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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가족의 의미

가족은 상처이자 위안이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가족에겐 오늘이 상처의 시간이었다면 내일은 위안 모드가 되곤 한다. 혼인과 핏줄로 맺어진 가족은 그 어떤 조직보다 허물없고 가깝다. 계산이 필요 없는 편안한 관계이다 보니 느슨하다 못해 함부로 대하기도 한다. 부부 끼리는 간섭을 하게 되고, 부모 자식 간에는 잔소리와 반항이 교차한다. 타인을 대할 때의 조심성과 긴장이 사라지니 상처는 필연적이다. 가족 간의 상처는 물론 타인과의 그것에 비하면 오래 가지는 않는다. 가족이 주는 위안이 상처보다 더 큰 보상을 주기 때문이다. 대개 아무리 친한 타자라도 가족만큼 큰 위안을 주지는 못한다. 한마디로 가족은 한 구성원을 들었다 놨다 하는 그리 나쁘지 않은 요물이다. 상처와 위안의 근원인 가족은 보듬어 함께 갈 동지이다. 따라서 가족은 사랑의 대상은 될지언정 존경의 대상은 되지 않는다. 연민이자 나를 비추는 거울인 가족을 존경한다고 말하면 어쩐지 썩 어울리지는 않는다. 덜 편한 사이라서 아직 그만큼의 거리감이 있다는 뜻으로 들리니.한 노부인이 인도 여행을 하고 싶어 했다. 여행사에서는 노구를 이끌고 인도까지 가는 건 무리라고 말렸다. 그래도 고집을 피워 여행길에 올랐다. 아스람에서 위대한 스승을 알현하려니 줄이 너무 길었다. 사흘이나 걸리는 그 시간을 부인은 기다리겠다고 했다. 드디어 성스러운 문 앞에 도달했다. 스승과는 세 마디 이상을 나눌 수는 없다고 했다. 노부인도 그러겠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스승 앞에 엎드리는 동안 노부인은 가장 성스러운 자에게 팔짱을 낀 채 말했다.“여보, 그만 집에 가자.”가족과 존경과는 생래적으로 궁합이 맞지 않다. 밖에서 카리스마 넘치고 근엄한 사람도 집안에 들어오면 인간적인 가족 구성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몽테뉴도 말하지 않았던가. 하인과 가족에게 존경 받는 주인은 거의 없다고. 가족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와 연민과 사랑의 대상이어야 온당하다. 가족에게 존경을 바라는 건 어리석거나 우둔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3-21

무지를 자각하기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는 역사 이래 인간의 영원한 숙제였다. 지금 하는 고민을 그 옛날에도 했고, 그 옛날의 고뇌가 지금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인간의 철학적 사유는 시간과는 무관한 영원 테제이다. 사람이라면 옳은 삶에 대해 나름 끊임없이 고뇌한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정으로 알지 못하면서도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게 문제였다. 그는 당시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신탁까지 받은 입장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결코 지혜 자체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가 자각한 건 오직 자신이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 하나였다. 다른 이들보다 그가 지혜롭다는 신탁의 의미를 그는 이렇게 해석했다. 자신이 뛰어난 게 아니라, 자신의 무지함을 알고 있다는 것에서 뛰어나다는 것을 깨달은 면에서 지혜로운 것이라고.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쉬우면서도 어렵다. 소크라테스의 전언대로라면`이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음. 옳다고 생각하는 그것조차 내 무지에서 온 것임.` 이런 자세야말로 지혜로운 방법이다. 쉬워 보이지만 그 실천은 얼마나 어려운가. 삶의 진정한 가치는 시험을 통해서 완성된다. 상처를 주고받아봐야 상처의 속성을 이해하게 되고, 많이 아파본 자라야 아픔의 실체를 제대로 증언할 수 있다. 그렇게 축적된 다양한 경험치는 각자의 철학적 바탕이 된다.무지의 자각이 깨우는 종소리에 당황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 소리가 꼭 크게 울리는 것도 아니다. 하룻밤 새 붉은 꽃잎을 터뜨리는 명자나무의 숨소리일 때도 있고, 내 큰 목소리 앞을 끊는 누군가의 잔잔한 충고의 미소일 때도 있다. 다 갖춰 완벽한 것들은 그저 피어나고 나지막이 속삭일 뿐이다. 호들갑스럽지 않아도 그 향기, 그 목소리에 주변은 귀 기울인다. 현상적 욕망이 아니라 오직 본질에 다가가고자 했던 소크라테스의 성찰 앞에서 당황스럽기만 한 봄날이다. 빈 수레 끈다고 곳간에 쌀가마 쌓이지 않는다. 매 순간 무지를 자각하는 마음 심지만은 놓지 말아야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3-20

천성대로

급히 먹는 밥에 체한다. 내가 그 짝이다. 뭐든지 서두른다. 신중하게 이것저것 알아보거나 차분하게 요모조모 생각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게으르면 느긋하기라도 할 것이지, 게으른데다 급하기만 하니 일상생활에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 뒷일을 생각지 않은 채 일단 저질러놓고 수습을 못해 허둥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내 최대의 약점이다. 누군가 친구의 메일 주소를 물어왔다. 그 누군가도 친구를 잘 아는 터라 별 생각 없이 친구의 메일 주소를 가르쳐줬다. 하지만 친구에게 그 누군가가 불편한 메시지를 보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당연히 일차적 책임은 메일 주소를 가르쳐준 내게 있다. 한 번만 돌려 생각하면 답이 나오지 않는가. 누군가는 친구의 전화번호를 아니까 직접 메일 주소를 물어 볼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의심하는 여유만 가졌어도 타인의 메일 주소를 함부로 가르쳐주는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떻게든 알게 되었으리라는 문제는 부차적이다. 그런 변명은 그야말로 자기 위안용에 지나지 않는다.위의 예처럼 급하다 보니 실수를 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느긋한 사람들이 부러운 것도 아니다. 이게 더 스스로를 화나게 한다. 느긋하거나 여유 있는 모습을 보면 본받고 싶은 게 아니라 답답하다는 생각이 먼저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지. 아마 급한 성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급한 성격의 특징은 약속을 잘 지키는데다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한다. 게다가 추진력도 있다. 하지만 이런 장점도 급해서 낭패를 부르는 경우 앞에서는 자랑거리조차 못 된다. 역지사지하면 느긋하거나 차분한 사람들은 급한 사람들이 얼마나 성가시게 보일 것인가.물론 급하거나 느긋하거나는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각자 장단점이 있다. 다만 내 가진 약점이 도드라진 순간에는 그 성정이 맘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다. 급한 그 특징조차 제 정체성의 한 일면이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성정이라면 달래가며 인정하는 수밖에./김살로메(소설가)

2014-03-19

획일성과 다양성

그 많던 어린 천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예술계나 수학계 등 특수 분야에서 우리나라만큼 그 재기를 일찍 드러내는 아이들도 없다. 전문가들이 놀랄 정도로 우리에겐 미국이나 유럽 아이들에 비해 한 분야에 재능을 떨치는 아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 재능이 언제까지나 보장되지 않는다는 게 우리 현실이기도 하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언젠가 한 칼럼에서 첼리스트 양성원이 한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이들이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의식의 기저에 깔려 있던 동양적인 가치 기준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는 게 그의 의견이다. 뿌리 깊은 유교 문화는 조직 문화를 낳고, 조직은 위계질서를 중요시하고 그 질서는 개인의 튀는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다. 겸손과 절제가 미덕으로 칭송 받는다. 자신도 모르게 이런 문화적 습성은 재능 있는 아이들의 DNA 속으로도 침투된다. 치열한 자기 확신을 가지는 것에 앞서 획일화된 사고가 먼저 머릿속에 주입된다. 될 성 부른 떡잎에 햇빛 보다 그늘이 먼저 와서 가려버린다. 어느 순간 그늘이 햇빛인 줄 알고 받아들이게 된다.좋은 예로 중학교만 들어가도 교칙이란 것에 지배를 받는다. 교칙을 위반하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나아가 사회나 국가에도 방해가 된다고 배운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그 교칙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은 온갖`하지마라`투성이로 가득하다. 그 내용은 실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수준이 아니라 통제해야 하는 입장에서 저 편하고자 획일화를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와 군사 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윗선에서 편리하기만 한 그런 관습과 규범이 규칙이나 도덕이 되었을 뿐인데, 길들여지다 보니 반박하는 것조차 잘못이라고 생각하게 된다.획일화를 따르는 건 모범적인 것이요, 다양화를 시도하는 건 죄악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하는 조직 문화야말로 개별자의 자긍심을 숨죽게 한다. 그 많던 어린 천재들이 획일성의 그늘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제 개성과 재능을 포기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3-18

대통령의 글쓰기

“짧고 간결하게 쓰게. 군더더기야말로 최대 적이네.” “평소에 사용하는 말을 쓰는 것이 좋네. 영토보다는 땅, 식사보다는 밥, 치하보다는 칭찬이 낫지 않을까?” “단 한 줄로 표현할 수 있는 주제가 생각나지 않으면, 그 글은 써서는 안 되네.” 청와대 연설비서관을 지낸 강원국씨가 전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글쓰기에 관한 생각이다. 글쓰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다 들어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진지하고도 담백한 시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선하게 다가온다. 강원국씨가 펴낸 `대통령의 글쓰기`(메디치미디어)에는 자신이 모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글쓰기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후일담 형식으로 나온다. 두 대통령 다 글쓰기와 연설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연설문을 단순히 권위나 통치 수단의 도구로 쓴 대통령들도 있었다. 그들은 결과에 치중하는 문구에 신경을 썼다. 반면, 소통과 대화의 장으로 연설문을 활용하려는 대통령들은 결과 못지않게 그 과정도 문구에 넣는 것을 중요시했다.그동안의 편견으로는 굵직한 틀만 대통령이 이야기하면 글 자체는 연설비서관들이 알아서 쓰는 줄 알았다. 연설문의 섬세한 부분에 있어서는 대통령이 일일이 관여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때부터 우리는 딱딱하고 권위적인 연설문에 길들여져 왔다. 그러다 보니 판에 박힌 문체나 문구에 그러려니 하고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대통령에 따라 연설문에 나오는 한 문구를 두고 얼마나 진지한 고민을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연설문은 분명한 메시지 전달력이 있어야 한다. 국민을 향한 대통령의 전언이라면 말해 무엇하랴. 이러한 글의 전달력과 소중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두 대통령의 글에 대한 소신과 자신만의 표현 방식에 눈길이 간다. `인사 청탁하면 패가망신한다.`는 다소 직설적인 노무현 대통령의 어법이나 `햇볕정책`이란 김대중 대통령의 말도 그런 고민 끝에 나왔다는 것도 흥미롭다. 통치력과는 상관없이 글의 의미를 귀히 여긴 대통령들이 있었다는 것 자체에 관심이 간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3-17

사소한 것의 역사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는 거창한 것들뿐이다. 인류의 탄생에서부터 각종 전쟁사와 왕조의 흐름에 이르기까지 굵직굵직한 것들을 연대순으로 공부해왔다. 그나마 그런 역사는 객관적이지 않고, 서술자의 시각이나 신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역사란 한 마디로 특정집단의 눈으로 바라본 일정 부분의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 승자의 산물인 역사는 운명적으로 쓰는 자의 시각과 이데올로기가 투사될 수밖에 없다. 모든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한다는 것은 지나온 세월만큼의 긴 시간이 필요하다. `아전인수 격 부분적 기록`이 역사가 될 수밖에 없는 건 인류가 감당해야 할 필연적 아이러니다. 기왕 역사가 백퍼센트 진실을 담을 수 없을 바에야 거시적인 것만 다루지 말고 미시적인 것에도 눈을 돌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학문적으로는 미시적 일상의 역사에 대해서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역사 교과서에도 `하찮은 것들, 혹은 시시콜콜한 것의 역사`에 대해서도 언급을 해보자는 것이다. 왕조 연대기나 전쟁사가 역사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역사 속 필부필부의 삶을 통해 간접 체험해 보자는 것이다.유럽이나 미국 역사 교과서에는 이런 사소한 일상의 역사가 많이 나오는 편이란다. 며느리를 얻기 위해 집안의 재정 상태를 까발리며 고군분투하는 가장의 편지, 대중음악의 뿌리를 찾아 가는 음악적 여정, 담배나 스타킹의 기원 등 일견 하찮아 보이는 것들에 대한 것들도 역사적 시야 안으로 적극 끌어들인다. 한 유럽 교과서는 아예 비역사적 인물에 대한 장이 따로 있을 정도이다. `이들은 집을 짓고 사랑하며 가족을 부양했지만 나폴레옹처럼 커다란 발자취는 남기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이들에 의해 세월은 흘러왔고, 그들의 삶에 의해 역사의 기반은 다져왔다.`평범하고 하찮은 것들, 기록되지 않는 그것들이 역사가 아닌 것은 아니다. 위의 인용문 말대로 역사의 기반을 그들이 다져왔다는 것은 역사적 진실이다. 그것만으로도 서민의 일상은 그 어떤 역사보다 역사적 힘을 갖는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3-14

희한한 계산법

집안에 뭔가를 설치할 일이 생겼다. 기본 약정 계약이 2년인데 3년으로 계약하면 3개월 치 사용료는 받지 않겠단다. 거기다 한 달 치 사용료를 상담자 자신이 추가로 부담하겠단다. 4개월이나 공짜로 사용할 수 있다고 홍보했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다. 뒤이어 온 설치 기사의 말에 의하면 한 달 치를 부담한다는 것은 그 마지막 날짜에 사용한 하루 분의 요금인 천 원을 부담한다는 의미이고, 마지막 날짜에 계약을 했으니 상담자로선 실적까지 올리게 됐으니 이득을 챙긴 거란다. 겉으로 보기엔 그럴 듯한 말 같아 보이지만 따지고 들면 헛말인 게 어디 한 둘인가. 함익병 피부과 원장의 월간조선과의 인터뷰가 도마에 올랐다. 내용을 훑어보니 `양질의 독재자가 국정을 운영하는 건 나쁘지 않다, 안철수는 과대망상증 혹은 거짓말쟁이다, 4대 의무를 지키지 않는 국민은 투표권조차 호사다.` 이런 취지의 발언이다. 실제 발언은 저런 수위 이상이다. 특히 `여자는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지지 않았으니 권리는 4분의 3만 행사해야 한다`며 `권리만 누린다면 도둑놈 심보`라는 말에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식 두 명 낳은 여자는 예외이며 계산을 철저히 할 필요가 있다`고 선심까지 쓰는 척한다.함익병 식 주장대로라면 4분의 3만의 권리를 행사해야 하는, 뜨끔한 심정인 쪽은 여성이 아니라 다른 쪽일 것이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그 많은 지도자급 인사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어떤 희한한 계산법이 그로 하여금 `자녀 수`와 `군대 가는 것`을 단순 동급으로 비교하게 만든 걸까.여성에게 국방의 의무란 꼭 군대를 가는 것만 의미하는 건 아니다. 함익병 식 사고 대로라면 군대 안 간 여성과 아이 두 명 낳지 않은 여성은 모두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다. 어찌 그들이 사리사욕 때문에 군대를 회피한 정치 사회 지도자급들과 같은 급으로 취급되어야 하나? 4분의 3만 권리 행사해야 하는 무리들에 대한 타깃을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았다. 계산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3-13

함부로 낙관하지 않기

긍정하는 자세는 바람직하다. 하지만 인생을 지나치게 낙관하는 것도 정신 건강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근거 없는 낙관주의는 때에 따라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온다는 게 연구자들의 이론이다. 잘 될 거야, 내일은 나아질 거야, 막연히 이런 희망을 품는다고 그것이 현실이 되지는 않는다. 약속된 희망의 날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제 실체를 드러내주지 않는다. 낙관한 사람은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절망하게 되고, 심할 경우 죽음까지 생각하게 된다. 반면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일 경우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것을 헤쳐 나갈 수 있다. 스톡데일은 베트남전쟁 때 하노이의 한 포로수용소에 갇혔던 미군 최고위 장교였다. 1965년부터 8년간이나 수용소 생활을 했다. 다른 수용자들이 크리스마스에는 풀려 날 거야, 부활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섣부른 희망에 부풀어 있을 때 그는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했다. 부당함 앞에서 정면 대응을 택하는 한편 앞날을 대비했다. 신념을 잃지 않고 의지로 버텨냈다. 그는 끝내 살아서 돌아왔다. 영웅이 된 그의 전언은 이랬다. `가혹한 현실을 회피한 채 낙관주의로 일관한 사람은 상실감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다`고.역경에 처했을 때 그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의지로 버티면 살아남을 수 있고, 조만간 일이 잘 풀릴 거라고 낙관하면 무너지기 쉽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스톡데일 패러독스`이다.도처에서 이런 현상을 만날 수 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아무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 불러도 혜택 받지 못하는 많은 약자들은 넘쳐 나고, 당신 꿈은 이뤄질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아무리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도 현실적인 답은 `희망 없음`일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런 상황에 놓인 약자들이 섣부른 낙관주의에 현혹되면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낙관주의의 뒤안길은 다름 아닌 상실감이기 때문이다. 함부로 낙관주의를 전파하는 것보다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하는 편이 훨씬 현명한 조언일 때도 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3-12

모든 것의 빌미 2

`자기가 감정적으로 그렇게 격하게 반응했던 이유가 상대가 가한 상해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예민한 기질도 그에 한몫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해결책을 스스로에게서 찾아볼 기회를 내담자가 갖게 되는 것.` - 독서 치료 교재 중에 비교적 널리 쓰이는 `따귀 맞은 영혼`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밑줄을 그어 놓은 지 몇 년이나 지났다. 그래도 필요할 때마다 자주 들여다보는 대목이다. 신혼이었던 어느 날, 놀러 온 남편 친구들 중에 한 분이 짓궂은 말장난을 친 적이 있었다. 그때 내 표정은 관리가 되지 않았다. 거의 거의 울음보를 터뜨리기 직전까지 갔다. 어떤 내용인지 기억조차 없지만, 세상에 대한 내공이 아직 쌓이지 않은 순수한(?) 때라 뭐든 곧이곧대로 믿던 시절이었다. `시침 뚝 떼고 미끼를 던졌는데 덥석 물어줘서 재밌었다.`며 그 친구분은 그야말로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누군가 던진 미끼를 보고 미낀 줄도 모르고 고군분투하거나 부화뇌동하는 것보다 우스운 꼴은 없었다.그때의 교훈으로 될 수 있으면 미끼는 물지 말아야지, 혹 물더라도 의연하게 대처하지 흥분은 하지 말아야지, 하고 자기체면을 걸곤 했다. 하지만 눈치 없기로는 일등이고, 흥분 잘하기로는 이등인 나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여전히 잘 넘어지고 잘 깨진다. 부끄럽고 한심하다. 그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가관이다. 미끼를 던진 상대가 가해자라라는 생각 때문에 한동안은 분해서 심장이 벌렁거린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일은 결국 자신에게 귀결되지 않던가.백 번 양보해 미끼를 던진 상대에게 일차적 잘못이 있다손 치더라도, 배르델 바르데츠기 여사의 저 가르침은 언제나 옳다. `자신의 예민한 기질도 그에 한몫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다. 미끼 던지는 대상과 마주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겠지만, 삶이 어디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기나 하던가. 피할 수 없는 함정에 빠져 흥분하게 되거들랑 자신의 예민한 기질이 그것을 자초했거늘 하고 다독일 밖에./김살로메(소설가)

2014-03-11

저마다 구차한 꽃잎

꽃들이 핀다. 꽃들이 진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빤스를 내렸다 올리는 그 새`를 기다려 주지 않고 변소 옆 봄꽃은 피어난다. 아쉬울 새도 없이 다른 한쪽에선 벌써 꽃잎이 진다. 일찍 핀 것도 억울한데 신발코에 묻은 마른 흙 한 번 쳐다보는 새 봄꽃은 진다. 둘 다 순간이요, 찰나의 시간이다. 차이점이라면 꽃 열리는 순간을 기다린 적은 많아도 꽃 떨어지는 순간을 기대한 적은 거의 없다는 거다. 아니, 아무도 그 순간은 기다리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일상은 구차하다. 필연적으로 구차함은 수치와 모멸이란 똥을 낳는다. 온몸은 화끈거리고 심장은 조여 온다. 그때야 돌아보게 되는 꽃잎의 시간들. 저 꽃들은 어디로 갈까? 순간순간 피고 지는 수많은 꽃잎들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저 먼 하늘로 올라 반짝이는 한 별이 될까? 더 먼 우주로 날아올라 한 무리의 은하별을 이끄는 수장별이 될까?다 부질없는 짓이다. 각자의 꽃들은 홀로 우뚝 선 별도 되지 않으며, 은하수를 이끄는 으뜸별도 되지 않는다. 한낱 먼지가 되어 사라질 뿐. 설사 사라진 그 먼지가 우주를 떠돌아 별이 되고 다시 몇 영겁을 거쳐 꽃으로 되돌아온다 해도 그것의 실체는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는 것.`잡다한 것들이 가득 들어찬 속을, 손을 넣어 하나하나 끄집어냈다. 쓰다 만 볼펜들, 커터칼, 연필, 캡슐에 든 알약들, 건전지, 명함, 압핀과 클립이 들어 있는 상자, 메모첩 등등이었다.` 서영은의 자전적 소설 `꽃들은 어디로 갔나`를 읽으면 인간이야말로 얼마나 하잘 것 없고 던적스러운 존재인가를 확인하게 된다. 우리 삶은 볼펜이고, 커터칼이고, 연필이고, 캡슐알약이며, 건전지며, 압핀이며 클립이다. 그 잡다한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사랑이며, 그 모멸을 견디는 것도 사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모두는 수영복 입은 미스 모스크바 사진을 욕망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것은 명예와 지식과는 상관없고, 드러난 덕망과도 무관하다. 저마다의 꽃들은 저 먼 우주 속으로 가 별이 되지 않는다. 한 점 먼지가 될 뿐./김살로메(소설가)

2014-03-10

승자도 패자도 아닌 우리

한 남자가 있었다. 그에게는 세 명의 불알친구도 있었다. 그 중 전학생이었던 한 친구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모범적이고, 지적인데다, 자기 세계관이 분명했다. 하루아침에 그는 친구들을 사로잡았다. 남자를 비롯한 세 명은 속으로 자신만이 이 친구와 더 친하다고 생각했다.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이 있었듯 남자를 비롯한 그들에겐 이 친구가 있었다. 고등학교를 마친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남자는 한 여자를 사랑했다. 그 여자도 남자를 사랑했는지 남자는 확신할 수 없었다. 모호한 태도에 질려 헤어지게 되었다. 얼마 뒤 데미안 같은 친구가 그 여자와 사귄다고 편지로 알려왔다. 그래도 되냐는 친구의 자문에 남자는 자신에겐 지난 일이니 괜찮다고, 대신 조심하는 게 좋겠다는 선에서 답을 보냈다. 얼마 뒤 친구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친구의 사연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사십 년 세월이 흘렀다. 남자는 여자에게서 편지 한 통을 건네받는다. 젊은 시절 친구와 여자가 사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이 친구에게 보냈던 편지였다. 남자가 기억하는 내용은 위에서 말한 `사귀어도 상관없고, 조심만 하면 될 것`이라는 정도의 상식적이고 건전한 수위였다. 하지만 편지를 읽은 남자는 충격에 휩싸였다. 잊었던 진실을 마주하게 되고 운명적인 사건들은 이어진다. 편지 내용은 스포일러가 되니 말하지 않겠다. 다만, 이 편지 하나로 다음과 같은 통찰에 이르게 된다는 건 말하련다.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믿을 게 못 되며, 조작될 수 있는지를.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부분적이고 조각난 것인지를. 환경적 심리적 요인에 시간이 더해지면서 그 기억이 얼마나 다양하게 변주되는지를. 그런 사실과 편지 내용은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에 나온다. 작가 줄리언 반즈가 안내하는 명제는 이렇다. `역사란 불확실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접점에서 이루어지는 확신`이라고. 승자도 패자도 아닌 찌질한 주인공 남자 그가 바로 우리 개인 역사를 이루는 자화상임을 환기시킨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3-07

당연하지 않을 이유

살면서 핏대 올릴 일은 참으로 많다. 그럴 경우 기질에 따라 제때 발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귀찮거나 소심해서 그냥 묻어두는 사람도 많다. 삿대질과 고함으로 자신을 어필하는 사람은 자기 생각과 세상은 한몸처럼 같은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핏대 올리지 않는 사람이 그 반대인가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들 역시 세상 이치에 내 생각은 부합하다고 생각한다. 표현 방법만 다를 뿐, 각자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라는 명제로 자기 굴레를 씌운다. 가령 이런 의문은 어떨까. 어째서 아프리카가 유라시아에 비해 발전이 늦었을까? 다른 모든 이유는 뒤로 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서양 사람들에 비해 그들이 인종적으로 차이가 있어서 그렇다는 확답을 준비해 놓는다. 너무 자명한 답이라서 이런 의문조차 지닐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재래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라는 보고서의 마지막 장에 보면 진실한 답이 나온다.역사적으로 결코 출발이 늦지 않았던 아프리카가 뒤처진 이유는 식량 생산 구조에 있다고 보았다. 가금의 부족현상과 작물화 할 수 있는 식물의 부족을 그 첫 번째 이유로 꼽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야생동물 천국이며 정글의 왕국인 아프리카에 제대로 된 가축과 작물식물이 들어온 것은 다른 두 대륙에 비해 수천 년이 지난 뒤였다. 또 다른 원인은 면적이 유라시아 대륙에 비해 절반인데다 대륙의 주요 축도 유라시아와는 반대로 남북방향이라는 점이다. 남북 축을 따라 움직이면 생식, 강우량, 질병, 문명 전파 등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단다.유럽이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던 건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의 차이점 때문이 아닌 건 자명해졌다. 그건 인종 차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망상일 뿐이다.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의 궤적이 달라진 건 지리적, 환경적 우연성의 차이에 있는 것이지 인종 자체와는 별 상관이 없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발견할 때의 이 숙연함이란. 작은 것에서부터 열리고 깨쳐 있으려고 노력해도 어렵기만 한 삶이라니./김살로메(소설가)

2014-03-06

봄 마중

무람없이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복 받은 일이다. 새 학기다. 강좌마다 손봐야 할 계획서와 강의록은 저만치 밀려 있고, 마감을 지켜야 할 개인적 원고도 쌓였다. 거기다 매일 1천 자의 생활칼럼까지 넘겨야 하니 조금씩 부담이 몰려온다. 여유 있을 때 너무 놀았다. 막판에 가서야 몰아붙이는 나쁜 습관을 원망하고, 천성적으로 게으른 성정까지 탓해보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다. 긍정의 믿음으로 헤쳐 나갈 수밖에. 이럴수록 힐링이 필요해. 마침 친구들과의 약속도 있겠다. 가벼운 맘으로 집을 나선다. 미세먼지가 사라진 하늘빛은 맑고 선명하다. 가장 깨끗한 선녀탕의 물빛을 밤마다 선녀들이 하늘로 퍼 나른 듯 투명하고 시리다. 만개한 꽃잎만큼 번져오는 백매향과 홍매향에 저마다의 낯빛이 환해지고, 봄 마중에 달뜬 마음들 금세 터질 것 같은 녹매 봉오리에 가서 달렸다. 납작하게 대지에 밀착한 봄냉이는 제 넓은 치마폭으로 덜 풀린 땅의 기운을 북돋운다. 기어이 봄이 오고 있었다.목까지 차올랐던 조급함도, 엉덩이까지 내려갔던 의기소침도, 순응하지만 거리낄 것 없는 자연 앞에서는 별 것 아닌 게 돼버린다. 머리 맑아지고 가슴 트이는 건 숨길 필요조차 없는 서로의 표정에서 드러난다. 따스한 분위기가 꺼질세라 예정에 없던 한 집을 방문한다. 버선발로 맞는 그미는 금세 인정 바이러스로 우리를 감염시킨다. 온몸과 마음으로 봄의 생기를 전해준다.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의 주인이 되고 어리석은 자는 마음의 노예가 된다고 했다. 잠깐의 봄나들이로, 아니 친구들 덕에 마음의 노예에서 주인으로 거듭난 느낌이다. 기대는 자에게 자연은 가깝고, 많은 짐도 정(情) 앞에서는 가볍다. 정은 낭비할수록 마음 부자가 된다는 걸 알겠다. 오래 만났다고 돈독하고, 오늘 봤다고 얕은 맘이 되는 건 아니다. 여러 발걸음이 한 마음으로 되는 건 소위 마음 밭이 통하기 때문이다. 맘 아끼지 않고 멈칫거리지 않은 채 누군가와 길 나설 수 있다는 것, 그거야말로 이른 봄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3-05

고전으로 하는 자기계발

개인적으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 책 분야 중의 하나가 자기계발서에 관한 것들이다. 많이 접하지도 않았지만 잘 나간다는 계발서의 대부분의 내용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자기 확신을 가지고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길이 열린다. 이런 주장의 동어반복이다. 그런 것이 자기계발이라면 성경이나 도덕 교과서만으로도 충분하다. 진정한 자기계발은 내면의 성찰 없이는 불가능하다. 물론 자기계발서라고 다 내 취향에 맞지 않는 건 아니다. 최근에 출간된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이라면 충분히 독자들의 공감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엄밀히 자기계발서라고는 할 수 없다. 구본형 저자에게 바치는 존경의 의미로 내가 그렇게 의미부여를 했을 뿐이다. 우리나라 자기계발서 계의 초기 멤버였던 선생은 성공만이 전부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자기기계발서는 크게 성공 지향적인 삶을 안내하거나 자기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구본형은 후자에 속한다. 무조건적인 성공만을 안내하는 게 아니라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혁신에 이를 것을 주문한다. 고전 안내서인 이 책을 굳이 자기계발서의 의미로 읽으려는 것은 이런 저자의 생각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나를 잃지 않고 내 가치를 찾아나서는 일 그것이 곧 자기계발의 기초이고, 그런 마인드로 고전 읽기를 꾸준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자기 혁신에 이르게 될 것이다.급작스런 발병으로 돌아가신 뒤 고인이 관여하던 연구소 연구원들에 의해 재구성된 이 책은 구본형식 고전읽기로 불릴 만하다. `다산문선`을 지나 `그리스인 조르바`를 거쳐 `안티고네`에 이르기까지 오롯이 고전에 몰두해 자신에게 이르고자 했던 저자의 숨결이 느껴진다. `고전의 창은 불완전한 인간을 찔러 깊은 상처를 입히고, 사랑의 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고전은 나를 바꾸는 지독한 유혹이자 삶에 기쁨을 쏟아주는 위대한 이야기다.` 아직 이런 단계까지는 생각도 못하지만 이 책을 통해 고전이 주는 매혹에 깊이 찔려 조금씩 나에게 이르고 싶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3-04

이웃이 사라진 자리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가장 반갑게 알은 체를 하는 사람은? 외판원이나 전도하는 사람이란다. 개인적으로 덧붙이자면 그 다음이 어린이들 쯤이 될 것이다. 한 엘리베이터를 쓰는 주민 수가 많은 고층 아파트에 산다면 이 말을 실감하게 된다. 특히 아이들이 다 커버린 중년 이후라면 새 이웃과 알고 지내는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나부터 이웃에 누가 사는지,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취미를 가졌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아이가 어리다면 그나마 같은 어린이집을 보낸다, 학습 정보를 공유한다는 등의 이유로 이웃과 알고 지낼 명분이라도 생기지만, 아이들마저 다 커버렸으니 그런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흔히 보는 풍경. 마지못해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잠시, 대개 스마트폰을 꺼내 애꿎은 화면만 터치하고 또 터치한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무에 그리 급하게 검색할 정보가 있을 것이며, 무슨 그리 다급하게 확인해야 할 메시지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나부터 그런다. 그 짧은 시간, 어색함을 감추기에는 스마트폰만큼 안전한 방어막도 없다. 그나마 아이들을 만나면 맘이 많이 누그러진다. 어른 이웃을 만났을 때의 어색함을 보상이라도 받듯이 아이들에게 말을 건넨다. 의외로 아이들은 성가셔하지 않고 이것저것 화답을 해준다. 소통의 부재나 현대인의 고립감이 뭔지를 모를 아이들의 천진성이 부러운 순간이다.농경사회의 집은 원래 정착이 그 주된 목표였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현대 도시인들 대부분은 정주민이 아니라 유목민에 가깝다. 처한 입장이 다양한 만큼 이곳저곳을 떠다니며 산다. 이웃을 사귈 시간도 의지도 생기지 않는다. 대신 인터넷의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를 기웃거리거나 현실적 도움이 되는 모임들을 찾아 나선다. 이웃 없는 사회가 가능한 시대가 오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이웃 없어도 불행한 줄 모르는 도시인들은 이 순간에도 옆집 안부 대신 스마트폰의 안녕부터 점검한다. 실체 없는 기기 앞에서 허허실실 혼자만의 웃음을 짓는다. 그 많던 이웃은 이제 스마트폰 안에 산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3-03

집단으로 길들이기

모 은행 신입사원 연수 관련 동영상이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삼백여 명의 신입 행원들이 멀쩡한 양복의 상하의를 걷어 부친 채 말 타기 자세를 취한다. 군대에서 집단 얼차려를 할 때나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드레스셔츠 등짝엔 물을 퍼부은 듯 땀이 흥건하다. 흐트러진 자세가 될라 치면 교관의 질타는 이어진다. 여자라고 봐주는 것도 없다. 견디다 못한 몇몇은 구토를 하거나 탈진한 채 쓰러진다. 삼 년이나 지난 화면이라지만 여전히 그런 식의 신입사원 연수를 하는 곳은 많다. 슬픈 현실이다. 혹자는 이런 극기 훈련을 통해 애사심을 기르고 동료애를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우리가 얼마나 집단 우선주의 또는 맹목적 국가주의에 길들여져 왔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기업도 국가의 축소된 형태이다. 작든 크든 집단의 안녕과 이익 앞에서는 개별자의 개성과 존재 이유는 묻혀도 좋다고 우리는 배워왔다. 잦은 이민족의 침입이라는 상황 속에 국가나 집단 이데올로기의 소중함에 자주 노출되었고 그것이 자연스레 체화된 면도 없지 않다.하지만 국가나 민족의 본래적 목적은 개인의 주체성을 깡그리 무시하는 무소불위의 그 무엇은 아니었다. 애초에 개인의 주체성을 보호하고 확대하기 위해 집단과 국가가 생겨났다. 하지만 거꾸로 되어 오늘날 도덕 교육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강조한다. 맹목적인 감성적 국가주의에 호소해 개인의 희생정신을 은근 조장하기까지 한다. 이런 생각들이 기업 정신에 고스란히 연결되면 위의 신입사원 연수 모습 같은 부조리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국가가 개인을 통제하는 것이 당연하듯, 기업 또한 개인을 소모품으로 취급해도 저항 없이 견디라고 주입한다. 애사심이나 동료애라는 명분을 내걸어 개인적 모욕쯤이야 별 것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린다.개인을 억압하고 길들여서 도산 안창호의 주인정신을 주입하면 뭘 하나? 지치고 무력화된 상황 앞에서 창의력과 자유의지는 저만치 달아나고 마는데. 자발성이 배제된 모든 통제는 모욕감과 회의감을 낳을 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2-28

자유에 대한 단상

이진경의 `삶을 위한 철학수업`(2013)은 `문학동네` 카페에 연재한 것을 엮은 책이다. 자유에 관한 사유 모음집인데, 책으로 다시 만나니 새롭기만 하다. 삶, 만남, 능력 등의 키워드는 독자로 하여금 자유의 여러 지표에 대해 성찰케 하도록 이끌어준다. 일상에서 만나는 고통과 환희, 타자와의 교류에서 생기는 필연적 사유의 파편들, 자아라는 기둥으로 버티는 능력의 환상 등이 얼마나 우리를 억압하는가. 하지만 자유를 원하면 원할수록 그것은 우리를 쉬이 놓아주지 않는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실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눈이 원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좋은 환경, 나은 학벌, 괜찮은 위상 등등에 대한 욕망은 어쩌면 사회가 규정한 욕망이다. 그 욕망을 욕망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자유를 갈망한다. 욕망이 다다를 수 없는 지점에 자유가 있다. 따라서 자유란 욕망들을 욕망하기 위한 방어 과정에서 생긴 또 하나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밑줄 긋기 할 부분도 많았는데, 특히 자존심과 자긍심에 관한 개념 구분은 한 눈에 들어왔다. `자존심은 남들에게서 자신에 대한 존중을 얻으려는 마음이다. 남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작동하는 것이다. …. 반면 자긍심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긍지의 표현이다. 그것은 남이 아닌 자신의 척도로 스스로를 비춘다. 남의 인정을 구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확신하는 것,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에 비추어 자신이 잘했는지, 잘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이를 테면 자존심은 약한 자들이 자신의 약함을 가리기 위한 방어기제고, 자긍심은 강한 자들의 자기 긍정의 내면 표식이라 할 수 있다. 전자가 타자를 향한 것이라면, 후자는 자기를 향한다. 자존심과 자긍심을 구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유에 대한 개념에 한 발자국 더 나아간 기분이다. 자유도 결국 내 안에서 생성되고 소멸된다. 따라서 모든 감정이나 의지들이 스스로를 향할 때 자유에 한결 가까워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2-27

참지 않아도 좋아

심야 토크쇼 중에 연애사를 소재로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청춘남녀들이 자신의 연애담을 상담하면 패널들이 조언을 해주는 형식이다. 수위가 높아 공중파 방송이라면 전파를 탈 수 없는 비교적 진솔하고 개방적인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요즘 젊은이들의 연애관을 볼 수 있는데다 패널들의 직설적이고 현실적인 입담도 눈여겨볼만하다. 그렇다고 거기에 나오는 모든 말들이 새겨들을 만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한 상담자가 나왔다. 미인을 보고 한 눈에 반했단다. 꼭 사귀고 싶었으나 경쟁자가 많았다. 그럴수록 지극정성을 다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고, 드디어 여자랑 사귀게 되었다.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여자의 성격은 안하무인격이었다. 많은 걸 남자에게 요구했고 명령조로 말했다. 사소한 것도 의존하고 별 것 아니 것에도 참견했다. 한 마디로 자신을 종 부리듯 한다는 게 남자 상담의 요지였다.그 상황에서 패널들의 조언이 내겐 충격적이었다. 그 정도도 견딜 수 없으면서 미인을 차지하려 했느냐는 힐난조였기 때문이다. 예쁘면 모든 게 용서가 된다는 자학적인 마인드에서 나온 조언은 건강한 건 못 된다. 거꾸로 생각해서 어떤 매혹적인 남성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남자의 매력에 빠져 매달리다시피 해서 여자가 사귀게 되었다 치자. 우위에 있는 남자는 그 여자를 종 부리듯 해도 되는 것일까. 일방적인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은 언젠가는 한계치를 만나게 되어 있다. 그러기 전에 그것을 피하는 게 상책이다.흔히 참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한다. 참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더 도덕적이며 안정감 있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이 시달려본 사람들일수록 참아야 한다고 설교하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모든 것은 임계점을 넘으면 폭발하게 되어 있다. 그 상황을 인정한다면 무조건 참는 게 능사만은 아니다. 애초에 참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참지 않는 용기도 필요하다고 조언할 수 있어야 한다. 무작정 참는 것만큼 행복지수를 갉아먹는 것도 없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2-26

변명도 연민도

인간은 상처의 동물이다. 누구나 상처 받고 상처 준다. 같은 농도로 주고받는 상처이건만 희한하게도 내가 받은 상처가 진해 보인다. 온통 상처 받은 영혼이 넘쳐나는 이유이다. 책도 상처 받은 사람을 위로하는 것들은 불티나게 팔리지만, 상처 준 사람을 직접적으로 반성하게 하는 책(이런 게 있을까만)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다. 상처는 주는 것일 때보다 받는 입장일 때 훨씬 상처 본연의 속성에 가깝다. 개인이나 집단의 갈등이 생긴다. 잘못을 저지른 이와 피해자가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자기 행동을 정당화할 변명을 찾기 바쁘다. 피해자 역시 마찬가지다. 상대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간다. 피해자인 자신에게 할당될 작은 책임조차 면하려면 어쩔 수 없다. 잘못을 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정당화하지는 않더라도 그때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해명함으로써 책임을 덜어보려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당하는 입장일 때는 일이 일어난 여러 정황들에 대해서는 빼는 대신 상대가 어떻게 나를 자극하고 해를 가했는지에 집중한다. 한마디로 자기 유리한 것만 이야기한다. 그래서 옛날부터 사람들은 당사자 간에 일어난 일은 두 쪽 다 들어봐야 안다고 했다.이런 현상은 막을 수 없는, 본능적인`자기애` 때문에 일어난다. 위대한 성인군자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스스로를 비교적 괜찮은 사람으로 여긴다. 올곧고 성실한 쪽에 내가 있고, 그릇되고 거짓을 일삼는 편은 상대방이라고 생각한다. 극악무도한 행위를 한 사람이나 인류를 파멸로 이끈 독재자들조차도 자신을 위한 변명은 마련한다. 사회악을 제거하기 위해,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기 위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한다지 않는가.나약한 인간은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는데 익숙하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나는 선, 너는 악의 구도가 자리 잡는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곧장 성립한다는 걸 알게 되면 언행에 신중을 가할 수밖에 없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선, 온전하게 피해자이거나 완벽하게 가해자인 일상은 없다. 변명도 연민도 한 몸에서 나온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2-25

힘들었지?

`자기보다 훌륭하고 덕 높고 잘난 사람, 그러한 사람들을 곁에 모아둘 줄 아는 사람, 여기 잠들다.`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묘비명이란다. 성공한 그의 이력이 이 한마디에 다 들어 있다. 카네기는 성공 비결을 자신의 능력 덕이라고 보지 않았다. 자신이 잘 해서가 아니라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뽑아 쓴 덕이라고 말했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그를 성공한 사업가로 만들었다. 나아가 기부와 자선의 실천을 통해 인간 사랑의 증거로 삼았다. `사람이 모든 것`이라는 생각을 앤드류 카네기는 일찍 깨쳤다. 어릴 때 카네기는 토끼 한 쌍을 선물 받았다. 한두 마리 토끼를 키울 때는 제 이름을 짓고 불러주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열 마리, 스무 마리로 늘어나면 그 이름을 짓고 기억하고 불러주는 건 쉽지 않다. 카네기는 출석부에서 힌트를 얻어, 반 친구들의 이름을 각 토끼에게 목걸이로 걸어주었다. 그러자 친구들은 제 이름 팻말이 걸린 토끼에게 관심을 가지고 먹이까지 챙겨 주는 것이었다.사람이라면 누구나 제 존재 증명을 바란다. 기업 경영을 하면서도 카네기는 토끼 키우던 그 시절의 교훈을 잊지 않았다. 직원이 다섯 명이었을 때나 오백 명으로 늘어났을 때나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며 필요한 사람인지를 강조했다. 평생에 그가 가장 즐겨하고 자주한 말은 `자네, 힘들었지?`라는 한 마디였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정성을 한시라도 잊지 않았다.누군가 나를 기억해주고 내 맘을 헤아려주는 것만큼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 것도 없다. 카네기는 인간의 이런 근본 정서를 기업 경영에 접목한 셈이다. 정당의 목적은 정권 획득이고, 기업의 목적은 이윤 추구이다. 하지만 그 목적에 도달하게 하는 바탕은 누가 뭐래도 사람이다. 현명한 카네기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돈을 먼저 벌기보다 사람을 먼저 벌어라. 그러면 돈은 따라 들어오게 되어 있다`는 멋진 명제에 이르렀다. 지친 누군가의 얼굴에 안간 미소가 보인다면 무심한듯 다가가 가만 손잡아 주고 싶다. 오늘 그대 힘들었지?/김살로메(소설가)

2014-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