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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모든 것의 빌미

독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면 배우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의 치유 프로그램이 어느 한 쪽만 일방적인 혜택을 보는 경우는 없다. 공감대라는 공통분모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이끄는 쪽이나 따르는 쪽이나 서로 배우게 된다. 오늘도 예외가 아니다. 재소자들을 상대로 `마음상함`에 관한 주제로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상처의 근원지인 가족과의 마음 상함에 대해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상처라는 말이 어울리지, 알래스카에 사는 생면부지의 아저씨와는 상처라는 말 자체가 적용되지 않는다. 의외로 많은 이들이 진솔하게 자신의 얘기를 털어 놓는다. 타인의 풍성한(?) 사례에 비해 비교적 다행한(!) 제 상처에 위안을 삼는 모습은 어디나 같다.안에 있는 그들이나 밖에 있는 우리나 따귀 맞은 영혼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뜻하지 않게 우리는 유행가 가사의 총 맞은 것처럼 내 영혼에 흠집 나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그때 언제나 눈물짓는 피해자는 나이고, 몹쓸 가해자는 상대방이다.(라고 생각한다.) 자신과 다른 생각이라고, 자신의 잣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상대는 내 영혼을 교란시키고 내 심장을 후벼 판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욱하는 마음에 나도 상대의 뺨을 갈긴다. 순차적으로 쌍방의 영혼에 펑크를 내고 만다.그 와중에 멋진 결론을 내 주는 한 분이 있다. 모든 상처의 빌미는 스스로에게 있단다. 오랜 수감 생활 동안 생각만 많아졌는데, 모든 것이 부질없고 `나` 아닌 원인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단다. 옆 사람이 날 모욕하는 건 내 작은 교만의 턱짓 때문이다. 옆집 아줌마가 내 눈빛을 거절하는 건 오늘아침 그미 발자국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바쁘단 핑계로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모든 것의 빌미가 된다는 걸 잊지 마라. 이 편한 통찰에 이르게 되면 마음 상함 때문에 타인을 단죄할 필요가 없다. 그분이 한 말을 받아 적는 이 순간이야말로 `힐링`이란 말이 가장 어울린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04

잡스라는 아이콘

스마트폰이 빠르게 세계로 확산된 데는 애플사의 `아이폰` 역할이 컸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 배경에 스티븐 잡스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세상을 뜬 뒤 많은 사람들이 잡스의 전기문을 읽었다. 괴팍하고 특이한 그의 성정 이면에 버림받은 어린 시절이 있었고, 추진력 뒤에는 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양부모와 절친 사업 동료가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잡스에 관한 영화가 나온다고 했을 때 기대감에 들떴다. 전기문을 넘어선 뭔가 강한 한 방이 있을 거란 예감 때문이었다. 예감이 언제나 맞는 건 아니었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를 영화로 옮겼을 때의 말할 수 없는 지겨움 같은 게 화면에 흘러나왔다. 스토리텔링이 얼마나 중요한 지 새삼 느낀 경우였다. 세상을 뒤집어버린 천재 괴짜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도, 하다못해 혼잣말이라도 들어볼 수 없었다. 버려진 자식으로서의 상실감, 도덕과 불화하는 내면의 혼란, 선불교와 인도에 관심이 많던 히피족으로서의 젊은 잡스, 까다로운 채식성과 어울리지 않는 다혈질 등 섬세하게 짚을 수 있다면 충분히 많은 울림을 줄 수 있는 이야기를 제대로 뽑아내지 못했다.인간 잡스를 그리지 못한 영화는 실패작으로 보였다. 차라리 다큐멘터리로 꾸렸다면 이만한 실망감에서는 멀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사전에 잡스에 관한 정보가 없거나 잡스 전기를 읽지 않은 사람들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잘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봐줄만한 것은 잡스로 분한 애쉬튼 커처의 연기력이었다. 그것으로 커버하기엔 감독의 한계가 빤히 보였다.잡스라는 아이콘은 너무 선명하고 그 콘텐츠 역시 참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영화에 와서는 흐지부지 사라지는 연기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누군가 별나거나 희한한 짓을 하면 흉보거나 손가락질하는 건 자유다. 하지만 절대 무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 미친 천재들이 세상을 바꾸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이런 내용의 내레이션을 얻은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영화였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03

가을 편지

시인 원재훈은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고 담담하게 읊었다. `한때 나는 편지에 모든 생을 담았다 / (중략) 창문이 열리듯, 낙엽은 하늘을 듬성듬성 비어 놓았다 / 그것은 상처였다 / 언제부턴가 내 삶의 간이역에는 기차가 오지 않아 / 종착역이 되었다 / (중략) 별들이 애써 하늘의 아픔을 가리고 있었다 / 그 아래에서 서성거리는 나의 텅 빈 주머니에는 / 그대에게 보낼 편지가 없다 /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하늘빛은 한층 차분해지고, 땅의 열기도 많이 숙졌다. 열린 창으로 다급히 들어오는 바람의 숨결에 가을 냄새가 확연하다. 이때쯤이면 가을 편지 한 자락이 생각나야 제격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언제부턴가 우리는 손 편지를 주고받기 드문 시대를 살고 있다. 기억을 살리기조차 아득하다.편지지 위에다 내 의지의 손으로 연필을 움직인다는 건 온몸으로 쓴다는 거다. 때론 에두르고, 더런 질러가며 하고 싶은 말들의 호흡을 가다듬던 그 불면의 흔적들. 상처의 갑옷을 입거나 환희의 날개를 달았던 그 까만 사연들은 쓰는 순간엔 상대를 넘어 우주 끝까지 가도 좋을 것들이었다. 하지만 편지 한 통에 기가 다 빠져 다음날을 꼬박 앓아눕고 나면 유치찬란했던 간밤의 실상이 제대로 보여 그 편지는 찢기기 일쑤곤 했다. 그래도 숙명처럼 편지를 즐겨 쓰던 시절이 우리에겐 있었다.친구들에게 받은 오랜 편지 뭉치를 발견했다. 잊고 지냈는데 십대와 이십대를 추억할 수 있는 좋은 매개물이 되어준다. 받은 게 쇼핑백 가득이니, 편지 쓰기 좋아했던 내가 보낸 건 그 두 배는 족히 되리라.갑자기 그것들의 운명도 궁금해진다. 편지 하지 않는 지금의 세대는 감성이 메말라서라기보다 대체할 것들이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 많아 눈이 바쁘고, 너무 빨리 돌아가 따라갈 수 없는 지금 세상이, 느린 손 글씨와 침 발라 붙이던 우표와 어울리기나 하던가. 그래도 가을 온다는 바람의 영근 전언을 한 번쯤은 손 편지로 배달하고 싶다. 한데 그 많던, 편지 받을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김살로메(소설가)

2013-09-02

자업자득

방과후 문예 활동 시간에 `내 방`이란 소재로 열 줄 글쓰기를 했다. 제한된 시공간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글쓰기 지도 방법 중의 하나가 `열 줄 쓰기`이다. 한 학생의 글에서 눈에 불이 번쩍 드는 느낌을 받았다. 엄마에 대한 전적인 애정과 신뢰가 묻어나왔는데, 처음엔 부러움이 일다가 나중엔 부끄러움이 퍼지게 하는 그런 글이었다. `내 방은 여관이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에 벌써 긴장했다.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게 들어오는 학생 생활이다 보니 `내 방`이란 현실은 잠만 자게 되는 공간이다.그런 방도 밤새껏 어지럽혀 놓고 나오기 일쑤인데 저녁에 집에 들어가 보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단다. 마치 여행할 때 섬세한 곳까지 신경 쓴, 깨끗한 잠자리를 만난 것처럼 잘 치워져 있단다. 좀 더 쾌적한 밤을 보내라고 엄마는 아침마다 딸이 나간 뒤 방청소를 한다. 엄마의 그 정성을 알기에 딸은 `내 방`에서 나에 관한 이야기 대신 `모정`에 대한 감사를 표한 것이다.그 학생의 엄마가 부러우면서도 스스로는 몹시 부끄럽다.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 자식이 부모 생각하는 마음 역시 누가 시킨다고 되는 게 아니다. 엄마 스스로 모범을 보이면 딸은 자연스레 보고 배운다. 물 맑아 손으로 떠 마실 것인지, 탁한 물에 코를 풀 것인지의 열쇠는 엄마에게 달려있다.한석봉 엄마가 맹자 엄마보다 위대한 건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열악한 환경에서도 제 성실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다. 이것 해라, 저것해라 지시하는 엄마보다 묵묵히 실행하는 엄마가 자식에겐 더 나은 본보기가 된다.방 한 번 제대로 청소해 준 적 없으면서, 치우라는 무언의 한숨이나 짓는 나 같은 엄마를 둔 딸들은 제 방 문을 쾅 닫은 채 무엇을 할 것인가. 엄마에 대한 애틋한 헌정사를 쓰는 대신 잘못 만난 엄마를 원망하는 랩 가사를 쓰고 있으리라. 친구를 얻으려면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주라 했다. 딸 맘을 얻으려면 먼저 모범을 보이는 모성이어야 한다. 베풀지 않고 바라는 건 과욕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30

네 잘못이 아냐

사춘기 때 그녀는 집을 나갔다. 없는 살림에다 마마보이인 그녀의 아버지는 피해의식에 절어 있었다. 괜한 자격지심으로, 이웃한 큰집 식구들 앞에서 그녀와 그녀의 엄마를 벌레 취급했다. 생활비를 받지 못한 모녀는 나란히 도벽이 생겼고, 사랑 받지 못한 외로움으로 지칠 대로 지쳤다. 중2 소풍날이었다. 보란 듯 그녀의 아버지는 또래의 사촌에게는 소풍 용돈을 쥐어주면서 그녀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녀는 결심했다. 집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아니 아버지를 버릴 때가 되었다고. 신작로를 벗어나 보리밭에 퍼질러 앉아 엄마가 싸준 소풍 도시락인 멸치 주먹밥을 눈물로 삼켰다. 학대와 모욕을 덩이 째 주던 아버지를 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푸르게 일렁이는 보리밭이 희망의 날갯짓처럼 다가왔다. 몇 십 년이 흘렀다. 자신과의 설운 약속대로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 이후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상처와 맞바꾼 그녀의 승리였다. 전언에 의하면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진 않지만 여전히 자책 중이라고 했다. 상처의 수렁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며, 옛 친구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네 잘못이 아냐.` 그녀를 만날 수만 있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다. 믿고 의지해야 할 가족에게서 받은 상처보다 쓰리고 아픈 건 없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부모에게 버림 받은 상처투성이 천재 윌에게 숀 교수가 말한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한 사람의 특별한 행동 그 이면을 가슴으로 이해한 자만이 건넬 수 있는 심연의 말이다. 눈빛을 맞추고 목소리 톤을 조절해가며 열 번 이상 진심을 다해 말한다.가족은 환희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상처의 근원이기도 하다. 어떻게 천륜인 아버지를 배반할 수 있냐는 꼰대 같은 발언보다 그녀가 매도당할 만큼 잘못한 게 없다고 변호하는 쪽에 손을 들게 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가족이 주는 상처 때문에 힘겨워 하는 모든 이에게 오늘 저녁 건네고픈 치유의 말은`네 잘못이 아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29

예의라는 폭력

제 눈의 들보보다 남의 눈의 티가 크게 보인다. 그게 인간이다. 그리하여 `잘 아니까 똑바로 말해주는 거야` `뒤끝은 없으니 서운해하지마`라며 상대에게 거침없이 말한다. 맞는 말처럼 들리는 저런 어법이야말로 불편부당한 말투 중의 하나이다. 사람은 상처의 동물이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약점을 알고 있다. 그것을 고려치 않은 채, 제 눈의 들보 든 지도 모르고 충고랍시고 권력자들은 남의 약점을 캐는데 일가견이 있다.선인들이 타인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기를 조심하라고 가르친 건 제 안에 더한 그 왈가왈부가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리라. 말하지 않는 약자는 타인의 약점을 몰라서가 아니다. 말할 필요도 없고, 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예의 상 알 뿐이다. 자중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선인들은 가르쳐왔다.하지만 예의 또는 예절이라는 게 동양적 사고의 틀 안에서는 약자가 강자에게 취하는 복종의 기미에 지나지 않는다. 일찍이 공자가 말했다. `다른 이를 존중하면 모욕당할 일이 없다`고. 애초에 그 말은 지위상하와 관계없이 태어난 말일 게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연예계에서 선배에게 깍듯이 인사하지 않는 것은 큰일날일이지만 먼저 상대를 발견하고도 선배가 후배에게 곁눈질조차 주지 않는다고 해서 예의에 어긋난다고 흥분하는 사람은 없다. 구석구석 살피면 예절은 언제나 약자 또는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권력 가진 자가 예의 부족 구설에 오른 예는 단연코 들어본 적이 없다.예절은 마음의 진정성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을 말한다. 갑의 위치라 해서 진정성과 형식을 표현하지 말란 법은 없다. 옛말에 `인사에 선후 없다`라고 했다. 예절에도 선후가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우리의 예절은 언제나 강자 앞에서 표하는 약자의 리액션에 머물고 만다. 그러다 보니 잘 안다는 이유로, 뒤끝 없다는 핑계로 갑은 을에게 폭력적 언사를 일삼는다. 예절에서 인간 동격 개념을 적용하기엔 무리인 세상을 우리는 여전히 살고 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28

안 자면 된다

만화 `미생`의 작가 윤태호의 인터뷰 기사를 읽는다. 자기 확신을 얻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었는지 그 기운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가정생활도 있고, 일거리도 넘치고 어떻게 그 모든 작업이 가능하냐고 묻는다. 작가의 답은 간단하다. `안 자면 된다`이다. 금 간 핸드폰 액정을 갈아 끼울 새도 없단다. 수요일, 토요일 밤에만 자는 생활이 이 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나. 안 잘 정도의 끈기와 오기와 체력이 있어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끈기와 오기를 키울 생각보다 먼저 앞서 자기합리화를 꾀하고, 체력을 다질 즉각적 행동은 미룬 채 몹쓸 체질 탓만 한다. 세상에 거저 되는 게 있던가. 윤태호 작가의 팬 층이 두터운 건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독자의 마음에 가 착착 달라붙기 때문이다. 겉돌지 않는 그의 대사와 내레이션은 지난했던 시간을 견딘 축복의 부산물로 보인다. 축포처럼 쏟아지던 `미생`에서의 몇몇 명대사들을 떠올려 보라.`우연은 기대하는 게 아니라 준비가 끝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 같은 것이다. 명절은 가족이란 이름의 폭력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잊지 말자, 나는 어머니의 자부심이다. 격식을 깨지 않으면 고수가 될 수 없다. 자꾸 사람을 판단하려고 애쓰다가는 자기 시야에 갇히고 만다. 정면을 봐. 남을 판단한다는 게 결국 자기생각을 투사하는 거라고. 그러다 자기 자신에게 속아 넘어가는 거야.` 등등.만화는 그림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말하는 작가가 윤태호이다. 만화든 글이든 스토리를 무시하면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 숱한 실패로 그것을 알아낸 작가는 그림책을 미루고 시나리오 필사에 노력했다. 뭐가 중요한 지를 알아내는 것에는 실패란 스승이 필수이다. 거기에서 얻은 가르침을 오래 붙들고 앉아 있는 법을 익힌다면 누구나 원하는 것을 밤하늘에 쏘아 올릴 수 있다. 인이 박일 때까지 두려움 없는 실패와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는 것, 그것이 `안 자면 된다`의 정신일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27

레미콘 차를 보며

달리는 레미콘 차 몸뚱이는 쉴 새 없이 돌아간다. 그 안에는 이미 섞인 콘크리트가 들어 있다. 모래, 자갈, 시멘트, 물 등 적절히 배합된 그들은 몸 섞어 서로를 보듬어야 한다. 목표점에 도달할 때까지 제 몸을 굴리지 않으면 내용물이 제대로 섞이지도 않을뿐더러 심하면 굳어버릴 수도 있다. 안착하여 타설될 때까지 돌고 돌아야 한다.레미콘 차 뒤꽁무니가 잘 돌아간다고 안심할 일은 아니다. 건설 현장 비리에 관한 텔레비전 고발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관리가 잘 되는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는 입구에 담당자가 나서서 레미콘을 점검한다. 불량 레미콘이 들어 있는 차를 발견할 경우 그 자리에서 되돌려 보낸다.반면 허술한 공사 현장에서는 퇴짜 맞은 그 레미콘 차를 형식적인 점검만 거친 채 그대로 투입시키고 있었다. 완공되었을 때 두 아파트에 대한 안전도는 극과 극이 될 것이다.삶도 마찬가지다. 삶의 본질은 관계이다. 일단 잘 반죽해야 한다. 어긋나고 흐트러진 배합률로 제 인생의 내용물을 반죽한다면 아무리 잘 돌려도 몹쓸 것이 되고 만다. 잘 굳은 축조물을 얻으려면 두 가지 다 충족해야 한다. 배합이 맞아야 하고 잘 섞을 줄 알아야 한다. 정치 구도, 문화 방식, 소통 의지 등 우리가 살아가는 기본 바탕에는 관계망이란 사회적 운명이 부여된다. 그 사회적 약속을 잘 배합하고 잘 융합할 때 굳건한 구조물을 얻을 수 있다.삶의 핵심은 인간 대 인간에게 있다. 일찍이 그것을 알아 낸 인류는 철학이라는 인간에 대한 위대한 학문을 고안해내기에 이르렀다. 하루하루의 삶이 모여 일생을 만든다. 내 삶을 어떻게 반죽하고 돌릴 것인가에 따라 완공된 건축물이 달라진다.불량 반죽은 아무리 돌려도 불량일 뿐이다. 운 좋아 그 레미콘으로 층층이 타설한다 한들 부실 건축물이 되고 만다. 반죽은 굳기 마련이다. 문제는 잘 굳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단한 구조물로 남을 것인가, 부실한 건축물로 부서질 것인가는 기초인 반죽과 돌리기에 달려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26

사랑하고 있는 걸까?

지금 이 순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상대의 목소리나 문자를 기다린다면 당신은 사랑하고 있다. 어쩌다 상대가 건네는 한 마디 말에 심장이 오그라든다면 당신은 사랑하고 있다. 아니 사랑에 빠져있다. 사랑에도 구별이 있다. 덜 사랑하는 자와 더 사랑하는 자. 사랑에 덜 사랑과 더 사랑이 어디 있냐고? 천만에! 사랑만큼 저울추가 확실히 기울어지는 것도 없다.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당사자들에게 똑같이 할당되는 것이라면 애초에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입술이 부풀고, 이별 때문에 치통에 시달릴 이유가 없다. 대상을 객관적·보편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덜 사랑하는 쪽이고, 대상에 주관적·감정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면 사랑에 빠진 쪽이다. 덜 사랑하는 쪽은 그 순도가 탁하기 때문에 덜 다치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게 버겁지 않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쪽은 순도 백퍼센트이기 때문에 더 다치고 버겁기만 하다.사랑의 단상에 관한 롤랑 바르트의 전언을 보자.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 한다.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 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배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덜 사랑하는 사람은 철새이고 사라지는 자이다. 반면 사랑하는 자의 천직은 외곬이자 처분을 기다리는 자이다. 설거지하기 성가셔 싱크대 한쪽에 미뤄둔 프라이팬처럼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신세이다. 언제나 부재중이거나 안개처럼 존재하는 그 덜 사랑하는 존재가 사랑인줄 알고 창을 연 채 반쯤은 얼이 빠진 채 기다리는 것이다. 결코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하지만 어쩌랴. 아무 것도 아닌 것에 갈망하고 집착하는 것, 이것이 사랑의 속성인 것을. 찔러대고, 나약했던 그 순간을 겪기 전까지는 투명한 물방울 같은 환상으로 남을 몹쓸 그 사랑!/김살로메(소설가)

2013-08-23

군더더기 없는 삶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스티븐 킹은 강조했다. 군더더기 없는 글의 매혹에 대해서. 고교 시절 그는 한 신문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늙은 편집자는 그가 제출한 원고의 대부분을 지워서 돌려주었다. 남은 것은 오직 킹이 처음에 하고자 한 내용 뿐이었다. 늙은 편집자는 어린 그에게 충고했다. 어떤 이야기를 쓸 때는 스스로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하고 써라. 원고를 고칠 때에도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은 모두 없애라. 그렇게 하면 핵심만 남을 것이다. 같은 맥락의 얘기를 사진 기초를 배울 때도 들었다. 한 수강생이 제출한 사진을 선생님은 화면에 띄웠다. 호수 풍경이었다. 드넓은 호수 가운데 오리 한 마리가 노닐고 언덕 주변으로는 화사한 붓꽃이 만개했다. 남은 오리 떼는 물풀에 가려 보일 듯 말듯 했고 그것을 정원 삼아 전원주택이 원경으로 잡힌 사진이었다. 선생님은 말했다. 그 풍경 중 호수에 떠 있는 오리를 제외하곤 다 버리는 게 낫다고. 사람들은 핵심을 원하지 군더더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고.무엇을 듣고 싶은가 또는 무엇을 보고 싶은가에 대한 중심점은 하나이다. 이것저것 말하고 이리저리 보여주고 싶은 건 당사자 입장일 뿐이다. 어떻게든지 하고 싶은 얘기도 많고, 보여주고 싶은 풍경도 많은 게 내 입장이다. 하지만 상대는 그렇지 않다. 다 알아 들을 마음도 없고, 다 볼 수 있는 눈을 키우지도 않는다. 타자화된 우리가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건 언제나 단순한 핵심 그것이다.글에서 군더더기를 버리는 것이나 사진에서 불필요한 풍경을 버리는 것만큼 삶에서 던적스러움을 버리는 건 어렵다. 단순한 핵심에 이르는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피나는 노력과 끊임없는 자기 훈련을 필요로 한다. 복잡하고 거창하고 요란한 것은 내 안에 깃든 욕망의 실체일 뿐, 타자에게 비치는 그것은 피로와 지루함의 허상일 뿐이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명쾌한 것 그 중심에 닿으려 하는 건, 그만큼 우리 삶이 복잡하고 까다롭다는 증거이기도 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22

도리스 레싱

상식과 기본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도전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 전통적 사고와 도덕적 관념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굳건한 힘이 되기는 하는 걸까? 이런 물음에 대한 알싸한 답을 주는 작가가 도리스 레싱이다. `다섯째 아이`에서의 강렬하고 통렬한 통점 때문에 기억에 남는 작가인데 이번에 개봉하는 `투 마더스(두 엄마)`도 그녀의 작품이 원작이란다. `다섯째 아이`에서의 그녀의 메시지를 내 식으로 환원하면 이렇다. 장미와 백합향이 향기롭다고 그것만을 삶의 가치로 고수할 수 있을 것인가. 시궁창 냄새나 쓰레기장 냄새도 나름의 존재이유가 있다. 평화로운 질서, 안온한 일상, 보장되는 미래 - 전통적 가치관과 건전한 윤리관에 충실한 젊은 부부는 이런 가정을 꿈꾼다. 하지만 다섯째 아이인 `벤`이 태어나면서 그들의 신화는 무참히 부서진다. 가는 몸에 부서질 것 같은 사지, 거대한 머리에 툭 튀어나온 눈. 괴물 같고 벌레 같은 외형에다 성격마저 괴팍한 벤은 중산층 삶에 대한 거리낄 것 없는 로망을 가졌던 부부를 순식간에 나락으로 몰아넣는다.행복의 기별로 가득했던 집안은 불행의 기운이 점령하고 만다. 파괴와 증오, 공포와 침울의 대상이 된 벤을 버려야 할 것인가. 가족의 평화와 안위를 위해, 그들이 꿈꿨던 이상향이란 그림을 위해 또 다른 가족인 벤을 포기할 것인가. 해결 난망의 숙제이지만 도리스 레싱의 전언은 분명하다. 벤이란 상징을 통해 우리 스스로 믿고 있는 가치나 기준이란 게 얼마나 헛된 것이며 무너지기 쉬운가를 보여준다.관계 또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바늘 끝 같은 감각으로 감지해낸 도리스 레싱의 철학이 `투 마더스`에 와서는 어떻게 변주되는지 궁금하다. 여성 감독이 만든 여성적 시각의 영화라 한계가 있을 수도 있다. 더구나 쌍방 친구 아들들과의 로맨스라니 막장 드라마로 빠질까 우려도 된다. 하지만 `다섯째 아이`에서의 도리스 레싱을 기억하는 감독이라면 뭔가 선명한 메시지를 던져주기 위해 애쓰지 않았을까. 작가의 기가 전해질지 기대 중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21

잔소리

엄마 노릇 제대로 못하는 것만큼의 자율성을 아이들게 부여했다고 위안하곤 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아들녀석이 말한다. `엄마, 잔소리가 뭔지 아세요? 엄마들이 하는 모든 말이 잔소리가 아니라, 같은 소리를 계속 하는 게 잔소리예요.` 한마디로 `엄마는 잔소리꾼`이란 얘기다. 별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건 내 입장일 뿐, 아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를 테면 내가 아들에게 하는 레퍼토리는 이런 거다. `어학이 기본이다. 딴 건 몰라도 어학 공부는 게을리하지 마라. 이 글로벌한 세상에서 어학이야말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또한 확실한 관심 분야를 개척하고,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았으면 좋겠다. 현대의 중산층 개념이 뭔지 아나? 아파트 평수도, 명품 가방 살 수 있는 능력도 아니다. 그런 건 경제적 측면에서 본 것이고, 요즘은 문화적 잣대로 중산층을 가늠한다. 그러니 정신적 중산층이 되고 싶으면 자기계발에 신경 써라.`아들 기준에 의하면 엄마가 이런 말을 두 번, 어쩌면 여러 번 했기 때문에 잔소리가 되는 것이다. 세상 모든 부모는 자식 걱정을 한다. 그 걱정의 다양한 버전이 보통의 자식들에게는 잔소리로 들린다. 그 시절 나 역시 그랬으니 할 말은 없다. 그렇다고 잔소리를 하지 않을 것인가. 부모는 말하고 자식은 거부하고, 엄마는 한두 번밖에 말한 기억이 없는데 자식은 여러 번 들은 것 같은 게 잔소리의 속성이다.가만 보면 훈육 또는 길잡이라는 형식의 모든 군소리는 부질없는 것 같다. 물이 자정작용 하면서 흐르듯 인간 성장에도 그 법칙이 적용된다. 부모의 잔소리와 무관하게 아이들은 크면서 스스로 깨닫는다. 시기의 늦고 빠름에 차이가 있을 뿐, 본인의 인생행로에서 어느 정도 자정능력을 발휘한다. 부모 스스로도 그리해왔다. 다만 자신이 겪은 시행착오의 시간과 횟수를 자식에게만큼은 줄여주고픈 맘에 잔소리를 하게 된다. 부모의 모든 옳은 소리는 아이들에겐 잔소리다.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모자식 간 천형이자 선물인 잔소리!/김살로메(소설가)

2013-08-20

플롯과 친구하기

스토리텔링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인간관계의 원활한 소통과 한 대상의 전략적 홍보 수단 등에서도 스토리텔링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커지고 있다. 원래 스토리텔링은 문학적 성과, 특히 소설을 이루는 장치이자 재료로서 강조되는 부분이었다. 스토리텔링이 제대로 되지 않는 소설은 고전적 의미에서 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고수하거나 의도적으로 스토리텔링을 무시하는 작가가 있어왔지만 그건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한 때 나는 글쓰기에서 플롯을 그리 중요시 여기지 않았더랬다. 글은 플롯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심리 묘사에 의해서만 글의 흥미나 질이 판가름 난다고 믿었다. 근거 없는 편협의 우물에 갇혀 있었다. 하기야 스토리텔링 자체도 부질없고 소용없다고 여겼다. 오직 쓰는 자의 손가락 의지에 글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믿고 싶어 했다. 등장인물의 외적 내적 묘사의 장악력만 있으면 플롯은 자연스레 따라온다고 착각했다.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플롯에 대한 신뢰감이 되살아난다. 단단한 플롯만이 독자를 만든다. 이야기의 뼈대나 구조를 플롯이라 하는데 플롯은 단순한 이야기의 개념을 넘어선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그저 늘어놓는 것이 이야기라면 플롯은 그것에 더해 당위인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 짜임새 있는 이야기의 힘이나 과정이 녹아 나야 제대로 된 플롯이라고 할 수 있다.그간 너무 등장인물의 내적 또는 외적 패턴에 의해서만 글을 쓰려고 했다. 이제 자세를 좀 바꿔보고 싶다. 플롯의 대가라 해도 좋을, 작가 딘 쿤츠가 말했다. `플롯이 없는 소설처럼 이 세상에 우스운 것은 없다. 누가 뭐래도 플롯은 소설의 으뜸 조건이다.` 태생적으로 광적 재능을 타고난 작가라면 플롯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 자체로 실험소설의 반열에 오를 수 있으니. 하지만 끊임없이 연마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구태의연하게 보일지라도 기본에 충실한 것도 나쁘지 않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쓰라는 내면의 요청이 들린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19

노익장(老益壯)

`노익장을 과시하다`라는 말이 있다. 젊은이에 뒤지지 않는 노년의 굳건한 패기를 표현할 때 쓰는 관용구이다. `후한서` `마원전`에 나오는 고사성어로 노당익장(老當益壯)의 준말이다. 말 그대로 비록 늙었지만 기운이 더욱 씩씩함을 일컫는다. 후한 광무제 때의 명장 마원은 예순두 살, 지금 같으면 상노인에 해당하는 나이에 광무제를 도와 군대를 일으켜 반란을 평정하고 흉노를 토벌했다. 말 그대로 대기만성을 이뤘다.평소 친구에게 `대장부는 어려울수록 굳세어야 하고, 늙을수록 건장해야 한다`며 노익장을 역설했다. 굳이 역사서를 들먹이지 않아도 현실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사람들도 많다. 얼마 전 모친상을 당한 지인의 경우, 백수(白壽)였던 당신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시기 사흘 전까지 일터에 나가셨고, 텃밭 가꾸기까지 거뜬히 하셨다고 했다. 내 친정 엄마도 마찬가지이다. 미수(米壽)가 멀지 않았건만 아직도 혼수방에서 일하신다. 천생이 부지런한 분이라 일 하지 않으면 못 견뎌 하신다.며칠 전 또 다른 노익장을 과시하는 분을 만났다. 일흔을 넘긴 그분은 매일 원고지 스무 장에 가까운 글을 쓰신다. 내 짧은 소견으로 힘들고 벅차지 않으시냐고 여쭈었다. 그렇긴 하지만 글쓰기가 건강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견딜 만하다고 하신다. 원고를 채운다는 스스로와의 약속 때문에 맘대로 술도 못하고 여행도 못하지만 얻는 게 더 많단다.일반적으로 일을 접고 느긋이 여가를 즐기는 것이 노년을 잘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분 말씀에 의하면 사람은 할 일이 있어야 늙지 않는단다.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거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노화는 걷잡을 수없이 빨라진다. 늙어서 일을 놓는 게 아니라, 일을 놓으면 늙게 되는 것이다. 젊다는 게 글 쓰는 데 유리한 건 사실이겠지만 나이 많다는 게 글 쓰는 데 불리한 것만도 아니다. 모든 건 마음먹기 나름이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그분처럼 열정이 넘치는 내 노년의 글쓰기를 그리며 오늘도 성심껏 자판을 두드린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16

인류 탄생 이래 가장 힘든 숙제 중의 하나가 소통일 것이다. 부부끼리의 교감, 자녀와의 대화, 친구와의 교류 등에서 온전한 승리를 맛보기란 쉬운 게 아니다. 일기장이 왜 생겨났겠는가. 소통 부재로 자괴하는 자들의 쓰라린 꽃 무덤이 그곳 아니던가. 다행히 요즘은 소통 덕에 환희할 수 있는, 발랄한 꽃다발 역할인 SNS도 생겨났으니 그 둘을 적당히 활용하면 소통의 중용 마당이 어느 정도는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상처의 꽃 무덤과 환희의 꽃다발이 매순간 교차하는 게 우리 삶이기 때문이다. 상처에도 환희에도 혀가 관여한다. 혀를 통해 나오는 말은 보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일찍이 그것을 갈파한 선인들이 이런 말을 지어냈다. `임금이 지혜로운 두 신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구해오도록 명령했다. 두 신하는 각자 상자 하나씩을 가져왔다. 첫 번째 상자에도 두 번째 상자에도 사람의 혀가 들어 있었다.`왜 우리는 상처를 주고받을까? 생각이 다르다는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타인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는 건 내 맘이니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타자에게 나를 똑 같이 대접해달라고 강제하기는 어렵다. 그건 타자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무한대로 뻗어있는, 자유롭기만 한 타자를 내 식으로 규제하려 할 때 우리는 필연의 상처와 대면한다.상처를 옮기는 기본 도구는 혀(말)이다. 속으로야 나라님도 팔아먹고 전 우주도 바꿔치기할 수 있다. 하지만 한 번 뱉은 언어는 걷잡을 수 없는 상처라는 꽃 무덤을 만든다. 흔히 잘못 놀린 혀는 세 사람을 죽인다고 했다. 놀리는 사람과 듣는 사람과 그 대상이 되는 사람 모두. 현명한 소통을 하는 자들은 타자를 향한 시선이란 끈을 느슨하게 잡을 줄 안다. 팽팽한 줄잡이야말로 상처의 근원이라는 것을 누적된 학습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혀 놀림도 훈련하면 줄일 수 있고, 소통의 문도 노력하면 언젠가는 열린다. 무더위를 이기는 것만큼 힘들지만 자기최면 걸듯 훈련과 노력은 필요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14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소설은 문장이고, 번역도 창작이다. 평소 소설에 대한 내 지론이다. 좋은 소설은 좋은 문장으로 이뤄져있다. 외국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외국 소설이 온전히 독자에게 전달되려면 제대로 된 번역자와 편집자를 만나야 한다.`롤리타`를 만났을 때 국내 유수 출판사 두 곳의 것을 비교하면서 읽은 적이 있다. 두 작품 다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더 발랄하고 좀 더 입체적이고 좀 더 비문을 덜 생산하는 쪽에 손을 들어주게 된다. 섬세한 부분까지 독자를 배려하는 편집자와 번역자의 노력에 마음이 가기 마련이다.재미삼아 본문의 첫 문장만 두 출판사 것으로 비교해본다. 하나는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이고, 다른 하나는`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이다. 내 취향으로는 전자 것이 훨씬 섬세하게 다가온다. 시적인 원문이 후자의 번역에서는 풀어지고 삐걱대는 데 비해, 전자의 것은 섬세한 대구 구조에까지 신경을 썼다. 설사 원문에서는 그렇지 않았더라도 짧은 문구 하나에서도 문체 미학까지 염두에 둔 번역을 높이 사고 싶었다. 번역 문장 하나가 무에 그리 중요하나 싶겠지만 조금 다른 문장 하나하나가 모여 서로 다른 한 권의 번역서가 된다. 각각 완성된 번역본은 번역자의 창작물이 되고 그 두 책은 독자들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읽힐 수도 있다.섬세한 묘사와 불편한 통찰, 시니컬한 풍자와 반짝이는 해학이 어우러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에서라면 그 괴리가 더할 수도 있다. 감동이나 교훈에서 멀어질수록 진짜 소설이다. 롤리타가 그렇다. 순정남의 외관을 하면서 속으로는 `넌 나에게 읽혔어.` 뭐 이런 여유와 포스를 풍기는, 애인으로서는 빵점이지만 소설가로서는 백점인 이 소설가의 작품을 읽을 때 취향에 맞는 번역본을 만나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나. 비교 번역 운운했지만 진실로 하고 싶은 한 마디는 이것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문장은 내게 `넘사벽`!/김살로메(소설가)

2013-08-13

저 바다의 끝은 어디일까

`바람의 풍경, 이창연 전`이 열리고 있다. 포항시립미술관이 기획한 선생의 유작전이다. 돌아가신 지 3년이 되었는데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선한 미소와 처연한 눈빛으로 남루의 풍경 끝자락까지 따뜻한 시선을 놓치지 않았고, 생활과 그림이 별 다를 바 없이 소박한데다 유머가 넘치던 분이었다. 선생님과 인연이 있던 지인들과 전시회장을 찾았다. 생각보다 조촐한 규모에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전시장의 크기가 선생의 입지를 규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에 마음만은 전우주적 공간이 되어 상상의 나래를 폈다. 사모님의 안내 덕에 그림 속에 담긴 선생님의 예술혼과 가치관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내게 선생님은 화가이기 전에 스승이다.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으로 먼저 만났다. `엄마 찾아 삼만 리`를 읽어주던 순정한 모습도, 화가로서 승승장구하던 모습도 모두 존경 받아 마땅했다. 어린 제자들을 사랑했지만 그림을 포기할 수 없어서 한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선생님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초중고 교과서에도 몇몇 그림이 실릴 만큼 선생님은 유명 화가가 되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담배가게`이다. 70년대 풍의 그 담배포 풍경에는 삶에 대한 철학이, 그림에 대한 예술관이, 인간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런 선생님의 자세한 우주관은 유작 전시회 기념으로 출간된 시화집을 통해 알 수 있다. 아르코 출판사에서 나온 이창연 화백의 `저 바다의 끝은 어디일까`는 `이창연 화가의 작가 노트`라는 부제가 딸린 시화집이다.그림을 삶의 꽃으로 비유한 선생님은 `그림이 그림이라면 그림이 아니다`라고 역설했다. 삶의 현장 그 리얼리티를 보듬지 못하면 진정한 예술가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절대 고독의 에너지로 당신만의 예술적 행보를 내디뎠던 그 흔적이 지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람들아, 슬픈 노랫가락 같고 유쾌한 농담 같은 선생님의 작가노트 `저 바다의 끝은 어디일까`에 관심 좀 가져주시라./김살로메(소설가)

2013-08-12

오전과 오후 일 사이 약간의 공백이 있다. 집까지 다시 갔다가 나오기엔 먼 거리이고 무엇보다 그 때야말로 나만의 오롯한 휴식 시간이니 내 식으로 즐기는 편이다. 일터 근처 비빔밥집이나 분식점을 찾아 대충 끼니를 때우고 얼른 카페를 찾아 나선다. 대개 주문한 신간을 꺼내 읽지만, 피곤이 뒤따를 땐 구석자리에서 손수건 한 장 덮어쓰고 과감하고 짧은 낮잠까지도 청한다. 그야말로 나만의 황금 시간을 갖는다. 한 줄기 소나기라도 퍼부어준다면 바깥 풍광에 시선을 저당 잡히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휴식이 된다. 이 집 저 집 떠돌며 과외를 하던 젊은 시절부터 혼자 점심 먹고 혼자 시간 때우는 일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혼자 노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렇게 쓰려는데, 우연히 내리 연속 지인들의 점심 같이 하자는 연락을 받고 글 길을 틀고야 마는구나. 혼자 먹는 점심도 나쁘지 않지만, 기막힌 타이밍으로 나를 찾아준 친구들이 구세주 같았다고.쏜살같이 달려온 지인들과 카페에 앉아 와플 세트 곁들인 천국표(?) 김밥을 먹는다. 그 와중에도 지인은 작은 유리병 하나를 내놓는 걸 잊지 않는다. 콩잎절임이란다. 도회지로 나온 이후, 처음 먹어본 콩잎절임의 오묘하고 경이로운 맛에 매료된 적이 있었는데 그 추억담을 기억한 지인이 부러 챙겨온 것이다. 섬세한 맘 씀에 괜히 울컥해지는 것이었다.그 잠깐 동안 `틈` 이란 말을 생각했다. 적당한 거리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우정이다. 계단에 앉은 커플 사이에 놓인 물병,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 한 잔, 발 담근 너와 나 사이에 흐르는 계곡물 소리만큼의 틈을 인정해야 사람 관계는 건강하고 오래 간다.저 물병만큼의 여유, 저 찻잔만큼의 배려, 저 물소리만큼의 타자화 등이 서로의 것이 될 수 있을 때 모든 관계는 빛난다. 틈을 유보한 채 성급히 내달리거나, 적정 거리를 놓친 채 보채는 모든 만남은 구라거나 신의 영역 둘 중의 하나다. 구라도 신도 원치 않는다. 다만 한 호흡이란 `틈`을 새기고 새길 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09

영화관이란 피서지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피서지는 영화관이다. 피서지에 대한 합리적 대가인지는 차치하고 시원함의 호사뿐만 아니라 입 호사 눈 호사까지 누릴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삼조이다. 땅 좁은 우리나라에서 보통 사람들이 활동적인 여가를 즐기기는 쉽지 않다. 살림살이 좀 나아지면서 보통 사람들은 영화관을 적절한 여가 장소로 활용할 줄 알게 되었다. 그나마 편하고 경제적인 여가 활용 중의 하나가 영화 보기이기 때문이다. 한 영화당 관객 천 만 시대를 가뿐히 넘기게 된 것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의 이런 여가 활용법도 한몫했다. 피서지로도 그만인데 영화가 좋으면 금상첨화이다. 신인감독 김병우의`더 테러 라이브`는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원래 분탕질이 심한 영화를 체질적으로 싫어해 영화 시작 십 분이면 졸기 일쑤다. 개연성도 없이 눈요깃감으로 쏘고, 부수고, 때리는 장면들이 어쩐지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 감정 이입이 쉽게 되지 않았다. 한데 이번 영화는 달랐다. 실시간 속보라는 긴장감에다 비루함과 비열함이 뒤섞인 인간군상의 아이러니 앞에서 절로 서늘해졌다.고립된 스튜디오 안이 장면의 대부분인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테러리스트와의 대화를 중계한다는 독창적인 상황도 눈길을 끌었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긴장감으로 엮여 있어 더욱 딴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소박한 영상으로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급 영화를 뛰어넘는 관객 시선 고정을 이끌어낸 것에 점수를 주고 싶다. 등장인물에 군더더기가 없고, 대사 처리에도 늘어짐이 없으며, 내용면에서도 과장이 덜 했다.다만 결론 부분이 약간 신파로 옮아간 것이 아쉬웠다. 파죽지세이던 감독의 진격에도 호흡이 달렸는지 다소 급하고 억지스러웠다. 90 여분 동안, 라이브로 중계되는 테러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다보면 관객이 아니라 실제 현장에 있었던 사람처럼 긴박감과 울분에 온몸이 저려온다. 더위 피하기 위한 잠시의 여가에서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쐬었으니 이보다 더한 여름나기가 어디 있겠는가./김살로메(소설가)

2013-08-08

비타민보다 운동

사람마다 체질과 체력이 다르다. 건강 체질에다 운동으로 몸을 관리한 사람들은 이 무더위에도 그리 지치지 않는다. 반면에 저질체력에다 운동마저 기피하는 나 같은 이들은 사계절 피곤의 연속이다. 체력에 비해 내가 가진 에너지와 기를 무리하게 쓴 날은 어김없이 탈이 난다. 채우지도 못했는데 퍼내 쓰니 쉬 지친다. 충분한 잠으로 보충해도 입술이 부르트고 잇몸은 부어오른다. 운동 부족이란 숙제를 해결하면 컨디션 회복에 도움이 되련만 쉽지가 않다. 모임에 나갔더니 간호사 지인이 비타민을 먹어보란다. 백퍼센트 비타민은 체력 유지에 도움이 될 거란다. 단맛과 각종 첨가물로 범벅이 된 무늬만 비타민인 제품과는 다를 것 같아 그미가 추천해준 비타민을 곧장 샀다. 너무 시고 제법 써 삼키기에 고역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더 신뢰가 가기도 한다. 혼자 먹기 미안해 온 식구를 끌어들인다. 지친 몸이 나쁜 쪽으로 금세 반응하는 나는 열심인데, 다른 식구들은 비타민에 별 관심이 없다. 청춘인 아들딸은 시큰둥해하고, 나름 운동으로 제 몸을 유지·관리하는 남편도 그리 반색하지는 않는다. 챙겨주면 먹기는 하지만 나처럼 진지하지는 않다.누구든지 경험하고 느낀 것만큼 반응한다. 제 몸에 이상 징후가 없으면 스스로 비타민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믿기에 건강에 대해 그다지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반면, 감당하지 못할 몸 기운을 느끼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비타민 같은 의지처라도 찾게 된다.건강은 누구에게나 예측불허이다. 내 몸이 피로를 느끼면 마음까지 힘들어지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고 몸이 아무런 불편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고 건강을 자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 이상으로 `신체의 안녕`에 관한 건 영원한 숙제이다. 비타민 같은 활력의 정점을 찍으려면 당장 뛰쳐나가 운동부터 해야 한다. 백퍼센트 비타민에만 의지하며 뒹굴뒹굴 게으름을 피우는 건 아직 급하지 않다는 걸 말한다. 굳건한 의지로 규칙적 운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크게만 보인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07