가 남아실 거랑 전체를 점령했다.잡초 하나도 `지심`이라 부르는 사람들, 조상의 산소를 벌초 할 대도 `풀을 벤다`가 아니라 `풀을 내린다`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 나무 한 그루도 어른처럼 공손히 대하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서둘러 저녁이 온다. 갈대밭이 휘도는 남아실을 사이에 두고 양떡마을과 음떡마을이 서로 초겨울 산자락을 이불로 덮어준다.권선희시인

2011-11-28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36> 산내 갯내 사람내 어울렁 더울렁 흥부 장터 / 울진 북면 부구리

동해안 최고 염전 지금은 명성만수십년 흥부 장터 좌판마다 사연 장날이다. 바닷가 쪽 공터 어물전에는 물 좋은 싱퉁이, 도루묵, 양미리부터 미주구리, 퉁수, 멸치등 건어물, 그리고 곰삭은 젓갈들이 나와 앉았다. 김장에 버무려 넣을 생선을 놓고 흥정하던 새댁에게 결국 아귀 사촌쯤 되는 놈 두 마리가 더 얹어 진 채 팔려 간다. 임연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몇 번이고 크기를 가늠하는 할머니의 굽은 등에도 늦가을 햇살이 올라탄다. 울진군 북면 소재지인 부구리는 흥부(興富)동과 염구(鹽邱)동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된 이름이다. 동해안 최고의 천일염 생산지였던 이곳은 6~70년 전 까지도 크고 작은 염전이 성황을 이뤘고, 간수(바닷물)를 가마솥에 끓여 얻는 `전오염(煎熬鹽)`으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전국에서 때깔 좋고 맛 좋은 흥부 소금을 사기 위해 장사치들이 몰려들었고 그것은 십이령을 타고 영남 내륙 곳곳으로 실려 나갔다던 흥부장터. 이제는 염전의 흔적 조차 찾을 수 없지만, 여전히 경상도 말씨와 강원도 말씨가 적당히 버무려 지고 태백산맥 자락이 키운 산내음과 동해가 품은 갯내음이 웅성거리는 곳, 오랜 세월 낯을 익히며 살아 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울렁 더울렁 피는 오늘은 흥부 장날이다.노충순씨(71세)의 좌판엔 신기한 물건들이 쌓여있다. 풍수가나 지관들이 가장 중요한 기구로 사용하는 패철(佩鐵)과 제사 모실 때 쓰는 검은 베로 만든 유생(儒生)의 예관(禮冠)인 유건儒巾도 있고, 먼지가 쌓인 중절모와 돋보기 그리고 더 이상 찾을 사람이 없을 듯 한 곽성냥도 있다. 노씨의 고객도 그의 물건처럼 오랜 단골들이다. 얼굴이 불그레한 그가 유건을 써 보이며 웃는다.“장터가 면사무소 옆에서 이리로 온 지가 글쎄 한 십오 년 됐나 몰라. 지금은 1일 6일장이지만 옛날에는 3일 8일장이었지. 내가 이 장사한 지가 30년이 넘어. 그 전에는 광업소에서 석탄 캐는 일을 했지. 나는 차가 없는 사람이야. 그래서 전을 요만큼만 풀고 접으니 수월코 편치. 술도 짬짬 묵고 또 퍼뜩 와가 장사 하고 얼마나 좋누. 하루에 맥주를 열 병은 먹는다. 안주는 무신 안주? 고추장에 멸치 꾹 찍어 먹으면 그게 최고 안주지.”장날 마다 떡을 해서 판 세월이 사십 년을 훌쩍 넘겼다는 할머니가 마수를 못했다고 발목을 잡는다. 백설기와 가래떡이 말랑말랑 따뜻하다. 빨간 스카프에 입술도 발갛게 바르고 눈썹도 곱게 그렸다. 종이상자를 깔고 앉은 모습이 소담하니 젊어 죽변 장, 흥부 장, 울진 장으로 돌아다닐 때는 곱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겠다. 다음 손님에게도 마수를 좀 해가라고 소리친다. 마수라는 말에 멈추는 발길들이 인정이다. 사는 마을이 달라도 장터에서 친구가 되었다. 경조사 오가며 힘과 마음을 보태며 살았다.“우리 어릴 때부터 흥부 장이 있었어. 엄마를 따라 장에 오면 풀빵, 찐 고구마, 강냉이 빵이 얼마나 먹고 싶던고. 사달라고 막 구불며 떼를 써도 절대 안 사줬지. 사 주기는커녕 궁디고 등짝이고 두들겨 팼지. 돈이 있어야 사주지. 그 속은 어땠겠노. 아이고, 한평생에 잘난 님은 잘 나게 살고 못난 님은 못 나게 살았지. 영결종천(永訣終天) 다 잊아뿌리고 인자부터 당하는 일은 잘 하고 살아야지. 자식들에게 환영을 받고 살라는가, 자식들한테 설움을 받을랑가 아직 모르는 일이야. 내가 지금 건강하고 장에라도 다니니까 엄마, 엄마 하지만 아파 드러누우면 양로원에 끄잡아다 놓겄지. 밥 주고 물주면 받아먹다가 가는 거라. 효자 자식이 실은 없다. 돈이 있으면 좋아하지만 돈이 없으면 부모도 짐덩이 밖에 안된다.”시장통 보리밥집은 쉼터다. 하루 세 번 버스가 다니는 금성리에서 장을 보러 나온 김분옥(84세)씨와 배추 팔러 온 이춘열(68세)씨가 마주 앉았다. 한 마을에서 평생을 형님 아우 살고 있지만 장터에서 나누는 한 끼 밥은 다르다. 무채, 미역줄기, 볶은 묵은지, 무친 배추나물을 얹어 쓱쓱 비빈 보리밥과 시래깃국을 놓고 서로 얼굴을 반찬 삼아 밥을 먹는다.“예전에는 여자들이 장보러 오는 일이 어디 있었나. 장날이면 아침 일찍 영감은 두루마기 쪽 빼입고 안 나섰나. 그러면 뭐가 필요하니 사오라고 주문을 하지. 그러면 뭐하겠노. 장터서 형님, 아우, 사돈 할 것 없이 만나 술 한 잔 걸치면 마캐 다 잊고 마는걸. 사서 들고 오던 물건까지도 다 잃어버리고 저녁 답에 갈지 자 걸음으로 사립문짝 안 들어서더나.”“7남매 내한테 맡겨 놓고 우리영감은 하늘나라로 돈 벌러 안갔능교. 첩첩 골짜기에서 농사 지어 장에 내다팔아 자식들 다 키웠지요. 인자는 동서남북 다 뿌려 놓고 나니 진진 밤이 길기도 깁디다만 그때는 잠 못 잘 시간이 어데 있능교. 호박덩이 하나라도 열리는 족족 내다 팔고는 커다란 항아리를 사서 토끼질 같은 30리를 걸어오면 잠이 범 보다 무섭게 쏟아지고 말고지요 ”두 양반 이야기에 보리밥을 푸던 식당 주인 안국단씨도 살아 온 세월을 들춘다. 마흔 아홉에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서 여덟 동생을 먹이고 가르쳤다.“우리 집에서도 울진 장, 죽변 장, 흥부 장이 모두 왕복 60리길이었지요. 열네 살 무렵 엄마를 따라 장작을 이고 장마다 팔러 갔었네요. 참나무 숯을 만들어 뱃사람들에게 팔기도 했지요. 무허가 벌목 단속 때문에 밤에 나가 팔고 아침에 돌아오기도 했구요.”`미역 소금 어물지고 춘양 장을 언제가노/ 가노, 가노 언제가노 열두 고개 언제가노/시그라기 우는 고개 이내 고개를 언제가노/ 대마 담배 곡물지고 흥부 장을 언제가노`봇짐을 지고 굽이굽이 고개 넘나들던 봉화 보부상의 노래는 들리지 않는다. 집채만 한 소금가마에 온종일 불을 지피던 여망이(소금 굽는 장인을 일컫는 울진 동해안 지방의 방언)도 먼 세상으로 돌아간 지 오래다. 실하게 키운 가을 채소와 몇 날 며칠 뒤적거리며 말린 피데기들 곁에 주름만이 앉아 놀다 저녁 보다 먼저 전을 접는다. 어슬렁 파도 소리 빈 장터로 스미는 저녁이지만 그래도 흥부 장터다.

2011-11-21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35> 그는 동해(東海)를 닮았다 / 울진의 화가 홍경표씨

“고향 바다를 그리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죠” 동해대로를 달린다. 길이 낳은 길들이 바다로 흘러간다. 허파꽈리처럼 절망절망 매달려 삶을 깁는 내항의 배들과 붉고 푸른 양철 지붕을 얹고 옹기종기 어깨를 건 집들. 후포를 지나고 평해를 지나 울진에 닿는 내내 펼쳐진 경전 같은 풍경에 파도는 손뼉을 친다. 투박하지만 순박한생명력 강한 동해 바다테크닉과 세련됨이 아닌진실성과 익숙함으로풍경과 정서를 담아낸다“왕피천이 흘러 내려간 근남면이 선조 때부터 살던 고향이었지요. 외지에서 군생활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죽변에 터전을 잡으셨습니다. 젊어서는 저도 도회지에 나가 공부하고 작업도 했지만 고향만큼 제 기질과 잘 맞는 곳은 없었습니다. 결국 1992년, 서른두 살에 서울을 버리고 화구만을 챙겨 무작정 내려 왔지요”울진군 북면 `주인예술촌` 2층에 있는 화가 홍경표(52)씨의 작업실은 선으로 색으로 출렁이는 또 하나의 바다였다. 생명력 강한 바다의 기질과 투박하고 질펀한 이면에 순박함을 지닌 이들의 삶이 맛좋게 버무려진 작품들. 붉은 바위와 노니는 흰 파도, 눈이 소복이 내린 마을의 설레는 지붕들, 억새 피는 가을 둔덕에서 빛나는 등대, 모두가 바다를 향하고 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운 외모를 풍기는 그의 눈빛과 의식 또한 바다를 닮은 듯 했다.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사십 대 초반에 청상이 된 어머니에 대한 맏아들의 연민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도시의 삶이 싫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가르쳐 준 성향대로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또 자본이 가지는 논리 이외에도 분명 가치 있는 것이 있다는 확신도 들었다. 올려면 오고 말라면 말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고향에 내려온 지 6개월 만에 아내는 모든 걸 정리하고 세 딸과 함께 울진으로 내려와 주었다. 고마웠다.“주로 그리는 게 제 고향 주변의 항구, 어촌 마을의 특성들입니다. 가파른 지형 끝에 마을이 형성되고 집들이 마치 달동네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제 눈에는 상당히 괜찮은 소재로 다가왔지요. 형이상학이 뭐 별겁니까? 질박한 삶 속에서 찾을 진실이 있다면 그게 형이상학이지요. 극단적인 상황 속에 휘몰아쳐서 거기서 뭔가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요? 무엇보다 화가라는 사람, 작가라는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터전과 시대의 삶에 누구보다 충실해야 한다고 믿어요. 제가 살고 있는 이 마을은 전 세계를 통틀어도 여기 밖에는 없잖아요. 그러니 지금 제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작업은 동해를 캔버스 가득 담아 방류하는 것, 그것뿐이지요.”친구들은 고향에 온 후 그의 그림이 상당히 밝아졌다고들 한다. 도시에 살면서 자연주의를 바탕으로 사실주의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유년의 익숙한 풍경을 끊임없이 울궈먹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와 자연과 마주보고 살면서 그리는 그림은 색에 대한 감각이 건강할 수밖에 없는 것. 자연과 맞대응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한 구성원으로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과의 동행 역시 그림을 넘어 지혜와 깨달음을 가르쳤다.`지방성`이라하는 것, 그것이 보편성을 띄는 데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형상을 묘사 할 때 테크닉의 세련됨이 좀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진실성을 바탕으로 가면 충분히 보완을 하고도 남는다. 그것이 지방성의 장점이다. 그는 누구보다 고향 바다의 풍경과 사람들의 정서를 잘 담아낼 수 있다.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 오래 바라보고 오래 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공간이 작가의 작품을 통해 유일성을 확보하고 대중성 또한 확보 하는 것, 그것은 개인의 자존과 함께 마을의 자존도 증명하는 것이다.“화가로 살게 된 기미를 굳이 찾으라면 어머니의 성향을 꼽고 싶습니다. 외형적인 것을 좀 따지는 분이셨거든요. 없이 살아도 옷맵시는 고와야 하고 낡은 것이라도 늘 깨끗이 빨아 입어야하며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누려야 한다는 분이셨습니다. 봄이 오면 문에 창호지를 바르셨는데 장식하기를 좋아하셨어요. 창호지 사이에서 드러나는 대나무 잎의 실루엣은 정말 예뻤습니다. 그러고 보니 외가 쪽으로는 예술 작업을 하는 이들이 제법 있네요”그는 문학을 공부하고 후에 그림을 만났다. 미술을 전공 하지 않은 것이 젊은 시절에는 다소 약점처럼 느껴지기도 하였으나 이젠 오히려 장점이 되었다. 테두리 안에서 배운다는 것, 가지고 있는 본바탕에서 적응을 깨뜨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역으로 채워나가고 있다. 사실에 근접한 그림을 화가적 안목으로 재구현하고 토해내는 과정, 그 만의 감각으로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빼며 심상을 거쳐 재조명된 사실적 자연을 꿈꾸는 재미가 크기 때문이다. 다듬은 것이 아니라 원시적인 `날것`이 가미된 그림, 사실이지만 사실이 아닌 그림, 그렇다고 `사실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림.“아주 예쁜 여자를 만났는데 마침 동향이었어요. 정성을 다해 꼬셨습니다. 순진하게 넘어 온 대가를 아내는 지금도 치르고 있습니다. 마등족이라고 아세요? 우리끼리 하는 속된 말로 마누라 등쳐먹는 사람이란 뜻이지요. 전업작가나 시민운동가 중에 주로 마등족이 많은데 아내들은 그들의 응원자와 보호자 역할을 훌륭히 해내곤 합니다. 저도 꽃집 주인인 아내가 늘 고맙지요. 덕분에 맘 놓고 그림을 그립니다”고향 바다를 그리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을 지키는 건 곁에 사는 이들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그는 `핵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대표를 맡아 매주 목요일 이면 군청 앞에서 촛불시위를 한다. 비가 다녀간 뒤 바다는 물빛 퍼렇게 세우고 은행나무는 샛노란 물감을 한껏 풀었다. 오늘은 아름다움을 바라볼 권리를 위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야 할 목요일이다.

2011-11-14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34> 3代를 이어 온 곰삭은 젓갈 내음 / 경주 감포읍 이광호씨

젓갈에 관한 현존하는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중국 최고의 자서(字書)의 하나인 `이아(爾雅)`로 기원전 3세기에서 5세기 경에 기록되었다. 이 문헌에서는 생선으로 만든 젓갈을 `지`, 육류로 만든 젓갈을 `해`라고 부른다. 한국의 젓갈은 신석기 시대에 기원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문헌상으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신문왕 3년(683년)의 기록에 왕후를 맞이하는 폐백 음식으로 등장했고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에는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해졌다. 경북 해안 지방에서는 오징어젓, 갈치젓, 꽁치젓, 멸치젓과 전복의 내장을 이용한 전복내장젓 등을 주로 담그는데 경주시 감포읍 일대에서 생산되는 멸치젓은 최고의 맛을 자랑한다. 오래전 감포 바닷가 마을은 멸치를 잡는 후리배가 많아 `후리자네`라고 불렸다. “어야차야 어야차 어야차야 어야차 어차 어차 어야차.” “쟁야 쟁야 쟁이야 쟁야.” 배를 항에 대어놓고 선원들은 얼굴부터 발끝까지 비늘을 뒤집어쓰며 그물을 털었다. 그러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양동이를 들고 나가 그물 밖으로 튕겨나오는 멸치를 주워 담았다. 떨어지는 멸치를 줍는 것은 누구도 막지 않았다. 지금은 매립을 하여 도로가 나고 수협 건물이 들어섰고 또 환경오염으로 인해 배 위에서 그물을 털기 때문에 그런 모습은 볼 수가 없다.올해로 3년 째 감포 5리 이장을 맡고 있는 이광호(45)씨, 그는 김장철이 다가오면서 액젓을 출하하느라 바쁘다. 바깥마당을 다 차지한 간독에서 1년을 푹 삭은 멸치젓을 걸러 커다란 통에 담고 다시 용기에 담아 개별 포장을 하고 트럭에 싣는 일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간독은 가로 세로 약 2미터 50정도 정사각형 작은 독과 2m70정도의 큰 독을 합해 모두 열두 칸이 있는데 이는 일제시대 때 방어를 염장하던 독이라 하니 70년은 족히 넘었으리라. 할아버지 대에 시작한 멸치젓갈 사업이 손자인 광호씨에 이르렀으니 간독 하나에 3대째 생을 걸고 살아 온 셈이다.“경주 모량이 고향인 할아버지께서 농협에 근무 하셨는데 발령을 받고 감포로 오셨지요. 그 해 제가 태어났으니 꼭 45년 전 일입니다. 처음엔 삯월세를 얻어 살았는데 69년도에 지금 사는 이집을 장만 하셨대요. 작고 허름한 양철집이었지만 간독 하나를 보신 거지요. 3년 후인 72년에 시작한 젓갈 사업은 농협 유통망을 통해 전국 방방곡곡으로 거래처를 넓혀 갔고 번듯한 집도 짓게 했습니다.”멸치를 판장에서 받으면 인부 6명이 한 조를 이뤄 일을 했다. 멸치를 내리는 사람, 상자를 부어주는 사람, 소금을 뿌리는 사람, 그리고 세 사람이 간독에 들어가 멸치와 소금이 잘 섞이도록 버무렸다. 일꾼들이 성의있게 안해주면 낭패였다. 소금이 고르게 섞이지 않으면 그 부분은 썩기 때문이다. 버무리고 나면 나무를 열십자로 덮고 부풀어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다시 큰 돌을 올려놓았다. 두 사람이 겨우 들어야 하는 무게의 돌은 마리젓의 형체를 온전하게 유지하게 하고 녹는 속도를 더디게 했다. 그리고는 이듬해 봄부터 출하할 때까지 틈틈이 염도를 측정하며 간독을 드나들며 1년 남짓 공을 들였다.물건을 포장할 때도 일일이 손으로 작업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꼼꼼하게 묶어 보내도 발효 음식인 탓에 깡통 안에서 숙성이 일어나 가스가 차고 액이 흘렀다. 당연히 반품이 많았다. 제품의 문제 보다는 포장 기술의 미비와 취급의 문제가 대부분이었지만 많게는 10개 중 5개가 돌아왔다. 어쩔 수 없이 팔리는 것만 수금해야 했다. 그 후, 포장 기계가 들어오고 과정이 야물어지면서 반품 양이 줄고 수입은 조금씩 나아졌다.“어릴 땐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에서 나는 비린내가 정말 싫었어요. 그러나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는 겨울방학마다 저도 일손을 보탰습니다. 주로 포장을 하고 차에 싣는 일이었는데 친구들까지 불러 일을 했는걸요. 할아버지께서 일꾼들 돈을 줄 때 저희에게도 용돈을 주셨어요. 그걸로 맛있는 것도 사 먹고 그랬습니다.”할아버지는 참 부지런한 분이셨다. 직장이 있었지만 퇴근 후에는 식당마다 다니며 음식 찌꺼기를 받아다가 돼지도 키우고 닭도 키우셨다. 일꾼을 부리는 것에도 철저했다. 겨울철이면 일꾼들이 3개월 정도 묵으면서 일을 했다. 귀찮을 정도로 쫒아 다니면서 소비자에게 가는 것이니 제대로 해야한다고 볶아대기도 했지만 일이 끝나면 가족처럼 대했다. 평소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하나 밖에 없는 손주인 나에게는 장난도 많이 쳤다. 창호지에 대나무를 붙이며 연을 만들어 주셨고 외출했다 돌아오실 때면 호떡같은 간식을 사오셨다.번창하던 사업은 농협 유통망이 막히면서 암담해졌다. 농협은 자체 생산을 계획했고 하루 아침에 거래처가 끊긴 여파에 위기가 찾아왔다. 할아버지로부터 일을 넘겨 받았던 아버지는 자신 대에서 닥친 위기에 크게 낙심했고 젓갈사업에서 마음이 멀어지는 듯 했다. 점차 양어장 사업으로 눈을 돌리셨고 급기야 서울서 대학을 졸업하고 스포츠센타에 근무하던 광호씨를 고향으로 불러내렸다. 둘은 양어장과 멸치젓갈 사업을 번갈아 가며 했다. 쉬이 일어서지는 못했지만 아버지에게 아들은 큰 힘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제일식품 알배기 멸치젓`의 맛을 기억하는 개인과 대형시장 상인들이 다시 주문을 해왔고 멸치사업은 서서히 나아지기 시작했다. 광호씨는 예쁜 각시와 결혼을 하고 은준, 승준 두 아들도 얻었다.“몇 년 전 소금이 그야말로 금값일 때가 있었지요. 돈이 있어도 구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 때 어쩔 수없이 중국산 소금을 쓴 적이 있었지요. 그해엔 완전 실패였습니다. 멸치젓갈의 맛은 좋은 멸치와 좋은 소금만이 답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저는 오래된 재래식 간독이 우리 `제일식품 알배기 멸치젓`의 맛을 보탠다고도 생각해요.”광호씨네 집에서는 음식에 간장 자체를 쓰지 않는다. 액젓을 다려서 보에 거른 뒤 병에 담아 나물도 무쳐먹고 미역국도 끓인다. 그는 젓갈의 고유한 맛을 바탕으로 재탄생 되는 새로운 상품에 대한 시도를 꿈꾼다. 좀 더 너른 부지를 마련해 공장을 짓고 싶다. 오래된 간독이 너무나 소중한 보물이지만 재래식 방식에 현대적인 시설을 접목해야만 발전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권선희시인

2011-11-07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33> 거마산 거마장마을, 그리고 ② / 경주 감포읍 전촌리

가난의 세월 너무 끔찍한숨인 듯 노래인 듯 옛날 옛적 이야기 전촌교로 쉼 없이 차량이 지나간다. 다리 아래 천막을 치고 둘러앉은 노인들이 세월아 네월아 윷놀이를 즐기고 있다. 이곳은 한 여름에는 시원하니 더할 나위 없는 피서지요, 누구나 오다가다 아무 때고 들러도 동무가 기다리는 놀이터다. 대부분 조상대대로 전촌리에서 살아 온 터라 슬그머니 다가앉아 툭 건드리기만 해도 옛날 옛적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온다. 지독한 가난이, 파란만장했던 젊음이, 굴곡 많은 시대가 영상처럼 흐른다.“옛날에는 신랑 각시 둘이 만나 얼라들 예닐곱은 우습게 낳았지. 열을 낳으면 한 섬을 낳았다고 했어. 아이고, 그 많은 식구에 먹을 거는 없고 거지는 또 얼마나 많았던고. 나무다리 밑에서도 살았고 추운 날엔 짚낱가리에서 자다가 얼어 죽는 일도 숱했다. 옷에 솜을 넣어 입는 사람들은 몇 안 되는 부자였지. 대부분은 광목을 끊어다가 옷을 만들어 입었는데 봄, 여름은 물론이요 겨울에도 그걸 입었으니 얼마나 추웠겠노. 또 삼이라 부르는 대마초를 심어 베옷을 지어 입기도 했어. 얼마나 까끄러웠다고. 그리고 우리 조모는 그 삼으로 술도 담갔는데 동네사람들이 맛 좋다고 난리도 아니었지”열악한 환경은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쉬이 앗아갔다. 못 먹어 허약했고 병이 들면 고칠 재간이 없었다. 한 집에 아이 한 둘 잃는 것은 예사였다. 그땐 마치 하얀 리본을 달아 놓은 것처럼 꼬리 끝이 흰 여우들이 많았다. 애장이라고 해서 산등성이에 대충 구덩이를 파고 죽은 아이를 묻으면 여우가 내려와 파먹기도 했다. 여우로부터 아이의 시신을 보호하기 위해 독에 넣어 돌로 덮고 가시나무를 얹기도 했지만 들에서 일을 하다보면 여우가 파 온 아이의 시체를 우둑 세워 놓기도 했다.전염병이 돌면 줄줄이 죽어 가마니에 덮여 나갔다. 마을 사람들은 타 동네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기 위해 새끼줄을 치고 보초를 섰다. 집집마다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 놓고 박으로 만든 바가지를 문대는 소리가 밤새도록 끊이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을 위한 행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약한 인간이 명마로부터 목숨을 지키기 위한 마음은 그토록 간절했다. 전염병이 어린 새끼의 목숨을 앗아가면 파묻지도 못하고 병이 다 지나갈 때까지 나무에 매달아 놓았다. 땅에 묻으면 마을 아이들이 모두 죽는다는 생각에서였다. 병이 다 지나가면 그때서야 아이를 땅에 묻었다. 언제 무엇으로부터 잃을지 모르는 두려움에 대부분 아이들 출생 신고를 세 살이 지난 후에 하곤 했다. 그 와중에도 목숨을 연명한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자랐다.“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따 먹고 잡아먹고 천지도 모르고 그렇게 컸어. 겨울이면 장치기를 했지. 논에 물이 꽁꽁 얼면 얼음 위에서 기다란 작대기를 하나씩 들고 뺑 돌며 장을 쳤는데 외국 놈들이 하는 아이스하키를 실제로는 우리가 먼저 한 셈이야. 암만 우리는 역사가 100년도 넘을 걸? 제기도 찼지. 엽전을 넣고 한지를 가지고 야무지게 만들었지. 찔찔 흐르는 콧물 닦아가며 세월 따라 나이를 먹었어”그토록 가난했던 시절을 지나 인구가 불고 변화가 온 계기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어부들의 후리배 사업 여파였다. 정어리와 멸치 떼가 유난히 많이 몰려오던 감포 항구에서 일본인들은 고기를 잡고 공장을 세웠다. 양쪽에 15명 씩 30명 남짓이 힘을 합해 끌어올리던 후리배는 돛대가 세 개나 달린 40자가 넘는 규모로 많을 때는 열 척이 넘게 조업을 했다. 포구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끓었고 그 중 절반은 외지 사람들이었다. 후리배 사업이 천석꾼보다 낫다는 말이 돌 정도로 수입이 좋았다. 사업은 일본인이 했지만 일꾼은 조선인을 썼다. 뱃일을 하려고 외지사람들이 몰려왔고 그들이 자리를 잡은 마을을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새마을이라 불렀다.후리배 일로 살림이 늘지는 않았지만 환경의 변화는 분명 있었다. 말이 다니던 길에 번듯한 도로가 생기고 일본인 가옥들이 생겼다. 상가가 늘고 새로운 물품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론 일본인 업자들이 감포 바다의 자원을 수송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은 부랴부랴 맨몸으로 감포를 떠났다. 그들의 재산은 그것을 관리하던 조선인들에게 넘어왔다.6.25 전쟁이 끝나고 얼마가 지났을까. 사룡굴 근처 바다에 간첩이 든 적이 있었다. 마을 사람이었던 그는 혼자 와서 몰래 아이 하나를 데리고 바위에 숨어 있다가 북에서 온 배를 타고 갔다고 했다. 지금도 해안 곳곳에는 군인들의 초소가 남아있고 그들이 낸 좁은 길로 가랑잎이 폭신하게 쌓이고 있다.“암, 달라져도 이만 저만 달라진 게 아니지. 공원에 선 말 동상 봤지? 거기 공원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제법 와. 경주시에서 지정한 회단지거든. 낚시꾼들도 오고 낚싯배도 많지. 우리 아들도 횟집을 하는데 여기 회가 맛이 참 좋아”“주름진 달걀에 모가 있나 방구에 뼈가 있나 구름에 주소가 있나 바람에 번지가 있나 여자 코고무신에 왼쪽이 있나 오른쪽이 있나”최두원(80)씨는 문득 흥에 겨운 리듬을 타며 노래 아닌 노래를 읊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한 종이 한 장을 꺼내 마치 소년처럼 웃었다. 빼곡하게 적힌 세월의 노래가 들려왔다. 긴 방파제 끝에 선 등대 너머에서 저녁이 오는 듯 했다.`해마다 피는 들국화는붉은 꽃 노란 꽃을 피우며아름다운 자태를 피우건만해마다 닥쳐오는 인생길은늙기만 하는구나.좋아했던 사람도미워했던 사람도모두가 떠나고 저한테도 왔노라싸우지도 말고미워하지도 말고모두가 간 세월 속에 재미스럽게 살다가소`계속

2011-10-31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32> 거마산 거마장마을 단룡굴과 사룡굴, 그리고 / 경주 감포읍 전촌리

용이 살았다는 단룡굴 사룡굴…큰 말 형상 닮아 거마장 마을진주 강씨 김해 김씨 터잡은 마을 곳곳 해묵은 사연들 경주시 감포읍은 지형이 감(甘)자 모양으로 생겼고또 감은사(感恩寺)가 있는포구라 하여 감은포라 부르다가음이 축약되어 감포(甘浦)라고칭하게 되었다고 한다.포구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조그마한 읍내에 닿자그 이름만큼이나 달디 단바람이 불었다.갯바위가 많아 해산물이 풍부한전촌리 일대는재미있는 이름의 마을이 많다.성(城)의 머리 부분에 해당한다는 성두(城頭)마을, 고세마을, 운촌(雲村)이라 부르기도 하는 구름마을, 소바짐, 말의 형상과 관련 있는 거마장(居馬場)마을, 외지인들이 들어와 새로 생겼다는 새마을, 해안의 나루가 나정리에 이르도록 길다하여 붙은 이름 장진(長津)마을 등이 그러하다. 마을이 품은 갖가지 사연들은 아쉽게도 자료에 상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나고 자란, 그리고 고요히 늙어가는 사람들의 마음 속 갈피갈피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더더욱 다행인 건 소소해서 더욱 빛나는 말씀들을 다름 아닌 앞바다가 귀 기울여 듣고 있다는 것이다.“높은 산에서 바라보면 큰 말이 있는 형상이라 해서 거마산 주변을 거마장, 혹은 거마끝이라 불렀지. 신라시대엔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병마가 주둔했다고도 해. 몇 년 전 마을 입구에 말 모양의 동상이 떠억 하니 선 걸 보면 그 말도 맞는가봐. 저기 거마장 부근에는 단룡굴과 사룡굴이 있는데 용 한 마리가 살았다 하여 단룡굴, 용 네 마리가 살았다고 사룡굴이란 이름이 붙었어. 촛대바위 근처 시누대숲 뒤에 있는 오목한 단룡굴에는 말이지….”장진마을에서 나고 자란 최두원씨는 여든 나이에도 정정했다. 팔도강산 모르는 것이 없다 하여 별명이 `최팔도`라 불린다는 그는 보고 듣고 겪었던 이야기들을 줄줄 풀어냈다. 그를 따라 거마산 자락을 오르는 내내 전촌항의 풍경이 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이곳은 진주 강 씨와 김해 김 씨들이 터를 잡은 곳이야. 누가 먼저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 아직도 두 문중이 각자의 명맥을 이어가지. 아주 옛날, 그러니까 임진왜란 때 말이야. 진주 강 씨 문중에 맘씨 곱고 효성이 지극한 처자가 살았어. 처자는 왜적으로부터 자기 아버지를 살리려고 거마산 단룡굴에 아버지를 모셨다네. 그리고는 끼니때마다 물을 길러다 밥을 지어 공양을 했지. 생각해 봐.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어? 그러던 어느 날, 처자가 물동이를 이고 거마산 기슭을 내려가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져 죽고 말았어. 단룡굴은 거마산 바닷쪽 벼랑에 있어서 매우 가파른 바위 사잇길을 지나야 하거든. 그 마음이 불쌍하고 또 갸륵하여 문중에서 처자의 효성을 기리는 무덤을 만들고 비를 세웠지. 그러나 소복하던 봉분은 세월에 무너져 이제는 야트막하니 흔적만 남아있어. 훗날 그 아버지의 묘 또한 처자의 묘 곁에 썼는데 위치가 참 좋아. 부녀가 나란히 거마산 둔덕에 누워 전촌항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편안해 보여. 옛날에는 비석이 자그마했는데 풀 뜯던 소가 뿔로 떠받는 바람에 갓이 떨어졌고 그래서 새로 세웠지. 아, 우리 어릴 적에는 말이지. 그 단룡굴에 들어가 가수가 되겠다고 백년설, 남인수, 고복수의 노래를 고래고래 불러대기도 했어. 거기서 노래를 부르면 마치 강당에 든 것처럼 우우 소리가 울리고 꽤나 잘 부르는 것 같이 들렸거든. 가수가 된 놈은 한 놈도 없지만 말이야.”최두원 씨의 안내로 찾은 단룡굴은 약 1미터 30센티 가량의 높이로 길이가 약 5미터 가량 되는 어둑한 굴이었다. 굴의 앞쪽엔 시누대숲이 있어 숨기에는 좋았으나 경사가 가파르고 위험했다. 이곳에 아버지를 모셔 놓고 물동이를 이고 오르내렸을 딸의 마음과 바로 이곳에서 금쪽같은 딸의 죽음을 맞아야 했던 아버지의 마음이 아직도 바람으로 파도로 거마산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만 같았다.단룡굴에 얽힌 이야기 뿐 아니라 거마산 구석구석에는 김해 김 씨와 진주 강 씨 두 문중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바랜 글씨가 적힌 비석과 입 다문 무덤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고 후손들이 정성으로 다듬은 잔디가 그랬다. 눈을 감고도 거마산을 훤하게 읽을 정도로 최두원씨의 발e±¸음은 산에 익숙했다. 그를 따라 거미줄을 걷어내고 쓰러진 고목을 쓰다듬으며 해안에 이르자 네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사룡굴이 나타났다.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흠뻑 흘렀다. 젖은 바위를 손으로 발로 짚어가며 다가갔다. 제법 크고 높은 바위 사이로 난 서너 개의 입구로 연신 파도가 들었다. 그 소리가 몹시도 우렁찼다. 물이 들지 않을 때는 반석이 드러나 여러 사람이 들어가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생기고도 남을 곳이었다. 임진왜란 때도 6.25 사변 때도 마을 사람들은 사룡굴로 피신을 했다. 해안길은 끊어져 보이지 않고 오로지 산길을 통하지 않으면 닿을 수 없었으므로 원주민이 아니면 알 수도 갈 수도 없는 곳이었다.다시 기슭을 올라 오래 된 포구나무 그늘에 앉아 사룡굴을 바라보았다. 굴곡 많은 시대를 만날 때마다 그곳에서 견딘 시간과 사람들은 멀리 흘러갔다. 하지만 남은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숨을 놓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거마산에 있는 작은 재만당과 큰 재만당에서 단룡굴과 사룡굴을 대상으로 정월 초하루와 유월 초하루, 1년에 두 번 정성스런 제를 지냈다. 무형의 전설에도 마음과 몸을 의지하고 그것의 안녕과 나의 안녕을 함께 빌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풍습마저 사라졌다. 오래전 기억들을 풀며 앞장 서 걸어가는 노인의 어깨 위에 바람은 갈참나무 낙엽을 올려놓았다.(계속) 권선희시인

2011-10-24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31> 낚시는 물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 / 포항 오천읍 조성식씨

가리비처럼 휘어진 해안선과 바다가 연인처럼 속삭인다. 기슭마다 보랏빛 해국은 피어나는데 잘박이는 배 곁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부부의 가을은 포구에 묶여 있다.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강사 2리 바다에 보트를 내려놓은 청년이 가짜 미끼 루어를 준비해 시동을 건다. 유유히 내항을 빠져 나가 파도를 타는 조성식(29세)씨는 그야말로 `꾼`이다. 본격적으로 낚시에 빠진 세월은 4년 남짓하지만 그의 솜씨나 대상어를 대하는 마음 씀씀이는 예사롭지 않다. “한참을 풀고 당기며 실랑이를 하다가 1미터 남짓한 농어를 올렸다고 생각해 보세요. 손맛도 맛이지만 반가움에 입을 맞추고 사진을 찍는 기분도 좋구요. 놀라움과 부러움을 동반한 주변 반응 또한 은근히 마음을 들뜨게 합니다. 무엇보다 그 묵직한 녀석의 둥근 두 눈과 제 눈이 마주쳤을 때 그 기분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습니까.”조성식씨는 포항에서 태어나 한 번도 포항 땅을 떠나지 않은 토박이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낚시를 다닌 적이 몇 번 있지만 낚시와의 실질적 인연은 `이영수` 라는 친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친구는 어릴 적부터 오어사에 가서 붕어를 잡을 만큼 낚시를 좋아했다. 그를 따라다니며 지겹도록 고기를 잡았다. 어떤 날은 싸우고도 배를 타고 낚시를 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 한 마디 안하고 뜰채로 떠주면서도 기쁨을 표시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있어 낚시는 지금까지도 생의 교집합인 셈이다. 해병대 부사관으로 5년 남짓 근무하는 동안 바다와 보트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던 것 또한 낚시를 좀 더 즐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루어는 말이지요. 고기를 꼬시는 게 아니라 사람을 꼬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낚시방에 가면 그 화려함에 반하고 `아, 이게 잘 물겠다. 싶어 그것을 사게 되거든요. 한번은 3만 원짜리 루어를 하나 사서 이게 색깔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겠다고 선언하고 껍질을 다 벗긴 뒤 검은색 페인트를 칠해 낚시를 한 적이 있었답니다. 그 날 다행히 운이 좋아 물고기는 많이 잡았지만 엉뚱하고 무모한 도전을 궁리하던 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납니다”그는 친구와 바다로 나가 맨땅에 헤딩하는 마음으로 루어 낚시를 시작했다. 3여 년 전만 해도 바다낚시의 대부분은 방파제에서 새우나 기타 미끼를 사용하여 낚싯대를 드리우는 것이었다. 외국에서 들어 온 루어는 처음 민물낚시에 주로 사용 되었으나 점차 바다낚시에 접목 되었고 현재 그 인구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루어는 오색찬란한 빛깔이 환상적인 물고기 모양의 가짜 미끼다. 독특한 모양의 주둥이는 물살의 저항을 받으면 움직임이 많아지는 특성을 가진 탓에 루어로 잡는 어종들은 공격성이 많고 성향이 동적인 경우가 많다. 한 마디로 배가 고파서 미끼를 먹는다기 보다는 까불까불하니까 거슬리니까 달려드는 것이다.“호미곶, 구룡포, 양포 인근 바다는 굉장한 어군이 형성되는 보물창고였습니다. 루어를 이용해 정말이지 닥치는 대로 잡았습니다. 농어나 삼치는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으므로 돌아갈 때는 아이스박스가 넘쳤고 그것을 서로 가져가라고 싸우기도 했습니다. 집에 들고 가면 어머니가 싫어하시고 남 주자니 고생해서 잡은 게 아깝고 말이지요. 부끄럽지만 그 땐 무조건 많이 잡는 게 최고인 줄 알았습니다”낚시를 어떤 사람들은 스트레스 풀러 간다고 하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심리적인 요인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고기를 잡았을 때보다 못 잡았을 때 실력은 늘었다. 잠도 안 오고 온통 놓치거나 못잡은 물고기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안타까움과 호기심과 도전성이 맞물려 자꾸 바다로 나갔다. 그리고 낚시에 대해 좀 더 정보를 얻고자 `바다루어클럽`이라는 동호회에 가입했다. 회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새로운 즐거움을 주었다. 낚은 물고기를 둘러 앉아 함께 먹고 정보를 교환하면서 무대는 한껏 넓어졌다. 블로그를 운영하며 잡은 물고기 사진을 올리고 경험을 썼다. 블로거들의 반응은 엄청났다. 수 백 개의 덧글이 쏟아지고 루어 낚시에 관한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 자리가 어딘지 직접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함께 출조하자는 이들도 생겨났다. 여유 있는 사람들은 고가의 보트를 구입하고 장비를 챙겨 쉽게 바다로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아쉽게도 낚시에 대한 기본예절은 챙기지 못했다.“보트를 내리는 과정에서의 무질서와 쓰레기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대상어의 처리 과정이 그랬습니다. 무조건 바다에 나가 반드시 큰 것을 잡아야 하고 많이 잡아야만 낚시를 잘한다고 여기는 그것이 문제였지요. 포구엔 함부로 세워 놓은 차량과 마구 던진 쓰레기들이 즐비했고 어떤 사람들은 하룻밤 사이에 커다란 농어를 열댓 마리씩 잡아 목을 따 바다를 붉게 물들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바닷가 마을 사람들에게도 바다에게도 그리고 물고기에게도 함부로 하는 꼴이 된 거지요”그런 모습은 그와 친구들을 반성하게 했고 변하게 했다. 바닷속에 사는 멋진 녀석과의 조우만으로도 충분한 즐거움이고 기쁨이다. 진정 낚시를 사랑하는 것은 `잡는다`의 개념을 넘어 `만난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었다. 포획이나 힘의 과시가 앞설 경우 모든 상황은 험악해진다. 사냥꾼이 많아지면서 물고기들이 똑똑해지는 탓도 있겠지만 예전보다 물고기가 줄어든 이유가 자격없는 낚시꾼들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물고기를 대하는 마음이 달라졌다. 바다를 펼쳐 물고기를 읽고 난 뒤엔 필요한 만큼만, 나와 주변이 감사히 먹을 수 있을 만큼만 데리고 왔다. 근사한 녀석을 만나면 입을 맞추고 기념사진을 찍고 돌려보냈다. 아이스박스가 넘치도록 채우는 기쁨을 넘어서는 기분을 덤으로 낚은 것이다.곧 파도가 칠 것이다. 파도가 크면 물고기들은 신나게 노닐 것이다. 그런 날은 배가 묶이고 낚시꾼들도 오지 않을 것을 읽는 탓이다. 태풍이 다녀가면 무너진 집을 짓고 새끼를 낳고 사냥을 하며 그들만의 질서를 다질 것이다. 농어가 놀고 삼치가 뛰고 무늬오징어가 지느러미 말갛게 흔들며 유영하는 저 바다, 바다가 곁에 있다는 건 축복이다. 대상어와의 근사한 만남을 꿈꾸며 그는 늘 바다로 갈 채비를 한다.

2011-10-17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30> 매화씨 명자씨 그리고 정자씨 / 포항 장기면 두원리

거랑 건너면 경주, 두원리 아낙 40여년 묵은 빛바랜 기억 “낯설었데이. 밥을 묵을 때도 부끄러웠고 아가씨 때는 가마솥에 밥을 해도 잘 되더니만 시집 와가 밥을 하이 죽밥이 되기 일쑤인기라. 아이고, 생솔갑을 쳐다가 불을 때가 보리쌀 씻어 안치면 연기는 또 을매나 맵던고. 눈물 콧물 질질 짜며 삼 시 세 끼 밥을 했지”동해안로 2714번 길은 거랑 하나 사이로 경주시 감포읍 연동과 포항시 남구 장기면 두원리가 나눠진다. 수년 전 복개로 얼핏 보면 한 마을처럼 보이지만 마주보는 집의 전화번호 국번도 마을이 치르는 행사도 다르다. 연동에서 두원리로 시집을 오면 엎어지면 코 닿을 듯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경주서 포항으로 시집을 온 셈이다. 그렇다고 인심까지 선을 긋고 사는 것은 아니다. 바다도 들판도 함께 경작하고 경조사에 마음 나누며 오순도순 살아간다.연자방아 암수가 떠억 하니 자리 잡은 집. 국화 봉오리가 소복한 마당에 돗자리를 펴고 매화씨(62), 명자씨(68) 정자씨(67)가 둘러앉아 망중한을 즐긴다. 멸치를 삶아 선별 작업을 마치고 건조기에 넣은 뒤다. 두원리 앞바다에 멸치 떼 신나게 노닐면 사내들은 새벽 배를 밀고 나가 그물을 풀고는 돌아오는 배 위에서 “물 끓여라.” 전화를 건다. 설사 비 쏟아지는 아침이라도 아낙들은 장작불을 때어 커다란 솥에 물을 끓인다. 예전에는 버리는 게 많았다. 수시로 하늘을 바라보고 날이 궂으면 방에 불을 넣어서라도 멸치를 말려야 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언제고 건조기에 넣으면 맛좋게 절로 마른다. 크기에 따라 볶아 먹는 것, 안주로 찍어 먹는 것, 국물을 내는 것을 구분하고 아주 굵은 멸치는 젓갈을 담갔다. 옹기에 멸치를 담아 품질 좋은 소금에 재고 한지로 주둥이를 덮어 풀을 쑤어 봉했다. 동짓달부터 이듬해 시월까지 보관했다가 곰삭은 젓갈을 거르곤 했는데 숙성이 잘 된 것은 바알가니 맛도 좋고 색깔이 고왔다. 내리 5년을 두고 먹어도 전혀 맛이 변하지 않았다.매화씨가 한 살 많은 동네총각과 결혼을 할 때만 해도 두원리는 온통 초가집이었다. 거랑은 물이 맑아 밤이면 위쪽에선 남자들이 아래는 여자들이 목욕을 했다. 간혹 고된 시집살이에 부아가 차오르면 빨래 방망이로 퍽퍽 두들기며 빨래를 했다. 바닷일에, 밭일에, 집안일에 둘둘 말려 흘러온 세월이 주름만 잔뜩 슬어 놓았지만 마음속엔 추억이 새록새록 산다.“낯설었데이. 밥을 묵을 때도 부끄러웠고 아가씨 때는 가마솥에 밥을 해도 잘 되더니만 시집 와가 밥을 하이 죽밥이 되기 일쑤인기라. 아이고, 생솔갑을 쳐다가 불을 때가 보리쌀 씻어 안치면 연기는 또 을매나 맵던고. 눈물 콧물 질질 짜며 삼 시 세 끼 밥을 했지”두원리 아낙들은 그렇게 두루두루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고 집안도 되었다. 시누이도 되고 올케도 되고 한 사십 년 푹 눌러 산 시골에는 남이 없다. 아이들은 책보를 매고 신작로를 걸어 계원초등학교에 다녔다. 차가 없던 시절에 어쩌다 공짜 차를 얻어 타면 좋아서 난리가 났다. 아침에 날고구마를 들고 학교에 가다가 자갈길 가에 소복이 흙을 덮어 감춰 놓고 하굣길에 그걸 꺼내 바닷가로 달려가 종일 놀곤 했다.“정월대보름이면 마을 복판에 금을 긋고 크다란 줄로 댕겼지. 여자, 남자,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마캐다 나와 줄당기고 나면 명절 음식으로 차리 놓고 술을 받아 종일 놀았다 아이가. 그라고 음력 시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는 묘제를 지냈데이. 과일캉 음식캉 차리 놓고 절하고 나믄 얼라들이 책가방 울러 매고 떡 받아 묵을라꼬 산등성이를 막 기 올라왔다. 그라믄 니 아 내 아 할 것 없이 쭐루리 줄을 서라카고 한 쪼가리썩 떡을 나눠줬재.”결혼은 동네 잔치였다. 이장 집에 보관했던 족두리, 장옷을 빌려서 쓰고 술잔, 그릇들은 혼사를 치르는 집에서 대부분 준비했다. 수탉과 암탉을 붉고 푸른 천으로 각각 싸서 탁자 위나 아래에 놓았다. 수탉의 울음소리는 밝고 신선한 출발을 의미하고 또한 혼례날 찾아오는 그러나 반드시 사라져야 할 악귀를 쫒는다는 의미였다. 또 전통 농경사회에서 중시하였던 다산(多産)에의 희망도 담겨있었다.“우리 형부가 부산 사람인데 말이지. 시내 사람이다 보이 장가오는 신랑에게 잿봉지를 던지는걸 몰랐던 기라. 동네총각들이 재를 봉지에 담아가 말을 타고 오는 새신랑에게 던지니까 재를 보얗게 덮어 쓰고는 마 눈도 몬 뜨고 서가 이래 말하데. “촌놈은 촌놈이다. 이게 사람이 하는 짓인가. 지금 짐승이 들어온다고 이래 두드리는가?” 승질이 나도 처가 동네니 욕도 몬하고…. 그기 한 마디로 동네 총각들이 지들 동네 각시를 데불고 가는 신랑과 얄궂은 얼굴트기를 한 셈인기라.”초상이 나도 온 동네 사람들이 움직였다. 상을 당한 집이 하얀 윗저고리를 지붕에 얹어 놓으면 `아, 저 집에 초상났구나.`는 신호였다. 정작 가족들은 슬픔에 빠져 경황이 없기 때문에 이웃들 친척들이 절차 밟아 입관하고 산에 묻는 것까지 다 해주었다. 3일 장부터 4일, 5일 장까지 있었는데 주로 3일장을 치렀다. 상여를 메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요령을 흔들었다. 만장을 들고 산으로 가는 행렬과 요질과 교대를 두르고 상여 뒤를 따르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배웅이었다. 아침 일찍 올라간 사람들이 땅을 파놓으면 먼저 산신을 위해 산신제를 올리고 시신을 묻었다. 그리고 난 뒤에 고인을 위한 제사를 지냈다. 사람 하나를 보내는 일에도 온 정성을 다했던 것이다. 그날 덮은 봉분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내려오던 사람들.“아이고, 상여 집을 지나갈 때는 와 그리 무섭던고. 내는 지금도 논으로 밭으로 갈 적에 뻘건 줄 퍼런 줄 보믄 마 발이 빨라진다. 내 발소리에 내가 놀라가 퍼뜩 지나간데이. 그라고 거그가 뱀이 많다는 소문도 있았다.”매화씨, 명자씨, 정자씨. 두원리 호쾌한 아낙들이 바랜 책장을 넘기듯 술술 기억을 풀고 있다. 대문 옆 굵은 은개나무도 연자방아 위에 앉은 청개구리도 마당에 널어놓은 붉은 고추도 귀를 열고 듣는다. 권선희 시인

2011-10-10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29> 돌문어 잡는 김헌길씨 /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청량한 구월 하늘 아래 호미곶 파도는 참 신나게도 논다. 멀리, 붉고 흰 등대를 돌아 입항하는 태창호를 은빛 갈매기 떼가 호위한다. 새벽을 밀며 바다로 나갔던 사람들의 눈부신 귀환이다. 태풍 기운으로 일주일 만에 나간 조업은 다행히 만선이다. 배 밑바닥에서 크고 작은 문어를 들어 올리는 김헌길 (57세)씨의 그을린 얼굴에 가을 햇살이 쏟아진다. “인자는 감으로 잡습니더. 사람도 더우면 응달로 가고 추우면 양달로 간다 아입니까. 또 많이 모여 있는 곳에 무슨 일로 있는가 싶아가 한 번 기웃거리게 되는 법이고요. 문어도 고기도 똑 같니더. 수온이 차면 위로 올라오고 더우면 밑으로 내리갑니다. 그라고 호미곶 돌문어는 억수로 이쁘니더. 내한테 밥을 주는 놈인데 우찌 안이쁘겠능교. 이쁘고 말고지요.”그는 11월 한철 참복잡이를 빼고는 사시사철 호미곶 앞바다에 문어잡이 배를 띄운다. 어르신도 모두 배를 탔으니 3대 째 어부로 살아 온 셈이다. 오남매 중 맏이였지만 할아버지도 외동, 아버지도 외동인 집안이었다. 일가친척이 없다는 것은 서글프고 외로운 일, 게다가 일찍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여덟 식구의 살림은 가난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등공민학교를 잠시 다녔지만 대보면에 중학교가 생기면서 고등공민학교는 문을 닫았다. 결국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열다섯 살 어린 나이에 처음 머구리배를 탔다.역할은 선원들의 밥을 해주고 잔심부름을 하는 화장이었다. 밥 짓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 철 꼬박 타야 쌀 한 가마니 남짓한 벌이였으나 대가를 받는 건 뿌듯했다. 천성이 바지런한 탓이기도 했지만 선원 대부분이 마을 어른들이라 그를 극진히 챙겨주었다.“머구리배는 아침에 나갔다가 날이 안 좋으면 들어오고 좋으면 저녁에 들어오고 그랬니더. 밥으로 폴폴 성글게 담으면 좀 남았는데 그것을 손으로 꾹꾹 눌러가 동생들에게 갖다 주곤 했지요. 동생들이 졸로리 나와 배 닿기를 기다렸다 아입니까. 그 쌀밥 냄새, 참 좋았습니다.”1년 남짓 머구리배를 탄 뒤 그는 오징어 배를 타기 시작했다. 오징어 스무 마리가 20원 하던 시절이었다. 선주들 모르게 몇 마리씩 팔아 그 돈을 집에 보냈다. 쉬이 나아질 리 없는 형편이었지만 부모에게도 동생들에게도 몫을 하는 것 같아 기뻤다. 가난이 어린 자식을 바다로 내몬 것 같은 심사가 부모에게는 평생 옹이로 박혔을 것이다.한 손으로 노를 저으며 수경으로 바다를 들여다보고 문어를 만나면 갈고리로 끌어 올리는 청경발이에서 낚시를 놓아 문어를 잡는 형식으로 조업의 형태는 변했지만 호미곶 해안은 이 방법을 쓰기엔 해안 지형이 적절치 않았다. 모래가 없고 유독 바위가 많은 탓에 낚시 줄은 늘 끊어지고 문어는 속 시원히 잡히지 않았다. 얼핏 경남에 가면 통발을 이용해 문어를 잡는다는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포항에서 식육점을 하는 사람이 갖고 있던 `순양호`라는 배를 선장이었던 이수만씨와 빌려 어느 정도의 세를 주고 통발을 이용한 조업을 시작했다.장비가 없던 시절이라 산을 보고 바닷길을 찾았다. 뒷산과 앞산의 꼭대기와 꼭대기를 똑바로 맞춰 갔고 삼각형 꼭짓점이 닿는 곳에 통발을 놓곤 했다. 공책에다 산을 그리고 표시를 하기도 했다. 호미곶 문어가 말도 못하게 많았다. 통발마다 문어가 들기 시작하는데 나날이 한 리어카씩 올렸다. 문어 뿐만 아니라 잡어도 들었다. 신나는 날들이었다. 엄청 벌었다. 그러나 작업이 잘 되니 4~5개월 쯤 지나 배 주인이 직접 하겠다고 했다.배를 탄 지 10여 년 만에 드디어 자신의 배를 가졌다. 모은 돈을 집에 주고 싶었지만 또 흩어지고 말 것이 뻔했다. 실패할 경우 빚에 빚이 얹어진다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한 편으로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끊임없이 다녀갔다. 결국 구룡포 사라 끝에 조그마한 배가 하나 났다는 소리에 통통배를 구입했다. 둘이 타고 낚시를 놓아 문어를 잡는 작은 조롱발이였다. 좋았다. 버는 만큼 내 것이었다. 배 구입을 반대하던 아버지도 돈을 모아 스스로의 배를 마련한 자식이 기특했으리라.`한수호`, 원래 배 이름을 그대로 썼지만 잊지 못할 첫 배의 이름이었다. `한수호`와 1년을 함께 바다에 나가 벌어들인 돈은 빚을 갚고도 배를 하나 장만할 만큼이었다. 조금씩 배의 크기를 늘였다. 살 때는 105만 원에 샀지만 120만원에 팔았다. 고기를 잘 잡는 배는 재수가 좋다는 미신 탓에 조금 더 주고도 쉽게 사갔다. 그는 작업이 잘 안 되는 배를 싼값에 샀다. 잘 다듬어서 기술을 믿고 시작했다. 그만큼 수입이 좋았고 자신감도 늘었다. 이젠 만들고 싶었다. 목선이었다. 조선소는 비쌌으므로 도목수를 고용하고 아버지와 함께 만들었다. 부산 가서 나무를 깨고 들여와 말리고 뚝딱거리며 만든 배 `행왕호`, 강사리 해봉사에 가서 이름 넣고 시 때를 넣어 지은 이름이었다.“옛날 아동 영주 그 짝에 주막이 하나 있았는데 말이시더. 과거보러 가는 사람들이 그 주막에 들러 가 문어를 묵고 가믄 마캐다 급제를 한다는 설이 있었다 캅니다. 또 문어 다리가 여덟 개니 팔자를 고쳐서 돌아온다는 야그도 있었지요. 그라고 `동지 문어 약 문어`라는 말 들어 봤능교? 크리스마스부터 1월 1일까지 잡히는 문어는 보드랍고 꼬들꼬들하니 최고시더. 문어가 게, 전복 할 것없이 온갖 좋은 건 다 먹고 사는데 삶은 물에 매운 고추 쫑쫑 썰어 넣고 파 송송 썰어 마시면 마 속이 개운하니더.”끼걱끼걱 태창호 정박한 포구에 노을이 진다. 우연찮게 친구들과 놀러왔다가 그만 발목을 붙들린 고운 처녀, 시부모 모시고 시동생들 치다꺼리에 이제 뱃일에서 손 떠나지 못하는 아내는 어느새 반백이 되었다. 노대바람 지나고 명주바람 맞으며 동생들 자식들 잘 거두어 훌훌 대처로 방류한 그 또한 한 척 배다. 문어를 실어 보내고 난 뒤 문어 통발에 든 이시가리, 도다리, 참가자미 몇 놈 쓰윽 쓰윽 회를 떠서 이웃과 소주 한 잔 시원하게 친다. 둘러 앉은 얼굴마다 호미곶 푸른 바다가 싱그럽게 출렁인다.

2011-09-26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28> 그 골목이 들려주는 이야기(5) / 포항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

1945년 8월15일 아침 서울 시내 각처에는 `금일 정오 중대방송, 1억 국민 필청`이라는 벽보들이 나붙었다. 소수의 식자층은 `일본의 항복`을 알리는 방송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에 감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코자 여기 충량한 그대들 신민에게 고하노라….” 정오 무렵, 일본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방송이 전해졌다. 1910년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우고, 1939년 7윌에는 노구교사건을 일으켜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개시했던 일본. 급기야 그들은 히틀러, 무솔리니와 손잡고 1941년 12윌8일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세계를 전쟁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일본은 서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1945년 5윌7일 나치스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선의 한 축이 무너지면서 패색이 짙어졌고, 7월17일 포츠담에서 미, 영, 소 3개국 대표는 힘을 집결키로 합의했다. 8월 6일과 9일에 미국의 폭격기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세례를 퍼부었고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가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4년을 끌던 태평양전쟁은 막을 내렸다. 그 날, 포항 동남쪽 포구 구룡포는 정적이 감돌았다. 일본인 가옥은 문을 굳게 닫았고 조선인 역시 만세를 부르며 뛰쳐나오는 이가 없었다. 이틀이 지난 어느 밤, 한 집에 네댓 명씩 모여 있던 청년들 중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에이, 마캐 나가자. 나가서 딥다 소리를 질러야 안켔나.” “그래 좋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루루 몰려나갔다. “만세~ 만세~” 큰 소리로 목청을 높이며 굳게 입 다문 일본인 거리를 뛰었다. 대열에 합류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순식간에 불어났다. 이삼십 명씩 무리를 이뤄 부르는 만세소리와 축항을 치는 파도소리가 늦여름 밤을 흔들었다.그 중에는 앞이 안보이는 봉사도 있었다. 그가 무리를 따라 창주공립보통학교 부근 로터리부터 축항까지 따라 뛰는 모습에 일행들은 배꼽을 잡고 웃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징을 치며 따라오는 노인도 있었다. 저녁마다 외치던 만세소리는 일주일가량 계속 되었다.포구에는 일본인의 짐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구룡포항을 통해 본국으로 가려고 몰려든 내륙사람들은 식솔들을 데리고 일본인 집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구룡포 사람들은 그들의 재산을 뺏거나 괴롭히지 않았다. 오히려 자국으로 돌아가는 그들에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챙기라고 했다. 수개월에 거쳐 운반선이 닿는 대로 그들은 떠났다. 일본인 중에는 죽어도 구룡포를 떠나지 않겠다던 노부부가 있었다. 아이가 없던 그들은 이곳에 살게 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 조선인들이 돌아가라고 해서 억지로 돌아갔지만 얼마 후 다시 구룡포를 찾아왔다. 그러나 결국 정착하지 못하고 쓸쓸히 구룡포를 떠났다.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바다를 건너 구룡포에 발을 딛었던 일본인들은 50여 년 동안 이루고 쌓았던 유토피아를 그렇게 놓아야 했던 것이다.“패전 소식으로 마을 전체가 어수선 했습니다. 급하게 철수하는 어선에 오르느라 짐을 제대로 챙길 수도 없었지요. 구룡포 항을 떠나자 배가 표류하기 시작했습니다. 8월 말에서 9월 초순 사이였어요. 기상이 매우 나빠 파도가 높았고 바람도 거칠게 불어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불안에 떨었습니다. 이러다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표류하다가 시모노세키에 겨우 도착한 우리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1931년 구룡포에서 태어나 1945년 패전으로 떠난 이시하라 히데오. 15살의 이시하라는 어머니의 친척이 갖고 있던 배를 타고 구룡포와 작별했다.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다. 가져올 물건도 없었다. 부모님은 구룡포가 제2의 고향처럼 살 곳으로 알았으므로 특별히 값어치 나는 것을 간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돌아온 뒤 거처할 집이 없어서 담배창고 한 쪽에서 기숙을 했다. 식량이 부족해 얻어먹었다.귀환할 때 손꼽히는 부자로 살던 하시모토 젠키지의 막내딸 하시모토 히사요. 그녀는 가족과 헤어져 홀로 배를 탔다. 일행이 모두 가가와현 사람들이라 잘 보살펴 주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배를 곯았다. 씻지 못해 꾀죄죄한 모습이 거지꼴이었다. 뒤늦게 오다에서 이뤄진 아버지와 어머니의 재회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눈물바다 였다.도가와 야스브로의 아들 카오루가 쓴 회고사는 당시 상황을 더욱 상세히 보여주었다. `전쟁의 상황은 나빠졌다. 미군기가 구룡포 상공에도 자주 나타나 정박 중인 어선에 총을 쏘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바닷가에는 조난당한 병사의 사체가 떠밀려 오는 일도 잦았다. 북한에서 내려오는 피난민들과 내륙으로부터 돌아오는 귀환자가 쇄도했다. 구룡포 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귀항하기 위해서였다. 고향을 떠나있던 구룡포 사람들도 돌아왔고 그 사이 조선인들로 구성된 조선자치회가 조직돼 활동을 하는 등 거리가 갑자기 붐볐다. 9월이 되자 현저하게 사람들이 줄었다. 남은 것은 치안관계의 주재소장을 비롯하여 몇 안 되는 사람 뿐이었다. 조선자치회가 배를 준비해 귀환하라는 요청을 했다. 그때 나와 오노 슈윤이치 두 사람을 빼고는 모두 구룡포 항구를 떠났다. 나와 오노는 우리가 태어난 땅에서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취하도록 술을 마시며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10월이 되자 심상소학교에 주둔해 있던 미군이 우리를 소환했다. 미군은 나와 오노를 즉시 일본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우리는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부산으로 갔고 부산항 부두에서 인양선 메이유호에 인도됐다. 그 배를 타고 처량하게 일본으로 돌아왔다.`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믿었을까? 그들은 일을 봐주던 집사나 가까웠던 이웃에게 맡겼다. 훗날 그들은 일본인들이 하던 일을 자연스럽게 이어 받았다. 누구 하나 간섭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러한 상황은 구룡포 사람들 사이의 빈부차이를 넓혔고 신분 변화를 가져왔다. 느닷없는 시대적 변화에 올라 탄 사람들은 급속히 부를 축적해 구룡포의 신진 세력으로 부상했지만 대다수 서민들은 일본인들이 거주할 때나 그들이 돌아간 뒤에나 똑같았다. 새롭게 변화할 여건도 구실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구룡포를 떠난 지 6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바람이 불면 갈피마다 먼지처럼 앉은 이야기들이 여전히 수런거리고 있다. 끝* 이 글은 2009년 3월, 소설가 조중의씨와 필자가 공동 집필하여 발간한 `구룡포에 살았다(도서출판 아르코)`를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권선희시인

2011-09-19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27> 포항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

구룡포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본격적으로 그들만의 사회를 만들어 갔다. 바다에서 잡아 올리는 수자원을 보관하기 위해 마을 곳곳에 우물을 파고 저장고를 지었다. 정신문화의 계승을 위해 신사와 절을 지었다. 그리고 학교를 세웠다. 얼마 전 폐교가 된 동부초등학교는 일본인들이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심상소학교였다. 심상소학교는 훗날 지금의 중학교 과정인 고등과를 신설하고 조선인 자녀 서너 명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른들의 치열하고 격동적인 움직임에 비해 정착촌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일상은 매우 평범했다. 몇몇은 조선인 친구들과 유년의 깊은 우정을 쌓기도 했다. 1918년 구룡포에서 태어나서 평생 토박이로 살아 온 서상호(93세)씨는 그들과 보낸 어린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日人들 신사와 절 학교 등 짓고 그들만의 정신문화 계승 본격화조선 어부와도 공생 관계… 겉으론 평온“여름이면 구룡포 해수욕장이나 근처 바다에서 고기도 잡고 수영도 했지요. 겨울이면 어울려 썰매를 탔구요. 돌아다니며 철사를 구해서 썰매를 만들어 장터 앞 거랑에 가서도 타고 논에 물을 막아서도 탔습니다. 형편이 좀 나은 아이들은 일본 나막신에 날을 달아 스케이트를 탔지요. 어스름 저녁 무렵 헤어지면 다음날 아침 다시 만나 놀곤 했습니다. 나카이시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배우지도 않은 한국말을 아주 잘했어요. 나카이시에게는 서너 살 위의 형이 하나 있었는데 그 역시 조선말을 술술 했지요.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몰라도 심지어 우리 옛날이야기까지 재미나게 들려주곤 했는걸요. 다른 일본 친구들과는 일본말로만 대화를 해야했지만 나카이시와는 조선말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했어요”그 시절, `나나`라고 불리던 처녀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본인 집에 파출부로 들어갔는데 주 일거리는 아이를 봐주는 것이었다. 나이가 15~16세 정도의 어린 처녀들이었는데 일본인 집에서 거주하면서 아이를 보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 아침에 일본인 집으로 들어갔다가 저녁 9시경이면 돌아왔다. 나나들은 약간의 보수를 받고 일을 했는데 한두 달이 지나면 특별한 일본어 교육을 받지 않고도 일본말을 유창하게 했다. 그들이 `나나`라고 불린 이유는 맨 처음 그 일을 맡은 처녀의 이름이 `란` 혹은 `난`으로 끝나 `란아` 혹은 `난아` 라고 부르던 것에서 서서히 `나나`가 되었고 후엔 그 일을 하는 모든 이들을 총칭하는 대명사가 된 것이다.“일본인들 은 10월 15일경이면 아끼 마쯔리라는 가을 축제를 크게 벌였습니다. `미꼬시` 또는 `오미꼬시` 라며 나무로 만든 빈 가마를 메고 온 동네를 돌아다녔지요. 가마를 멘 청년들이 좀 잘 사는 집을 찾아가면 주인은 술과 떡 같은 음식을 내놓았어요. 그렇게 온 골목을 요란스레 돌고는 날씨가 제법 쌀쌀한데도 가마를 멘 채로 바닷물에 뛰어 들었습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들이 `와쇼이!` 혹은 `와세이` 라 외쳤는데 어른들은 조선시대 통신사가 일본에 갔을 때 “왔소!”라고 한데서 유래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또 추절 행사 때는 온 동네가 집집마다 처마 끝에 고운 단풍잎 같은 낙엽을 만들어 빙 둘러 달고 등불을 달았어요. 빨간 단풍잎을 단 처마도 멋졌지만 밤이면 불을 밝히던 등불도 장관이었지요. 그렇게 온 동네가 치장을 하고 한 사나흘 정도 들썩거렸는데 신사에서 시작해서 신사에서 끝났습니다. 마쯔리축제는 순전히 일본인들만의 축제였어요. 조선사람들은 해코지를 하지도 않았고 방해도 하지 않았지요. 그저 구경만 했습니다”반면 조선인들은 음력 8월16일이면`들구경`이라는 행사를 했다. 추석 다음날이면 온 마을 사람들이 마을 입구의 용두산 고개로 올라갔다. 어른 아이할 것 없이 삼정골이고 성동이고 몰려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좀처럼 바깥나들이가 없었던 처녀들도 그 날만은 잘 차려입고 나섰다. 전날 추석 명절에 준비한 음식을 들고 오는 사람도 있었고, 오랜만에 만난 사돈이나 일가친척들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올라왔다. 좀처럼 들판 구경이 힘든 바닷가 사람들이라 가을 동산에 올라 눌태리 쪽 들판을 바라보는 들구경은 아주 인기가 좋았다. 누가 언제 시작했고 언제 끝이 났는지는 모르나 그리운 추억이다. 들구경에는 일본인들이 참여하지 않았고 순전히 조선인들만의 행사였다. 마쯔리를 구경하던 조선인들처럼 일본인들은 들구경을 지켜보며 흥미로워 했다.일본인들은 주로 어스름한 저녁 무렵에 결혼식을 했다. 따로 식장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주로 자신의 집 2층에서 했으므로 자세한 절차나 광경은 볼 수가 없었다. 하객이 북적이지 않았고 차분하고 조용하게 치렀다. 또 그들은 함께 살던 이웃이 죽으면 화장을 하는 장례를 치렀다. 상여는 시신을 눕힌 직사각형인 우리나라 상여와는 조금 달랐다. 일본인들의 상여는 마치 가마처럼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였다. 그들은 시신을 바르게 앉힌 채로 가마에 태우고 가서 화장을 했다. 그러나 축항을 만들고 나서 지금의 구룡포 화장장 앞에 새로 화장장을 만들고는 그들 역시 시신을 눕히는 형태로 바꿨다. 아마도 사망 후 시신을 앉은 자세로 유지하는 것이 번거로웠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변화는 공존하는 세월이 길어지면서 섞인 문화의 대표적 예다. 지금의 동부초등학교 부근에 일본인들이 만든 납골당이 있었는데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모두 가져갔다. 그러나 구룡포 공원 옆 대나무 숲에는 무덤이 하나 남아 있다. 당시 신사의 제주였던 사카이 어머니의 무덤이다. 사카이는 당시 80세가 넘는 나이였는데 본국으로 떠나면서 무슨 연유인지 어머니의 무덤을 챙기지 못했다. 나이가 연로한데다가 느닷없이 닥친 상황에 경황이 없던 탓인지도 모르겠다.구룡포에 거주하던 양측 어민들의 관계에서 특별히 드러나는 부딪침은 없었다. 조선인들은 그들로 인해 활기를 띄기 시작한 항구의 모습에 협조했고, 일본인들은 텃세를 부리지 않고 자신들을 호기심으로 지켜보던 조선인들과 공생의 지혜를 발휘했던 탓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약간의 두려움과 호기심 속에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경계했으리라는 느낌도 버릴 수가 없다. 계속* 이 글은 2009년 3월, 소설가 조중의씨와 필자가 공동 집필하여 발간한 `구룡포에 살았다(도서출판 아르코)`를 바탕으로 쓰였습니다.

2011-09-05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26> 그 골목이 들려주는 이야기(3)

포항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하시모토 - 도가와 日 양대세력 이끌어심한 알력 빚다 방파제 축조 명분 제휴 일본 어민들에게 어업권을 인정해 주기 시작하면서 1912년 구룡포 정착 일본인 가옥은 47호가 되었고 1916년에는 78호로 크게 늘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어업과 관련된 다양한 업종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그 중에서도 눈여겨 볼만한 인물은 하시모토 젠기치와 도가와 야스브로. 구룡포 거주 일본인의 양대 세력은 크게 가가와현 출신의 어민들과 나머지 타 지역에서 유입된 일본인들로 나뉘어졌다. 하시모토 젠기치를 중심으로 하는 가가와현 출신들은 초기 개척 당시부터 주도적으로 임해온 터라, 뒤에 유입된 타 지역 어민들을 배척했다. 구룡포 거주자의 절반 가까이가 가가와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세력은 대단했다. 이에 반해 타 지역 각지에서 들어 온 어민들은 가가와현 출신의 기득권 주장과 텃세에 맞서 대응했다. 그들이 내세운 중심인물은 오카야마 출신의 도가와 야스브로였다.가가와현 출신의 하시모토는 가이코호, 지요호, 다카호 등의 선박을 소유하고 구룡포를 기점으로 경북, 경남의 연안은 물론이고 관동지방까지 무대로 활동했다. 훗날, 선어운반업과 더불어 대형낙망과 건착망(고등어와 정어리 등을 잡는 그물 어구)어업과 정어리 가공공장까지 경영하면서 막대한 재산을 모은 하시모토는 가가와현 출신 어부중 최고의 부를 이룬 사람이었다. 그는 재력을 바탕으로 가가와현 이주민들의 리더역할을 했다.하시모토와 비슷한 시기에 구룡포로 진출한 도가와 야스브로. 1875년생인 그는 불과 27세의 젊은 나이에 1902년 구룡포 남쪽 모포리에 정착하였다가 6년 뒤인 1908년 도로개설이 보다 쉽고 수산업기지로 전망이 밝다고 구룡포로 거주지를 옮겼다. 1908년 당시 포항으로 이주해 정착한 오카야마현 사람들은 95호나 되었다. 도가와는 포항에 자리잡은 고향사람들과 교류하며 금융기관, 권력, 경제 등 다방면으로 인맥을 넓힌 탓에 하시모토와 견줄만한 충분한 위치가 되었고 가가와현을 제외한 타 출신 이주민들 중 대표가 되었다.일본인 집단촌은 외형상 보기엔 평화로워 보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알력과 세력 다툼으로 인해 두 패로 나뉘어져 있었다. 마을이 점점 번창할수록 상권은 물론 의사결정권에서도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갈등이 표면화됐다. 하시모토를 회장으로 하는 가가와현민회와 도가와를 회장으로 하는 타 현민회는 매사에 맞서 갈등을 일으켰다. 마을의 일을 할 때도 의견이 충돌했다. 간혹은 다툼도 벌어져 부상자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 팽팽하게 맞서던 두 세력이 손을 잡은 것은 항만건설이라는 염원 때문이었다. 자연항인 구룡포는 거친 파도를 막아 낼 시설물이 전무해 풍랑이 거세지거나 폭풍이 불어 닥치면 속수무책이었다. 어선이 전복되고 많은 사상자들이 속출했다. 파도가 주택가까지 덮쳐 골목길을 통행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시모토와 도가와는 제휴를 결심했다. 서로의 명분을 지킬 수 있을뿐만 아니라 구룡포의 미래가 달린 사업이라 걸림돌이 될만한 것은 없었다. 그들은 `구룡포축항기성동맹회`를 조직했다. 회장은 도가와 야스브로가 부회장은 하시모토 젠기치, 이사는 마츠이 나카이치시가 맡았다. `축항기성동맹회`가 조직되기 이전인 1918년 도가와는 스스로의 힘으로 경북도로부터 지원을 받아 방파제 축조에 나선 경험이 있었다. 도가와의 재력과 하시모토의 인맥을 동원한 구룡포 거주 일본인들은 항만 축조에 뛰어들었다. `가가와현 해외출어사`에 따르면 1921년 1월 공사비 약 3만 엔을 투입해 항구 북동쪽에 면적 2천333평을 매립하는 공사를 시작하였고 1922년부터 3년 사업으로 35만 엔을 투입해 이미 매립해 놓은 항구 북동쪽 용주리부터 방파제를 설치해 나갔다. 공사비는 조선총독부로부터 12만 엔, 경북 도청으로부터 13만 엔을 지원 받았고 나머지 자금은 창주면(현재 구룡포읍)과 일본인거주민들로부터 조달했다.지금의 병포리 부근 용두산 자락은 온통 돌산이었다. 얼마 전 허물린 펭귄통조림 공장까지 커다란 바위가 이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깎아 축항을 만드는데 사용했다. 돌을 깎고 흙을 퍼내는 중장비가 없어 레일을 깔고 수레에 돌을 실어 날랐다. 일일이 사람의 힘으로 바다를 메워 나갔다. 수없이 많은 조선인들이 공사에 투입되었다. 공사는 1926년 끝났고 182m의 방파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방파제로 구룡포는 어업근거지의 기본적인 여건을 갖추게 됐다. 방파제 축조로 선박의 항내 정박이 안정되자 부산에서 원산을 오가는 여객선과 부산에서 울릉도를 오가는 여객선의 중간 항구가 되었다. 1차 방파제 축조가 끝났지만 하시모토와 도가와는 너무 작다고 판단해 1931년 경북도 민자 사업의 일환으로 나머지 방파제 공사를 마무리하기로 의기투합했다. 당시 경북도 평의원으로 활동했던 도가와의 영향력과 로비도 큰 도움이 되었다. 1932년 2월부터 총 공사비 59만 엔을 투입해 방파제 확축매립공사를 시작했다. 그 후 3년 뒤인 1935년 3월 70m의 방파제를 연장하고 재해복구연장 명목으로 135 m의 공사를 추가했다. 이때서야 구룡포항의 현재 모습이 갖추어진 것이다.훗날, 하시모토가 발기인이 되어 도로와 축항건설에 많은 공로를 세운 도가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송덕비를 1944년 구룡포 공원에 세웠다. 도가와가 언제 사망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송덕비가 세워진 연도를 가늠하면 그는 해방 이전 구룡포에서 사망한 것으로 짐작된다. 도가와는 생전에 6남매를 두었으며 장남 카오루는 1912년 구룡포에서 태어나 1945년 패전을 맞아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후 도쿄에 거주하며 구룡포에 살았던 사람들로 구성된 구룡포회를 이끌어 오다가 2005년 93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딸 오오구로 카요코(2008년 당시 74세)는 일본 오사카 사카이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하시모토는 1944년 도가와의 송덕비를 세우고 난 뒤 그 해 구룡포에서 사망했다. 이국의 항구에서 한 시대를 주름잡던 화려한 생도 세월을 비껴갈 순 없었다. 서서히 다가오는 패전의 기운을 그들은 과연 감지했을까? 계속* 이 글은 2009년 3월, 소설가 조중의씨와 필자가 공동 집필하여 발간한 `구룡포에 살았다(도서출판 아르코)`를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2011-08-29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25>그 골목이 들려주는 이야기(2)

포항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 2008년 초가을, 가가와현 오다무라에 사는 마츠모토 시게노리(88세)를 만났다.그는 구룡포에서 19살 까지 살다가패전과 함께 돌아와고향에서 와인 공장을 하며 살고 있었다.마츠모토가 들려준 이야기와챙겨준 자료, 사진 등은일본인 가옥 거리에 대한실마리를 푸는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이후에도 그는 각지에 흩어져 있는`구룡포회` 사람들을 연결해 주었는데그들의 회고록과 출어사등 당시 기록물을 통해서서히 당시의 풍경이 일어서기 시작했다.日 어부들에 부 안겨준 동해 황금어장구룡포 정착 사연엔 침탈의 역사 흔적“정어리 떼가 몰려오는 날이면 그 뒤를 수십 마리의 고래가 따라왔는데 물을 뿜어 올리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정어리는 너무 많이 잡혀서 육지에 내려놓으면 산더미처럼 쌓였고 고등어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걸려서 배가 침몰하는 경우도 있었다.”“배와 그물이 모두 불안전한 것이었지만 어획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하룻밤에 1천 여 마리의 삼치를 잡았는데 그물을 거두면 배가 가라앉고 배를 침몰 시키지 않으려면 그물을 버려야했다. 어부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후쿠오카현에 속한 지역 오시마의 촌사편찬위원회가 출어의 실태를 오래 기록으로 남겨 놓기 위해 좌담회를 열고 그 내용을 기록한 `오시마촌사`에서도 당시 어획량이 얼마나 많은 부를 안겨주었는지를 보여준다. 오시마 어부들은 폭이 5척 1촌, 길이가 20척에서 25척 남짓한 1인승 배로 삼치잡이에 나섰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삼치를 찾아 북상하여 경상북도 구룡포를 근거지로 경북, 경남, 강원도 일대 먼 바다에까지 나가 조업을 했다. 삼치가 정어리를 먹고 기름을 토해 낸 것을 표적으로 삼치 떼를 찾아냈다. 많이 잡힐 때는 이른 아침 불과 1시간 만에 85마리~115마리가 줄줄이 낚였다. 무게는 700돈에서 1관이나 됐다. 삼치가 뛰놀 때는 그 부근 일대가 붉은 빛을 띄게 되는데 솟구쳐 뛰어오르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이렇게 잡은 삼치는 하야시가네 상점의 모선이 전표를 내주고 사들인 다음 얼음에 재워 교토로 보냈다. 삼치 한 마리에 보통 80전, 최고일 때는 2엔까지 했다. 전표를 받고 삼치를 넘긴 어부들은 구룡포로 들어와 사무소에서 돈으로 바꾸었다. 어선이 만선으로 들어오는 호어기 때는 1인당 300엔 정도를 품에 안고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도 많았다. 당시엔 80엔의 돈으로 폭 6자(약 30.30CM) 3치(3,03CM)의 3인승 배를 만들 수 있었으니 어부가 삼치잡이로 벌어들인 300엔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그렇다면 통어를 하며 조업을 하던 일본 어부들이 어떤 계기로 구룡포에 정착하여 맘껏 바다를 누비며 조업을 할 수 있었고 우리는 왜 한반도 동남쪽 황금어장을 고스란히 그들에게 내어줄 수밖에 없었을까?오다촌 바닷가 산중턱에 있는 `조선출어자 공로비`에는 `1883년 가가와현 쓰다에 사는 사나이 다다기치, 구마기치, 요시로 삼형제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을 받아 쓰시마에 어로를 나갔다가 유명산에 올라 조선 반도로 가고자 하는 뜻을 세웠다. 1년 뒤인 1884년 운송선으로 거제도로 가서 만선으로 각지에 운송했다`는 내용이 있다. 또 다른 자료에는 `1880년 경 오다와 지척에 있는 쓰다의 구마기치, 와다 두 명이 칼과 총을 지참하고 도미연승(도미를 잡는 그물)을 가지고 출어했다` 는 기록이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가가와현 어민들이 조선해에 출i?´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에서 1884년 사이가 된다. 그렇다면 조일통상장정으로 조일 어업관계 조항이 규정되기 이전부터 일본 어부들은 공공연하게 조선해를 상대로 조업을 했다는 것인데 이는 엄연한 침탈이다.1883년 7월 `조일통상장정`이 체결되었다. 양국 어부들은 서로의 해상으로 출어를 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일본인의 조선해 조업은 이전까지 밀어(密漁) 또는 불법이었던 것에서 합법적인 통어(通漁)로 인정된 셈이다. 그 후 1908년 11월 `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본 어민들에게도 조선 어민들처럼 어업권을 인정해 주게 됐다. 이때부터 일본 어민들이 조선 땅으로 진출해 이주어촌을 건설하는 정착 어업시대가 된 것이다. 일본은 왜 조선정부에 무리한 어업협정을 요구해 자국 어민들의 조선해 출어를 적극 도운 걸까? `가가와현 해외출어사`를 보면 세토내해 연안 어장의 주요부분은 특권적인 수부조합에 의해 점유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유로운 공동어장은 좁고 열악했다. 어구는 발달하였고 작은 물고기까지 잡아들인 탓에 어장은 자원이 고갈 되었다. 또 세토내해는 사면이 각 어장과 접해 있어 복잡한 분쟁이 늘 끊이질 않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세토내해를 벗어나 경합이 없는 넓은 어장으로 출어하는 것이었다. 어자원이 풍부한 조선해, 특히 구룡포 인근 바다는 그야말로 그들에겐 유토피아였던 셈이다.그렇다면 조선 어부들도 일본해에 진출하여 맘껏 조업을 했을까? 1900년 초 한국 주요 어장은 왕실 궁내부의 직할 어장과 부호 양반들의 독점물이었다. 그나마 주요어장이 아닌 어촌의 경우 대부분 어민들은 소규모 자가 어업으로 고기를 잡고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게다가 당대 어부의 사회적 신분은 하층민에 속했다. 사대부는 물론이고 평민들까지 어촌지역과는 혼사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들에게 진취적인 기상과 어업기술의 발전을 기대하기란 애당초 힘든 일이었다. `조선통상장정`은 일본 어민들과 동등한 조건으로 우리 어민들의 일본해 출어를 보장해 놓았지만 당시 조선의 어업 현실로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우선은 열악한 어구와 어선으로 수천 리 험난한 바닷길을 가야하는 출어 자체가 어려웠다. 여기에 풍족한 조선 어장도 한몫 했다. 굳이 먼 바다로 나가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원양에 대한 진출의 필요성을 몰랐다. 가가와현 오다 어부들이 구룡포에 쉽게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은 `한일어업협정(1908)`을 계기로 한. 일 간에 형성된 시대적 상황과 구룡포 주민들의 사회, 경제적 역학관계 등 복합적인 것이 맞물렸기 때문이리라. 계속* 이 글은 2009년 3월, 소설가 조중의씨와 필자가 공동 집필하여 발간한 `구룡포에 살았다(도서출판 아르코)`를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권선희시인

2011-08-24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24> 그 골목이 들려주는 이야기(1)

포항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 스산하다. 낡은 목조 건물들이 이마를 맞대고 휘어지는 골목, 부서질 듯 위태로운 처마의 모서리가 후지산 문양이 박힌 나무 발코니를 내려다보고 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2층의 창들은 이제 삐걱이지 조차 못한다. 100여 년 전으로 세월을 돌리면 이곳은 목욕탕과 이발소, 세탁소, 약국, 사진관, 잡화점 등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곳, 여관과 식당, 선술집 그리고 기생들을 고용한 고급 요정들이 밀집해 있던 향락의 거리였다. 고기가 많이 잡히는 성어기에는 도처에서 몰려 온 일본 뱃사람들로 밤낮없이 북적였다. 낮에는 항구를 중심으로 선주와 어부, 운반업자들이 어깨가 받칠 듯이 붐비고, 밤이면 노랫가락과 술타령, 기생들의 간드러지는 웃음소리로 뒷골목은 날이 새는 줄 몰랐다. 오랫동안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 온 어부들이 유흥을 즐기던 석정정(石井亭), 안성정(安城亭), 한양루(漢陽樓), 이엽정(二葉亭), 영해루(迎海樓) 등 숱한 요리집들은 당시의 모습을 담은 바랜 사진 속에 호사스럽던 날들을 가두고 있다. 웃음을 팔던 작부들도 호기롭게 요리집의 문을 열어 젖히던 어부들도 오래전 먼 세상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이 낳아 기르던 아이들도 패전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 이미 생을 마쳤거나 백발이 되었다. 파란의 시대를 흘러 온 황량한 골목은 이제 길가에 나와 앉은 백일홍 화분과 묶인 개가 아직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가다 쉬다를 반복하는 동안 골목 끝에서 비린 바람이 불어왔다. 골목길 돌아서면, 10번 변한 추억이 아련히…경사 가파른 계단을 걸어 오른 구룡포 공원, 호국 영령을 모시고 그들의 희생을 기리는 충혼각과 충혼탑, 그리고 용왕당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조금만 둘러보면 움찔움찔 일어서는 왜색적인 풍경들. 공원 뒤에는 오래전 일본인 자녀들이 다니던 심상소학교가 있다. 앳된 일본인 처녀 선생을 기억하는 늙은 은행나무가 선 교정은 훗날 구룡포동부초등학교로 운영되다가 지금은 폐교가 되었다. 오른쪽 둥그런 공터에는 비취빛 규화석으로 된 일본인 송덕비가 7미터 남짓한 규모로 우뚝 서 있고, 충혼탑 뒤편에는 신사에 들기 전 손을 씻는 데미즈야가 기우뚱하게 놓여있다. 또 버려진 듯한 석불상도 하나 있는데 `부동명왕(不動明王) 대정(大正) 6년`이라 새겨져 있다. 그런가하면 공원 입구 좌우에는 코마이누 한 쌍이 앉아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공원에서 왼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는 일본풍의 건물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남아있었다. 해방 이후 구룡포 성당의 공소로 쓰인 탓에 마당에 성모상이 서 있었지만 지붕을 비롯한 외형은 누가 보더라도 일본 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신사라고 불렀다. 후에 신사가 아닌 불교 진언종 소속의 `본원사`라고 밝혀졌으나 2년 전 마을 주민들이 허물어 지금은 텅 빈 마당에 때낀 성모상 만이 남아있다. 또 공원 바로 옆집 대나무 숲에는 아직도 신사의 제주 사카이 어머니 무덤도 있다.그들이 이곳을 떠난 지 70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조선 팔도 구석구석 왜국의 잔해에 상처입지 않은 곳 몇이나 되랴마는 대부분은 세월이 지우고 덮어버렸다. 그러나 이 자그마한 포구 구룡포의 한 귀퉁이는 소멸되지 않고 버티고 있다. 나라를 빼앗긴 시대, 아픔과 혼란의 시대가 남긴 이야기들이 바람이 불면 씁쓸하게 골목을 흘러 다닌다. 몰려 온 사람들과 밀려 난 사람들이 공유했던 역사 속 구룡포. 비록 가난했지만 평화롭고 아름답던 어촌이 이방인들의 등장으로 겪었던 변화와 혼돈, 그리고 이곳에 생의 터전을 부리고 살다 패전과 함께 돌아간 일본인들의 삶이 후미진 곳마다 아슬아슬 고여 있다. 혹시라도 못다 전한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닐까?일본 가가와현 사누키시 시토쵸에서 발간한 `시토정사`에는 `1909년 하시모토 젠기치가 구룡포로 이주해 매제인 우에무라와 공동으로 성어 운반업을 했다`고 쓰여 있다. 또 오카야마 현 와케군 히나세쵸에서 발간한 히나세정지에 `포항은 청일전쟁 이전부터 잠수기업의 근거지로 1903년 돗토리 현 어부가 처음 내항하여 개발됐고, 1908년 오카야마 현 어부들이 포항에 이주어촌을 건설해 어업에 종사했다`라고 쓰인 걸 보면 그들은 포항 이주 이후에 구룡포에 대한 발견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일제 식민지배기를 1910년부터 1945년까지로 보는 일반적 견해에 의한다면 일본인 어부들의 구룡포 진출시기는 보호국체제 아래에서나마 대한제국의 주권이 아직 남아 있을 때 이미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한 작은 포구까지 들어와 한 세월 풍미하던 사람들, 그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왜 이곳을 택했고 무엇을 하고 살았으며 어떻게 떠나갔을까?100여 년 전 처음 구룡포를 찾아 온 사람들은 일본의 4개 섬 가운데 가장 작은 시코쿠의 북쪽 가가와현(香川縣) 어부들이었다. 상식적으로라면 일본 열도에서 한반도 동해와 가장 가까운 혼슈와 주코쿠의 북서쪽 해안에 살던 어부들이어야 했다. 그러나 목선을 타고 구룡포를 찾아 온 어부들은 멀고 먼 일본 세토내해 연안의 가난한 어부들이었던 것이다.통어를 다니던 1세대는 어업활동이 번창하고 포구에 사람이 들끓자 서서히 구룡포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들은 수산업자와 선원,각종 사업장에서 일하는 잡부들을 상대로 상인으로 신분을 바꾸었다. 일부는 선박 경영과 선어 운반업, 통조림 가공공장 운영으로 큰 부자가 되기도 했다. 단기간 내에 놀랍도록 변화하는 신분은 당시 구룡포 인근해의 풍성한 어자원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처음 그들은 구룡포 주민들이 살지 않았던 북동쪽 산비탈에 거주지를 잡았으나 서서히 축항을 건설하고 모래사장을 매립하여 지금의 거리에 하나 둘 가옥을 지어갔다. 고기잡이로 얻는 수입이 늘자 가족이 늘고 생활에 필요한 필수품을 취급하는 부대시설이 생겨났으며 업종이 다양해지면서 거리는 나날이 번창했다. 계속*이 글은 2009년 3월, 소설가 조중의씨와 필자가 공동 집필하여 발간한 `구룡포에 살았다`(도서출판 아르코)를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2011-08-19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23> 이국의 바다에 꿈을 걸었다<2> / 포항 구룡포항 외국인 선원들

통영서 첫 배 타고 많이 맞고 많이 울어포항서 동포 친구와 맘 따뜻한 사장 만나 3년 만에 한국 돈 2천만 원 정도 벌었어요.돌아가서 집 사고 땅 사고할 정도는 안 되지만그래도 나아졌어요.월급을 통장에 모아두었다가환율 변동에 따라 고향에 보내요. 아들은 이제 5살,딸은 10살 되었어요.4년 동안 두 번 고향 다녀왔어요. 돌 지나고 떠나온 아빠를아들은 몰라봤어요.안기려 하지 않았어요.하지만 딸은아빠 많이 기다렸다며 반겼어요. 사진 보며 자란 모습 생각해요.”봄부터 청어 비늘 마를 새가 없는 포구다. 만선으로 돌아 온 배들이 모야를 삐또에 걸면 중매인들의 한바탕 경매가 눈부신 아침을 연다. 뜰채가 터지도록 청어를 떠올려 트럭에 풀면 가공 공장으로 축양장으로 향하는 길은 또 하나의 비린 바다가 된다.국내에 외국인 선원 신분으로 들어온 이들 대부분이 배를 타지만 일부는 가공 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한다. 장위습(35)과 류보리(32)는 포항시 남구 구룡포에 있는 주영수산(사장 김재환)에서 일하는 중국인 근로자다. 둘 다 2007년에 한국에 들어와 계약한 3년 근무를 마치고 다시 연장을 했으니 4년 가까이 근무한 셈이다. 내년 6월이면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사람들. 그들은 트롤선이 드는 포구 곁 공장에서 이국의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있다.하남성이 고향인 장위습은 택시 운전을 해서 모은 돈으로 선원송출회사를 통해 한국에 왔다. 처음 닿은 곳은 남해 통영, 꽃게잡이 배를 탔다. 그 배에는 한국선원 9명과 중국인 선원이 2명 있었는데 가혹행위가 심했다. 무엇보다 손발이 맞아야 하고 쉼 없이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 뱃일. 연습이나 차차 익숙해 가는 과정은 생략된 채 곧바로 조업 현장에서 몫을 해내야만 했다. 낯선 뱃일의 육체적 어려움은 뒷전으로 치더라도 무엇보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큰 벽이었다. 말을 잘 듣고 싶어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절박한 환경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성격은 불같았고 욕설과 주먹이 소통의 전부였다. 답답하고 억울했다. 견디다 못해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면 싸움은 더욱 커졌다. 참 많이 맞았다. 많이 울었다. 눈물이 늘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었다. 망망한 바다, 어디를 둘러봐도 의지할 곳은 없었다.도저히 못 견디고 결국 4개월 만에 배에서 내렸다. 한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장위습도 따라 가고 싶었다. 그러나 한국에 들어올 때 품었던 꿈과 투자한 돈이 아까워 돌아갈 수 없었다. 가족과 이별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던 때가 생각났다. 몇 년 만 죽어라 고생하면 형편은 나아지리라 꿈꾸며 왔다. 이렇게 돌아가면 남은 생 내내 좌절이 더 클 것 같았다.장위습은 회사를 통해 다른 곳으로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또 다시 만날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왔으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온 것이 주영수산. 주영수산은 배도 여러 척 가지고 있었고 가공 공장도 있었기에 자신이 일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인상 좋은 사장은 설움에 절어 초췌해진 그를 따뜻하게 받아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게다가 주영수산에는 류보리를 포함한 10명의 중국인 친구들이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처지가 같았고 무엇보다 말이 통했으므로 쉬이 친해질 수 있었다.계절 따라 취급하는 어종은 다르지만 작업은 끊임이 없다. 봄이면 포구에서 실려 온 청어를 깨끗이 씻어 상자에 담고 포장한 뒤 냉동 창고로 나른다. 여름부터 오징어잡이가 시작되면 할복 작업을 하고 덕장에 널고 걷고 반복하며 가을을 맞는다. 겨울이면 과메기 작업으로 눈코 뜰 새가 없다. 보통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을 하지만 일거리가 넘쳐나면 잔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 모두 몸을 쓰는 일이라 고되다. 어깨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다. 그러나 일을 마치면 함께 할 수 있는 친구가 있고 언제나 가족같이 보살펴 주는 사장 내외가 곁에 있다. 공장 맞은 편 건물 5층에 마련해 준 숙소로 퇴근해서 중화방송을 보고 컴퓨터로 가족과 소식도 주고받는다. 명절이면 일감을 놓고 며칠이나마 휴식을 취한다. 고향에서 요리사로 일했던 류보리는 언제나 맛있는 중국 음식을 차려낸다.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외로움이다.“3년 만에 한국 돈 2000만 원 정도 벌었어요. 돌아가서 집 사고 땅 사고 할 정도는 안 되지만 그래도 나아졌어요. 월급을 통장에 모아두었다가 환율 변동에 따라 고향에 보내요. 아들은 이제 5살, 딸은 10살 되었어요. 4년 동안 두 번 고향 다녀왔어요. 돌 지나고 떠나온 아빠를 아들은 몰라봤어요. 안기려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딸은 아빠 많이 기다렸다며 반겼어요. 사진 보며 자란 모습 생각해요.”예전에 비해 외국인 선원들을 대하는 인식이나 환경은 한결 따뜻하다. 선주들이나 선원들 서로가 `살이`에 대한 힘겨움을 이해하고 기대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라 아직도 일부 선원들의 불명한 행방에 선주들이 곤혹을 치르는 일도 허다하다. 그 사연이야 가지가지겠지만 열악한 임금에 대한 불만과 일확천금에 대한 허상이 대부분일 것이다. 허탈하고 난감하지만 구석구석 숨어든 그들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불법 체류자로 떠돌다가 단속에 걸리면 강제추방을 당하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장위습과 류보리는 며칠 후 함께 휴가를 간다. 이번에는 스무날 남짓한 시간을 얻었다. 장위습의 어머니가 폐암 수술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장은 수술 과정을 지켜보고 오라며 넉넉한 시간을 주었다. 함께 떠나는 류보리 역시 장위습과 함께 돌아오라고 같은 시간을 허락했다. 장위습은 아내에게 줄 화장품을 사 두었고 류보리는 8살 딸에게 줄 과자와 사탕, 초콜릿을 모아 두었다. 어린 딸에게는 아빠가 한국에서 사온 선물을 자랑하며 한동안 보낼 즐거울 시간이겠다.“오늘 만두 만들어요. 밀가루, 부추, 만두 빚어요. 이모도 같이 먹을래요?” 마음은 벌써 고향에 가 있을 류보리가 씨익 웃으며 말한다. 모처럼 중국술도 한 병 곁들인 저녁상엔 손수 빚은 만두가 고향을 이야기 할 것이다. 어쩌면 사장님도 끼어 앉아 툭툭 어깨를 다독일지 모른다. 고무호스로 시원하게 물줄기 뿜으며 일터를 정리하는 그들의 등 너머로 발갛게 이국의 여름 노을이 진다.

2011-08-08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22> 이국의 바다에 꿈을 걸었다<1> / 포항 구룡포항 외국인 선원들

바다는 막막하고 꿈은 아득해애절한 망향가 목놓아 부르네 “나는 새우, 대게, 다 잡아요. 새우발이 타면 열흘에서 보름, 바다에 있어요. “독도도 가봤어요. 아주 예뻤지만 구경 못했어요.“일 열심히 해야 하기 때문에 많이 볼 수 없어요. 열여섯 시간 일해요.“나는 멀미 안했어요. 친구들은 멀미 했어요.“말 안 통할 때 힘들었어요. 착한 한국 사람 김성원이 많이 도와줬어요.“그렇지만 약속 안 지키고 돈 빌려 가면 안주는 그런 사람 조금 있어요.”내항에 정적이 감돈다. 태풍의 기운을 감지한 배들이 스크럼을 짜고 정박해 있다. 용왕대에 걸린 오색 깃발이 서서히 펄럭인다. 나무상자를 꿰매는 포장집도 입을 다물었고 그물을 손질하던 아낙들도 보이지 않는다. 족히 사나흘은 이렇게 숨죽인 채 바다가 잔잔해 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날들임을 포구는 알고 있다.저녁 무렵, 세왕식육식당 뒷방이 시끌시끌하다. 선주 내외가 회식을 열어주는 모양이다. 선주의 아내가 연신 구운 고기를 선원들 앞에 올려준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띄엄띄엄 한국말로 응대하는 사내 곁에는 저 둥그런 눈으로 고개만 끄덕이는 젊은이도 있다. 새내기 선원인가보다. 말 보다 눈짓, 몸짓이 더 크게 오가는 자리다. 소주잔이 서너 배 돌자 그을린 얼굴들이 발그레 물든다. 모처럼 비린 작업복을 벗고 바닷가 소읍의 저녁에 둘러앉은 사람들. 그들은 이국의 바다에 꿈을 건 외국인 선원들이다.2011년 6월 30일 기준으로 구룡포항내 외국인 선원은 총 227명에 달하며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등 국적 또한 다양하다. 그들의 임금은 월 90만 원에서 98만 원 정도. 노동부를 통해 들어 온 20톤 미만 선박의 선원 69명과 국토해양부를 통해 들어온 20톤 이상 선박 선원 158명이 비슷한 환경에서 일하지만 각자 다른 기관의 법을 적용 받다보니 다소 급여 차이가 있다. 비단 구룡포항 뿐만 아니라 국내 어선에 고용되는 선원중 외국인선원의 비율은 날이 갈수록 늘고 있다. 그로인해 어쩔 수없이 발생하는 제도적, 사회적 문제들도 빈번하지만 그 틈바구니에서 새록새록 희망이 피기도 한다.만성호를 타는 리학봉(35)과 대현호를 타는 마홍위(39)를 만난 것은 구룡포수협(수협장 연규식) 옥상에 지어진 외국인선원 전용 숙소에서였다. 이곳은 외국인 선원들의 주거 안정은 물론이고 어선 입, 출입 시 효율적인 고용관리를 위해 수룡포수협이 2년 전 마련한 곳이다. 연 면적 576㎡ 부지에 숙소 5동과 관리실, 휴게실, 식당 등 부대시설을 갖추었으며 현재 39명이 거주하고 있다. 배 조업상 들고 나는 시간이 불규칙하고 말이 잘 통하지 않아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우애를 쌓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공간이다. 게다가 조선족 민용빈씨가 숙소에 근무하며 소통의 상당부분을 해결해 주니 그 또한 기댈 언덕이다. 서글서글한 눈매가 인상적인 마홍위는 6살짜리 아들을, 우람한 덩치에 웃는 모습이 순박한 리학봉 역시 두 아들을 거느린 가장이었다. 숙소에 오기 전엔 그들도 선주가 마련해 준 셋방에서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 친구들과 함께 장을 보고 요리를 하며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 어쩔 수없는 고립의 시간을 지내야 했던 것에 비해 이곳은 몸과 마음이 편안한 공간인 셈이다. 육지보다 바다에 있는 날이 더 많지만 어쩌다 조업을 나가지 않을 때는 피시방에 들러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고 가끔 노래방에 가서 노래도 한다. 포구의 노래방에는 이제 중국 노래들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낯선 나라에서 목줄 세워가며 애타게 부르는 망향가는 얼마나 애절할 것인가.“나는 새우, 대게, 다 잡아요. 새우발이 타면 열흘에서 보름, 바다에 있어요. 독도도 가봤어요. 아주 예뻤지만 구경 못했어요. 일 열심히 해야 하기 때문에 많이 볼 수 없어요. 열여섯 시간 일해요. 나는 멀미 안했어요. 친구들은 멀미 했어요. 말 안 통할 때 힘들었어요. 착한 한국 사람 김성원이 많이 도와줬어요. 그렇지만 약속 안 지키고 돈 빌려 가면 안주는 그런 사람 조금 있어요.”마홍위의 고향은 바다도 있고 농사도 짓는 곳이었다. 어릴 적엔 산으로 들로 소를 몰고 다녔다. 개구쟁이 짓으로 어머니의 속을 썩이던 날도 많았다. 매를 맞고 쫓겨나 집에 못 들어간 적도 있다. 그 모든 게 사랑인 걸 후에 알았다. 청년이 되어 이런 저런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그렇게 모은 돈을 들여 한국으로 배를 타러 왔다. 어머니 이야기에 이르자 그만 눈물이 고인다. 이제 어머니는 세상에 안계시기 때문이다.“2010년 위독하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고향 달려갔어요. 그러나 어머니 휴가 끝날 때까지 돌아가시지 않았어요. 마음 놓았어요.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다시 일 할 때 어머니 돌아가셨어요. 슬펐어요. 우리 어머니 예뻤어요. 나를 사랑했어요. 내 손 잡아주고 얼굴 막 부벼 주었어요.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 두 눈 닮았어요.”3년간의 계약 기간을 마친 마홍위는 1년 10개월 더 연장을 했다. 그러나 2010년 12월에 들어 온 리학봉은 계약기간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집을 떠나 온지 1년남짓한 그에게는 10살 8살 두 아들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시시때때로 다녀간다. 얼른 돈을 벌어 옥수수와 밀농사를 짓는 아내에게로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가서 어릴 적 꿈이었던 가게를 내고 오순도순 살고 싶을 것이다. 그들은 급여를 모두 고향의 가족에게 보내고 간간이 생기는 돈으로 최소한의 생활을 한다. 고향의 식구들을 생각하면 사치란 없다. 아주 가끔 포항 시내에 나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여행 같은 건 꿈 꿀 수 없다. 이다음에 부자가 되면 그때 아내와 함께 꼭 한국 여행을 하고 싶다는 마홍위와 리학봉, 구룡포 바다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태풍이 비껴간 바다가 눈부신 햇살을 부려놓았다. 만성호도 대현호도 엔진소리 세우느라 분주하다. 부식을 담은 상자들과 가스통이 배달되고 커다란 수박도 두어 덩이 실었다. 담배 한 보루씩 받아 든 선원들이 익숙하게 제 자리를 찾는다. 저 배를 타고 나가 사나흘 밤낮 열심히 그물을 걷어 올리고 일렁이는 파도 위에 둘러앉아 밥을 먹을 것이다. 그들이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건 포기할 수 없는 꿈이다. 깊어가는 여름, 접시꽃이 발간 얼굴로 그들을 배웅하고 있다.계속

2011-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